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회鍾會는 자가 사계(士季)이고, 영천군 장사현 사람이며, 대부 종요의 작은 아들이다. [주]


회가 그의 어머니를 위해 전(會為其母傳)을 지어 이르길, 위씨춘추에 이르길: [[장창포전]]으로 분할

종회는 어려서 민첩하고 현명하며 조숙하였다. 중호군 장제가 논문을 썼는데, 그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그 사람의 눈동자를 관찰하면 그 사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종회가 다섯 살 때, 종요는 그를 장제에게 보내 만나도록 했다. 장제는 그를 매우 기이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이 아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는 장성한 후, 계산과 기예(초서와 예서)에 뛰어났으며 박학하고 명리에 대해 매우 정통하였고, 학습을 할 때는 밤을 낮으로 이었으며, 이로부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정시 연간, 비서량으로 임명되었으며, 상서중서시랑으로 승진하였다.


世語曰:司馬景王命中書令虞松作表,再呈輒不可意,命松更定。以經時,松思竭不能改,心苦之,形於顏色。會察其有憂,問松,松以實答。會取視,為定五字。松悅服,以呈景王,王曰:「不當爾邪,誰所定也?」松曰:「鍾會。向亦欲啟之,會公見問,不敢饕其能。」王曰:「如此,可大用,可令來。」會問松王所能,松曰:「博學明識,無所不貫。」會乃絕賓客,精思十日,平旦入見,至鼓二乃出。出後,王獨拊手歎息曰:「此真王佐材也!」

松字叔茂,陳留人,九江太守邊讓外孫。松弱冠有才,從司馬宣王征遼東,宣王命作檄,及破賊,作露布。松從還,宣王辟為掾,時年二十四,遷中書郎,遂至太守。松子濬,字顯弘,晉廷尉。

臣松之以為鍾會名公之子,聲譽夙著,弱冠登朝,已歷顯位,景王為相,何容不悉,而方於定虞松表然後乃蒙接引乎?設使先不相識,但見五字而便知可大用,雖聖人其猶 病諸,而況景王哉?

세어에 이르길 : 사마경왕(
司馬景王; 사마사)이 중서령 우송(虞松)에게 표를 짓도록 명령했는데 2번이나 올렸는데 모두 마음에 안 들어 우송으로 하여금 다시 고치도록 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우송은 생각했지만 고칠 수가 없어 마음속으로 이를 걱정하여 안색에 나타났다. 종회는 그가 걱정이 있음을 살피고 우송에게 물었고 우송은 사실로 대답하였다. 종회는 (표의 초안을) 가져와 보고서는 다섯 글자를 고쳤다. 우송은 기쁘게 승복하고는 이로써 사마경왕에게 바쳤는데 왕이 말하길


「마땅히 그대가 한 게 아닐 것이다. 누가 고쳐주었는가?」


우송이 말하길


「종회입니다. 방금 전 또한 말씀 드릴려고 했는데 공의 견문에 당하여 감히 그 능력을 탐할 수 없습니다. 」


왕이 말하길


「이와 같으면 크게 쓸 수 있다. 오도록 하라.」


종회는 우송에게 경왕이 능한 것을 물었는데 우송이 대답하길


「박학다식하여 궤뚫고 있지 않는 게 없습니다.


종회는 마침내 빈객을 거절하고 정밀하게 10일 동안 생각하여 아침에 들어가 경왕을 보고 2경(저녁 9시~11시)가 되어서 나왔다. (종회가) 나간 후에 왕은 홀로 손뼉을 치며 감탄하여 말하길


「저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왕을 보좌할 만한 인재이다.」


우송(虞松)은 자가 숙무(叔茂)이고 진류사람으로 구강태수 변양(邊讓)의 외손자이다. 우송은 약관에 재주가 있어 사마선왕을 따라 요동을 정벌하였는데 선왕은 그로 하여금 격문을 짓게 하였고 적을 격파하는데 이르러 노포(공고문)를 짓도록 하였다. 우송이 돌아오자 선왕은 연속으로 징벽하였고 당시 나이가 24세였으며 중서랑으로 옮기고 마침 태수에 이르렀다. 우송의 아들은 우준()으로 자가 현홍(顯弘)이며 진나라의 정위를 지냈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종회는 명공의 아들로 명성이 일직부터 현저하였으며 약관에 등조하여 이미 현달한 지위를 역임하였는데 사마경왕의 재상이 되어 용납하는 것에 남김이 있어 바야흐로 우송의 표를 고친 이후에야 마침내 불러 만나게 되었겠습니까? 만약 먼저 서로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단지 다섯 글자를 보고 바로 크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비록 성인이라도 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사마경왕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고귀향공이 제위에 오른 후, 관내후의 작위를 그에게 하사했다.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군 사마경왕이 동쪽 정벌에 나섰는데, 종회는 종군하여 기밀 사무를 담당하였고, 위장군 사마문왕은 대군의 뒤쪽을 담당했다. 사마경왕이 허창에서 죽자, 사마문왕이 육군을 통솔하였고, 종회는 군마 안에서 작전을 짰다. 당시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상서 부하에게 명하여 동남쪽은 금방 평정되었으므로 위군장을 허창에 머물게 하여 중앙과 지방의 구원병이 되도록 하고, 부하는 군사들을 인솔하여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종회는 부하와 상의하여 부하로 하여금 표를 올리도록 하는 동시에 즉시 위장군과 함께 출발하여 낙수 남쪽으로 돌아가 주둔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사마문왕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정치를 보좌하도록 했으며, 종회는 황문시랑으로 승진시켜 무정후로 봉하고 식읍 3백호를 주었다.

감로 2년(257), 제갈탄을 불러 사공으로 삼았다. 그 당시 종회는 관직을 물러나 집에서 상을 치르고 있었는데 제갈탄이 반드시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재빨리 사마문왕에게 아뢰었다. 사마문왕은 일이 이미 시행되었으므로 다시 돌이켜 바꿀수 없었다. 


종회의 어머니의 전에 이르길: [[장창포전]]으로 분할


제갈탄이 반역을 하자, 황제는 항에 체류하였고, 사마문왕은 수춘에 도착하였고, 종회는 또 그를 따라갔다.

