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요(劉繇)는 자가 정례正體이고 동래東萊군 모평牟平현 사람이다 제효왕齊孝王의 작은 아들이 모평후로 봉해졌고, 그 자손들이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유요의 백부 유총劉寵은 한나라 태위太衛였다.


[주 : 『속한서(續漢書)』에 이르길: 유요의 조부는 유본(劉本)으로 스승에게 경전을 수업받고 여러 책을 널리 배워 통유(通儒)라 불렸다. 현량 방정으로 천거되어, 선현(船縣)의 현장(縣長)이 되었는데, 관직에 있다 죽었다.

유총의 자는 조영(祖榮)으로 부업(父業)을 이어받아, 경전에 밝고 행실을 닦아 효렴으로 천거되어, 광록대부(光祿大夫)로써 사방을 다니며 두루 감찰하였으며, 동평릉(東平陵)의 현령에 제수되었다. (현령으로) 일을 수년 동안 보았는데, 모친의 병 때문에 관직을 버리자, 백성들과 사민(士民)들이 수레를 잡고 바퀴를 막으며 도로에 가득 모이니, 수레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이에 멈추고, 가벼운 복장으로 몰래 숨어 돌아가서 모친을 공양했다. 후에 대장군부(大將軍府)에 불러졌고, 점차 승진해 회계(會稽)태수가 되었는데, 자신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니, 군중(郡中)이 크게 다스려졌다. 불려 들여가 장작대장(將作大匠)이 되었다. 산음(山陰=원래 회계군의 치소(治所)입니다)의 현민들 중 치소에서 수십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약사(若邪) 속의 산과 계곡 사이에 있는 자들이 있었는데, 대여섯명 늙은이 나이가 모두 칠팔십이었으나, 유총이 옮겨간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와서는 유총을 같이 전송하는데, 사람들이 1백전을 가져왔다. 유총이 이를 보고는 힘들여 와서는


“부로(父老)들께서 어찌 힘들게도 먼 곳에서 오십닙까!”


라 하니, 모두가 대답하길


“산곡에 사는 비루한 늙은이들이라, 생전에 아직 군현에 와 본적이 없습니다. 예전에 관리들이 징발하고 착취함이 없어지지 않아, 민간에서는 혹 밤에도 개 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마침내는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명부(名府)께서 (와서) 수레에 내리신 이후로는 개도 밤에 짖지 않고, 관리들이 민가에 오는 일이 드무니, 나이가 늙어서야 바로 성화(聖化)를 만나게 되었는데, 지금 가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우리들이 와서 전송하는 것입니다.”


라 했다. 유총이 사례하고, 그들 중에서 큰 동전 하나만 골라 받으니, 그래서 회계에서는 유총을 일전태수(一錢太守)라 불렀다. 그 청렴함이 이와 같았다.

유총은 전후로 두 번의 군수를 역임하고, 8번 구경(九卿)의 지위에 있었고, 4번 삼사(三事=삼공(三公)에 올랐다. 집에는 재물을 가지지 않았고, 중요한 보물이 없었으며, 항상 보잘것 없는 음식을 없고, 의복은 박하였으며, 수레는 해지고 말은 여위었으니, 호칭을 구루(窶陋)라 불렸다. 세 번이나 재상의 지위를 버리고, 번번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경사를 왕래할 때면 항상 길에서 내려와 참승(驂乘)을 풀고 지나갔지만, 사람들은 그가 누군인지 몰라봤다. 유총이 일찍이 정(亭)에서 쉬려고 했는데, 그 정의 관리가 그를 제지하며 말하길


“역참을 정돈한 것은 유공을 기다리느라 그랬으니, 여기서 쉴 수 없소.”


라 했다. 유총이 이 때문에 그냥 지나갔다. 그의 청렴함과 검소함이 모두 이같은 것이었다. 노환으로 집에서 죽었다.

유요의 형 유대는 자가 공산이고, 시중과 연주자사를 역임했다.

