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권(孫權)은 자가 중모(仲謀) 이다.

그의 형 손책이 강동의 여러 현들을 평정했을 때, 손권의 나이가 15세였는데, 양성현의 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군에서 효렴으로 되었고, 주에서 무재로 천거되었으며, 봉의교위를 대행했다.

강표전 江表傳에서 이르길 : 손견이 하비승下邳丞일 때, 손권이 태어났는데, 네모난 얼굴에 입이 컸고, 눈에서 광채가 나, 손견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며, 귀한 상이라고 생각했다. 손견이 죽고, 손책이 강동에서 군을 일으키니, 손권은 늘 따라다녔다. 성격과 도량이 크고 밝으며, 어질고 과단성이 뛰어났으며, 협객을 좋아해 선비를 양성하니, 비로소 이름이 알려져, 부형父兄과 동등해졌다. 매번 참여하여 함께 계략을 세우니, 손책이 그를 매우 기이하게 여기며,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매번 빈객을 만나길 청하곤, 항상 손권을 돌아보곤 이르길

“여기 있는 제군이, 너의 장수들이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손책이 멀리 있으면서도 신하로서의 책임을 다하여 공물을 상납했으므로 사자 유완을 보내 작위와 관복을 하사했다. 유완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제가 보건대, 손씨 형제는 비록 각기 재능이 출중하고 사리에 통달했을지라도 모두 수명이 길지 못합니다. 오직 둘째 손권만은 모습이 기이하고 특이하며, 골상도 평범하지 않아 크게 귀하게 될 징조가 있으며, 수명 또한 가장 깁니다. 여러분들은 제 말을 기억해 두십시오.』

건안 4년(199년), 손권은 손책을 따라 여강태수 유훈을 정벌하러 갔다. 유훈을 격파한 후, 진군하여 사이(沙羨)에서 황조를 토벌했다.

/沙羨: 사선이라 읽어야 할 것 같지만 《한서》 지리지의 주석에 '羨의 음은 夷라.'라고 하여 사이라고 읽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5년(200년), 손책이 사망하자, 대사를 손권에게 맡겼다. 손권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손책의 장사 장소가 손권에게 말했다.

『효렴, 어찌 울고 있을 때입니까? 더구나 주공이 상례를 세웠으나 아들 백금이 따르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를 거스르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 당시 부득이 상례를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현재 사악한 자들이 서로 각축을 벌이고 있으며, 시랑이 같은 자들이 길에 가득 차 있는데, 오히려 가까이 있는 자(손책)를 애도하려고 상례의 규정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을 열고 강도를 불러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지, 인(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 배송지裵松之가 살피건대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서 이르길 : “자하子夏가 묻길 ‘3년의 상 중에, 전쟁을 피하지 않음은, 예禮입니까? 유사有司에게서 비롯된 것입니까?’ 공자孔子가 이르길 : ‘내가 노담老聃에게서 듣기론, 과거 노공魯公 백금伯禽이 이러함이 있었다고 한다.’ 정현주鄭玄注에서 이르길 : “주인周人들은 졸곡卒哭하고 사직했었다. 당시 서융徐戎이 난을 일으켜, 백금은 졸곡하고 이를 정벌했으니, 임금을 위한 일을 서둘러 도왔다.” 장소가 이른 ‘백금은 기준으로 삼고 따르지 않다’가, 대략 이를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손권의 상복을 바꿔 입게 하고, 말에 올라 밖으로 나가 군대를 순시토록 했다. 이 당시 손권은 오직 회계, 오군, 단양, 예장, 여릉만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중 몇몇 군은 멀리 험준한 곳으로서 아직 전부 복속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각 주와 군에 퍼져 있었으며, 빈객으로 의탁하고 있는 선비들도 개인의 안위로서 자신이 가서 머물 곳을 결정하였으므로, 군주와 신하의 두터운 관계는 없었다. 장소와 주유 등은 손권이 자신들과 함께 대업을 이룰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을 맡기고 손권을 섬겼다.

조조는 표를 올려 손권을 토로장군으로 임명하고 회계태수를 겸임토록 했다. 손권은 오에 주둔하면서 오군의 승을 회계군으로 보내 문서와 사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손권은 장소를 태사태부의 예로써 대우하고, 주유, 정보, 여범 등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재능이 걸출한 사람들을 부르고, 예로써 명망 있는 선비를 초빙하였으므로 노숙, 제갈근 등이 비로소 빈객이 되었다. 손권은 부장들을 각지로 파견해, 산월족을 진압하고 어루만졌으며,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토벌했다.

산월족은 부락 이름이기도 하며, 한나라 말기에서 당대까지 강소성과 절강성 등의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부족의 이름이기도 하다.

강표전: 예전에 손책이 표를 올려 이술(李術)을 여강태수(廬江太守)로 삼았는데, 손책이 죽은 후에, 이술은 손권을 따르지 않고, 손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맞아 들였다. 손권이 편지를 써서 도망자들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술은 

"덕이 있었으면 되돌아갔을텐데 덕이 없으니까 도망쳐 나온 것 아닙니까? 왜 다시 되돌려 보내야 합니까?"

라고 하였다. 손권이 크게 노하며 이 사실을 조공에게 알렸다. 

"엄자사(嚴刺史)[양주자사(揚州刺史) 엄상(嚴象)]는 옛날에 공께서 임용한 바였으며, 한 주(州)가 임명한 장군이었음에도, 이술이라는 자가 흉악하게도 한나라 제도를 범하고, 그를 해치면서 제멋대로 굴며 무도하니 마땅히 신속하게 죽여 없애야 합니다. 이제 이술을 치려는 바, 이는 한편으로 국조(國朝)를 위해 흉악한 무리(鯨鯢)를 없애려 함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추천해준 장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원수(怨讎)갚음을 돕고자 함입니다. 또 이는 천하의 의를 전하기 위함이기에 밤낮(夙夜)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지금 이술은 반드시 다시 거짓으로 말하여 구원을 청구할 것입니다. 밝으신 공께서는 아형(阿衡)의 벼슬에 계시면서 해내에서 우러러보고 있으니, 바라건대 집사에게 칙령을 내리셔서 다시는 들어주지 마십시오."

이 해에 병사들을 이끌고 손권은 환성(皖城)에서 이술을 공격했다. 이술은 성을 닫고 수비에 들어갔고 조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조조는 구원하지 않았다. 식량이 떨어지자 부녀 중 어떤 이들은 진흙을 말아 삼켰다. 마침내 성을 도륙해, 이술의 목을 매달았고, 그의 부곡 3만여 인을 옮겼다

7년(202년), 손권의 어머니 오국태가 세상을 떠났다. 

 
8년(203년), 손권은 서쪽으로 황조를 토벌하러 가서 그의 수군을 격파하였으나 오직 성만큼은 함락시킬 수 없었는데, 산월족이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손권은 군대를 돌려 예장을 지나와서 여범으로 하여금 파양을 평정토록 하고, 정보에게는 악안을 토벌하도록 했으며, 태사자에게는 해혼을 다스리도록 했다. 한당, 주태, 여몽 등은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있는 여러 현의 현령이나 장으로 임명됐다.
  
9년(204년), 손권의 동생인 단양태수 손익이 측근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사촌형 손유가 손익의 자리를 대신했다. [주]
 
[주] 오록(吳錄): 어느 날 손권이 백관들과 연회를 하고 있었는데 심우(沈友)와 옳고 그름을 가지고 논하였다. 손권이 사람들에게 명하여 그를 붙잡아 내보내게 하면서 말했다. 

"어떤 사람이 경(卿)이 반란을 꾸민다고 알려 왔소."

하고 말했다. 심우는 말해 봐야 소용없음을 알고 손권에게 말했다. 

"주상(主上: 헌제)께서 허(許)도에 계시는데도 무군지심(無君之心: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 임금을 얕보거나 업신여김)을 품고 있는 자들도 (바로 당신도) 반역인 것은 마찬가지 아니오?" 

하고 말했다. 손권은 곧 그를 죽였다.

심우(沈友)는 자가 자정(子正)이고 우군(吳郡)사람이다. 11살에 화흠(華歆)이 풍속(風俗)을 순시하다가 그를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불러 말하기를 

"심랑(沈郎), 수레에 올라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심우가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군자(君子)가 호의를 맺고 회연(會宴)을 할 때는 예(禮)로써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인의(仁義)가 쇠퇴하고 성현들의 도가 무너지매 선생께서는 명을 받들어 장차 교화를 널리 펴시고 풍속을 바로 잡으셔야 할 터인데, (지금) 위의(威儀)를 가볍게 여겨 벗어나게 (행동하시는 것은) 장작을 짊어지고 불을 끄러 가는 것과 같으니[負薪救火], 불타는 것을 더욱 거세지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更崇其熾]?" 

하였다.

화흠이 부끄러워하며 말하기를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시대로부터 비록 빼어난 이들이 [英彥], 많이 나왔으나, 어린 나이에 벌써 이와 같은 자는 없었다."

하였다.

심우는 약관의 나이에 박학하고 꿰뚫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다가, 글을 잘 지었으며, 또한 군사에 관한 일을 좋아하여,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주(注)를 달았다. 또한 변론하여 말하는 것마다 사람들이 모두 말문이 막혀 상대하지 못하였으므로, 모두 그의 붓(筆之妙), 혀(舌之妙), 칼(刀之妙), 이 세 개 모두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하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손권이 예로써 초빙하니 와서 패왕(霸王)의 지략과, 당시의 문제에 대해서 논하였고, 손권이 높이 평가했다. 형주(荊州)를 취하여 겸병해야 함을 아뢰니 손권이 받아들였다. 심우는 얼굴빛을 바로하고 바른 말을 하는데다, 풍채가 준려(峻厲)하여 용렬한 신하들과 크게 달랐으므로, 마침내 모반(謀反)하였다고 모함을 받았다. 손권 또한 그의 재주가 빼어남을 꺼렸기 때문에 심우를 죽였다. 그의 나이 29였다.

10년(205년), 손권은 하제에게 상요를 토벌하도록 하고, 상요를 분할하여 건평현을 만들었다.
 
12년(207년), 서쪽으로 황조를 정벌하여 그의 관리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13년(208년) 봄, 손권은 또 다시 황조를 정벌하러 갔다. 황조는 먼저 수군을 파견하여 손권의 군대를 막았는데, 도위 여몽이 황조의 선봉을 격파시키고, 능통과 동습 등이 모든 정예부대로 황조를 공격하여 마침내 그의 성을 함락시켰다. 황조는 혼자 달아났지만, 기사 풍칙(馮則)이 추격하여 그의 머리를 베고, 그의 부하 남녀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해, 하제에게 이()현, 섭()현을 토벌하도록 하고, 섭현을 분할하여 시신(始新)현, 신정(新定)현(1), 여양(犁陽)현, 휴양(休陽)현(2)을 만들었으며, 이 여섯 현으로 신도군을 만들었다.

(1) 오록(吳錄)에 이르길: 진은 신정(新定)을 수안(遂安)으로 바꿨다.

(2) 오록(吳錄)에 이르길: 진은 휴양(休陽)을 해녕(海寧)으로 바꿨다.


형주목 유표가 죽자, 노숙이 명을 받들어 유표의 두 아들을 위로하고, 아울러 형주의 변화를 관찰하기를 원했다. 노숙이 형주에 도착하기 전에 조조가 이미 변방 지역까지 진군해 왔으므로, 유표의 아들 유종은 무리를 바치고 항복했다. 유비는 남쪽으로 장강을 건너려고 하다가 노숙과 만나게 되었다. 노숙은 그 기회에 손권의 뜻을 전달하고, 그를 위해 오늘 이후 일의 성패에 대해 진술했다. 

유비는 진군하여 하구에서 주둔하면서 제갈량을 손권에게 보내 만나도록 했다. 손권은 주유와 정보 등을 유비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이때 조조는 방금 유표의 병력을 얻었으므로 형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손권의 많은 모사들은 모두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두려워하였으며, 대부분 손권에게 조조를 맞아들여 항복하기를 권유했다.
 
강표전에 실린 조조가 손권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르길
 
「요즘은 죄상을 들어 죄지은 자들은 토벌했고, 군기가 남쪽으로 향하자 유종이 항복했소. 이제 수군 80만을 단련하여 바야흐로 오(吳) 땅에서 손장군과 자웅을 가려보려고 하오.」
 
손권은 이 편지를 들고 있다가 모든 신하들에게 보여주자, 두려워하면서 실색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오직 주유와 노숙만이 조조에게 저항할 것을 주장하여 손권과 뜻을 같이 했다. 주유와 정보는 좌우독이 되어 각각 1만 명을 인솔하여 유비와 함께 진격해 적벽에서 맞부딪쳐 조조의 군대를 크게 격파시켰다. 조조는 남아 있는 배에 불을 지르고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사졸들은 굶주리고 역병이 유행하였으므로 죽은 자가 대부분이었다. 유비와 주유 등은 또 남군까지 추격했다. 조조는 그대로 북쪽으로 돌아가고, 조인과 서황에게는 강릉을, 악진에게는 양양을 지키도록 했다. 

그 당시 감녕은 이릉에서 조인의 부하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손권은 여몽의 계책을 써서 능통을 남겨 조인에게 저항하도록 하면서, 그 중 절반의 병력은 감녕을 원조했다. 이 때문에 오나라 군대는 승리하여 돌아왔다. 손권은 직접 병사들을 인솔하여 합비를 포위하고, 장소에게 구강군의 당도현을 공격하도록 했다. 장소의 병력은 불리했는데, 손권은 성을 공격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조조는 형주에서 돌아와 장희를 보내 기병을 이끌고 합비로 가도록 했다. 조조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손권은 후퇴했다.

14년(209년), 주유와 조인이 서로 대치한 지 1년이 넘어,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조인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손권은 주유를 남군태수로 삼았다. 유비는 표를 올려 손권에게 거기장군을 대행하도록 하고 서주목을 겸임하도록 했다. 유비는 형주목을 맡아 공안에 주둔했다.

 
15년(210년), 예장을 분할하여 파양군을 만들고, 장사군을 나누어 한창군을 두었으며, 노숙을 태수로 임명하여 육구에 주둔하도록 했다.
 
16년(211년), 손권이 관소를 말릉으로 옮겼다. 다음 해, 석두성을 수축하고 말릉을 건업으로 고쳤다. 조조가 장차 침략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유수오를 만들었다.
 
18년(213년) 정월, 조조가 유수를 공격해 손권과 한 달 남짓 서로 대치했다. 조조는 멀리 손권의 군대를 보고 그들의 정제하고 엄숙함을 찬탄하고는 곧 물러갔다.
 
조조는 유수까지 진격해 와서 유선(배의 일종)을 만들어, 밤에 중주를 건넜다. 손권은 수군을 움직여 포위하고는 3천 명을 붙잡았으나, 근의 군대 역시 빠져 죽은 자가 수천이나 되었다. 손권이 몇 차례 싸움을 걸었지만, 조조는 굳게 지킬 뿐 나오지 않았다. 손권은 스스로 빠른 배를 타고 유수구로부터 조조의 군대로 들어갔다. 조조의 장수들은 오나라 군대가 공격해 오는 줄 알고 그들을 치려했다. 조조가 말했다.
 
『이는 필시 손권이 우리 군대의 대오를 보려고 오는 것이다.』
 
군중에 명을 내려 엄숙함을 보이게 하고, 궁노들에게는 함부로 활을 쏘지 말도록 했다. 손권은 5, 6리를 나아가다가 군대를 철수시키려 북을 올렸다. 조조는 그 북소리에 맞춰 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려면 응당 손중모(손권) 같아야지 유경승(유표)의 아들들은 개돼지와 같구나!』
 
라고 했다. 아울러 손권은 조조에게 서찰을 보내어 말하기를
 
「봄물이 바야흐로 불어나니 공은 속히 떠나십시오!」
 
라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종이에
 
「당신이 죽지 않으면 나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라고 위협했다. 조조는 여러 장수들에게
 
『손권이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는 철수했다.

위략(魏略)에서 이르길, 손권이 큰 배를 타고 전황을 살펴보니, 조공이 궁노수(弓弩)로 하여금 마구 쏘게 하여 화살이 배에 꽂히고 있었다. 배가 한쪽으로 기우뚱하자 손권은 배를 돌려 다시 한쪽 면에 화살을 꽂히게 하여 배의 평형을 맞춘 뒤 돌아왔다.

 

당초 조조는 장강 북쪽 해안의 군과 현을 손권에게 탈취당하게 될 것을 걱정하여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내지로 이주하도록 명했다. 백성들은 서로 놀랐으며 여강, 구강, 기춘, 광릉의 10여 만 호가 모두 장강을 건너 동쪽으로 이주했다. 장강 서쪽은 그래서 텅 비게 되어 합비 남쪽으로는 오직 환성만이 있게 되었다.
  
19년(214년) 5월, 손권이 환성을 정벌했다. 윤달에 환성을 함락시키고, 여강태수 주광과 참군 동화, 남녀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해, 유비가 촉을 평정했다.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를 손에 넣었으므로 제갈근을 시켜 형주의 여러 군을 돌려주도록 요구했다. 이에 유비는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취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돌려주겠습니다.』
 
손권이 말했다.
 
『이는 빌렸으면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며, 공허한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쪽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를 두었다. 그러나 관우가 이들을 모두 내쫓았다. 손권은 매우 노여워하며 즉시 여몽을 파견해 선우단, 서충, 손규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巴丘)(주)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했다. 손권은 육구에 머물면서 여러 군대를 총지휘했다. 여몽이 도착하자, 장사와 계양 두 군은 모두 복종했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만이 투항하지 않았다.

파구(巴丘)는 오늘 날의 파릉(巴陵)을 말함이다.


마침 유비가 공안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익양까지 가도록 했다. 그래서 손권은 곧 여몽 등을 불러 돌아가서 노숙을 원조하도록 했다. 여몽이 사자를 보내 학보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학보는 투항했다. 이렇게 하여 세 군의 장수와 태수를 모두 손에 넣었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손교, 반장 및 노숙의 병사들과 함께 전진하여 익양에서 관우에게 저항했다.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마침 조조가 한중으로 들어갔다. 유비는 익주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손권과 화해하도록 했다. 손권은 제갈근에게 유비에게 가서 응답하도록 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형주를 나누어 장사, 강하, 계양 동쪽 지역을 손권에게 돌려주고, 남군, 영릉, 무릉 서쪽 지역을 유비에게 귀속시켰다. 손권은 육구로부터 돌아와 합비를 정벌하려고 했다. 합비를 공략할 수 없자,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오려 했다. 병사들이 모두 길에 올랐을 때, 손권은 능통, 감녕 등과 함께 진 북쪽에서 위나라 장수 장료의 습격을 받았다. 능통 등이 죽을 각오로 손권을 방어했다. 그 사이 손권은 준마를 타고 진교를 넘어 달아났다. [주]

[주] 헌제춘추: 장료가 항복한 오나라 장수들에게 물었다. 

