고유(高柔)는 자가 문혜(文惠)이고, 진류군(陳留郡) 어현(圉縣) 사람이다. 부친 고정(靖)은 촉군(蜀郡) 도위(都尉)로 임명되었다. [1] 

[1] 《진류기구전陳留耆舊傳》에서 이르길 : 고정의 할아버지 고고固는 왕망王莽의 치세 때 벼슬하지 않았고, 회양태수淮陽太守에게 해를 입어 그 지조로 명성을 떨쳤다. 고고의 아들 고신愼은 자가 효보孝甫로, 성품이 돈후하고 도량이 매우 컸다. 죽은 형의 아들 다섯 명을 기르니, 그 은혜가 매우 두터웠다. 낭야상琅邪相 하영何英이 그 행실을 가상히 여겨, 자신의 딸을 배필로 주었다. 하영은 곧 거기장군車騎將軍 하희熙의 아버지다. 고신은 두 현의 현령을 지내고, 동래태수東萊太守가 되었다. 늙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은 매우 허름했으며 항아리 하나 모은 것이 없었다. 아내가 말하였다.

"당신은 여러 차례 임지를 다스렸고 나이도 먹었으면서, 어찌 남겨진 자손에게 줄 것이 조금도 없습니까?"

고신이 답하였다.

"나는 근신함과 청렴함으로 근본이 되었고 태수(二千石) 됨을 남겼거늘 어찌 그러한단 말이오!"

아들 고식式은 효성이 지극하여 항상 봉양에 힘썼다. 영초永初 연간에 메뚜기떼로 피해를 입어 먹을 것이 없었을 때, 어령圉令 주강周彊이 주와 군에 표를 올렸다. 태수 양순楊舜이 고식을 효자로 천거하니, (고식은)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훗날 효렴孝廉으로 낭郞이 되었다. (고신의) 차남은 고창昌이며, 고창의 아우는 고사高賜이다. 모두 자사刺史와 군수郡守를 지냈다. 고식의 아들은 고홍弘이며, 효렴에 천거되었다. 고홍은 고정을 낳았다.

고유는 고향에 머물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금 영웅이 나란히 일어났으며, 진류는 사방으로부터 공격받기 쉬운 곳입니다. 조장군(曹將軍: 조조)이 비록 연주(兗州)를 점거하고 있지만, 본래 천하를 통일하려는 뜻이 있으므로 편안히 앉아 지키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장부군(張府君: 장막)이 먼저 진류를 차지하면, 저는 한가함을 틈타 변란이 발생할 것이 걱정되기에 당신들과 함께 이곳을 피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장막이 태조와 친하고, 고유의 나이 또한 어리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고유의 사촌 형 고간(幹)은 원소(袁紹)의 생질[甥]인데, [2] 하북(河北)에 있는 고유를 불렀다. 고유는 일족을 들어 그를 따랐다. 마침 이때 고정(靖)이 서주(西州: 익주)에서 죽었다. 그 당시는 길이 험난하였고, 군대와 도적이 횡행하였다. 그러나 고유는 곤란함과 위험을 무릅쓰고 촉(蜀)으로 가서 시신을 맞이했는데, 쓰고 달고 슬프고 비참한 것 중에서 경험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3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2] 사승의 후한서(謝承後漢書)에서 이르길:고간(幹)의 자는 원재(元才)다. 재주와 뜻이 웅대하고 문무 모두 뛰어났다. 아버지 고궁躬은 촉군태수蜀郡太守였고, 할아버지 고사高賜는 사례교위司隷校尉였다. 《진류기구전》과 사승의 《후한서》를 보건대, 고간은 마땅히 고유의 족숙이어야 하지 종형이 아니다. 어느 쪽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다.

태조(太祖)는 원씨(袁氏)를 평정하자, 고유를 관현(管縣 또는 菅縣)의 장(長)으로 임명했다. 현의 사람들은 평소부터 그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몇몇 간사한 관리들은 모두 스스로 도주해 버렸다. 고유가 명령을 내려 말했다.

“옛날(진한시대) 병길(邴吉)은 정치를 담당할 때, 일찍이 과오가 있는 관리에 대해서는 오히려 포용할 수 있었소. 하물며 이런 관리들이 내 수하에서 어떠한 잘못도 범하지 않았음에랴! 그들을 불러 복직시키시오.”

