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史랑방
 
 
예(濊)는 남쪽으로 진한(辰韓) 북쪽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고 동쪽으로 대해(大海)에 다다르니
[집해2] 지금 조선(朝鮮)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집해3] 호(戶)는 2만이다.

[집해2] 정겸 왈, 예(濊) 또한 오래된 나라(古國)다. 주서(周書) 왕회편(王會篇)에 ‘穢人前兒(예인전아)’라는 글이 있고 진晉 때의 공조가 이를 주하여 예를 동이별종(東夷別種)이라 하였다. 그 나라의 예전 도읍은「문헌통고」에 의하면 조선의 강원도 강릉부 동쪽에 있었다. 심흠한(청) 왈,「일통지」에서 조선 강원도의 치소인 강릉부가 국성(國城)(서울)의 동쪽에 있고 본래 예맥(濊貊) 땅이었으며 한나라 때 임둔군(臨屯郡) 지경이라 하였다.

[집해3] 범엽의「후한서」에서는 “예는 서쪽은 낙랑(樂浪)에 이르며, 예(濊) 및 옥저(沃沮), 고구려(句驪)가 본래 모두 옛 조선(朝鮮)의 땅이었다.” 하였다. 

정 겸(丁謙) 왈, 예국(濊國)이 비록 조선의 동쪽에 있었으나 조선 동쪽이 유독 예(濊) 하나는 아니었다. 범씨(范氏)(→범엽)가 위지 예전 이 대목을 고쳐 ‘예 및 옥저, 구려가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 한 것이 비교적 맞는 말이다.
 
옛날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가서 여덟 조의 가르침을 지어 가르치니[집해4] 문을 닫아걸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하지 않았다. 그 후 40여 세대를 지나,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참람되게 왕(王)이라 칭했다.[집해5]

[집해4]「한서」지리지에서 

“은 (殷) 나라의 도가 쇠하자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떠나 그 백성들에게 예의(禮義), 농사와 누에치기와 직작(織作,직조)을 가르쳤다. 낙랑(樂浪), 조선민(朝鮮民)들이 8조(八條)의 금령을 범하여 사람을 죽이면 즉시 사형에 처하고,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써 갚고, 도둑질하면 남자는 몰수해 그의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계집종)로 삼았으며 속죄하고자 하면 사람마다 50만을 (속죄금으로) 내었다.” 

하였다. 

안사고(당)가 (이를 주하여) “8조가 모두 갖추어져 보이지는 않는다.” 하였다.

진秦나라 말에 진승(陳勝) 등이 봉기하여 온 천하가 진(秦)나라에 반기를 드니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民) 수만 명이 조선(朝鮮)으로 피난했다.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몽치 모양으로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복장을 입고는 또한 와서 왕이 되었다.[집해6]

[집해6] 위만(衛滿)에 관한 일은 뒤에서 배송지가「위략」을 인용한 글에 상세히 보인다.

「한서」육가전에서 “한나라 고조 유방이 남월왕의 인수를 전해 주러 육가를 위타에게 보내자 위타(尉佗)(조타趙佗)가 추계(魋結)하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채 육가를 접견했다” 하였다. 
 
한무제가 조선(朝鮮)을 쳐서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4군(四郡)을 설치했다.[집해7] 이때 이후로 호(胡), 한(漢)이 점차 구별되었다.

[집해7] 범엽의「후한서」에서는 

“연 인(燕人) 위만(衛滿)이 준(準)을 공격해 깨뜨리고는 스스로 조선의 왕이 되었고, 나라를 전해 손자인 우거에 이르렀다. 한무제 원삭(元朔) 원년(B.C 128년)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우거(右渠)를 배반하고는 28만(명)을 이끌고 요동으로 와서 내속하니, 무제가 그 땅으로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했다가 몇 년 뒤에 폐지했다. 

원봉(元封) 3년(B.C 108년)에 이르러 조선을 멸하고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도(玄菟), 진번(眞番)의 4군(部)을 나누어 설치했다. 

소제(昭帝) 시원 5년(B.C 82년)에 이르러 임둔, 진번을 폐지하고 낙랑, 현도에 병합했다. 현도는 다시 옮겨서 (고)구려에 두었다.” 하였다.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한나라 때 이래로 그 관직에는 후(侯), 읍군(邑君), 삼로(三老)가 있어 하호(下戶)들을 통치한다.
 
노인들이 예로부터 스스로 일컫기를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한다. 그들의 성정은 소박하고 성실하고 욕심이 적고 염치(廉恥)가 있어 남에게 청하거나 구걸하지 않는다. 언어(言語)와 법속(法俗)은 대체로 (고)구려(句麗)와 같으나 의복에는 다른 점이 있다. 남녀가 모두 곡령(깃이 둥근 옷)을 입고 남자는 너비 몇 촌(寸)의 은화(銀花)를 매달아 장식한다. 

단단대산령(單單大山領)[집해9]의 서쪽은 낙랑군에 소속되고 단단대산령 동쪽의 7현(七縣)은 동부도위(都尉)가 주관하였고[집해10] 모두 예(濊) 사람들을 백성(民)으로 삼았다. 

[집해9] 정겸(丁謙) 왈, 단대령은 즉 강릉(江陵)의 동쪽 일대에서 남북으로 뻗은 큰 산이다. 노필이 보건대, 여기서는 대산령(大山領)이라 적었는데 혹 嶺(령)자를 쪼개어 둘로 적은 것뿐일지도 모른다. 

[집해10] 범엽의「후한서」에서 “(현도는 다시 구려로 옮기고) 단대령 동쪽의 옥저(沃沮), 예맥(濊貊)은 모두 낙랑에 속했다. 뒤에 경토(境土)가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 다시 영동 7현(領東七縣,단단대령 동쪽의 일곱 현)을 떼어내어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다.” 하였다. 노필이 보건대 위의(앞의) 일은 동옥저전(東沃沮傳)에 보인다. 

