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휴(孫休)는 자가 자열(子烈)이고 손권의 여섯째 아들이다. 13세 때, 중서랑(中書郎)ㆍ사자(射慈)ㆍ낭중(郎中) 성충(盛沖)에게서 학문을 전수받았다.

태원(太元) 2년 정월, 그는 낭야왕(琅邪王)으로 봉해졌으며 호림(虎林)에 거주했다.

4월, 손권이 세상을 떠나고, 손휴의 동생 손량(亮)이 제위를 계승하고, 제갈각(諸葛恪)이 정권을 장악했다. 여러 왕들이 장강가의 군사 요충지에 있으려 했으므로 손휴도 단양군(丹楊郡)으로 옮겼다. 태수(太守) 이형(李衡)이 이 일로 인해 손휴를 범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손휴는 편지를 올려 그를 다른 군으로 옮기게 할 것을 갈구했다. 손량은 조서를 내려 손휴를 회계(會稽)로 옮기도록 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는 용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데, 돌아보아도 용의 꼬리가 보이지 않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매우 기이하게 여겨졌다. 손량이 폐출된 후, 27일에 손침은 종정(宗正) 손해(孫楷)에게 중서랑(中書郎) 동조(董朝)와 함께 손휴를 영접하도록 했다. 손휴는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마음속에 의혹이 있었다. 손해와 동조가 손침 등이 그를 받들어 영접하려는 본의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했기 때문에 하루 낮 이틀 밤을 머무른 후에 출발했다.

10월 17일, 행차하여 곡아(曲阿)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이 손휴에게 만나기를 원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이 오래되면 사변이 발생할 것이며, 천하 사람들은 모두 폐하에게 의지할 것입니다.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신속하게 행동하십시오.”

손휴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이날, 포새정(布塞亭)으로 나아갔다. 무위장군(武衛將軍) 손은(恩)이 승상(丞相)의 일을 대행하여 백관들을 인솔하고 숭요와 법가를 이용해 영창정(永昌亭)에서 맞이했으며, 궁궐을 짓고 군대의 휘장으로 편전을 만들었으며 오좌를 두었다. 18일, 손휴가 도착했다. 그는 멀리서 편전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멈추고 손해에게 먼저 손은을 만나보도록 했다. 손해가 돌아오자, 손휴는 수레를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신하들은 두 번 절하고 신이라고 칭했다. 손휴는 편전으로 들어가더니 사양하며 어좌에 즉위하지 않고 동쪽 회랑에 서 있었다. 호조상서(戶曹尚書)가 앞 편전의 계단 아래로 가서 예절에 따를 것을 주상하고, 승상이 옥새와 부명을 바쳤다. 손휴는 세 번 사양했고, 신하들을 세 번 청했다. 손휴는 이렇게 말했다.

“장군ㆍ승상ㆍ제휴들이 모두 과인을 추천하였는데, 과인이 감히 옥새와 부명을 이어 받지 않겠소?”

신하들은 지위에 따라 순서대로 행렬의 앞에 섰고, 손휴는 수레를 타고, 백관들이 그 곁에서 나아갔다. 손침은 병서 1천명을 이끌고 수도의 교외에까지 나가 손휴를 영접하고, 길가에서 배례했다. 손휴는 수레에서 내려 답례했다. 이날 중에 정전으로 들어가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고쳤다. 이 해는 위나라의 감로(甘露) 3년에 해당한다.

- 덕이 있는 자를 기리고 공이 있는 자를 상주는 것은 과거나 현재의 보편적인 이치이다. 때문에 대장군(大將軍) 손침(綝)을 승상(丞相)ㆍ형주목(荊州牧)으로 임명하고 식읍 다섯 현을 증가한다. 무위장군(武衛將軍) 손은(恩)은 어사대부(御史大夫)ㆍ위장군(衛將軍)ㆍ중군독(中軍督)으로 임명하고 현후(縣侯)로 봉한다. 위원장군(威遠將軍) 손거(據)는 우장군(右將軍)ㆍ현후(縣侯)로 삼는다. 편장군(偏將軍) 손간(幹)은 잡호장군(雜號將軍)ㆍ정후(亭侯)로 임명한다. 장수교위(長水校尉) 장포(張布)는 군왕을 도와 열심히 수고했으므로 장포를 보의장군(輔義將軍)으로 임명하고 영강후(永康侯)로 봉한다. 동조(董朝)는 직접 영접하였으므로 향후(鄉侯)로 봉한다.

