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책(孫策)의 자는 백부(伯符)이다. 손견이 처음 의병(義兵)을 일으켰을 때, 손책은 모친을 데리고 서(舒)현으로 옮겨가서 살면서, 주유(周瑜)와 서로 친구가 되었고, 사대부들을 거둬 모으니, 장강과 회수 사이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주 :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길 「손견이 주전(朱儁)이 올린 표(表)에 의해 (그의) 좌군(佐軍)(사마)이 되자, 그의 일가는 남겨두어 수춘(壽春)에 정착하게 했다. 손책의 나이 10세 때, 이미 교우관계를 맺어 이름이 알려지고 그의 성예(聲譽)가 자자하였다. 주유라는 자는 손책과 동년배였는데, 또한 영달(英達)하고 숙성(夙成)하였는데 손책의 소문을 듣고, 서현에서 조언(造焉)으로 찾아왔다. 바로 우호관계를 맺으니, 그 우의가 쇠붙이도 끊을 만 하였다. 손책에게 서현으로 이주해 살 것을 권하니, 손책이 이 말을 따랐다.」라 한다.]

손견이 죽자(薨), 돌아와 곡아(曲阿)에 장사지냈다. (장례가) 끝나자 이내 장강을 건너 강도(江都)에 거처했다. 

[『위서(魏書)』에 이르길 「손책은 의당 후작 자리를 이어야 했으나, 동생 손광(孫匡)에게 양보해 주었다.」라 한다]

서주목 도겸(陶謙)은 손책을 매우 꺼려했다. 손책의 외숙 오경(吳景)이 이때 단양(丹楊)태수로 있었는데, 손책이 이에 모친을 모시고 곡아로 옮겨놓고, 여범(呂範), 손하(孫河)와 같이 오경에게 가면서, 이를 기화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수백 명을 얻었다.

흥평(興平) 원년(194), 원술을 따랐다. 원술이 그가 매우 뛰어나다 여겨 손견의 옛 부곡들을 손책에게 돌려주었다. 

[주 : 『오력(吳歷)』에 이르길 「처음 손책이 강도에 있을 때, 장굉(張紘)은 모친상을 지내고 있었다.

손책이 수차례 장굉을 찾아가 세상의 일에 관해 물으면서 말하길 

“바야흐로 지금 한의 사직은 중도에 쇠미하였고, 천하는 어지러워지자, 영웅호걸들은 각자 자기 무리를 가지고 사사로운 이익을 영위하고 있지만, 아직 능히 위험을 부여잡고 혼란을 구제할 자가 없습니다. 선군(先君)과 원씨가 함께 동탁을 격파했지만, 공업(功業)은 채 완성되지 못하고, 끝내 황조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이 손책이 비록 어리석고 나이도 어리지만 작은 뜻이나마 있기에, 원양주(袁楊州=원술)를 따라가 선군의 남은 병사를 얻고, 단양의 외삼촌에게 가서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해, 동쪽으로 오회(吳會)에 웅거하며 선친의 치욕을 갚고, 조정의 바깥 울타리가 되고자 합니다. 그대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라 했다.

장굉이 대답하길 

“저는 본디 미련하고 모자라며 상중(喪中)에 있어, 그 성대한 계략을 받들어 도울 바가 없습니다.” 

라 했다.

손책이 

“그대의 고명(高名)함은 널리 퍼져 원근(遠近)에서 귀의할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금일의 계획을 그대에게서 결정되어야 하는데, 어찌 생각을 품기만 하고 말씀하지 않으시어, 높은 산(高山)의 우러름에 부합하시겠습니까? 만약 이 작은 뜻을 펼치게 되어 피로써 복수하게 된다면, 이것은 곧 그대의 공훈이며, 손책이 마음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라 하며 울면서 눈물을 흩뿌렸지만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장굉이 손책의 충성됨과 장렬(壯烈)함이 속에서 드러나고 응대하는 말(辭令)이 강개함을 보고, 그의 의지에 감복하여 이내 대답하길 

“옛날 주나라의 도가 쇠약해지자 제(齊)와 진(晉)나라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고, 왕실이 편안해지니 제후들이 제 직분을 다하였습니다. 지금 그대께서 선친의 뒤를 이으시고 용맹하다는 명성이 있으시니, 만약 단양에 들어가 오회의 병사를 수습하여, 형주와 양주를 하나로 한다면 적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강에 웅거하고 위덕(威德)을 떨치며, 여러 나쁜 무리들을 쓸어버리고 한실(漢室)을 바로잡아 보좌한다면, 그 공업은 제 환공(桓公)이나 진문공(文公)과 같을 것인데, 어찌 다만 외번(外藩)에 그치겠습니까? 바야흐로 지금은 세상이 어지럽고 다난(多難)하니, 만약 일이 성공된다면, 마땅히 같이 일한 사람들과 함께 남으로 구제하십시오.” 

라 했다.

손책이 말하길 

“그대와 계획이 하나로 부합되었으니, 영원히 굳건한 직분을 가지게 된 셈입니다. 지금 바로 가야하니, 노모와 어린 동생을 그대에게 맡기며, 이 손책에게는 다시는 되돌아 볼 걱정이 없습니다.” 

라 했다.」고 한다.

『강표전』에 이르길 

「손책이 지름길로 가서 수춘(壽春)에 당도하여 원술을 뵙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길 “죽은 부친께서는 옛날 장사(長沙)에서 출발하여 동탁으로 토벌하러 가다가, 명사군(明使君)과 함께 남양에서 만나, 같이 호의를 맺었습니다. 불행히도 난을 만나, 공업을 완성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손책은 선인들의 오랜 은의(恩誼)에 감복하며, 직접 기대어 의지코자 하니, 원컨대 명사군께서는 제 정성을 살펴 주십시오.” 

라 했다.

원술이 그를 심히 귀히 여기고 남달리 보았지만, 아직 그 부친의 병사를 돌려주려 하지는 않았다. 원술이 손책에게 이르길 

“내가 원래 그대 외숙을 단양태수로 삼았고, 백부인 백양(伯陽=손견의 형인 손분(孫賁)의 자)은 도위(都尉)로 삼았는데, 거기는 정병(精兵)이 가득한 땅이니, 돌아가 그 땅에서 (병사를) 모아보게.” 

라 했다.

손책이 마침내 단양으로 가서 외숙에게 의지해, 수백 명을 얻었는데, 경(涇)현의 큰 도적 수령 조랑(祖郞)에게 기습당해,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다시 원술을 가서 찾아뵈니, 원술이 손견의 잔여 병력 1천여 명을 손책에게 돌려주었다.」

고 한다.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가 부절을 갖고 관동지역의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는데, 수춘에 와서는 예로써 손책을 천거하여, 표를 올려 회의(懷義) 교위(校尉)로 배수하니, 원술의 대장인 교유(喬蕤)와 장훈(張勳)이 모두 진정으로 그를 공경하였다. 원술이 항상 탄식하여 말하길 

“이 원술에게 손랑(孫郞)같은 자식이 있다면, 죽어서도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는가!” 

라 하였다.

손책의 기병 병사가 죄를 짓고는 원술의 진영으로 도망쳐 들어가 안쪽 마구간(內廐)에 숨었다. 손책이 사람을 시켜 가서 참수하게 하였는데, 일이 끝난 후 원술에게 가서 사과하였다. 원술이 말하길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좋아하는데, 응당 같이 그런 자를 미워해야지, 어찌해서 사과까지 하오?” 

라 했다. 이로 인해 군중의 사람들이 더욱 그를 두려워 꺼려했다.

원술이 처음 손책을 구강(九江)태수로 삼으려다가, 나중에 바꾸어 단양의 진기(陳紀)를 등용했다. 

후에 원술이 서주(徐州)를 공격하려고, 노강(盧江)태수 육강(陸康)에게 쌀 3만 곡(斛)을 구했다. 육강이 주지 않자 원술이 대노하였다. 손책이 예전에 일찍이 육강에게 간 적이 있었는데, 은 만나주지 않고 주부(主簿)를 시켜 접대하게 하였다. 손책이 (이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원술이 손책을 보내 육강을 공격하게 하면서, 이르길 

“예전에 착오로 진기를 기용했는데, 매양 본래 뜻대로 되지 않을 걸 한스러워 했소. 지금 그대가 육강을 잡게 되면, 구강 지역은 진실로 경의 소유가 될 것이오.” 

라 했다. 손책이 육강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나, 원술은 다시 자신의 옛 관리 유훈(劉勳)을 태수로 삼으니, 손책이 더욱 실망하였다.

이에 앞서 유요(劉繇)가 양주자사가 되었는데, 양주의 옛 주치(州治=주의 치소(治所)가 수춘이었다. 수춘은 원술이 점거하고 있기에, 유요는 이에 장강을 건너 곡아(曲阿)에서 다스렸다.