관리들은 모두 돌아와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을 나타냈으며, 전원 훌륭한 관리가 되었다. 고간은 투항한 후 오래지 않아 병주(并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유는 스스로 태조에게 귀의하였지만, 태조는 일에 따라 그를 처형하라고 자간영사(刺奸令史)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고유는 법을 처리하는 것이 타당했으며, 옥 안에는 판결을 받지 못하여 머물러 있는 죄수가 없었으므로, 불러서 승상창조속(丞相倉曹屬)으로 임명했다. [3]

[3] 魏氏春秋曰:柔既處法平允,又夙夜匪懈,至擁膝抱文書而寢。太祖嘗夜微出,觀察諸吏,見柔,哀之,徐解裘覆柔而去。自是辟焉。

태조는 종요(鍾繇) 등을 파견하여 장로(張魯)를 토벌하려고 했다. 그런데 고유가 간언하여, 지금 거대한 군대를 함부로 파견한다면 서쪽에 있는 한수와 마초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되어 창자 서로 선동하여 반역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우선 삼보(三輔 : 경조ㆍ풍익ㆍ부풍)를 불러 모아서 삼보가 평정시킨다면, 한중(漢中)은 격문만을 보내도 평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종요가 관소를 넘어 쳐들어가자, 과연 한수와 마초 등이 모반하였다.

위(魏)나라가 막 세워졌을 때, 상서랑(尚書郎)으로 임명되었다가 승상이조연(丞相理曹掾)으로 전임되었다. 태조가 명을 내려 말했다.

“안정된 사회 안에서 교화를 분포하는 것은 예의를 으뜸으로 삼아야 하오. 혼란스런 세상에서 정치를 할 때는 형법을 우선해야 하오. 때문에 순(舜)은 사흉(四凶)의 가족을 내쫓고 고요(皋陶)로 하여금 옥을 책임지는 간리가 되게 하였소. 한 고조(漢祖)는 진(秦)나라의 가혹한 법률을 폐지하고 소하(蕭何)로 하여금 법률을 제정하도록 하였소. 연(掾)의 맑은 식견은 공평타당하고 법전에 밝으니, 힘껏 직무에 임하도록 하오!”

고취(鼓吹: 군악계)의 송금(宋金) 등이 합비성(合肥)에서 도망쳤다. 과거의 법률에 따르면, 군이 토벌 중에 있는데 병사가 도주하면 그의 처자식을 사형에 처해야만 했다. 태조는 이와 같이 해도 도망치는 병사를 제지할 수 없음을 근심하다가, 형벌을 더욱 가중시켰다. 송금의 모친과 처 및 두 동생을 모두 관의 노비로 지급했다. 담당 관리는 이들 모두를 전원 사형에 처할 것을 상주했으나, 고유가 상소하였다.

- 사졸(士卒)이 군에서 도망치는 것은 실제로 한탄할 만합니다. 그러나 제가 사사로이 듣건대 그 중에는 때때로 후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을 말하면 응당 그들의 아내와 자식을 관대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첫째는 적으로 하여금 그들을 믿지 못하게 할 수 있고, 둘째는 그들에게 돌아오려는 마음을 유발시킬 수 있습니다. 만일 과거의 법령에 따른다면, 본래 도망친 병사가 후회하여 고치려는 희망을 끊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또 외람되게 형벌을 더 무겁게 하려고 하니, 저는 지금 이후로 군대의 사병들이 한 명의 도망자를 보고 처형이 자신에게까지 미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서로 연달아 도주하게 되면 다시 사형에 처해질 사람이 없게 될 것이 걱정입니다. 이와 같이 형벌을 무겁게 하는 것은 도망치는 것을 그치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더욱 많이 도망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

태조가 말했다.

“옳소.”

즉시 그만두고 송금의 모친과 동생들을 죽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목숨을 구하게 된 사람은 매우 많았다.

승진하여 영천태수(潁川太守)가 되었으며, 또 수도로 돌아와 법조연(法曹掾)으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 교사(校事: 관리 감찰관)로 노홍(盧洪)과 조달(趙達) 등을 두어 관리들의 과실을 살피도록 했다. 고유는 간언하여 말했다.

“관직을 두어 직무를 나누어 각자 한 가지 일씩 주관하도록 하십시오. 지금 교사(校事)를 설치한 것은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을 신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조달 등은 누차에 걸쳐 자신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으로써 포상과 폄하를 진행시켜 권력을 휘둘렀으므로, 응당 그들의 재능이 마땅한가를 살펴야만 합니다.”

태조가 말했다.

“조달 등에 대한 그대의 이해는 아마도 나만 못한 것 같소. 다른 사람의 과실을 탐색하고 적발하여 많은 사건을 처리할 수 있어야만 되는 것인데, 현인이나 군자로 하여금 이 일을 하도록 하면 할 수 있겠소? 옛날에 숙손통(叔孫通)이 도적들을 기용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소.”

조달 등은 후에 부정한 이익을 꾀하려다가 적발되었다. 태조는 그들을 죽이고 고유에게 사례했다.

문제(文帝)가 제위에 오른 후, 고유는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로 임명되었으며,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하사받았고 전임하여 치서집법(治書執法)의 관직을 더하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자주 비방하고 미혹시키는 말이 있었다. 문제는 이 점을 통한해 하며 인심과 언론을 미혹시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죽이고, 이 일을 밀고하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기로 했다. 고유가 상소를 올렸다.