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단양태수(丹陽太守) 이형(李衡)은 지난 일의 죄로 자진하여 담당관리에게 구속되었었다. 이것은 관중이 제환공의 띠쇠를 명중시키고, 모시는 사람이 중이의 옷을 벤 것과 같은 것으로 군주에게 있으면서 그 군주를 위하는 것이다. 이형을 단양군으로 돌려보내 의심을 낳지 않도록 하라.


양양기(襄陽記)에 이르길:[[이형전]]으로 분리

28일, 손호(孫皓)를 오정후(烏程侯)로 봉하고, 손호의 동생 손덕(德)은 전당후(錢唐侯)로, 손겸(謙)은 영안후(永安侯)로 봉했다.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르길 : 신하들이 황후, 태자를 세우길 상주하니, 조서를 내리길 : “짐이 갖춘 덕이 적은데, 나라를 세우는 큰 사업을 받들어 이으며, 공무를 처리한 날이 부족하고, 은혜와 덕택도 퍼지지 못했으니, 후비의 호, 사자嗣子의 지위를 더함은, 급한 바가 아니다.” 유사가 다시 거듭 청했으나, 손휴는 겸허하게 굴며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3일, 바람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짙은 안개가 연일 계속되었다. 손침 일가에서 나온 다섯 명의 제후는 각각 근위병을 지휘하였고, 권력이 군주를 기울게 할 정도였다. 그들이 진술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공손히 하며 어기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방자함은 더해만 갔다. 손휴는 그들이 변고를 일으킬까 걱정하여 수차례 상을 주었다. 5일, 손휴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대장군(손침)의 충성심은 마음속에서 나와 먼저 원대한 계획을 세워 사직을 안정시켰으며, 조정 안팎의 대신들이 모두 그의 건의를 칭찬하고 있으며, 백관들이 마음을 같이 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을 넘는 것은 아니었다. 전날, 대장군과 더불어 상의하고 계획에 참여하여 짐의 즉위에 온힘을 다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조사하여 관례에 따라 응당 작위를 더해 주어야 하는 자에게는 빨리 시행하도록 하라.

7일, 또 조서를 내렸다.

- 대장군은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모든일을 관장하므로 그 직책은 번잡하다. 위장군(衛將軍)ㆍ어사대부(御史大夫) 손은(恩)을 시중(侍中)으로 임명하여 대장군과 함께 모든 일을 분담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21일,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모든 하급 관리들의 집에는 다섯 명 아니면 세 명까지 동시에 관리가 되어, 아버지와 형이 수도에 있고, 자식과 동생은 군이나 현의 관리로 있다. 이러한 집에서 부세를 내거나 군대가 출정할 때 참가하게 되면 집안일을 돌볼 사람이 없게 된다. 짐은 이 점을 매우 동정한다. 다섯 사람 아니면 세 사람까지 공사를 담당하고 있을 때, 그 아버지나 형이 남기를 희망한다면, 한 사람은 남도록 하고 부세를 면제시켜 주며 군대가 출정할 때도 참가하지 말도록 하라.

또 이렇게 말했다.

- 관리나 장수들 중에서 영창정에서 맞이하여 모신 자에게는 모두 직위를 한 등급씩 올려주도록 하라.