이 때 오경(吳景=손책의 외숙)이 아직 단양에 (태수로) 있었고, 손책의 종형인 손분은 단양도위로 있었는데, 유요가 이르자 모두 그를 쫓아냈다. 오경과 손분은 물러나 역양(歷陽)에 살고 있었다. 유요가 번능(樊能)과 우미(于糜)를 보내 동으로 횡강진(橫江津)에 주둔하게 하고, 장영(張英)은 당리구(當利口)에 주둔시켜 원술에 맞서도록 했다.

원술이 자신의 옛 관리인 낭야(琅邪)의 혜구(惠衢)를 양주자사로 삼고, 다시 오경을 독군(督軍) 중랑장(中郞將)으로 삼아 손분과 함께 병사를 거느리고 장영 등을 치게 했으나, 해가 이어져도 이기지 못했다. 손책이 이에 원술을 설득하여, 조경 등을 도와 강동(江東)을 평정하도록 요청했다. 

[주 : 『강표전』에 이르길 

「손책이 원술을 설득하길 

“제 집안의 구은(舊恩)은 동쪽에 있으니, 원컨대 외숙을 도와 횡강(橫江)을 토벌토록 해주십시오. 횡강이 함락되고, 이에 본토로 들어가 병사들을 모집하면 3만 명을 얻을 수 있으니, 명사군께서 한 왕실을 바로잡아 구제하는 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라 했다. 원술이 그의 원한을 기억하고 있지만, 유요가 곡아를 점거하고 있고, 왕랑(王朗)은 회계(會稽)에 있어서, 손책이 능히 평정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여 이를 허락했다.」

고 한다.]

원술이 표를 올려 손책을 절충교위(折衝校尉), 행(行) 진구장군(殄寇將軍)으로 삼았다. 병사는 천여 명과 기병 수십 필, 그리고 빈객(賓客)들 중 따르기 원하는 자가 수백 명이었다. 

역양(歷陽)에 도착할 즈음에는 5~6천명을 얻었다. 손책의 모친이 먼저 곡아에서 역양으로 옮기니, 손책이 다시 모친을 부릉(阜陵)을 옮기고, 장강을 건너 전전하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격파되어 감히 그 예봉을 당해내는 자가 없으며, 군령은 엄숙하니, 백성들은 그를 따랐다. 

주 : 『강표전』에 이르길 

손책이 장강을 건너 유요의 우저(牛渚 ; 『후한서 당고열전』에 주석에 의하면 “우저는 산 이름이다. 장강 중에 돌출되어 있는데, 우저기(牛渚圻)라 부르며, 선주(宣州) 당도현(當塗縣) 북쪽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한서 군국지』에는 양주(楊州)의 단양군 내 말릉(秣陵) 현 남쪽에 있다고 합니다.)에 있는 진영을 공격하여, 창고의 양곡과 군수품을 모두 얻으니, 이해가 흥평 2년(195)년이다. 

이 때 팽성(彭城) 상(相) 설례(薛禮)와 하비(下邳) 상 착융(笮融)은 유요에 의지하여 그를 맹주로 삼고 있었는데, 설례는 말릉성에 웅거하고, 착융은 현 남쪽에 주둔했다.

손책이 먼저 착융을 공격하자, 착융이 병사를 내보내 교전했지만, (손책의 군대가) 적군의 머리 5백여 급을 베니, 착융은 곧 성문을 닫고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이로 인하여 장강을 건너 설례를 공격하자, 설례는 갑자기 달아나서는 번능, 우미 등과 함께 병사를 함해 우저의 진영을 습격해 탈환했다. 

손책이 이를 듣고, 돌아가 번능 등을 공격하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았다. 다시 내려와 착융을 공격하다 유시(流矢)에 맞아서 넓적다리에 상처를 입어서 말에 탈 수 없게 되자, 이 때문에 직접 수레를 몰고 우저영으로 돌아갔다. 어떤 자가 모반하여 착융에게 알리길

“손랑이 화살에 맞아 이미 죽었다”

고 했다. 착융이 크게 기뻐하여 바로 장수 우자(于慈)를 보내어 손책을 향해 가도록 했다. 손책이 보기(步騎) 수백 명을 보내 도발하도록 하고 배후에는 복병을 매복시켜 두었는데, 적들이 나와 공격하자, 칼날을 접전해 보지도 않고 거짓으로 달아나니, 적들이 매복 속으로 추격해 들어오자, 이에 크게 격파하고, 머리 1천 여급을 베었다. 손책이 이로 이해 착융의 진영 아래로 가서 좌우를 시켜 

“손랑이 마침내 어찌되었다고 하더냐!”

고 크게 소리 지르게 했다. 적들이 이에 놀라고 두려워 밤중에 달아났다. 착융은 손책이 아직 살아있음을 듣고는, 다시 도랑을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면서 수선하며 수비했다. 

손책은 착융의 주둔지가 지세가 험준하고 견고(險固)하다 여겨 바로 그냥 놔두고 가버리고, 해릉(海陵)에서 유요의 별장(別將)을 공격해 격파하고, 돌아서 호숙(湖孰)과 강승(江乘)을 공격해 모두 항복시켰다.

손책의 사람됨은 용모와 얼굴이 빼어나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며, 성품이 활달하면서도 남의 의견을 잘 들어주고, 사람을 기용하는데 뛰어나니, 이 때문에 사민(士民)들 중 그를 만나는 자는 진심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고, 그를 위해서 기꺼이 죽었다.

유요가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자, 여러 군의 태수들도 모두 성곽을 부수고 달아났다. 

[주 : 『강표전』에 이르길 

「손책이 어린 시절에는 비록 위호(位號)가 있었지만, 사민들은 모두 손랑(孫郞)이라 불렀다. 백성들은 손랑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넋이 나갔다. 높은 관리들은 성곽을 내버려두고 산 속에 쥐처럼 숨었다. 손책이 오자 군사들이 영을 받들어, 감히 노략질하지 않고 닭이나 개나 푸성귀 하나라도 범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이내 크게 기뻐하며 다투어 고기와 술을 가지고 군으로 갔다.

유요는 이미 달아났고, 손책은 곡아로 입성해 장사들의 노고를 위로하며 물품을 내리고, 장수 진보(陳寶)를 보내 부릉으로 가서 모친과 동생들을 맞이하게 했다. 은혜를 베푸는 영을 내려 여러 현에 알리길 

“유요와 착융 등의 옛 부곡으로 먼저 항복해 오는 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기꺼이 종군하는 자는 그 한사람만 가고, 그 집안의 부역은 면제한다. 싫어하는 자도 강제하지 말라.” 

고 했다. 열흘 사이에 사면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니, 병사 2만여 명과 말 1천 필을 얻어, 그 위세가 강동에 진동하고 형세는 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군 사람 엄백호(嚴白虎) 등은 각자 무리 1만 여 명씩 거느리고 곳곳에 모여 있었다. 오경 등이 먼저 엄백호 등을 공격하고자 하여, 이에 회계로 모였다. 손책이 말하길 

“엄백호 등은 단순한 도적 무리일 뿐, 큰 뜻이 있는 자들은 아니니, 이번에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라 했다. 이에 병사를 거느리고 절강(浙江)을 건너, 회계에 근거하며, 동야(東冶)를 도륙내고 이내 엄백호 등을 공격해 격파했다. 

[주 : 『오록』에 이르길 「이때 오정(烏程) 출신의 추타(鄒他), 전동(錢銅) 및 전 합포(合浦)태수인 가흥(嘉興) 출신 왕성(王晟) 등이 각각 만여 명 혹 수천여명을 무리를 모으고 있었다. 병사를 이끌고 쳐서 토벌하여, 모두 다 공파하였다. 손책의 모친 오씨(吳氏)가 말하길 

“왕성과 네 아버지는 당에 올라 처를 보게 된 일이 있는데, 지금 그분의 자식과 형제들은 모두 효수되고, 홀로 늙은이 혼자 남았는데, 어찌 다시 협박할 수 있겠느냐?” 

라 했으나, 놔두고 가서는 나머지 일족들도 모두 주살했다.

손책이 직접 백호를 토벌하였는데, 백호는 성루는 높이고 견고하게 수비하며, 그의 아우 엄여(嚴輿)를 보내 화의를 청하게 했다. (손책이) 이를 허락했다. 엄여는 혼자 손책과 대면할 약속을 청했다. 만나게 되자, 손책은 날이 시퍼런 칼을 빼들고 좌석을 부수었는데, 엄여가 몸을 움직이자, 손책이 웃으며 

“듣자하니 경은 자리에 앉아서 잘 뛸 수 있다던데, 날랜 것이 평상시만 못하니, 오로지 경을 희롱한 거였구려!” 

라 하니, 엄여가 

“내가 칼날을 보고 그랬소.” 

라 했다. 손책이 그의 무능함을 알고, 이에 손에 쥔 창을 그에게 날리니, (엄여는) 서서 죽었다. 엄여는 용맹함과 힘이 있었는데도, 엄백호는 그가 죽은 것을 보고는 심히 두려웠다. 진격하여 엄백호를 공파했다. 엄백호는 여항(餘杭)으로 달아나서, 도적 무리 속의 허소(許昭)에게 투탁(投託)했다. 정보(程普)가 공격할 것을 청하자, 손책이 

“허소는 옛 주군에게 의를 지켰고, 옛 벗들에겐 진실함이 있으니, 이는 장부의 뜻이오.” 