- 지금 미혹스러운 말을 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고, 고발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잘못을 범한 사람이 착하게 바로잡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또 장차 흉악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서로 무고하는 것이 넘쳐흐를 것이므로, 이는 확실히 사악함을 제지하고 소송을 줄이는 공명정대한 방법이 아닙니다. 이전에 주공(周公)은 조서를 만들어 은대의 조종(祖宗)을 칭송하였으며 소인의 원한을 전연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한(漢)나라 태종(太宗: 문제) 또한 미혹시키는 말이나 비방하는 것에 대한 법령을 폐지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응당 미혹시키는 말과 비방하는 것을 밀고하는 자에게 상을 주는 법률을 폐지하고, 하늘이 만물을 어질게 양육하는 것을 융성하게 해야만 합니다. ─

문제가 즉시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서로 무고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그래서 문제는 조서를 내렸다.

- 감히 비방하여 다른 사람을 고발하는 자는 고발당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그에게 내리겠다. ─

이로부터 고발하는 사람이 사라졌다. 교사(校事) 유자(劉慈) 등은 황초(黃初) 초년부터 수년 사이에 관리와 백성의 간사한 죄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적발했다. 고유는 모두 그것의 허실을 명백히 할 것을 요구했다. 이 이외에 작은 법에 저촉된 자는 벌금을 부과하는 데 그쳤다.

4년(223), 승진하여 정위(廷尉)가 되었다.

위(魏)나라 초, 삼공(三公)에는 일이 없었으므로 또 조정의 정사에 관여하기를 희망했다. 고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 천지는 사계절에 따라 공적을 이루고, 군주는 대신들의 보필에 의거하여 나라를 다스려 일으킵니다. 은(成湯)은 아형(阿衡: 이윤의 관직명)의 보좌에 의지하였고, 주문왕과 주무왕(文武)은 주공단(旦)과 태공망(望)의 역량에 기대었으며, 한나라 초기의 소하(蕭)와 조삼(曹)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모두 원훈(元勳)으로써 심복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모두 성스럽고 현명한 군주가 위에서 대신을 임용하는 데 뛰어나고 현명한 재상과 훌륭한 신하가 아래에서 수족이 된 것입니다. 지금 삼공으로 보좌를 담당하는 신하는 모두 나라의 대들보이며, 백성들은 모두 그들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공을 설치하기는 했지만, 그들로 하여금 정사에 참여하도록 하지 않고 있으므로, 각자 한가하게 심성을 수양하며 충언을 진언하는 경우가 매우 적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조정이 대신을 임용하는 의의를 숭상하는 것이 아니며, 대신들은 조정의 잘잘못에 대한 의견을 진술할 수 없습니다. 고대에는 형법과 정치에 의문이 있을 때는 삼공과 구경으로 하여금 의론하도록 했습니다. 지금 이후부터, 조정에서 의문 나는 문제와 재판에 관한 큰 일이 있다면, 응당 반복하여 삼공의 의견을 구하여야만 됩니다. 삼공은 달의 첫째 달과 15일에 조정에 나오도록 하고, 또 특별히 그들을 불러 들어오게 하여 정치적 득실을 논의하고, 정치적인 일에 대해 광범위하게 의견을 발표하도록 할 수 있으며, 천자의 귀를 열게 하고 국가에 커다란 이익이 있게 하기를 희망합니다. ─