오래지 않아, 손휴는 손침이 역모했다는 보고를 듣고 은밀히 장포와 일을 도모했다. 12월 8일 납일(조상이나 신들에게 제사지내는 날) 조서를 내려 손침을 체포도록 했으며, 그날 중에 사형에 처했다. 9일, 좌장군(左將軍) 장포(張布)에게 간신을 토벌하도록 명령하고, 장포에게 중군독(中軍督)의 관직을 더했으며, 장포의 동생 장돈(惇)을 도정후(都亭侯)로 임명하고 병사 3백 명을 주었으며, 장돈의 동생 장순(恂)을 교위(校尉)로 임명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고대에는 나라를 세우고 나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인도하고 성정을 도야하며, 시대를 위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건흥 이래로부터 그 당시의 일에 변고가 많았기에 관리와 백성들은 자못 눈앞의 이익을 목표로 하여 근본을 버리고 끝으로 달려가 고대의 도의를 따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숭상하는 것이 돈후하지 못하면, 교화를 손상시키고 풍속을 파괴한다. 고대의 제도에 따라 학교를 세우고 오경박사를 두며 시험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여 그들에게 총애와 봉록을 더하라. 현임 관리와 장차 관리가 되는 자제 중에서 학문을 좋아하고 뜻있는 자를 선택하여 각각 수업을 받도록 하라. 1년간 학습한 후, 시험을 보아 그들의 등급을 매겨 작위와 상을 주도록 하라. 그들에 관한 것을 보는 자로 하여금 그들의 영예를 좋아하게 하고, 그들에 관한 것을 들은 자로 하여금 그들의 명예를 흠모하도록 하라. 이로써 군왕의 교화를 넓히고 풍속을 융성하게 하도록 하라.

2년(259) 봄 정월, 지진과 번개가 있었다. 3월, 구경의 관제를 갖추었다.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짐은 부덕하면서 왕공의 위에 있기 때문에 밤낮으로 전전긍긍하며 잠자는 일과 먹는 것을 잊고 있다. 지금은 전쟁을 그만두고 문덕을 함양함으로써 위대한 교화를 확충시키려고 한다. 이 방법을 밀고 나가면, 반드시 사인과 백성들이 풍족해질 것이며, 농업과 양잠이 발전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관자(管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창고가 충실하면, 예절을 안다. 입을 것과 먹을 것이 풍족하면 영예를 안다.’ 한 남자가 밭을 갈지 않으면 굶주리게 되는 자가 있으며, 한 아낙네가 길쌈을 하지 않으면 추위에 떠는 자가 있게 된다. 굶주림과 추위가 함께 이르렀는데도 백성들이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는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근년 이래로 주나 군의 관리와 백성들 및 여러 진영의 병사들은 대부분 이 과업을 어기고 모두 배를 타고 장강으로 들어가 상류와 하류 사이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좋은 밭이 점점 황폐화되고, 창고에 보존한 곡식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천하태평을 구하려고 한들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거둬들이는 조세는 지나치게 무겁고, 농부의 이익은 적은데, 이와 같이 하겠는가! 지금 나는 농업을 광범위하게 개척하고 농민들의 부세를 줄이고, 밭의 좋고 나쁨을 구별하여 경작지에서 과세하고, 관대하고 공평하게 하도록 힘쓰려고 한다. 관청도 나도 각기 얻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 집집마다 수입이 충분하여 식구들에게 공급하기에 넉넉하다면, 몸을 아끼고 생명을 중시하여 법령을 어기지 않을 것이며, 이와 같이 된 이후에는 형벌을 사용하지 않게 되고, 풍속을 바르게 될 수 있다. 신하들의 충성심과 인자함에 의지하면서, 만일 당시의 정치에 마음을 다한다면, 설령 태고의 성대한 교화가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한 문제 시기의 태평스러움에는 역시 미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태평스러운 경지에 이르면 신하와 군주는 함께 영화로울 것이고, 이르지 못한다면 국력은 쇠약해지고 국가는 침범과 치욕을 받게 될 텐데, 어떻게 세상이 조용하고 여유로울 수 있겠는가? 여러 공경과 상서들은 함께 자문하고 계획하여 가장 적합한 방안을 선택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농사짓고 양잠하는 계절이 벌써 왔으니, 때를 뒤로 할 수는 없다. 일을 결정하여 시행하는 것, 이것이 짐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다.