"아까 보니깐 자줏빛 수염(紫髯)을 가진 장군이 있었어. 상체는 길고 하체는 짧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던데, 그게 누구요?" 

항복한 장수가 말했다. 

"그것은 손회계(孫會稽: 손권)입니다"

하자, 장료와 악진은 서로 쳐다보며, 말할 시간도 없이, 뛰어나가 추격했지만, 그것으로 만족해야 해서, 군(軍)전체가 잃어버린 기회를 안타까워했다.

강표전: 손권의 진교(津橋: 나루터에 설치된 부두 비슷하게 생긴 다리?)에서 준마에 탄 채 있었는데, 진교 남쪽은 이미 철거되어 한 길 남짓 널빤지가 없었다. 곡리(谷利)가 말 뒤에 있다가 손권에게 안장을 꼭 잡고 고삐를 늦춰 잡게 한 다음, 채찍으로 말이 뛰는 것을 도와 드디어 진교를 건너뛰게 했다. 손권이 그곳에서 살아나자 즉시 곡리를 도정후(都亭侯)후에 봉했다. 곡리는 본디 옆에서 모시는 급사(給使)였다. 근직(謹直: 신중(愼重)하고 올곧음)하고 친근감이 많고, 충의에 마음이 두텁고 외곬이었고, 말함에 있어서 쓸데없는 말을 안 하였기에, 손권의 그에 대한 총애와 신뢰는 상당한 것이었다.

21년(216년) 겨울, 조조는 거소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곧이어 유수를 공격했다.
 
22년(217년) 봄, 손권은 도위 서상을 파견하여 조조를 만나 항복을 청하도록 했다. 조조는 사자를 보내 화의에 동의한다고 대답하고 새로 결혼하게 될 것을 약속했다.
 
23년(218년) 10월, 손권은 장차 오군으로 가서 직접 말을 타고 능정에서 호랑이를 쏘려고 했다. 말은 호랑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손권은 쌍극을 던졌다. 호랑이가 상처를 입고 물러나자, 항상 따라다니던 장세(張世)가 창으로 공격하여 사로잡았다.
 
24년(219년), 관우가 양양에서 조인을 포위하자, 조조는 좌장군 우금을 보내 주인을 구원하도록 했다. 때마침 한수가 불었기 때문에 관우는 수군을 이용하여 우금 등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전부 포로로 잡아 강릉으로 압송했다.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손권은 내심 관우를 두려워했지만, 겉으로는 자신의 공을 알리고 싶은 생각으로 조조에게 편지를 써서 관우를 토벌하는데 자신이 힘을 보태기를 청했다. 조조는 이것은 관우와 손권으로 하여금 서로 대치하여 싸우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역참에게 손권의 편지를 조인이 있는 곳으로 보내 조인이 화살을 쏘아 관우에게 보이도록 했다. 관우는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했다. 

윤달, 손권은 관우를 정벌하려고 먼저 여몽을 파견해 공안을 습격하도록 하여 장군 사인을 붙잡았다. 여몽이 남군에 도착하자, 남군태수 미방은 성을 버리고 투항했다.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수복하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과 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12월, 반장의 사마 마충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붙잡았다. 그래서 형주는 평정됐다. 이 해, 역병이 성행하였다. 손권은 형주 백성들의 조세를 전부 면제시켜 주었다. 조조는 표를 올려 손권을 표기장군으로 임명하고, 가절을 주고 형주목을 겸임토록 했으며, 남창후에 봉했다. 손권은 교위 양우를 보내 한 황실에 공물을 바치도록 했고, 아울러 왕돈에게 명하여 말을 사들이도록 했으며, 또 주광 등을 석방하여 위나라로 돌아가도록 했다. [주]

[주] 위략: 양우(梁寓: 梁寓)의 자는 공유(孔儒)인데 오군 사람이다. 손권이 조공을 살피기 위해 양우를 파견했는데, 그를 연(掾)삼고 곧 되돌려 보냈다.
 
 25년(220년) 봄 정월, 조조가 세상을 떠났다. 태자 조비가 부친을 대신하여 승상과 위왕이 되었으며, 연호를 연강으로 고쳤다.
 
 가을, 위나라 장수 매부(梅敷)가 장검(張儉)을 사자로 보내 손권에게 몸을 의탁하여 보살핌을 받게 해달라고 청했다. 남양군의 음, 찬, 축양, 산도, 중려 다섯 현의 백성 5천 호가 와서 귀속되었다.
  
 겨울, 위나라의 사왕(조비)이 존호를 칭하고 연호를 황초로 바꿨다.
 
 황초 2년(221년) 4월, 유비가 촉에서 제로 칭했다.
 
위략에서 이르길: 손권은 위 문제 조비가 선양받고, 유비가 제를 칭하자, 별점을 잘 치는 자를 불러 자신의 구역에 해당하는 성기(별의 기운)가 어떠하냐고 물어보고는 스스로 참칭하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위차가 아직 낮음으로 무리에 위엄을 보일 수 없었고, 또한 먼저 낮추고 후에 웅거하고자 하였으니, 낮추게 되자 위망과 지위에 기댈 수 있게 되었으며, 후에 웅거하자 틀림없이 정벌을 부르게 되었는데, 정벌을 부른 연후 무리를 세차게 할 수 있었고, 무리의 기세가 오른 연후 크게 뽐낼 수 있었으니, 이러한 연고로 촉과 깊이 단절하고 오로지 위를 섬긴 것이로다.

손권은 공안에서 악성으로 천도하고 이름을 무창으로 고쳤으며, 무창, 하치, 심양, 양신, 시상, 사이(沙羨) 여섯 현으로 무창군을 만들었다.
  
5월, 건업에서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8월, 무창성을 수축하고,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생존할 때는 멸망을 잊지 말며, 안정되었을 때 반드시 위험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은 고대의 유익한 교훈이오. 옛날 준불의는 한나라의 명신인데, 태평스러운 세상에서도 칼을 몸에서 떨어지게 하지 않았소. 군자는 무비에 느슨할 수 없소. 하물며 현재 우리들의 몸은 변방에 있고, 시랑이 같은 악인들과 접하고 있는데, 경솔하게 갑작스런 사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소? 최근에 듣기로는, 장수들이 출입할 때 각자 겸손과 절약을 숭상하여 시종과 병사를 따르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를 아끼려고 생각한 행위가 아닌 것이오. 자신을 보전하고 명성을 남겨 군주와 부모를 안심시키는 것이 어찌 위험에 처하고 치욕을 받는 것이겠소? 응당 깊이 경계하고 그 큰 생명을 힘껏 숭상해야만 하며, 이것이 나의 생각과 부합하는 것이오.』
 
위 문제가 제위에 오른 후부터, 손권은 사자를 보내 번국이 되기를 구했으며, 아울러 우금 등을 돌려보냈다.

11월, 위 문제가 손권에게 다음과 같은 책명을 내렸다.
  
「성스럽고 명석한 군주의 제도에서는 덕행으로 작위를 세우고 공로로 봉록을 제정한다. 공로가 큰 자는 봉록이 후하고, 덕행이 높은 자는 두터운 예우를 받는다. 주공단에게는 성왕을 보좌한 공훈이 있었고, 강태공에게는 상을 멸망시킨 공훈이 있었으므로, 모두 토지가 나뉘어 봉해지는 대우를 받았으며, 아울러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을 받았다. 이것은 큰 공훈을 표창하는 것이며, 우수한 인물을 특별히 대우한 것이다. 가까이로는 한고조가 천명을 받았을 당초에 비옥한 토지를 나누어 여덟 성의 공신들에게 주어 왕이 되도록 했다. 이것은 이전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며, 후세 제왕의 귀감이다. 

짐은 부덕한데도 천명을 받아 한 왕실의 황통을 변혁하여 모든 나라에서 군림하고 국가 통치의 병권을 잡게 되었다. 이전 시대의 성명한 군주에게 제를 보고 정무를 처리하며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도록 하기를 원한다. 경은 선천적으로 충성스럽고 총명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재능으로 제왕을 보좌하고, 천명의 움직임을 깊이 이해하며, 국가의 흥망의 이치를 투철하게 보고, 멀리 사자를 보내 잠수와 한수에 배를 띄웠다.(주) 소식을 들은 후, 그림자가 형체에 붙듯이 우리 조정에 마음을 의탁하고 상소하여 번속으로 칭하려고 했다. 아울러 비단과 갈포 등 남방의 공물을 바치고, 장수들을 모두 석방하여 우리 왕조로 돌아오도록 했다. 충성심과 공경심은 내부에서부터 나오고, 성실함이 행동에 나타나며, 신의는 금이나 돌에 새기고, 대의는 신하를 덮었으니, 짐은 이 점을 매우 칭찬하노라.

(주)우공(禹貢)에 이르길:타(沱)와 잠(潛)은 원래 물길이며, 注曰:「水自江出為沱,漢為潛。」

지금 그대를 봉하여 오왕으로 삼고, 사지절 태상 고평후 형정에게 명하여 그대에게 옥새, 수대, 책서, 금호부, 첫째부터 다섯째까지, 좌죽사부 첫째부터 열 번째 것까지를 주도록 하고, 대장군 사지절 독교주로써 형주목의 직무를 맡도록 할 것이다. 청색 흙을 백모에 싸서 그대에게 하사하여 짐의 명령에 응답하여 드날려 동하(동쪽 중국)를 다스리게 할 것이다. 표기장군 남창후의 인수와 부책은 반납하라. 현재 또 그대에게 구석의 예품을 더해 줄 테니, 공경하게 이후의 명을 들으라. 

그대는 동남쪽 땅을 안정시키고 장강 밖의 토지를 잘 다스려 한족과 이족이 편안히 실업을 하고 어떤 사람도 반역의 마음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에게 대락(천자가 제사에 나갈 때 타는 수레)과 융락(천자가 진영으로 나갈 때 타는 수레) 각 한 대, 검정말 여덟 필을 주겠다. 그대는 재정에 힘쓰고 농업을 장려하여 창고에는 식량과 물자로 가득하다. 때문에 그대에게 용을 수놓은 예복과 모자를 주고, 홍색 신발을 주겠노라. 그대는 덕으로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예교를 성행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당의 삼면에 배치하는 제후의 악대를 주겠노라. 

그대는 좋은 사회 기풍을 창도하고 백월을 회유했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홍색의 큰 대문이 있는 집을 주어 살도록 하겠다. 그대는 자신의 재간과 모략을 운용하여 현명하고 방정한 사람을 관리로 임명하였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납폐를 주어 전에 오르도록 하겠다. 그대는 충성스럽고 용감함을 함께 발휘하여 사악한 자를 말끔히 제거하였다. 이 때문에 흉악한 추물들을 소멸시키고, 죄인들은 처벌을 받도록 했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부와 월을 각각 하나씩 주겠다. 

그대는 안으로는 문치로서 화해롭게 하고, 밖으로는 무위로써 신임을 얻었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동궁(옛날 천자가 공로가 있는 제후에게 하사한 붉은 활) 열 개, 노시 천 개를 주겠다. 그대는 충성과 정숙함을 기초로 하고, 공경과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거창(울금초를 쪄서 창주에 섞은 술 : 옛날에 신이 내려올 때 썼다고 함) 한 유(울창주를 담는 그릇을 지칭), 규찬(종묘에서 쓰는 제기로 옥으로 만든 것)을 쪼개 주겠다. 

존경하노라! 나는 그대가 선양한 선왕의 전적을 신중히 여기고, 나의 명령에 복종하고 우리 국가를 힘껏 보좌하여 그대의 위대한 공업이 영원히 빛나도록 하겠노라.」


[주] 강표전: 손권이 신하들과 의논하니, 차라리 상장군(上將軍) 구주백(九州伯)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칭하고, 위나라에서 주는 왕위를 받지 말라고 했다. 이에 손권이 대답했다. "구주백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이다. 예전에 패공(沛公) 유방도 한때 항우(項羽)로부터 한왕(漢王)이라는 칭호도 받았는데 그것은 다 시세에 따른 것이오. 왜 받지 말라는 것이오?" 하고는 왕위를 받았다.


//손성(孫盛)이 이르길: 옛날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주나라에 굴하지 않았고, 노나라 중연(仲連)은 진나라 백성이 되지 않았다. 사내가 필부의 뜻으로서, 오히려 의롭고 욕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열국의 군주가 천하를 삼분하였음에도, 다소 그 절개를 허락하고, 어떤 경우에는 신하요 어떤 경우에는 아니라 하는가? 내가 오, 촉을 보니 모두 한을 섬긴다 칭하며, 한을 대신하는데 이르러, 신하의 절개를 굳게 잡을 수 없었으며, 군자는 이로 인해 그 후대를 번창하게 할 수 없음을 알았으니, 결국 대국에 삼켜짐을 당하는도다. 만약 손권이 군신의 의견을 따랐다면, 종신토록 한나라의 장수라 칭했을 것인데, 어찌 의롭지 못함이 천지와 사방을 슬퍼하며, 어짐이 백세를 감동시켰다 하겠는가!


이 해, 유비가 군대를 인솔하여 손권을 치러 와서 무산, 자귀에 이르자, 사자를 보내 무릉의 이민족들을 회유하고 관인과 부신을 주었으며 작위와 상을 약속했다. 그래서 여러 현과 오계의 백성들은 모두 오를 배반하고 촉에 항복했다. 손권은 육손을 도독으로 임명하고, 주연과 반장 등을 이끌고 유비에게 항거하도록 했다. 도위 조자를 사자로 하여 위나라로 파견했다. 위 문제가 조자에게 질문했다.
 
『오나라의 왕은 어떤 군주인가?』
 
 조자가 대답했다.
 
『총명하고 어질며, 지혜롭고 웅대하고 재략이 있는 군주입니다.』
 
 위 문제는 구체적인 상황을 물었고, 조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보통 사람들 속에서 노숙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그의 총명함입니다. 보통 병사들 가운데서 여몽을 발탁했는데, 이것은 그의 현명함입니다. 우금을 붙잡았지만 죽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그의 어짊입니다. 형주를 취하면서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지혜로움입니다. 세 주를 차지하고 호랑이처럼 천하를 보고 있으니, 이는 그의 웅대함입니다. 폐하에게 몸을 굽혔으니, 이것은 그의 재략인 것입니다.』[주]

[주]오서에 이르길: 조자(趙咨)는 자가 덕도(德度)이고 남양(南陽) 사람이다. 들은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아, 같이 응대하면 말주변이 좋았다.


손권이 오왕이 되자 그는 중대부(中大夫)가 되어 위나라로 사신으로 갔다. 위나라 문제가 기쁘게 여기면서 농담으로 조자에게 물었다. 

"오왕은 학문이라 것에 대해 알고는 있습니까?" 

이에 대답했다.

“저희 주인께서는 1만 척의 군선을 강에 띄우고 무장 군사 백만을 거느리시며 현명한 인재를 발탁해 일을 맡기시고, 항상 경략(經略)에 뜻을 두고 계십니다. 잠시라도 여가가 나면 경전과 사적을 섭렵해 큰 뜻을 터득하시니, 서생들처럼 문장이나 찾고 구절이나 외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조비는 조자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위협하는 말투로 다시 물었다.

"만약 내가 오나라를 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소?"

조자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큰 나라에는 작은 나라를 정복하는 무력이 있고, 작은 나라에는 큰 나라를 막아 내는 방책이 있는 법입니다."

조비가 곧 다그쳐 물었다.

"그대의 오나라가 우리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조자는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저의 오나라에는 백만의 용사들이 있으며, 장강(長江)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차지하고 있어서, 무엇으로든지 다른 사람들을 두렵게 할 수 있습니다."

조비는 조자의 태도와 말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태도를 바꾸어 친절한 말투로 조자에게 물었다.

"오나라에는 그대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있소?"

"특히 총명하고 뛰어난 인재는 8, 90명 될 것이고 저와 같은 사람은 어찌나 많은지, 수레에 싣고 말로 되어도,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거재두량 車載斗量)"

조자는 오나라에 돌아와서, 손권에게 더욱 중용되었으며, 기도위(騎都尉)에 봉하여졌다. 조자가 말하길

"북방을 살펴보니 결국에는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므로, 현재의 계책으로 조정은 한나라 사백년의 끝을 승계하고,
동남쪽의 운세에 응하여, 마땅히 연호를 고치고 복색을 바르게 하고, 천명에 응함으로서 민심에 순응하소서."

손권이 이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손권의 아들 손등을 작위에 봉하려고 했다. 손권은 손등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편지를 올려 작위를 사양하고, 다시 서조연 심형(沈珩)을 보내 사의를 표했으며, 아울러 지방 공물을 바쳤다.(주1) 손등을 왕태자로 세웠다.(주2)


(주1)오서에서 이르길: 심형(
沈珩)의 자는 중산(仲山)이며 오군출생이다. 려서 경예(경학)에 능했는데, 특히 춘추 내, 외전을 잘알았다. 손권은 심형이 지모가 있고, 홀로 대함에 능하였으므로, 이에 사자로 위나라에 이르게 하다. 황제(조비)가 묻길

"오는 우리 위가 동쪽으로 향할 것이라고 의심하는가?"

심형이 말하였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말하였다.

"왜 그러한가?"

말하였다.

"옛날에 맺은 맹약을 믿는데, 말하길 우호관계로 돌아가자고 하였으니, 그래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만약 위가 이 맹약을 어긴다면 우리 스스로 미리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또 다시 물었다.

"듣건데 오의 태자가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하는데 정녕 그러한가?"

심형이 말하였다.

"신이 동조(東朝)"에 있어서 조회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연회에도 참여하지 않아서 이와 같은 의논을 들은 바가 없습니다."

