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孫皓)는 자가 원종(元宗)이고 손권의 손자이며, 손화의 아들이다. 그는 일명 팽조(彭祖)라고도 하고, 자가 호종(皓宗)이다. 손휴가 즉위한후, 손호를 오정후로 봉하여, 봉국으로 가도록 했다. 서호의 백성 경양이 손호의 관상을 보고는, 매우 고귀한 사람이 될것이라고 했다. 손호는 속으로는 기뻐했지만, 함부로 발설하거나 티를 내지 않았다. 손휴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촉나라는 막 망하려고 하고 있었고, 교지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나라의 안팎이 두려워 떨고 있었으며, 훌륭한 군주를 얻기를 희망했다.

좌전군 만욱(萬彧)은 과거 오정현의 현령을 지냈으며, 손호와 서로 친했는데, 손호는 재능과 식견의 영명함과 과단성이 있고, 장사환왕(손책)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며, 또 게다가 학문을 좋아하고 법도를 받들어 준수한다고 칭찬하였으며, 여러 차례 승상 복양흥(濮陽興)과 장군 장포(張布)에게 말했다. 복양흥과 장포는 손휴의 비, 태후 주씨(朱)에게 손호를 후사로 삼도록 하라고 권유하였다. 주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아비를 잃은 과부인데, 어찌 사직의 걱정을 알겠습니까 ? 단지 오나라가 멸망하지 않고 종묘가 의지할 곳이 있으면 됩니다. "

그래서 곧 손호를 영접해서 세웠다. 그 당시 손호는 23세였다. 손호는 연호를 바꾸고 대사면을 실시하였다.

원흥 원년 (264) 8월, 상대장군 시적(施績), 대장군 정봉(丁奉)을 좌우대사마로, 장포를 표기장군으로 임명하고, 시중을 더했으며, 많은 사람들의 지위를 승진시키고, 상을 주는 것은 한결같이 모두 옛날 관례와 같이 했다.

9월 태후를 경황후(景皇后)로 낮추고, 아버지 손화(和)의 시호를 문황제(文皇帝)라고 했으며, 어머니 하씨를 존중하여 태후라고 했다.

10월 손휴의 태자 손완을 예장왕(豫章王)으로 임명하고, 둘째 아들을 여남왕(汝南王), 셋째 아들을 양왕(梁王), 넷째 아들을 진왕(陳王)으로 삼았으며, 후에는 등씨(滕氏)를 세웠다.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르길 : 손호孫皓가 처음 즉위하고, 우조優詔를 밝히고, 사민을 구휼하고, 곳간을 열어서, 가난하여 가진 게 없는 이들을 구원하고, 법으로 궁녀를 내보내서 처가 없는 이에게 짝을 지어주고, 동산에서 금수를 기르던 것은 모두 풀어줬다. 당시에 대중의 뜻이 한 곳으로 몰리며 명군이라고 칭했다.


손호의 소원이 실현 된 후, 그는 포악해지고 교만해지고 꺼리기 싫어하는 것이 많아 졌고, 주색을 좋아하게 되었으므로, 조정의 위 아래 할것없이 모두 실망하였다. 복양흥과 장포는 이에 속으로 후회했다. 어떤 사람이 이 두사람을 손호에게 무함했다.

11월 복양흥과 장포가 주살되었다.

12월 손휴를 정릉에 안장시켰다. 황후의 부친인 등목(滕牧)을 고밀후로 봉하고 외숙 하홍(何洪) 등 세명을 모두 열후로 봉했다.


오력(吳歷)에 이르길:등목(滕牧)의 본명은 등밀()이었는데,정밀(丁密)의 이름을 피휘해 목으로 고친 것이다. 정밀(丁密)도 목을 피하기 위해 정고(丁固)로 이름을 바꿨다.

이 해, 위에서 설치한 교지태수가 군에 도착했다. 진문제가 위나라의 상국을 맡았다. 그는 이전에 오나라의 수춘성을 지키다가 항복한 장수 서소(徐紹)와 손욱(孫彧)을 사자로 하여 명령을 받아 편지를 갖고 오나라로 가도록 하여 형세의 이해 관계를 진술하여 손호에게 항복할 것을 권고했다.


漢晉春秋載晉文王與皓書曰:「聖人稱有君臣然後有上下禮義,是故大必字小,小必事大,然後上下安服,群生獲所。逮至末塗,純德既毀,剿民之命,以爭彊於天下,違禮順之至理,則仁者弗由也。方今主上聖明,覆幬無外,僕備位宰輔,屬當國重。唯華夏乖殊,方隅圮裂,六十餘載,金革亟動,無年不戰,暴骸喪元,困悴罔定,每用悼心,坐以待旦。將欲止戈興仁,為百姓請命,故分命偏師,平定蜀 漢,役未經年,全軍獨克。于時猛將謀夫,朝臣庶士,咸以奉天時之宜,就既征之軍,藉吞敵之勢,宜遂回旗東指,以臨吳境。舟師泛江,順流而下,陸軍南轅,取徑四郡,兼成都之械,漕巴漢之粟,然後以中軍整旅,三方雲會,未及浹辰,可使江表厎平,南夏順軌。然國朝深惟伐蜀之舉,雖有靜難之功,亦悼蜀民獨罹其害, 戰於綿竹者,自元帥以下並受斬戮,伏尸蔽地,血流丹野。一之於前,猶追恨不忍,況重之於後乎?是故旋師按甲,思與南邦共全百姓之命。夫料力忖勢,度資量險,遠考古昔廢興之理,近鑒西蜀安危之效,隆德保祚,去危即順,屈己以寧四海者,仁哲之高致也;履危偷安,隕德覆祚,而不稱於後世者,非智者之所居也。今朝廷遣徐紹、孫彧獻書喻懷,若書御於前,必少留意,回慮革算,結歡弭兵,共為一家,惠矜吳會,施及中土,豈不泰哉!此昭心之大願也,敢不承受。若不獲命, 則普天率土,期於大同,雖重干戈,固不獲已也。」    


한진춘추에 진 문왕이 손호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어 이르길 : 「성인이 칭하길 군신이 있은 연후에 위아래의 예의가 있고 그 때문에 큰 쪽은 작은 쪽을 사랑하고 작은 쪽은 큰 쪽을 섬긴 이후에야 상하가 편안하고 뭇 생령들이 있을 장소를 얻을 수 있다하였습니다. 말세에 이르러 순수한 덕이 이미 무너지면서 백성들의 생명을 해쳐 천하를 다투고 예법에 따르는 지극한 도리를 위배하니 이는 곧 인자한 사람이 말미암지 않는 바입니다. 방금에 주상께서 성스럽고 밝으며 다스림이 천하를 뒤덮어 저는 재상의 자리를 채운지라 나라의 중요한 지위에 속해있습니다. 오직 화하가 어긋난 지라 변방이 결렬된 것이 60여년이 되고 전쟁이 수차례 일어나 싸우지 않은 해가 없었으니 시체가 드러나고 원기가 상하여 곤궁과 초췌함이 안정되지 못하였습니다. 매번 슬픈 마음이 들어 앉아서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정도입니다. 장차 전쟁을 멈추고 인자함을 일으켜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빌고자 편사에 명령을 내려 촉한을 평정하도록 하였는데 전역이 해를 넘기지도 않고 전군이 촉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 맹장과 모사, 조신과 뭇 선비들이 모두 하늘의 시기의 마땅함을 받들어 이미 정벌에 나선 군대로 적을 삼킨 기세에 힘입어 응당 깃발을 되돌려 동쪽을 향해 오나라의 국경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수군을 강에 띄워 흐름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며 육군은 남쪽으로 수레바퀴를 돌려 4군을 지나 성도의 기계와 파한의 곡식을 실어 나른 연후에 중군을 가지런히 하여 3방향에서 운집하면 12일도 채 되지 않아 강표를 평정하고 남하를 궤도에 오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조는 촉을 정벌하던 원정을 심히 우려하여 비록 어지러움을 평정한 공로가 있지만 또한 촉의 백성들이 홀로 그 해를 당한 것을 슬퍼하니 면죽관에서 싸운 사람들 중에서 원수이하가 더불어 참륙당해 엎어진 시체가 땅을 덮고 피가 흘러 들판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하나가 앞서 가도 뒤따라가는 유한을 참을 수 없거늘 하물며 다시 한번 뒤에서 하겠습니까? 그렇기에 군대를 돌리고 갑옷을 수습하며 남방과 더불어 백성의 생명을 보전하고자 생각하였습니다. 무릇 힘과 세력을 헤아리고 물자와 험난함을 가늠하며 멀리 고대의 흥하고 폐하는 원리를 고찰하고 가까이 서촉의 안위의 효과를 거울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덕을 높이고 국조를 보전하며 위태로움을 피하고 순리에 따르는 것으로 자신을 굽혀 사해를 평안하게 하는 것은 인자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높은 경지요 위태로움을 밟고 구차하게 안전을 도모하며 덕을 무너뜨리고 국조를 뒤엎어 후세에 칭해지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거하는 바가 아닙니다. 지금 조정에서 서소, 손욱을 보내 편지를 드려 마음속의 생각을 밝히니 만약 편지가 면전에 도착하거든 반드시 약간이라도 의중에 남겨 전쟁하고자 한 생각을 돌리고 우호를 맺어 전쟁을 그치게 하여 더불어 한 집안이 된다면 은혜가 오회뿐만 아니라 중토에도 널리 퍼질 것이니 어찌 태평성대가 오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소(사마소)의 마음속의 거대한 소원인데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명을 얻을 수 없다면 천하가 모두 대동을 기대하니 비록 다시 한번 전쟁을 한다고 하여도 진실로 부득이한 일이 될 것입니다.」

감로 원년 (265) 3월, 손호는 사자를 파견하여 서소와 손욱을 따라 위나라로 가서 편지를 주도록 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나는 당신이 세상을 뛰어넘는 재능에 의자하고 있고, 재상의 중임에 있으면서, 군주를 바르게 인도하는 공이 있음을 아는데, 그 행동은 수고롭고도 주도면밀합니다. 나는 부덕하면서 등급은 나라의 대업을 계승하게 되었으며, 현인이나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세상의 이치를 구제하려고 했지만, 당신의 나라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 인연을 아직까지 맺지 못하였으며, 당신의 훌륭한 뜻은 분명하게 빛나고 있어서 나는 깊이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광록대부 기척(紀陟)과 오관중랑 홍구(弘璆)를 보내 나의 진지한 마음을 나타냅니다. --


강표전에서 이르길 : 손호의 서신은 두 번 서두에서 아뢴다고 말하며, 이름을 칭하고 말하나 성은 쓰지 않았다.