3년(260) 봄 3월, 서릉(西陵)에서 붉은 새가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가을에 도위(都尉) 엄밀(嚴密)의 건의를 받아들여 포리당(浦里塘)을 만들었다. 회계군(會稽郡)에서 회계왕(會稽王) 손량(亮)이 수도로 돌아가 천자가 되어야 한다는 뜬소문이 있었다. 손량의 궁인이 손량에게 무당을 보내 기도하도록 했는데, 기도하는 말 속에 사악한 언사가 들어 있다 하여 고발했다. 담당관리는 이 보고를 손휴에게 알렸다. 손량은 후관후(候官侯)로 폐출되었으며, 다른 봉국으로 보내지게 됐다. 가는 도중에 손량은 자살했고, 호송을 담당했던 관리는 처형되었다. 


오록吳錄에서 이르길 : 어떤 이가 이르길 손휴孫休가 그를 짐독으로 죽였다. 진晉 태강太康 중에 이르러서, 오吳의 옛 소부少府 단양丹楊의 대옹戴顒이 손량孫亮의 시신을 영접해, 뇌향賴鄉에 이를 매장했다.


회계 남쪽을 건안군(建安郡)으로 만들고, 도를 나누어 건평군(建平郡)을 두었다.


오력吳歷에서 이르길 : 이 해에 건덕현建德縣에서 대정大鼎을 얻었다.

4년(261) 여름 5월, 폭우가 쏟아져 시내와 샘물이 불어났다. 가을 8월, 광록대부(光祿大夫) 주혁(周奕)ㆍ석위(石偉)를 파견하여 나라를 순시하며 풍속을 살피게 하고, 장수와 관리들의 청렴함과 혼탁함, 백성들의 질곡을 살피도록 하는 조서를 내렸다.


초국선현전楚國先賢傳에서 이르길 : 석위石偉의 자는 공조公操로, 남군南郡 사람이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해, 절조를 닦으며 태만하지 않았고, 고결하게 남의 힘을 입지 않고 홀로 서며, 빼앗을 수 없는 뜻을 가졌다. 무재茂才, 현량방정 賢良方正 으로 천거되나, 모두 나서지 않았다.


손휴가 즉위하고, 특별히 석위를 징소해, 점점 승진해 광록훈光祿勳에 이르렀다.


손호가 즉위하고, 조정의 정사가 어지러워져, 석위는 이에 연로해 지병이 생겼다고 하소연하고 걸신乞身해, 이에 광록대부 光祿大夫 에 임명됐다. 오가 평정되고, 건위장군建威將軍 왕융王戎이 친히 석위를 방문했다.


태강太康 2년, 조서에서 이르길 : “오의 옛 광록대부 석위는, 지조를 가지며 청렴하고 결백해, 백발이 되도 변하지 않았으며, 어지럽고 위태로운 곳에서 처지가 어려웠는데도, 깨끗한 절조는 기록할 만하다. 나이가 이미 매우 늙어서, 먼 길을 가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넘은 견디지 못하므로, 석위를 의랑議郎으로 삼아, 이천석二千石의 관질을 더해주니, 끝까지 일생을 다하며 누리도록 하라.” 석위는 마침내 미친데다 눈이 멀었다고 가장하며, 진晉의 관작을 받지 않았다. 향년 83세, 태희太熈 원년에 죽었다.


9월, 포산에서 백룡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해, 안오(安吳)의 백성 진초가 죽어 땅 속에 매장되었는데, 6일 후에 다시 소생하여 땅속에서 뚫고 나왔다.

5년(262) 봄 2월, 백호문(白虎門)의 북쪽 누각이 불에 탔다. 가을 7월, 시신에서 황룡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8월 13일, 폭우와 천둥이 치고 시내와 샘이 불어났다. 16일, 황후(皇后) 주씨(朱氏)를 세웠다. 19일, 아들 손만(孫{雨單}댓글 링크 참고)을 태자(太子)로 세우고, 대사면을 시행했다.


