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창(王昶)은 자가 문서(文舒)이고 태원군(太原) 진양현(晉陽) 사람이다.


왕씨보(王氏譜;왕씨족보?)를 보면 왕창의 백부는 왕유(柔)이며 자는 숙우(叔優)이고, 아버지는 왕택(澤)이며 자는 계도(季道)이다.

곽림종전(郭林宗傳;후한의 유명한 학자) 에서 말하길:  숙우, 계도가 어렸을 적에 곽림종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는데 (知人之鑒), 둘이 문안을 여쭙고자 찾아뵈어, 재주와 지혜(才智)와 덕행(德行)에 대해 질문하였다. 林宗이 웃으며 말하길「경卿 두사람 모두 이천석 관리가 되겠구나, 그렇지만 숙우가 능히 벼슬길에 오르고, 계도가 경술(經術:경서관련학술)에 정진하게 됨에 있어 그 재주를 힘쓰고 노력하지 아니하면 그리하지 못하리라。」숙우등은 그 말을 따랐다。숙우는 북중랑장에(北中郎將) 이르렀으며,계도는 대군태수代郡太守가 되었다.


젊었을 때, 같은 군(郡) 사람 왕릉(王淩)이 나이가 더 많았으므로 왕창은 그를 형(兄)으로 모셨다. 문제(文帝)가 동궁(東宮 : 태자였음을 의미함)에 있을 때 왕창은 태자문학(太子文學)이 되었으며, 중서자(中庶子)로 승진하였다.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산기시랑(散騎侍郎)으로 전임되었고, 낙양(洛陽)의 전농(典農)이 되었다. 당시 도성지역은 수목이 무성하게 자라 숲을 이루었는데, 왕창이 백성들에게 나무를 베어 황폐한 땅을 개간하도록 권하였다. 연주자사(兗州刺史)로 승진했다.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양열장군(揚烈將軍)의 칭호를 더하고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했다. 왕창은 비록 외부에서 관직을 맡고 있었지만, 마음은 조정에 있었다. 그는 위(魏)가 진(秦)과 한(漢)의 병폐를 계승하여 법률제도가 가혹하고 조잡한데, 만일 국가의 법전을 대대적으로 고쳐 선왕(先王)의 유풍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면 정치 교화의 부흥을 희망해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치론(治論)을 지었는데, 그것은 대략 고대의 제도에 의지하고 당시 정무(務)와 부합되는 것을 20여 편으로 만든 것이다. 또 병서(兵書)에 있어서 기책(奇)과 정공법(正)의 운용에 대해 서술하여 청룡(青龍) 연간에 상주했다.


손자병법에서 말하길 전쟁은 원칙적인 전술로 싸우고 변칙적인 전술로 승리하는 것이다. 변칙적인 전술과 원칙적인 전술을 번갈아 내놓기를 마치 둥근 고리가 끝이 없는 것처럼 한다.

왕창은 형의 아들과 자기 아들에게 이름과 자(字)를 지어 주었는데, 모두 겸허와 성실함에 의지하여 그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 때문에 형의 아들의 이름은 묵(默)이고 자는 허정(處靜)이며, 또 한 명의 이름은 심(沈)이고 자는 허도(處道)이고, 그의 아들은 이름이 혼(渾)이고 자가 현충(玄沖)이며, 또 한 명의 이름은 심(深)이고, 자는 도충(道沖)이다. 왕창은 또 문장을 써서 그들에게 경계시켰다.