오록吳錄에서 이르길 : 기척紀陟의 자는 자상子上으로, 단양丹楊 사람이다. 처음에 중서랑中書郎이 됐는데, 손준孫峻이 남양왕南陽王 손화孫和를 조사하게 하며, 그가 자살하게 했다. 기척은 은밀히 정직하고 엄정한 언사로 호소하게 하여, 손준이 노하였다. 기척은 두려워,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손휴 때, 부친 기량紀亮이 상서령尚書令이었고, 기척은 중서령中書令이라, 매번 조회에서, 조서로 병풍을 가지고 그들의 자리를 나누게 했다. 파견되며 예장태수豫章太守가 됐다.


干寶晉紀曰:陟、璆奉使如魏,入境而問諱,入國而問俗。壽春將王布示之馬射,既而問之曰:「吳之君子亦能斯乎?」陟曰:「此軍人騎士肄業所及,士大夫 君子未有為之者矣。」布大慚。既至,魏帝見之,使儐問曰:「來時吳王何如?」陟對曰:「來時皇帝臨軒,百寮陪位,御膳無恙。」晉文王饗之,百寮畢會,使儐者告曰:「某者安樂公也,某者匈奴單于也。」陟曰:「西主失土,為君王所禮,位同三代,莫不感義,匈奴邊塞難羈之國,君王懷之,親在坐席,此誠威恩遠著。」又問:「吳之戍備幾何?」對曰:「自西陵以至江都,五千七百里。」又問曰:「道里甚遠,難為堅固?」對曰:「疆界雖遠,而其險要必爭之地,不過數四,猶人雖有八尺之軀靡不受患,其護風寒亦數處耳。」文王善之,厚為之禮。 



臣松之以為人有八尺之體靡不受患,防護風寒豈唯數處?取譬若此,未足稱能。若曰 譬如金城萬雉,所急防者四門而已。方陟此對,不猶愈乎!    

간보의 진기에 이르길 : 기척과 홍구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경역에 들어가면 피할만한 것이 있나 물었고 나라에 들어가면 풍속을 물었다. 수춘의 장군 왕포(王布)가 말을 타고 활쏘는 것을 보여주고서는 묻기를


「오나라의 군자도 역시 능히 이를 할 수 있습니까?」


하니 기척이 말하길


「이는 군인, 기사가 익혀서 미칠 수 있는 것이지 사대부, 군자 중에는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왕포가 크게 부끄러워 하였다. 이미 이르러 위나라의 황제가 보고는 빈객을 접대하는 관리로 하여금 묻게하길


「올때에 오나라의 왕이 어떠하였는가?」


하니 기척이 대답하길


「황제께서 임헌하시고 백료들이 배위하였으며 드시는 음식이 무양하셨습니다.」


진 문왕이 연회를 베풀어 백료들이 모두 모였는데 빈객을 접대하는 자를 시켜 고하길


「모자는 안락공이고 모자는 흉노의 선우입니다.」


하니 기척이 말하길


「서주가 토지를 잃었는데 군왕의 예법으로 대접받는 것이 자리가 3대와 동등하니 의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흉노는 변방의 다스리기 어려운 나라인데 군왕이 품었고 친히 좌석에 있으니 이는 진실로 위엄과 은혜가 널리 현저한 것입니다. 」


또 묻기를


「오나라 변방의 수비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길


「서릉에서부터 강도에 이르기까지 5700리입니다.」


또 묻기를


「길이 심히 먼데 견고하게 수비하기 어렵겠소?」


하니 대답하길


「국경이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험요한 곳이라 반드시 다퉈야 되는 땅은 4곳에 불과합니다. 마치 사람이 비록 8척의 몸을 가지고 있어 병을 얻기는 하지만 풍한을 수비하는데 있어서는 또한 몇 곳 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


하니 문왕이 훌륭히 여기고 예를 후하게 갖췄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사람의 몸이 8척이 되어 병을 얻는데 있어 풍한을 방어하는 것이 어찌 겨우 몇 장소 뿐이겠습니까? 비유를 취하는 것이 이렇다면 능력을 칭할게 못됩니다. 만약 말하길 비유컨대 견고한 성 1 만치가 급히 방어할 곳은 4개의 성문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바야흐로 기척의 이 응대가 더욱 훌륭하지 않았겠습니까!


오록에서 이르길 : 손호는 제부諸父로서 손화와 관련된 자는, 가속을 모두 동야東冶로 옮겼는데, 오직 기척만은 은밀한 뜻을 가졌기에, 특별히 자식 기부紀孚를 도정후都亭侯에 봉했다.


기부의 동생 기첨紀瞻은, 자가 사원思遠으로, 진晉에 들어가 섬기며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됐다.


홍구弘璆 는, 곡아曲阿 사람으로, 홍자弘咨의 손자이며, 손권의 생질이었다. 홍구는 후에 중서령, 태자소부 太子少傅 에 이르렀다.

그런데 서소는 유수까지 가서 오로 불려 돌아와 살해되었고, 그의 가족은 건안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전에 어떤 자가, 서소가 중국(위나라)를 칭찬했다고 보고했기 때문에 살해 당한 것이다.

여름 4월, 장릉에서 감로가 내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래서 연호를 바꾸고 대사면을 실시했다.

가을 7월, 손호는 경후 주씨를 핍박하여 죽였다 주씨의 영구를 정전에 두지 않고 어원 안의 작은 방에서 상사를 처리하게 했다. 사람들은 경후가 질병으로 죽은 것이 아님을 알고 애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손휴는 넷째 아들을 오군의 작은 성으로 보냈고, 오래지 않아 나이가 많은 두 아들을 죽였다.

9월 서릉의 독 보천(步闡)이 표를 올려 건의한것에 따라 무창으로 수도를 옮겼다. 어사대부 정고(丁固)와 우장군 제갈정(諸葛靚)이 건업을 지켰다. 기척과 홍구가 낙양에 도착했을때, 진문제가 죽었다.

11월, 두 사람은 비로소 돌려보내지게 되었다. 손호는 무창에 도착하여 대사면을 실시했다. 영릉 남쪽을 시안군(始安郡)으로 계양 남쪽을 시흥군(始興郡)이라고 했다. 진이 위의 제위를 받았다.

보정 원년 (266) 정월, 대홍려 장엄(張儼)과 오관중랑장 정충(丁忠)을 파견하여, 진문제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도록 했다. 돌아올 때, 장엄은 길에서 병사했다.


오록에서 이르길 : 장엄 張儼 은 자가 자절子節로, 오吳 사람이다. 약관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현위顯位를 역임했고, 박문하고 학식이 많아, 대홍려大鴻臚에 임명됐다. 진晉에 사자로 갈 때, 손호가 장엄에게 이르길 :


“지금 남북이 친교를 맺는데, 군이 출경出境할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기에, 힘껏 행하길 빌겠소.”


대답하길 :


“황황자화 皇皇者華 로, 영광을 받았으니, 옛 사람과 같은 명예를 널리 퍼트리는 아름다움이 없어도, 드러난 재능과 기개를 연마해, 사명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이르고 나니, 거기장군車騎將軍 가충賈充, 상서령 배수裴秀, 시중侍中 순욱荀勗 등이 모르는 것으로 업신여기고자 했으나 굴복시킬 수 없었다. 상서복야尚書僕射 양호羊祜, 상서尚書 하정何楨이 나란히 호대縞帶의 교분을 맺었다. 


정충은 손호를 설득시키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방은 수비 장비가 세워지지 않아 익양을 습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

손호는 여러 신하들에게 이에 관한 의견을 구했다. 진서대장군 육개(陸凱)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군대란 부득이란 상황에서만 쓸 수 있는데, 삼국이 정립한 이래로 더욱 서로 침입하고 토벌하여 1년이라도 편안할 때가 없었습니다. 지금 강대한 적군은 막 파촉을 병탄시켰으며, 토지를 겸병하는 실질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사자를 파견하여 친하기를 구하면 전쟁을 멈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라고는 할수 없습니다. 지금 적군의 세력은 강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행으로 승리를 얻을려고 하니, 이는 이득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거기장군 유찬(劉纂)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이 오행을 낳았는데, 누가 전쟁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 거짓 수단에 의지하여 서로 다투는 것도 종래에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누설하는 것이 있다면 어찌 놓칠 수 있겠습니까 ? 마땅히 첩자를 보내 그들의 정세를 관찰해야만 합니다."

손호는 마음속으로는 유찬의 견해를 받아 들였다. 촉은 막 평정되었기 때문에, 군사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렇게 되면 진나라를 자연히 단절 시키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8월, 각지에서 커다란 솥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그래서 연호를 바꾸고 대사면을 실시했다. 육개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상시 만욱을 우승상으로 임명했다.


겨울 10월, 영안(永安)의 산적 시단(施但) 등이 무리 수천 명을 모아(주1) 손호의 이복동생 영안후 손겸(孫謙)을 위협하여, 오정으로 나왔으며, 손화의 능묘를 파헤쳐, 악기와 곡개를 취했다. 그들이 건업에 도착하자 무리는 수만으로 늘어나 있었다. 정고와 제갈정(諸葛靚)은 우둔에서 이를 맞아 싸웠다. 쌍방이 격전을 펼쳤는데, 시단 등이 결국 패하고 달아났다. 손겸은 체포되어 자살했다. (주2)



(주1)오록(吳錄)에서 이르길: 영안(永安)은 지금의 무강현(武康縣)이다.



(주2)한진춘추漢晉春秋에서 이르길 : 애초에 기운을 보고 조짐을 알아내는 이가 형주荊州에 왕기王氣가 있어서 양주揚州를 망가뜨리고 건업궁建業宮에 불리하다고 일렀기에, 손호孫皓는 무창武昌으로 천도하고, 사자를 파견해 백성을 징발해서 형주 경계의 대신, 명가名家의 무덤과 낮은 산이 이어진 것을 파서 이를 눌렀다. 시단施但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듣고 나서, 스스로 땅을 옮겨 계책이 실현될 수 있었다고 여겼다. 수백 명에게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건업에 들어가서, 시단의 처자식을 죽이게 하고는, 천자가 형주의 군을 보내서 양주의 도적을 격파해, 전의 기운을 눌렀다고 일렀다.


회계를 분할하여 동양군(東陽郡)으로 삼았으며, 오군과 단양군을 분할시켜, 오흥군(吳興郡)으로 삼았으며,


손호의 조서에서 이르길 : “과거에 토지를 나눠 나라를 세워서, 어질고 재간있는 이를 칭찬하고 장려하며, 국방의 요충지를 널리 세웠다. 진秦이 오등작을 제거하고 36군으로 만들었으며, 한실漢室이 처음 흥하고, 즐거이 세워서 이에 105에 이르렀으니, 일에 따라서 적당한 방식을 제정하며, 대략 정해진 수는 없었다. 지금 오군吳郡의 양선陽羨, 영안永安, 여항 餘杭, 임수臨水와 단양丹楊의 고장故鄣, 안길 安吉, 원향 原鄉, 어잠於潛 여러 현은, 지세와 물의 흐름의 편리함이, 모두 오정烏程으로 주입돼, 군을 세워서 산월山越을 진압하고, 또한 명릉明陵을 지키며, 대제大祭를 받들기에 이미 마땅하니, 또한 좋지 않은가! 시급히 이 9현을 나눠서 오흥군吳興郡으로 삼고, 오정을 치소로 삼도록 하라.”