당초, 오나라 대장 전종은 손권의 인척이며 손권 수하의 중요한 대신이었다. 전종의 아들 전역, 손자 전정, 조카 전단, 전편, 전집등은 모두 병사를 이끌고 와서 제갈탄을 구원했다. 전역의 형의 아들 전휘와 전의는 건업에 남아 있었는데, 그 가족들 사이에 싸움이 나서 소송을 하게 되어 모친을 모시고 수십 명의 부하를 인솔하여 장강을 건너 사사로이 사문왕에게 귀순했다. 종회는 계획을 세우고 비밀리에 전휘와 전의를 위해 편지를 써서, 전휘와 전의로 하여금 가까이 신임하는 자에게 편지를 갖고 성으로 들어가 전역 등에게 말하도록 하였다. 그 편지에는 오나라 내부에서는 전역등이 수춘을 공격하여 이길 수 없음에 대해 노하여 장수들의 가족을 모두 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도망쳐 귀순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역등은 두려웠으므로 수하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동쪽 성문을 열고 나와 투항했다. 그들은 모두 작위에 봉해지고 총애를 받았으며,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로부터 괴리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수춘이 격파된 것은 종회의 계책이 큰 몫을 하였으므로, 사마문왕은 날이 갈수록 종회를 더욱 후하게 대접하고 중요시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자방이라고 불렀다. 군대가 돌아오자, 태복으로 승진되었으나,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중랑의 신분으로 대장군의 부서에서 기실의 일을 담당하며 대장군의 심복이 되어 긴요한 직책을 맡았다. 종회는 제갈탄을 토벌한 공으로 나아가 진후의 작위를 받게 되었는데, 누차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종회는 군사(軍事)를 협동하여 관장하고 계책을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적병의 상황을 예측하여 승리를 얻었으니 계책에 의한 공이 있는데 은총을 강력히 사양하고 있다. 그 사양하는 말과 마음이 간절하고 독실하다. 앞뒤로 여러 차례 봉하였지만 그의 의지를 바꿀 수 없었다. 무릇 성공한 후에 오만한 곳에 있지 않는 것은 옛 사람이 중시했던 것이다. 종회의 완고한 주장에 따라서 그의 미덕을 이루도록 하겠다."

사예교위로 승진시켰다. 비록 지방관리로 있었지만, 당시 정치상의 감소와 증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익 혹은 불이익을 주었으므로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혜강 등이 처형되었던 것도, 모두 종회의 계책 이였다.

사마문왕은 촉나라의 대장 강유가 변방지역을 자주 소란하게 하자, 촉나라의 국토는 작고 백성들은 피곤에 지쳐 있으며, 자원과 재력은 매우 적어 다 썼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병사를 대거 출동시켜 촉나라를 취하려고 했다. 오직 종회만이 역시 촉나라를 취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으므로 함께 촉의 지형을 조사하고 당시의 형세를 연구하고 논하였다.

경원 3년(262) 겨울, 종회를 진서장군, 가절도독관중제군사로 임명하였다. 사마문왕이 청주, 서주, 연주, 예주, 형주, 양주 모든 주에 명령을 내려서 함께 배를 만들도록 했으며, 또 당자에게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큰 배를 만들도록 명령했는데 외무에서는 오나라를 토벌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원 4년(263) 가을, 조서를 내려 등애와 제갈서에게 각기 3만여 명의 병사를 통솔하도록 명령을 했으며, 등애는 감송과 답중 일대로 곧장 가서 강유와 교전하며 견제하였고, 제갈서는 무가와 교두로 가서 강유의 돌아갈 길을 끊어 노았다.

종회는 10만여 병사를 인솔하여 사곡과 낙곡으로 나누어 들어갔다. 우선 아문장 허의에게 앞쪽에서 길을 닦아 열도록 하고 종회에게는 뒤쪽에서 따라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랑이 파괴되어 말의 발이 빠졌으므로 허의가 죽게 되었다. 허의는 허저의 아들로, 왕실에 공훈이 있었지만, 용서받지는 못했다. 군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다.

촉나라는 각 보루에 주둔해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모두 싸우지 말고 물러나 한과 낙 두성으로 돌아와 지키라고 했다. 위흥태수 유흠은 자오곡으로 달려갔고, 기타 각 군은 몇 갈래길로 나란히 진군하여 한중에 도착했다. 촉나라의 감군 왕함은 악성을 지켰고 호군 장무는 한성을 지켰는데 각각 병사가 5천명씩 있었다. 종회는 호군 순개와 전장군 이보로 하여금 각기 1만 명을 통솔하도록 했다. 순개는 한성을 포위하고 이보는 악성을 포위했다. 종회는 길을 지나 서쪽으로 양안구로 와서 사람을 보내 제갈양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호군 호열등으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 관성을 공격하여 격파하게 하고 창고 속에 쌓아놓은 곡식을 얻었다.

강유는 답중에서 돌아와 음평에 도착하여서 병사들을 모아 합쳐서 관성으로 가려고 했다. 미처 도착하기 전에 관성이 이미 격파되었다는 것을 듣고 물러나 백수로 가서 촉나라 장수 장익, 요화등과 공동으로 검각을 지키며 종회에게 대항했다. 종회는 촉나라의 장수, 관리, 선비 등을 포로로 잡고 말했다.

"과거 한대의 제운은 쇠약해졌고 통솔한 영토는 분열되고 붕괴 되었으며 백성들의 생명은 거의 소멸되었습니다. 태조 무황제는 신같은 무예와 신성한 재능을 갖고 있었으므로 혼란을 제압하여 바르게 돌려놓아 무너져가는 제운을 구제하고 중화의 땅에 안정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고조 문황제는 천의와 민심에 순응하여 천명을 받아 제위에 즉위했습니다. 열조 명황제는 광채를 발휘하여 국가의 대업을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위나라의 강산 밖에는 여전히 다른 정부와 다른 풍속이 있어서 그곳의 국토와 백성들은 왕화를 아직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태조, 고조, 열조께서 걱정하며 한을 남겼던 일입니다."

"지금 주상은 성덕을 갖고 몸을 삼가고 이치에 한하여 전인들의 사업을 계승하고 융성하게 하였으며, 조정의 재상과 보필하는 신하는 공경스럽고 엄숙하고 현명하고 마땅하며, 왕실을 위해 수고로우며 정사를 시행하여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고 있기 때문에 국내 모든 곳이 단결되고 평화스럽고, 변방의 이민족에게 덕을 펴서 숙신조차도 공물을 바칩니다. 황제께서는 파와 촉이 독자적으로 행사하여 백성이 아님을 가슴 아파하고, 이곳 백성들의 노역이 끝나지 않음을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육군에게 명령을 하여 하늘의 정벌을 공경스레 집행하게 하고, 정서, 융주, 진서 각 군대에게 다섯 갈래의 길로 나란히 진군하게 했습니다."