문제는 그의 의견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문제가 이전부터 싫어했던 치서집법(治書執法) 포훈(鮑勛)을 법을 왜곡시켜 가면서 처형하려고 하자 고유가 법을 지키며 문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문제는 매우 노하여 고유를 상서대(臺)로 출두시키고 지령을 받은 사자를 정위(廷尉)로 보내 포훈을 죽였다. 포훈이 죽은 후에 고유로 하여금 정위 관서로 돌아가도록 했다.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고유는 연수정후(延壽亭侯)로 봉해졌다. 당시는 박사(博士)가 유가경전(執經)을 관장하였는데, 고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 신이 듣건대, 도덕을 준수하고 학문을 중시하는 것은 성인의 위대한 훈시이며, 문학을 장려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것은 제왕의 밝은 의리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한나라 말기는 정치가 쇠퇴하고 예악이 붕괴되었으며, 각종 할거 세력이 이익과 권력을 다투었으므로 전쟁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유학자들은 조용히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태조(太祖)가 막 병사를 일으켰을 대, 이와 같음을 안타깝게 여겨 혼란이 평정되는 동시에 군현으로 하여금 학문을 가리키는 관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고조(高祖)가 즉위한 후, 이 사업은 진일보 발전했으며, 새로 태학을 세우고 각 주에서는 고시제도를 시행하였으므로, 천하의 유학자들은 새로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고 새로 제사의례를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친히 정치를 하면서 총명한 재지를 발휘하여 위대한 계획을 진행시키고 선제의 사업을 드날렸으니, 설령 하계(夏啟)가 하우의 기업을 계승했다고 하더라도 폐하의 공적을 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박사들은 모두 경학을 익혔으며 행위는 단정합니다. 이들은 전국에서 천거하여 선발한 우수한 인재이지만, 관직에 오르는 것은 현의 장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이 하면 유술(儒術)을 존경하고 게으른 사람을 면려시킬 수 없을까 걱정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착한 행동을 선양하여 교육시키면 행하지 않아도 면려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초원왕(楚)은 예로써 신공(申公)을 모셨고, 학사(學士)는 모두 경학에 날카롭고 정통했습니다. 한나라 광무제는 탁무를 존경하여 그를 중요한 관직에 놓아 사대부들로 하여금 다투어 모방하게 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박사는 유가 도통의 원천이며 육경(六藝)을 장악한 사람이므로, 응당 그들의 학문과 품행의 우열에 근거하여 서열에 관계없는 지위로써 대우해야만 합니다. 경학을 학습하는 사람을 장려한다면 널리 교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명제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후에 명제가 궁전을 대대적으로 건축하자, 백성들은 노역으로 고통스러워했다. 미녀들을 전국적으로 선발하여 후궁으로 채웠다. 후궁이 낳은 황자(皇子)가 연이어 요절하자, 명제는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게 되었다. 고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 오와 촉 두 적은 교활하여 은밀히 병사들의 무예를 훈련시키며 위나라를 멸망시킬 것을 도모하고 복종할 의도를 전혀 나타내고 있지 않습니다. 응당 장병들을 양성하고 무기를 수리하여 편안한 상태에서 그들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러나 최근 궁전을 건축하여 위와 아래가 수고롭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만일 오와 촉으로 하여금 우리들의 허실을 알도록 한다면, 세력을 연합하여 우리를 공격할 것이고, 우리가 그들을 격파시키는 것 또한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 한문제(漢文)는 열 채의 집을 아끼고 작은 누대를 세우는 즐거움도 갖지 않았습니다. 곽거병(去病)은 흉노(匈奴)의 위해를 걱정하느라 집을 지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현재 소모한 것은 1백 금(金)의 비용뿐만 아니며, 걱정하는 것은 단지 흉노의 걱정뿐이 아닙니다. 지금 건축 중에 있는 궁전을 조략하게 하여 조정 연회의 의례에 알맞게 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노역을 멈추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돌아가 농경생산에 종사하도록 하기를 부탁드립니다. 오와 촉이 바야흐로 평정된 후에 다시 천천히 궁정을 지을 수 있습니다. 옛날에 헌원(軒轅)에게는 스물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으므로, 멀리까지 후대(제위에 오르는 것)를 전하였습니다. 주나라 왕실은 희성(姬國)의 나라가 40개나 있었으므로 더욱 오랜 세월(8백여 년)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총명하고 통달하며 이성이 있지만, 최근 황자가 연이어 요절하여 황자를 생산할 조짐조차 없습니다. 신하들의 마음에는 우려하고 불안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주례(周禮)에서 말하기를, 천자는 후비 이하 120명을 둘 수 있으니, 여관(女官)의 규모는 이미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듣건대 후궁의 수는 이 수를 넘었다고 합니다. 대대로 창성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이것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이렇습니다. 후궁 중에서 현숙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엄선하여 후궁의 수에 이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십시오. 아울러 정신을 양육하고 오로지 청정함만을 보배로 삼으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자손의 번성은 희망하는 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명제가 대답하여 말했다.

“짐은 그대가 충심을 갖고 한마음으로 왕실을 위하여 직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당신은 어떤 건의든 간에 나에게 들려주시오.”

당시는 수렵에 관한 법령이 매우 준열했다. 의양(宜陽)의 전농도위(典農) 유귀(劉龜)가 몰래 천자의 사냥터 안에서 토끼를 쏘자, 그의 공조(功曹) 장경(張京)은 교사로 가서 이 사실을 말했다. 명제는 장경의 이름을 숨기고 유귀를 체포하여 투옥시켰다. 고유가 고발한 사람의 이름을 알리기를 청하자, 명제는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유귀가 죽어야만 하는 것은 감히 내 사냥터에서 사냥을 했기 때문이오. 유귀를 정위(廷尉)로 보냈을 때에는, 정위로 곧바로 조사를 해야만 하오. 무엇 때문에 또 고발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오. 내가 어찌 마음대로 유귀를 체포할 수 있겠소?”

고유가 말했다.

“정위는 천하에서 공정한 법관입니다. 어떻게 황상의 기쁨과 노여움에 의지하여 법을 허물어뜨리게 하겠습니까?”

또 당시 상주를 올렸는데, 언사가 간절하고 뜻이 심원했다. 명제는 그 뜻을 알았으므로 장경의 이름을 말했다. 고유는 즉시 돌아가 판결을 내렸으며, 각기 해당하는 죄에 처했다.