- 무릇 사람의 아들된 자의 도리는 자신의 몸을 귀중하게 여기고 행동을 온전하게 하여 부모의 명성을 빛나게 하는 것보다 큰 것은 없다. 사람들이 이 세 가지 일의 장점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간혹 몸을 위태롭게 하고 집을 파멸시켜 멸망의 화 속으로 빠지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그들이 존경하며 받들고 학습하는 것이 정확한 도리가 아닌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무릇 효(孝)ㆍ경(敬)ㆍ인(仁)ㆍ의(義)는 각종 행위의 출발점으로 그것을 실행하면 설 수 있다. 이것은 몸을 세우는 기본이다. 효와 경이 있으면 종족이 편안하고, 인과 의가 있으면 향리 사람들이 존중한다. 이러한 행위는 안에서 완성되어 명성(名)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지고한 품행상에서 열심히 하지 않고 기본에 등을 돌리고 말단을 좇는다면, 천박하고 화려한 데로 빠지게 되고 붕당(朋黨)이 될 것이다. 천박하고 화려해지면 허위의 평가를 받게 될 것이고, 붕당이 되면 반대파로부터의 비판을 받는 근심이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에 대한 경계는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전철을 밟는 자가 갈수록 많아지고 말단을 구하는 경향이 매우 심해지는 것은 모두 당시의 명예에 미혹되고 눈 앞의 이익에 눈이 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무릇 부귀와 명성은 사람의 성정이 좋아하는 것인데, 군자가 간혹 그것을 얻게 되더라도 취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재난은 전진할 줄은 알면서 물러날 줄 모르고, 욕구는 알고 만족은 모르는 것이다. 때문에 굴욕스런 재난과 후회의 과실이 생기는 것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만일 만족을 모르면 얻으려고 하는 것을 잃는다.’고 했다. 때문에 만족할 줄 알고 만족하면 항상 충족해지는 것이다. 지난 일의 성공과 실패를 보고 장래의 길흉(吉凶)을 관찰해 보아라. 명성을 다투고 이익을 바라며 욕망이 끝이 없으면서, 일생을 무사히 지내고 집을 지키며 오랫동안 행복을 온전하게 할 수 있었던 자는 없었다. 나는 너희들이 몸을 일으켜 자기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고 유가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도가의 주장을 이행하도록 하려고 현묵충허(玄默沖虛 : 조용하고 말이 적으며 마음을 맑게 비우는 것)로써 너희들의 이름을 지었고, 너희들이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고 감히 이름의 뜻을 위반하거나 초월하지 말도록 하려고 한다. 고대 사람드은 쟁반과 주전자에 명문(銘文)을 새겼고, 책상과 지팡이에는 경계의 말이 있어서 일어나고 누우면서 그것을 관찰하여 지나친 행위가 없도록 하였다. 하물며 자기 이름에 있는데 경계하지 않을 수 있으랴! 무릇 사물은 빨리 완성되면 빨리 망가지고, 늦게 완성되면 결말이 좋다. 아침에 꽃을 피우는 풀은 저녁이 되면 떨어진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무성함은 엄동설한에도 시들지 않는다. 때문에 학식있는 군자는 빨리 완성되는 것을 싫어하고, 궐당(闕堂 : 지명)의 어린이를 경계로 삼고 있다. 만일 범망(范망)이 진나라 손님을 접대하면서 먼저 대답을 한 것에 대해 아버지 범무자(范무자)가 지팡이로 때려서 그의 관을 부러지게 했다면, 이것은 그가 다른 사람을 가로막는 것을 싫어한 것이다.[주1]


대체로 사람은 장점이 있으면서 스스로 과시하지 않는 자가 드물고, 능력이 있으면서 스스로 시인하지 않는 자가 적다. 다른 사람을 가리는 자는 다른 사람들 또한 그를 가리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 또한 그를 무시할 것이다. 때문에 세 명의 곡씨(郤氏 : 춘추시대 진의 대부)는 진(晉)에게 살해되었고, 왕숙(王叔)은 주(周)에게 죄를 받았다. 이것은 스스로 우수하다고 과시하고 자만하여 다투기를 좋아한 허물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군자(君子)가 자신을 선전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겸양을 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가리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대체로 굽은 것을 펴고 겸양을 얻는 것으로 간주하고,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사람은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다. 무릇 비단과 칭찬은 사랑과 증오의 근원이며 복과 화의 기틀이다. 때문에 성인(聖人)은 그것에 대해 매우 신중하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를 칭찬하겠는가. 만일 칭찬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그를 살펴 보아야만 한다(論語의 衛靈公傳)’고 했고, 또 자공(子貢)이 사람을 비교하고 비평할 때, 사(賜)는 현명하구나! 나는 과실이 있다.‘라고 했다. 성인(聖人)의 덕을 갖고도 역시 이와 같이 말하거늘, 하물며 평범한 무리가 경솔하게 비난하고 칭찬하리오?


옛날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그의 형의 아들을 경계시키며, ‘다른 사람의 결점을 들을 경우, 부모의 이름을 듣는 것처럼 해야한다. 귀로 들으려면 들을 수 있지만 입으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경계는 지당한 말이다.[주2]


사람들이 때때로 자기를 비방할 경우에는 응당 물러나 자신이 비방받을 만한 점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만일 자기에게 비난할 만한 행위가 있다면 그 말은 옳은 것이고, 만일 자기에게 비난할 만한 행위가 있다면 그 말은 옳은 것이고, 만일 자기에게 비난할 만한 행위가 없다면 그 말은 잘못된 것이다. 옳으면 그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황당하면 자기 자신에게 해로울 것이 없는데, 또 어찌 돌아가 보복하겠는가?