문제가 이를 좋아하였고, 이에 심형을 불러들여 자신의 근처에 두고,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마쳤다. 심형이 일에 따라 향응하였는데, 굴복하는 바가 없었다. 심형이 돌아와서 말하길 :

"신이 은밀하게 시중 유엽를 살펴, 자주 적을 위해서 간계를 베풀었는데, 결국 오래지 않아 삼가게 되었습니다.
신이 병가의 구론을 들었는데 다음과 같았습니다, 적이 나를 침범하지 않을 것에 의지하지 말고, 내가 침범할 수 없음에 의지하라, 지금 조정을 위해서 그것을 근심합니다. 또한 마땅히 다른 일을 살펴 생각하였는데, 군자를 넓히기 위해 오로지 농상에 힘써야 합니다; 배와 수레를 수선하고, 전쟁 도구를 더 만들고, 모두 아울러 채우도록 명령해야 합니다. 병사와 백성을 어루만지고 길러야하고, 각자 그 자리를 얻도록 해야합니다; 뛰어난 인물을 취하여 끌어들이고, 장수와 사졸을 장려하면, 천하를 꾀할 수 있습니다."

사신으로 명성이 있어, 영안향후에 봉하고, 관직이 소부에 이르렀다.
 
(주2)강표전에 이르길: 이 해, 조비는 사자를 보내어, 작두향, 대패, 명주, 상아, 서각, 대모, 비취, 투압, 장명계 등을 오나라에 요구했다. 군신들은 상주하여 말하기를 

"형주와 양주 두 주에서 바치는 공물에는 늘 적용하던 규정이 있습니다. 위에서 구하는 진귀한 노리개 감의 물건은 예법에 맞지 않습니다. 마땅히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왕이 말하였다.

"
옛날 혜시가 제를 높여 왕이 되게 하자 손님이 그것을 비난하여 말하길 : 공의 학문이 거존인데, 지금 제를 왕으로 삼으니, 어찌 그것을 뒤집었느냐? 혜자가 말하길 : 여기 사람이 있어, 그 사랑하는 아들의 머리를 치길 바랬는데, 보석으로 그것을 대신함이 가능하였다, 아들의 머리는 소중하나 보석은 소경하구나, 가벼움으로 무거움을 대신하였는데, 어찌 옳지 않다 하느냐? 야흐로 서북쪽 사람과 일을 벌이고 있어서 강남 지역의 백성들은 위의 주군에 의지하여 생명을 부지하고 있소. 저 사람이 구하려는 것은 저 사람이 양암(諒闇)중인데도 구하는 것이 이와 같다면 어찌 함께 예의를 말할 수 있겠소?"
  
황무 원년(222년) 봄 정월, 육손의 부장군 송겸 등이 촉의 주둔지 다섯 곳을 공격하여 모두 격파시키고 그 장수들을 참수했다.
 
3월, 파양군에 황룡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촉나라 군대는 험준한 요새에 분산하여 점거하고 앞뒤로 50여 개의 진영을 두었는데, 육손은 상대방 병력의 경중에 따라 병사를 내어 대항하여 정월부터 윤 6월까지 대대적으로 격파시켰다. 전쟁터에서 목이 베이거나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 촉나라 병사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유비는 달아나 겨우 죽음을 모면했다.

오록에서 이르길: 
손권이 사신을 보내 위나라에 안부를 물으며, 유비를 깨뜨리고 인수와 수급을 획득한 것, 토지를 얻은 바를 자세히 상주하였고, 아울러 장수와 관리의 공과 수고에 마땅히 작위와 상을 더해야 한다는 의미의 표문을 올렸다. 문제가 사신에게 보답하여, 다람쥐 새끼 가죽, 밝은 빛의 갑옷, 곁마를 내리고, 또한 편지로 (자신의) 저작인 전론과 시부를 손권에게 주었다. 위서에 조서와 회답이 실렸는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늙은 오랑캐가 변방의 굴로, 험지를 넘어 깊이 들어가, 오랜 세월을 헛되이 보냈는데, 안으로는 피폐함으로 허둥대고, 밖으로는 지혜와 힘이 부족하였다, 고로 계두(
雞頭)에서 몸을 보였고, 병사를 나누어 서릉으로 향하였는데, 그 계책이란 강동을 요동치게 하기 위해서 앞 자취에 발을 구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뿌리가 아직 땅에 세워지지 못함으로, 그 가지를 부러뜨렸다, 비록 유비의 오장을 도려내지는 못하였으나, 몸통과 머리를 분리하게 하여, 그곳에서 제압하고 죽였으므로, 또한 충분히 촉랑캐 부중을 두렵고 걱정하게 하였다. 옛날 오한(吳漢)이 먼저 형문을 사르고 후에 이릉에서 일어나니 자양(子陽 공손술의 자)이 도망가서 죽음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내흡(來歙)이 처음 악양(略陽) 치니 문숙(文叔 유수의 자)이 그것을 기뻐하엿고 외효(隗囂)에게 그 재주를 뽑낼 바가 없음을 알게 하였다. 이제 촉랑캐를 토벌하니 바로 그 일들과 같으며 장군이 방략을 세워 힘써 온전히 홀로 이겼다."
 
당초, 손권은 겉으로는 위나라를 의탁하고 섬겼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의지한 것은 아니었다. 위나라는 시중 신비, 상서 환계를 보내 오나라로 가서 손권과 맹약을 맺게 하고, 아울러 손권의 아들을 불러 임자로 임명하려고 했다. 손권은 사양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자란 일종의 인질 제도로서, 손권의 자식을 조정으로 불러 도관의 직책을 준 것을 일컫는다. 이러한 제도는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데, 자신의 자식이 조정에 있으니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다. 손권은 이 사실을 알았으므로 거부했다.

 

가을 9월, 위나라는 곧 조휴, 장료, 장패에게 동구까지 나가도록 명령하고, 조인에게는 유수까지 병사를 출동하도록 했으며,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에게는 남군을 포위하도록 했다. 
 
동구는 일명 동보라고도 하며, 동보구로도 되어 있다.
 
손권은 여범 등에게 다섯 군대를 인솔하여 수군을 이용해 조휴 등을 막도록 하고, 제갈근, 반장, 양찬에게는 남군을 구하도록 했으며, 주환을 유수의 도독으로 임명하여 조인을 막도록 했다. 당시 양, 월 땅의 이민족의 대다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 내부적으로 환난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손권은 매우 겸허한 인사로 위 문제에게 편지를 올려 스스로 잘못을 고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만일 저의 죄악이 사면되지 못한다면, 응당 토지와 백성들을 봉환하고 교주에 몸을 의탁하고 여생을 끝마치기를 원합니다.」
 
위 문제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대는 혼란스런 세상에서 태어나 본래는 천하를 종횡할 뜻이 있었지만, 신분을 낮춰 위나라를 받들어 현재의 작위에 있게 되었다. 그대가 오왕으로 책봉된 이래, 바친 공물은 길에 가득했다. 유비를 토벌하는 공업은, 조정에서는 그대에게 의지하여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다. 여우처럼 묻었다가 또 파는 것은 옛 사람들이 부끄러워했던 것이다.(주1)

짐과 그대 사이는 대의로 이미 확정되었는데, 어찌하여 병사들을 수고롭게 하고 멀리 장강과 한수까지 출정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조정의 의론은 군주된 자라도 말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삼공들이 그대의 과실을 보고했는데, 모두 근거가 있었다. 짐은 밝지 못하고, 비록 증삼의 어머니가 북을 던진 의심이 있을지라도 대신들의 말이 진실이 아니기를 희망하는 것으로써 국가의 복으로 간주하였다. 때문에 먼저 사자를 보내 수고를 위로하고, 또 상서시중을 보내서 이전에 맺은 약속을 실행하도록 하였으며, 그대의 아들을 인질로 삼기로 결정했었다.

그러나 그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아들로 하여금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여 상의하던 대신들은 그대의 태도록 의아스러워 했다.(주2) 또 이전에 도위 호주가 그대에게 아들을 보내도록 권유했었는데, 그것은 사실 조정의 신하들이 함께 도모한 의견이었으며, 이것으로써 그대의 본심을 추측하였다.
  
그대는 과연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밖으로는 외효가 아들을 광무제에게 보내고 충절을 끝까지 다하지 않은 예를 인용했고, 안으로는 두융이 아들을 보내지 않고 충성을 지켰음을 비유했다. 하지만 세상도 다르고 시대도 변하여 사람들은 각각 마음이 있게 되었다. 호주가 돌아와 입으로 진술하면서 손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논의하는 자들로 하여금 점점 더 그대에게 의심을 더하게 했으며, 그대가 우리 조종을 시종 잘 받든다고 한 것의 기초가 의지할 바를 잃게 되었다. 나는 그래서 신하들의 상의에 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그대가 올린 편지를 살펴보니, 깊은 성심이 넘쳐흘러 나는 내심 매우 감개하였으며 애통해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날 즉시 조서를 내려, 여러 군대에게 단지 참호를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 쌓을 뿐 경거망동하여 진군하지 말도록 명했다. 

만일 그대가 반드시 충의와 정절을 나타내어 사람들의 회의적인 의론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아침에 손등이 직접 경성에 도착하도록 하라. 그러면 저녁에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오도록 명령을 할 것이다. 이 말의 진실은 대강과 같도다!」(주3)


(주1) 국어(
國語)에서 이르길: 여우는 묻었다가 파본다. 그래서 성공하지 못한다.

(주2)
위략에 위나라 삼공의 상주가 기재되어 말하길 :

"신이 듣기로 가지가 큰 것은 마음이 드러나 있고, 꼬리가 큰 것은 흔들리지 않으니, 국가가 있고 가문이 있는바 삼가하라 하였습니다. 옛날 한이 승하고 진은 폐하여, 천하가 새로 정해져, 대국의 왕은, 신하의 절개를 다하지 못하고, 소하, 장량의 꾀로도 그것을 단속하는 것을 갖추지 못하여, 육왕으로 하여금 전후로 모반하게 하는데 이르렀고, 곧 그것을 정벌하여, 병기와 수레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또 문제, 경제는 수성하였는데, 전쟁을 잊고 부역을 그침으로, 오와 초를 경시하고 내버려두게되어, 작은 뱀을 키워 큰 뱀으로 완성하니, 이미 토지신과 곡식신을 크게 근심하게 하였고, 앞 일의 불망(잊지 아니함)을 덮었기에, 뒷 일의 스승이 된 것입니다.

오왕 손권은, 미숙하고 천한 소인배로, 작은 공로도 없으며, 병란을 우연히 만나, 애비와 형의 일을 따랐기에, 어릴 때는 알로 따뜻하게 부화된 은혜를 입고, 커서는 올빼미로 반역의 성질을 품었습니다. 하늘의 베품을 배반하여 버리고, 죄악을 크게 쌓았습니다. 관우와 더불어 회복하여 번갈아 서로 엿보았는데, 이로움을 구하여 편함을 보았으니, 원한을 품고 자신을 거짓으로 낮추어 말하였습니다. 선제(조조)가 쓰임을 구함으로서 손권의 간교함을 알았는데, 이때 우금이 수재로 인해 패배함으로서, 무리가 관우를 토벌하는 것을 주장하므로, 이로 인해서 손권에게 맡기게 된 것 입니다.

선제의 위구를 자리에 내려놓자, 손권은 마음을 다함과, 진실로 슬퍼함이 있지 않았으며, 대상(조조의 죽음)으로 인해 왕실의 과약함을 원하였고, 동도(董桃)에게 부탁하여 선제의 명령을 전하자, 아직 보고와 허락을 얻지 못함을 헤아려, 멋대로 양양을 취하여, 몰려 내쫓기게 되는데 이르렀기에, 바뀌어 자기를 굽히고 의지를 꺽었습니다. 마음이 삐뚤고 한쪽으로 치우친 형태이고, 말로만 그럴듯한 것이 물이 흐르듯 하니, 비록 거듭 역마를 보내고 자주 사신을 보내고, 우금 등을 돌려 보내었으나, 외효의 형세를 관망하는 간사함을 내포하여, 밖으로는 천천히 토벌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촉의 도적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천자의 조정이 넓음을 머금고, 이미 참지 못할 것을 베풀었으며, 넉넉하여 그것을 용서하였고, 그 것과 함께 다시 시작하여, 외람되게 또한 땅을 갈라 그것을 왕으로 삼아, 남면칭고하게 하였고, 관직을 겸하게 하고 지위를 거듭하여 주었으며, 예우하여 구명, 명마 백사마를 갖춰주었는데, 이에 그 형세를 이루어, 총애가 높이 드러나 빛나니, 고금에 둘도 없었습니다. 손권은 개양의 모양인데, 뜻밖에 호표의 문장을 입게 되었지만, 죽음에 이르는 절개에 고요히 힘씀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세상에 없는 은혜에 대한 헤아림이 없음을 보고 드립니다. 신이 매번 손권에게 내리는 전후 장표를 보았고, 또한 어리석은 생각으로서 손권의 조서를 수집하여 조사하였는데, 스스로 막기 위해서 강호로 띠를 두르고, 완고함을 업어 불복하고, 탐내고 사치함이 여러 대를 거듭하여, 거짓으로 성공을 꾸미고, 위로는 위타, 영포의 계책이 있고, 아래로는 오피의 강함과 드셈의 말씀을 암송하니, 결국 침범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는 신하가 아닙니다.

생각컨데 조조(晁錯)는 불발(길을 떠나지않음)하고 왕후를 약화시킴을 모략으로 하여, 즉 칠국이 연횡하니, 재앙이 오래되어 커졌습니다; 괴통(蒯通)이 역하(歷下)를 습격하는 책략을 끊지 않음으로, 즉 전횡(田橫) 이 스스로 생각하여, 죄가 깊어지고 변고가 심각하였습니다. 신이 주례의 구벌지법으로 그것을 삼가며 생각하여, 손권의 흉악함과, 역적의 싹이 나는 것을 평가하니, 죄가 십오로 보입니다. 옛날 구려(九黎)가 덕을 어지럽히니, 황제(黃帝)가 벌을 더했습니다 ; 항우의 죄가 십이니, 한조(漢祖)가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손권이 죄와 허물을 범한 바가 명백하여, 인과 은혜를 수양함과, 우주를 용납함이 그릇되었습니다. 신은 손권을 파면하여, 홍려가 작위와 영지를 빼앗고, 포획하여 치죄하기를 청합니다. 감히 따르지 않음이 있어, 병사를 옮겨 나아가 토벌하여, 이로서 국법으로 옳고 그름의 일정함을 밝히고, 이로서 삼주 모든 백성의 고통을 진정시키소서."

그 십오가지 조목은, 글자가 많아 기재하지 않았다.


(주3) 위략에서 이르길: [[호주전]]으로 분리
 
그래서 손권은 연호를 바꾸고 장강 가에서 저항하며 수비했다. 

겨울 11월, 큰 바람이 불었고, 여범 등의 병사 수천 명이 익사하여, 남은 군사는 장강 남쪽으로 돌아왔다. 조휴가 장패에게 날랜 배 5백 척과 죽음을 각오한 병사 1만 명을 주어 서릉을 습격하도록 하여 성의 수레를 불태우고 수천 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았다. 장군 전종, 서성은 위나라 장수 윤로를 추격하여 목을 베고 수백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12월, 손권은 태중대부 정천에게 백제에 있는 유비를 방문하도록 하여 비로소 우호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른다.


손권이 말하였다. 


"근자에 현덕(玄德 ; 유비)의 글을 얻어 읽었는데, 대단히 깊이 있고 자신의 잘못을 탓하며, 예전의 좋았던 사이로 되돌리기를 바란다. 전에 서쪽에서 촉(蜀)이라고 하던 것은 한(漢)나라 황제가 아직 있었기 때문이고, 지금 한나라가 이미 폐하였으니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라 할 만하구나."


//《오서(吳書)》에서 이른다.// 정천전으로 분리.


그러나 손권은 의연하게 위 문제와 서로 왕래하다가 후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절교했다. 이 해, 이릉(夷陵)을 서릉(西陵)으로 고쳤다.
 
2년(223년) 봄 정월, 조진은 군대를 나누어 강릉 중앙의 사주를 점거했다. 이 달, 손권은 강하산에 성을 쌓았다. 사분력을 바꿔 건상력을 사용했다. 
 
강표전에서 이르길: 손권은 오덕(木火土金水)의 추이를 고려해 보았는데, 오나라 정권에 해당하는 사덕의 활동을 보고는 이렇게 바꾼 것이다.

지림志林에서 이르길 : 토土덕이 행해져서 진辰에 납향臘享함은, 그 규칙에 적합하다. 토덕이 술戌에 성하나, 미未에 조신祖神에게 제사를 지냄은, 올바른 도리가 아니다. 토는 미에서 생겨나기에, 미가 곤초坤初가 된다. 이 때문에 월령月令에서, 건말建未의 달에, 교외에서 황정黃精을 제사 지내고, 조신에게 제사를 지냄은 그것이 성할 때 시행한다. 지금 그것이 시작될 때 조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시행함이, 어찌 천운에 대응하는 것이겠는가?
 
3월, 조인은 장군 상조 등을 파견하여 병사 5천을 이끌고 유선을 타고, 새벽에 유수 중앙의 사주를 건너도록 했다. 조인의 아들 조태는 군사를 이끌고 급히 주환을 공격했다. 주환은 병사로 방어하면서 장군 엄규 등을 파견하여 상조 등을 격파시키도록 했다. 이 달, 위나라 군대는 모두 퇴각했다.
 
여름 4월, 손권의 신하들이 손권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다. 손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강표전에서 이르길 : 손권이 사양하길 :

“한가漢家가 쇠미해져도, 구제할 수 없었는데, 또한 무슨 마음으로 겨루겠는가?”

신하들이 천명과 상서로운 조짐을 칭하며, 거듭 청하였다. 손권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장수와 재상들에게 이르길 :

“왕년에 고는 현덕이 바야흐로 서쪽 변경으로 향하기에, 먼저 육손에게 무리를 가려서 이를 대비하도록 명했소. 듣기론 북쪽 방면에서, 고를 구하고자 했는데, 고는 내심 그들이 협박함이 있을까 꺼렸으나, 만약 벼슬을 줌을 받지 않으면, 이는 욕보이는 거라 생각하게 해서 그들이 빨리 일어나도록 재촉하게 돼, 곧 서쪽과 함께 이르는 경우에 해당돼, 두 곳에서 적을 받아들이며, 고에게 혹독한 상황이 되기에, 스스로 생각을 억누르며, 그들이 왕에 봉함을 따랐소. 머리를 숙이고 굽힌 뜻을, 제군은 아직 다 알지 못하는 듯하기에, 지금 이를 함께 설명하는 것일 뿐이오.” 