영릉 북부를 소릉군邵陵郡으로 만들었다.

12월, 손호는 수도를 건업으로 회복시켰고, 위장군 등목(滕牧)을 무창에 남겨 지키게 했다.

2년(267) 봄, 대사면을 실시했다. 우승상 만욱이 장강을 거슬러, 파구에 주둔하여 지켰다.

여름 6월, 현명궁을 수축했다.


태강삼년지기(太康三年地記)에 이르길: 오(吳)에는 태초궁(太初宮)이 있어,둘레가 삼백 장(丈)으로 손권이 쌓기 시작했다. 소명궁(昭明宮)은 둘레가 오백 장(丈)으로, 손호가 만들었다. 진이 이를 피휘하여, 현명(顯明)이라 불렀다.


오력(吳歷)에서 이르길: 현명(顯明)은 태초(太初)의 동쪽에 있다.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르길: 손호가 신궁을 짓는데 이천석(二千石)이하 관리는 모두 직접 산으로 들어가 직접 벌목하는 것을 감독하며 도와야 했다. 또 제영(諸營)을 파괴하고 원유(園囿)를 크게 만들어 개장하고, 흙을 쌓아 산을 만들고 누관(樓觀)을 지었는데, 온갖 기교를 다 부려 공사비용이 억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육개(陸凱)가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겨울 12월, 손호는 현명궁으로 이주하여 머물렀다. 이 해, 예장,여릉,장사를 분할하여 안성군을 만들었다.

보정 3년(268) 봄 2월, 좌우어사대부 정고(丁固)와 맹인(孟仁)이 사도, 사공이 되었다.


오서(吳書)에 이르길:전에 정고가 상서로 있을 때, 소나무가 그의 배 위에서 자라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송이라는 글자는 열 십,여덟 팔,공평할 공이니 18년이 지나면 나는 아마 삼공이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결국 꿈과 같이 되었다.

가을 9월, 손호는 동관으로 출전하였고, 정봉은 합비에 도착했다. 이 해, 교주자사 유준(劉俊) 전부독 수칙(脩則) 등이 교지를 습격했는데, 진나라 장수 모경(毛炅) 등에게 격파당하고 모두 죽였으므로 병사들은 흩어지고 합포로 돌아왔다.

건형 원년 (269) 봄 정월, 아들 손근(孫瑾)을 태자로 세우고, 별도로 회양왕(淮陽), 동평왕(東平)을 세웠다.

겨울 10월, 연호를 바꾸고 대사면을 실시했다.

11월 좌승상, 육개가 죽었다. 감군 우사(虞汜), 위남장군 설후(薛珝) 창오 태수 도황(陶璜)을 파견하여, 형주에서 출발하도록 하고, 감군 이욱(李勖) 독군 서존(徐存)에게는 건안에서부터 바닷길로 출발하도록 하여 모두 합포에 도착해 교지를 공격하도록 했다.

2년(270) 봄, 만욱이 무창에서 건업으로 돌아왔다. 이욱은 건안 길이 통하지 않아 불편했으므로, 길 안내를 맡았던 장수 풍비(馮斐)를 살해하고 군대를 인솔하여 돌아왔다.

3월 우레가 쳐서 1만여 호가 불타고, 7백명이 죽었다.

여름 4월, 좌대사마 시적이 죽었다. 전중열장 하정(何定)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부 이욱은 마음대로 풍비를 살해하고, 독단적으로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왔습니다. "

이욱과 서존의 가족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가을 9월, 하정이 장수와 병사 5천 명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하구에서 사냥을 했다. 도독 손수(孫秀)가 진나라로 달아났다. 이 해에 대사면을 실시했다.

3년(271) 봄 정월 30일, 손호는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화리까지 나왔다. 손호의 어머니와 비첩도 모두 동행했다. 동관의 현령 화핵(華覈)등이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므로, 이내 돌아왔다.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르길 : 애초에 단양丹楊의 조현刁玄이 촉蜀에 사신으로 가, 사마휘司馬徽가 유이劉廙와 더불어 운명과 역수曆數를 논한 일을 얻었다. 조현은 그 글을 거짓으로 늘려서 나라 사람들을 속이길 :


“누런 기旗와 자줏빛 덮개가 동남쪽에서 보이니, 끝내 천하를 가질 이는, 형荊, 양揚의 임금이로다!”


또한 중국의 항복한 이를 얻었는데, 수춘壽春 아래에서 동요가 있다며 말하길 :


“오吳의 천자가 곧 올라오리라.”


손호孫皓가 이를 듣고는, 기뻐하길 :


“이는 천명이다.”


곧 그의 모친과 처자식에다 후궁 수천까지 싣고는, 우저牛渚에서부터 육로를 통해 서쪽 위로 올라가며, 청개青蓋가 낙양洛陽에 들어가, 천명에 따른다고 일렀다. 가다가 큰눈을 만났는데, 길이 움푹 파이고 무너져서, 병사들이 갑옷을 입고 무기를 가지고는, 백 명이 함께 수레 하나를 끌었는데, 혹한으로 거의 죽었다. 병사들이 견디지 못해, 모두 이르길 :


“만약 적과 조우하면 바로 난을 일으킬 뿐이다.”


손호가 이를 듣고는, 곧 돌아갔다.


이 해, 우사와 도황이 교지를 격파시키고, 진에서 설치한 수비대장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 구진 일남은 모두 오나라로 돌아왔다.


漢晉春秋曰:初霍弋遣楊稷、毛炅等戍,與之誓曰:「若賊圍城,未百日而降者, 家屬誅;若過百日而城沒者,刺史受其罪。」稷等日未滿而糧盡,乞降於璜。璜不許,而給糧使守。吳人並諫,璜曰:「霍弋已死,無能來者,可須其糧盡,然後乃 受,使彼來無罪,而我取有義,內訓吾民,外懷鄰國,不亦可乎!」稷、炅糧盡,救不至,乃納之。


華陽國志曰:稷,犍為人。炅,建寧人。稷等城中食盡,死亡者 半,將軍王約反降,吳人得入城,獲稷、炅,皆囚之。孫皓使送稷下都,稷至合浦,歐血死。晉追贈交州刺史。初,毛炅與吳軍戰,殺前部督脩則。陶璜等以炅壯 勇,欲赦之。而則子允固求殺炅,炅亦不為璜等屈,璜等怒,面縛炅詰之,曰:「晉(兵)賊!」炅厲聲曰:「吳狗,何等為賊?」吳人生剖其腹,允割其心肝,罵 曰:「庸復作賊?」炅猶罵不止,曰:「尚欲斬汝孫皓,汝父何死狗也!」乃斬之。晉武帝聞而哀矜,即詔使炅長子襲爵,餘三子皆關內侯。此與漢晉春秋所說不 同。


한진춘추에 이르길 : 당초에 곽익(霍弋)이 양직(楊稷)과 모경(毛炅)등을 수비하러 보내면서 더불어 맹세하여 이르길 「만약 적이 성을 포위하여 100일이 지나지 않았는데 항복하는 사람은 그 가속을 주멸하고 만약 100일이 지나고 성이 함락된 사람은 자사가 그 죄를 받는 걸로 한다.」하였는데 양직 등이 날짜를 채우지 못하고 양식이 다하여 도황에게 항복을 구하였다. 도황은 항복을 허락하지 않으며 양식을 보내 수비하도록 하였다. 오나라 사람들이 더불어 간하니 도황이 말하길 「곽익이 이미 죽었으니 올수 있는 사람이 없다. 모름지기 양식이 다할 때 까지 기다려 연후에 마침내 받아주는 것이 가하니 저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가 없고 내가 취하는 것이 정의롭도록 하니 안으로는 내 백성들을 교화시킬 수 있고 밖으로 이웃 나라를 품을 수 있다면 또한 괜찮지 않겠는가! 」양직과 모경은 식량이 다 떨어지고 구원병이 이르지 않자 마침내 이들을 받아들였다. 


화양국지에 이르길: 양직은 건위사람이고 모경은 건녕사람이다. 양직 등이 성중에 음식이 다하고 죽은 사람이 절반이었는데 장군 왕약((王約)이 도리어 항복하고 오나라 사람이 성으로 들어와 양직과 모경을 잡아 가두었다. 손호는 양직을 수도로 보내라고 시켰는데 양직이 합포에 이르러 피를 토하고 죽었다. 진나라는 추증하여 교주자사로 삼았다. 당초에 모경이 오나라 군대와 더불어 교전하면서 전부도독 수칙(脩則)을 죽였다. 도황 등의 사람들은 모경의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풀어주고자 하였다. 수칙의 아들인 수윤()이 굳이 모경을 죽일 것을 구하고 모경 또한 도황 등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도황 등이 노하여 모경의 두 손을 묶고 무릎 꿀리고서는 힐난하길 「진나라의 도적이다!」하니 모경이 성난 소리로 말하길 「오나라의 개들이 도적이 무엇인지나 아느냐?」하니 오나라 사람이 산채로 그의 배를 갈랐다. 수윤이 그의 심장과 간장을 가르며 욕하길 「어찌 다시 도적짓을 하겠느냐?」하였으나 모경은 오히려 욕하길 그치지 않으며 말하길 「오히려 너의 손호를 베길 바래야지. 너의 아버지는 어찌하여 개를 섬기다 죽었는가 !」 마침내 참수하였다. 진무제가 이를 듣고 슬퍼하여 곧 조서를 내려 모경의 장자로 하여금 작위를 세습하고 나머지 3 아들은 모두 관내후로 삼았다.    



이는 한진춘추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다.


대사면을 실시하여 교지를 나누어 신창군(新昌郡)을 만들었다. 장수들은 부엄(扶嚴)을 격파시키고 무평군(武平郡)을 두었다.

무창의 독 범신(范慎)을 태위로 임명했다. 우대사마 정봉, 사공 맹인이 죽었다.