라 하고, 그를 내버려 두었다.」고 했다.

신 송지가 살펴보니, 허소가 옛 주군에게 의를 지켰다는 것은 (오군태수) 성헌(盛憲)을 도와주었던 것을 이르는데, 이 일이 나중에 나오는 주에 보인다. 옛 벗에게 진실함이 있었다는 것은 엄백호를 받아주었던 일이다.]

손책이 고위 관리들을 전부 갈면서, 손책 자신은 회계태수를 맡았다가 다시 오경을 단양태수로, 손분을 예장(豫章)태수로 삼았다. 예장군을 나눠 노릉군(盧陵郡)으로 만들고, 손분의 아우 손보(孫輔)를 노릉태수로 삼고, 단양의 주치(朱治)를 오군태수로 삼았다. 팽성의 장소(張昭), 광릉(廣陵)의 장굉(張紘), 진송(秦松), 진단(陳端) 등을 모주(謀主)로 삼았다. 

[주 : 『강표전』에 이르길 「손책이 봉정(奉正)도위 유유(劉由), 오관연(五官掾) 고승(高承)에게 장(章 ; 신하가 천자에게 올리는 문서. 표(表) 같은 부류)을 받들고 허도로 가서, 방물(方物)을 헌납하게 했다.」고 한다.]

이때 원술이 존호를 참칭하므로, 손책이 서한을 보내 그를 질책하고 관계를 끊었다. 

[주 : 『오록(吳錄)』에 실린 손책이 장굉에게 짓게 한 서한에 이르길 

「무릇 상천(上天)은 과오를 맡는 별(司過之星) 드리어 놓았고 성왕(聖王)들은 감간(敢諫)의 나무를 세워서, 그르치고 어긋남에 대한 대비를 설치해 두었고 경계하는 말을 급히 하도록 하였으니,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무릇 장점이 있는 곳에 반드시 단점이 있습니다. 지난 가을 전령의 부신(符信)에 큰 계획이 있기에, 모두 두려워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돌아서서 같이 공헌(貢獻)물을 갖추는 일임을 알게 되자, 만 백성들은 의혹을 풀었습니다. 얼마 전 듣자하니 의논을 세워, 다시 이전의 계획을 쫓아 따라가고자 하여, 곧 그 일의 기일에 있어 바로 정해진 달이 있게 되었습니다. 더욱 아득해져서 이것은 떠돌아다니는 망언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정말 그렇다고 말한다면, 백성들이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지난 날, 의병을 일으켜서 천하의 사대부들이 이에 향응(響應)한 것은, 동탁이 폐치(廢置)를 제멋대고 하고 태후와 홍농왕(弘農王)을 시해하며 궁인들을 쪄 죽이며 능원을 파헤쳐서 그 폭역(暴逆)함이 이에 이르렀기에, 그래서 여러 주군의 영웅호걸들이 소문을 듣고 의병을 모집한 것입니다. 신무(神武)함은 외방에 떨치니, 동탁은 마침내 내부에서 섬멸되었습니다. 큰 악이 이미 넘어져 죽었지만, 어린 임금은 동쪽을 돌아보며, 보부(保傅=천자와 제후의 자제를 보호, 인도하는 관리)를 시켜 명을 공포하여서 여러 군대를 정돈하게 했는데, 그렇지만 하북(河北)에서는 흑산(黑山)적과 통모(通謀)하고, 조조는 동쪽 서주에서 그 해독을 퍼뜨리며, 유표는 남쪽 형주에서 난을 일으키고, 공손찬은 북쪽 유주를 통째로 삼키며, 유요는 장강과 호수(滸水)에서 결단하고, 유비는 회수(淮水) 모퉁이에서 맹주자리를 다투니, 이것은 명을 받들어 궁시와 창을 도로 싸 넣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유비와 유요는 이미 격파되었고, 조조 등은 굶주리고 있으니, 마땅히 천하와 함께 모의를 합쳐 간악한 무리들을 주살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내버리고 도모하지 않으면 직접 취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며, 해내(海內)가 바라는 바가 아닌 것이 하나입니다.

옛날 성탕(成湯)이 걸왕(桀王)을 정벌하면서 하나라가 죄를 많이 지었다고 말했고, 무왕(武王)은 주왕(紂王)을 정벌하면서 은나라의 죄와 벌이 무겁다고 했습니다. 이 두 왕은 비록 성덕(聖德)이 있어도, 의당 세상에 임금노릇 해야 되었습니다. 만약 그 때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면, 또한 부역이 일어날 것도 없었습니다. 어린 임금은 천하에 잘못을 지은 게 없고, 다만 춘추가 아직 어릴 뿐이며, 강한 신하들에게 협박당한 것인데, 만약 허물도 없이 그를 빼앗는다면, 탕왕과 성왕의 고사에 부합치 못함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동탁이 비록 광폭하고 교활하나, 임금을 폐위하고 스스로 허여함에 이르러 또한 아직도 다하지 않았기에, 천하가 그 교활함과 포학함을 듣고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한 마음으로 그를 미워하여, 중원의 전쟁을 별로 경험해 보지 못한 병사들로 변방의 날래고 사나운 오랑캐들을 당해내야 하기에, 이것이 모름지기 정신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사방의 사람들이 모두 적들을 희롱하고 전쟁에 익숙해져서 붙잡아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저들은 어지러우나 우리는 다스려지고, 저들은 거스르나 우리는 순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은 대단히 어지러워, 크게 거병하여 임하면, 적들은 족히 화란(禍亂)에 빠질 것이 세 번째입니다.

천하의 신기(神器)는 헛되이 간구할 수 없고, 반드시 모름지기 하늘이 사람의 노력을 기려서 주는 것입니다. 은의 탕왕에게는 흰 비둘기(白鳩)의 상서로움이, 주 무왕에게는 붉은 까마귀(赤烏)의 상서로움이 있었습니다. 한 고조 때는 별들이 모이는 상서가, 세조(世祖=후한 광무제)에게는 신광(神光)의 징험(徵驗)이 있었으니, 모두가 백성들이 걸왕과 주왕의 학정(虐政)에 곤핍하고 파리해졌고, 진나라와 왕망의 부역에 해독을 입었기 때문에, 능히 무도(無道)한 자들을 제거하고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천하가 어린 임금에 대한 근심을 그르다 하는 것은, 천명을 받은 응험(應驗)을 보지 못하였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존호에 오르고자 하였으니, 혹여 아직도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네 번째 입니다.

천자의 귀함, 사해의 부유함을 누가 욕심내지 않겠습니까? 의리상 그럴 수 없고, 세력으로도 얻을 수 없을 뿐입니다. 진승과 항적(項籍=항우), 왕망, 공손술의 무리는 모두 남면(南面)하고 고(孤)라 칭했지만, 능히 (천하를) 구제할 수 없었습니다. 제왕의 자리는 보익(補翼)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어린 임금은 재지(才智)가 뛰어나시니, 만약 핍박하고 우환이 되는 자들을 제거한다면, 반드시 중흥(中興)의 대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무릇 임금이 주 성왕의 융성함에 이르게 한다면, 자신은 (성왕을 보좌한) 주공 단(旦)과 소공 석(奭)의 빼어남을 받으니, 이것은 진실로 존명(尊明)에 바라는 바 입니다. 설령 어린 임금에게 타인에게 있어 달리 고쳐진다 하더라도, 종실의 계통으로 우러러 받들어 지고, 근친(近親)의 현량(賢良)을 논하게 되어, 유씨의 종통을 잇고, 한실(漢室)을 견고하게 할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은 금석(金石)에 그 공이 기록되어, 원형에 단청(丹靑)이 칠해지는 바이니, 전해오는 경사는 무궁하며 (이를 기념하는 음악의) 악기에 그 소리를 드리우게 됩니다. 버리고 하지 않아도 그 어려움을 하는 자는, 밝고 밝은 본마음을 생각해 보면, 마음속으로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여섯 번째입니다.

5 대 동안 재상을 지내어서, 권력은 중하고 세력은 융성하여, 천하에 (귀하의 가문에) 비견할 바는 없습니다. 그 충정(忠貞)함은 필히 의당 밤낮으로 (조정을) 생각한다고 이르는 것이니, 나라의 실패를 부여잡고 사직의 위기를 염려하는 것은, 조상의 뜻을 받들어서 한실의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도를 행하는 정절을 잊고서, 억지로 욕심을 나아가 취한다면, 장차 천하의 사람들을 집안의 관리가 아니면 문생(門生)이라 할 것인데, 누가 나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사방의 적들은 나의 벗이 아니면 내가 부리는 자들 인데, 누가 나를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어찌 누대를 이은 세력을 타서, 여기서 일어나 취하지 않습니까? 이 두 가지의 것은 수가 서로 다르지만, 상세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이것이 일곱 번째입니다.