하물며 다른 사람이 자신을 비방했다는 것을 듣고 분노하는 자는 추악한 평가를 사람에게 더하고, 사람들이 더욱 가혹하게 복수하는 것은 침묵하며 스스로 자신을 닦는 것만 못하다. 속담(諺)에서 말하기를, 추위를 막는 데는 갖옷을 두껍게 하는 것만 못하고, 비방을 그치는 데는 자신을 닦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사실이다. 만일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인사, 흉악한 인물에 대해서는 가까이 하려 해도 오히려 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들과 대면함에 있어서랴. 그 해독은 깊다. 허위로 가득찬 사람의 말은 도덕에 근본을 담고 있지 않으며, 행동은 말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의 부박한 태도는 비교적 쉽게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게 미혹되어 그들의 언행을 통해 그들을 검색한 줄을 모른다. 근래 제음(濟陰)의 위풍(魏諷)ㆍ산양(山陽)의 조위(曹偉)는 모두 사악하고 멸망하는 말로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간사함을 품고 젊은 사람들을 동요시킨다. 비록 그들이 도끼나 칼로 목을 베이는 형벌을 받아 세상 사람들에게 큰 경계를 밝히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나쁜 영향을 받은 자는 진실로 많다. 근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주3]


만일 산림 속에서 은둔하며 사는 인사, 백이(夷)ㆍ숙제(叔)의 무리들이 수양산(首陽)에서 좋은 마음으로 오랫동안 굶주리고, 면산(綿山)에서 편안히 불로 뛰어들었다는 실례는 탐욕스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공격하고 풍속을 좋은 쪽으로 발전시키도록 고무시킨다. 그러나 성인(聖人)은 가서 할 수 없고, 나 또한 원하지 않는다. 지금 너희들의 조상은 대대로 관직에 있었는데, 오직 인의(仁義)를 명예로 삼아 행동했고, 근신을 시켜 칭찬을 얻었으며, 집안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화목했으며, 스승과 친구들에게서 배움에 힘썼다. 나는 그 당시 사람들과 일을 하였는데, 비록 출신은 달랐지만 모든 사람들로부터 각기 취할 바가 있었다.


만일 산림 속에서 은둔하며 사는 인사, 백이(夷)ㆍ숙제(叔)의 무리들이 수양산(首陽)에서 좋은 마음으로 오랫동안 굶주리고, 면산(綿山)에서 편안히 불로 뛰어들었다는 실례는 탐욕스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공격하고 풍속을 좋은 쪽으로 발전시키도록 고무시킨다. 그러나 성인(聖人)은 가서 할 수 없고, 나 또한 원하지 않는다. 지금 너희들의 조상은 대대로 관직에 있었는데, 오직 인의(仁義)를 명예로 삼아 행동했고, 근신을 시켜 칭찬을 얻었으며, 집안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화목했으며, 스승과 친구들에게서 배움에 힘썼다. 나는 그 당시 사람들과 일을 하였는데, 비록 출신은 달랐지만 모든 사람들로부터 각기 취할 바가 있었다.


영천(潁川)의 곽백익(郭伯益 : 곽혁)은 통달한 사람으로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그의 사람됨은 도량의 넓음에 있어서는 부족하였고,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존경하는 것이 극단적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태산처럼 중시하였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풀처럼 홀시했다. 그를 이해하기 때문에 가까이 지내는데, 나의 아들이 그와 같이 되기는 원하지 않는다.[주4]


북해(北海)의 서위장(徐偉長 : 서간)은 높은 명성을 추구하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을 찾지 않으며 담담하게 자기의 본성을 지키면서 오직 도(道)에만 힘쓸 뿐이다. 그가 긍정 혹은 부정하는 바가 있다면 거짓으로 고인의 언행에 기탁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내고,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폄하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존경하고 중요시하고, 내 아들이 그를 본받기를 희망한다.