당시의 제도에는 하급관리가 부모의 상을 당하게 되면 백 일이 지난 후에 모두 관청으로 돌아와 일을 하도록 했다. 어떤 관청의 사도(司徒)로 있는 해홍(解弘)이라는 관리가 부친상을 당하여 돌아가려고 했는데, 마침 전쟁이 발생하였으므로 즉시 사도부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받았지만, 그는 질병이 있어 갈 수 없었다. 명제는 화를 내며 조서를 내려 말했다.

“너는 증삼(曾)과 민자건(閔)이 아니거늘, 어찌 몸이 쇠약할 만큼 슬프다고 하는가?”

정위에게 그를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재촉했다. 고유는 해홍의 몸이 확실히 허약함을 보고 상주하여 이 상황을 진술하여 관대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명제는 그래서 조서를 내려 말했다.

- 효자구나, 해홍이여! 그를 풀어주라! ─

당초에 공손연(公孫淵)의 형 공손황(公孫晃)은 숙부 공손공(公孫恭)에 의해 인질로 수도로 보내졌다. 공손연이 아직 모반하기 이전이었는데, 공손황은 공손연이 모반을 도모한다고 누차 보고하였다. 공손연이 모반하자, 명제는 시장에서 참수시키는 것을 참지 못하고 옥 안에서 죽이려고 했다. 고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 상서에서 말하기를, ‘죄가 있으면 그의 형을 판단하여 처리하고, 덕이 있으면 그의 선행을 표창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왕제(王制)의 명백한 법전입니다. 

공손황과 그의 처자식은 반역한 자의 동족으로서 확실히 머리를 베어 사람들에게 보여서 수대를 보존할 수 없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신은 예전에 공손황이 폐하께 몇 차례 글을 올려서 공손연이 모반의 음모를 꾀하고 있음을 폭로했다고 사사로이 들었습니다. 그는 비록 반역한 자의 동족이지만, 그의 본심에 의거하여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자는 흉악한 형으로 인한 사마우(司馬牛)의 근심을 이해했고, 기해(祁奚)는 사악한 신하 양설호에 연좌되어 투옥된 양설호의 형인 숙향(叔向)의 무죄를 밝혔는데, 이것은 과거의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공손황의 이전의 말이 믿을 만하다면 그의 죄를 사면시켜 주어야 하고, 만을 그의 말이 신빙성이 없는 것이었다면 시장에서 그의 머리를 베어야 합니다. 지금 나아가 그의 생명을 사면시키지 못하고, 물러나 그의 죄행을 밝히지 못하고 옥에 가두어 스스로 자살하도록 한다면, 위나라를 관찰하는 사방의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의문을 낳게 될 것입니다. ─

명제는 듣지 않았고, 결국 사자를 파견하여 금가루를 공손황과 그의 처자식에게 마시게 하고, 관과 의복을 내려 집에 매장했다. [4]

[4] 孫盛曰:聞五帝無誥誓之文,三王無盟祝之事,然則盟誓之文,始自三季,質任之作,起於周微。夫貞夫之一,則天地可動,機心內萌,則鷗鳥不下。況信不足焉而祈物之必附,猜生於我而望彼之必懷,何異挾冰求溫,抱炭希涼者哉?且夫要功之倫,陵肆之類,莫不背情任計,昧利忘親,縱懷慈孝之愛,或慮傾身之禍。是以周、鄭交惡,漢高請羹,隗囂捐子,馬超背父,其為酷忍如此之極也,安在其因質委誠,取任永固哉?世主若能遠覽先王閑邪之至道,近鑒狡肆徇利之凶心,勝之以解網之仁,致之以來蘇之惠,燿之以雷霆之威,潤之以時雨之施,則不恭可斂衽於一朝,炰哮可屈膝於象魏矣。何必拘厥親以來其情,逼所愛以制其命乎?苟不能然,而仗夫計術,籠之以權數,檢之以一切,雖覽一室而庶徵於四海,法生鄙局,冀或半之暫益,自不得不有不忍之刑,以遂孥戮之罰,亦猶瀆盟由乎一人,而云俾墜其師,無克遺育之言耳。豈得復引四罪不及之典,司馬牛獲宥之義乎?假令任者皆不保其父兄,輒有二三之言,曲哀其意而悉活之,則長人子危親自存之悖。子弟雖質,必無刑戮之憂,父兄雖逆,終無勦絕之慮。柔不究明此術非盛王之道,宜開張遠義,蠲此近制,而陳法內之刑以申一人之命,可謂心存小善,非王者之體。古者殺人之中,又有仁焉。刑之於獄,未為失也。臣松之以為辨章事理,貴得當時之宜,無為虛唱大言而終歸無用。浮誕之論,不切於實,猶若畫魑魅之象,而躓於犬馬之形也。質任之興,非(防)〔仿〕近世,況三方鼎峙,遼東偏遠,羈其親屬以防未然,不為非矣。柔謂晃有先言之善,宜蒙原心之宥。而盛責柔不能開張遠理,蠲此近制。不達此言竟為何謂?若云猜防為非,質任宜廢,是謂應大明先王之道,不預任者生死也。晃之為任,歷年已久,豈得於殺活之際,方論至理之本。是何異叢棘既繁,事須判決,空論刑措之美,無聞當不之實哉?其為迂闊,亦已甚矣,漢高事窮理迫,權以濟親,而總之酷忍之科,既已大有所誣。且自古以來,未有子弟妄告父兄以圖全身者,自存之悖,未之或聞。晃以兄告弟,而其事果驗。謂晃應殺,將以遏防。若言之亦死,不言亦死,豈不杜歸善之心,失正刑之中哉?若趙括之母,以先請獲免,鍾會之兄,以密言全子,古今此比,蓋為不少。晃之前言,事同斯例,而獨遇否閉,良可哀哉!