"고대에 군사를 진군시킬 때에는 인을 근본으로 하고 의로써 다스렸습니다. 왕되는 자의 군대는 출정은 하지만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때문에 우순은 방패와 도끼를 휘둘러 유묘를 항복시켰고, 주무는 재산을 흩어지게 하고 국고의 양식을 풀어 마을의 인의를 나타냈습니다. 지금 진서장군은 천자의 명령을 받들어 대군을 대신 지휘하고 있는데, 포고에 따라 널리 가르쳐 백성들의 생명을 구제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니, 무력을 다하여 전투를 하지 않아야만 하루 아침에 정치적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안전과 위급함이 되는 점을 간단히 진술하였으니 저의 말을 경청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익주의 선주는 당대의 영제로 저명하며 북방의 평야에서 병사를 일으켰지만, 기주와 서주의 교외가 곤란하게 되고, 원소와 여포의 손에 운명이 쥐어졌던 것을 조조가 구출하여 도와주었으므로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중간에 다시 조조에게 등을 돌리고 같은 뜻을 지닌 친구를 버리고 따로 다른 쪽에 서게 되었습니다."

"제갈공명은 진천을 넘보고 강백약은 자주 농우로 병사를 내어 우리 변방을 피로하고 소란하게 하고 우리가 지배하는 저족과 강족을 침범하였는데, 마침 국가에 일이 많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구벌같은 싸움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변방지역은 진정되었으며 국내에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힘을 축척하여 때를 기다리며, 아울러 병사들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키고 있는데, 파와 촉은 한주의 병력을 분산시켜 수비하고 있으므로 천하의 군사를 제어하기는 어렵습니다."

"단곡과 후화는 싸움에서 패배하여 상심하고 사기가 떨어졌으므로 강대하고 당당한 적을 감당하기는 곤란합니다. 근년 이래로 일찍이 편안한 날이 없었으며, 출정하는 장부들은 피로와 고통 속에 있었으므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귀의하는 사람들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모두 현인들이 직접 보았던 것입니다. 촉나라 재상 장은 진나라에서 체포되었고 공손술은 한나라에서 머리를 배였으니, 구주의 위험은 한 성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현인들이 들었던 것입니다."

"총명한 사람들은 형체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을때 위험을 보고, 지혜로운 사람은 싹이 트지 않았을 때 화를 압니다. 때문에 미자는 상을 떠나 오랫동안 주나라의 빈객이 되었으며, 진평은 항우를 떠나 한나라에서 공을 세웠던 것입니다. 어찌 안락한 독주에 심취하여 봉록을 생각하고 변화를 기도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위나라 조정은 하늘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고, 보필을 담당한 재상들은 너그럽고 동정심이 많은 덕성을 널리 시행하여 먼저 흔혜를 준 연후에 형벌에 처하고, 생명을 좋아하고 살육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과거 오나라 장수 손일이 백성을 움직여 귀순하게 하여 상사의 관직에 임명하였으며, 받은 총애는 그의 직위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문흠과 당자는 국가의 커다란 해가 되어 군주를 모반하여 적이 되었고, 또 오나라에 투항하여 적군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당자는 포위되어 체포되었고, 문흠의 두 아들은 귀순하여 투항했는데, 모두 장군으로 임명되고 제후로 봉해졌으며, 당자는 국사에 참여하여 듣고 있습니다. 손일 등은 곤궁하여 귀순하였지만 오히려 깊은 은총을 받았는데, 하물며 파와 촉의 현인지사 중 시기를 보고 행동 한 자야!"

"진실로 성공과 실패를 깊이 고찰하여 명사처럼 몸을 멀리 던져 마자의 자취를 따르고, 몸을 진평이 일을 한 궤도 속에 두면 고인과 같이 복을 받고, 후대 자손들에게까지 행복이 전해질 것이며, 백성과 관리들은 모두 안정되게 거주하며 원래의 일에 종사하여 농민들은 자기의 논을 바꾸지 않고, 상인은 자신의 점포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계란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은 위험이 제거되어 영원히 안정되고 복을 누리게 될 텐데,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만일 하루의 편안함을 탐하여 미혹된 상태로 깨닫지 못하고 귀순하지 않고 병사들이 발동하면 옥석은 모두 부서지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것을 후회한다고 하더라도 또 미치지 못합니다. 이익과 해로움을 상세하게 분석하여 스스로 많은 행복을 구해야 합니다. 지금 이런 것을 선포하여 모든 사람들이 듣고 알게 하십시오."

등애는 강유를 좇아 음평으로 가서 정예병사를 선발하여 한덕양으로부터 강유와 좌담도로 들어가 면죽으로 가서 직접 성도로 향하여 제갈서와 함께 전진하려고 했다. 제갈서는 본래 강유와 교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서쪽으로 진군하는 것은 본래의 명령이 아니었는데, 그대로 백수로 진군하여 나아가 종회와 합쳤다. 종회는 장군 전장등을 파견하여 검각 서쪽으로부터 강유에게 나가도록 했다. 백 리를 이르지 못한 지점에서 전장은 우선 촉나라의 보병 세부대를 격파했다. 등애는 전장에게 앞에 서서 가도록 했다. 그래서 말을 타고 오랫동안 멀리 달려 앞으로 향했다. 종회와 제갈서의 군대는 검각으로 향했다.

종회는 독자적으로 군대를 장악하려고 제갈서가 두려워하며 전진하지 않는다는 상소를 몰래 올렸다. 조정에서는 죄인용 수레로 제갈서(諸葛)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군대는 전부 종회에게 귀속되었다.


백관명(百官名)을 살피니 : 제갈서(諸葛)는 진(晉)으로 돌아와 태상숭례위위(太常崇禮衛尉)가 되었다. 아들은 제갈충(諸葛沖)으로 조정에서 벼슬을 하였다.
# 太常崇禮衛尉 : 벼슬이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세설신어를 살피니 [ 入晉為太常 、 崇禮衛尉 ,見鍾會傳注引百官名 ] 으로 나온다.


순작연주기(荀綽兗州記) : 제갈충(諸葛)의 아들은 제갈전(諸葛詮)으로 자는 덕림(德林)이며,  제갈매(諸葛玫)의 자는 인림(仁林)이다. 둘은 모두 널리 이름을 알렸다.

제갈전은 연주자사(兗州刺史), 제갈매는 시중어사중승(侍中御史中丞)의 벼슬을 하였다.


종회는 나아가 검각을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으므로 병사들을 안솔하여 물러났다.

촉나라 군사는 요충지를 보존하며 저항하였다. 등애는 곧 면죽으로 갔다. 쌍방이 대전을 벌여서 제갈첨을 죽였다. 강유 등은 제갈첨이 이미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인솔하여 동쪽, 파로 들어갔다. 종회는 곧 부까지 진군하여 호열, 전속, 방회들을 파견하여 강유를 추격하도록 했다. 등애는 군사를 성도로 진군시켰다. 유선은 등애에게로 가서 투항하였으며, 강유 등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종회에게 투항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강유는 광한군 처현까지 와서 병사들에게 모두 병기를 버리라고 명령하고, 부절과 전거를 호열에게 보내고, 동쪽 길로부터 종회에게로 가서 투항했다. 종회는 상소를 올려 말했다.