동평(東平)의 유공간(劉公幹 : 유정)은 박학하고 높은 재능을 갖고 있으며, 성실하고 절도가 있으며 큰 뜻이 있다. 그러나 그의 성정과 행동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자기를 구속하고 꺼리는 바가 적고,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충분히 서로 보충할 수 있다. 나는 그를 아끼고 중요시 하지만 내 아들이 그를 앙모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주5]


낙안(樂安)의 임소선(任昭先 : 임하)은 순수하고 도를 따라 행동하며, 안으로는 명민하고 밖으로는 관대하게 용서하며, 겸손함과 공경을 따르고, 거처는 더러운 장소를 피하지 않고, 평상시는 겁먹은 듯하지만 의에 대해서는 용감하고 조정에 있어서는 자신의 몸을 잊는다. 나는 그를 친구로 생각하며 그를 칭찬하는데, 아들이 그를 존경하기를 원한다.[주6]


만일 너희들이 이상의 사람들을 이끌어 내려고 생각하고 유사한 일을 한다면, 너희들은 한 실마리를 나타내는 데 충분할 것이다. 재산을 사용할 때는 친척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은혜를 펼 때는 위급한 자를 구하는 데 노력하고, 집 밖으로 나갈 때는 노인을 위문하고, 논의할 때는 비난하지 않는 태도를 존중하고, 관직에 나갈 때는 충성과 절개를 숭상하고, 사람을 구할 때는 실질과 도의를 안중에 두고, 세상에 처할 때는 교만과 음란함을 경계하며, 빈천할 때는 삼가며 슬퍼하지 말고, 나가고 물러날 때는 마땅함을 염두에 두고, 일을 할 때는 몇 번이고 생각하도록 해라. 이와 같이 하면 충분히 내가 또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주1]國語曰:范文子暮退於朝,武子曰:「何暮也?」對曰「有秦客廋辭于朝,大夫莫之能對也,吾知三焉。」武子怒曰:「大夫非不能也,讓父兄也。爾童子而三掩人於朝,吾不在,晉國亡無日也。」擊之以杖,折其委笄。臣松之案:對秦客者,范燮也。此云范匄,蓋誤也。


[주2]臣松之以為援之此誡,可謂切至之言,不刊之訓也。凡道人過失,蓋謂居室之愆,人未之知,則由己而發者也。若乃行事,得失已暴于世,因其善惡,即以為誡,方之 于彼,則有愈焉。然援誡稱龍伯高之美,言杜季良之惡,致使事徹時主,季良以敗。言之傷人,孰大於此?與其所誡,自相違伐。


[주3]세어(世語)에서 이르길: 황초(黃初)중에, 손권(孫權)이 칭번하자(通章表). 조위(曹偉)는 백의(白衣; 관직을 안 가진 평민)의 신분으로 강상(江上)을 올라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재물을 구하여 경사에 있는 관리들과 교제하고 연결고리를 만들자고 하였는데 주살되었다.


[주4]백익(伯益)의 이름은 곽혁(郭奕)으로,곽가(郭嘉)의 아들이다.


[주5]臣松之以為文舒復擬則文淵,顯言人之失。魏諷、曹偉,事陷惡逆,著以為誡,差無可尤。至若郭伯益、劉公幹,雖其人皆往,善惡有定;然既友之於昔,不宜復毀之 於今,而乃形于翰墨,永傳後葉,於舊交則違久要之義,於子孫則揚人前世之惡。於夫鄙懷,深所不取。善乎東方之誡子也,以首陽為拙,柳下為工,寄旨古人,無 傷當時。方之馬、王,不亦遠哉!


[주6] 임소선(任昭先)의 이름은 임하(任嘏)이고 자는 소선(昭先)이다. 따로 전기가 있는데,낙안(樂安) 박창(博昌) 사람이다. 어려서 똑똑하여 고향사람들은


"늙은 사람은 장씨가 최고고 어린아이는 임씨가 최고다"


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임조(任旐)이고 자는 자여(子旟)이다. 한나라 말기에 황건적의 난이 기승일때, 기근이 들어, 사람들끼리 잡아 먹었는데, 도적들이 박창에도 들이닥쳤는데, 임조(任旐)라는 이름을 듣고는 서로 이렇게 말했다.


"소문에는 임자여(任子旟)라는 사람이 천하의 현인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도적들이지만 그래도 그집안에 쳐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고는 모두 물러갔다. 이때부터 그의 명성은 멀리멀리 퍼져갔다. 주군에서 모두 그를 효렴으로 천거했고, 산조(酸棗), 축아(祝阿)의 현령이 되었다.


임하는 8살때 어머니를 잃었는데, 우는 소리가 그칠줄 모르고 애달파서 어른들로부터 이구동성으로 그 지성을 대단하다 했다. 14살에 시학(始學: 학습을 시작)하여, 한번 깨달은 것은 두번 묻을적이 없고, 3년이 지나자 오경을 줄줄 외우고, 그뜻을 모두 탐구하여, 모두 속뜻을 알아, 세상 사람들이 그를 신동(神童)이라 했다.