吳錄載休詔曰:「人之有名,以相紀別,長為作字,憚其名耳。禮,名子欲令難犯 易避,五十稱伯仲,古或一字。今人競作好名好字,又令相配,所行不副,此瞽字伯明者也,孤嘗哂之。或師友父兄所作,或自己為;師友尚可,父兄猶非,自為最 不謙。孤今為四男作名字:太子名{雨單},{雨單}音如湖水灣澳之灣,字莔,莔音如迄今之迄;次子名{雷大},{雷大}音如兕觥之觥,字{西升},{西 升}音如玄礥首之礥;次子名壾,壾音如草莽之莽,字昷,昷音如舉物之舉;次子名{亠〈先夂〉},{亠〈先夂〉}音如褒衣下寬大之褒,字{〈禾午〉火}, {〈禾午〉火}音如有所擁持之擁。此都不與世所用者同,故鈔舊文會合作之。夫書八體損益,因事而生,今造此名字,既不相配,又字但一,庶易棄避,其普告天 下,使咸聞知。」  臣松之以為傳稱「名以制義,義以出禮,禮以體政,政以正民。是以政成而民聽,易則生亂」。斯言之作,豈虛也哉!休欲令難犯,何患無名,而 乃造無況之字,制不典之音,違明誥於前脩,垂嗤騃於後代,不亦異乎!是以墳土未乾而妻子夷滅。師服之言,於是乎徵矣。    


오록에 손휴의 조서를 기재하여 이르길 「사람에게 이름이 있는 것은 이로써 서로 질서를 세우고 분별하고자 함이니 커서 자(字)를 짓는 것은 그 이름대로 (부르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예법에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은 범하기 어렵고 피휘하기 쉽게 하고자 하는 것인데 오십에 백중이라 칭하니 옛날에는 자가 혹 하나였다. 지금의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좋은 이름과 자를 짓고 또 서로 짝을 맞추나 그 행동은 알맞지 않으니 이는 눈 먼 사람이 자를 백명(伯明)으로 짓는 격으로 내가 일찍이 비웃는 바이다. 혹 사우,부형이 짓는 경우도 있고 혹 자기가 짓는 경우도 있는데 사우는 가하지만 부형이 짓는 것도 잘못됐는데 자기가 짓는 것은 최고 겸손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지금 네 아들의 이름과 자를 짓는다. 큰 아들의 이름은 1.jpg, 음은 호수만오(湖水灣澳)할 때의 만이다. 자는 흘1-2.jpg, 음은 흘금(迄今)할 때의 흘이다. 다음 아들의 이름은 굉2.jpg, 음은 시굉(兕觥) 할 때의 굉이다. 자는 현2-1.jpg, 음은 현현수(玄礥首)할 때의 현이다. 다음 아들의 이름은 망3.jpg, 음은 초망(草莽)할 때의 망이다. 자는 거3-1.jpg, 음은 거물(舉物)할 때의 거이다. 다음 아들의 이름은 포4.jpg, 음은 포의하관대(褒衣下寬大)할 때의 포이다. 자는 옹4-2.jpg이다. 이들은 모두 세상에서 쓰는 것과 다른 것으로 일부러 옛 문헌을 베껴서 모아 만든 것이다. 무릇 8체의 손익을 쓰고 사건으로 인해 생긴 것이니 지금 이 이름과 자를 만들어 이미 서로 배합하지도 않고 또한 글자가 하나 밖에 없어 쉽게 피할 수 있으므로 천하에 널리 알려 모두 들어 알도록 하라.」    


신 송지가 생각건대 전(춘추좌씨전)에 이르길 「이름을 짓는 것은 도의를 나타내는 것이고 도의는 예법을 만들어내며 예법은 정치로 체현되고 정치는 백성을 바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정치가 이루어지면 백성들이 말을 듣고 그렇지 않으면 어지러움이 생깁니다. 」이 말이 만들어진 것이 어찌 헛되겠습니까! 손휴는 범하기 어렵게 하려고 하였는데 어찌 이름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마침내 근거 없는 글자를 만들어내고 전적에 없는 소리를 제작하여 전대의 명고에 위배되고 후대에 어리석음과 비웃음을 드리우는 것입니까? 또한 기괴하지 않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분토가 마르기도 전에 처자가 주멸된 것입니다. 사복(진나라의 대부, 위에 나온 춘추좌씨전의 말을 한 사람이다.)의 말이 여기에서 효험이 있습니다.