유비가 백제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서: [[풍희전]]으로 분리

5월, 곡아에서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보다 앞서, 희구의 수장 진종이 장수 오왕(왕직)을 죽이고 병사들을 이끌고 모반하여 위나라로 들어갔다. 위나라는 그를 기춘태수로 임명했는데, 그 이후 진종은 변방 지역을 여러 차례 침범했다.
 
5월, 손권은 장군 하제에게 명하여 미방과 유소 등을 지휘하여 기춘을 습격토록 했다. 유소 등이 진종을 생포했다.
 
겨울 11월, 촉은 중랑장 등지를 시켜 오나라를 방문하도록 했다.
 
오력에서 이르길: 이때 촉나라에서는 말 2백 필과 비단 1천 필 및 특산물을 보내었으며, 이로부터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사신이 왕래하는 일이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물론 오나라 역시 특산물을 보내어 후의에 답례하였다.
 
3년(224년) 여름, 손권은 보의중랑장 장온을 파견하여 촉을 방문하도록 했다.
 
가을 8월, 사형수들을 사면시켰다.
 
9월, 위 문제는 광릉까지 출병하여 대강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곳은 인물이 있으므로 도모할 수가 없겠구나.』

干寶晉紀曰:魏文帝之在廣陵,吳人大駭,乃臨江為疑城,自石頭至于江乘,車以木楨,衣以葦席,加采飾焉,一夕而成。魏人自江西望,甚憚之,遂退軍。權令趙達 算之,曰:「曹丕走矣,雖然,吳衰庚子歲。」權曰:「幾何?」達屈指而計之,曰:「五十八年。」權曰:「今日之憂,不暇及遠,此子孫事也。」    

간보의 진기에 이르길 : 위 문제가 광릉에 있으니 오나라 사람들이 크게 놀라 마침내 강을 임하여 가짜 성을 만들었는데 석두에서 강승에 이르기까지 수레를 나무기둥으로 삼고 옷가지를 삿자리로 삼고서 채식을 가하니 하루저녁에 완성되었다. 위나라 사람들이 강의 서쪽에서 바라보고 심히 두려워하니 마침내 퇴군하였다. 손권이 조달에게 계산해보라고 하니 말하길 :

「조비가 갑니다. 그러나 오나라는 경자년에 쇠할 것입니다.」 손권이 말하길 「얼마 남았는가?」하니 조달이 손가락을 굽히면서 계산하여 말하길 「58년입니다.」하니 손권이 말하길 「금일의 걱정은 멀리 미칠 겨를이 없으니 이는 자손들의 일이다.」하였다.

吳錄曰:是歲 蜀主又遣鄧芝來聘,重結盟好。權謂芝曰:「山民作亂,江邊守兵多徹,慮曹丕乘空弄態,而反求和。議者以為內有不暇,幸來求和,於我有利,宜當與通,以自辨定。恐西州不能明孤赤心,用致嫌疑。孤土地邊外,間隙萬端,而長江巨海,皆當防守。丕觀釁而動,惟不見便,寧得忘此,復有他圖。」  

오록에 이르길 : 이 해에 촉주가 다시 등지를 보내 내빙하여 거듭 맹호를 맺었다. 손권이 등지에게 말하길 「산민이 난을 일으켜 강변의 지키는 병사들이 많이 철군해 조비가 빈틈을 노려 일을 벌일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화친을 구해왔소. 의논하는 사람들이 국내에 겨를이 없는데 다행히 와서 화친을 구하니 우리에게 유리하므로 응당 통호하여 이로써 (국내의) 일을 처리하는게 좋겠다고 여겼소. 서주가 나의 단심을 밝게 알지 못하여 의심할까 두렵소. 나의 토지가 변방에 있고 간극이 많으며 장강과 거해가 모두 응당 수비해야할 곳이오. 조비가 틈을 보고 움직여도 오히려 편리하지 못한데 하물며 이를 잊어먹고 다시 다른 것을 도모하겠소?」

 
그리고는 돌아왔다.
  
4년(225년) 여름 5월, 승상 손소(孫邵)가 죽었다. [14]

[14] 오록에서 이르길: 손소(孫邵)는 자가 장서(長緒)이고, 북해(北海) 사람이다. 신장은 8척이고, 공융(孔融)의 공조(功曹)가 되었을 때. 공융은 그를 일컬어 '조정의 인재'라고 했을 정도였다. 강동의 유요(劉繇)에게 몸을 의탁하였으며, 손권(孫權)이 집정하자 여러 차례 진언을 올렸다. 여강태수(廬江太守)를 배했고, 거기장군장사(車騎將軍長史)로 옮겼으며, 황무(黃武) 원년(222년) 손권이 오왕(吳王)에 임명되자 승상, 위원장군(威遠將軍)이 되었고, 양선후(陽羨侯)에 봉해졌다.


장온(張溫)과 글염(曁艶)이 상주하자 스스로 위계를 사임하고 죄를 청했으나, 손권이 복직시켰다. 63살에 죽었다.

《지림》에서 이르길: 오나라 창업의 기초가 되었고, 또 수상이 되었던 손소(孫邵)가 사서에 전기가 없는 이유에 대하여 항상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래서 나는 (지림(志林)의 저자 우희(虞喜)는) 그 이유를 유성숙(劉聲叔)에게 물었다. 유성숙은 박물군자(博物君子)이다. 유성숙은 대답했다. 

"손소의 명성과 지위를 생각해보면 마땅히 그의 전기가 있어야 하는데, 정부(丁孚)와 항준(項峻) 이 소서를 쓸 때는 주기(注記)가 있었는데, 이들의 말에 따르면 손서는 장혜서(張惠恕: 장온(張溫)) 이랑은 말도 안 나누는 사이였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위요(韋曜)가 오서(吳書)를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위요가 장온의 당 출신이어서, 바로 이 때문에 손소의 전기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6월, 태상 고옹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吳書曰:以尚書令陳化為太常。化字元耀,汝南人,博覽衆書,氣幹剛毅,長七尺九寸,雅有威容。為郎中令使魏,魏文帝因酒酣,嘲問曰:「吳、魏峙立,誰將平一海內者乎?」化對曰:「易稱帝出乎震,加聞先哲知命,舊說紫蓋黃旗,運在東南。」 帝曰:「昔文王以西伯王天下,豈復在東乎?」化曰:「周之初基,太伯在東,是以文王能興於西。」帝笑,無以難,心奇其辭。使畢當還,禮送甚厚。權以化奉命光國,拜犍為太守,置官屬。頃之,遷太常,兼尚書令。正色立朝,敕子弟廢田業,絕治產,仰官廩祿,不與百姓爭利。 妻早亡,化以古事為鑒,乃不復娶。權聞而貴之,以其年壯,敕宗正妻以宗室女,化固辭以疾,權不違其志。年出七十,乃上疏乞骸骨,遂爰居章安,卒於家。長子 熾,字公熙,少有志操,能計算。衛將軍全琮表稱熾任大將軍,赴召,道卒。

오서(吳書): 상서령(尚書令) 진화(陳化)가 태상(太常)이 되었다. 진화는 자가 원요(元耀)이고 여남(汝南)사람이다. 많은 책을 읽었으며 기간(氣幹)하고 강의(剛毅)하였고, 키가 7척 9촌이며 용모가 고아하여 위용이 있었다. 낭중령(郎中令)이 되어 위나라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는데, 위나라 문제 조비가 술에 취하여 농담 삼아 물었다. 

"오나라와 위나라가 서로 대립하고 있는데, 장차 누가 해내를 통일할 것 같소?" 

진화가 대답했다. 

"주역(周易)에 제출호진(帝出乎震:황제가 辰,곧 동방에서 나온다는 말이다.)이라 하였습니다. 더불어 듣기로 운명을 아는 선철의 구설에 자개와 황기가 동남에서 움직였다고 합니다.(송서에 보이는데 이르길 ‘한세의 술사가 황기와 자개가 북두성과 견우성의 사이에 보이는데 강동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하였다.’) ”

문제가 말하길

「옛날에 문왕은 서백으로서 천하를 통치하였는데 어찌하여 다시 동방에 있는가?」

라 하니 진화가 말하길

「주나라가 처음 기초를 세울 때 태백이 동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로써 문왕이 능히 서방에서 흥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니 문제가 웃으면서 힐난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그 말을 기이하게 여겼다. 사절의 일이 끝나고 응당 돌아갈 때 예송하는 것이 아주 후하였다. 손권은 진화가 명을 받들어 나라를 빛냈다고 여겨 건위태수에 임명하고 관속을 두었다. 얼마 후 태상으로 옮기고 상서령을 겸했다. 낯빛을 바로하고 조정에 섰으며 자제들에게 농업을 폐하고 산업을 궁구하는 것을 끊어 관록을 바라볼 뿐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못하도록 하였다.

부인이 일찍이 죽었는데 진화는 옛 일을 거울 삼아 마침내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손권이 듣고 훌륭하게 여겼고 장년으로 인해 종정에게 명령내려 종실의 여자를 처로 삼게 하도록 했는데 진화가 질병을 들어 고사하였으므로 손권은 그의 뜻을 위배토록 하지 않았다. 나이가 70을 넘자 마침내 상소를 올려 퇴직을 구했는데 끝내 장안에 거처하였고 집에서 죽었다.

아들인 진치(
)는 자가 공희(公熙)로 어렸을 때부터 지조가 있었고 계산에 능했다. 위장군 전종이 표를 올려 진치를 대장군에 임명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부름에 임해 가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환구에서 연리지(뿌리가 다른 두 나무 가지 결이 서로 이어져 하나가 된 나무로서 상서로운 징조의 하나)가 있다고 보고했다.
  
 겨울 12월, 파양의 적 팽기가 자칭 장군이라 칭하고 여러 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병사가 수만이나 되었다. 이 해, 지진이 연이어 발생했다.

오록(
吳錄)에서 이르길: 그해 겨울 위문제가 광릉에 이르러, 강에 접근하여 병사를 보이게 하였는데, 병사가 십여만이 있었으며, 깃발이 수백리를 가득 매웠으니, 강을 건너려는 마음이 있었다. 이 시기 매우 추워 얼음이 얼었고, 배가 강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문제는 파도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길 :

"아! 처음부터 하늘이 이런 방법으로 남북을 단절하였구나!"

마침내 돌아갔다.
손소(
孫韶)가 또한 장군 고수(高壽) 등에 결사대 오백인을 인솔하게 하여 지름길로 보내 밤에 요격하니, 문제가 매우 놀랐고, 고수 등이 부거와 우개를 얻어 돌아왔다.          
  
 5년(226년) 봄, 손권이 영을 내려 말했다.
 
『군사를 일으킨 지 매우 오래되어 백성들은 경작지를 떠났고, 아버지와 아들, 지아비와 아내가 서로 도울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 지금 북쪽의 적은 물러나 움츠리고 숨어 있으며, 중원 밖의 지역에는 전쟁이 없다. 각 주와 군에 명령을 내리니, 정책을 느슨하게 하여 백성들을 쉬도록 하라.』
 
 이때, 육손은 각지의 식량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장수들에게 농지를 개간하여 확대하도록 표를 올려 명령하도록 했다. 손권은 이에 답했다.
 
『매우 좋은 의견이오. 지금 우리 부자도 직접 공전을 받아 수레를 끌고 온 여덟 필의 말을 넷으로 짝짓도록 하겠소. 비록 그대의 성군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도, 백성들과 동등하게 수고를 하려는 것이오.』
  
 가을 7월, 손권은 위 문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하를 치고 석양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돌아왔다. 창오에서 봉황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손권은 세군(단양, 오군, 회계)의 열악한 땅 10현을 분할하여 동안군을 설치했다.(주) 전종을 태수로 임명하여 산월을 토벌하여 평정했다.

(주)
오록에서 이르길 : 군의 치소는 부춘이다.
  
 겨울 10월, 육손이 눈앞의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상소를 올려 진술하면서 은덕을 펴고 형벌을 줄이며 세금을 느슨하게 하고 징용을 멈출 것을 권유했다. 또 이렇게 말했다.
 
『충성스런 말은 전부 진술할 수 없는데, 세상에 몸을 붙이고 사는 신하가 자주 이로운 주장으로 당신에게 간언하기를 바랍니다.』
 
 손권은 이에 답하여 말했다.
 
『법령의 설치는 악함을 끊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미연에 방비하려는 것이오. 어떻게 형벌을 설치하여 소인들을 위협하지 않겠소? 

이것은 먼저 명령을 내리고, 이후에 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지 법을 범하는 자가 있게 하려는 것이 아니오. 그대는 형벌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는데, 나 역시 무슨 이로움이 있겠소? 단지 부득이 이렇게 한 것일 뿐이오. 

현재 그대의 의견에 의하면, 응당 신하들에게 새롭게 자문을 구하고 상의하여 힘껏 따라 할 수 있어야만 하오. 게다가 가까이 있는 신하들이 바른 길로 나가도록 전부 말하여 간언하고, 친척들이 주군의 부족한 면을 보충하고 조언함으로써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고 자신의 충성스럽고 신실함을 밝히는 것이오. <상서>에서 말하기를 "내가 당신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굽히고 나를 따르지 마시오." 라고 했소. 내가 어찌 충언으로써 신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겠소? 

그런데 그대는 "감히 전부 진술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으니, 어떻게 충성스런 말이라고 할 수 있겠소? 만일 지위가 낮은 신하들 중에서 받아들여 쓸 수 있는 의견을 제시한 자가 있다면, 어찌 사람으로 말을 버리고 채택하지 않을 수 있겠소? 단지 아첨하며 자신을 파는 자에 대해서는 비록 내가 어리석을지라도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소. 징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천하기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통일의 공업은 여러분들의 지지에 의지해야만 성공할 수 있소. 만일 강동을 지키며 너그러운 정치를 행한다면, 병력은 저절로 사용하기에 충분할 것인데 또 많이 징용하겠소? 단지 않아서 강남을 지키고 있는 것은 얕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소. 만일 미리 징용하지 않는다면, 아마 때에 임하여 곧바로 쓸 수 없을 것이오. 또 나와 그대는 신분과 명분이 현저하게 다르지만, 기뻐하고 근심하는 것은 실재로 같소. 

그대가 보내온 표에서 말하기를, 감히 여러 사람들을 따라 하며 자신을 허용하여 구차하게 재난을 면하지 않겠다고 했소. 이것은 확실히 내가 만족해하는 것이며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오.』
 
그리고 손권은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법령 조문을 잘 베끼도록 하고, 낭중 저봉에게 이것을 육손과 제갈근에게 보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삭제하거나 덧붙이도록 했다. 이 해, 교주를 나누어 광주를 설치했으나, 오래지 않아 원래 모양대로 회복시켰다. [주]

[주] 강표전: 손권이 무창(武昌)에 있으면서 큰 선박을 만들어 꾸미고, 장안(長安)이라 이름 지었고, 시험 운행에 들어갔다. 그때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곡리(谷利)라는 장수가 사공[柂工]들에게 명하여, 번구(樊口)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손권이 말했다. 

"지금 마땅히 나주(羅州)를 향하도록 하라"

하고 말했다. 그러자 공리가 칼을 뽑아 들고 사공들에게 말했다. 

"번구에 배를 대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곧바로 배는 방향을 틀어 번구에 닿았고, 바람이 너무 맹렬하게 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배는 운행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시험 운행을 포기했다. 손권이 말했다. 

"곡리는 물을 너무 무서워한 것 아니오?"

곡리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대왕께서는 만백성의 주인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서 경망스럽게, 격랑이 부는 바람 앞에서 놀다가, 화려하게 꾸민 누각이, 만약에 전복하는 일이 생긴다면, 이것은 사직이 우려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굳이 죽음을 무릅쓰고 만류했습니다." 

손권은 곡리를 소중히 여겨, 두 번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경의를 담아 곡(谷)이라 불렀다.

6년(227년) 봄 정월, 장수들이 팽기를 체포했다.
  
윤 12월, 한당의 아들 한종이 병사들을 인솔하여 위나라로 투항했다.
  
7년(228년) 봄 3월, 손권은 아들 손려를 건창후로 봉했으며, 동안군을 없앴다.
 
여름 5월, 파양태수 주방이 거짓으로 오나라를 배반하여 위나라 장수 조휴를 유인했다.
  
가을 8월, 손권이 환구에 도착하여 장군 육손을 파견하여 장수들을 이끌고 석정에서 조휴를 크게 격파시켰다. 대사마 여범이 죽었다. 이 해, 합포군을 주관군으로 바꾸었다.
 
강표전에 이르길: 이해, 장군 적단이 모반하여 위나라로 달아났다. 손권은 장수들이 죄가 두려워 달아나는 것을 걱정하여 명을 내려 말했다.
 
『지금부터 장수들은 중죄를 세 번 저지른 그 이후에 죗값에 대하여 논할 것이오.』
  
황룡 원년(229년) 봄, 공경과 백관들이 모두 손권에게 정식으로 제를 칭하도록 권했다.
  
여름 4월, 하구와 우창에서 나란히 황룡과 봉황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7일, 손권은 남쪽 교외에서 황제의 지위에 즉위하였으며, 이날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바꿨다.

吳錄載權告天文曰:「皇帝臣權敢用玄牡昭告于皇皇后帝:漢享國二十有四世,歷年四百三十有四,行氣數終,祿祚運盡,普天弛絕,率土分崩。孽臣曹丕遂奪神器, 丕子叡繼世作慝,淫名亂制。權生於東南,遭值期運,承乾秉戎,志在平世,奉辭行罰,舉足為民。群臣將相,州郡百城,執事之人,咸以為天意已去於漢,漢氏已 絕祀於天,皇帝位虛,郊祀無主。休徵嘉瑞,前後雜沓,曆數在躬,不得不受。權畏天命,不敢不從,謹擇元日,登壇燎祭,即皇帝位。惟爾有神饗之,左右有吳, 永終天祿。」    

오록에 손권이 하늘에 고하는 글을 실어 이르길「황제 신 손권은 감히 검은 소를 바치며 상제에게 밝게 고합니다. : 한조가 향국한지 24세이고 보낸 해가 434년인데 기의 움직이는 수가 끝나고 복록의 운행이 다하여 천하가 진멸하고 영토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불충한 신하 조비가 마침내 신기를 침탈하였고 조비의 아들인 조예는 세를 이어 간특한 짓을 벌여 명분에 넘치는 행동을 하고 제도를 어지럽혔습니다. 손권은 동남에서 태어나 시기가 움직이는 때를 당하여 하늘을 받들어 군대를 이끌고 뜻이 세상을 태평하게 하는데 있으며 견책과 형벌을 행하는 것이 모두 백성을 위함입니다. 군신, 장상, 주 와군, 모든 성 그리고 자기의 일을 가진 백성들은 모두 하늘의 뜻이 한조에서 떠나고 한씨가 이미 하늘에 제사 지내기를 끊었으므로 황제의 자리가 비었고 제사를 지냄에 있어 주인이 없다고 여깁니다. 상서로운 징조가 앞뒤로 잇달아 발생하고 천명이 저에게 이르렀으니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권은 천명을 두려워하여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삼가 훌륭한 날을 택하여 단에 올라 요제(땔감을 쌓아두고 그 위에 불을 질러 하늘에 지내는 제사의 일종)를 드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자 합니다. 오직 그대 신명께서 이를 흠향하시고 오나라를 도와 영원히 천록을 마치도록 해주십시오.」


부친 파로장군 손견을 추존하여 무열황제라 하고, 어머니 오씨를 무열황후라고 했으며, 형 토역장군 손책을 장사환왕이라고 했다. 오왕의 태자 손등을 황태자로 삼았다. 장리들은 모두 작위가 올랐으며 상을 받았다.
  