기근(荒亂)이 들어 집안이 가난해서 물고기를 팔았는데, 물고기에도 관에서는 세금을 때려, 물고기값이 수배로 뛰었는데, 임선은 물고기 값을 예전 그대로 받았다.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가축을 샀는데, 각 8필 가격이었다.그런데 나중에팔았던 가축을 되가져가겠다고 했다. 시가는 이미 64필이었다. 같이 샀던사람들은 시가인 64필가격을 받으려고 했는데, 임하는 본래에 취득했던 가격만 받았다. 같이 구매했던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면서, 본래의 가격만 받고 되돌려주었다.


比居者擅耕嘏地數十畝種之,人以語嘏,嘏曰:「我自以借之耳。」耕者聞之,慚謝還地。及邑中爭訟,皆詣嘏質之,然後意厭。其子弟有不順者,父兄竊數之曰: 「汝所行,豈可令任君知邪!」其禮教所化,率皆如此。會太祖創業,召海內至德,嘏應其舉,為臨菑侯庶子、相國東曹屬、尚書郎。文帝時,為黃門侍郎。每納忠 言,輒手書懷本,自在禁省,歸書不封。帝嘉其淑慎,累遷東郡、趙郡、河東太守,所在化行,有遺風餘教。嘏為人淳粹凱悌,虛己若不足,恭敬如有畏。其脩身履 義,皆沈默潛行,不顯其美,故時人少得稱之。著書三十八篇,凡四萬餘言。嘏卒後,故吏東郡程威、趙國劉固、河東上官崇等,錄其事行及所著書奏之。詔下祕 書,以貫群言。


청룡(青龍) 4년(236), 조서를 내렸다.

- 재지(才智)가 있으며 문장(文章)에 뛰어나고 생각이 깊고 멀리 도모하며, 먼 곳의 일을 눈앞의 일처럼 예측하고, 보이지 않지만 관찰할 수 있고, 계산된 모략은 헛되이 운용하는 일이 없고, 제출한 계획은 헛되이 발휘하지 않으며, 품행은 전일하고 단정하며 삼가고, 행동은 깨끗하고 안정되게 하고 노력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지향하는 것은 공적인 일에 있는 사람을 구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나이에 한정하지 말고 귀천에 구속되지 말며 구경(卿)과 교위(校) 이상의 자리에 있는 자는 각기 한 사람씩 추천하라.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은 왕창을 추천했다.

정시(正始) 연간, 왕창은 전임하여 서주(徐州)자사로 전임되고, 무관정후(武觀亭侯)로 봉해졌으며, 정남장군(征南將軍)ㆍ가절도독형예제군사(假節都督荊豫諸軍事)로 승진했다. 왕창은 국가에는 변하지 않는 백성이 존재하지만 전쟁에는 변하지 않는 승리가 없으며, 토지에는 변하지 않는 요충지가 있지만 수비에는 변하지 않는 형세가 없다고 생각했다. 현재 완성(宛)에 주둔하고 있고, 배는 선지(宣池)에 있어 급한 일이 있어도 달려가기에 충분하지 못하였으므로, 곧 상소를 올려 신야(新野)를 관서로 옮기고 두 주(二州 : 형주와 예주)에서 수군을 훈련시키고, 농업에 힘을 기울여 개간을 증강시켜 창고에는 곡물이 가득 쌓이도록 하라고 했다.

가평(嘉平) 초년,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은 조상(曹爽)을 주살한 후, 상주하여 대신들의 득실에 대해 광범위한 의견을 하문했따. 왕창은 정치 방책 다섯 가지를 진술했다.