겨울 10월, 위장군(衛將軍) 복양흥(濮陽興)을 승상(丞相)으로 임명하고, 정위(廷尉) 정밀(丁密), 광록훈(光祿勳) 맹종(孟宗)을 좌우어사대부(左右御史大夫)로 임명했다. 손휴(休)는 승상 복양흥과 좌장군 장포가 과거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정무를 그들에게 맡겼다. 장포는 궁궐의 부서를 주관했고, 복양흥은 군사나 행정에 관한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손휴는 고전 문헌에 관한 연구에 뜻을 두고 제자백가의 말을 모두 읽으려고 했다. 그는 특히 꿩 사냥을 좋아하여 봄과 여름 사이에는 항상 새벽에 나갔다가 밤에 돌아왔는데, 오직 이때만은 책을 읽지 않았다. 손휴는 박사좨주(博士祭酒) 위요, 박사(博士) 성충(盛沖)과 도덕과 육예에 관해 토론하기를 바랐다. 위요와 성충은 평소 모두 성실하고 솔직하였으므로 장포는 그들이 궁궐로 돌아와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과실을 발견해 자기로 하여금 전권을 휘두를 수 없게 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황당한 이유를 들어 손휴의 결정을 막으려고 했다. 손휴는 장포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학문에 빠져 수많은 책을 개략적으로 읽으면서 부딪치게 된 문제가 적지 않았소. 현명한 군주와 어리석은 군주, 간신과 적, 고금의 현인과 어리석은 사람, 이러한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 나는 보지 않은적이 없었소. 지금 위요 등이 궁궐로 들어오면, 단지 그들과 책에 관해서만 논의할 뿐이지, 위요 등을 따라 처음부터 다시 학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오. 설령 다시 학습을 한들 또한 손해되는 것이 무엇이겠소? 그대는 위요 등이 신하들의 간사함과 변란을 일으키는 일에 관해 말하게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이로써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오.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스스로 방비했으니, 위요 등을 통한 이후에 비로소 알게 되는 일은 없게 되었소. 이 일은 어떠한 해로움도 없소. 그대는 마음속에 특별히 기피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장포는 조서를 받은 후 깊이 사과하고, 다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였으며, 또 정사를 방해하게 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손휴는 이렇게 대답했다.

“서적에 대한 일을 걱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을 좋아하면 해로울 것이 없소. 이는 나쁜 일을 할 요소가 없는데, 오히려 그대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이 때문에 나는 몇몇 견해를 말하겠소. 정무와 학업이라는 것은 각기 다른 흐름이 있으면서 서로 방해하지 않소. 그대가 오늘 정사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나의 견해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못되오.”

장포는 표를 바치고 고개를 조아리며 죄를 시인했다. 손휴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잠시 그대로 하여금 깨우치게 하려고 했을 뿐인데, 어찌하여 고개를 조아리는 데까지 이르시오! 그대의 이와 같은 충성은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알고 있소. 과거에 서로 깨우친 까닭은 오늘 웅대한 사업을 위해서였소. 시경에서 말하기를, ‘누구든지 시작은 좋지만 좋은 결말은 드물다’ 고 했소. 좋은 시작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란 진실로 어려운 일이오. 그대는 끝까지 지키도록 하시오.”

당초, 손휴가 낭야왕(王)으로 있을 때, 장포는 좌우장독(左右將督)으로 있으면서 항상 손휴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손휴가 제위에 오르게 되자, 총애와 대우는 더욱더 두터워졌으며 국가의 권력을 독점하도록 하여, 무례한 행동을 많이 했다. 스스로 자신의 단점을 꺼리고 있었으므로 위요와 성충이 이 일을 말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에 그들이 궁궐로 들어오는 일을 특히 근심하며 꺼려했던 것이다. 손휴는 비록 그의 마음을 이해는 했지만, 마음이 좋을 수 없었고, 오히려 그의 의심이 걱정되었으므로 결국 장포의 의견과 같이 하여 학문 연구 계획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다시는 성충 등을 궁궐로 들어오도록 하지 않았다. 이 해, 전쟁을 살피는 자를 사자로 하여 교지로 파견해 공작과 큰 돼지를 조달하도록 했다.