당시 사냥터의 사슴을 죽이는 자는 그 몸은 사형당하고, 재산은 관에 몰수되었으며, 발견하여 알린 자에게는 후한 상을 주었다. 고유는 상소를 올려 말했다.

─성왕(聖王)이 천하를 통치할 때에는 농업을 확대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삼고, 지출의 절약을 자본으로 삼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무릇 농업을 확대하면 곡식이 축적되고, 지출을 절약하면 재산이 쌓이며, 재산이 쌓이고 곡식이 축적되면서 우환이 있은 적은 없었습니다. 고대에 한 남자가 밭을 갈지 않으면 그 때문에 굶주리는 자가 있게 되고, 한 아녀자가 길쌈을 하지 않으면 그 때문에 추위에 떠는 자가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천하를 통치한 중기 이래로 백성들이 빈번한 노역을 책임져야만 했으므로 농업에 참여하는 자는 감소하였으며, 게다가 이전에 또 사냥을 금지하는 법령이 있어서 사슴들은 사방에서 횡행하며 농가를 짓밟아 피해를 입혔으며, 그 손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백성들이 비록 목책을 설치하여 방어할지라도 그들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영양(滎陽) 일대에 이르러 사방 수백 리에 걸쳐 1년 간 농사지은 것을 거의 수확하지 못했으니, 백성들의 생명은 실로 가련하기만 합니다. 

지금 천하에서 재물을 낳는 방법은 매우 적지만, 사슴으로 인한 손해는 매우 많습니다. 만일 갑자기 전쟁이 발발하여 노역을 징발하고 흉년의 재앙이 있게 된다면, 장차 그것에 대처할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고대의 성인들이 관심을 기울였던 일을 살펴보시고, 농사의 곤란함을 가엾게 여기시어 백성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펴서 그들로 하여금 사슴을 잡을 수 있도록 이 금령을 폐지하신다면, 백성들은 오랫동안 이익을 얻게 되어, 장차 매우 즐거워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입니다. ─ [5]

[5] 魏名臣奏載柔上疏曰:「臣深思陛下所以不早取此鹿者,誠欲使極蕃息,然後大取以為軍國之用。然臣竊以為今鹿但有日耗,終無從得多也。何以知之?今禁地廣輪且千餘里,臣下計無慮其中有虎大小六百頭,狼有五百頭,狐萬頭。使大虎一頭三日食一鹿,一虎一歲百二十鹿,是為六百頭虎一歲食七萬二千頭鹿也。使十狼日共食一鹿,是為五百頭狼一歲共食萬八千頭鹿。鹿子始生,未能善走,使十狐一日共食一子,比至健走一月之間,是為萬狐一月共食鹿子三萬頭也。大凡一歲所食十二萬頭。其鵰鶚所害,臣置不計。以此推之,終無從得多,不如早取之為便也。」

오래지 않아 호군(護軍) 진영의 병사 두례(竇禮)가 근처로 외출하였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진영에서는 그가 도망갔다고 생각하고 표를 올려 추격하여 체포하고, 그의 처 영(盈)과 남매를 관의 노비로 삼을 것을 건의하였다. 영은 이어서 주의 관청으로 가서 억울함을 하소연하였는데, 그것을 알아주는 자가 없었다. 영은 그래서 정위(廷尉)로 가서 말했다. 고유가 질문하여 말했다.

“너는 남편이 달아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영이 눈물을 떨구며 대답하여 말했다.

“저의 남편은 어려서 양친을 잃어 할머니 한 분을 어머니로 생각하며 자랐는데, 그녀를 매우 공경스럽고 근신하게 모셨으며, 또 남매를 불쌍히 여겨 매우 자상하게 보살폈으니, 경박하고 교활하게 집안 식구들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유가 또 그녀에게 물었다.

“네 남편이 다른 사람과 원한관계는 없느냐?”

영이 대답하여 말했다.

“저희 남편은 선량하여 다른 사람과 원수를 맺지 않았습니다.”