[주 : 『속한서』에 이르길: 유요의 부친은 유여(劉輿)인데, 유방(劉方)이라고도 하며, 산양(山陽)태수이다. 유대와 유요는 모두 영특한 재주가 있었다. 『영웅기』에는 유대는 효제(孝悌)하고 인서(仁恕)하여, 자신을 비워 남을 받아 준다고 칭송했다.

유요가 19세 일때, 부친 유위劉韙가 도저들에게 붙잡혀 인질이 되었는데, 유요가 도적들에게서 아버지를 구하여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 그는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고, 낭중郎中이 되었으며 하읍현의 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군수가 그가 조정 중신의 친척이라는 점 때문에 의탁하려고 하자 곧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주의 관소에서는 그를 불러 제남을 다스리도록 했다. 제남의 상은 중상시의 아들이었는데, 뇌물을 받고 법에 따르지 않았다. 유요는 상주하여 그를 파면시켰다. 평원의 도구홍이 유요를 천거하여 무재로 추천하려고 했다.

자사가 말했다.

“작년에는 유공산을 추천하였는데, 어찌하여 또 유정례를 추천합니까?”

도구홍이 대답했다.

“만일 당신이 앞서 유공산을 임명했고, 뒤에 유정례를 발탁한다면, 이른바 두 마리 용을 매고 먼 길을 가는 것이며, 기린을 부려 천 리를 가는것인데 또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

마침 이 무렵에 조정에서는 유요를 사공연으로 초빙하고 또 시어사를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가 회포에서 난을 피하고 있을때, 양주자사로 임명한다는 조서가 내려왔다.  그 당시 원술이 회남에 있었다. 유요는 두렵고 꺼려졌으므로 감히 양주로 가지 못했다. 유요가 남쪽으로 장강을 건너려고 하자 오경과 손분이 그를 영접하여 곡아에 있게 했다. 원술은 황제의 칭호를 참칭하려고 기도하면서 여러 군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유요는 번능과 장영을 파견해 장강가에서 주둔하며 원술에게 대항하도록 하고 오경과 손분은 원술로부터 관직을 받았기 때문에 강제 쫓아냈다.

그리고 원술은 곧 자신을 양주자사로 임명하고, 오경 손분과 힘을 합쳐 장영과 번능등을 공격했지만, 1년이 지나도 승리하지 못했다. 한의 조정은 유요에게 양주목, 진문장군을 더하여 임명했으며, 병력을 수만 명 주었다. 손책은 장강을 동쪽으로 건너 장영과 번능등을 격파시켰다. 유요는 단도로 달아났다가

[주 : 원굉(袁宏)의 『한기(漢紀)』에 이르길: 유요가 장차 회계로 달아나려 할때, 허자장(許子將=허소(許劭))이


“회계는 부유하고 실하여 손책이 탐내는 곳이며, 궁박하게 바닷가에 치우쳐 있으니 가서는 안됩니다. 예장보다 못하니, 예장은 북으론 예양(豫壤)과 연결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형주와 접해 있습니다. 만약 이민(吏民)들을 거두어 합치고, 사신을 보내 공물을 헌상하여 조연주(曹兗州=조조)와는 서로 알리시면, 비록 원공로(袁公路)와는 떨어져 틈이 있게 지만, 그 사람됨이 승냥이같아서,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 족하께선 왕명을 받으셨으니, 맹덕(孟德=조조)와 경승(景升=유표)이 반드시 서로 구원해줄 것입니다”


라 하니, 유요가 이 말을 따랐다.

결국에는 장강 남쪽으로 거슬러올라가 예장을 지키려는 생각으로 팽택에 주둔했다. 착융窄融

[주 : 착(窄)음은 장력(壯力)의 반절음]

이 먼저 도착하여 태수 주호를 살해하고

[주 : 『헌제춘추(獻帝春秋)』에 이르길: 이 해, 유요는 팽택에 주둔하고, 한편 착융에게 주호를 도와 유표가 등용한 태수 제갈현(諸葛玄)을 토벌하게 했다. 허자장이 유요에게 이르길 “착융은 군대를 내면서 명의(名義)를 돌아보지 않는 자입니다. 주문명(朱文明)은 성실한 이를 추천해 남을 잘 믿으니, 마땅히 몰래 이를 방어하도록 해야 합니다”라 했다. 착융이 도착하자 과연 사기로 주호를 죽이고, 군의 일을 대신 통솔했다.