"적군 강유, 장익, 요화, 동궐 등은 목숨을 위해 도주하여 성도로 가려고 했습니다. 신이 즉시 사마 하후함과 호군 호열등을 파견하여 검각으로부터 신도, 대도를 나와 그들의 앞길을 끊게 하고, 참군 원청, 장군 구안등에게 뒤를 따르도록 했으며, 참군 황보개, 장군 왕매등은 부의 남쪽에서 병사를 내어 그의 복부를 뜷고 신은 부현을 점거하여 동서의 군대에 지원을 했습니다."

"강유 등이 통솔하는 보병과 기병 4, 5만 명은 갑옷을 두르고 예리한 칼을 들고 산천을 막고 계곡을 막아 수백 리에 걸쳐 앞과 뒤가 서로 이어져 있었으므로 그의 많은 병력에 기대에 궤도를 따라 서쪽으로 행군했습니다. 신은 하후함과 황보개 등에게 병사를 나누어 유리한 지세를 점거하여 그물망을 넓게 하고, 남쪽으로는 오나라로 달아나는 길을 막으며, 북쪽으로는 국외로 탈주하는 길을 막고, 사방으로부터 군사를 집결시켜 앞과 뒤가 나란히 나아가서 작은 길을 모두 단절시켜 달아나 숨을 곳이 없도록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신은 또 직접 편지를 써서 설득을 하고, 살 길을 열어 줄 것을 나타냈습니다. 적은 어려움에 처하여 운명이 끝나가고 수가 다했음을 알고 갑옷을 벗고 병기를 던지고 스스로 결박을 하여 인질이 되어서 귀순할 의사를 나타냈고, 바친 인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물자와 병기는 산처럼 쌓였습니다."

"옛날에 순이 방패와 도끼를 휘두르며 춤을 추자 유모가 자연스럽게 복종했고, 목아의 군대는 상왕조의 병사들에게 창을 거꾸로 들게 했습니다. 정벌은 있었지만 싸우지 않은 것은 제왕의 성업인 것입니다. 아군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상책이고, 적군을 파괴하는 것이 하책입니다 ㅡ《손자》<모공편(謀攻篇)>. 이것은 병사를 사용하는 법칙입니다."

"폐하께서는 성명하고 덕이 있으시니, 전대 제왕의 자취를 찾을수 있고 보좌하는 신하들은 충성스럽고 현명하므로 주공단과 나란히 견줄 수 있으며, 인덕으로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예의로 반역자를 징벌할 수 있습니다. 풍속이 다른 곳 또한 교화로 돌아오게 하면 복종하지 않으려고 생각하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출동하는 군대는 규정된 시간을 넘기지 않고, 병기는 예리한 칼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며, 만리가 똑같은 풍속을 갖고 구주가 함께 통일 되었습니다. 신은 직시 조서로서 내린 명령을 받들어 선포하여 제왕의 은덕과 교화를 계도하고 선양하여 사직을 회복하고, 마을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세금을 면제하고 그들의 병역과 부역을 줄이고, 그들에게 예의와 도덕을 가르쳐 그 풍속을 바꾸고 지키는 규범을 나타내어 그 습속을 바꾼 결과, 백성들은 즐거워하고 안락해 하며, 후에 소생하게 된 것은 도의로부터 죄를 벌하지 않은 것입니다."

종회는 그래서 군사들을 엄격히 살펴 침략하여 약탈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겸허하게 하여서 적을 불러들임으로써 촉나라의 관료들과 교분을 맺었고 강유와의 감정도 매우 좋았다. 


世語曰:夏侯霸奔蜀,蜀朝問「司馬公如何德」?霸曰:「自當作家門。」「京師俊士」?曰:「有鍾士季,其人管朝政,吳、蜀之憂也。」

세어에 이르길 :하후패(
夏侯霸)가 촉으로 도망쳤는데 촉의 조정에서 묻길 「사마공은 무슨 덕을 지녔는가?」하니 하후패가 대답하길 「스스로 응당 가문을 이룰 만 합니다.」 「경사의 준사는 어떠한가?」하니 대답하길 「종사계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조정을 관장하는 것은 오촉의 걱정거리입니다.」


漢晉春秋曰:初,夏侯霸降蜀,姜維問之曰:「司馬懿既得彼政,當復有征伐之志不?」霸曰:「彼方營立家門,未遑外事。有鍾士季者,其人雖少,終為吳、蜀之憂,然非非常之人亦不能用也。」後十五年而會果滅蜀。

按習鑿齒此言,非出他書,故採用世語而附益也。

한진춘추에 이르길 : 당초 하후패가 촉에 항복하였을 때 강유가 물어 말하길 「사마의가 이미 그곳의 정권을 얻었으니 응당 다시 정벌하고자 하는 뜻이 있는가?」하니 하후패가 말하길 「그 쪽은 가문을 경영하고 세우느라 바깥일에 신경쓸 수 없습니다. 종사계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됨이 비록 어려도 끝내 오,촉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다만 비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를) 쓸 수 없습니다.」15년 후에 종회는 마침내 촉을 멸망 시켰다.

생각건대(배송지의 의견) 습착치의 이 말은 다른 책에서 나온게 아니고 세어를 채용하면서 덧붙여 늘린 것이다.


12월 조서를 내렸다.

"종회가 향하는 곳마다 붕괴되고 황해되어 이전에는 강한 적이 없었으므로 적의 성을 포위하여 제압하고 그물망을 펴 흩어져 달아나는 패전병을 사로 잡았다. 촉나라의 뛰어난 지휘관이 스스로 결박을 하고 투항해왔다. 계획을 세무에 있어서는 빠뜨리거나 과실이 없고, 정벌을 함에 있어서는 성공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무릇 싸움에서는 온갖 계책을 사용해 싸워서 전부 승리하여 실패한 적이 없고, 정벌을 할 경우 실제로 전투는 하지 않았다. 중국의 서쪽 지역을 개척하여 평정하여 사방이 모두 안정되었다. 종회를 사도로 임명하고, 작위를 승진시켜 현후로 봉하며, 식읍 1만 호를 더하겠다. 아들 두 명을 정후로 봉하고 각기 식읍을 천 호씩 주어라."

종회는 내심 모반할 마음이 있었는데, 등애가 황제의 명령을 이어받아 정권을 휘둘러 군사적인 일을 처리하였으므로 은밀히 상소를 올려 등애가 모반할 조짐이 있다고 말했다.