또 물었다.

“네 남편이 다른 사람에게 돈이나 재산을 빌려준 적이 있는가?”

대답하여 말했다.

“일찍이 돈을 내어 같은 진영 안에 있는 병사 초자문(焦子文)에게 주었는데, 그를 찾아가 달라고 했지만 받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초자문은 마침 작은 죄를 범하여 감옥에 갇혀 있었다. 고유는 곧 초자문을 불러 무슨 죄를 범했는지 물었다. 말이 끝나자 또 질문했다.

“너는 옛날에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린 적이 있느냐 없느냐?”

초자문이 대답했다.

“홀로 가난하게 살고 있으므로 애초부터 감히 다른 사람에게 돈이나 물건을 빌리지 않습니다.”

고유는 자문의 안색을 살피더니 곧 말했다.

“너는 옛날에 두례(竇禮)의 돈을 빌렸는데, 무엇 때문에 빌리지 않았다고 했느냐?”

초자문은 고유가 이 사실을 알고 있음을 괴이하게 여겼으며, 일이 탄로 났다고 생각하고 대답하지 않자, 고유가 말했다.

“네가 두례를 죽였으니, 빨리 자백하라.”

초자문은 머리를 조아리며, 두례를 죽이게 된 자초지종과 시신을 매장한 곳을 모두 말했다. 고유는 곧 관리와 병졸들을 보내 초자문의 자백에 따라 주례의 시신을 파내어 즉시 찾게 하였다. 명제는 조서를 내려 영 모자를 평민으로 회복시켰으며, 전국에 포고하여 두례의 일로써 경계를 삼게 했다.

정위의 관직에 23년 있다가 태상(太常)으로 전임되었으며, 열흘 후에 사공(司空)으로 승진하였고, 후에 사도(司徒)로 임명되었다.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은 상주하여 조상(曹爽)을 면직시킬 것을 청하였고, 황태후(皇太后)는 조서를 내려 고유를 불러 가절행대장군사(假節行大將軍事)가 되어 조상의 군영을 차지하도록 했다. 태부가 고유에게 말했다.

“그대는 주발(周勃: 전한시대 때 여씨 일족을 멸망시키고 유씨의 실권을 회복시킨 장군)이오.”

조상이 피살된 후, 승진하여 만세향후(萬歲鄉侯)로 봉해졌다. 고귀향공(高貴鄉公)이 즉위하자, 승진하여 안국후(安國侯)로 봉해졌고, 태위(太尉)로 전임되었다. 상도향공(常道鄉公: 조조의 손자 조환)이 즉위한 후, 식읍이 증가하여 이전 것과 합쳐 4천 석이 되었으며, 앞뒤로 하여 그의 두 아들을 정후(亭侯)로 봉해졌다.

경원(景元) 4년(263), 나이 90에 세상을 떠났는데, 시호를 원후(元侯)라고 했다. 손자 고혼(渾)이 뒤를 이었다.

함희(咸熙) 연간, 다섯 등급 작위를 세웠으며, 고유 등이 이전 왕조 때의 공훈이 탁월하였으므로 바꿔서 고혼을 창육자(昌陸子)로 봉했다. [6]

[6] 진제공찬(晉諸公贊)에서 이르길:柔長子雋,大將軍掾,次誕,歷三州刺史、太僕。誕放率不倫,而決烈過人。次光,字宣茂,少習家業,明練法理。晉武帝世,為黃沙御史,與中丞同,遷守廷尉,後即真。兄誕與光異操,謂光小節,常輕侮之,而光事誕愈謹。終於尚書令。追贈司空。


진수의 평: 고유(高柔)는 법률 이론에 밝았고 20년간 관직을 지킨 원로로 관직에서 세상을 떠났다.
분류 :
위서
조회 수 :
6243
등록일 :
2013.05.04
12:50:52 (*.67.12.154)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2593/04c/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2593

코렐솔라

2013.07.15
12:00:25
(*.0.203.172)
2번 주석이 1번 주석과 같은 것이 들어가 있기에 수정했습니다.

장기튀김

2013.11.04
03:01:52
(*.121.129.101)
才志弘邈,文武秀出。父躬,蜀郡太守。祖賜,司隸校尉。案陳留耆舊傳及謝承書,幹應為柔從父,非從兄也。未知何者為誤。

→ 재주와 뜻이 웅대하고 문무 모두 뛰어났다. 아버지 고궁躬은 촉군태수蜀郡太守였고, 할아버지 고사高賜는 사례교위司隷校尉였다. 《진류기구전》과 사승의 《후한서》를 보건대, 고간은 마땅히 고유의 족숙이어야 하지 종형이 아니다. 어느 쪽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장기튀김