吳錄曰:仁字恭武,江夏人也,本名宗,避皓字,易焉。少從南陽李肅學。 其母為作厚褥大被,或問其故,母曰:「小兒無德致客,學者多貧,故為廣被,庶可得與氣類接也。」其讀書夙夜不懈, 肅奇之,曰:「卿宰相器也。」初為驃騎將軍朱據軍吏,將母在營。既不得志,又夜雨屋漏,因起涕泣,以謝其母,母曰:「但當勉之,何足泣也?」據亦稍知之,除為監池司馬。自能結網,手以捕魚,作鮓寄母,母因以還之,曰:「汝為魚官,而鮓寄我,非避嫌也。」遷吳令。時皆不得將家之官,每得時物,來以寄母,常不先食。及聞母亡,犯禁委官,語在權傳。特為減死一等,復使為官,蓋優之也。 


楚國先賢傳曰:宗母嗜筍,冬節將至。時筍尚未生,宗入竹林哀嘆,而筍為之出,得 以供母,皆以為至孝之所致感。累遷光祿勳,遂至公矣。    


오록에 이르길 : 맹인(孟仁)의 자는 공무(恭武)로 강하사람이며 본명은 맹종(孟宗)인데 손호의 자를 피휘해 바꿨다. 어렸을 때 남양(南陽)의 이숙(李肅)을 따라 배웠다. 그의 어머니가 두터운 요를 만들어 넓게 폈는데 혹자가 그 이유를 물었고 어머니가 말하길


「작은 아이가 덕이 없는 데도 손님을 불러오나 학자는 빈한한 경우가 많으므로 넓게 자리를 펴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한 것 뿐이오.」


책 읽는 것을 주야로 게으르지 않게 하여 이숙이 기이하게 여겨 말하길 「


그대는 재상의 그릇이다.」


하였다. 처음에 표기장군 주거(朱據)의 군리가 되어 어머니를 모셔 군영에 있게 하였다. 이미 뜻을 얻지도 못하고 또한 밤에 비 때문에 집에 물이 세니 이로 인해 일어나 울면서 그의 어머니에게 사죄하였는데 어머니가 말하길


「다만 응당 노력할 뿐이니 어찌 족히 눈물을 흘릴만한 일이냐?」


주거 또한 점차 그를 알아서 염지사마에 임명하였다. 스스로 능히 그물을 엮어 손으로 물고기를 잡아 젓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보냈는데 어머니는 이로 인해 돌려보내면서 말하길


「너는 어업을 관장하는 관리가 돼서 생선젓을 만들어 나에게 부치니 혐의를 피하는 것이 아니다.」


라 하였다. 오령으로 옮겼다. 당시에 모두 집을 옮길 수 있는 관직을 얻지 못하여 매번 절기에 맞는 물건을 얻으면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보냈으며 항상 먼저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데 이르러 금기를 범하고 관직을 버렸는데 말이 손권전에 보인다. 특별히 사형에서 한 등급을 경감해주고 다시 관리를 하도록 하였는데 대체로 우대해준 것이었다.    


초국선현전에 이르길 : 맹종의 어머니가 죽순을 즐겼는데 장차 겨울이 이르려 하고 있었다. 당시에 죽순이 오히려 자라지 않았는데 맹종이 죽림으로 들어가 슬프게 탄식하니 죽순이 그를 위해 자라나 이를 얻어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었고 모두들 지극한 효성이 불러낸 감응이라고 여겼다. 누차 옮겨 광록훈이 되었고 마침내 공에 이르렀다.


서원에서 봉황이 모여들었다는 보고가 있었고, 이듬해에 연호를 바꾸었다.

봉황 원년(272) 가을 8월 서릉의 독 보천을 초빙하려고 했다. 보천은 부름에 응하지 않고 성읍을 바쳐 진나라로 투항해버렸다. 악향 도독 육항(陸抗)을 파견하여 보천을 체포하도록 했다. 보천의 병력은 모두 투항했다. 보천과 함께 모의한 수십 명의 삼족을 멸했다.

대사면을 실시했다. 이 해, 우승상 만욱이 견책을 받아 근심으로 사망했고, 그의 자제들은 여릉으로 이주되었다.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르길 : 애초에 손호孫皓가 화리華里를 유람할 때, 만욱萬彧이 정봉丁奉, 유평留平과 은밀히 모의하길 : “이 거동은 긴급한 게 아닌데, 만약 화리에 이르러 돌아오지 않으면, 사직의 일이 중요하니, 스스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이 이야기가 자못 누설됐다. 손호가 듣고 알게 됐으나, 만욱 등은 옛 신하라서, 우선 참기로 꾀하고 몰래 마음에 품었다. 후에 연회를 통해서, 독주를 만욱에게 마시게 하나, 술을 전하던 이가 살짝 이를 덜어냈다. 또한 유평에게 마시게 하나, 유평이 이를 깨닫고, 다른 약을 복용해서 해독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만욱은 자살했고, 유평은 근심하고 번민하다, 한 달 남짓 지나서 또한 죽었다. 


하정의 사악한 일이 발각되어 주살되었다. 손호는 그의 죄악이 장포와 유사하다고 여겼으므로, 그가 죽은 후 그의 이름을 하포로 고쳤다.


江表傳曰:定,汝南人,本孫權給使也,後出補吏。 定佞邪僭媚,自表先帝舊人, 求還內侍,皓以為樓下都尉,典知酤糴事,專為威福。而皓信任,委以眾事。定為子求少府李勖女,不許。定挾忿譖勖於皓,皓尺口誅之,焚其尸。定又使諸將各上好犬,皆千里遠求,一犬至直數千匹。御犬率具纓,直錢一萬。一犬一兵,養以捕兔供廚。所獲無幾。吳人皆歸罪於定,而皓以為忠勤,賜爵列侯。 


吳歷曰:中書郎 奚熙譖宛陵令賀惠。惠,劭弟也。遣使者徐粲訊治,熙又譖粲顧護不即決斷。皓遣使就宛陵斬粲,收惠付獄。會赦得免。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길: 하정(何定)은 여남(汝南)사람으로, 본래 손권의 급사였다가 출보(出補)되어 관리가 되었다. 하정은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여 스스로 선제의 오래된 신하임을 표방하며 돌아와 내신으로 근무할 것을 구했는데 손호는 누하도위로 삼고 식량을 사고파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위복을 오롯이 하였다. 그러나 손호는 신임하여 여러 일을 맡겼다. 하정은 아들을 위해 소부 이욱(李勖)의 딸을 구했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하정은 분을 품고 손호에게 이욱을 참소하였는데 손호는 어린아이까지 주살하고서는 그 시체를 불태웠다. 하정은 또한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각자 훌륭한 개를 바치도록 하였는데 모두 천 리나 되는 먼 거리에서 구해 개 한 마리의 가치가 비단 수 천 필에 이르렀다. 개를 끄는 도구인 줄도 1만전에 이르렀다. 개 한 마리에 병사 한명을 붙였고 토끼를 잡아 주방에 공급하여 길렀다. 잡을 수 있는 사냥감이 얼마 없어서 오나라 사람들이 모두 죄를 하정에게 돌렸는데 손호는 그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다 여겨 열후의 작위를 내렸다.    


오력에 이르길 : 중서랑 해희(奚熙)가 완릉령 하혜(賀惠)를 참소하였다. 하혜는 하소()의 동생이다. 사자 서찬(徐粲)을 보내 신문하고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해희는 또한 서찬이 돌아보고 보호하여 즉시 결단하지 않았다고 참소하였다. 손호는 사자를 완릉에 보내 서찬을 참수하고 하혜를 하옥시켰다. 사면을 맞아 죄를 면제받았다.

2년 (273) 봄 3월 육항을 대사마로 임명했다. 사도 정고가 죽었다.

가을 9월, 회양왕을 노왕(魯)으로 바꾸어 봉했으며, 동평왕을 제왕(齊)으로 봉하고, 또 진류왕(陳留) , 장릉왕(章陵) 등 아홉 명의 왕을 봉하여 총 11명의 왕을두었고, 왕에게는 병사 3천명씩 공급했다. 대사면을 실시했다.

손호의 애첩 가운데 어떤 자가 사람을 시장에 보내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도록 했다.

사시중랑장 진성(陳聲)은 평소 손호가 총애하는 신하인데, 손호의 총애와 대은에 의지하여, 그러한 사람을 법으로 다스렸다. 첩은 이 일을 손호에게 말했다. 손호는 이에 대해 매우 노여워 했으며, 다른 일을 빌려 진성의 머리를 불태우고 도끼로 잘랐으며, 그 몸을 사망산 아래에 두었다. 이 해, 태위 범신이 죽었다.

3년(274) 회계에 장안후 손분(孫奮)이 천자가 되어야 한다는 뜬 소문이 있었다. 임해태수 해희(奚熙)는 회계태수 곽탄(郭誕)에게 편지를 보내어 국가의 정치에 대해 비판을 했다. 곽탄은 단지 해회의 편지만을 고발하였을뿐 헛소문에 관해서는 알리지 않았으므로, 곽탄은 건안으로 보내져 배를 만드는 노역을 하게 되었다.


會稽邵氏家傳曰:邵疇字溫伯,時為誕功曹。誕被收,惶遽無以自明。疇進曰: 「疇今自在,疇之事,明府何憂?」遂詣吏自列,云不白妖言,事由于己,非府君罪。吏上疇辭,皓怒猶盛。疇慮誕卒不免,遂自殺以證之。臨亡,置辭曰:「疇生長邊陲,不閑教道,得以門資,廁身本郡,踰越儕類,位極朝右,不能贊揚盛化,養之以福。今妖訛橫興,干國亂紀,疇以噂沓之語,本非事實,雖家誦人詠,不足 有慮。天下重器,而匹夫橫議,疾其醜聲,不忍聞見,欲含垢藏疾,不彰之翰筆,鎮躁歸靜,使之自息。愚心勤勤,每執斯旨,故誕屈其所是,默以見從。此之為愆,實由於疇。謹不敢逃死,歸罪有司,唯乞天鑒,特垂清察。」吏收疇喪,得辭以聞,皓乃免誕大刑,送付建安作船。疇亡時,年四十。皓嘉疇節義,詔郡縣圖形廟堂。    


회계소씨가전(會稽邵氏家傳)에 이르길:소주(邵疇) 의 자는 온백(溫伯)으로 당시에 곽탄의 공조로 있었다. 곽탄이 체포되자 두렵고 급하여 스스로를 밝힐 도리가 없었다. 소주가 나아가 말하길


「소주가 지금 스스로 있는데 소주의 일을 명부께서 어찌 걱정하십니까? 」


하고는 마침내 관리에게 이르러 스스로 자백하여 말하길 요언을 말하지 않은 일이 자기로부터 나왔고 부군의 죄가 아니라 하였다. 관리가 소주의 말을 올렸으나 손호의 노기가 여전히 왕성하였다. 소주는 곽탄이 끝내 면하지 못할까 걱정되어 마침내 자살함으로써 증명하고자 하였다. 죽음에 임박하여 사를 지어 이르길


「소주는 변방에서 생장하고 가르침에 한가롭지 않아 문제의 자격을 얻고 본군의 업무에 참여하였는데 동류를 뛰어넘어 공조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성대한 교화를 떨치게 하고 복을 기르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요언이 함부로 흥기하면서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히는데 소주는 시끄럽게 떠드는 말은 본래 사실이 아니므로 비록 집집마다 이야기하고 사람마다 읊어대도 염려할게 없다고 여깁니다. 천하의 중요한 일을 필부가 함부로 의논하니 그 추악한 소리를 미워하여 보고 듣는 것을 참지 못해 잘못을 덮고 문자로 드러내지 않게 하여 경망스러운 것을 진정시켜 고요함으로 돌아가게 해 스스로 숨죽이도록 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마음이 간절하여 매번 이 뜻을 지녔으니 그런고로 곽탄은 옳게 여기는 바를 굽혀 묵묵히 (저의 의견을) 좇은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이 된 것이라면 실로 소주로부터 연유된 것입니다. 삼가 감히 죽음에서 도망쳐 유사에게 죄를 돌릴 수 없으며 오직 천자의 굽어 살핌을 구걸하니 특별히 밝은 보살핌을 내려주기 바랍니다.」


관리가 소주의 상을 치루고 얻은 사를 들었는데 손호는 마침내 곽탄에게 대형을 면하고 건안으로 보내 배를 만들도록 하였다. 소주가 죽었을 때 나이가 40세였다. 손호는 소주의 절의를 가상하게 여겨 조서를 내려 군현의 묘당에 형태를 그리도록 하였다.


