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王淩)은 자가 언운(彥雲)이고 태원군(太原) 기현(祁) 사람이다. 숙부 왕윤(允)이 한(漢)나라에서 사도(司徒)가 되어 동탁(董卓)을 주살하자, 동탁의 부장(將) 이각(李傕)과 곽사(郭汜) 등이 동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침입해와 왕윤을 살해하고, 그의 집안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왕릉과 그의 형 왕신(晨)은 당시 나이가 어렸는데, 성벽을 넘어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향리(鄉里)로 달아났다. 왕릉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고, 발간현(發干)의 장(長)으로 임명되었으며, 점점 승진하여 중산태수(中山太守)가 되었다.


魏略曰:淩為長,遇事,髡刑五歲,當道掃除。時太祖車過,問此何徒,左右以狀對。太祖曰;「此子師兄子也,所坐亦公耳。」于是主者選為驍騎主簿。


그가 부임한 곳에서 치적을 쌓자, 태조(太祖)는 그를 초빙하여 승상연속(丞相掾屬)으로 삼았다.

문제(文帝)가 제위에 오르자, 왕릉을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하였으며 지방으로 내보내 연주자사(兗州刺史)로 삼아 장료(張遼) 등과 함께 광릉(廣陵)에 이르러 손권(孫權)을 토벌하도록 했다. 장강가에 이르러, 밤에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오(吳)나라 장수(將) 여범(呂範) 등이 탄 배가 표류하다가 북쪽 해안에 이르게 되었다. 왕릉은 장수들과 맞아 공격하여서 적의 우두머리를 체포하여 죽이고, 배를 포획하여 전공을 세웠으므로 의성정후(宜城亭侯)로 봉해졌으며, 건무장군(建武將軍)의 관직이 더해졌고 청주자사(青州)로 옮겼다.

이 당시 북방 해안가 일대의 동란의 여파가 있었으므로 법령과 제도가 완벽하게 시행되지 못했다. 왕릉은 정치를 펴고 교육을 시행하고, 선량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사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어 기강을 차츰 확립해 나가니 그에 대한 칭찬이 백성들의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 이후 조휴(曹休)를 따라 오(吳)나라를 정벌하러 가 협석(夾石)에서 적과 마주쳤다. 조휴의 군대는 유리함을 잃었지만, 왕릉이 목숨을 바쳐 힘껏 싸워서 포위망을 뚫었으므로 곤란함을 면하게 되었다. 곧 양주(揚州)와 예주(豫州)의 자사(刺史)로 바꿔 임명되었는데, 병사들과 백성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처음에 왕릉이 예주에 도착하여 이전 현인(賢)들의 자손을 표창하고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선비를 구하였다. 각각 조문(條)과 교령(教)이 있었고, 그 뜻이 매우 아름다웠다. 처음에 왕릉은 사마랑(司馬朗)ㆍ가규(賈逵) 와 친구로 교제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연주(兗)와 예주(豫)에 이르러서도 명성과 정치적 업적을 계승할 수 있었다.

정시(正始) 초년(240), 왕릉은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임명되었고, 가절도독양주제군사(假節都督揚州諸軍)가 되었다. 2년(241) 오(吳)나라 대장(大將) 전종(全琮)이 이끄는 수만 명의 군사가 작피(芍陂)를 침범해 오자, 왕릉은 각 군대를 이끌고 맞아 토벌하러 갔으며, 적과 제방을 차지하려고 힘껏 싸운지 며칠 만에 적군이 물러나 달아났다. 왕릉은 승진하여 남향후(南鄉侯)로 봉해졌으며, 식읍 1,350호를 받았다. 거기장군(車騎將軍)ㆍ의동삼사(儀同三司)로 승진하였다.

이 당시 왕릉의 외조카 영호우(令狐愚)는 재능이 있어서 연주자사(兗州刺史)가 되었으며, 평아(平阿)에 주둔했으니, 아저씨와 조카가 함께 병권(兵)을 관장하며 회남(淮南)지역의 중임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왕릉은 나가 사공(司空)으로 승진했다. 사마선왕(司馬宣王)은 이미 조상(曹爽)을 주살하고, 왕릉을 태위(太尉)로 임명하고, 절월(節鉞)을 주었다. 왕릉과 영호우[주]는 비밀리에 함께 상의하여, 제왕(齊王 : 조방)은 어려서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없고, 초왕(楚王) 조표(彪)가 나이도 많고 재능도 갖고 있으므로 조표를 맞아들여 세우고 허창(許昌)을 수도로 해야 된다고 했다.


