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楊戲)는 자가 문연(文然)이고 건위군(犍為) 무양현(武陽) 사람이다. 어려서 자가 공홍(公弘)인 파서군(巴西)의 정기(程祁), 자가 계유(季儒)인 파군(巴郡)의 양태(楊汰), 자가 백달(伯達)인 촉군(蜀郡)의 장표(張表)와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양희는 항상 정기를 추천하며 그들 가운데 제일 뛰어난 자라고 주장했는데, 승상(丞相) 제갈양(亮)은 그를 충분히 알았다.
제갈양이 세상을 떠난 후, 상서우선부랑(尚書右選部郎)으로 임명됐고, 자사(刺史) 장완(蔣琬)에게 초빙되어 치중종사사(治中從事史)가
됐다. 장완(琬)은 대장군(大將軍)의 신분으로 부(府)를 열었을 때, 또 양희를 초빙하여 동조연(東曹掾)에 임명했고,
남중랑참군(南中郎參軍)으로 승진시켰으며, 내강도독(庲降都督)의 부장이 되었고, 건녕태수(建寧太守)를 겸임했따. 질병으로 인해
성도로 소환되어 호군감군(護軍監軍)에 임명되었다. 지방으로 나가 재동태수(梓潼太守)를 겸임하고, 중앙으로 들어와
사성교위(射聲校尉)가 되었다.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간략하며 번잡함이 없었다.
연희(延熙) 20년(257)에 대장군(大將軍) 강유(姜維)를 따라 출전하여 망수(芒水)까지 갔다. 양희는 평소 마음속으로는 강유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술을 마신 후 담소할 때, 늘상 조소하는 말을 했다. 강유는 겉으로는 관대하게 보였지만 내심으로는
견딜 수 없었다. 군대가 돌아온 후, 담당관리는 강유의 마음을 알고 상주하여 양희를 면직시켜 평민이 되도록 했다. 그 후 양희는
경요 4년(261)에 세상을 떠났다.
양희의 성격은 비록 게으르고 일을 허투루했지만,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감언을 하지도, 지나친 애정을 대하지도 않았다. 문서로
사무상의 지시를 줄 경우는 종이 한 장을 전부 사용할 때가 드물었다. 그러나 옛 친구에 대한 우정은 독실하여 정성과 두터운
정으로써 대했다. 파서군(巴西)의 한엄(韓儼)ㆍ여도(黎韜)는 어려서부터 서로 친했는데, 후에 한엄은 심한 질병으로 인해 폐인처럼
되고, 여도는 선행이 없어 버림받게 되었다. 양희는 그들을 위해 각종 사무를 경영하고 생활을 원조하여 처음과 같은 우정을 나눴다.
또 당시 사람들은 초주(譙周)는 그 시대에 맞는 재능이 없다고 말하며 그를 존경하는 자가 적었지만, 양희만은 그를 중시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칭찬의 말을 했다.
“우리들의 자손은 시종 이 키다리(초주를 말하는 것인데 초주는 키가 8척이 되었다고 함)만 못할 것입니다.”
식견있는 자들은 이 때문에 양희를 존경하며 중시했다.
장표(張表)는 장중한 의표와 태도를 갖추었고, 처음에는 명성과 관위가 양희와 같았는데, 후에 상서(尚書)까지 올라갔고,
독내강(督庲降)ㆍ후장군(後將軍)이 되었고, 양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정기(祁)와 양태(汰)는 각기 일찍 세상을 떠났다.
화양국지(華陽國志): 이밀(李密)의 조부는 이광(李光)으로 주제태수(朱提太守)였다. 아버지는 빨리 죽었다. 어머니 하씨(何氏)씨는 경적(更適)사람이다. 이밀은 할머니에게 길러졌다. 춘추좌씨전을 배웠다.
"관리들이 쓰기에는 여유가 있고, 백성들은 스스로 자급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또한 손권은 형제의 우열에 대하고 논의를 걸어
"사람의 형(오빠)이 되는 것보다도, 남동생이 되는 것이 좋다(손권은 손견의 차남)"
라고 주장했다. 이밀은
"저는 바라건대 형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손권이 대답했다.
"왜 형이 되고십습니까?"
이밀이 대답했다.
"형이 되면 그 만큼 부모님을 길게 돌볼 수 있을테니까"
라고 대답했고, 오의 군신은 모두 감탄했다.