당초, 흥평 연간(194년~195년)에 오(吳)에서는 이런 동요가 있었다.

황금 수레에
아롱진 난초 귀
창문을 열고 [주]
천자가 나온다.
 

[주]창문은 오나라의 서쪽 성곽 문이며, 부차가 일어난 곳이다.
  
5월, 손권은 교위 장강과 관독을 사자로 삼아 요동으로 가도록 했다.
  
6월, 촉은 위위 진진을 파견하여 손권이 제위에 오른 것을 축하했다. 손권은 곧 촉과 협의하여 천하를 나누어서 예주, 청주, 서주, 유주는 오에 속하게 하고, 연주, 기주, 병주, 양주는 촉에 귀속시켰다. 사주 땅은 함곡관을 경계로 삼았다. 맹약의 말을 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이 환난을 내려 한 왕실의 계통은 질서를 잃고, 반역하는 신하들이 이 틈을 타서 국가의 대권을 탈취했다. 

동탁에서 시작하여 조조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흉악한 무리들이 천하를 파괴하고 중원으로 하여금 분열되게 하여 천하에는 기강이 없어지고 백성들과 신령들은 고통스러워하고 원망하여 몸을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조조의 아들 조비에 이르러서는 역행하여 수많은 흉악한 일을 하고 항상 사악하고 간사한 일을 하여 황제의 자리를 찬탈했다. 그리고 도가 부족한 조예는 조비의 악행을 답습하여 병력에 의지해 토지를 빼앗았는데, 아직 형벌에 복종하여 죽임을 받지 않았다. 옛날 공공이 천하를 어지럽혔을 때, 고신은 군대를 동원했고, 삼묘가 법을 범하자 우순은 정벌을 했다. 오늘 조예를 멸하고 그의 무리를 붙잡는 일은 한과 오가 아니면 장차 또 누가 맡겠는가? 

악인을 토벌하고 흉포함을 제거하는 것에는 반드시 그들의 죄행을 선포하고 응당 먼저 그들의 영토를 분열하여 그 토지를 빼앗아 사인과 백성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각기 돌아갈 바를 알도록 해야 한다. 때문에 <춘추>에서, 진 문공이 위를 토벌하기에 앞서 그의 토지를 나누어 송나라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은 이런 이치인 것이다. 게다가 고대에는 위대한 공업을 세우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맹서를 하였기 때문에 <주례>에는 맹약을 주관하는 관리가 있었고, <상서>에는 맹서를 선포하는 문서가 있었다. 한과 오는 비록 신의가 마음속에서 나왔지만, 토지를 구분하여 경계를 정하고 마땅히 맹약이 있어야 한다. 

제갈 승상은 덕망과 위엄을 먼 곳까지 빛냈으며, 본국을 도와 보필하고, 밖으로는 군대를 지휘하는데, 신의는 음양을 감동시키고 성실함은 천지를 감응시켰다. 다시 맹약을 맺어 성의를 확대하고 서약의 말을 준수하여 오와 촉의 사인과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함께 이 일을 알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단을 세우고 희생을 죽여 신령에게 분명하게 고하고, 한 차례 피를 묻혀 맹세하고 서약서를 희생의 입에 넣고, 그 부본을 천부(천자가 쓰는 물품을 보관하는 곳)에 보관한다. 

하늘은 높아도 아래쪽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신령의 위력도 위의 성실함을 도와 실현시킬 수 있으며, 사신, 사맹의 신은 여러 신령들과 이곳에 와서 제사를 받지 않지 않는다. 오늘 한과 오가 결맹한 이후에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함께 위의 도적들을 토벌하고, 위험을 서로 구하며 재난을 나누고, 기쁨을 함께 하며 좋아하고 싫어함을 함께 하며, 어떤 사람이든 간에 두 마음을 품는 일은 없도록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촉을 위해 한다면 오가 그를 토벌할 것이고, 만일 어떤 사람이 오를 위해 한다면 촉이 그를 토벌할 것이다. 각각 자기의 봉토를 지키며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이 맹약이 후대에 전해져도 시종 이와 같이 한다. 무릇 모든 맹약은 모두 맹서에 기재된 것과 같다. 

성실한 언사는 화려하지 않으며, 그 실질은 우호 관계에 있다. 어떤 사람이 이 맹약을 버린다면 화를 낳고 먼저 내부에 혼란이 있을 것이다. 두 마음을 갖고 협력하지 않고 천명에 태만하면, 신령과 상제가 그를 살피고 징벌할 것이며, 산천의 모든 신들은 그를 들어 주살하고, 그 군대를 멸망시키고 그 나라를 영원할 수 없도록 할 것이다. 

위대한 신령이시여! 분명하게 살펴 주십시오!」
  
가을 9월, 손권은 건업으로 천도했으나, 원래부터 역소에서 살았으므로 다시 관청을 짓지는 않았다. 상대장군 육손을 불러 태자 손등을 보좌토록 하고, 무창의 남은 일을 관장하도록 했다.
  
2년(230년) 봄 정월, 위나라는 합비 신성을 지었다. 

손권은 조서를 내려 도강좨주를 설립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교육을 받도록 했다. 장군 위완과 제갈직을 파견하여 무장을 한 사병 1만 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이주와 단주를 구하도록 했다. 단주는 바다 가운데 있었는데 노인들이 전하는 말로는, 진시황제가 방사 서복을 보내 어린 소년과 소녀 수천 명을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 봉래의 신선과 선약을 구하도록 하였는데, 이 주에 이르러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오늘날 수만 호가 되었고, 그 주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회계로 와서 베를 샀고, 회계 동쪽 현에 살고 있는 자가 바다를 가다가 또 태풍을 만나 단주까지 표류해 오기도 했다. 그곳은 매우 먼 곳에 위치하였으므로, 위온 등은 결국에는 이를 수 없었다. 단지 이주의 수천 명을 데리고 돌아왔을 뿐이다.
  
3년(231년) 봄 2월, 태상 반준을 파견하여 병사 5만 명을 이끌고 무릉의 이민족을 토벌하도록 했다. 위온과 제갈직은 모두 조서를 거스르고 공로가 없었으므로 하옥되어 주살되었다.
  
여름, 산야에 있는 누에가 고치를 만들었는데, 큰 것은 마치 알 같았다. 야생 벼가 저절로 생장하였으므로 유권현을 화흥현으로 바꾸었다. 중랑장 손포는 거짓으로 투항하여 위나라 장수 왕릉(王淩)을 유인했다. 왕릉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손포를 영접하려고 했다.
  
겨울 10월, 손권은 대군을 부릉 등에 잠복시켜 왕릉을 기다렸는데, 왕릉은 이것을 알고 달아났다. 회계군의 남시평에서 벼가 자란다는 보고가 있었다.
 
12월 29일, 대사면을 시행하고, 다음해부터 가화 원년으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가화 원년(232년) 봄 정월, 건창후 손려가 죽었다.
 
3월, 장군 주하, 교위 배잠을 파견하여 뱃길로 요동으로 가도록 했다.
  
가을 9월, 위나라 장수 전예가 이들을 맞아 반격했다. 성산에서 주하의 목을 베었다.
 
겨울 10월, 위의 요동태수 공손연이 교위 숙서와 낭중령 손종을 파견하여 손권에게 번국이라고 칭하고, 아울러 모피와 준마를 바쳤다. 손권은 매우 기뻐하고, 공손연에게 작위를 주었다.

江表傳曰:是冬,群臣以權未郊祀,奏議曰:「頃者嘉瑞屢臻,遠國慕義,天意人事,前後備集,宜脩郊祀,以承天意。」權曰:「郊祀當於土中,今非其所,於何施此?」重奏曰:「普天之下,莫非王土;王者以天下為家。昔周文、武郊於酆、鎬,非必土中。」權曰:「武王伐紂,即阼於鎬京,而郊其所也。文王未為天子,立郊於酆,見何經典?」復書曰:「伏見漢書郊祀志,匡衡奏徙甘泉河東,郊於長安,言文王郊於酆。」權曰:「文王性謙讓,處諸侯之位,明未郊也。經傳無明文, 匡衡俗儒意說,非典籍正義,不可用也。」  志林曰:吳王糾駮郊祀之奏,追貶匡衡,謂之俗儒。凡在見者,莫不慨然以為統盡物理,達於事宜。至於稽之典籍,乃更 不通。毛氏之說云:「堯見天因邰而生后稷,故國之於邰,命使事天。」故詩曰:「后稷肇祀,庶無罪悔,以迄于今。」言自后稷以來皆得祭天,猶魯人郊祀也。是 以棫樸之作,有積燎之薪。文王郊酆,經有明文,匡衡豈俗,而枉之哉?文王雖未為天子,然三分天下而有其二,伐崇戡黎,祖伊奔告。天既棄殷,乃眷西顧,太伯 三讓,以有天下。文王為王,於義何疑?然則匡衡之奏,有所未盡。按世宗立甘泉、汾陰之祠,皆出方士之言,非據經典者也。方士以甘泉、汾陰黃帝祭天地之處, 故孝武因之,遂立二畤。漢治長安,而甘泉在北,謂就乾位,而衡云:「武帝居甘泉,祭于南宮」,此既誤矣。祭汾陰在水之脽,呼為澤中,而衡云「東之少陽」, 失其本意。此自吳事,於傳無非,恨無辨正之辭,故矯之云。脽,音誰,見漢書音義。  

강표전에 이르길 : 이해 겨울에 군신들은 손권이 교사(동지에는 남교에 하지에는 북교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므로 주의를 올려 말하길 「근래에 상서로운 징조가 누차 이르고 먼 나라도 의를 사모하니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일이 전후로 모두 갖춰졌으므로 응당 교사를 정비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어야 합니다.」 손권이 말하길 「교사는 응당 대지의 중앙에서 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 장소가 아니니 어찌 치룰 수 있겠는가?」 다시 주의를 올려 말하길 「하늘 아래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으니 왕자는 천하를 집안으로 삼습니다. 옛날 주나라 문왕과 무왕이 풍과 호(각 주 문왕과 무왕의 수도)에서 교사를 올렸으니 반드시 대지의 중앙일 필요가 없습니다.」 손권이 말하길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고 호경에서 천조하였으니 교사를 지낼만한 곳에 지낸 것이다. 문왕은 천자가 안 됐는데 풍에 교사를 지냈으니 어떤 경전에서 보이는가?」 다시 글을 써서 이르길 「엎드려 한서 교사지를 보건대 광형이 주를 올려 감천, 하동에서 장안으로 옮겨 교사하도록 하면서 문왕이 풍에서 교사를 지냈다고 말하였습니다.」 손권이 말하길 「문왕은 성격이 겸양한데 제후의 자리에 처해 교사를 지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경전에 명문이 없고 광형같은 속유의 억설은 전적의 올바른 뜻이 아니므로 쓸 수 없다.」 

지림에 이르길 : 오나라 왕이 교사를 지내라는 주의를 반박하면서 광형(匡衡)을 깎아내려 속유라고 하였다. 무릇 보는 사람은 개연히 물리에 달하여 사물의 마땅함에 통달했다고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전적을 고찰하는데 이르러서는 마침내 다시 통하지 않는 곳이 있다. 모장의 말에 이르길 「요임금이 태(邰)에서 하늘을 보고 후직을 낳으니 태에 나라를 세워 하늘을 섬기도록 명령했다.」라 했고 이로 인해 시경에 이르길「후직이 교사를 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거의 잘못과 회한이 없이 지금에까지 이르렀다.」라 했으니 말하길 후직 이래로 모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인데 노나라의 교사와 동일하다. 이로 말미암아 역박(棫樸: 시경 대아에 보인다.)의 시에 요제를 드리기 위해 쌓아 놓은 땔감이 있는 것이다. 문왕이 풍에 교사를 지낸 것은 경전에 명문이 있는데 광형이 어찌 속유라서 왜곡한 것이겠는가? 문왕이 비록 천자가 되지 못했다지만 천하를 삼분 하여 그 중의 둘을 가졌으니 숭(崇)과 려(黎)를 정벌하였고 조이(
祖伊)가 달려가 고한 것이다. 하늘이 이미 은나라를 버리고 권연히 서쪽을 돌아보았고 태백이 세 번 양보하여 이로써 천하를 소유한 것이다. 문왕이 왕이 되는데 정의에 있어 무슨 의문이 있겠는가? 그러나 광형의 주의에 다하지 못한 점이 있다. 생각건대 세종이 감천, 분음의 사당을 세우는데 있어 모두 방사의 말에서 나온 것이지 경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방사가 감천, 분음이 황제가 천지를 제사지낸 곳이라고 하여 효무제가 이로 인해 마침내 2개의 제터를 세운 것이다. 한나라의 수도는 장안이고 감천은 북쪽에 있다. 말하길 건(乾:하늘)의 자리를 취했다고 하니 광형이 말한 「무제가 감천에 거하면서 남궁에 제사지냈다.」는 말은 이미 틀린 것이다. 분음에 지내는 제사는 물의 꼬리 부분에 있어 택중이라고 불렀는데 광형이 말하길 「동쪽의 소양」이라 하였으니 본의를 잃은 것이다. 이는 오나라의 일인데 오주전에 비판이 없으므로 변정하는 말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긴 고로 바로잡아 이른 것이다. 수(脽)는 음이 수(誰)로 한서음의에 보인다.
 
2년(233년) 봄 정월, 손권이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은 부덕한데 천명을 받았으므로 아침저녁으로 걱정하고 근신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수면을 취할 틈이 없다. 세상의 환란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여 위로는 신령님의 비호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희망을 위로하기 원한다. 이 때문에 돌아다보면서 우수한 인물을 열심히 구해 그들과 함께 힘을 합쳐 같이 천하를 평정하려 한다. 만일 마음을 같이 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과 함께 늙어 갈 것이다. 

지금 사지절 독유주 영청주목 요동태수 연왕(공손연)은 오랫동안 위나라의 핍박을 받아 멀리 한쪽에 떨어져 있어, 비록 우리나라에 충성을 하려 해도 그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오늘 그는 천명에 순응하여 멀리서 사자 두 명을 보내왔다. 그의 충성스런 마음은 분명하게 나타나며, 서술한 표에는 심오한 정이 나타나고 있다. 짐이 이것을 얻었으니, 어떤 기쁨이 이와 같겠는가! 

비록 탕왕이 이윤을 만나고, 주 문왕이 여망을 얻었으며, 세조(광무제)가 천하를 아직 평정하지 못할 때 하우를 얻은 것도 오늘 여기에서 정해지는 것이다. <상서>에서 "군주 한 명에게 기쁨이 있으면, 만백성은 이것에 의지한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천하에 대사면을 시행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려고 하니, 주와 군에 명을 내려 모두 이 일을 알 수 있도록 하라. 특히 연나라에 조서를 내려 나의 조서와 은덕을 받들어 선양하고, 온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이 경사를 모두 알도록 하라.』
  
3월, 숙서와 손종을 귀국시키고, 태상 장미, 집금오 허안, 장군 하달 등은 사자로 하여 병사 1만 명을 인솔하고, 금, 보물, 진귀한 물건과 구석의 모든 물품을 갖고 뱃길로 공손연에게 주었다.(주1) 이에 대해서 오나라 조정의 대신들은 승상 고옹 이하 모두 간언하여 공손연은 아직 믿을 만하지 못한데 오히려 총애와 대우가 지나치게 후하니, 단지 관리와 병사 수백 명을 보내 숙서와 손종을 호위하여 보낼 수 있다고 했지만, 손권은 끝까지 듣지 않았다. (주2)

(주1)
江表傳載權詔曰:「故魏使持節車騎將軍遼東太守平樂侯:天地失序,皇極不建,元惡大憝,作害于民,海內分崩,群生堙滅,雖周餘黎民,靡有孑遺,方之今日,亂 有甚焉。朕受曆數,君臨萬國,夙夜戰戰,念在弭難,若涉淵水,罔知攸濟。是以把旄仗鉞,翦除凶虐,自東徂西,靡遑寧處,苟力所及,民無災害。雖賊虜遺種, 未伏辜誅,猶繫囚枯木,待時而斃。惟將軍天姿特達,兼包文武,觀時睹變,審於去就,踰越險阻,顯致赤心,肇建大計,為天下先,元勳巨績,侔於古人。雖昔竇 融背棄隴右,卒占河西,以定光武,休名美實,豈復是過?欽嘉雅尚,朕實欣之。自古聖帝明王,建化垂統,以爵褒德,以祿報功;功大者祿厚,德盛者禮崇。故周 公有夾輔之勞,太師有鷹揚之功,並啟土宇,兼受備物。今將軍規萬年之計,建不世之略,絕僭逆之虜,順天人之肅,濟成洪業,功無與比,齊魯之事,奚足言哉! 詩不云乎,『無言不讎,無德不報』。今以幽、青二州十七郡〔百〕七十縣,封君為燕王,使持節守太常張彌授君璽綬策書、金虎符第一至第五、竹使符第一至第 十。錫君玄土,苴以白茅,爰契爾龜,用錫冢社。方有戎事,典統兵馬,以大將軍曲蓋麾幢,督幽州、青州牧遼東太守如故。今加君九錫,其敬聽後命。以君三世相 承,保綏一方,寧集四郡,訓及異俗,民夷安業,無或攜貳,是用錫君大輅、戎輅、玄牡二駟。君務在勸農,嗇人成功,倉庫盈積,官民俱豐,是用錫君袞冕之服, 赤舄副焉。君正化以德,敬下以禮,敦義崇謙,內外咸和,是用錫君軒縣之樂。君宣導休風,懷保邊遠,遠人迴面,莫不影附,是用錫君朱戶以居,君運其才略,官 方任賢,顯直錯枉,群善必舉,是用錫君虎賁之士百人。君戎馬整齊,威震遐方,糾虔天刑,彰厥有罪,是用錫君鈇鉞各一。君文和於內,武信於外,禽討逆節,折 衝掩難,是用錫君彤弓一、彤矢百、玈弓十、玈矢千。君忠勤有效,溫恭為德,明允篤誠,感于朕心,是用錫君秬鬯一卣,珪瓚副焉。欽哉!敬茲訓典,寅亮天工, 相我國家,永終爾休。」    