신 배송지가 상고하건대 : 찰전察戰은 오의 관호로, 지금 양도揚都에는 찰전항察戰巷이 있습니다.


6년(263) 여름 4월, 천릉(泉陵)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5월, 교지군(交阯郡)의 관리(吏) 여흥(呂興)등이 모반하여 태수(太守) 손서(孫諝)를 살해했다. 손서는 이 이전에 군에서 우수한 수공예인 1천여 명을 건업(建業)으로 보냈는데, 전쟁을 살피는 관리가 도착하였으므로 다시 이들이 징용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여흥 등은 이 때문에 병사와 백성들을 선동하고 이민족들을 유인하여 불러들였던 것이다.

겨울 10월, 촉나라에서 위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알렸다.

20일, 건업의 석두소성(石頭小城)에 불이 나서 서남쪽으로 180장(丈)을 불태웠다. 22일, 대장군(大將軍) 정봉(丁奉)에게 여러 군대를 인솔하여 위(魏)의 수춘(壽春)으로 향하도록 하고, 장군 유평(留平)에게는 남군(南郡)의 시적(施績)을 찾아가 군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상의하도록 하였으며, 장군(將軍) 정봉(丁封)과 손이(孫異)에게는 면중(沔中)으로 가도록 했다. 이것은 모두 촉나라를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촉나라 군주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에 병사를 철수시켰다. 여흥은 손서를 죽이고 사자를 위나라로 파견하여 태수와 병사를 요청했다. 승상 복양흥이 둔전하는 농민 1만 명을 뽑아 병사로 만들 것을 건의했다. 무릉을 분할하여 천문군(天門郡)을 만들었다.


오력에서 이르길 : 이 해에 청룡青龍이 장사長沙에서 보였고, 백연白燕이 자호慈胡에 보였고, 적작赤雀이 예장豫章에서 보였다.

7년(264) 봄 정월에 대사면을 실시했다.

2월, 진군장군(鎮軍將軍) 육항(陸抗), 무군장군(撫軍將軍) 보협(步協), 정서장군(征西將軍) 유평(留平), 건평태수(建平太守) 성만(盛曼)이 병사들을 인솔하여 촉의 파동(巴東) 수비대장인 나헌(羅憲)을 포위했다.

여름 4월, 위나라의 장수 신부독(新附督) 왕치(王稚)가 바다를 건너 구장으로 들어가 그곳의 장관을 체포하고 재산과 남녀 2백여 명을 약탈했다. 장군 손월(孫越)이 이를 맞아 공격하여 배 한척을 나포하고 30명을 포로로 잡았다.

가을 7월, 해적이 해염(海鹽)을 격파 시키고 사염교위(司鹽校尉) 낙수(駱秀)를 살해했다. 중서랑(中書郎) 유천(劉川)으로 하여금 여릉(廬陵)으로 출병하도록 했다. 예장(豫章)의 백성 장절(張節) 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병력이 1만여 명이나 됐다. 위나라에서는 장군 호열(胡烈)에게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인솔하여 서릉(西陵)으로 침입해 나헌을 구조하도록 했다. 육항 등은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또 교주를 분할하여 광주(廣州)를 설치했다.

24일, 대사면을 실시했다. 25일, 손휴가 세상을 떠났다.


강표전에서 이르길 : 손휴는 앓아 누워, 입으로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이에 손수 글을 써서 승상丞相 복양흥濮陽興을 불러들이고는, 자식 손만에게 나와 그에게 절하게 했다. 손휴가 복양흥의 팔을 잡고, 손만을 가리키며 그를 부탁했다.