- 첫째, 도덕을 숭상하고 학문에 전력하고, 부화한 것을 억제하고 단절시켜야 한다. 황족의 자제들로 하여금 태학(太學)에 들어가 엄숙한 예의를 학습하도록 한다. 둘째, 고시(考試)를 시행해야 한다. 고시는 마치 표준을 재는 수준기(準 : 수평을 재는 기계)와 먹줄(繩 : 목수가 쓰는 직선을 그리는 줄) 같은 것이다. 수준기와 먹줄을 버리고 마음대로 굽음 혹은 곧음을 결정하고 강등과 승진을 폐지하고 헛되이 논의한 적은 없었다. 셋째, 관직에 있는 자는 그 직책에서 오랫동안 있도록 해야 한다. 치적이 있으면 그 지위를 올리고 작위를 내린다. 넷째, 관직을 줄여 하는 일 없이 녹을 먹는 일이 없도록 하고, 염치의 마음을 일으켜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못하도록 한다. 다섯째, 사치를 근절시켜야 한다.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고, 의복에는 신분에 맞는 무늬를 달도록 하여 상하의 질서가 있게 하고, 곡물과 비단을 비축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소박한 경지로 돌아가게 한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그를 칭찬했다. 이것을 기회로 왕창으로 하여금 백관(百官)의 고시제도(考課)를 편찬하도록 했다. 그러자 왕창은 당우(唐虞 : 요와 순) 시대에는 강등과 승진에 관한 문장은 있었지만, 고시 방법에 관한 것은 전해지지 않았고, 주(周)에는 총재(冢宰 : 재상)의 직책을 제정하여 각 관리의 치적을 통일되게 조사하여 상과 벌을 내렸지만 또 고시제도는 없었다고 생각되므로 이로부터 성명한 군주는 현명한 사람을 임용할 때 식견이 명백하고, 대체로 강등과 승진의 법칙을 세워 그것을 통달한 관리에게 위탁하며, 황제는 그것의 대강을 총괄하기 때문에 관원의 능력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고 서술했다. 왕창의 건의는 대체로 이와 같았다.

정시 2년(250), 왕창이 상주하여 말했다.

- 손권(孫權)은 우수한 대신을 내쫓고 적저(適)와 서자(庶)가 나뉘어 다투고 있으니, 이 틈을 타 오(吳)와 촉(蜀)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백제(白帝)와 이릉(夷陵) 일대, 검(黔)ㆍ무(巫)ㆍ자귀(秭歸)ㆍ방릉(房陵)은 모두 장강 북쪽에 위치하며, 한족(民)과 만족(夷)이 신성군(新城郡)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니, 습격하여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성태수(新城太守) 주태(州泰)에게 무(巫)ㆍ자귀(秭歸)ㆍ방릉(房陵)을 습격하도록 하고, 형주자사(荊州刺史) 왕기(王基)를 이릉(夷陵)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왕창을 강남(江)으로 향하게 하고 양쪽 해안에 대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어 물을 건너 적을 공격했다. 적군은 남쪽 해안으로 달아났으며, 일곱 길로 나누어 함께 공격했다. 그때 왕창은 매복하고 있던 궁수들에게 동시에 화살을 발사하도록 했다.


적군의 대장 시적(施績)은 밤에 도주하여 강릉성(江陵城)으로 들어갔으나, 추격하여 수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왕창은 적을 평지로 유인하여 싸울 생각을 하고, 곧 먼저 다섯 부대를 파견하여 큰 길을 따라 돌아가도록 하여 이것을 적군이 바라보고 기뻐하게 하고, 노획한 말로 무장한 말과 갑옷과 참수당한 적군의 머리를 싣고 성 주위를 달려서 그들을 화나게 만들고, 복병을 두어 기다렸다. 시적은 과연 위나라 군대를 추격하였다. 왕창은 그와 싸워 승리했다. 시적은 도주했다. 왕창은 그의 장수 종리무(鍾離茂)ㆍ허민(許旻)을 죽이고, 그들의 갑옷(甲)과 참수당한 머리(首), 군기(旗), 북(鼓), 진귀한 보물(珍寶), 무기(器仗)를 얻고 병사들을 정돈하여 돌아왔다. 왕기(王基)ㆍ주태(州泰)는 모두 공을 세웠다. 그래서 왕창은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ㆍ의동삼사(儀同三司)로 승진되고, 경릉후(京陵侯)로 봉해졌다.


관구검(毌丘儉)과 문흠(文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병사를 인솔하여 관구검과 문흠에게 저항한 공적이 있었으므로 두 아들을 정후(亭侯)와 관내후(關內侯)로 봉하고, 지위를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승진시켰다. 제갈탄(諸葛誕)이 반역하였을 때, 왕창은 협석(夾石)을 근거로 하여 강릉(江陵)에 압력을 가하였고, 주적(施績)과 전희(全熙)와 대치하여 동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했다. 제갈탄이 주살된 후 조서를 내려 말했다.

- 옛날 손빈(孫臏)은 조(趙)나라를 보좌하고, 직접 대량(大梁 : 위의 수도)으로 나갔다. 서쪽 병사가 용맹하게 돌진하는 것은 또 동정(東征)의 세력을 만드는 것이다.

식읍이 1천 호 증가되어 이전 것과 합쳐 4천 7백 호가 되었으며, 사공(司空)으로 승진하고 지절(持節)ㆍ도독(都督)은 옛날과 같았다.