世語曰:會善效人書,於劍閣要艾章表白事,皆易其言,令辭指悖傲,多自矜伐。又毀文王報書,手作以疑之也。

세어에 이르길 : 종회는 다른 사람의 서체를 잘 모방하여 검각에서 등애의 장표,백사를 가로채 모두 그 말을 바꿔놔 언사가 불손하고 교만하여 스스로의 공을 많이 자랑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문왕의 답서를 훼손하고 자신의 수작으로 대신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래서 조서를 내려 죄인용 수레로 등애를 돌아오도록 불렀다.

사마문왕은 등애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고 걱정하고 종회에게 명령을 내려서 함께 성도로 진군하도록 하고, 감군 위관에게 종회 앞에서 진군하도록 했으며, 사마문왕의 친필로 쓴 명령서를 갖고 등애의 군대를 설득하도록 했다. 등애가 인솔하는 모든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곧 등애를 체포하여 죄인용 수레 안에 들어가게 했다. 종회가 꺼렸던 것은 오직 등애뿐이었는데, 등애가 이미 붙잡혔으므로 종회는 즉시 성도에 도착하여 독자적으로 대군을 통솔하여 그 위세는 서쪽 변방 지역을 진동시켰다.

그는 스스로 공명이 세상을 덮는 것은 다름 사람 밑에서는 다시는 있을 수 없고, 게다가 용맹한 장수와 정예 병사들이 모두 자기 수하에 있다고 말하고 곧 모반을 계획했다. 그는 강유 등으로 하여금 모두 촉나라 명사를 인솔하여 사곡을 나가도록 하고, 종회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뒤를 따르려고 했다. 장안에 도착한 후 종회는 기병은 육지로 행군하도록 하고, 보병은 수로로 흘러내려와 위수로부터 황하로 들어가도록 하여, 닷새만에 맹진에 도착하게 하여 기병과 낙양에서 합쳐 하루아침에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회가 받은 사마문왕의 편지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등애가 혹시 부름을 받고 나가지 않을까 걱정이오. 지금 중호군 가충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만 명을 이끌고 사곡으로 들어가서 악성에 주둔하도록 하시오. 나는 10만 명을 인솔하여 장안에 주둔하겠소. 가까운 시일에 만납시다."

종회는 편지를 받고 놀라 가까이 하는 사람을 불러서 말했다.

"단지 등애만을 잡는다면, 상국은 내가 혼자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오. 현재 나의 세력이 무거워지자, 그는 틀림없이 내가 다른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오. 속히 행동을 해야겠소. 만일 일이 성공한다면 천하를 얻을 수 있지만, 일이 성공하지 못하여 물러나서 촉한을 보존한다면, 유비가 되는 조건을 잃지 않을 것이오. 나는 회남에서 군사적인 일에 참여한 이래로 계획을 세워 실책을 범한 적이 없었는데, 이것은 사해가 모두 알고 있는 것이오. 나는 이것에 의지하여 안전하게 돌아가려 하오!"

종회는 5년(263) 정월 15일에 성도에 도착했다. 그 다음날, 호눅, 군수, 아문가독 이상 및 촉나라의 옛날 관리들을 모두 초청하여 촉나라 조정에서 태후의 상을 당했음을 발표하였다. 태후가 남긴 조서를 거짓으로 만들어 종회에게 병사를 일으켜 사마문왕을 폐하도록 했다고 하고, 위조된 조서를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전부 보여주고 아랫사람에게 의논을 끝내게 한 뒤 목판에 쓴 증서로 관직을 임명하였으며, 또 신임하는 사람들을 파견하여 각 군대를 대신 관리하도록 하였다.

초대된 관리들은 익주 관서에 모두 가두고 성문과 궁문을 모두 닫고 병사들에게 엄하게 포위하여 지키도록 했다. 종회의 장하독 구건은 본래 호염의 부하였는데, 호염이 그를 사마문왕에게 추천하였고, 종회는 사마문왕에게 구건이 자기를 따르게 해달라고 정하여 그를 매우 신임하고 아꼈다. 구건은 호열이 혼자 구금된 것을 뿔쌍히 여기고 종회를 만나서 친병을 안으로 들여보내 음식을 나르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각 아문의 병사 또한 그 예에 따라 한 명씩 드나들었다. 호열은 그의 친병에게 말하여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구건이 소식을 몰래 전해 주었다. 종회는 이미 큰 굴을 뜷었고, 수천 개나 되는 흰 몽둥이를 준비하여 외부에 있는 병사들을 모두 벌러 들어오게 하여 사람들마다 깁으로 만든 흰 두건을 주어 산장으로 삼아 순서대로 몽둥이로 때려 죽여 굴 속에 던지려 한다."

각 아문의 친병 또한 모두 이와 같은 말을 하였고, 하룻밤 사이에 서로 말을 전하여 전원에게 알려졌다. 어떤 사람이 종회에게 말했다.

"아문기독 이상을 전부 죽여야 합니다."

종회는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18일 정오, 호열의 병사와 호열의 아들이 북을 올리며 문을 나서자, 각 진영의 군사들은 약속을 갖지 않았는데도 모두 북을 울리며 함성을 지르고 나왔으며, 일찍이 지휘하는 자가 없는데도 다투어 성으로 먼저 달려갔다. 그 당시 마침 강유에게 무기를 주고 있었는데 밖에 혼란스러운 소리가 큰 불길처럼 일고 있다고 보고하는 자가 있었다. 오래지 않아 병사들이 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종회는 놀라서 강유에게 말했다.

'이 병사들이 와서 나쁜 행동을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오?'

강유가 말했다.

'그들을 공격하는 것뿐입니다.'

종회는 병사를 파견하여 붙잡혀 있는 아문과 군수를 죽이도록 했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기물을 들어 문을 부수고, 사병들은 대문을 부수었으므로 격파할 수 없었다. 곧 성문 밖에서는 사다리에 의지하여 성이 어지럽게 진입하였고, 쏘아대는 화살은 비오듯 했으며, 아문과 군수들은 각기 흩어져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서 그들의 부하 병사들과 합류했다. 강유는 종회의 의병을 이끌고 싸워 대여섯 명을 직접 죽였다. 병사들은 강유와 결투하여 죽이고 다투어 달려가서 종회를 죽였다. 종회는 당시 마흔 살이었고, 수백 명의 장수들이 살해되었다.


진제공찬에서 이르길: 호열(胡烈)의 아들의 이름은 연(淵)이고, 자는 세원(世元)이다. 호준(胡遵)의 손자이다. 


호준은 안정사람으로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였다. 여러 번진(藩鎮)에 거주하며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이른다. 


#藩鎮 : 한어사전을 보면 허정전과 육개전을 예를 들어, 地方方面长官 또는 藩卫镇抚로 해석하므로, 여러 지방의 치안을 담당한 것으로 보면 될 듯 싶습니다.