성철(聖哲)에서 귀한 바는 기의(機宜)에 살펴서 행동거지에 조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도모하기 어려운 일과 보전하기 어려운 형세에서 많은 적들의 기세에 부딪혀 많은 이의 마음을 살리는데, 공의(公義)로는 불가하고 사사로운 계책으로는 이롭지 못하며, 명철한 바가 처하지 못하는 것이 여덟 번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많은 도참이나 위서(緯書)에 혹하여 그른 부류들도 끌어와서, 문자와 견주어 부합시켜 놓고 그 일을 기뻐하는 것은, 실로 위에 아부하고 사람들을 혹세케 하는 것이니, 끝내는 후회하는 자가 있을 것이며, 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런 일이 없었던 적이 없으니, 깊게 가려서 심사숙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홉 번째 입니다.

이 아홉 가지는 존명께서 보아온 나머지일 뿐이며, 많은 것들은 자신에게서 갖추어져 일어나는 법이니, 흘리고 잊으신 바를 기우십시오. 충언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니, 이것을 남겨두어 들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라 했다.

『전략(典略)』에는 장소(張昭)의 글이라 했다.

신 송지가 살피건대, 장소는 비록 명망이 무겁긴 하나, 장굉의 문장만 못하니, 이 글은 필히 장굉이 지은 것이다.]

조공이 표를 올려 손책을 토역(討逆)장군으로 삼고, 오후(吳侯)에 봉하였다. 

[주 : 『강표전』에 이르길

 「건안(建安) 2년(198) 여름, 한의 조정이 의랑(議郞) 왕포(王誧)를 보내 무진(戊辰)일의 조서는 받들어 가게 했는데, 그 조서에 

“동탁이 반역하고 난을 일으켜, 나라를 흉하고 백성들을 해치었다. 선장군(先將軍) 견(堅)은 (난적을) 평정해 토벌할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그 아름다운 뜻이 완성되지 못하였지만, 그 아름다움은 저명하였다. 손책이 그 착한 도를 따라 복을 구하는데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손책을 기도위(騎都尉)로 삼고, 오정후(吳亭侯)의 작을 잇고, 회계태수를 통괄하게 한다.”

고 했다.

또 조칙에 이르길 

“옛 좌장군 원술이 조정의 은혜를 돌아보지 않고, 앉아서 흉역(凶逆)한 일을 만들더니, 허위(虛僞)를 조작해 내어, 병란을 일으키고 백성들을 속이려 하였는데, 이제야 그 말을 들으니 그렇게 되지 않았다. 사지절(使指節) 평동장군(平東將軍) 영(領) 서주목(徐州牧) 온후(溫侯) 포(布=여포)가 원술이 혹세무민하여 요망한 짓을 지어낸 것을 알린 것을 얻으니, 원술이 간악한 성품을 가지고, 무도한 바를 완성해, 왕궁을 수리하고 공경을 두며, 천지에 교사(郊祀)를 지내며, 백성들은 잔멸하고 만물을 해치어 앙화(殃禍)의 깊은 독이 됨을 알았다. 

여포가 전후로 계책을 올려 본조에 마음을 두고, 돌아가 원술을 토벌하여 나라의 본받을 만한 절개가 되려 하니, 높여 특별히 대우함을 더해준다. 무릇 상을 내걸어 공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근면할 때만 그렇게 수여하는 바이니, 그래서 편의로 총애하여 제수하노니, 이전의 봉읍을 승습(承襲)케 하고, 대군(大郡)으로 중하게 여겨, 영광이 아울러 이르러, 이것은 손책이 힘과 명(命)을 다하는 때이다. 마침내는 여포 및 행(行) 오군태수 안동(安東)장군 진우(陳瑀)와 더불어 힘을 합치고 한마음으로 같은 날 토벌하러 가라.”

고 했다.

손책이 직접 병마를 통령하게 되자, 다만 기도위로써 군(郡)을 다스리는 것을 가벼이 여기고, 장군의 호칭을 얻고 싶어, 이에 사람을 시켜 왕포에게 은근히 비유하니, 왕포가 바로 부절을 받들어 손책을 임시로 명한(明漢)장군으로 임명했다. 이 때 진우는 해서(海西)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손책이 조칙을 받들고는 엄숙히 하고서, 응당 여포와 진우와 함께 형세를 같이 했다. 

행군하여 전당(錢塘)에 도착하자, 진우가 몰래 손책을 치려고 도모하여, 도위(都尉) 만연(萬演) 등을 보내 몰래 장강을 건저, 인수를 지니고 가 양(楊), 선성(宣城), 경(涇), 능양(陵陽), 시안(始安), 이(黟), 흡(歙)의 여러 험한 현의 우두머리인 조랑(祖郞), 초기(焦己) 및 오군 오정(烏程)의 엄백호 등에게 30여개의 인수를 전하고 내부에서 호응하게 하고, 손책이 군대를 발동시키는 것을 기다려, 여러 군을 공격해 취하고자 하였다. 손책이 이를 깨닫고서 여범(呂範), 서일(徐逸)을 파견해 해서에서 진우를 공격하게 해, 진우를 크게 격파하고, 그의 관리와 병사, 처자식 4천명을 잡았다.」

고 한다.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에 이르길 「진우가 단기로 기주(冀州)로 달아나서 자신이 원소에게 귀부하니, 원소가 그를 고안(故安) 도위로 삼았다.」고 한다.

『오록』에 실린 손책이 표에 사례하는 글에는 

「신은 고루(固陋)하여, 혼자서 변방 모퉁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널리 베푸시고 은택이 깊어, 작은 정절도 놓치지 않아, 신이 작위를 잇게 되고 겸하여 이름난 군(名郡)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 영광을 우러르며 총애를 돌아보는데, 능히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흥평(興平) 2년(195) 12월 2일, 오군 곡아에서 원술이 드린 표를 얻어 보고야, 신이 진구(殄寇)장군의 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조서를 받고 보니, 이내 속이고 천단(擅斷)하는 것을 알았지만,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신의 나이 17세 때 부친을 잃게 되자, 아비의 사업을 이어서 맡지 않는 비루함이 있어, 석신(析薪)의 경계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했고, 실로 무탈하게 18세에 공을 세우게 되니 조상들께서 이 어린 후손을 거느리고 명을 도우신 것입니다. 

신이 처음 병사를 거느릴 때, 나이는 채 약관도 되지 않아, 비록 놀라 두려워하여 무력이 없었지만, 작은 명이나 생각하여 힘을 다하였습니다. 원술의 광혹(狂惑)함을 생각건대 그 위악함이 깊고도 무겁습니다. 신이 위령(威靈)을 입어, 명을 받들어 죄지은 자를 토벌하매, 기필코 승첩을 헌상해, 제수해주신 것에 보답하겠습니다.」

라 했다.

// 신 송지가 살피건대, 본전에는 손견이 초평 3년(192)에 죽었다고 했다. 손책은 건안 5년(200)에 죽었다고 했는데, 손책이 죽을 때 나이는 26세로, 손책이 사망할 때를 계산해 보면, 손책은 응당 18세가 되는데, 여기 표에서는 17세라 했으니,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장번(張璠)의 『한기(漢紀)』 및 『오력(吳歷)』에는 모두 손견이 초평 2년(191)에 죽었다는 했으니, 아마도 이것이 옳고 본전이 틀린 것 같다.

『강표전』에 이르길 「건안 3년(198), 손책이 또한 사신을 보내 방물을 진헌하고, 원년에 올린 것의 배가 되게 보냈다. 그 해, 제서(制書)를 내려 토역장군으로 옮겨 배수하고, 오후(吳侯)로 고쳐 봉했다.」고 한다]

원술이 죽자, 장사(長史) 양홍(楊弘), 대장 장훈(張勳) 등이 그의 병사를 거느리고 손책에게 가고자 했는데, 여강태수 유훈(劉勳)이 도충에서 습격하여 모두 사로잡고, 그들의 진기한 보물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갔다. 손책이 이를 듣고서, 거짓으로 유훈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유훈은 새로이 원술의 병력을 얻은 데다, 이때 예장(預章) 상료(上繚)의 일족의 백성(종민(宗民)?) 1만여 가(家)가 강동(江東)에 있었는데 손책이 유훈에게 이들을 공격해 취하라고 권했다. 유훈이 움직이자, 손책이 날랜 병사들도 밤낮으로 달려 여강을 기습하고 함락시키니, 유훈의 병사들은 모두 다 항복하고, 유훈은 혼자서 휘하의 수백 명과 함께 조공에게 귀의하였다. 

[주 : 『강표전』에 이르길 

“손책이 조칙을 받고, 사공(司空) 조공, 위장군(衛將軍) 동승(董承), 익주목 유장(劉璋) 등과 함께 힘을 합쳐 원술과 유표를 토벌하였다. 군대가 엄숙히 진격하려 할 때, 원술이 죽었고, 원술의 사촌아우 원윤(袁胤)과 사위 황의(黃猗) 등은 조공을 두려워해서 감히 수춘을 지키지 못하여, 이내 원술의 관을 올려 매고 그 처자식 및 부곡의 남녀를 데리고, 환성(皖城)의 유훈에게로 갔다. 