감로(甘露) 4년(259)에 죽었으며, 시호를 목후(穆侯)라고 했다. 아들 왕혼(渾)이 후사를 이었고, 함희(咸熙) 연간에 월기교위(越騎校尉)가 되었다.


진서(晉書)에서 말하길: 왕혼渾은 진나라 월기교위가 되어, 여러 곳에 살면서 임무를 맡았고, 오나라를 평정하는데 공이 있어, 아들 하나를 강릉후(江陵侯)에 봉하였으며, 벼슬은 사도(司徒)에 이르게 된다. 왕혼의 아들은 왕제濟이며, 자는 무자武子이다. 영특하고 재주가 있어 좋은 평판을 받았으며, 하남윤, 태복 太僕 에 임명되었다. 일찍 죽었으며, 표기장군에 추증하였다. 왕혼의 동생 왕심深은 기주자사이다. 왕심의 동생 왕담湛은 자는 처충處沖으로, 여남태수이다. 왕담의 아들 왕승承은 자는 안기安期로 동해내사 東海內史 이다. 왕승의 아들 왕술述은 자는 회조懷祖이고, 상서령 尚書令, 위장군 衛將軍 이다. 왕술의 아들은 왕탄지坦之의 자는 문도文度이고, 북중랑장 北中郎將, 서주, 연주 2개의 자사이다. 왕창의 자손 중 왕담은 가장 덕과 명예가 높았고, 왕승 또한 명사로 이름 날렸으며, 왕술과 왕탄지는 세상에서 존중 받아, 이 시기에 가문이 번성하였다. 왕담에 대한 것은 진양추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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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5
12:59:28
(*.0.203.172)
주석 추가 게으른 사냥꾼님의 이글루에 감사합니다.

코렐솔라

2013.08.16
10:58:32
(*.52.91.73)
조위관련 주석 추가. 이 중요한게 번역이 안 되어 있었군요.

구라뱅뱅

2013.10.30
16:36:45
(*.49.168.253)
정시(正始) 연간, 왕창은 전임하여 서주(徐州)에 있게 되었고, 무관정후(武觀亭侯)로 봉해졌으며, 정남장군(征南將軍)ㆍ가절도독형예제군사(假節都督荊豫諸軍事)로 승진했다.

=>正始中,轉在徐州,封武觀亭侯,遷征南將軍,假節都督荊、豫諸軍事。
정시 中 서주자사로 전임되고, 무관정후에 봉해졌으며, 정남장군, 가절도독형예제군사로 승진했다.

轉在전임되다이며, 徐州는 州를 말하므로 주자사(또는 주목이나 위방진년표를 보면 정시2년 서주자사가 된다고 나옵니다.)
# 연주자사 였다가 서주자사로 옮긴것을 말합니다.

코렐솔라

2013.10.30
17:25:06
(*.0.203.41)
넵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이게 자사가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군요.

breathtaker

2014.05.30
18:57:44
(*.177.28.130)
정시 연간 서술에 "농어벵"이라는 오타가 보입니다(아무래도 "농업에"의 잘못으로 보입니다)
또한 관구검의 난 대목에서 시적(주적)을 "이적"이라고 적은 부분도 수정 부탁드립니다. (이 부분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주적"으로 통일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구라뱅뱅

2019.09.20
17:14:43
(*.21.49.97)
案王氏譜:昶伯父柔,字叔優;父澤,字季道。郭林宗傳曰:叔優、季道幼少之時,聞林宗有知人之鑒,共往候之,請問才行所宜,以自處業。林宗笑曰:「卿二人皆 二千石才也,雖然,叔優當以仕宦顯,季道宜以經術進,若違才易務,亦不至也。」叔優等從其言。叔優至北中郎將,季道代郡太守。

왕씨보(왕씨족보?)를 보면
왕창의 백부는 왕유(柔)이며 자는 숙우(叔優)이고, 아버지는 왕택(澤)이며 자는 계도(季道)이다.
郭林宗傳 에서 말하길 (郭林宗은 후한의 유명한 학자)
숙우, 계도가 어렸을 적에 곽림종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는데 (知人之鑒), 共往候之,請問才行所宜,以自處業。
林宗이 웃으며 말하길「경卿 두사람 모두 이천석 관리가 되겠구나, 그렇지만숙우는 마땅히 벼슬길에 오를것이고, 계도는 經術(경서관련학술) 나아갈것이며,若違才易務,亦不至也。」숙우등은 그 말을 따랐다。숙우눈 북중랑장에(北中郎將) 이르렀으며,계도는 대군태수代郡太守가 되었다.