삼군독 하식(何植)을 보내 해희를 붙잡도록 했다.

해희는 병사를 일으켜 스스로 지키고 바닷길로 봉쇄했다. 해희의 부하가 해희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건업으로 보냈으며 삼족을 멸했다. 가을 7월, 사자 25명을 주나 군에 나누어 보내 도망자나 반란자를 적발하도록 했다, 대사마 육항이 죽었다. 연호를 고쳤을 때부터 이해까지 대규모의 역병이 계속 발생했다. 울림을 분할하여 계림군(桂林郡)을 만들었다.

천책 원년 (275) 오군에서 땅을 파 은을 얻었는데, 길이가 1척이고 넓이가 3푼이며 그 위에 연월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래서 대사면을 실시하고 연호를 바꾸었다.

천새(天塞) 원년(276년)

오군의 임평호는 한나라 말년 부터 잡초가 무성하여 통하지 않았는데 이제 다시 개통되었다고 보고했다. 노인들이 서로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호수가 막히면 천하가 혼란스러워지고, 개통되면 천하가 태평스럽다고 했다. 또 호숫가에서 돌상자를 얻었는데, 길이가 네 치이고 넓이가 두 치 남짓 되며 위에 황제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백색 작은 돌이 들어 있었다. 연호를 바꾸고 대사면을 실시하였다.

회계태수 차준(車浚), 상동 태수 장영(張詠)은 산민(算緡)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참수 되었고, 그 머리는 여러 군에 보내져 사람들에게 보였다.


강표전에서 이르길 : 차준車浚은 공직에 있으며 청렴하고 충직했는데, 군郡이 기근과 가뭄을 만나, 백성들에게 자재와 양식이 없어서, 상표하여 구휼을 구했다. 손호는 차준이 사사로운 은혜를 심고자 한다고 여겨, 사람을 파견해 효수하였다. 또한 상서 웅목熊睦이 손호의 몹시 잔학함을 보고, 조금 간하는 바가 있었으나, 손호는 사람을 보내 도환刀環으로 쳐 죽이게 하니, 시신에는 온전한 살가죽이 없었다.


가을 8월, 경하독 손해(孫楷)가 진으로 투항했다.

파양에서 역양 사이의 산 속에 돌 무늬가 글자를 이루고 있었는데 전부 스무 글자로, '초는 구주의 물가이고, 오는 구주의 수도이며, 양주 선비가 천자가 되어 네 대를 다스려야 태평스러운 시대가 시작된다.'라고 되어 있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江表傳曰:歷陽縣有石山臨水,高百丈,其三十丈所,有七穿駢羅,穿中色黃赤, 不與本體相似,俗相傳謂之石印。又云,石印封發,天下當太平。下有祠屋,巫祝言石印神有三郎。時歷陽長表上言石印發,皓遣使以太牢祭歷山。巫言,石印三郎 說「天下方太平」。使者作高梯,上看印文,詐以朱書石作二十字,還以啟皓。皓大喜曰:「吳當為九州作都、渚乎!從大皇帝逮孤四世矣,太平之主,非孤復 誰?」重遣使,以印綬拜三郎為王,又刻石立銘,褒贊靈德,以答休祥。


강표전에 이르길 : 역양현에 석산이 있어 물에 임해 있는데 높이가 100장이고 그 30장 쯤의 곳에 일곱 곳이 나란히 뚫려 있었는데 뚫린 가운데가 황적색을 띄어 본체와는 서로 닮지 않았으니 세속에서 더불어 전하며 석인(石印)이라 일컬었다. 또 말하길 석인이 봉인을 풀면 천하가 응당 태평해진다. 아래에는 사당이 있는데 무당이 석인의 신으로 삼랑(三郎)이 있다 하였다. 당시에 역양현의 장이 표를 올려 석인이 풀렸다고 하니 손호가 사자를 보내 역산에 태뢰의 제사를 지냈다. 무당이 말하길 석인의 삼랑이 이르길 「천하가 바야흐로 태평하다.」라 하였다. 사자는 긴 사다리를 만들어 올라가 석인의 문자를 보고 가짜로 붉은 글씨로 돌에 20글자를 쓰고는 돌아와 손호에게 보고하였다. 손호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길 「오나라가 응당 구주의 수도이자 물가가 되겠구나 ! 대황제로부터 고에 이르기까지 4세인데 태평시대의 군주가 고가 아니면 누구이겠느냐?」다시 사자를 보내 인수로써 삼랑을 왕에 임명하고 돌을 새기고 비명을 세워서 신령한 덕을 찬양함으로 아름다운 조짐에 보답하였다.



또 오흥의 양선산에 길이가 10여장 되는, 석실이라고 불리는 속이 텅빈 돌이 있었는데, 돌의 겉 표면에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사도를 겸임하는 동조와 태상을 겸임하는 주처를 양선현까지 파견하여, 국산으로 봉선했다. 다음해부터 연호를 바꾸고, 대사면을 시행한 것은 돌의 문자에 부응한 것이다.

천기 원년(277) 여름, 하구독 손신(孫慎)이 강하와 여남에서 진격하여 그곳의 백성들을 말살시키고, 약탈했다. 당초, 추자 출신 장숙張俶이 여러 차례 다른 사람을 모함하여 누차에 걸친 승진으로 사직중랑장이 되었고, 제후로 봉해졌으며,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이 해, 그의 죄가 들어나 사형에 처해졌다.


강표전에서 이르길 : 장숙張俶의 부친은, 회계會稽 산음현山陰縣의 심부름꾼이었는데, 장숙이 불량함을 알아, 상표하길 : “민약 장숙을 사직司直으로 기용하신다면, 죄가 있어도 연좌되지 않길 비옵니다.” 손호가 이를 허락했다. 장숙은 탄곡彈曲 20 명을 다스리며, 마음대로 불법을 들추어내고 살펴, 이에 애증관계인 이들은 서로 공격하며, 상호 헐뜯고 고발했다. 탄곡은 말을 받아들이고, 잡아서 감옥에 가뒀는데, 재판을 위해 송사를 들음이 도리에 어긋나, 판결은 뇌물로 이루어졌다. 인민들은 딱하고 곤란해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장숙은 사치스럽고 음란함을 싫어하지 않아, 첩 30여 명을 취했고, 무고한 이를 함부로 죽이다가, 여러 간악한 일들이 모두 드러나, 부자가 모두 거열車裂됐다.

2년 (278) 가을 7월, 성기(成紀), 선위(宣威) 등 11명의 왕을 세우고, 왕에게 3천명의 병사를 주고 대사면을 실시하였다.

3년 (279) 여름, 곽마(郭馬)가 모반했다. 곽마는 본래 합포태수 수윤(脩允) 수하의 사병 대장이다. 수윤은 계림태수로 전임되었지만, 질병으로 광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먼저 곽마를 보내 5백 명의 병사를 인솔하여, 군에 도착해서 이민족을 어루만지도록 했다. 수윤이 죽자. 병사들은 당연히 다른 곳으로 분배되어야만 했다. 곽마 등은 몇 대에 걸쳐 군대에서 오랜 정을 쌓았으므로, 이별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 손호는 이때 또 광주의 호구를 정확하게 조사하여, 그것에 따라 과세하려고 했다. 곽마는 이 때문에 사병 가운데 부장 하전(何典), 왕족(王族), 오술(吳述), 은흥(殷興) 등과 이 때문에 병사와 백성들을 불안하게 하고 동요시켜 병력을 합쳐 모아 광주독 우수(虞授)를 공격하여 죽었다. 곽마는 스스로 도독교, 광이주제군사, 안남장군이라고 칭했으며, 은흥은 광주자사가 되고 오술은 남해 태수가 되었다. 하전은 창오군을 공격했고, 왕족은 시흥군을 공격했다.


한진춘추漢晉春秋에서 이르길 : 이전에 오에서 예언을 말하던 이가 이르길 : “오의 패망 때, 병사들이 남쪽 변방에서 일어날 것이고, 오를 망하게 하는 자는 공손公孫이다.” 손호가 이를 듣고는, 문무직위에서부터 사병까지 성이 공손인 자는, 모두 광주廣州로 옮기고, 강江의 곁에는 머물게 하지 않았다. 곽마 郭馬의 반란을 듣고는, 크게 두려워하며 이르길 : “이는 하늘이 망하게 하는 것이구나.”

8월에 군사 장제(張悌)를 승상으로 삼고, 우저의 도독 하식(何植)을 사도로 임명하였다. 집금오 등순(滕循)을 사공으로 임명했지만 아직 배하지 않았을 때 진남장군,가절영광주목으로 직책을 바꾸어 임명하고, 병사 1만명을 인솔하여 동쪽 길로부터 곽마를 토벌하도록 했다.

등순이 시흥에서 왕족과 부딪혀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곽마는 남해태수 유략(劉略)을 살해하였으며, 광주자사 서기(徐旗)를 축출시켰다. 손호는 또 서릉독 도준(陶濬)을 파견하여 병사 7천명을 이끌고 서쪽 길로부터 진군하도록 하고, 교주목 도황에게는 그의 수하 및 합포나 울림 등 여러 군에서 병사들을 인솔하여 동쪽과 서쪽 군대가 함께 곽마를 공격하도록 명했다.

귀목채(鬼目菜)가 장인 황구(黃耇)의 집에서 자라 대추나무에 의지해 있었는데, 길이는 1장 남짓 되고, 줄기가 4촌이며, 두께는 3푼이나 되었다. 또 매채(買菜)가 장인 오평(吳平)의 집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높이가 4척 두께가 3푼이나 되어 마치 비파나무 모양과 같았으며, 위쪽 가지의 넓이는 1척 8촌이고, 아래쪽 줄기는 넓이는 5촌이나 되며, 양쪽으로 녹색잎이 자랐다. 동관의 관리는 그림에 근거하여 귀목채를 지초(芝草)라고 부르고, 매채를 평려초(平慮草)라고 불렀다. 그리고 황구를 시지랑에 오평을 평려군에 임명하였으며, 두 사람 모두에게 은으로 된 인과 청색 수를 주었다.