// 정겸(丁謙) 왈, 영동7현 전서(한서) 지리지를 살펴볼 때 낙랑군이 25현이나 후한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18현 뿐이니, 폐지된 동예, 불이, 잠태, 화려, 야두매, 전막, 부조의 7현이 틀림없이 모두 영동(領東)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한서) 무제기 신찬 주(注)에서 임둔군의 치소가 동이(東暆)라 하였으니, 예(濊) 땅에 처음 창해군을 세웠다가 폐지하고 뒤에 다시 임둔군을 세웠으며, 지금의 강릉부(江陵府)가 실제로 한나라 때의 동이현(東暆縣)이었음을 알 수 있다. 

뒤에 도위(都尉)를 폐지하고 그 우두머리, 수령을 봉해 후(侯)로 삼았으며 지금의 불내예(不耐濊)가 모두 그 종(種)이다. 한나라 말에는 다시 (고)구려(句麗)에 복속되었다.

그 풍속은 산천을 중시하고 산천에는 각기 부분(部分)이 있어 함부로 서로 넘어서 들어갈 수 없다. 동성(同姓)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금기가 많아 병을 앓거나 사망(死亡)하면 곧 옛 집을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지어 거주한다.

마포(麻布,삼베)가 있고 누에를 쳐서 명주실을 만든다. 별을 살피는 법을 깨우쳐[집해12]그 해의 풍약(豊約,풍성함과 빈약함)을 미리 안다. 주옥(珠玉,진주와 옥)을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항상 10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밤낮으로 음주가무(飮酒歌舞)하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부른다. 또 호랑이에 제사지내며 신(神)으로 여긴다. 그 읍락(邑落)이 서로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그 벌로 노예, 소, 말을 물리니 이를 책화(責禍)라 한다.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음으로써 갚게 하며,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길이 3장(丈)의 모(矛)를 만들어 때로 몇 명이 함께 이를 잡고 쓰기도 하며 보병 전투에 능하다. 낙랑단궁이 그 땅에서 난다. 그곳의 바다에서는 반어피(班魚皮)가 나고 토지에는 무늬 있는 표범이 많다. 또한 과하마(果下馬)가 나며 한나라 환제(桓帝) 때 이를 헌상하였다.[1]

[1] 신 송지가 보건대, 과하마(果下馬)는 키가 3척으로 매우 작아서 이를 타고 과일나무 아래를 지나갈 수 있으므로 과하라 일컬었다. 박물지(博物志)와 위도부(魏都賦)에 보인다.[집해14]

[집해14] 혜동(惠棟) 왈,「박물지」에서 “바다에서는 반어피가 나고 뭍에서는 무늬 있는 표범이 난다.” 하였다.

「관자」규탁편에서는 “발조선(發朝鮮)의 무늬 있는 가죽"이라 하였다. 또 경중갑편(輕重甲篇)에서는 “발조선이 조현하지 않으면 청컨대 털을 없앤 가죽옷을 화폐(幣)로 삼으십시오.” 하였고 “표범 가죽 하나는 천금의 값어치에 달하니 이를 화폐로 삼은 연후에는 교역의 이익을 누리기 위해 8천리 밖의 발조선(發朝鮮)이 조현하러 올 것입니다.” 하였다.

「이아」태부(太府)에서는 “동북쪽의 아름다운 것으로는 척산(斥山)의 털을 없앤 가죽이 있다.” 하였고 곽박(郭璞)이 이를 注하여 “호표(호랑이나 표범) 부류의 가죽에 색과 무늬가 있으니 이 문피(文皮)는 즉 무늬 있는 표범의 가죽이다.” 라고 하였다. 

유규(劉逵)가 위도부(魏都賦)에 주(注)하여 “한나라 때의 마구간에는 예전에 낙랑(樂浪)이 헌상한 과하마(果下馬)가 있었으니 키가 3척이고 수레를 끌었다.” 하였다.

명나라 때의 황홍헌은「조선국기」에서 “과하마, 장미계(長尾雞,닭의 일종), 초놜(貂豽), 해표피(海豹皮)가 산출된다.” 하였다. 

강서명은 "정장거(定張車,작은 수레 종류), 과하마(果下馬)가 모두 궁정 내에서 쓰였다.” 고 하였다.

(위나라 제왕 조방) 정시(正始) 6년(245년),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영동의 예(濊)가 구려(句麗)에게 예속한다 하여 군대를 일으켜 이를 치자 불내후(不耐侯) 등이 읍(邑)을 들어 항복했다.

정시 8년(247년), 궐로 와서 조공하니 조서를 내려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임명했다. 불내예왕은 그 백성들 사이에서 뒤섞여 살며 사시(四時)로 낙랑 또는 대방군(郡)으로 와서 조회하여 알현하였다. 두 군(郡)(낙랑군과 대방군)에 군사 정벌이 있거나 세금을 거둘 때면 예민들에게도 물자를 공급하고 노역하게 하여 마치 (郡의) 백성처럼 대우하였다.[집해15]

[집해15] 정겸 왈, 위의 앞의 고구려전, 동옥저전에서는 예맥(濊貊)이라 함께 칭했다가 여기서는 예(濊)만 싣고 맥(貊)은 빠뜨렸으니 또한 거칠고 엉성하도다.「동번기요」를 살펴보니 맥(貊)의 도읍(貊都)이 강원도 춘천부 북쪽 13리 되는 곳의 소양강 북쪽 연안에 있었다 한다.

출처: 史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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