아들은 호분(胡奮)으로 자는 현위(玄威)이다. 같은 임무를 맡았다. 


#方任 : 호삼성이 말하길 方面之任也 이라고 하니, 그 아버지와 같은 임무를 맡았다고 보면 될 듯 싶습니다.


딸은 진무제의 귀인으로, 총애를 받았다. 태강(太康 280~289)중에 호분은 상서복야(尚書僕射)에 진군대장군(鎮軍大將軍)을 더해 부서를 열었다.


동생은 호광(胡廣)으로 자는 선조(宣祖)이며,소부(少府)에서 일했다. 다음 동생은(次) 호열(胡烈)로 자는 현무(玄武)이며 진주자사(秦州刺史)이다.


다음 동생은(次) 호기(胡岐)이며,자는 현의(玄嶷)이며 병주자사(并州刺史)이다. 호광의 아들은 호희(胡喜)이며 량주자사(涼州刺史)이다.

당초, 등애는 태위로 임명되고 종회는 사도로 임명되었으며, 지절, 도독제군은 옛날과 같았는데, 모두 정식으로 임명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종회의 형 종육은 4년 겨울에 죽었는데, 종회는 그것을 알지 못해 조문을 못했다. 종회의 형의 아들인 종옹은 종회를 수행하다가 함께 죽었다. 종회가 기른 형의 아들 종의 및 종준, 종천등은 하옥되었으며, 당연히 참수되어야만 했다. 사마문왕은 천자에게 상주했다. 천자가 조서를 내렸다.

"종준 등의 조부 종요는 세 조대의 시대에 최고의 직위인 태사에 임명되었으며 군주를 보좌하여 공훈을 세웠으므로 종묘에서 제사를 받고 있다. 그들의 부친 종육은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일을 처리하는 데 공적이 있었다. 옛날 초나라는 자문이 다스린 공로를 생각하여 무씨의 제사를 끊어지지 않게 했고, 진나라는 성선의 충성심을 기록하여 조씨의 후대를 보존시켰다. 종회와 종옹의 죄로써 종요와 종육의 후대를 끊어야 하다니, 나는 착잡한 심정이다. 종준과 종산형제를 특별히 용서하여 관직과 작위를 옛날과 같게 하라. 단지 종의와 종웅의 자손들만은 법에 따라 처형하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종육은 일찍이 사마문왕에게 종회는 책략에 의지하여 뜻밖의 것을 지키기는 어려우므로 중요한 직책에 위임될 수 없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종산 등을 용서한 것이라고 했다.


漢晉春秋曰:文王嘉其忠亮,笑答毓曰:「若如卿言,必不以及宗矣。」    


한진춘추에 이르길 : 문왕은 그 충량을 가상하게 여겨 웃으며 종육에게 답하길 「만약 경의 말과 같다면 반드시 종족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다.」

당초, 사마문왕은 종회를 파견하여 촉을 토벌하려고 했는데, 서조의 관속 소제가 사마문왕의 접견을 청하여 말했다.

"지금 종회에게 10만의 병사를 인솔하여 촉나라를 토벌하도록 하라고 했는데,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는 종회를 단독으로는 중임을 다하지 못할 것이니, 다른 사람으로 그 일을 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문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어찌 또 이 점을 모르겠는가! 촉나라는 천하의 근심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히 쉬지 못하게 하오. 내가 지금 촉나라를 토벌하는 것은 손바닥에서 손가락 같은 것일 뿐이오. 사람들은 모두 촉나라를 토벌할 수 없다고 말하오. 무릇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주저하고 두려워하면 지혜와 용기는 모두 소멸되고, 적으로 하여금 강하게 하여 적에게 체포될 뿐이오."

"오직 종회만이 나의 의견과 같았으므로 오늘 종회를 파견하여 촉나라를 토벌하도록 하는 것이오. 그는 반드시 촉나라를 멸망시킬수 있소. 촉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그대가 걱정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었이겠소?  패배한 군대의 장수는 용감하다고 말할 수 없고, 나라를 잃은 대부는 그들과 생존을 도모할 수 없는데, 이것은 그들의 담이 무너졌기 때문이오."

"만일 촉나라가 격파된다면 유민은 놀라 두려워할 것이니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을 것이오. 중국의 장수와 병사들은 각자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 그들과 함께 난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오. 만일 사악한 일을 한다면 스스로 멸족을 초래하는 것이오. 그대는 이 일을 걱정하지 마시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알지 못 하도록 신중하시오."

종회가 등애의 불법적인 일을 고발했을 때, 사마문왕은 서쪽으로 오려고 했는데, 소제가 또 말했다.

"종회가 인솔하는 병사는 등애보다 대여섯 배는 되므로, 단지 종회에게 등애를 체포하도록 명령만 내리시면 되지 직접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마문왕이 말했다.

"그대는 지난번에 했던 말을 잊었소? 어떻게 또 출병하지 않을 수 있겠소? 비록 이와 같다 하더라도 이 말은 선언할 수가 없소. 나는 스스로 응당 신의로써 사람을 대해야 한다고 약속했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배반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오.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불충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을 의심할 수 있겠소!"

"최근 가호군이 나에게 질문을 하여 말하기를 '종회를 약간 의심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여, 나는 대답하기를 '지금 그대를 파견하여 일을 하도록 하고, 어찌 또 그대를 의심할 수 있겠소?'라고 대답했소. 가호군 역시 나에게 아무말도 못했소. 내가 장안에 도착하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오."

대군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 종회는 과연 이미 죽었고, 모든 것이 예상했던 것과 같았다.


함희원년 백관명을 살피니, 소제(邵悌)의 자는 원백(元伯)이며, 양평 사람이다.