가평(嘉平) 원년(249) 9월, 영호우가 장군(將) 장식(張式)을 백마(白馬)로 파견하여 조표와 서로 묻고 왕래하였다. 왕릉은 또 사인(舍人) 노정(勞精)을 낙양(洛陽)까지 파견하여 이 일을 아들 왕광(王廣)이 이렇게 말했다.

“천자의 폐립(廢立)은 중대한 일이니 재난의 징조로 삼지 마십시오.”


한진춘추(漢晉春秋)에서 이르길: 왕릉과 영호우가 모의하기를, 황제는 어리석고 약하여 강한 신하들에게 통제를 받아 주군이 이를 견디지 못하는데 초왕(楚王) 조표(曹彪)가 지혜와 용기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황제로 세워 조씨(曹氏)를 다시 흥하게 하고자 하였다. 왕릉이 왕광(王廣)에게 이를 알리자 왕광이 말하길


"무릇 큰일을 들고 일어나려면 마땅히 사람들의 정서에 근본을 두어야 합니다. 조상(曹爽)은 교만함과 사치함으로 민심을 잃었고 하평숙(何平叔; 何晏)은 헛되게 화려하였지만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했으며 정밀(丁謐), 필궤(畢軌), 환범(桓範) 등양(鄧颺)은 비록 나란히 오래 명망을 가졌었지만 모두 세상에서 오로지 경쟁만 하였습니다.


조정의 제도를 바꾸고 정령을 자주 고쳤으니, 자기가 갖고 있는 이상이 비록 높다고 하더라도 그 하는 일은 아래로 이어지지 않았으니 백성들은 옛 것에 익숙해 있어서 무리 중에 고친 것을 좇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세력이 사해를 기울일 정도였고 명성은 천하를 뒤흔들 정도였으나 같은 날에 목 잘려 죽었고, 명사들은 반쯤 줄어들었지만 백성들이 이를 편안하게 생각하고 혹 슬프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민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마의의 사정은 비록 헤아리기기가 어렵지만 일은 아직 반역하지 않고,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 쓰면서 널리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심어놓고 앞의 조정에서 만든 정령을 고쳐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요구하는 것에 부흥하고 있습니다.


조상이 나쁘다고 여기는 것은 저 사람이 반드시 다 고치지 않은 것이 없고,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으면서 백성들을 애휼하는 것은 천 번째 일로 삼고, 부자형제들이 아울러 병권의 요체를 잡고 있어서 아직은 쉽게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릉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신송지가 생각하길 이와 같은 말의 부류들은 모두 전사前史에서는 실리지 않은 바인데, 오히려 습씨習氏에게서만 나온다. 또한 언법체계制言法體가 옛날과 같지 않으니 모두 습착치鑿齒가 스스로 만들어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그해 11월, 영호우(愚)는 왕식을 다시 파견하여 조표를 만나게 했는데, 돌아오기도 전에 마침 영호우가 질병으로 죽었다.


주: 위서에 이르길 : 영호우令狐愚의 자는 공치(公治)로, 본명은 영호준(令狐浚)이다. 황초 연간, 화융호군이 되었다. 오환교위 전예가 호(胡)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는데, 지시를 조금 위반하였다. 영호우가 법으로 그를 잡아넣으려 하였다. 황제(문제)가 노하여 형구로 영호우를 포박하고, 벼슬을 파면하고 죄를 묻고는 조서를 내려


"영호준은 어찌 그리 멍청하냐!"


라 하였기에 우(愚)를 이름으로 삼았다. 정시 연간, 조상의 장사가 되었고, 후에 밖으로 나가 연주자사가 되었다.


魏略曰:愚聞楚王彪有智勇。初東郡有訛言云:「白馬河出妖馬,夜過官牧邊鳴呼,眾馬皆應,明日見其跡,大如斛,行數里, 還入河中。」又有謠言:「白馬素羈西南馳,其誰乘者朱虎騎。」楚王小字朱虎,故愚與王淩陰謀立楚王。乃先使人通意於王,言「使君謝王,天下事不可知,願王 自愛」!彪亦陰知其意,答言「謝使君,知厚意也。」


2년(250), 형혹성(熒惑 : 화성)이 남두(南斗)의 위치로 진입했는데, 왕릉이 말했다.