강표전에 손권의 조서를 실어 이르길 : 「옛 위나라 사지절 거기장군 요동태수 평락후 : 천지가 순서를 잃고 큰 법도가 세워지지 않아 악당의 괴수가 백성들을 해치니 해내가 무너지고 뭇 생령들이 연멸되어 비록 남아 있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하나 남아 있는 자들이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 난리가 더욱 심하구나. 짐이 천명을 받들어 만국에 군림하고 주야로 전전긍긍하며 생각이 어려움을 멈추게 하는데 있으니 마치 깊은 물을 건너는데 건널 방법을 모르는 것과 같구나. 이로써 병사들을 지휘하여 흉학한 적들을 제거해 동에서부터 서에 이르기까지 평안할 새가 없었고 진실로 힘이 닿는 곳이라면 백성들에게 재해가 없었다. 비록 적들의 남겨진 무리가 모두 주살당하지는 않았다 하여도 오히려 죄수를 고목에 묶어 시간을 기다려 죽었다. 오직 장군은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 특별히 훌륭해 문무를 겸하여 시세의 변하는 것을 보고 거취를 고려하여 험저한 곳을 넘어 붉은 마음을 드러내 천하를 위해 먼저 커다란 계획을 세웠으니 위대한 공로가 옛 사람과 가지런히 할 만 하다. 비록 옛날 두융이 농우를 배반하고 끝내 하서를 점령하여 광무제의 패업을 정하여 아름다운 명성이 있다고 하나 어찌 다시 이를 초과하겠는가? 아름답고 고상한 것을 존중하고 우아하게 여기는 것을 짐은 실로 좋아한다. 자고로부터 성제, 명왕은 교화를 수립하고 후대에 세계를 남김에 있어 작위로 덕을 포상하고 공로에는 녹으로 보상하였는데 공로가 큰 사람은 녹이 후했고 덕이 융성한 사람은 예우가 높았다. 그러므로 주공은 협보의 노고가 있고 태사는 응양의 공업이 있으므로 더불어 국가를 열고 겸하여 비물을 받은 것이다. 불세의 책략을 수립하여 참역의 무리들을 끊어내고 하늘과 사람의 질서에 따라 홍업을 이룩했으니 공로가 이와 더불어 비할 것이 없는데 제나라와 노나라의 일이 어찌 족히 말할 만하겠는가! 시경에 말하지 않았는가 『쓰이지 않는 말이 없고 보답 받지 않는 덕이 없네.』지금 유주와 청주 17군 170현에 그대를 연왕에 봉하고 사지절 수 태상 장미가 그대에게 새수와 책서, 금호부 제1에서 제5, 죽사부 제1에서 제10을 하사한다. 그대에게 현토를 내리고 백모를 깔며 이에 그대는 거북의 껍질을 새기고 내려준 총사(冢社 :사직)를 쓰도록 하라. 바야흐로 전쟁이 있을 때면 병마를 통솔하고 대장군의 장비로 유주, 청주의 군대를 감독하며 요동태수는 이전과 같이 한다. 지금 그대에게 구석을 가하니 공경히 이후의 명령을 듣도록 하라. 그대는 3세동안 서로 이어오면서 일방을 보호하고 4군을 안녕하게 하였으며 다른 풍속의 백성들을 가르쳐 백성들과 오랑캐가 생업을 편안히 여기고 두 마음을 품지 않았으니 이에 그대에게 대로, 융로 , 현모 2사를 내린다. 그대는 농업에 힘쓰고 농민들이 성공하여 창고가 가득차고 관민이 더불어 풍족하니 이에 그대에게 곤면의 의복을 내리고 적석(赤舄:신발)을 덧붙인다. 그대는 올바른 교화를 덕으로 이뤄냈고 아래를 대하는데 예법으로 공경하여 의를 두텁게 하고 겸양을 숭상하니 내외가 모두 감화되므로 이에 그대에게 헌현의 음악을 내린다. 그대는 아름다운 풍속을 선도하고 멀리 떨어진 곳을 품고 보호하니 멀리 있는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의부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에 그대에게 붉은 문을 내려 거소로 쓰게 한다. 그대는 재략을 운용하여 관방에 현자를 임명하여 올바른 것을 밝혀 굽은 것을 폐하니 뭇 선이 반드시 들리므로 이에 그대에게 호분의 용사 100인을 내린다. 그대는 융마가 정제되고 위엄이 먼 곳까지 진동시키며 하늘의 형벌을 공경히 여겨 죄 있는 것을 드러내니 이에 그대에게 부월 각 1개를 내린다. 그대는 문치가 안에서 화합하고 무치가 밖에 믿음을 주니 역적을 토벌해 잡고 적의 군대를 막아 어려움을 해결하므로 이에 그대에게 동궁 1장 동시 100개 여궁 10장 여시 1000개를 내린다. 그대의 충성과 근면이 유효하고 온화, 공손이 덕이 되는바 밝고 공평하며 독실과 진정함이 짐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므로 이에 그대에게 거창 한 동이와 규찬을 덧붙여 내린다. 탄복스럽구나 ! 이 가르침을 공경히 받들어 하늘의 공평을 밝히어 우리 국가를 보좌하며 영원히 그대의 아름다움을 마치도록 하라.」


(주2)
신 배송지가 여기건대 손권이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고 충고를 듣지 않으며 중론을 거슬렀고, 공손연을 믿으며 헤아림이 끝나서, 공격하여 정벌하는 책략과, 거듭 염려함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취지를 전달하고 조명詔命을 하사하며, 이에 만 명을 썼으니, 이 얼마나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우며 포학함이 심하단 말입니까! 이러한 징병은, 단지 우매하고 현명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도리에 어긋난 짓입니다.

공손연은 과연 장미 등의 목을 베어 그들의 머리를 위나라로 보내고, 그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와 물자를 빼앗았다. 손권은 매우 분노하여 직접 공손연을 정벌하려고 했는데, 상서복야 설종 등이 간절히 간언하여 그만두었다.(주1) 이 해, 손권은 합비 신성으로 진격하며 장군 전종을 파견하여 육안을 정벌하도록 했지만, 모두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주2)

 

(주1)강표전江表傳에서 손권孫權이 성내는 것을 싣길 : “짐의 나이가 60으로, 세상사의 어려움과 쉬움을, 맛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근래에 쥐새끼에게 마음대로 다루어지니, 노기가 산과 같이 오르게 하는구나. 친히 쥐새끼의 머리를 끊어서 바다에 던지지 않고는, 다시 만국에 임할 낯이 없다. 설령 엎어지고 자빠지더라도, 한스럽지 않으리라.” 


(주2)[주: 위소의「오서」왈: 당초 (233년 손권이 공손연에게 보낸) 장미(張彌), 허안(許晏) 등이 함께 (공손연의 근거지인) 양평에 도착하니 그 관속들과 종자가 4백여 명에 달했다.

공손연(公孫淵)이 장미, 허안을 도모하고자 하여 먼저 그들 무리를 요동(군郡)의 여러 현(縣)에 나누어 두니, 중사(中使)인 진단(秦旦), 장군(張羣), 두덕(杜德), 황강(黃疆) 등과 관리와 병사 60명은 현도군(玄菟郡)에 두었다. 현도군은 요동 북쪽에 있었고 서로 2백리 떨어져 있었다. 

(현도)태수 왕찬(王贊)은 2백 호(戶)와 또한 (2백 편호 이외에?) 3-4백 명쯤을 거느리고 있었다. 진단 등은 모두 민가에서 묵으며 먹고 마시는 것을 여기에 의존했다. 40여 일이 지나 진단이 황강 등과 더불어 의논하길, 

“우리는 멀리 와서 국명(國命)을 욕되게 하고 이곳에 버려졌으니 어찌 (이미) 죽은 것과 다를 바 있겠소? 이제 이 군(郡)을 보니 형세(形勢,세력)가 심히 미약하오. 만약 (우리가) 어느 날 마음을 합해 성곽을 불태우고 그 장리(長吏,현의 장관인 현령, 현장이나 현승, 현위 등 비교적 녹질이 높은 관리)들을 죽여 나라를 위해 설욕한다면 그 연후에 비록 죽음을 당하더라도 족히 여한이 없을 것이오. 구차하게 살아남아 오래도록 죄수가 되는 것과 비교해 어떠하오?” 

하니 황강 등이 이를 옳게 여겼다. 그리하여 몰래 서로 약속하여 8월 19일 밤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날 낮에 부중(部中)의 장송(張松)이 이를 고하니 왕찬이 곧바로 사중(士衆,사졸)들을 모으고 성문을 닫았고, 진단(秦旦), 장군(張羣), 두덕(杜德), 황강(黃疆) 등은 모두 성을 넘어 달아났다. 

당시 장군(張羣)의 무릎에 종기가 발병해 일행을 잘 뒤따르지 못하자 두덕(杜德)이 늘 그를 부축하여 함께 갔다. 험한 산골짜기로 6-7백리 길을 가 상처가 더욱 심해져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 풀숲에 누워 서로 지켜보며 비통해하며 흐느꼈다. 장군(張羣)이 말했다, 

“내가 불행히 상처가 심해 죽을 날이 멀지 않았소. 경들이 속히 길을 나아가면 도착할 곳이 있으리라 믿소. 헛되이 서로 지키다 깊은 골짜기에서 함께 죽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소?”

두덕(杜德)이 말했다, “만 리를 떠돌며 생사를 함께 했으니 차마 내버릴 수 없소.” 

그리고는 진단(秦旦), 황강(黃疆)을 떠밀어 앞서 가도록 하고는 두덕 자신은 홀로 남아 장군(張羣) 을 지키며 과일과 나물을 따서 먹었다. 진단, 황강이 헤어진 지 며칠만에 (고)구려(句驪)에 도착하고는, (손권이) 구려왕(句驪王) 궁(宮)과 그 나라의 주부(主簿)에게 내린 조령을 밝히고 사여품이 있었으나 요동의 공손연에게 공격받아 빼앗겼다고 속여서 말했다.

궁(宮) 등이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조령을 받들고 사인(使人)들에게 명해 진단(秦旦) 등을 따라가서 장군(張羣), 두덕(杜德)을 맞아 오게 했다. 그 해에 궁(宮)이 조의(皂衣) 25명을 보내 진단 등을 호송해 (오나라로) 돌려보내고 표문(表文)을 올리며 칭신(稱臣)하고 초피(貂皮,담비가죽) 천 매(枚), 할계피(鶡雞皮, 할계 가죽. 산해경 곽박 주에서 ‘할계는 꿩을 닮았고 몸집이 크고 푸른색이며 모각毛角이 있는데 적과 싸울 때는 죽어서야 멈춘다’ 고 했음) 10구(具)를 바쳤다. 진단 등이 손권을 만나자 슬프면서도 기뻐하며 스스로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했다. 손권이 이들을 의롭게 여겨 모두 교위(校尉)로 임명했다. 1년을 사이에 두고(2년 뒤에?) 사자(使者) 사굉(謝宏), 중서(中書) 진순(陳恂)을 보내 (고구려의) 궁(宮)을 선우(單于)로 삼고 의물(衣物)과 진보(珍寶)를 사여했다. 

진순(陳恂) 등이 안평구(安平口)에 도착한 뒤 먼저 교위 진봉(陳奉)을 보내 궁(宮)을 만나게 했다. 그런데 궁(宮)이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의 풍지(諷旨, 에둘러서 넌지시 권하는 교지)를 받았는데 오나라 사자로써 스스로 힘쓰라는 오나라 사자를 붙잡아 공을 세우라는 내용이었다. 

진봉(陳奉)이 이를 듣고 (안평구로) 되돌아가자 궁(宮)이 주부(主簿) 착자(笮咨), 대고(帶固) 등을 보내 안평(安平)으로 나가게 하여 사굉(謝宏)과 서로 만났다. 사굉이 곧바로 30여 명을 묶어서 사로잡아 이들을 볼모로 삼았다. 그러자 궁(宮)이 사죄하고 말(馬) 수백 필을 바치니, 이에 사굉이 착자, 대고를 보내주어 조서와 사여품을 지니고 가서 궁(宮)에게 주게 했다. 이때 사굉의 배가 작아 수백필을 다 싣지는 못하고 말 80필 만을 싣고 돌아왔다. 

3년(234년) 봄 정월,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전쟁이 장기간 그치지 않아 백성들은 부역으로 고통을 당하며, 세금이 간혹 거두어지지도 아니하니, 각종 세금을 느슨하게 하고 다시는 재촉하여 징수하지 말라.」


여름 5월, 손권은 육손과 제갈근 등을 파견해 강하, 면구에 주둔하도록 하고, 손소와 장승 등에게는 광릉, 회양으로 진군하도록 했으며, 자신은 대군을 인솔하여 합비 신성을 포위했다. 이 당시, 촉의 재상 제갈량이 무공까지 병사를 이끌고 나왔으므로, 손권은 위 명제가 멀리 나갈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위 명제는 병사를 보내 사마선왕을 원조하여 제갈량에게 대항하고, 직접 수군을 이끌고 동쪽 정벌에 올랐다. 위 명제가 수춘에 도착하기 전에 손권은 퇴각하여 돌아왔고, 손소 역시 공격을 멈췄다.


가을 8월, 제갈각을 단양태수로 임명하여 산월을 토벌하도록 했다.


9월 초하루, 서리가 내려 곡식이 많이 상했다.


겨울 11월, 태상 반준은 무릉의 이민족을 평정하러 갔다가 일을 마치고 무창으로 돌아갔다. 조서를 내려 다시 곡아현을 운양현이라 하고, 단도현을 무진현이라고 했다. 여릉의 도적 이환과 나려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4년(235년) 여름, 여대를 파견하여 이환 등을 토벌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우박이 내렸다. 위나라 사자가 말을 진주, 비취, 대모와 교환하기를 원하자, 손권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모두 내가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고, 말을 얻을 수 있는데 어찌 그 교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소?』


5년(236년) 봄, 대전을 주조하였는데, 대전 하나가 5백 개의 소전에 상당했다. 조서를 내려 관리와 백성들에게 동을 내도록 하고, 그 동을 계산하여 전을 주었다. 화폐 주조에 대한 처벌 조항을 만들었다.


2월, 무창에서 예빈전에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보오장군 장소가 죽었다. 중랑찬 오찬이 이환을 체포했고, 장군 당자가 나려 등을 체포했다.


10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더니, 여름까지 계속됐다.


겨울 10월, 혜성이 동방에 나타났다. 파양의 도적 팽단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6월(237년) 봄 정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3년 상은 천하에 통행하는 제도로서 사람의 감정이 지극히 애통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개인의 슬픔을 버리고 국가의 예법을 따르지만,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억지로 3년 상을 고수한다. 세상이 태평스럽고 성현의 도가 통하여 아래 위에 일이 없을 때에는 군자는 인간의 감정을 빼앗을 수 없다. 따라서 3년간이라는 기간이 효자의 가문에도 이르지 않는다. 나라에 일이 있을 때는 예절을 간소화하여 그 당시의 마땅함에 따르고 상복을 입은 대로 국사를 처리한다. 그래서 성인이 법령을 제정할 때도 예절이 있어도 제때가 아니면 실행되지 못했던 것이다. 상사를 당하고도 집으로 달려가지 않는 것은 고대의 예절이 아니지만, 시대의 변화에 응하여 대의를 중시하고 사적인 감정을 잘라 낸다. 이전에는 이런 이유로 하여 처벌을 정하고, 고급 관리는 직무를 맡고 있으면서 상사를 당하면 반드시 교대자가 있어야만 했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범하는 자가 있고, 비록 그 과실을 살펴 죄를 다스린다고 하더라도 공무는 여전히 황폐해진다. 현재는 일이 많을 때이고 국가도 어려움이 많으니, 무릇 관직에 있는 관리들은 응당 각자 충성을 다하고 공적인 것을 앞에 두고 사적인 것을 뒤에 두어야 하며, 이 취지를 삼가 따르지 않는 것은 매우 의의가 없는 일이다. 중앙과 지방에 있는 관료들은 다시 이 일에 관해 상의하여 법령을 적당하게 하도록 노력하고 상세하게 조목을 만들도록 하라.」


고옹이 상주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례 의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에 관한 법을 세움에 있어서 가벼우면 효자의 감정을 금지할 수 없고, 무거워도 본래 사형에 처해야만 되는 죄는 아닙니다. 설사 엄격한 형벌을 더한다고 하더라도 위반하는 자는 반드시 적을 것입니다. 만일 법을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 처벌을 가중하면 사사로운 감정은 차마 하지 못하고, 처벌을 줄이면 법령이 폐지되어 실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고급 관리로서 먼 곳에 있는 자에게는 설령 상사가 있다고 해도 통지하지 않는다면 그 형세는 반드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대리자를 선발하는 시간에 만일 소식을 전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고급 관리가 직무를 팽개치는 걱정은 없을 것이고, 효자가 중형을 범하여 처벌되는 경우 또한 없을 것입니다.』


장군 호종이 의견을 제시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상사에 관한 예절은 비록 전장에 의한 제도가 있다고 해도, 만일 비상시기에 있지 않으면 집행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마침 전쟁 시기로 군사와 일반 정사를 처리하는 상황이 다른데, 고급 관리가 상사를 만났을 때 금지하는 조항이 있음을 알면서도 공공연히 과감하게 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한다면, 설사 효자가 부모의 상사를 듣고 달려가지 않는 이를 생각했을지라도 신하된 자가 금지하는 것을 범하는 죄는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법률 금령이 본래 가볍게 만들어진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신하는 국가에 충성하고 효도로써 집안을 세우며 벼슬에 나와 신하가 되는데, 어떻게 양자를 모두 가질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충신인 자는 효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법률을 제정하여 사형으로써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만일 고의로 법을 위반한다면 죄를 범한 것이므로 결코 사면시킬 수 없습니다. 사형을 실시함으로써 죽을죄를 범하는 자를 막고, 이것으로써 한 사람을 처리한 그 이후에는 후손이 반드시 끊길 것입니다.』


승상 고옹이 신하들의 의견에 동의하여 사형을 실시할 것을 주청했다. 그 후, 오현의 현령 맹종이 모친상을 당해 달려갔다가 일을 마친 후 직접 이름을 드러내어 무창의 감옥에 구금되어 형벌을 달게 받기를 표명했다. 육손은 그의 평소 행동을 서술하고 그를 위해 부탁을 했다. 손권은 그래서 맹종의 직위를 한 등급 줄여 주었으며 이후에는 이러한 예는 생각할 수도 없다고 했다. 때문에 법을 위반하며 상가로 달려가는 일은 근절됐다.