유훈은 군량은 적은데 서로 떨칠 곳은 없기에, 사촌 동생 유해(劉偕)를 보내 예장태수 화흠(華歆)에게 곡식을 구하러 보냈다. 화흠의 군은 본래 군량이 적어서, 관리를 보내 유해를 데리고 해혼(海昏)과 상료(上繚)로 가게 하여, 여러 일족의 우두머리들에게 3만 곡(斛)의 쌀을 함께 내어 유해에게 주도록 했다. 유해가 간 지 한 달이지나, 비로소 수천 곡을 얻었다. 유해가 이에 유훈에게 보고하였데, 그 상황을 갖춰 설명하니, 유훈에게 가서 습취(襲取)해 오도록 하였다. 몰래 군대를 보내 해혼읍 아래에 도착하게 하였다. 일족의 우두머리(宗帥)들이 이를 알고서는, 창고를 비우고 도주해 숨으니, 유훈은 끝내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 때 손책은 서쪽으로 황조(黃祖)를 토벌하느라, 행군하다 석성(石城)에 이르렀는데, 유훈이 몸을 가볍게 하여 해혼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사촌형이 손분(孫賁)과 손보(孫輔)는 나눠 파견해 8천명을 거느리고 팽택(彭澤)에서 유훈을 기다리게 하고, 자신은 주유와 함께 2만 명을 거느리고 걸어서 환성을 급격하여 곧 함락시켜서 원술의 수많은 공인(工人) 및 고취(鼓吹) 부곡 3만여 명과 아울러 원술과 유훈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표를 올려 여남태수 이술(李術)을 여강태수로 등용하는 한편 병사 3천 명을 주어 환성을 지키게 하였고, 나머지 모두는 잡았던 사람들은 동으로 오군으로 가게 했다. 

손분과 손보는 또한 팽택에서 유훈을 격파하니, 유훈은 초강(楚江)으로 달아나 들어갔는데, 심양(尋陽)에서 걸어서 치마정(置馬亭)에 도착하여서는 손책 등이 이미 환성을 격파하였다는 것을 듣고 서새(西塞)로 들어갔다. 기수(沂水)에 이르러서 보루를 쌓고 스스로 지키면서, 유표에게 위급함을 고하고, 황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황조가 큰 아들 황역(太子射; )의 선군(船軍) 5천명을 보내 유훈을 돕게 했다. 손책이 다시 공격하러 가서, 유훈을 크게 격파했다. 유훈과 유해는 북으로 조공에게 귀의하니, 황역 또한 달아났다. 손책은 유훈의 병사 2천여 명과 함선 1천여 척을 거둬들이고, 마침내 하구(夏口)로 전진해 황조를 공격했다. 이때 유표는 조카 유호(劉虎)와 남양(南陽)의 한희(韓晞)를 보내 장모(長矛) 부대 5천명을 거느리고, 와서 황조의 선봉이 되게 하였다. 손책이 더불어 싸워서 크게 격파하였다.」고 한다.

주수창 : 황조는 유표에게 속하며 아울러 참호(僭號; 제 분수에 넘치는 스스로의 칭호) 하지 않았는데, 아들을 어찌 태자라 칭하겠는가?

의심하건데, 장자長子의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 주석: '射의 음은 亦'


『오록』에는 손책의 표가 실려 있는데, 

「신이 황조를 토벌하게 되어, 12월 8일 황조에게 도착하여(沙羨縣)에 주둔했습니다. 유표가 장수를 보내어 황조를 보내니, 모두 신에게 왔습니다. 신이 11일 아침에 강하태수 행(行) 건위 중랑중(建威 中郞將) 주유, 계양태수 행 정로 중랑장(征虜 中郞將) 여범, 영릉태수 행 탕구(蕩寇) 중랑장 정보(程普), 봉업(奉嶪) 교위 손권, 행 선등(先登) 교위 한당(韓當), 행 무봉(武鋒) 교위 황개(黃蓋) 등과 동시에 함께 진격했습니다. 신이 말을 타고 진영을 다지며, 손으로 급고(急鼓)를 쳐서 전세를 바로잡았습니다. 관리와 군사들은 분격하여, 뛰어 오르길 백배나 하며, 마음으로 정밀하면서 뜻이 과단성이 있으니, 각자가 명령을 받드는 것을 다투었습니다. 여러 겹의 참호를 뛰어 넘어 신속하고 빠르기가 마치 나는 듯 하였습니다. 불을 놓아 바람에 보내고, 병기는 연기 아래서 격렬히 부딪히며, 궁노(弓弩)가 아울러 발사되니, 활이 비가 모이는 듯 하며, 해가 진시(辰時)가 되자, 황조는 이내 궤멸되었습니다. 적의 예봉은 끊어지고 질풍 같은 불로 태워버리고, 앞에는 살아남은 도적떼들이 없고, 오직 황조만 달아났습니다.

/沙羨: 사선이라 읽어야 할 것 같지만 《한서》 지리지의 주석에 '羨의 음은 夷라.'라고 하여 사이라고 읽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처자식 7명을 붙잡고, 유호와 한희 이하 2만 여급을 참수하였으며, 강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은 자가 1만여 구나되고, 배는 6천척이며, 재물은 산같이 쌓였습니다. 비록 유표는 사로잡지 못했지만, 황조는 교활한 마음을 품어 유표의 심복이 되며, 조아(爪牙)같은 짓을 하여 유표의 장기가 되었는데, 황조의 기세가 멈췄고, 황조의 집안과 부곡들도 땅을 쓸 듯 남음이 없으니, 유표는 혼자 남은 오랑캐로, 귀신이 되어 시체 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이 모든 것이 성조(聖朝)의 신무(神武)함이 널리 떨친 것이오, 신이 죄 있는 자를 토벌해서 효험을 본 것은 조금 애쓴 것일 뿐입니다.“」

라 했다고 한다.]

이 때 원소가 바야흐로 강성했는데, 손책이 강동을 병합했고 조공의 힘은 미칠 수 없기에, 또한 그를 위무하고자 하였다. 

[주 : 『오력(吳歷)』에 이르길 「조공은 손책이 강남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매우 어렵게 생각하며, 항상 “미친 개 같은 아이와 예봉을 다투기 어렵도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내 동생의 딸을 손책의 작은 동생인 손광(孫匡)의 배필로 보내고, 또한 아들 조장(章; 조창(彰)의 오기로 여겨짐)은 손분(孫賁)의 딸을 맞게 하였으며, 모두 예법으로 손책의 동생인 손권과 손익(孫翊)을 천거하고, 또한 양주자사 엄상에게 명하여 손권을 무재(茂才)로 천거하게 했다.

건안 5년(200), 조공이 관도에서 원소와 서로 대치했는데, 손책에 몰래 허도를 습격해 한의 황제(헌제)를 맞이하려 했다. 

[ 주 : 『오록』에 이르길 

「이 때 고대(高岱)란 자가 여요(餘姚)에 은거했는데, 손책이 명하여 회계승(會稽丞) 육소(陸昭)가 반역을 일으킨 일에 대하여 사신을 나가게 하는 한편, 손책은 사심 없이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가 『좌전(左傳)』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이내 자신을 독서로 희롱하며 그와 강론하고자 했다. 어떤 자가 말하길 

“고대는 장군으로써 다만 영무(英武)할 뿐이지 문학의 재주는 없으며, 만약 같이 『좌전』을 논한 게 되어 혹 모른다고 말하면, 모(某)는 부합한다고 말하십시오.”

라 했다. 또 고대에게 이르길 

“손장군은 사람됨이 자기를 이기는 것을 싫어하니, 만약 매번 물으면 마땅히 모른다고 말해서, 그의 뜻에 부합해 주십시오. 만약 모든 것에 문의(文義)를 변론한다면, 이것이 필히 위태로워 질 것입니다.“

라 했다. 고대가 이 말을 옳다고 여겨, 『좌전』을 논하게 되었을 때, 간혹 모른다고 답했다. 손책이 과연 노하여 자신을 가벼이 여긴다 하여, 이내 그를 가두었다. 벗들과 당시 사람들이 모두 맨 자리에 앉아서 그를 위해 청했다. 손책이 누각에 올랐는데, 수 리 안이 가득 매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손책은 그가 뭇사람들의 마음을 거둬들인 것을 싫어하여, 마침내 그를 죽였다.

고대의 자는 공문(孔文)으로 오군 사람이다. 타고난 성품이 총달(聰達)하여, 재물을 가벼이 하고 의를 귀하게 여겼다. 그의 벗들은 발군으로 빼어났는데, 현달(顯達)하지 않았을 때 사귄 8명은 모두 세상의 뛰어난 인재였다. 태수 성헌(盛憲)을 위해 계책을 올린 적이 있어,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다. 