하던거 까지만 우선 올렸네요.

구라뱅뱅

2019.09.23
17:17:37
(*.21.49.97)
王柔字叔優,弟澤,字季道,林宗同郡晉陽縣人也。兄弟總角共候林宗,以訪才行所宜。林宗曰:「叔優當以仕進顯,季道當以經術通,然違方改務,亦不能至也。」後果如所言,柔為護匈奴中郎將,澤為代郡太守。

後漢書卷六十八   郭符許列傳第五十八

구라뱅뱅

2019.10.11
17:13:55
(*.21.49.97)
의역을 하자면
왕씨보(왕씨족보?)를 보면
왕창의 백부는 왕유(柔)이며 자는 숙우(叔優)이고, 아버지는 왕택(澤)이며 자는 계도(季道)이다.
郭林宗傳 에서 말하길 (郭林宗은 후한의 유명한 학자)
숙우, 계도가 어렸을 적에 곽림종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는데 (知人之鑒), 둘이 문안을 여쭙고자 찾아뵈어, 재주와 지혜(才智)와 덕행(德行)에 대해 질문하였다. 林宗이 웃으며 말하길「경卿 두사람 모두 이천석 관리가 되겠구나, 그렇지만 숙우가 능히 벼슬길에 오르고, 계도가 경술(經術:경서관련학술)에 정진하게 됨에 있어 그 재주를 힘쓰고 노력하지 아니하면 그리하지 못하리라。」숙우등은 그 말을 따랐다。숙우는 북중랑장에(北中郎將) 이르렀으며,계도는 대군태수代郡太守가 되었다.

구라뱅뱅

2019.10.11
17:30:08
(*.21.49.97)
孫子兵法曰:兵以正合,以奇勝;奇正還相生,若循環之無端。

손자병법이라 검색한 자료로 올립니다.

손자병법에서 말하길
전쟁은 원칙적인 전술로 싸우고 변칙적인 전술로 승리하는 것이다.
변칙적인 전술과 원칙적인 전술을 번갈아 내놓기를 마치 둥근 고리가 끝이 없는 것처럼 한다.

https://blog.naver.com/swings81/221474498922

구라뱅뱅

2019.10.11
18:05:26
(*.21.49.97)
案晉書:渾自越騎入晉,累居方任,平吳有功,封一子江陵侯,位至司徒。渾子濟,字武子,有雋才令望,為河南尹、太僕。早卒,追贈驃騎將軍。渾弟深,冀州刺 史。深弟湛,字處沖,汝南太守。湛子承,字安期,東海內史。承子述,字懷祖,尚書令、衛將軍。述子坦之,字文度,北中郎將,徐、兗二州刺史。昶諸子中,湛 最有德譽,而承亦自為名士,述及坦之並顯重於世,為時盛門云。自湛已下事,見晉陽秋也。
왕혼渾은 진나라 월기교위가 되어, 여러 곳에 살면서 임무를 맡았고, 오나라를 평정하는데 공이 있어, 아들 하나를 강릉후(江陵侯)에 봉하였으며, 벼슬은 사도(司徒)에 이르게 된다. 왕혼의 아들은 왕제濟이며, 자는 무자武子이다. 영특하고 재주가 있어 좋은 평판을 받았으며, 하남윤, 태복 太僕 에 임명되었다. 일찍 죽었으며, 표기장군에 추증하였다. 왕혼의 동생 왕심深은 기주자사이다. 왕심의 동생 왕담湛은 자는 처충處沖으로, 여남태수이다. 왕담의 아들 왕승承은 자는 안기安期로 동해내사 東海內史 이다. 왕승의 아들 왕술述은 자는 회조懷祖이고, 상서령 尚書令, 위장군 衛將軍 이다. 왕술의 아들은 왕탄지坦之의 자는 문도文度이고, 북중랑장 北中郎將, 서주, 연주 2개의 자사이다. 왕창의 자손 중 왕담은 가장 덕과 명예가 높았고, 왕승 또한 명사로 이름 날렸으며, 왕술과 왕탄지는 세상에서 존중 받아, 이 시기에 가문이 번성하였다. 왕담에 대한 것은 진양추에 보인다.

코렐솔라

2019.10.16
16:55:58
(*.46.174.164)
감사합니다. 위의 주석 3개 모두 반영하였습니다. 진서 왕혼전이 번역 안 되었다고 만날 그랬는데 여기서 그 일부를 보게 되는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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