2월, 육손이 팽단 등을 토벌하여 그 해에 모두 격파시켰다.


겨울 10월, 위장군 전종을 파견하여 육안을 습격하였지만 공략시키지 못했다. 제갈각이 산월을 평정하는 일을 마친 후, 북쪽으로 여강에 주둔했다.


적오 원년(238년) 봄, 한 개가 1천 소전에 상당하는 대전을 주조했다.


여름, 여대가 여릉의 적을 토벌하고 육구로 돌아왔다.


가을 8월, 무창에서 기린이 출현했다고 한다. 담당 관리는 기린은 천하태평의 상징이므로 마땅히 연호를 고쳐야 한다고 상주했다.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근래 붉은색 까마귀가 궁전 앞에 모여 있었는데, 짐이 직접 보았다. 만일 이런 신령스런 새가 길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연호를 바꾸어 응당 적오를 원년으로 해야만 한다.」


신하들은 다음과 같이 상주하여 말했다.


『과거 주 무왕이 은의 주왕을 토벌할 때, 붉은색 까마귀의 길상이 있었고, 군주와 신하들이 이것을 보아 마침내 천하를 얻게 되었는데, 이 일은 성인이 역사서에 상세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최근의 일은 길상으로 생각되며, 직접 보았으니 또 명백합니다.』


그래서 연호를 고쳤다. 보부인이 죽자, 황후로 추증했다.


당초, 손권은 교사 여일을 신임했는데, 여일은 성격이 가혹하고 법을 매우 엄하게 집행했다. 태자 손등이 이 점을 자주 간언했지만, 손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산들은 이 때문에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후에 여일의 간사한 죄악이 발각되어 참살 당하게 되었는데, 손권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자책했으며, 곧 중서랑 원례를 시켜 여러 대장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도록 하고, 이 기회에 그 당시의 정사에 있어서 고쳐야만 할 점에 관해 질문했다. 원례가 돌아오자, 손권은 또 조서를 내려 제갈근, 보즐, 주연, 여대 등을 질책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례가 돌아와 보고한 것에는, 자유(제갈근), 자산(보즐), 의봉(주연), 정공(여대)과 함께 서로 만나보고, 아울러 그 당시 정사에 있어서 응당 앞뒤로 해야만 되는 일에 관해 물었더니, 각자 민사를 관장하지 않았으므로 자신들의 의견을 진술할 수 없다면서 모두 백언(육손)과 승명(반준)에게 미루었다고 했다. 백언과 승명은 원례를 만나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슬퍼하였고, 말하는 취지는 고통스러웠고 마음속으로는 위기와 공포를 갖고 있었으며, 불안한 마음이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매우 실망했으며, 매우 기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엇 때문인가? 


무릇 성인은 잘못된 행위가 없게 할 수 있고, 현명한 사람은 스스로 관찰할 수 있다고 본다. 사람의 거동이 어떻게 모두 적중할 수 있겠는가? 내가 여러분의 의견을 함부로 거절하고 경솔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의심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른 것이겠는가? 


내가 군대를 일으킨 지 50년 간, 부세는 모두 백성들에게서 나왔다.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반역하는 자들이 아직도 있으며, 사인과 백성들이 수고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확실해 나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부득이한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일 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성장하여 머리는 희끗희끗하게 되었다. 내심과 행위를 여러분들은 십분 알 수 있으며, 공사의 감정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서로 충분히 신임할 수 있다. 


여러분들이 의견을 전부 말하고 직접적으로 간언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나의 허물을 보완하는 것은 나 역시 희망한다. 과거 위무공은 나이가 많았어도 뜻이 매우 커서 보좌할 신하를 간절하게 구하였으며, 왕왕 혼자 탄식하고 꾸짖었다.(주) 또 일반 평민과 사귈 때에도 인정과 뜻으로써 합쳐 친구가 되었으며, 여전히 곤란한 상황 속에서도 변심하지 않았다. 오늘 여러분들은 나와 함께 일을 하면서 비록 군주와 신하의 대의명분은 있지만 골육지친도 또 이와 같음을 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영예, 행복, 기쁨, 슬픔을 그대들과 함께 할 것이다. 충성스런 자는 감정에 빠지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는 도모함에 있어 남김이 없고 일의 시비에 대해서는 함께 책임을 지는데, 여러분들은 어찌 한가롭게 있겠는가! 


우리들은 같은 배로 물을 건너는 것과 같은데,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겠는가! 제 환공은 제후의 패자였는데, 그에게 선행이 있으면 관자가 일찍이 찬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에게 허물이 있으면 일찍이 간언하며 그치지 않았었다. 지금 나 자신은 제 환공의 덕이 없음을 반성하지만, 여러분들은 간언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여전히 의심과 비난을 품고 있다. 이 점에서 말하면, 나는 제 환공과 비교하여 진실로 우수하지만, 여러분들은 관자와 비교할 때 어떠한지 아직 모른다.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했으니, 이 일에 대해서는 웃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함께 대업을 세우고 천하를 통일시켜야지, 마땅히 또 누가 있겠는가? 모든 일에는 당연히 줄이고 늘림이 있으며, 다른 의견을 즐겁게 들어 나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으려 한다.』


(주) 강표전에서 이르길 : 손권이 다시 이르길 : “천하에 순백의 여우는 없으나, 순백의 갖옷은 있으니, 많은 것들이 축적된 바요. 대저 순수하지 않은 것이 순수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축적된 바가 아니겠소? 그러므로 많은 이의 힘을 쓸 수 있다면, 천하에 적이 없을 것이고, 많은 이의 지혜를 쓸 수 있다면, 성인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오.”  


2년(239년) 봄[주1] 3월, 손권은 사자 양도(羊茞), 정주(鄭冑), 장군 손이(孫怡)를 요동으로 가게 하여 위나라 수장 장지(張持), 고려(高慮) 등을 공격하게 하여 남녀를 포로로 잡았다. [주2]



[주1]강표전에 실린 손권의 정월 조서에서 이르길 : “낭리郎吏란, 숙위宿衞하는 신하로, 고대의 명사命士다. 이사이에 임용하는 바는 자못 그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지금부터 삼서三署를 선발함은 모두 사과四科에 의거하며, 헛소리로 서로 꾸미는 사람은 얻지 말도록 하라.”


[주2] 문사전(文士傳): 정주(鄭冑)는 자가 경선(敬先)이고 패국(沛國) 사람이다. 아버지 정찰(鄭札)은 문학에 뛰어났고, (219년) 손권이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임명되자, 정찰을 종사중랑(從事中郎)으로 삼고, 장소(張昭), 손소(孫邵)와 같이 조의(朝儀)에 참석하도록 했다. 


정주는 정찰의 막내아들인데, 문무(文武)에 재능이 있어, 어려서 이름이 아려졌고,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곧 건안태수(建安太守)가 되었다. 여일(呂壹)의 빈이 군내에서 법을 범하자, 정주가 그 빈객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고 그를 죽였다 [考竟]. 이 때문에 여일이 앙심을 품었고 곧 몰래 손권에게 정주를 참소했다. 손권이 크게 노하며 정주를 불러오게 했는데, 반준(潘濬), 진표(陳表)등이 애걸하여 정주를 석방하였다. 


후일에 선신교위(宣信校尉)가 되었으며, 공손연(公孫淵)에게 가서 공손연을 구조하러 갔지만, 이미 위나라 사마의에게 격파된 뒤였다. 되돌아와 집금오(執金吾)가 되었으며, 아들은 정풍(鄭豐)인데, 자는 만계(曼季)이고, 문학(文學)에 조행(操行)이 있었고, 육운(陸雲)과 친하였고, 육운과 시를 주고받았다. 사공(司空) 장화(張華: 232-300)이 불렀으나, 가지 않았고 죽었다. 


신 송지가 듣기로는 손이(孫怡)는 동주(東州)사람인데, 손권이랑 친척은 아니라고 한다.


영릉에서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여름 5월, 사이(沙羨)에 성벽을 세웠다.


겨울 10월, 장군 장비가 남쪽으로 이민족을 토벌했다. 장비(蔣秘)가 이끄는 도독 요식(廖式)이 임하태수 엄강(嚴綱) 등을 죽이고 자칭 평남장군이라고 하며, 동생 요잠(廖潛)과 함께 영릉, 계양 및 교주, 창오, 울림의 여러 군을 동요시켰으며, 병력은 수만이나 되었다. 장군 여대와 당자(唐咨)를 파견하여 토벌하도록 했는데, 1년여 만에 모두 격파시켰다.


3년(240년) 봄 정월,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대체로 군주는 백성이 없으면 국가를 세울 수 없고, 백성은 곡식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다. 근래 이래로 백성들의 납세와 복역이 너무 많았고, 해마다 또 수재와 한재가 있어 한 해의 곡물 수확량이 감소하였는데, 관리들 가운데 어떤 자는 좋지 못하여 백성들의 농번기를 빼앗아 굶주림의 고통에 이르게 하고 있다. 지금 이후로 독군과 군수는 관리들의 법을 준수하지 않는 행위를 삼가 살피고, 농사와 양잠을 해야 할 시기에 부역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는 적벌하여 보고하라.」


여름 4월, 대사면을 실시하고, 여러 군과 현에 조서를 내려 성곽을 수리하고 망루를 만들었으며 참호나 굴을 파서 도적들을 대비하도록 했다.


겨울 11월, 백성들에게 기근이 발생하자 조서를 내렸다. 창고를 열어 빈궁한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했다.


4년(241년) 봄 정월, 대설이 내려 평지에도 3척이나 쌓였고, 날짐승과 들짐승 중에서 태반이 죽었다.


여름 4월, 위장군 전종을 파견하여 회남을 공략하도록 하고 작파를 무너뜨리고 안성의 곡식 창고를 불태우고 그곳의 백성들을 거둬들였다. 위북장군 제갈각이 육안을 공격했다. 전종과 위나라 장수 왕릉(王淩)이 작파에서 전쟁을 했는데, 중랑장 진황(秦晃) 등 10여 명이 전사했다. 거기장군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고, 대장군 제갈근이 조중(柤中)을 취했다.


한진춘추(漢晉春秋)에서 이르길: 영릉태수(零陵太守) 은례(殷禮; 은찰(殷札)이라고 되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이 손권에게 말하였다.


"지금 하늘이 조씨(曹氏)를 버려서 상주(喪誅)하는 일이 여러 차례 보이고, 호랑이가 싸우는 때에 어린아이가 일을 맡았습니다. 폐하께서 친히 군사를 인솔하시어 혼란스러운 나라를 빼앗고 망하는 나라에 모욕을 주고 의당 형주(荊州)와 양주(揚州)의 땅을 싹 쓸어서 강건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동원하여 강한 사람들은 창을 잡게 하고 약한 사람들은 운반하는 일을 하게 하십시오.


서쪽 익주(益州)의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시어, 농우(隴右)에 진을 치게 하고, 제갈근(諸葛瑾)과 주연(朱然)에게 많은 무리를 주어서 곧바로 양양(襄陽)을 겨냥하게 하시며 육손(陸遜)과 주환(朱桓)은 별도로 수춘(壽春)을 정벌하게 하시고 대가(大駕)는 회수의 북쪽으로 들어가서 청주(青)와 서주(徐)를 거쳐 가도록 하십시오. 양양과 수춘이 포위되어 곤궁하게 되고 장안 이서가 촉군과 싸우느라 여념이 없게 되면 허창과 낙양의 군사가 반드시 동서 양쪽으로 나뉘게 될 것이니 이때 아군이 기각지세(琦角之勢)를 만들어 병진하면 중원의 백성들이 반드시 내응할 것입니다.


장수가 서로 마주 대하고 있으면 혹 편하고 마땅한 일을 잃게 되고, 한 부대가 실패하면 세 부대의 군사들의 마음이 떠날 것입니다. 바로 마땅히 그 때 아군이 말마지거(抹馬肢車 : 배불리 먹은 말과 충분히 장비를 갖춘 전차)로 성읍을 휩쓸면서 이긴 기세를 타고서 북쪽으로 쫓아내어 화하(華夏)를 평정해야 합니다.


만약에 모든 군사와 많은 무리를 동원하지 아니하고 전처럼 가볍게 움직이면 크게 쓰이기에는 부족하고 쉽게 누차에 걸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니, 백성은 피곤하게 되고 위신은 소멸되며, 기회는 가버리고 힘은 다 빠질 것이니 군사를 내보내는 계책이 아닙니다."


손권이 이를 채용할 수 없었다.


5월, 태자 손등이 죽었다. 이 달, 위나라 태부 사마선왕이 번성을 구원했다.


6월, 군대가 돌아왔다.


윤달 6월, 대장군 제갈근이 죽었다.


가을 8월, 육손이 주에 성을 쌓았다.


5년(242년) 봄 정월, 아들 손화를 세워 태자로 삼고 대사면을 실시했으며, 화흥을 가흥으로 고쳤다. 모든 관리들이 황후를 세우고 네 아들을 왕으로 삼을 것을 상주했다.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현재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백성들은 수고로우며 고달프다. 게다가 공로가 있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는 아직 기록되지 않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자는 오히려 구휼되지 못했다. 그런데 토지를 함부로 분할하여 자신의 자제를 풍요롭게 하고, 작위를 높여 자신의 비첩을 총애하려고 하니, 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 건의는 방치하라.」


3월, 해염현에 황룡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여름 4월, 진귀한 물품의 헌상을 금지시키고 태관에서 제공하는 음식의 양을 줄였다.


가을 7월, 장군 섭우, 교위 육개를 보내 병사 3만 명을 인솔하게 하여 주애(朱崖)와 담이(儋耳)를 토벌하도록 했다. 이 해, 역병이 크게 유행하였고, 담당 관리들은 또 황후를 세우고 자식들을 왕으로 삼을 것을 상주했다.


8월, 아들 손패를 세워 노왕으로 세웠다.


6년(243년) 봄 정월, 산도군에서 백호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제갈각이 육안을 정벌하고, 위나라 장수 사순의 진영을 격파시켜 그의 백성들을 수용했다.


겨울 11월, 승상 고옹이 세상을 떠났다.


12월, 부남왕 범전이 사자를 보내 예인과 그곳의 특산물을 바치도록 했다. 이 해, 사마선왕이 군대를 이끌고 서현(舒縣)으로 들어갔고, 제갈각은 환에서 시상(柴桑)으로 옮겼다.



7년(244) 봄 정월, 상대장군(上大將軍) 육손(陸遜)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가을, 원릉(宛陵)에서 가화(嘉禾)가 자랐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 해, 보즐과 주연 등이 각각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촉나라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촉은 오와의 맹약을 등지고 위와 서로 내통하려고 많은 배를 만들고 성곽을 수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장완은 한중을 수비하면서 사마의가 남쪽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위나라의 후방이 텅 비었는데도 병사를 내어 적을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한중을 버리고 성도 부근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은 이미 매우 분명해졌으니 또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응당 방비할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손권은 상황을 추측해 보고는 이와 같지 않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촉을 두텁게 대우하고, 공식적인 사자를 파견하여 맹약을 맺었으며, 촉에게 불성실하게 대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소? 또 사마의는 이전에 서현으로 들어왔다가 열흘이 지나자 곧 물러났소. 촉은 만 리 먼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어떻게 형세의 위급함을 알고 곧 바로 병사를 내겠소? 


과거 위나라가 한천으로 들어오려고 했을 때도, 우리들은 여기에서 삼엄하게 경계하면서 또 거동하지 않고 있었는데, 마침 위나라 군대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어 출병을 멈추었었소. 촉나라가 어찌 이 때문에 우리를 의심할 수 있겠소?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의 국가를 다스리면서 배나 성곽을 무엇 때문에 수리하여 보호하지 않겠소? 지금 우리가 여기서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이 어찌 또 촉을 방어하려고 하는 것이겠소? 사람들의 말은 매우 믿을 만하지 못하오. 짐은 여러분들을 위해 집을 허물어서 보증하겠소.』


촉나라는 결국 스스로 도모하는 바가 없었는데, 과연 손권이 헤아린 것과 같았다.


강표전江表傳에 실린 손권孫權의 조서에서 이르길 : “독장督將이 배반하고 도망가면 그 처자식을 죽여서, 처는 지아비를 버리고, 자식은 부친을 버리게 해, 인의의 교화를 매우 해쳤으니, 지금부터는 죽이지 말도록 하라.”


8년(245년) 봄 2월, 승상 육손이 세상을 떠났다.


여름, 우레가 궁궐 문의 기둥에 떨어졌으며, 또 남진 대교의 기둥을 쳤다. 다릉현에 홍수가 발생하여 범람하였으므로 주민들의 가옥 2백여 채가 유실되었다.


가을 7월, 장군 마무(馬茂) 등이 모반을 꾀했으므로, 그들의 삼족을 멸했다. [주]


[주] 오력: 마무(馬茂)는 본래 회남(淮南) 종리군(鍾離郡)의 장이었는데, 왕릉(王淩)에 의해서 그 자리를 잃게 되자, 반란을 하여 오나라로 항복해 왔고, 오에서는 그를 정서장군(征西將軍), 구강태수(九江太守), 외부독(外部督)으로 삼고, 후(侯)로 봉했고, 1천여 명의 병사를 주었다. 


손권이 수차례 원중(苑中: 동산)에 나와 여러 공경들과 같이 사냥했는데, 마무는 겸 부절령(符節令) 주정(朱貞)과 무난독(無難督) 우흠(虞欽), 아문장(牙門將) 주지(朱志)와 같이 공모하여, 원중에서 손권을 엿보았다. 여러 공경들과 장군들이 아직 들어오기 전에, 주정은 조서를 받으로 왔다고 칭하고 곧 손박을 체포하면, 마무가 병사들을 이끌고 원중에 쳐들어와 손권을 때려죽이고, 궁궐과 석두성을 나누어 점거하여, 이를 위나라에 보고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모두 죽음을 당했다.