성으로 진입하여 군의 관소를 점거하고 있었다. 유요는 군대를 진군시켜 착융을 토벌하려다가 격파당했지만, 다시 돌아와서 속현을 규합하여 착융을 쳐서 격파했다. 착융은 패하여 산속으로 달아났지만,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유요는 오래지 않아 질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42세였다.

착융은 단양사람이다. 당초 병사 수백명을 모아 서주목 도겸에게 의탁했었다. 도겸은 그에게 광릉과 팽성의 물자 운송에 관한 일을 감독하도록 했다. 그는 끝내 방종된 행동을 하고 마음대로 사람들을 죽이는가 하면 세 군의 위탁을 받은 수송물자를 쉽게 절취하여 자기 것으로 했다. 그런 연후에는 거대한 불사를 만들고 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그 몸을 황긍으로 칠했으며, 비단옷을 입혔다. 아홉 겹의 동으로 만든 쟁반을 늘어뜨리고 그 아래에 몇 층 누각과 각도(이층으로 된 회랑)를 만들어 3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사람들은 모두 불경을 외우는 것을 의무로 삼고, 그 군대 및 주위 군의 사람으로 불교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불경을 듣고 도를 받아들이도록 했으며, 또 기타 노역을 면제시켜줌으로써 사람들을 끌여들였다. 이로부터 먼 곳과 가까운 곳, 앞과 뒤에서 온 자가 5천여 가구나 되었다. 항상 욕불(석가가 탄생한 4월 8일에 석가의 몸에 물을 뿌리는 행사)의식을 할 때마다, 술과 밥을 많이 차려 놓았으며, 길가에 펼쳐진 자리가 수십리나 되었다. 백성들은 와서 구경하고 음식을 먹었는데 그 수는 1만 명이나 되었으며, 막대한 비용巨億이 들었다.

조조가 도겸을 공격하여 서주 땅이 혼란스러워 지자, 착융은 남녀 1만 여명, 말 3천 필을 끌고, 광릉으로 달아났다. 광릉태수 조욱은 빈객을 대하는 예절로서 그를 대우했다. 이보다 앞서, 팽성의 상 설례가 도겸의 압박을 받아 말릉에 주둔하고 있었다. 착융은 광릉에 인구가 많음을 탐하여 주흥을 틈타서 조욱을 살해하고 병사를 풀어 대약탈을 한 연후에 가득 싣고 떠났었다. 도중에 설례를 죽이고 그 후에 주호를 죽였다.

이후에 손책은 서쪽으로 강하를 토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예장을 지나면서 유요의 시신을 거두어 운반해 주었으며 유요의 가족들을 극진히 보살폈다. 왕랑은 손책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정례가 이전에 막 주로 부임하려고 했을 무렵,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대의 가문에서 그를 위해 앞뒤로 달아나게 한 것에 의지하여 장강을 건너 다스릴 곳을 세울 수 있었으며 거처할 곳이 정해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경계를 뛰어넘는 예우는 맺은 우정을 십분 느끼게 하며, 우정에는 시작과 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후에 원씨와 원수가 되어 당신들의 관계는 조금씩 소원해져 갔습니다. 다시 당신이 원씨와 동맹을 맺으면서 당신들은 원수지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의 본심을 살펴보면 사실 원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정세가 안정된 이후에는 항상 다시 화목을 실현하고 또 과거의 긴밀했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를 떠났습니다. 그의 신실된 마음이 겉으로 분명히 나타나지 않은 채 질병으로 총총히 세상을 떠났으니, 슬프고 한스럽습니다! 두터움으로써 엶음을 대하고 덕으로써 원수를 갚아 유골을 거두고 죽은 자를 애도하고 산 자를 연민하여  과거의 의심을버리고 성년이 되지 않은 고아를 보호할 줄 아는 것입니다. 진실로 은정이 매우 깊고, 아름다운 이름이 두터운 것입니다. 옛날 노나라 사람은 제나라에 대한 원망이 있었지만, 제나라의 군주가 죽었을때, 상기를 페지시키지 않았습니다.