겨울, 진나라는 진동대장군 사마주(司馬伷)에게 도중으로 진군하도록 명령하고, 안동장군 왕혼(王渾) ,양주자사 주준(周浚)에게는 우저로 진군하도록 하였으며, 건위장군 왕융(王戎)에게는 무창으로, 평남장군 호분(胡奮)에게는 하구로, 진남장군 두예(杜預)에게는 강릉으로, 용양장군 왕준(王濬)과 광무장군 당빈(唐彬)에게는 장강을 건너 동쪽으로 내려가도록 하고, 태위 가충(賈充)을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정세를 살펴 가장 중대한 일을 처리하도록 해, 그를 군대 병력의 가장 핵심에 위치하도록 했다.

도준은 무창에 도착하여 북방의 군대가 대규모로 출동했다는 보고를 듣고 멈춰 주둔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당초, 손호는 신하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열 떄마다 모든 사람들을 잔뜩 취하지 않게 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는 황문랑 10명을 배치하여 특별히 그들에게는 술을 주지 않았으며, 곁에 온종일 서 있도록 하였는데, 관리들의 잘못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연회가 끝난 후, 그들은 각자 자신들이 발견한 관리들의 과실을 상주하였으며, 불만스러운 얼굴을 지은자, 망언을 하는 실수를 한 자로서 적발되지 않은자가 없었다. 큰 잘못을 저지른 자의 경우에는 즉시 엄벌에 처하고, 작은 잘못을 저지른 자는 반드시 그 죄를 시인하도록 했다. 후궁은 수천 명이나 되었으므로, 민간에서 새로 선발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또 궁안으로 물살이 센 물을 끌어들여 궁녀들 가운데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모두 죽여 그 물로 흘러가도록 했다. 어떤 때는 사람의 가죽을 벗겼고, 어떤 때는 사람의 눈을 뽑기도 했다.

잠혼(岑昏)은 음험하고 아첨을 잘 하였지만 총애를 받아 구경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는 부역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근심하고 고통을 받았다. 이 때문에 조정의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인심은 떨어졌고, 어떤 사람이든 간에 손호를 위해 힘을 다하는 자가 없었다. 아마도 사악한 일이 이미 극점에까지 쌓여 다시는 천명을 받을 수 없게 된 까닭일것이다.



주: 오가 평정된 후, 진의 시중(侍中) 유준(庾峻) 등이 손호의 시중 이인(李仁)에게 묻기를,


"듣건대 오주는 사람의 낮을 벗기고 사람의 발을 끊었다는데, 있었던 일이냐?"

이인이 말하길

"전해진 바가 잘못된 것이다. 군자는 낮은 곳에 머무는 걸 꺼리니, 천하의 악이 모두 그의 탓으로 돌려지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일일 것이고, 만약 진실로 그러한 일이 있었더라도, 또한 괴이하게 여길만한 것이 못된다. 옛날 당, 우에는 5형이 있었고, 삼대에는 7벽과 육형의 제도가 있었으나, 혹독하고 잔학하다고 하지 않는다. 손호는 일국의 주인이 되어, 살생의 권한을 장악하고, 죄인이 법을 범하면, 징벌을 내린 것이니, 어찌 죄가 많다 하겠는가! 무릇 요임금으로부터 주살을 당한 자라도 원망이 없을 수 없고, 걸왕으로부터 상을 받은 자라도 사모함이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이 인정이다."

다시 묻기를

"(사람들이) 말하길 귀명후(손호)는 사람들이 곁눈질하고 쳐다보는 걸 싫어하여, 그 눈을 파버렸다는데, 정말 있었던 일이냐?"

이인이 말하길

"또한 그런 일은 없었는데, 전한 자가 속였을 뿐이다. 곡례에 따르면 천자를 볼 때는 깃 아래에서부터 하며, 제후를 볼 때는 턱 아래에서부터 하며, 대부를 볼 때는 나란히 보며, 사(士)를 볼때는 얼굴을 마주하고, 5보의 내에서는 시선을 돌릴 수 있다 ; 윗 사람을 볼 때 나란히 하는 것은 건방진 것이고, 아랫사람을 볼 때 허리로부터 보는 것은 근심하는 것이고, 곁눈질 하여 보는 것은 사악한 것이다. 예에 따라 사람을 보는 것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몸가짐을 삼가야 하는 것이니, 하물며 임금의 경우겠는가! 임금을 볼 때 예법을 어그러뜨리며 보는 것은, 이는 예법에서 오만하다고 말하는 바다 ; 오만한 것은 즉 무례한 것이고, 무례한 것은 신하된 도리가 아니고, 신하된 도리가 아닌 것은 즉 죄를 범한 것이고, 죄를 범한 것은 즉 예상할 수 없는 함정에 빠뜨린 것이 아니다. 바르게 사용했다면, 있었더라도, 무슨 잘못이 되겠는가?"

유준 등이 이인이 답한 바를 모두 훌륭하다고 하였으나. 문장이 많아 모두 기재하지 못한다.

천기 4년(280) 봄, 중산왕 대왕 등 11명의 왕을 세우고, 대사면을 실시했다. 왕준과 당빈이 도착하는 곳이면 붕괴되고 와해되어 저항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두예는 강릉독 오연(伍延)의 목을 베고 왕혼은 승상 장제(悌)와 단양태수 심영(沈瑩)등의 목을 베었으며, 그들이 있는 곳마다 싸움에서 승리했다.


간보(干寶)의 진기(晉紀)에서 이르길: 오승상군사(吳丞相軍師) 장제(張悌), 호군(護軍) 손진(孫震), 단양태수(丹楊太守) 심영(沈瑩)은 3만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성양도위(成陽都) 장교(張喬)를 양하(楊荷)에서 포위하였는데 장교의 무리는 겨우 7천 명이어서 목책을 닫고 항복을 받아달라고 청하였다. 오의 부군사 제갈정(諸葛靚)이 이들을 다 도살하려고 하자 장제가 말하였다.


"강한 적이 앞에 있는데 작은 일을 먼저 해서는 마땅하지 않소. 또한 항복한 자들을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오."


제갈정이 말하였다.


"이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힘이 적어 대적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또한 거짓으로 항복하여서 우리를 늦추려고 하는 것이지 진정으로 항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마음의 동요를 없애기 위해 능히 전부를 파묻어 삼군의 기세를 일으켜야 합니다. 만약에 이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전진한다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


장제가 이 말을 좆지 않고 그들을 위무하며 전진하였다. 오 호군(護軍) 장한(張翰), 양주자사(揚州刺史) 주준(周浚)이 서로 진을 치고 마주보게 되었는데, 심영이 단양(丹楊) 지역의 정예병사 도순(刀楯) 5천 명을 인솔하고 이들을 청건병(青巾兵)이라 불렀다. 앞뒤로 여러번 견진(堅陳)을 함락시키고 이에 회남군(淮南軍)을 쫓아, 세 번 진나라 병사와 부딪쳤으나 꿈쩍도 하지 아니하였다. 심영이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니 그 무리들이 혼란에 빠졌고 설숭(薛勝), 장반(蔣班)이 그러한 혼란한 틈을 타니 오나라 병사들이 차례로 붕괴되어 장수들이 이를 중지시킬 수 없게 되었고 장교(張喬)가 뒤로부터 이들을 쳐서 오나라 군사를 판교(版橋)에서 대패시켰다. 장제, 손진, 심영이 붙잡혔다.


[[장제전]]으로 분리


수신기(搜神記)에서 이르길: 임해(臨海)군 송양(松陽)현 사람 유영(柳榮)이 장제(張悌)를 따라 양주(楊)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유영은 그만 병으로 배 안에서 죽어, 이틀이나 지나게 되었다. 군사들은 이미 언덕으로 올라가 버려, 누구 하나 그 시신을 매장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부르짓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누가 군사(장제)를 묶어 간다! 누가 군사를 묶어 간다!"


그 소리는 심히 격앙되어 있었으며, 유영은 다시 살아났다. 사람들이 그에게 묵자 유영은 이같이 설명하였다.


"내가 하늘에 올라 북두성(北斗) 문 아래에 이르자, 갑자기 어떤 사람이 장제를 묶어 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 가슴이 두근거려 나도 모르게 '무슨 일로 군사를 묶는가.'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문지기의 부하들이 제게 화를 내면서 꾸짖어 나를 되돌아가게 하더이다. 저는 너무 무섭고 떨려 입에서 그런 말들이 튀어나왔을 뿐입니다."


그날 장세는 전사하고 말았다. 유영은 진(晉) 원제(元帝) 때까지도 살아 있었다.

3월 9일, 궁전 안의 신임하는 수백 명이 머리를 조아리며 잠혼을 죽일 것을 손호에게 요청하였다. 손호는 황당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들의 요구에 따랐다.


간보 寶 의 진기 晉紀 에서 이르길 : 손호 孫皓 의 대궐 안에서 친근한 수백 명이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손호에게 이르길 :

 

송본 宋本 에선 謂를 請이라고 썼다.

 

“북쪽의 군이 나날이 가까워지나, 병사들은 칼을 들지 않으니, 폐하께선 장차 어찌하실 겁니까!” 손호가 이르길 : “무엇 때문인가?” 대답하길 : “잠혼岑昬 때문입니다.” 손호는 다만 “너희들 같으면, 응당 그 놈으로 백성에게 사죄하겠군.”이라고 말했을 뿐이나, 무리는 이를 틈타 “예!”라고 이르고, 마침내 나란히 일어나 잠혼을 잡았다. 손호가 끊임없이 계속하여 그치길 구했으나, 이미 그를 도륙했다.

 

호삼성胡三省이 이르길 : 독언 獨言 은, 그의 말이 이에 그쳤을 뿐임을 이른 것이다. 유 唯 는, 대답하다다. 낙역 駱驿 은, 계속 사람을 파견함이 끊이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11일, 도준이 무창에서 돌아왔다. 즉시 도준을 불러서 수군 상황에 대해서 질문했다. 도준이 이렇게 말했다.

"촉군의 배는 모두 작습니다. 지금 2만 명의 병사를 얻어 큰 배를 타고 싸운다면 자연히 그들을 격침시킬수 있습니다."