허공이 와서 (오)군을 다스리자, 고대는 성헌을 데리고 허소(許昭)의 집에서 난을 피했고, 도겸에 구원을 청했다. 도겸이 바로 구원해주지 못하자, 고대는 애태우며 파리하여 피를 흘리며, 음료조차 입에 대지 못하였다. 도겸이 그의 충절과 장렬함에 감복하여, 신포서(申包胥=오자서가 초나라를 탈출하도록 도운 오자서의 친구)의 뜻이 있어, 군대를 내는 것을 허락하고, 편지를 허공에게 보냈다. 고대가 도겸의 편지를 갖고 돌아왔으나, 허공은 이미 그의 모친을 가두었다. 오군 사람은 대소 할 것 없이 모두 두려워했고, 허공이 분노를 품고 있다가, 끝내 해를 입은 것이다. 

고대가 임금에게 있으면 임금을 위하고, 또한 모친이 감옥에 있는데 기필코 가서 보아야 하며, 만약 들어가 본다면 일은 저절로 풀리게 될 것이라 했다. 마침내 편지를 통하고 직접 아뢰니, 헝공이 곧 서로 상면하였다. 재주와 말이 민첩하여, 스스로 사과하길 좋아하여, 허공이 등청할 때 그 어미를 나오게 하였다. 고대가 허공을 바라보고는, 벗인 장윤(張允)과 심민(沈睧)에게 말하여 배를 미리 갖추어 놓게 하고, 허공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니 추격 받게 될 것이라 하였다. 나와서 바로 모친을 데리고 배에 올라 편한 길로 도망쳤다. 허공이 잠시 후 사람을 보내 추격하게 했는데, 추격하는 자에게 영을 내려 배에 가면 강가에서 바로 죽이고, 이미 통과했으면 멈추라고 했다. 고대와 길이 엇갈리게 되어, 마침내 면하게 되었다. 주살되었을 때 나이 30여세였다.」

고 한다.

睧의 음은 민(閔)이다.

『강표전』에 이르길 

「당시 도사(道士)인 낭야(琅邪) 사람 우길(于吉)이란 자가 있었는데, 앞서는 동쪽에서 우거(寓居)하다가, 오회 사이를 왕래하며 정사(精舍)를 세우고, 이르길 선인화(仙人鏵)라 하고, 탁문(度門) 아래로 왔다. (그러자) 여러 장수와 빈객들 중 3분의 2가 누각을 내려가 그를 영접하고 절하니, 빈객을 담당하는 자가 금하며 질책했으나, 그치게 할 수 없었다. 손책이 영을 내려 그를 잡아오게 하였다. 그를 섬기던 여러 사람들이 모두 다 부녀자들을 시켜 들어가 손책의 모친을 뵙고, 그를 구해주도록 청하게 했다. 모친이 손책에게 말하길 

“우선생은 또한 군대를 돕고 복을 지었고, 장사들을 치료하고 보호하였으니, 죽여서는 안 된다.”

라 했다. 손책이 말하길 

“이 자는 요망한 자로, 뭇사람들의 마음을 능히 현혹하여, 멀리는 여러 장수들이 가시는 군신의 예를 서로 돌아보지 않게 하여, 모두가 이 손책을 내버리고 누각 아래로 내려가 절하게 하였으니, 없애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 했다. 여러 장수들이 다시 연명(連名)으로 돌려 일을 아뢰고 그를 구해주기를 진언하였지만, 손책이 말하길 

“옛날 남양의 장진(張津)이 교주(交州) 자사가 되었을 때, 이전 성인의 가르침(典訓)을 버리고 한가(漢家)의 법률을 폐하고는, 일찍이 진홍 옷을 입으며 머리띠를 매고, 북치고 금을 타며 향을 사르고, 간사한 속세의 도가 책을 읽으면서, 교화를 돕는다고 운운하더니, 끝내 남이(南夷)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이것은 더욱 무익(無益)한데, 제군들이 다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자는 귀록(鬼錄=죽은 자의 이름을 적은 명부)에 올려 두고, 다시는 지필(紙筆)을 소비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라 했다. 곧 참수하라고 재촉하고는, 시장에다 목을 내걸었다. 그를 섬기던 여러 사람들이 아직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시체만 남겨두고 혼백은 빠져 나가 신선이 된다(尸解)고 말하면서, 다시 제사를 하고 복을 구하였다.」

고 한다.

[붙임 - 이 우길에 관해서는 『후한서 열전』 권30 하 『양해(襄楷)열전』에도 바로 아래에 나오는 신서(神書)를 바쳤다는 기사와 더불어 여기의 『강표전』이 주석으로 실려 있습니다. 『양해열전』에 실린 『강표전』의 내용은 몇몇 구절만 제외하고(우길이 향을 사르고 도가 책을 읽으며, 부적과 약수를 만들어 병을 치료하니, 사람들이 그를 섬긴다는 구절)는 여기에 실린 것과 같습니다. 다만 『후한서』에는 우길(于吉)이 아닌 간길(干吉)이라 표현되고 있습니다.]

『임지(林志)』에 이르길 

「처음 순제(順帝=126~144) 때에 낭야의 궁숭(宮崇)이 궐로 가서 스승 우길이 곡양(曲陽) 천수(泉水) 가에서 얻은 신서(神書)를 올리고, 흰 바탕에 붉은 경계를 둘렀고, 이름을 『태평청령도(太平靑領道)라 하고, 무릇 1백여 권이었다. 순제에서 건안 중엽에 이르기까지 5~60년이니, 우길은 이때 나이는 거의 백 살에 가까웠을 것이다. 나이가 어린이(悼)와 노인(耄)은 예법상 형을 가하지 않는다(『예기(禮記)』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또한 천자가 순수(巡狩)하면, 나이가 백 살이 된 자를 물어, 가서 뵙는데, 나이든 이를 공경하고 친애하는 것이, 성왕(聖王)의 지극한 교화이다. 우길의 죄가 죽음에 미치지 않는데, 난폭하게도 잔인한 형을 가하여, 이내 죽였으니,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나 우희(虞喜=이 책 『지림』의 저자)가 환왕(桓王=장사환왕(長沙桓王), 손책의 시호)의 죽음을 돌아 살펴보니, 건안(建安) 5년(200) 4월 4일이다. 이때 조공과 원소가 서로 싸우고 있었지만, 아직 승부를 내지 못했다. 하후원양(夏侯元讓=하후돈, 원양의 하후돈의 자)과 석위(石威)의 책을 살펴보니, 원소가 격파된 후이다. 그 책에 이르길 

“손분을 장사태수에 제수하고, 장진(張津)의 영릉, 계양을 업으로 삼게 했다”

고 하였으니, 이것은 환왕이 죽기 전이고 장진이 죽은 이후의 일인데, 서로 물러서지 않은 것은, 장진이 죽었다는 뜻을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라 한다.

신 송지가 살피건대: 태강(太康) 8년(287), 광주(廣州) 대중정(大中正) 왕범(王範)이 교주와 광주의 『이주춘추(二州春秋)』를 올렸다. 건안 6년(201) 장진은 오히려 교주목이 되었다. 『강표전』의 허망함은 『지림』에서 운운한 바와 같다.

『수신기(搜神紀)』에 이르길 

「손책이 장강을 건너 허도를 습격하고자 하여 우길과 함께 길을 갔다. 이때 크게 가물어 가는 곳마다 두텁고 괴로웠다. 손책이 여러 장수와 관리, 병사들을 재촉해 빨리 배를 끌고 오게 하고는, 혹 자신이 일찍 나와 감독하다가, 장수와 관리들이 우길 부근에 많이 있는 것을 보고는, 손책이 이 때문에 격노하여

“내가 우길만 못해서 먼저 그에게 가는 것을 일삼는가?”

라 했다. 바로 우길을 붙잡아 들이게 했다. 그가 오자 꾸짖어 묻기를

“날씨가 말라 비가 오지 않고, 길에는 고생이 많아, 때맞게 지나가지 못하여서, 그래서 내가 일찍 나왔는데, 경은 그 근심을 같이 하지 않고, 배 가운데 앉아서 귀신같은 물건을 만들고 있으니, 내 군대를 패배하게 하는 것은 지금 마땅히 없애라.”

고 했다. 사람을 시켜 포박하여 땅 위에 두어 햇빛에 드러나게 하고는, 비를 빌게 하면서, 만약 하늘과 감응하여 한낮 중에 비가 내리게 하면 응당 사면할 것이나, 그러지 못하면 주살할 것이라 했다. 갑자기 구름의 기운이 위로 모여 약간 정도만 합치더니, 대낮 중 즈음이 되자, 큰 비가 한꺼번에 내려 계곡이 가득 찼다. 장수와 병사들은 기뻐하며 우길이 반드시 구원될 것이라 여겨, 아울러 가서 경축하고 위로하였다. 손책이 끝내 그를 죽였다. 장수와 관리들은 슬퍼하며 함께 그의 시체를 묻었다. 밤이 되자, 홀연히 다시 구름이 일어 그 위를 덮었는데, 다음날 아침 가서 보니 (그 시체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강표전』과 『수신기』의 우길에 관한 일이 같지 않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몰래 병사를 조련하고, 여러 장수들을 나눠 배치하였다. 출발하기 전에 옛 오군태수 허공(許貢)의 빈객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앞서 손책이 허공을 죽였는데, 허공의 어린 아들과 빈객들은 강변에 도망쳐 숨었다. 손책이 단기로 나왔다가 마침내 빈객들과 마주쳤는데, 빈객들이 손책을 공격해 상처를 입혔다. 