<<춘추>>에서는 노나라의 태도를 칭찬하여 “예의를 깨달았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훌륭한 사관을 마땅히 귀감으로 하여 적어야 되는 것이고, 향교에서 칭찬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유정례의 장자는 지조가 있으니, 반드시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대는 위엄을 크게 떨치고 형법을 시행하며, 아울러 은혜를 베풀어서 또 훌륭함을 나타내지 않겠습니까!

유요의 맏아들 유기(劉基)는 자가 경여(敬輿)이고, 14세 때 유요의 상을 지키며 예절을 다하고 유요의 옛날 관리들이 음식물을 보내왔지만 모두 받지 않았다.

[주 : 『오서(吳書)』에 이르길: 유기가 다난(多難)함을 만나, 어린 몸으로 곤경과 고초를 겪었고, 숨어 살고 도리를 몸소 살피지만, 이를 슬픔으로 여기지 않았다. 여러 동생들과 함께 살며, 항상 밤에 자고 일찍 일어나니, 처첩들도 그의 얼굴을 보는게 드물었다. 여러 동생들이 존경하여, 그를 아버지처럼 섬겼다. 망령되게 교류하지 않으니, 문중에 잡다한 빈객이 없었다.

그의 자태와 용모는 아름다웠다. 손권은 그를 아끼고 존경했다. 손권이 표기장군으로 임명되었을 때에, 그를 불러 동조연으로 삼았으며, 보의교위,건층중랑장을 제수했다. 손권이 오왕이 되었을 때는 유기는 대농으로 승진시켰다. 손권이 일찍이 연회를 열었을 때 기도위 우번이 술에 취하여 손권을 범하는 행동을 했다. 손권은 우번을 죽이려고 했으며, 노여워 하는 정도가 상당했는데 유기의 간곡한 간언으로 말미암아 우번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손권은 일찍이 한여름에 배 위에서 연회를 베푼 적이 있었다. 배안의 누각 위에서 뇌우를 만나게 되었는데, 손권은 우산으로 자신을 가리고, 또 유기에게도 몸을 가리도록 했지만 그 밖의 이런 대우를 받을 수가 없었다. 손권이 유기를 대우함은 이와 같았다. 이후에 유기를 낭중령으로 바꿔 임명했다.

손권이 제위에 즉위하자 유기를 광롱훈으로 바꿔 임명하고 상서의 사무를 나누어 처리하도록 했다. 그는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손권은 아들 손패를 위해 유기의 딸을 맞이하고, 집 한 채를 하사하였으며, 사계절마다 특별히 내리는 것을 전종이나 장소와 같게 했다. 유기의 두 동생 유삭(劉鑠)과 유상(劉尙)은 모두 기도위로 임명되었다. 


유기의 아들은 유향() 으로 관직은 월기교위(越騎校尉)에 이르렀다.


오서(吳書)에서 이르길:유향(享)의 자는 원복(元復)으로,상서(尚書)를 지냈고、오군태수(吳郡太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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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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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30
09:49:39 (*.52.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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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6
17:13:29
(*.0.203.140)
헐, 총검토하기 잘했네요. 맨 마지막에 子享,官至越騎校尉 이 부분이 빠져있었습니다.

코렐솔라

2013.07.16
17:23:30
(*.0.203.140)
후후 ,맨 마지막 오서는 제가 번역할 수 있는 내용인듯. 쓸데없이 뿌듯하다. 제길.

코렐솔라

2018.10.17
21:29:34
(*.74.126.228)
작융으로 되있는 2개 착융으로 수정. 사실 본전 귀찮아서 확인 안 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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