그래서 손호는 병사들을 모았고 도준에게는 부절과 부월을 주었다. 다음날, 응당 출발했어야 하는데 병사들이 모두 달아났다. 그러나 촉군(진나라 익주자사로 승진했던 왕준은 성도에서 양자강을 따라 내려왔음) 왕준은 강물의 흐름을 따라서 출발했고, 사마주와 왕혼은 모두 오나라 변방 근처까지 다다랐다. 손호는 광록훈 설영 중서령 호충등의 계책을 사용하여 왕준, 사마주, 왕혼에게 각각 사자를 파견하여 편지를 받들도록 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 과거 한나라 왕실이 천하를 통치할 능력을 상실하고 구주가 분열되었을때, 나의 조상들은 이 때를 빌려 강남을 차지하였으며, 그리고 산천을 분할하여 차지해 위나라와 떨어지게 되었소. 지금 대진은 천자가 일어나 은덕을 사해에 펼쳤소. 나는 어둡고 우매하여 구차하게 편안하려고 하여 천명을 아직 깨닫지 못했었소. 오늘에야 이르러서야 천자의 육군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수레는 원정길을 가득 메우고 멀리 장강가까지 나아가게 했소. 온 나라가 두려워하자 순식간에 모든 것이 안정되었소. 감히 천조의 넓은 도량과 빛나는 은덕에 기대 삼가 나의 관리 태상 장기 등을 파견하여 두르고 있던, 인수를 받들어 돌려보내고 머리를 숙여 귀순하여 명령을 청하겠소. 오직 신임을 얻어 받아들여져 백성들을 구제하기를 희망할 뿐이오. --


江表傳載皓將敗與舅何植書曰:「昔大皇帝以神武之略,奮三千之卒,割據江南, 席卷交、廣,開拓洪基,欲祚之萬世。至孤末德,嗣守成緒,不能懷集黎元,多為咎闕,以違天度。闇昧之變,反謂之祥,致使南蠻逆亂,征討未克。聞晉大眾,遠 來臨江,庶竭勞瘁,眾皆摧退,而張悌不反,喪軍過半。孤甚愧悵,于今無聊。得陶濬表云武昌以西,並復不守。不守者,非糧不足,非城不固,兵將背戰耳。兵之 背戰,豈怨兵邪?孤之罪也。天文縣變於上,士民憤嘆於下,觀此事勢,危如累卵,吳祚終訖,何其局哉!天匪亡吳,孤所招也。瞑目黃壤,當復何顏見四帝乎!公 其勖勉奇謨,飛筆以聞。」


皓又遺群臣書曰:「孤以不德,忝繼先軌。處位歷年,政教凶勃,遂令百姓久困塗炭,至使一朝歸命有道,社稷傾覆,宗廟無主,慚愧山 積,沒有餘罪。自惟空薄,過偷尊號,才瑣質穢,任重王公,故周易有折鼎之誡,詩人有彼其之譏。自居宮室。仍抱篤疾,計有不足,思慮失中,多所荒替。邊側小 人,因生酷虐,虐毒橫流,忠順被害。闇昧不覺,尋其壅蔽,孤負諸君,事已難圖,覆水不可收也。今大晉平治四海,勞心務於擢賢,誠是英俊展節之秋也。管仲極 讎,桓公用之,良、平去楚,入為漢臣,舍亂就理,非不忠也。莫以移朝改朔,用損厥志。嘉勖休尚,愛敬動靜。夫復何言,投筆而已!」


강표전에 손호가 장차 패할 때 삼촌 하식(何植)에게 보낸 편지를 실어 이르길 : 「옛날 대황제가 신무한 책략으로 3천명의 병졸로 떨쳐 일어나 강남에 할거하면서 교주와 광주를 석권하여 드넓은 기초를 개척하였는데 국조가 만세에 이르도록 하고자한 것이었소. 고의 부덕에 이르러 이루어진 왕업을 이어 지키면서 백성들을 품어 모이게 하지 못하고 많은 실수를 저질러 하늘의 뜻에 위배되고 말았소. 변고에 어두워 오히려 상서로운 징조라 말하고 남만의 반란을 불러왔소. 토벌이 성공하지도 못했는데 듣기로 진의 대중이 멀리와서 강에 임하여 무리가 피로하고 대중이 꺾여 퇴각하는데 장제가 반역하지 않고 잃은 군사가 절반이라 하오. 고는 심히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지금에 이르러 할 수 있는 것이 없소. 도준의 표를 얻어보니 말하길 무창 이서는 더불어 다시 수비하지 못한다하오. 수비하지 못하는 것은 식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성이 견고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병사와 장군들이 전투를 거부하기 때문이오. 병사들이 전투를 거부하는 것으로 어찌 병사들을 원망하겠소? 고의 잘못이오. 천문은 변화를 위에 걸어놨고 사민은 분노의 탄식을 아래에서 하니 일의 기세를 보건대 위태롭기가 계란을 쌓아놓은 거 같으니 오나라의 국조가 장차 끝나는 게 어찌 형세가 이렇게 되었는가! 하늘이 오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고가 불러온 것이오. 황토에 눈을 감으면 또 응당 무슨 얼굴로 4명의 황제를 뵈어야 한단 말이오! 공은 기이한 계책을 힘써 생각해내 나는 붓으로 써서 들어볼 수 있도록 하시오.」    


손호는 또한 군신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르길 「고의 부덕으로 부끄럽게 선왕의 궤철을 이었는데 자리에 있는 여러 해 동안 정교가 흉패하여 마침내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속에서 궁핍하도록 만들었으니 하루아침에 도가 있는 군주에게 귀순하고 사직을 경복시켰으며 종묘에 주인이 없게 하였으니 부끄러운 마음이 산처럼 쌓여 남은 죄가 없을 정도요. 스스로 부덕한 사람으로 지나치게 높은 자리를 구차하게 얻었으며 하찮은 재주로 무거운 왕공을 자임했으니 그러므로 주역에서 솥의 다리가 잘리는 경계가 있고 시인에게 옷이 알맞지 않다는 기롱이 있었던 것이오. 스스로 궁실에 거하면서 무거운 질병을 끌어안고 계책이 부족하며 생각하는 바가 중도를 벗어나 많은 것이 황당하고 참람하였소. 주변의 소인들로 인해 참혹함이 생기고 포학한 독이 횡류하니 충성스럽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해를 입었소. 어두워서 깨우치지 못하고 그 막힌 바를 찾아보니 고가 그대들을 저버렸고 일이 이미 도모하기 어려워 물을 엎은 다음 다시는 수습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되었소. 지금 대진이 사해를 평정하고 현명한 사람을 채용하는데 힘쓰니 진실로 영웅호걸이 펼칠 수 있는 때요. 관중은 원수를 심하게 대했지만 환공은 등용했으며 장량과 진평은 초나라를 떠나 한나라의 신하로 들어갔소. 어지러운 것을 버리고 다스리는 것에 나아가는 것은 불충이 아니오. 조정을 옮기고 정삭을 바꾸는 것으로 뜻을 손상시키지 마시오. 아름다운 노력과 의지로 행동을 조심스럽게 결정하시기 바라오. 무릇 다시 무슨 말을 하겠소. 붓을 던지는 것으로 마치오!」


15일, 왕준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손호의 투항을 접수하고 손호의 결박을 풀어주고 관을 불태우고 나서 초청하여 만났다.


진양추(晉陽秋)에서 이르길: 왕준(王濬)이 거두어들인 도적(圖籍)이, 4개 주(州), 43개 군(郡), 313현(縣), 52만 3천 호(戶), 관리(吏) 3만 2천, 병(兵) 23만, 남녀구(男女口) 230만으로 미곡(米穀) 2백팔십만 곡(斛) 주선(舟船) 오천여 소(艘 척) 후궁(後宮) 오천여명이었다.


사마주(司馬伷)는 손호가 자신에게 인수를 주었기 때문에 사자를 파견해 손호를 돌려보냈다. 손호는 가족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옮겨 태강 원년 5월 1일에 수도까지 왔다. 4월 4일 ,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 손호가 달아날 길이 없자 귀순하여 투항했다. 이전의 조서에, 그가 항복한다면 장차 사형에 처하지 않고 대우하기로 했는데, 현재 손호가 장차 도착하려 하니 나의 마음에 연민의 정이 있다. 그에게 귀명후의 칭호를 내리겠다. 그에게 의복과 수레, 밭 30경을 주고 해마다 곡물 5천석, 돈 50만전, 비단 5백필, 솜 5백근을 주도록 해라.

손호의 태자 손근을 중랑으로 임명하고 아들 중에서 왕으로 봉해진 자는 낭중으로 임명했다. [주]

[주] 수신기: 오나라가 처음 창건되었을 때 사람들의 믿음이 굳건하지 않아 변경에 진을 치고 수비하는 장수들은 모두 그 처와 자식을 인질로 삼았으니 그 이름을 보질이라 했다. 아이들은 나이가 어려 서로 비슷한 무리들끼리 함께 장난치며 놀러 다녔는데 하루에 십 수 명이 있었다.

영안 2년 3월, 이상한 아이 한 명이 있었는데 키는 4척 남짓이고 나이는 예닐곱 정도로 푸른 옷을 입었는데 놀고 있는 아이들의 무리에 끼어드니 여러 아이들 중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다. 놀고 있던 아이들이 모두 물었다

"너는 누구네 집의 어린 아이기에 오늘 돌연 왔느냐?"

이상한 아이가 답했다

"너희들이 놀이하는 모습을 보니 재밌어 보여 오게 되었다"

아이들이 그를 자세히 보고 살피니 눈에서 빛이 쏘아져 나와 바깥으로 번개처럼 안광이 쏘아져 나오니 여러 아이들이 두려워하여 거듭 그 아이의 정체를 물었다. 이에 그 아이가 대답했다

"너희들은 내가 싫으냐?

나는 사람이 아니다. 형혹성(화성)이다. 내가 장차 있을 일을 너희들에게 알려주마. 3공이 죽고 사마씨를 따를 것이다"

여러 아이들이 크게 겁냈고 어떤 아이는 어른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말하니 어른들이 달려와 그를 보았다 아이가 말했다

"너희들을 두고 가마!"

그러면서 몸을 우뚝 세워 뛰어오르니 곧 몸의 모양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얼굴을 들고 그를 쳐다보았더니 그 모습이 마치 한필의 비단을 끌고 하늘로 오르는 것 같았다. 그곳에 온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표표히 점차 높이 올라가다가 흔들리다가 사라졌다. 이 때 오나라의 정치는 엄하고 급박하여 감히 이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5년 후 촉이 망했고 6년 후 진이 흥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오나라도 멸망하고 사마씨를 따랐다

5년(284) 에 손호는 낙양에서 죽었다.


오록(吳錄)에서 이르길: 손호는 4년 12월에 죽었으며 당시 나이는 42세로 하남현(河南縣) 경계에 장사지냈다.