당시 30세였고, 시호를 경황제(景皇帝)라고 했다.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 이르길: 오경제 시기에 변방을 지키던 장수가 광릉의 모든 무덤을 파내어, 널판지를 취하여 성을 정비하였고, 파손된 곳이 매우 많았다. 큰 무덤이 복발復發하여, 안에는 중각(重閣)이 있어, 문짝(戶扇)이 모두 지도리가 회전하여 열고 닫을 수 있으며, 사방 둘레가 길로 되어 수레가 통과할 수 있으며, 그 높이는 가히 말을 타고 갈수 있음이다. 또 주동(鑄銅)으로 만든 사람은 수십매枚이니, 그 크기는 오척이고, 모두 큰관을 쓰고 붉은 옷을 입었으며, 검을 잡고 영위靈位를 모신 자리를 시중들어 늘어서 있으니, 모든 동인 배후 석벽에 새겨져 있기를 대궐안殿中의 장군將軍, 혹은 시랑侍郎, 상시 常侍 라 하였다. 공주公主의 무덤 같았다. 그 관을 깨트리니, 관 안에 사람이 있고, 머리카락이 이미 반백班白으로 의복과 관이 곱고 밝으니, 용모가 살아있는 사람과 같았다. 관 안 운모雲母가 1尺즈음 두터우며 백옥벽(白玉璧 하얀 옥벽) 삼십매枚가 시신에 깔려있다. 병사들의 무리가 함께 죽은 사람에서 나와 마주드니, 무덤 벽에 의지하였다. 옥이 하나 있어 길이는 1척 여로 형태는 '동과冬瓜'와 비슷했는데 죽은 사람의 품에서 미끌어져나와 땅에 떨어졌다. 양 귀 및 코의 빈 속은 모두 황금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대추 정도의 크기였다. 이는 즉 해골이 보물[옥, 황금]의 힘을 빌리면 [오랫동안] 썪지 않는다는 본보기[效].


분류 :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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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21
등록일 :
2013.04.30
09:42:34 (*.52.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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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5.07
14:22:43
(*.0.203.42)
저 만이라는 글자는 사정이 복잡합니다. http://rigvedawiki.net/r1/wiki.php/%EC%86%90%EB%A7%8C 여기를 참고

코렐솔라

2013.07.16
21:24:50
(*.52.89.88)
배주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12.04
16:28:47
(*.0.203.43)
오록에 있는 손휴가 손량을 짐독으로 죽였다는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0842777

코렐솔라

2013.12.14
13:44:28
(*.52.91.73)
손만 한자는 위에 링크 참고하세요. 쓰니까 계속 오류 때문에 내용이 다 날라가 버려서 까먹게 되는군요.

다시는 저 만짜라는 한자를 손휴전에 안 넣을 겁니다. 기술적으로 고쳐지는 것도 없고. 쳇.

장기튀김

2013.12.25
17:43:34
(*.147.123.78)
개인적으로, 이미지 형태로 만들어서 박아넣는(?) 것을 추천합니다.

http://rexhistoria.net/index.php?mid=three_supplement&page=2&document_srl=38666
조전비음 문서의 '왕도'가 이렇게 처리되었습니다. ㅎㅎ

코렐솔라

2013.12.25
17:58:16
(*.52.91.73)
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네요. html로 억지로 박아넣으니 수정할 때마다 뒷부분이 날라가는 사태가 계속 발생하니;;;

장기튀김

2013.12.25
18:00:37
(*.147.123.78)
이미 만들어 봤습니다 ㅎㅎ 자유게시판에 올려보겠습니다

코렐솔라

2013.12.25
18:35:49
(*.52.91.73)
손만을 손완으로 바꾸고 html을 그냥 그림으로 치환합니다. 코드 버전은 http://rexhistoria.net/76958 여길 참고해주세요.

260 대정, 263 청룡 모두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357067

황후와 태자는 뒤로 미루자는 손휴도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357181

말 못해서 손완 손으로 가리키는 것은 처사군님 번역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415876

석위에 관한 것도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415723

찰전 관련 배송지의 평도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415812

코렐솔라

2016.04.25
15:23:57
(*.46.174.164)
손완 다시 손만으로 바꿉니다 ㅋ 저 아들들에 대한 오록의 번역과 그에 대한 배송지의 평은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rexhistoria.net/151630

이걸로 손휴전의 모든 번역이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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