“남두 가운데 화성이 있으니, 갑작스럽게 고귀하게 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위략(魏略)에서 이르길: 왕릉은 동평의 백성 호상(浩詳)이 천문을 안다고 들었으므로, 불러서 물었다. 호상은 왕릉이 뜻하는 바가 있다고 의심하여, 왕릉의 뜻을 맞춰주었다. 오나라에 상사가 있을 것이라고는 하지 않고, 회남은 초의 분야인데, 오늘날 오와 초를 함께 점하고 있으니 마땅히 왕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왕릉은 이로써 뜻을 정했다.

3 년(251) 봄, 오(吳)나라 적병(賊)이 도수(涂水)를 막았다. 이 때문에 왕릉은 사건을 일으키려고 각 군대에게 비상태세를 갖추도록 하고, 적군 토벌을 구하는 상주문을 올렸는데, 조서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답장이었다. 왕릉의 음모는 더욱 깊이 진행되었다. 그는 장군(將軍) 양홍(楊弘)을 파견하여 폐립하는 일을 연주자사(兗州刺史) 황화(黃華)에게 알리도록 했다. 황화(華)와 장홍(弘)은 연명(連名)하여 일을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에게 보고했다. 사마선왕의 중군(中軍)을 이끌고 수로를 이용하여 왕릉을 토벌하면서, 우선 왕릉의 죄를 사면해준다는 명령을 내렸으며, 또 상서(尚書) 왕광(王廣)을 데리고 동쪽으로 가서 그로 하여금 편지를 써서 왕릉을 깨우치게 하였다. 사마선왕은 대군을 이끌고 몰래 백척(百尺)까지 나아가 왕릉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왕릉은 스스로 대세가 이미 끝났음을 알았으므로 배를 타고 혼자 나와서 사마선왕을 맞이하고, 하급관원 왕욱(王彧)을 보내 사죄하고, 인수(印綬)와 절월(節鉞)을 보냈다. 군대가 구두(丘頭)에 도착하자, 왕릉은 스스로를 결박하고 물가에서 죄값을 받으려고 기다렸다. 사마선왕(宣王)은 조서를 받고 주부(主簿)를 보내 결박을 풀어주고, 왕릉을 위로하고 인수와 절월을 돌려주었으며, 보병과 기병 6백 명을 파견하여 왕릉을 수도로 돌려보냈다. 왕릉은 항(項)에 이르러서 독약을 먹고 죽었다.


위략(魏略)실린 왕릉이 선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르길


「卒聞神軍密發,巳在百尺,雖知命窮盡,遲於相見,身首分離,不以為恨,前後遣使,有書未得還報,企踵西望,無物以譬。昨遣書之後,便 乘船來相迎宿丘頭,旦發於浦口,奉被露布赦書,又得二十三日況,累紙誨示,聞命驚愕,五內失守,不知何地可以自處?僕久忝朝恩,歷試無效,統御戎馬,董齊 東夏,事有闕廢,中心犯義,罪在三百,妻子同縣,無所禱矣。不圖聖恩天覆地載,橫蒙視息,復睹日月。亡甥令狐愚攜惑群小之言,僕即時呵抑,使不得竟其語。 既人已知,神明所鑒,夫非事無陰,卒至發露,知此梟夷之罪也。生我者父母,活我者子也。」


又重曰:「身陷刑罪,謬蒙赦宥。今遣掾送印綬,頃至,當如詔書自 縛歸命。雖足下私之,官法有分。」及到,如書。태부는 사람을 보내 그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왕릉은 이미 사면을 받았고, 더욱이 옛날에 잘 지냈던 것을 믿고 다시 의심을 품지 아니하고 작은 배를 타고 지름길로 태부에게 가려고 하였다. 태부는 사람들을 시켜서 이를 막고 배를 회하(淮) 가운데 머무르게 하였는데, 서로의 거리가 10여 장이었다. 왕릉은 자기를 바깥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에 멀리있는 태부에게 말하였다.


"경이 곧바로 절간(折簡; 반쪽자리 죽간)을 가지고 나를 부른다고 하여도 내가 마땅히 감히 이르지 않겠는가? 군대까지 끌고 와야 했는가?"


태부가 말하였다.


"경은 절간을 축출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오."


왕릉이 말하였다.


"경은 나에게 빚을 진 것이오."


태부는 말하였다.


"나는 차라리 경에게 빚을 지지 국가에 빚을 지지는 않겠소"


마침내 사람을 시켜 그를 서쪽(낙양)으로 호송하게 했다. 왕릉은 스스로 중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에 시험삼아 관에 박는 못을 요청함으로써 태부의 의중을 떠보았는데 태부가 못을 그에게 주었다. 왕릉은 항(項)에 이르렀을 때 밤에 속관들을 불러 그들과 결별하면서


"향년 80에 신명이 모두 스러지게 되었으니 천명인가 보다!"