2013.11.04
03:15:38
(*.121.129.101)
[1] 陳留耆舊傳曰:靖高祖父固,不仕王莽世,為淮陽太守所害,以烈節垂名。固子慎,字孝甫。敦厚少華,有沈深之量。撫育孤兄子五人,恩義甚篤。琅邪相何英嘉其行履,以女妻焉。英即車騎將軍熙之父也。慎歷二縣令、東萊太守。老病歸家,草屋蓬戶,甕缶無儲。其妻謂之曰:「君累經宰守,積有年歲,何能不少為儲畜以遺子孫乎?」慎曰:「我以勤身清名為之基,以二千石遺之,不亦可乎!」子式,至孝,常盡力供養。永初中,螟蝗為害,獨不食式麥,圉令周彊以表州郡。太守楊舜舉式孝子,讓不行。後以孝廉為郎。次子昌,昌弟賜,並為刺史、郡守。式子弘,孝廉。弘生靖。

[1] 《진류기구전陳留耆舊傳》에서 이르길 : 고정의 할아버지 고고固는 왕망王莽의 치세 때 벼슬하지 않았고, 회양태수淮陽太守에게 해를 입어 그 지조로 명성을 떨쳤다. 고고의 아들 고신愼은 자가 효보孝甫로, 성품이 돈후하고 도량이 매우 컸다. 죽은 형의 아들 다섯 명을 기르니, 그 은혜가 매우 두터웠다. 낭야상琅邪相 하영何英이 그 행실을 가상히 여겨, 자신의 딸을 배필로 주었다. 하영은 곧 거기장군車騎將軍 하희熙의 아버지다. 고신은 두 현의 현령을 지내고, 동래태수東萊太守가 되었다. 늙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은 매우 허름했으며 항아리 하나 모은 것이 없었다. 아내가 말하였다.
"당신은 여러 차례 임지를 다스렸고 나이도 먹었으면서, 어찌 남겨진 자손에게 줄 것이 조금도 없습니까?"
고신이 답하였다.
"나는 근신함과 청렴함으로 以二千石遺之, 어찌 그러한단 말이오!"
아들 고식式은 효성이 지극하여 항상 봉양에 힘썼다. 영초永初 연간에 메뚜기떼로 피해를 입어 먹을 것이 없었을 때, 어령圉令 주강周彊이 주와 군에 표를 올렸다. 태수 양순楊舜이 고식을 효자로 천거하니, (고식은)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훗날 효렴孝廉으로 낭郞이 되었다. (고신의) 차남은 고창昌이며, 고창의 아우는 고사高賜이다. 모두 자사刺史와 군수郡守를 지냈다. 고식의 아들은 고홍弘이며, 효렴에 천거되었다. 고홍은 고정을 낳았다.

코렐솔라

2013.11.04
09:15:37
(*.166.245.132)
감사합니다. 반영했습니다. 以二千石遺之 이 부분은 나는 근심함과 청렴함만으로도 2천석을 남겼다는 의미인가요?

구라뱅뱅

2013.11.04
10:16:30
(*.49.168.253)
我以勤身清名為之基,以二千石遺之,不亦可乎!

문맥에 약하지만, 부인이 어찌 자식에게 남긴것이 없느냐엔 말에
난 勤身清名으로 근본基이 되었고, 이에 二千石(태수/현령)이 됨을 遺남겼거늘
의 뉘앙스 인데, 어순이나 문법으로 좀 다듬을 필요는 있을 듯 싶네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촉서 촉서 목차 링크 재원 2013-07-08 172604
공지 위서 위서 목차 링크 [1] 재원 2013-06-29 180436
공지 오서 오서 목차 링크 [3] 재원 2013-06-28 130924
290 위서 고당륭전 [1] 견초 2013-05-04 4965
289 위서 <배송지주>왕이전 [1] 재원 2013-05-04 5070
288 위서 양부전 [1] 견초 2013-05-04 6180
287 위서 <배송지주>신헌영전 [2] 재원 2013-05-04 4132
286 위서 신비전 [1] 견초 2013-05-04 4990
285 위서 왕관전 [1] 견초 2013-05-04 3994
284 위서 손례전 [1] 견초 2013-05-04 4745
» 위서 고유전 [5] 견초 2013-05-04 6243
282 위서 최림전 [1] 견초 2013-05-04 4279
281 위서 한기전 [1] 견초 2013-05-04 3969
280 위서 배잠전 [1] 견초 2013-05-04 4897
279 위서 조엄전 [1] 견초 2013-05-04 5457
278 위서 두습전 [1] 견초 2013-05-04 4485
277 위서 양준전 [1] 견초 2013-05-04 4013
276 위서 상림전 [2] 견초 2013-05-04 4434
275 위서 화흡전 [1] 견초 2013-05-04 4242
274 위서 노육전(노식의 아들) [1] 견초 2013-05-04 5526
273 위서 위진전 [1] 견초 2013-05-04 4379
272 위서 서선전 [1] 견초 2013-05-04 4472
271 위서 진교전 [5] 견초 2013-05-04 5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