8월, 대사면을 시행했다. 교위 진훈을 파견하여 둔전사병과 잔인 3만 명을 데리고 구용 중도에 운하를 파서 소기로부터 운양 서쪽 성까지를 연결하여 상인들의 교역 장소를 만들고 식품 창고를 만들도록 했다.


9년(246년) 봄 2월, 거기장군 주연이 위나라의 조중을 정벌하여 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포로를 잡았다.


여름 4월, 무창에서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가을 9월, 표기장군 보즐이 승상으로, 거기장군 주연이 좌대사마로, 위장군 전종이 우대사마로, 진남장군 여대가 상대장군으로, 위북장군 제갈각이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강표전에서 이르길 : 이 해에, 손권의 조서에서 이르길 : “사굉謝宏이 지난날 대전大錢을 주조하는 것을 진술하며, 재화가 널리 퍼질 거라고 일렀기에, 이를 들어줬다. 지금 듣기론 백성들의 생각은 편리하다고 여기지 않으니, 유통을 정지시키고, 기물器物을 주조하며, 관官에서는 다시 내놓지 말도록 하라. 사가에 있는 것들은, 칙령으로 감춘 것을 보내게 하여, 그 가치를 헤아려 주고, 바르지 못한 바가 있지 않도록 하라.”


10년(247년) 봄 정월, 우대사마 전종이 세상을 떠났다. [주]


[주] 강표전: 이 해에 손권은 제갈일(諸葛壹)로 하여금 가짜로 항복한 척 하여 위나라의 제갈탄(諸葛誕)을 유인하도록 하였고, 제갈탄은 보병과 기병 2만여 명을 이끌고 고산(高山)으로 나왔다. 손권도 도중(涂中)을 나와 출전하여 고산에 이르렀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제갈탄이 눈치를 채고 회군하였다.


2월, 손권은 남궁으로 갔다.


3월, 태초궁을 개축했고, 여러 장수들과 주군이 모두 노동에 힘썼다.


강표전江表傳에 실린 손권孫權의 조서에서 이르길 : 건업궁建業宮은 도리어 짐이 경京에서부터 와서 장군의 부시府寺를 만들었을 뿐이라, 목재기둥은 대략 가늘고, 모두 썩어서, 항상 손상되고 파괴될까 두렵다. 지금 아직은 다시 서쪽으로 가지 않을 것이니, 무창궁武昌宮의 목재와 기와를 옮겨서, 다시 이를 보수하라.” 유사有司가 상주하길 : “무창궁은 이미 28 해가 지나서, 쓸 수 없을까 두려우니, 의당 도처에서 모두 다시 벌목하여 보내게 하달하시옵소서.” 손권이 이르길 : “대우大禹는 궁실을 보잘것없게 하는 것을 훌륭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군사軍事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도처에 부세가 많으니, 만약 다시 모두 벌목하면, 농상農桑을 방해할 것이다. 무창의 목재와 기와를 옮겨도, 당연히 쓸만할 것이다.”


여름 5월, 승상 보즐이 세상을 떠났다.


겨울 10월, 사형수들을 대사면시켰다.


11년(248년) 봄 정월, 주연이 강릉에 성벽을 쌓았다.


2월, 여러 차례 지진이 발생했다.


강표전에 실린 손권의 조서에서 이르길 : “짐이 갖춘 덕이 적고, 선조의 제사를 받듬을 그르치며, 공무를 처리함이 밝지 못해서, 천지의 신으로부터 책망을 받아, 밤낮으로 오직 삼감이, 오래되지 않았다. 관리들은 각자 정신을 진작시켜, 짐의 과실을 생각하며, 꺼리는 바가 있지 않도록 하라.”


3월, 건업궁이 완성됐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고, 운양에서 황룡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5월, 파양에서 백호가 나타났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었다.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고대의 성왕은 선행을 쌓고, 몸을 닦아 도를 행하여 천하를 손에 넣었다. 그래서 길상의 징조가 내려 인사와 상응하였으니, 이것은 성왕의 덕행을 나타내는 것이다. 짐은 현명하지 못한데 어떻게 이 경지에 이르렀는가? <상서>에서 말하기를 "비록 다른 사람에게 칭송되더라도 미덕이 있다고 자만하지 말라." 고 했다. 공경 대신들은 힘껏 노력하여 맡은 일을 다 하고 짐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아 주길 바란다.」


서응도(瑞應圖)에 이르길: 백호는 인자(仁者)이다. 왕자는 포학하지 않으므로 인자한 호랑이도 해가되지 않는 것이다.


12년(249년) 봄 3월, 좌대사마 주연이 죽었다.


4월, 까마귀 두 마리가 까치를 물어 동관에 떨어뜨렸다.


9월, 표기장군 주거(朱據)가 승상을 대리하고, 까치를 태워 제사를 지냈다.


오록(吳錄)에 이르길: 6월 무술(戊戌)일, 임평호(臨平湖)에서 보정(寶鼎)이 나왔다.8월 계축(癸丑)일,백구(白鳩; 하얀비둘기)가 장안(章安)에서 관측됐다.


13년(250년) 여름 5월, 하짓날에 화성이 남두 별자리로 들어갔다.


가을 7월, 화성이 또 북두성 두 번째 별을 지나 동쪽으로 운행했다.


8월, 단양, 구룡 및 고장, 영국 지역의 여러 산이 붕괴되었고 홍수가 발생하여 범람했다. 조서를 내려 조세를 면제시키고, 종자와 식량을 빌려 주었다. 태자 손화를 폐위시켜 고장에 구류시켰다. 노왕 손패에게는 자살을 명했다.


겨울 10월, 위나라 장수 문흠이 거짓으로 모반하여 주이를 유인했다. 손권은 여거를 파견하여 주이가 있는 곳으로 가서 문흠을 영접토록 했다. 주이 등이 신중하게 행동함으로써 문흠은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11월, 아들 손량을 태자로 세웠다. 군사 10만 명을 보내 당읍현에 도당을 만들어 북쪽 통로를 막았다.


12월, 위나라 대장군 왕창이 남군을 포위하고, 형주자사 왕기가 서릉을 공격했으므로, 손권은 장군 대열, 육개를 파견하여 가서 막도록 했다. 왕창과 왕기는 모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庾闡揚都賦注曰:烽火以炬置孤山頭,皆緣江相望,或百里,或五十、三十里,寇至則舉以相告,一夕可行萬里。孫權時合暮舉火於西陵,鼓三竟,達吳郡南沙。    


유천의 양도부 주에 이르길 : 봉화는 횃불을 고산의 봉우리에 둬서 모두 강을 연해 서로 바라보게 해서 혹 100리 혹 50리 혹 30리인데 적이 이르면 곧 들어서 서로에게 알려주는데 하룻밤에 만 리를 갈 수 있다. 손권의 시기에 저녁이 되어 불을 서릉에서 들어 올리면 자정쯤에 이르러 오군의 남사에 도달한다.


이 해, 신인이 편지를 주어 연호를 바꾸고 황후를 세우라고 말했다.


태원(太元) 원년(251년) 여름 5월, 황후 반씨를 세웠으며,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바꾸었다.


당초, 임해군 나양(羅陽)현에는 신이 있었는데, 자칭 왕표(王表)라고 했다.


오록(吳錄)에서 이르길: 나양(羅陽)현은 지금의 안고(安固)현이다.


그 신은 민간에서 활동하여 언어와 음식이 일반 사람들과 차이가 없었지만, 그의 형체를 나타내지는 않았다. 또 그에게는 시녀 한 명이 있었는데, 이름이 방적(紡績)이었다. 이 달, 중서랑 이숭(李崇)을 파견하여 보국장군 나양왕의 인수를 받들어 왕표를 영접하도록 했다. 왕표는 이숭을 따라 함께 나왔다. 왕표는 이숭 및 지나게 된 군수나 현령과 담론하였는데, 이숭 등은 그의 의견을 반박하지 못했다. 산천을 지나면서 시녀로 신들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이숭은 왕표와 도착했다. 손권은 왕표를 위해 창룡문 밖에 진을 만들어 놓고, 측근의 사신을 보내 술과 음식을 여러 차례 갖고 가도록 했다. 왕표는 수재와 한재와 같은 작은 일에 관해 예언했는데, 증험이 있었다.


손성이 이르길 : 나 손성이 듣기론 국가가 장차 흥하려면, 백성에게서 듣고, 국가가 장차 망하려면, 귀신에게서 듣는다고 한다. 손권이 연로해져 뜻이 쇠해지고는, 참소를 잘하는 신하를 곁에 두고,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웠으며, 첩을 처로 삼았으니, 덕이 적고 인의가 모자람이 많다고 이를 수 있도다. 그런데도 하늘이 내리는 상서로운 징조를 거짓으로 세우며, 요사스러운 것에서 복을 구했으니, 장차 망하려는 조짐이, 또한 뚜렷하지 않은가!


가을 8월 초하루, 태풍이 불어 강과 바다가 범람하여 평지의 물은 깊이가 8척이나 되었고, 오군 고릉의 송백이 뽑혔으며, 군의 남쪽 성문이 날려 떨어졌다.


겨울 11월, 대사면을 실시했다. 손권은 남쪽 교외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와 질병으로 누워 있었다.


오록에서 이르길:손권이 얻은 병은 풍질(風疾)이라 한다.


12월, 역마로 대장군 제갈각을 불러 태자태부로 제수했다. 조서를 내려 부역을 줄이고 부세를 감소시켜 백성들의 고통과 근심을 제거해 주었다.


2년(252년) 봄 정월, 이전 태자 손화를 남양왕으로 임명하여 장사에 머물도록 했다. 아들 손분을 제왕으로 삼아 무창에 거주하도록 했다. 아들 손휴를 낭양왕으로 임명하여 호림에 거주하도록 했다.


2월, 대사면을 실시했으며, 연호를 신봉으로 고쳤다. 황후 반씨가 세상을 떠났다. 여러 장수와 관리들이 자주 왕표를 찾아가 복을 구하자, 왕표는 달아났다.


여름 4월, 손권이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71세였고 시호를 대황제라고 했다.


가을 7월, 장릉에 안장했다. [주]


[주] 부자(傅子): 손책은 명과독단(明果獨斷: 날카롭게 분석하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용개천하(勇蓋天下: 용맹이 천하를 뒤덮을 정도)였고, 아버지 손견이 죽은 뒤에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장군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고, 천리에 걸쳐 싸우니, 결국에 강남(江南)의 땅을 차지하여, 그곳의 명문 호걸들을 죽이고, 인접국에 위세를 드높였다. 나중에 손권이 손책의 기업(其業)을 이어받아, 장자포(張子布)가 있어 복심으로 여기고, 육의(陸議=육손), 제갈근(諸葛瑾), 보즐(步騭)이 있어 고굉(股肱)으로 여기고, 여범(呂範), 주연(朱然)이 있어 조아(爪牙)로 여기고, 임무를 나누고 직책을 받아 사이를 타며 틈을 노리고 군대를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기에, 싸워서 적게 졌고 강남이 편안했다.


평하여 말한다. 


손권은 몸을 굽혀 치욕을 참으면서 재능 있는 자를 임용하고 지혜로운 자를 존중했고, 구천(句踐)과 같은 비범한 재능이 있었으니, 영웅 중에서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혼자 강남의 땅을 차지하여 삼국정립의 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의심이 많고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었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했다. 그는 참언을 듣고 믿어 인성을 멸하는 일을 하여 아들과 손자를 버리고 죽었다.[주1] 어찌 자손들에게 평안한 책략을 남기고, 신중하게 자손의 안전을 계획한 자라고 말하겠는가? 그 후대가 쇠미하여 결국은 국가를 멸망시키게 되었는데, 틀림없이 이러한 원인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주2]


[주1] 마융馬融이 상서尚書 에 주를 달길 : 진殄 은, 끊다다. 군자의 거동을 끊어지게 하는 것이다. 

 


[주2]// 신 송지가 보건데, 손권이 죄 없는 자식을 (세자에서) 폐하여 그것이 비록 어지러움의 징조가 되고 나라가 기울어 졌다 해도 (오나라의 멸망은) 처음부터 포악한 손호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손권이 손화를 폐하지 않았다면, 손호가 적자가 되어 황제 자리를 이었을 것이니 결국은 망했을 것이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는 즉 나라의 멸망은 어두움과 잔인함에서 비롯된 것이지, 누구를 폐출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손량이 임금 자리를 보존하고 손휴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손호가 제위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손호가 오르지 않았다면, 즉 오나라도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류 :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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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30
09:25:08 (*.52.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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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6.28
12:49:56
(*.104.28.55)
정천전을 분리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7.08
16:47:13
(*.52.89.87)
주석 수정중인데 너무 이상하게 되어 가는 것이 많습니다-_- 일부분만 번역되어 있다던지;;;

코렐솔라

2013.07.08
22:40:07
(*.52.89.87)
오주전 모든 주석 등록 완료

손호 때문에 어차피 망했을 거라는 평은 mlbpark의 phenom님의 번역으로 정확한 번역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코렐솔라

2013.07.10
11:16:00
(*.52.89.87)
삼국지 갤러리 년사님의 도움으로 부자 번역 완료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311696&page=1&bbs=

코렐솔라

2013.07.10
11:16:24
(*.52.89.87)
삼국지갤러리 관운장천리행님의 도움으로 위략 별점 번역완료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311706&page=1&bbs=

코렐솔라

2013.07.10
18:20:11
(*.104.141.18)
년사님의 도움으로 조자의 번역도 완료!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311669

코렐솔라

2013.07.10
23:33:14
(*.52.89.88)
오록의 조비의 손권 찬양은 삼국지갤러리 피셔킹님의 제보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311719&page=1&bbs=

코렐솔라

2013.07.11
22:51:24
(*.52.89.88)
손성의 백이 숙제 중연은 삼국지 갤러리 년사님의 번역입니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311745&page=1&bbs=

코렐솔라

2013.07.11
22:56:56
(*.52.89.88)
심형 미번역 부분 년사님이 채워주셨습니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311748&page=1&bbs=

코렐솔라

2013.07.12
00:50:37
(*.52.89.88)
혜시의 인용도 년사님이 채워주셨습니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311751&page=1&bbs=

코렐솔라

2013.07.13
01:23:08
(*.52.89.88)
촉랑캐가 들어간 오록의 번역은 년사님이 도와주셨습니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311781&page=1&bbs=

코렐솔라

2013.07.13
01:28:42
(*.52.89.88)
심형의 나머지 번역 년사님이 해주셨습니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311782&page=1&bbs=

코렐솔라

2013.07.13
01:37:05
(*.52.89.88)
오록에서 조비의 탄식도 년사님의 번역입니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311783&page=1&bbs=

코렐솔라

2013.07.14
12:28:01
(*.52.89.88)
위략 삼공의 손권 토벌서 년사님의 번역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311862&page=1&bbs=

코렐솔라

2013.07.19
22:27:57
(*.52.89.88)
맨 위에 강표전은 처사군님의 번역입니다.

장기튀김

2013.08.01
11:49:17
(*.36.36.195)
吳錄曰:郡治富春也。
오록에서 이르길 : 군의 치소는 부춘이다.

입니다.

코렐솔라

2013.08.01
11:50:19
(*.0.203.41)
감사합니다. 반영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8.17
10:08:04
(*.52.91.73)
앞에는 섭현이라 잘 써져있는 놈이 뒤에는 흡현이라고 되어있길래 수정

코렐솔라

2013.09.04
10:43:35
(*.166.245.166)
정주장군 손이 -> 정주(鄭冑), 장군 손이로 수정합니다. 밑에 주석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얼핏보면 손이의 직함이 정주장군인 줄 알듯

코렐솔라

2013.09.09
01:14:57
(*.52.91.247)
공손연 쥐새끼 관련 주석에서 퇴각하니-> 앞뒤로 휘둘리니 로 수정합니다.

코렐솔라

2013.09.09
01:51:33
(*.52.91.247)
본국의 황제를 도와 보필하고-> 본국을 도와 보필하고로 수정합니다. 원문이 翼戴本國라는군요

코렐솔라

2013.09.09
19:01:57
(*.166.245.166)
공손연 파병을 디스하는 배송지와 http://blog.naver.com/kyspert/110175734850 왕표와 관련된 손성의 디스는 http://blog.naver.com/kyspert/110175734878 여기로 둘 다 처사군님의 번역입니다.

코렐솔라

2013.09.10
13:20:32
(*.0.203.44)
종과 위나라 장수 왕릉->전종과 위나라 장수 왕릉

코렐솔라

2013.11.04
18:28:07
(*.166.245.132)
폐공->패공으로 고칩니다.

코렐솔라

2013.12.03
23:13:44
(*.166.245.165)
강표전에 실린 목재를 옮겨쓰라는 손권의 조서는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0800251

코렐솔라

2014.01.06
11:14:03
(*.52.91.73)
연좌제를 금한 것의 처사군님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2780910

코렐솔라

2014.01.13
16:56:44
(*.166.245.152)
공손연 쥐새끼는 처사군님 번역으로 바꿉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3263084

강표전 사굉의 화폐 얘기는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213861

248 2월~3월 사이에 있는 강표전 손권 조서의 마음껏 말해라도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290855

순백 여우 순백 갖옷도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283798

한가가 쇠미해로 시작되는 강표전의 손권이 왕이 된 이유는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309277

손권의 강표전 정월 조서도 처사군님 번역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327665

배송지의 증자문 얘기도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327530

지림의 납향 얘기도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327621

유천 양도부, 서응도도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220058735102

venne

2014.05.21
20:21:05
(*.186.21.9)
주랑장 손포 -> 중랑장 손포

오타 수정요청합니다.

venne

2014.05.22
11:31:05
(*.203.36.95)
담당 관리들은 또 황호를 세우고 자식들을 왕으로 삼을 것을 상주했다.

황호 -> 황후

오타 수정요청합니다.

코렐솔라

2016.04.12
11:15:22
(*.234.105.133)
58년 뒤면 망할 거라는 조달의 말, 등지가 다시 화친하러 온 오록, 진화의 얘기가 실린 오서, 황제가 될 때 고한 글, 제사와 관련된 강표전과 지림의 얘기, 공손연에게 1만명과 함께 보낸 조서, 서응도의 얘기, 유천의 양도부주는 모두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151524 이로써 이 문서에 있는 모든 주석은 번역이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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