[주 : 『강표전』에 이르길 

「광릉(廣陵)태수 진등(陳登)은 사양(射陽)을 다스렸는데, 진등은 곧 진우(陳瑀)의 사촌형의 아들이다. 

손책이 이전에 서정(西征)에 나섰을 때, 진등이 몰래 다시 사신을 보내, 인수를 엄백호의 나머지 일당에게 주고, 후에 해칠 것을 모의하여, 진우가 욕을 본 것을 갚고자 하였다. 손책이 돌아와서는 다시 진등을 토벌했다. 군대가 단도(丹到)에 도착하자, 먼저 군령 수송을 기다렸다. 

손책의 성품은 사냥하길 좋아해서 보기를 거느리고 수차례 사냥을 나갔다. 손책이 말을 몰며 사슴을 쫓는데, 그가 탄 말은 준마로 따라오는 기병들이 끊어져서 미치지 못했다. 처음, 오군태수 허공이 한의 황제에게 표를 올려 말하길 

“손책은 용맹하고 웅걸하여, 항적(=항우)과 서로 비슷하니, 마땅히 귀함과 총애를 더하여, 수도를 불러들이십시오. 만약 조서를 받고도 돌아가지 않는다면, 외방에 내쫓는 형세가 되어 필히 세상의 우환거리를 만들 것입니다.”

라 했다. 

손책의 척후 관리가 허공의 표를 얻어, 이를 손책에게 보여주었다. 손책이 허공을 청해 서로 만나고는, 허공을 꾸짖었다. 허공은 그런 표가 없다고 말했지만, 손책은 바로 무사를 시켜 그를 교살(絞殺)시켰다. 

허공의 노객(奴客)이 민간에 숨어서 허공의 복수를 하려고 했다. 사냥하는 날에, 군졸이 3명 있었는데 곧 허공의 노객이었다. 손책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라 하니, 대답하길 

“저희들은 한당(韓當)은 병사들인데, 사슴을 잡느라 여기 있는 것입니다."

라 했다. 손책이 

”한당의 병사들이라면 내가 다 아는데, 너희들은 본적이 없다.“

라 하며 이에 한 사람을 쏘고, 시위를 놓아 쓰러뜨렸다. 나머지 두 사람은 겁에 질리고 급하여, 바로 활을 들어 손책을 쏘니, 뺨에 적중했다. 나중에 기병이 곧 도착하자, 모두 찔러 죽였다.」고 한다.

『구주춘추(九州春秋)』에 이르길 

「손책은 조공이 북으로 유성(柳城)을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강남의 병사를 모두 일으키고, 스스로 대사마(大司馬)라 칭하며, 장차 북으로 허도를 습격하려 했는데, 자신의 용맹을 믿고는 가면서 대비를 해놓지 않아, 위난(危難)에 처하게 된 것이다.」

라 했다.

손성(孫盛)의 『이동평(異同評)』에 이르길 

「무릇 이런 여러 책들은 각자 잘못된 바가 있다. 손책이 비록 위엄을 강외에 떨치고 6군을 공략해 가졌지만, 황조는 그 상류에 타고 있고, 진등은 그 심복들을 이간질하며, 또한 깊고 험한 곳의 강한 일족들은 다 귀부하지 않았으며, 조공과 원소가 범같이 쟁투하느라 그 형세가 산과 바다를 기울이는데, 손책이 어찌 그 틈을 타서 멀리 여영(汝穎)으로 출사(出師)하고 황제를 오월로 옮길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무릇 용렬한 보통 사람들도 꿰뚫어 보는 바인데, 하물며 손책처럼 사세(事勢)에 통달한 자에게 있어서랴? 

또 살펴보니, 원소는 건안 5년에 여양(黎陽)에 이르렀지만, 손책은 4월에 위해를 만났으니, 지(志=『지림』)에서 손책이 조공과 원소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고 운운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등을 정벌했다는 말이 증험이 된다. 

또 『강표전』에는 손책이 한당의 군사를 다 안다고 얘기했는데, 이것은 거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고, 그저 한사람을 쏘아 죽였던 것이다. 무릇 삼군의 장수와 군사들은 혹 새로 귀부해온 자들이 있고, 손책은 대장인데, 어찌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알지 못하기에 바로 쏘아 죽였다는 것은 잘못된 논의이다. 또 손책이 죽음을 당한 것은 (건안) 5년의 일이며, 유성의 군역은 12년의 일이니, 『구주춘추』의 착오가 매우 심하다.」

고 한다.

신 송지가 살피건대; 『부자(傅子)』에도 조공이 유성을 정벌할 때, 장차 허도를 습격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 기술함이 이와 같으니,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손성이 나무란 부분은 다 옳지는 않다. 황조가 처음 손책에게 격파되었을 때, 그 혼기(魂氣)가 아직 되돌아오지 않았고, 또한 유표의 군신은 본래 겸병(兼竝)하려는 뜻이 없었으며, 비록 상류에 있다고 해도 어찌 오회 지역을 엿보겠는가? 손책이 이 거사는 이치상 먼저 진등을 도모하였고, 다만 군대를 일으키는 것이 있는 것은 진등에게 그치지 않았을 뿐이다. 이때 강한 일족들의 용맹한 두령들과 조랑(祖郎), 호嚴虎의 무리들은 사로잡히고 멸망하여 다 없어졌고, 나머지는 산월(山越)로 달아났는데, 어찌 족히 걱정거리가 될 만하겠는가? 그러나 손책이 그 틈을 엿본 것이,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손책의 뜻대로 이뤄졌다면, 대권을 손에 쥐고 회수와 사수(泗水) 사이는 가는 곳마다 모두 가히 도읍으로 삼을 수 있으니, 어찌 꼭 강외(江外)에 모두 뜻을 두기만 하고 양월(揚越)로 황제를 옮겨야 하겠는가? 『위무기(魏武紀)』를 살펴보니 무제(조조)는 건안 4년에 이미 출병하여 관도에 주둔했고, 이는 손책이 죽기 전이며, 오랫동안 원소와 교전했으니, 곧 국지(國志)에서 말한 바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허공의 빈객은 들은 바 없는 소인들이지만, 능히 식견에 감복하고 은혜를 만나니, 의에 임하여 사는 것을 잊고, 마침내 분발(奮發)하였으니, 옛 장렬함을 기다린 바가 있다. 『시경』에 “군자에게 훌륭한 계책이 있으면, 소인들도 같은 부류이다”라 하였으니, 허공의 빈객들이 그런 자들이다.]

상처가 심하자, 장소 등을 청하여 말하길 

“중국(中國=중원)은 바야흐로 난리가 일어났지만, 무릇 오월(吳越)의 군사들과 삼강(三江)의 견고함으로는 족히 대업의 성패를 살필 수 있습니다. 공 등이 나 동생을 잘 살펴 주십시오!”

라 했다. 손권을 불러 인수를 채워 주며 말하길 

“강동의 병사를 일으켜서 양 진영 사이에서 기회를 보아, 천하를 다투는 것은 경이 나만 못하다; 그러나 현인을 등용하고 능력 있는 자에게 맡겨 각자가 제 마음을 다하게 하고, 강동을 보전하는 것은 내가 경만 못하다”

라 했다. 밤이 되어 죽으니, 이 때 나이 26세였다. 

[주 : 『오력』에 이르길 

「손책이 상처를 입었을 때, 의원이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직접 보호하길 좋아하니, 백일 동안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손책이 거울을 가져다 스스로 비춰보고 좌우에 말하길 

“내 얼굴이 이와 같은데, 아직도 다시 공을 세우고 대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

라 했다. 책상을 치고 크게 분격하니, 상처가 모두 파열되어 그날 밤에 죽었다.」고 한다.

『수신기』에 이르길 

「손책이 우길을 죽이고, 매양 혼자 앉아 있었는데, 우길이 주변에 있는 듯이 바라보니, 그 뜻이 그를 매우 싫어하였고, 점차 평소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후에 상처를 치료함에 약간의 차도가 있자 거울을 끌어다 스스로 비춰봤는데, 거울 속에 우길이 있는 것을 보고 돌아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이렇게 하길 두세 번 하다 이에 거울을 깨트리고 크게 소리치니, 상처가 모두 터져 얼마 안 되어 죽었다.」

고 한다.