말하고는 마침내 자살했다.


干寶晉紀 曰:淩到項,見賈逵祠在水側,淩呼曰:「賈梁道,王淩固忠于魏之社稷者,唯爾有神,知之。」其年八月,太傅有疾,夢淩、逵為癘,甚惡之,遂薨。

사마선왕(宣王)은 곧 수춘(壽春)에 도착했다. 장식(張式) 등은 모두 자수하였으며, 이 일을 철저하게 규명했다. 조표(彪)는 사형을 받았으며, 이와 연좌된 자는 모두 삼족(三族)을 멸하게 되었다.


[[선고전]]으로 분리


조정에서의 논의는, 곧 춘추(春秋)의 대의로써 제(齊)나라의 최서(崔杼), 정(鄭)나라의 귀생(歸生 : 둘다 모두 주군을 살해한 인물임)에 대해서는 사후에 형을 더하여 시신을 꺼내 사람들에게 보이고 관을 부수었다. 이 일은 전적 안에 기록되어 있는데, 왕릉(淩)과 영호우(愚)의 죄는 응당 옛날 전적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왕릉과 영호우의 묘를 파서 관을 자르고, 그들의 시신을 그 부근에 있는 시장에 3일간 말렸으며, 그들의 인수(印綬)와 조복(朝服)을 불태우고, 시체를 직접 흙에 묻었다.


干寶晉紀曰:兗州武吏東平馬隆,託為愚家客,以私財更殯葬,行服三年,種植松柏。一州之士愧之。


나아가 양홍(弘)과 황화(華)의 작위를 향후(鄉侯)로 봉했다. 왕광(王廣)은 뜻이 있고 학문과 덕행이 숭상되었으며, 46세에 죽었다.


위씨춘추(魏氏春秋)에 이르길:왕광(王廣)의 자는 공연(公淵)이다. 弟飛梟、金虎,並才武過人。太傅嘗從容問蔣濟,濟曰:「淩文武俱贍,當今無雙。廣等志力,有美於父耳。」退而悔之,告所親曰:「吾此 言,滅人門宗矣。」魏末傳曰:淩少子字明山,最知名,善書,多技藝,人得其書,皆以為法。走向太原,追軍及之,時有飛鳥集桑樹,隨枝低卬,舉弓射之即倒, 追人乃止不復進。明山投親家食,親家告吏,乃就執之。

분류 :
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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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4
13:51:29 (*.52.89.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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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23
00:08:54
(*.52.89.87)
주석 추가

아래 위략은 세설신어보 책에 나온 사마의와 왕릉의 대화로 못 드립이 나옵니다.

코렐솔라

2013.08.14
11:13:53
(*.52.91.247)
대사 부분만 번역된 것은 자치통감에 해당 구절이 있기 때문이죠. 선고 관련은 그냥 저런 내용이 있다는 것만 알면 될 듯 합니다.

참고로 네이버에는 단고라고 되어있는데 호삼성이 선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를 달았습니다.

1. 양강이 배반하고 영호우의 계책 다붐.
2. 선고가 미친듯이 욕함
3. 양강이 후를 원했는데 자신이 말한 것과 조사 결과가 다름
4. 양강도 죽게 됨.
5. 선고가 다시 욕함

http://rexhistoria.net/community_three/41371#comment_41429 습착치의 기록에 대해 배송지가 평한 것은 사마휘님의 번역입니다.

코렐솔라

2013.12.12
11:40:04
(*.52.91.73)
기존 선고전은 갖다 버리고 승룡님 번역으로 교체했습니다.

승룡

2013.12.12
17:16:10
(*.229.34.94)
공간이 부족하지 않다면 원문도 아래나 위쪽에 병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한문학 하시는 분들이 읽고 지적해줄 수 있도록 해두면 언젠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문장이 완성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

코렐솔라

2013.12.12
17:18:34
(*.166.245.165)
죄송합니다. 바로 원문도 넣도록 하겠습니다.

코렐솔라

2013.12.12
17:22:46
(*.166.245.165)
아, 그리고 모든 글에 원문 병기는 기술팀에 기술을 요청했는데 한달째 무소식;;; 이 부분은 되는데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코렐솔라

2015.12.28
19:17:07
(*.234.104.49)
호상 얘기는 위키백과 출진으로 https://ko.wikipedia.org/wiki/%EC%99%95%EB%A6%89_%28%EC%A1%B0%EC%9C%84%29 위키백과에 따라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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