평한다. 손량은 나이가 어렸지만 현명하게 보좌해줄 신하가 없었으므로, 그가 황제의 지위를 대신하여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것은 필연적인 추세이다. 손휴는 옛날에 아끼고 익숙한 은혜를 베푼 복양흥과 장포를 임용했기에, 나아가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여 새로운 정치(改絃易張)를 할 수 없었다.[※-1] 비록 착실한 뜻을 지니고 학문을 좋아했을지라도 어지러운 나라를 구제하는데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또 이미 폐출된 손량에게 주어진 수명대로 살지 못하게 한 것은, 우애가 의로움에서 얄팍했다.[※-2]


손호는 부당한 형벌을 남용하였으므로, 죽거나 쫓겨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로써 아래 사람마다 두려워하여 모두 하루하루 생명을 보존하기를 원하고, 아침에 저녁의 일을 헤아리지 못했다. 형혹熒惑(화성)·무축巫祝이 교대로 상서로운 징조를 나타낸 것은 급박함이 이르렀다고 여긴다. 옛날에 순舜·우禹는 몸소 농사를 짓고, 지극히 신성한 덕행을 갖추었어도 오히려 신하들에게 맹세하여, ‘내가 너의 보필을 어겼을 때는 누구든 충언하면 절할 것이다.’고 하면서, 늘 자신이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했다.


하물며 손호는 사납고 미련하며 잔혹한 법령을 마음대로 시행하여, 충성스럽게 간언하는 신하를 주살하고 참언하고 아첨하는 자는 승진시켰으며, 그 백성들을 학대하여 부리고, 음란하고 사치스러움이 극에 달했으니, 마땅히 허리와 머리를 분리시켜 백성들에게 사죄시켜야 했다. 사형시키지 않는다는 조서를 내리고, 귀명후의 은총을 더해주었으니, 어찌 대사면(曠蕩)한 은혜를 지나치게 두텁게 베푼 은택이 아니겠는가!

 

[※-1] ‘개현역장改絃易張’은 말 그대로 ‘현악기의 줄을 바꾸고 팽팽하게 바꾼다.’라는 뜻이다. 사람과 정치로 비유하면, 새로운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여, 타성에 젖은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새로운 정치를 한다는 뜻이다.


손성이 말했다. 무릇 고대부터 군주를 세웠으니, 백성을 맡아 다스림을 바탕으로 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늘과 땅의 협력을 바라고, 만물에 은혜를 비춰야 한다. 만약 음란 잔학하여 이러한 것을 게을리 하고 뭇 생명에 혹독하게 해를 입히면, 하늘이 그를 죽이고 그 복을 끊어버리며, 그 남면南面하는 존엄을 빼앗고 그 독부獨夫(인심을 잃은 자)에게 죽음을 더한다. 이런 까닭으로 은 탕왕, 주 무왕은 월鉞[황월이라 하여 천자만 사용하는 것으로, 천자를 가리킨다.]에 저항했지만, 순응하지 않는 자를 나무라는 것에 어긋나지 않았다. 한 고조는 검을 떨쳤지만, 절개의 뜻을 잃은 적이 없었다. 무슨 이유인가? 진실로 천하에서 잔혹한 원수는, 사람과 신이 물리치는 까닭이다.

하물며 손호의 죄는 떠돌이 도적(逋寇)같고 잔학함은 신辛(주왕), 계癸(걸왕)를 넘어섰으니, 흰 깃발을 걸어 효수梟首해야 했다. 그래도 오히려 원혼冤魂(억울한 귀신)들에게 사죄하기에 부족하고, 진흙탕에서 땅 귀신이 되어도 포학한 발자취를 기념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나 우대하여 귀명후의 이름을 드러나게 하고 은총을 베풀어 물건을 거듭 더해주었으니, 어찌 하늘을 받들어 천벌을 행하고 죄 지은 자를 쳐서 억울하게 죽은 백성을 조상弔喪하는 뜻이겠는가? 이로써 참역僭逆한 자를 징벌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 사납고 혹독한 자에 대한 계율이 없게 되었다.


《시경》에서, ‘저기 모함하는 자들을 잡아다, 호랑이와 승냥이에게 던져주라.’고 했다. 모함하는 자도 오히려 그럴진대, 하물며 참람하고 잔학한 자이겠는가? 게다가 신기神旗(천자의 군대)가 번개처럼 휩쓸고 잘못된 나라(僞窟)에 병력이 다다르자, 이치가 막히고 세력이 급박해진 다음에 목숨을 청했으니, 그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드러내야 했다. 삼구三驅[※]의 뜻이 또 막히어서, 천자의 지극한 권도權道로 또한 잡는 게 없었구나.

 

[※] ‘삼구三驅’란 사냥하는 법도에서, 세 번째, 혹은 세 방면에서의 짐승몰이를 말한다. 짐승몰이들 하듯, 손호의 죄를 몰아붙였어야 했다는 뜻이다.


육기(陸機)의 변망론(辨亡論): [[변망론(처사군님) /변망론(구다라님)]]으로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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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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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94
등록일 :
2013.04.30
09:46:56 (*.52.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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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4.30
23:16:24
(*.52.89.87)

맹종읍죽의 내용을 대충 넣어 파란색 처리했습니다. 혹시 온전한 번역이 있다면 제보바랍니다.

코렐솔라

2013.07.16
21:57:11
(*.52.89.88)
배주 추가. 역시 관심없는 오나라+ 관심없는 후반부니 번역이 거의 없군요.

코렐솔라

2013.08.13
16:19:44
(*.0.203.183)
유준, 이인 관련 문답은 번역 되어있는데도 위치가 이상한 곳으로 가 있고 번역 안 된 원문까지 있길래 원문을 지우고 본위치로 이동시켰습니다.

코렐솔라

2013.08.16
19:38:02
(*.52.91.73)
진양추 기록 추가. 장제 옆에서 죽다 사라안나 기록도 특이하지만 후궁 5천명이면 생각보다 적군요

코렐솔라

2013.08.17
12:51:52
(*.52.91.73)
장제, 제갈정, 심영 기록 추가

코렐솔라

2013.09.09
22:20:35
(*.166.245.166)
변망론은 처사군님의 번역 http://blog.naver.com/kyspert/110175763865

코렐솔라

2013.09.10
10:56:44
(*.0.203.197)
변망론의 손책 평은 처사군님의 번역 http://blog.naver.com/kyspert/110175787075 변망론 번역이 완료되면 따로 분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코렐솔라

2013.10.10
22:44:36
(*.166.245.168)
맨 마지막 손성의 평은 구다라님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62757

코렐솔라

2013.10.11
16:00:47
(*.0.203.146)
진수의 평도 구다라님 번역으로 바꿉니다.

dragonrz

2013.10.24
11:36:55
(*.67.125.192)
사평 부분에 : "또 이미 폐출된 손량에게 죽지 못하게 시켜야 했는데, 우애가 의로움에서 얄팍했다. " 이 부분에서"또한 이미 폐해진 손량으로 하여금 천수를 누리지 못하게 하였으니"가 맞을 듯 합니다. "형혹熒惑(화성), 무축巫祝이 교대로 상서로운 징조를 나타낸 것은 급박한 정세를 나타낸 것이다." 보건대 급박한 정세를 나타낸 게 아니고 以爲至急 에서 以爲는 ~로 여기다, ~로 삼다의 의미이므로 지극히 급한 일로 여겼다고 해석해야 됩니다. 惑拜昌言 은 혹' 선량한 말을 들으면 절을 하여' 항상 미치지 못할것 처럼 하였다는 뜻인데 앞 부분의 해석이 누락된것 같습니다.

코렐솔라

2013.10.24
12:04:15
(*.104.143.222)
감사합니다. 이 사이트를 만든 이유 중에 하나가 번역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인데 dragonrz님 덕분에 이런 부분으로 논의가 많이 되는 것 같아 기쁩니다. 해당 번역은 구다라님이 제공해주신 것으로 제가 원래 있던 번역을 고치고 넣은 것이기에 일단 문의를 드리고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구다라

2013.10.29
21:41:55
(*.155.79.204)
dragonz님 의견대로 하죠~~
저야 배우는 처지이고
원래 <노자>에서도 '부득기사'는 '천수를 누리지 못한 것'이니 그렇게 수정했으면 합니다.
나머지도 문장을 잘 다듬어서 수정해 주세요

코렐솔라

2013.10.30
14:03:01
(*.0.203.61)
중간에 장제의 발언 중 "위나라 백성들이 조조를 따르는 것은 그 위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조조가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은 아니다" 가 있는데 한 번 쑤셔넣어 봐야겠군요;;;

코렐솔라

2013.10.30
15:11:53
(*.104.28.55)
「不然。曹操雖功蓋中夏,威震四海,崇詐杖術,征伐無已,民畏其威,而不懷其德也。丕、叡承之,係以慘虐,內興宮室,外懼雄豪,東西馳驅,無 歲獲安,彼之失民,為日久矣。司馬懿父子,自握其柄,累有大功,除其煩苛而布其平惠,為之謀主而救其疾,民心歸之,亦已久矣。故淮南三叛而腹心不擾,曹髦 之死,四方不動,摧堅敵如折枯,蕩異同如反掌,任賢使能,各盡其心,非智勇兼人,孰能如之?其威武張矣,本根固矣,群情服矣,姦計立矣。今蜀閹宦專朝,國 無政令,而玩戎黷武,民勞卒弊,競於外利,不脩守備。彼彊弱不同,智算亦勝,因危而伐,殆其克乎!若其不克,不過無功,終無退北之憂,覆軍之慮也,何為不 可哉?昔楚劍利而秦昭懼,孟明用而晉人憂,彼之得志,故我之大患也。」

끼우맞추면 걍 민폐에 불과할 것 같아서 포기

코렐솔라

2013.12.05
15:51:04
(*.166.245.165)
강표전의 처음에 명군이라 불린 손호는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0887666

코렐솔라

2013.12.05
18:09:38
(*.52.91.73)
손호의 만욱, 유평 독살시도 http://blog.naver.com/kyspert/110180906375 , 이상한 말들 믿다가 눈 만나서 삽질한 강표전 내용은 http://blog.naver.com/kyspert/110180906322 도굴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kyspert/110180906283 모두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감사합니다.

코렐솔라

2013.12.06
15:32:47
(*.52.91.73)
손호가 말하기도 전에 잠혼을 죽인 것은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0960120

코렐솔라

2014.01.31
02:55:32
(*.52.91.73)
오흥군을 만들 때 손호의 조서는 처사군님 자료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4345475

강표전 두 번 말하는 손호와 오록의 비웃음 당하는 장제도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415812

기척의 얘기와 장엄의 얘기는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455726,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455709,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455691

공손씨 이주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552807 장숙의 부친 얘기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552771 차준 얘기는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552727

코렐솔라

2016.05.20
13:48:28
(*.196.74.143)
한문이 병용된 주석은 dragonrz님의 번역(http://rexhistoria.net/151729)입니다. 해당하는 주석은 진문왕이 손호에게 보내는 편지, 기척과 홍구의 얘기. 양직, 모경의 얘기, 맹인의 얘기, 하정의 얘기, 소주의 얘기, 삼랑이라는 신에 대한 얘기, 망할 때 하식에게 보낸 편지와 다른 장군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코렐솔라

2016.05.21
01:26:08
(*.196.74.143)
유준 수칙이 모경과 싸웠다가 패했다로 고쳤고 노역을 간 사람을 곽탄으로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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