"신은 운수가 사납고 죄가 많아 어린나이에 불행을 당하였습니다. 태어난지 6개월만에 자애로우신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이 4살때 외삼촌이 어머니의 뜻을 꺾고 개가시켰습니다. 조모유씨는 제가 외롭고 약함을 불쌍히 여기여 몸소 어루만지며 키워주셨습니다. 신은 어려서 병이 많아 9살까지 잘 걷지 못하고 외롭고 쓸쓸히 고생하며 성년에 이르렀습니다. (신에게는)숙부.백부도 없고, 형제도 없습니다. 가문은 쇠하고 박복하여 늦게서야 자식을 두었습니다. 밖으로는 기복과 공복을 입거나 억지로라도 가까이할 친척이 없으며 안으로는 문에서 맞이하는 시종도 없습니다. 외로이 홀로선채 몸과 그림자만 서로 위로할 뿐이었는데 유씨가 일찍부터 병에 걸려 침상에 누워계시니 신은 탕약을 받들어 일찍이 버려두고 떠난적이 없습니다. 성스러운 조정을 받들기에 이르러 맑은 교화를 흠뻑입었습니다. 앞서 태수 규가 신을 효렴에 추천하더니 후에 자사인 영이 신을 수재로 천거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공양을 맡을 사람이 없어서 사양하고 명을 받들지 않았습니다. 조서가 특별히 내려져 신을 낭중 벼슬에 임명하시고 얼마후 나라의 은혜를 입게 되어 신에게 세마의 벼슬을 제수하였습니다. 외람되이 미천한 몸으로 동궁(태자)를 모시게 되어서 신은 죽어서도 보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할머니가 죽고 상이 끝나자, 이밀은 상복을 벗고, 상서랑(尚書郎)으로부터 하내(河內) 온(溫)현의 령로 승진하여 엄격하고 명백히 정치함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했다. 중산제왕이 매번 온현을 지나갈 적마다, 반드시 트집을 잡아 재화를 청하니, 온현의 백성과 관리들을 (이를) 근심으로 여기고 상당히 걱정하였다. 이밀의 치세에 이르러, 중산왕(中山王)이 (온)현을 지날 때, 추교(芻茭: 말이나 소를 먹이던 풀)와 땔나무를 요구하였더니 이밀은 한(漢) 고제(高祖)가 패(沛)현을 지날 적에, (패현의) 늙은이와 어린아이에게 예의를 갖추어 극진히 대접하고 고향의 공물은 한치도 번거롭고 요란한 누를 끼치지 않으며 받지 않던 옛 고사를 인용하여 상주문을 올렸다.
- 삼가 생각하건대, 명왕(明王)께서 효도하는 생각이 법이 되고, 몸소 경계를 기울이셔서 알고 움직이시면, (백성들이) 나라를 우러러 보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백성의 재물 따위를 강제로 요구하여 빼앗는 것은 (성현의) 가르침을 들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이후로 중산왕은 (온현을) 지나간 적이 있으나 감히 번잡스럽게 추태를 부리지 않게 되었다. 농서왕(隴西王) 사마자서(司馬子舒=사마태(司馬泰), 사마의 동생 사마규의 둘째 아들)와는 친구로서 깊이 공경하여 지냈으나, 그 집안의 권세에 마음두는 일 없이 공정하고 정직히 사귀었다.
이밀이 임기가 끝나, 주대중정(州大中正)이 되었다. 성품이 바르고 곧은지라 사사로이 권력이 있는 자리나 지위에 굽히지 않았다. 순욱(荀勖)과 장화(張華)를 (잘못을) 지적해 사이가 틀어져 한중태수(漢中太守)로 좌천되었다. 여러 제왕들은 이를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 1년 뒤 벼슬에서 나오고(정확히는 면직되었음), 6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한 이론이 10편에
달했고, 안동장군(安東將軍) 호웅(胡熊), 황부사안(皇甫士安= 황보밀(皇甫謐), 황보숭(皇甫嵩)의 증손)과는 서로 사이가 막역하였다.
양희는 연희 4년(241)에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을 지었다. 그가 칭송하여 서술한 자는 지금 대부분 촉서(蜀書)에 실려 있다. 이
때문에 아래에 기록하겠다. 이 이후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시호를 추가하지 않았다. 때문에 간혹 칭송되어 수록되어야 되지만, 이
편에 없는 자도 있다. 양희가 칭찬한 자로 현재 전(傳)이 만들어지지 않은 자는 내가(삼국지의 저자 진수) 모두 양희의 찬사
아래에 그들에 관한 이력을 기록하니, 그들의 대체적인 자취를 소략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 다음 얘기는 사요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1037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