손권이 존호를 칭한 후, 손책에게 시호를 추증하여 장사환왕(長沙桓王)이라 하고, 아들 손소(孫紹)를 오후(吳侯)에 봉하였다가 나중에 상우후(上虞候)로 고쳐 봉했다. 손소가 죽자, 아들 손봉(孫奉)이 후사를 이었다. 손호(孫皓) 때는 손봉이 응당 제위에 올라야 한다는 요언(妖言)이 있어서, 주살되었다.

평하여 말한다. - 손견은 용감하고 강인하며, 가난하고 비천한 지위에서 집안을 일으켰다. 그는 동탁을 죽이라고 장온에게 간하였고, 동탁이 파헤친 제왕의 능묘를 덮어 가지런하게 했으며, 충성스럽고 장렬한 절개를 지니고 있었다. 손책은 기개가 호방하고 실행력이 뛰어났으며, 용맹함과 예리함은 세상을 덮었고, 비범한 인물을 살펴 취했으며, 뜻은 중국을 통일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경솔하고 함부로 결정을 내려 몸을 잃고 실패하는 데 이르렀다. 게다가 오나라가 강동에서 할거하게 된 것은 손책이 그 기초를 만들었지만, 손책에 대한 손권의 존숭은 지극하지 못했고, 그의 아들이 후작을 받는 데 그친 것은 인의의 측면에서 보아도 너무 인색하다.



손성孫盛이 이르길 : 손씨형제는 모두 훌륭한 지모가 동류를 뛰어넘는다. 기반을 창립하며 공을 세움은, 손책으로 인한 것으로, 또한 임종하던 날, 고명顧命하며 손권에게 맡겼다. 대저 우정의 사이에서도, 오히려 문경지교刎頸之交가 있는데, 하물며 천륜의 두터운 사랑 관계였고, 영웅호걸인 뛰어난 식견을 가진 이가, 어찌 이전 사람에게 명호名號를 아껴, 본성의 근원인 지극한 본질을 어긴 것이겠는가? 혹은 장차 흥망의 운수를 깊이 생각하여, 그의 명기名器를 삼간 것인가? 대저 근본이 명칭이 정확해지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큰 제방이 되고, 의심하여 다른 마음이 생기는 것을 막는 것이, 불화를 없애는 좋은 계책이다. 그러므로 노은魯隱공이 의를 숭상하다, 끝내 우보羽父의 화가 이르렀고, 송선宋宣공이 인을 품다가, 끝내 상공殤公의 슬픔이 있게 됐다. 모두 마음에 작은 선을 보전하나, 천하를 다스리는 그림에 통하지 못했고, 당년에 명예를 구하나, 후세에 물려줄 모책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천승千乘의 나라를 가벼이 여겨, 정도를 시행하는 것도 못했다고 이를 수 있다. 손씨는 어수선한 때를 이용해, 마음대로 하려는 뜻을 떨칠 수 있었으나, 기초는 덕을 많이 베풀어 쌓은 토대가 아니었고, 나라는 반석과 같은 견고함이 없어서, 권세가 하나면 번영이 이루어질 수 있으나, 뜻이 어그러지면 화란이 먼지를 일으키며 발생할 것인데, 어찌 드러나지 않은 기미를 미리 막지 않고, 장래에 재난을 걱정할 수 있겠는가? 장한 것이로다! 손책은 우두머리가 돼 대사를 주관한 임금으로, 오의 개국 군주이고, 장수와 재상으로 재직하는 이들은, 모두 오래된 이들이었으나, 대를 이을 자식은 약하고 용렬하여, 부업을 계승해도 짊어질 수 없는데, 그를 받들었다면 노환魯桓공, 전불田巿의 재앙이 일어났을 것이고, 그를 존숭했다면 여이與夷, 공자 풍馮의 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 때문에 명분에 상응하여 실질을 바르게 해 근본을 정하여, 귀천이 다르고 멀게 하여, 연후에 국가에는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함을 책망함이 없었고, 후사는 시기하는 의심이 없었고, 무리의 뜻에서는 이단의 견해가 끊어졌고, 불만을 품고 멋대로 행동하려는 이는 분수에 넘치는 야심으로 기회를 노리려는 마음을 닫았으니, 정에 있어선 비록 어긋나고, 대사에 있어선 비록 인색해도, 장구한 계획을 포괄하고, 황위를 이을 자식을 영원히 지키는 것은, 그것이 아직 없을 때 이를 다스리고, 그것이 아직 어지럽지 않을 때 이를 처리하는 거라고 이를 수 있다. 진씨陳氏의 평은, 부족한 것이로다!

분류 :
오서
조회 수 :
14871
등록일 :
2013.04.30
09:20:29 (*.52.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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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06
19:02:04
(*.52.89.88)
http://rexhistoria.net/xe/11062 에 따라 장온을 인도하여 동탁을 죽이고->동탁을 벌하고 로 바꿨습니다.

코렐솔라

2013.07.06
20:39:35
(*.52.89.88)
장온을 인도하여 동탁을 죽이고->동탁을 죽이라고 장온에게 간하였고 정사 삼국지방 순우도님의 제보에따라 이렇게 바꿨습니다. 도움 감사드립니다. 링크: http://cafe.naver.com/historicdata/1457

코렐솔라

2013.07.08
15:40:38
(*.52.89.87)
손책전의 평이 없던 것처럼 그 밑에 손성의 주석 평도 없기에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7.31
15:14:26
(*.0.203.142)
배송지 평에 조랑, 엄백호를 본문에 맞추어 엄호로 수정합니다.

구라뱅뱅

2013.09.05
15:52:43
(*.49.168.253)
손책이 이를 듣고, 돌아가 번능 등을 공격하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았다. 다시 내려와 번능을 공격하다, 유시(流矢)에 맞아서
원문 : 策聞之,還攻破能等,獲男女萬餘人。復下攻融,為流矢所中,

여기서
다시 내려와 번능을 공격하다 의 원문을 보면, 復下攻融 으로 착융笮融 이 맞네요.

코렐솔라

2013.09.05
15:54:01
(*.52.91.247)
예전에 이 글 볼 때도 번능을 이기고 또 번능을 공격하는 것이 이상하다 했더니 착융이군요. 수정했습니다.

구라뱅뱅

2013.09.09
16:17:52
(*.49.168.253)
策被詔敕,與司空曹公、衛將軍董承、益州牧劉璋等並力討袁術、劉表。
손책이 조칙을 받고, 사공(司空) 조공, 장군 동승(董承), 익주목 유장(劉璋) 등과 함께 힘을 합쳐 원술과 유표를 토벌하였다.

衛將軍 // 董承
위장군 동승

이 맞습니다.

코렐솔라

2013.09.09
16:22:53
(*.0.203.44)
장군 동승->위장군 동승 으로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구라뱅뱅

2013.09.09
17:37:47
(*.49.168.253)
是時哀紹方彊,而策并江東,曹公力未能逞,且欲撫之。
이 때 원소가 바야흐로 강성했는데, 원술이 강동을 병합했고 조공의 힘은 미칠 수 없기에, 또한 그를 위무하고자 하였다.

원술 => 손책

코렐솔라

2013.09.09
17:40:00
(*.166.245.166)
반영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것도 있었군요 ㅜㅠ

코렐솔라

2013.09.09
17:38:52
(*.166.245.166)
태자사 황역 부분 집해의 번역은 구라뱅뱅님이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rexhistoria.net/49208

구라뱅뱅

2013.09.09
17:57:22
(*.49.168.253)
又為子章取賁女
또한 아들 원장(袁章)은 손분의 딸을 맞게 하였으며

에 대한 집해 내용
又爲子彰取賁女,「◎彰,各本均作“章”。◎官本《考證》曰:章,當作“彰”,鄢陵侯也。」
관본 官本 고증 考證 에서 이르길 章은 당연히 彰 이며, 언릉후(조창)이다.

집해가 틀리다 하더라도, 원장은 아니네요. 조조 아들이 원씨라니!!

코렐솔라

2013.09.09
18:11:52
(*.166.245.166)
이건 집해가 아니더라도 건강실록에도 조창으로 나오니 조장으로 표기하고 조창이라고 따로 설명달겠습니다.

코렐솔라

2013.09.09
18:29:47
(*.166.245.166)
아무래도 원국지 패러디로 누가 집어넣은 것이 아닐까 싶긴 하군요

코렐솔라

2014.01.14
18:31:43
(*.52.91.73)
진수 평 밑에 부분은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3333102

코렐솔라

2014.01.14
18:35:02
(*.52.91.73)
그리고 진수의 평 부분과 위에 한 기사가 주석의 색깔로 되어 있길래 다시 원상복귀 시켰습니다.

코렐솔라

2016.05.20
13:53:21
(*.196.74.143)
"문대의 자는 공문"으로 할 때 문대->고대로 수정

코렐솔라

2016.06.02
12:41:21
(*.46.174.164)
육간을 육강으로 고치고

경 등이 먼저 엄백호 등을 겨가하고 하여
->
경 등이 먼저 엄백호 등을 공격하고자 하여

로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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