漢晉春秋曰:文王聞鍾會功曹向雄之收葬會也,召而責之曰:「往者王經之死,卿哭于東市而我不問,今鍾會躬為叛逆而又 輒收葬,若復相容,其如王法何!」雄曰:「昔先王掩骼埋胔,仁流朽骨,當時豈先卜其功罪而後收葬哉?今王誅既加,於法已備,雄感義收葬,教亦無闕。法立於上,教弘於下,以此訓物,雄曰可矣!何必使雄背死違生,以立於時。殿下讎對枯骨,捐之中野,百歲之後,為臧獲所笑,豈仁賢所掩哉?」王悅,與宴談而遣之。

習鑿齒曰;向伯茂可謂勇於蹈義也,哭王經而哀感市人,葬鍾會而義動明主,彼皆忠烈奮勁,知死而往,非存生也。況使經、會處世,或身在急難,而有不赴者乎? 故尋其奉死之心,可以見事生之情,覽其忠貞之節,足以愧背義之士矣。王加禮而遣,可謂明達。

한진춘추에 이르길 : 문왕이 종회의 공조 상웅(
向雄)이 종회를 거두어 장사지내줬다는 것을 듣고는 불러 책망하여 말하길


「전날 왕경(王經)이 죽었을 때에 경이 동시에서 곡을 해도 나는 묻지 않았는데 지금 종회는 친히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다시 거두어 장사를 지내줬다니 만약 다시 서로 용납한다면 왕법이 있어 무엇 하겠는가!」


상웅이 말하길


「옛날 선왕은 죽은 시체를 매장해줬으니 인자함이 썩은 뼈에도 흘렀는데 당시에 어찌 미리 그 공로와 죄상을 따져보고 거두어 매장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왕의 주벌이 이미 가해졌고 법도에 있어 이미 완비되어 웅(상웅)은 의로움이라 여겨 거두어 매장한 것이지 정교에 있어 또한 흠결이 없습니다. 법도는 위에서 세워지고 정교는 아래에서 드넓게 펼쳐지는데 이로써 만물을 가르친다면 웅은 올바르다고 여깁니다. 어찌하여 반드시 웅으로 하여금 죽은 이를 배반하고 산 사람을 어기게 하여 이로써 당시에 서도록 하는 것입니까. 전하께서 썩은 뼈와 대적하여 원수로 여겨 들판 한 가운데다 버리면 백년후에 비천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실 것이니 어찌 인자와 현명함이 가리워질 수 있겠습니까?」


라 하니 왕이 기뻐하며 연회에서 더불어 이야기하고 보내 주었다.

습착치가 말하길 ; 상백무는 가히 의로움을 실천하는데 용감하다고 말할 만하다. 왕경에게 곡하고 애통함이 시장의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종회를 매장하고 의로움이 밝은 군주를 움직였다. 저는 모두 충렬이 굳세게 떨쳐 죽음을 알고서도 나아간 것으로 사는 것에 (뜻을 둔 것이) 아니다. 하물며 가령 왕경과 종회가 세상을 사는데 있어 몸이 갑작스러운 난을 만났다면 달려가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그 죽음을 받드는 마음을 찾아보면 가히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는 감정을 알 수 있고 충정한 절개를 보면 족히 의로움을 저버리는 선비를 부끄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왕이 예법을 더해 보내니 가히 명달하다고 할 만 하다.


종회는 일찍이 《역경》에 호체와 재성의 이동이 없는 것에 대해 논한적이 있었다. 종회가 죽은 이후, 종회의 집에서 서적 20편을 얻었는데 제목을 《도론》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형명가의 저작이었으며, 그 글이 종회가 쓴 것과 비슷하였다. 이전에 종회가 어렸을 때, 산양의 왕필(王弼)과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왕필은 유가와 도가의 이치에 대한 논의를 좋아했으며, 문필이 좋고 예능이 있고 변론을 좋아했고, 《역경》과 《노자》에 주를 달았고, 일찍이 상서랑에 임명되었으며 20여 세에 세상을 떠났다.


왕필(王弼)의 자는 보사(輔嗣)이다. 하소가 그의 전을 지어 이르길: [[왕필전]]으로 분할


평하여 말한다.


왕릉은 고상한 품격과 절개가 있었고, 관구검은 재능과 식견이 탁월했으며, 제갈탄은 엄숙하고 강인하여 위엄이 있고, 종회는 숙련된 책략가였으니, 이들 모두 이름을 빛내어 영예와 중임을 받았다. 그러나 모두 마음속의 큰 뜻이 지나쳐 화근과 혼란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기회를 잡아 신속하게 사변을 일으켜 일가 친척이 모두 죽게 했으니, 어찌 큰 잘못과 미혹이 아니겠는가! 등애는 강인하고 건장하여 공을 세우고 사업을 일으켰지만, 화를 방비하려는 생각이 부족하여 실패와 과실이 찾아오게 만들었다. 어찌 먼 곳에 있는 제갈서가 실패한 원인은 알면서 가까이 자기의 처지는 볼 수 없었는가? 이는 옛 사람이, 눈은 큰 털은 볼 수 있지만 자신의 눈썹은 보지 못한다고 말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史記曰:越王無疆與中國爭彊,當楚威王時,越北伐齊,齊威王使人說越云,越王不納。齊使者曰:「幸也,越之不亡也。吾不貴其用智之如目,目見毫毛而不自見其睫也。今王知晉之失計,不自知越之過,是目論也。」

사기에 이르길 : 월왕 무강의 통치시기에 중국과 다퉜는데 초나라 위왕의 통치시기에 월나라가 제나라를 북벌하였다. 제나라 위왕은 사신을 보내 월왕을 설득하였는데 월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나라의 사자가 말하길 「다행입니다. 월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저는 지혜를 사용하는 것이 눈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데 눈은 미세한 터럭을 볼 수 있지만 스스로의 속눈썹은 보지 못하는 법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진나라의 실책을 알고 있지만 스스로 월나라의 잘못은 모르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목론(目論: 앞에서 말한 눈 이야기)입니다.」

분류 :
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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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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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5.23
12:10:46
(*.0.203.45)

손개->순개 오타 수정

코렐솔라

2013.07.23
00:34:00
(*.52.89.87)
주석 추가

KM학생

2013.08.02
15:45:34
(*.100.108.153)
주석들은 미번역된건가요?

코렐솔라

2013.08.02
15:46:02
(*.52.91.73)
네, 그렇습니다.

KM학생

2013.08.02
15:46:59
(*.100.108.153)
아쉽군요..

구라뱅뱅

2013.08.04
15:16:38
(*.49.168.253)
臣松之按:鍾繇于時老矣, 而方納正室。蓋禮所云宗子雖七十無無主婦之義也。
이거에 대해서 살펴봤는데, 제가 번역이 딸려서 참 어렵네요.
우선 배송지의 의견이고, 대략 적으로
鍾繇于時老矣 : 종요가 노인이 되었을때를 말하는 듯 싶으며
而方納正室 : 正室(정실:본처)을 들였다는 것을 말하는 듯
蓋禮所云宗子雖七十無無主婦之義也。
이는 禮記에 나오는 것으로
孔子曰
宗子雖七十無無主婦
非宗子雖無主婦可也
공자 왈
종자(종가宗家의 맏아들)는 나이가 비록 70이 되었더라도 주부(한 집안의 주인의 아내. 즉, 안주인)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종자가 아니면 주부가 없어도 무방하다

앞부분을 번역해야 맞는지 보겠지만, 늙어서 正室을 들인것을, 대게 예의로 말하길(蓋禮所云) "공자왈 부분" 의 의미이다. 라는 식의 내용인듯 싶네요.

코렐솔라

2013.08.04
15:25:21
(*.131.108.250)
종요가 80이 넘어서 죽었다는 것이 순유전 말고 여기서도 배송지는 같은 방식으로 주장했군요. 무슨 뜻인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으니 많은 분들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본문에 그대로 적기가 좀 그러니 댓글 상태로 남겨둘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구라뱅뱅

2013.08.04
15:27:55
(*.49.168.253)
네~ 누군가 잘 이쁘게 다듬어 주실듯요.

구라뱅뱅

2013.08.04
15:19:39
(*.49.168.253)
按咸熙元年百官名:邵悌字元伯,陽平人。
함희원년 백관명을 살피니, 소제(邵悌)의 자는 원백(元伯)이며, 양평 사람이다.

코렐솔라

2013.08.04
15:25:41
(*.131.108.250)
넵 바로 반영하겠습니다

구라뱅뱅

2013.08.05
10:04:33
(*.49.168.253)
按百官名:緒入晉為太常崇禮衛尉。子沖,廷尉。
백관명을 살피니 : (제갈)서는 진(晉)으로 돌아와 태상숭례위위(太常崇禮衛尉)가 되었다. 아들은 (제갈)충(沖)으로 조정에서 벼슬을 하였다.
# 太常崇禮衛尉 : 벼슬이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세설신어를 살피니 [ 入晉為太常 、 崇禮衛尉 ,見鍾會傳注引百官名 ] 으로 나온다.

荀綽兗州記曰:沖子詮,字德林,玫字仁林,並知名顯達。詮,兗州刺史。玫,侍中御史中丞。
순작연주기 : (제갈)충의 아들은 (제갈)전(詮)으로 자는 덕림(德林)이며, (제갈)매(玫)의 자는 인림(仁林)이다. 둘은 모두 널리 이름을 알렸다.
제갈전은 연주자사(兗州刺史), 제갈매는 시중어사중승(侍中御史中丞)의 벼슬을 하였다.

코렐솔라

2013.08.05
10:10:14
(*.52.91.73)
감사합니다. 바로 반영하겠습니다.

구라뱅뱅

2013.08.05
10:38:07
(*.49.168.253)
晉諸公贊曰:胡烈兒名淵,字世元,遵之孫也。遵,安定人,以才兼文武,累居藩鎮,至車騎將軍。子奮,字玄威,亦歷方任。女為晉武帝貴人,有寵。太康中,以奮 為尚書僕射,加鎮軍大將軍、開府。弟廣,字宣祖,少府。次烈,字玄武,秦州刺史。次岐,宇玄嶷,并州刺史。廣子喜,涼州刺史。

진제공찬 : 호열(胡烈)의 아명(兒名)은 연(淵)이고, 자는 세원(世元)이다. 호준(胡遵)의 손자이다.
호준은 안정사람으로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였다. 여러 藩鎮에 거주하며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이른다.
#藩鎮 : 한어사전을 보면 허정전과 육개전을 예를 들어, 地方方面长官 또는 藩卫镇抚로 해석하므로, 여러 지방의 치안을 담당한 것으로 보면 될 듯 싶습니다.
아들은 호분(胡奮)으로 자는 현위(玄威)이다. 같은 임무를 맡았다.
#方任 : 호삼성이 말하길 方面之任也 이라고 하니, 그 아버지와 같은 임무를 맡았다고 보면 될 듯 싶습니다.
딸은 진무제의 귀인으로, 총애를 받았다. 태강(太康 280~289)중에 호분은 상서복야(尚書僕射)에 진군대장군(鎮軍大將軍)을 더해 부서를 열었다.
동생은 호광(胡廣)으로 자는 선조(宣祖)이며,소부(少府)에서 일했다. 다음 동생은(次) 호열(胡烈)로 자는 현무(玄武)이며 진주자사(秦州刺史)이다. 다음 동생은(次) 호기(胡岐)이며,자는 현의(玄嶷)이며 병주자사(并州刺史)이다. 호광의 아들은 호희(胡喜)이며 량주자사(涼州刺史)이다.

코렐솔라

2013.08.16
09:45:51
(*.131.108.250)
헐, 이걸 놓쳤을 줄이야 죄송합니다 반영했습니다,

코렐솔라

2018.08.14
10:43:18
(*.112.38.51)
안녕하세요. 해당 번역에서 아명을 아들로 바꿔서 번역해야 한다는 의견이 들어왔습니다. http://rexhistoria.net/161532 혹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확인 후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구라뱅뱅

2018.08.15
13:44:13
(*.172.220.193)
맞네요. 호준-호열-호연 이네요.

코렐솔라

2018.08.17
11:10:20
(*.46.174.164)
넵, 반영하겠습니다.

코렐솔라

2016.02.01
02:33:22
(*.55.70.71)
장창포전은 따로 분리하였고 우송과 종회의 관계와 우송에 대한 짤막한 전( http://blog.naver.com/dragonrz/220612030737 ) 부분과 하후패가 종회를 경계하는 얘기, 상웅의 대화는 ( http://blog.naver.com/dragonrz/220613694453 ) dragonrz님 번역입니다. 감사합니다.

코렐솔라

2016.02.08
23:18:45
(*.55.70.71)
왕필전을 따로 분리하였고 마지막에 사기의 번역은 dragonrz님의 번역(http://blog.naver.com/dragonrz/220621451624)으로 이것으로 종회전의 모든 주석이 번역 완료되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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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촉서 촉서 목차 링크 재원 2013-07-08 180975
공지 위서 위서 목차 링크 [1] 재원 2013-06-29 189426
공지 오서 오서 목차 링크 [3] 재원 2013-06-28 136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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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 위서 동이전(1) 개요 재원 2013-05-04 8227
308 위서 가비능전 재원 2013-05-04 5408
307 위서 선비전 재원 2013-05-04 6039
306 위서 오환전 [2] 재원 2013-05-04 7188
» 위서 종회전 [19] 견초 2013-05-04 10566
304 위서 등애전 [4] 견초 2013-05-04 11587
303 위서 제갈탄전 [4] 견초 2013-05-04 7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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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위서 관구검전 [3] 재원 2013-05-04 10485
300 위서 왕릉전 [7] 견초 2013-05-04 6073
299 위서 왕기전 [4] 견초 2013-05-04 6027
298 위서 왕창전 [5] 견초 2013-05-04 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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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위서 서막전 [3] 견초 2013-05-04 5222
295 위서 곽회전 [2] 견초 2013-05-04 8130
294 위서 견초전 재원 2013-05-04 5658
293 위서 전예전 재원 2013-05-04 6809
292 위서 만총전 [4] 견초 2013-05-04 9528
291 위서 잔잠전 [1] 재원 2013-05-04 4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