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고원님의 史랑방 


태사자(太史慈)는 자가 자의(子義)이고 동래군 황현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군의 주조사(奏曹史)로 봉직했다.
 
마침 군(郡) 과 주(州) 사이에 분쟁이 생겨 시시비비가 가려지지 않았으므로 먼저 듣게 되는 쪽의 의견이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이었다. 그때 주(州)의 공문이 이미 출발하였고 군수는 나중에야 이를 두려워하여 사자로 보낼 이를 찾았다. 당시에 태사자가 21세(186年)였는데 사자로 선발되어 밤낮을 달려 낙양에 도착했는데 공거(公車: 한나라 때 정부 공문서나 상소문을 처리하던 부서)의 문에 이르렀을 때 주의 관리가 공문을 올리려 하는 것을 발견했다. 태사자가 물었다,

“그대는 공문을 올리려는 것입니까?”

관리가 대답했다,

“그렇소”

“공문은 어디 있소?”

라고 태사자가 묻자 관리가 대답했다,

“수레 위에 있소이다”

태사자가 말했다,

“공문의 표제에 잘못 된 곳이 없소? 가져와 보여주시오.”

관리는 태사자가 동래 사람인걸 몰랐으므로 공문을 갖다 주었다. 태사자는 이미 품속에 칼을 품고 있었고 공문을 받는 즉시 찢어 버렸다. 관리가 펄쩍 뛰며 큰 소리로 외쳤다,

“어떤 녀석이 내 공문을 찢었다!”

태사자가 관리를 수레 사이로 데려가 말했다,

“애초에 그대가 내게 공문을 주지 않았다면 나 또한 그걸 찢을 순 없었을 거요. 우린 둘 다 길흉화복이 같아졌다 할 것인데 나 혼자만이 죄를 받지는 않을 것이오. 어찌 함께 침묵을 지키고 도망하여 삶과 죽음을 바꾸는 것만 하리오, 함께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소이다.”

관리가 말했다,

“그대는 군을 위해 내 공문을 찢어 이미 그 뜻을 이루었는데 어찌 달아난다는 말씀이오?”

태사자가 대답했다,

“당초에 군수가 나를 파견한 것은 단지 공문이 바쳐졌는지 가서 확인하라는 것이었소. 오히려 내 의욕이 지나쳐 공문을 찢은 것이오. 지금 돌아가면 나 또한 문책 받을까 두려워 함께 떠나려는 것이오” 

관리는 태사자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그날로 함께 떠났다. 태사자는 관리와 함께 성을 나왔는데 기회를 틈타 성으로 돌아가서 군수의 공문을 올렸다.

주(州)에서 이 일을 듣고 즉시 관리를 보내 다시 공문을 올렸는데 담당관리는 앞서 공문이 왔다는 이유로 수리하지 않았고 이 사건에 대해서 불리한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태사자는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주(州)로부터는 미움을 사게 되었고 화를 입을까 두려워 요동으로 피신했다.
 
북해상(北海相) 공융은 이 일을 듣고 태사자를 뛰어난 인물이라 여겨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그의 모친에 안부를 전하고 아울러 선물을 보냈다. 그때 공융이 황건적의 침입을 받아 출병하여 도창에 주둔했는데 황건적 관해에게 포위되었다. 태사자는 요동에서 돌아왔는데 모친이 태사자에게 말했다,

“너는 공북해(공융)과 일찍이 만난 적은 없을 것이나 네가 떠난 후로 정성껏 나를 돌봐줌이 오랜 친구 이상이었다. 지금 황건적에게 포위되어 있다 하니 너는 마땅히 그를 도우러 가야 한다.”

태사자는 사흘을 머문 후 홀로 걸어서 도창에 이르렀다. 당시는 포위가 삼엄하지 않아 밤에 기회를 틈타 성안으로 들어가 공융을 만날 수 있었다. 성밖으로 출병하여 도적을 격파할 것을 청했으나 공융은 들어주지 않았고 외부의 구원을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구원하러 오는 자는 없고 포위는 날이 갈수록 좁혀졌다. 공융은 평원상(平原相) 유비에게 위급함을 알리고자 했으나 성 안의 사람들은 나가려는 자가 없었는데 태사자가 스스로 임무를 맡을 것을 청했다.
 
공융이 말했다,

“지금 황건적의 포위가 삼엄하여 뭇 사람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하는구려. 경의 뜻이 비록 장하나 실제로는 어렵지 않겠소?”

태사자가 대답했다,

“지난날 부군(府君: 고급관리나 연장자에 대한 존칭) 께서는 제 노모에게 정성을 기울여 주셨고 노모는 이에 감격하시어 저를 보내어 부군의 위급을 도우라 하셨는데, 제가 이에 따른 것은 반드시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뭇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데 저 또한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부군이 제 노모를 돌봐주신 은의와 노모가 저를 보내신 뜻에 어찌 합당하겠습니까? 사태가 이미 급박하니 부군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마침내 공융은 태사자의 말이 옳다 여겼다.
 
태사자는 빈틈없이 여장을 꾸리고 밥을 배불리 먹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건(鞬: 동개, 활과 화살을 꽂아 넣어 등에 메는 물건) 을 두르고 활을 쥐고 말에 올라탔는데, 두 명의 기병에게 각각 과녁을 하나씩 가지게 한 채 자신의 뒤를 바짝 따라오도록 한 채 성문을 열고 곧바로 나갔다. 밖에서 성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모두 놀라 병마를 출동시켰다. 태사자는 말을 성 밑의 해자(성 밖으로 둘러서 판 참호)로 끌고 가 기병이 갖고 있던 과녁을 세우고 거기에 활을 쏘았는데 활을 다 쏘자 성문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에 또 이와 같이 했는데 성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은 어떤 이는 몸을 일으키고 어떤 이는 누워 있었고, 태사자는 과녁을 세우고 활을 다 쏘고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날 아침에 또 성밖으로 나와서 이처럼 했는데 포위하던 병사 중에 일어나는 자가 없었고, 그래서 태사자는 채찍질을 하여 직접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도적들이 이를 깨달았을 때는 태사자는 이미 빠져나간 후였고, 또 활을 쏘아 여러 명을 죽였으므로 활시위 소리에 맞춰 모두 엎어지기 바빠 감히 뒤쫓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평원에 도착한 태사자는 유비에게 유세하여 말했다,

“저는 동래군의 한갓 미천한 사람으로 공북해(공융)의 친척도 아니며 같은 고향사람도 아닙니다만, 다만 명예와 뜻으로 서로 교우하여 재앙을 나누고 근심을 함께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지금 관해가 난을 일으켜 북해가 포위되었고 외롭고 궁벽한데 구원해주는 이가 없으니 코앞에 급박한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대는 인의(仁義)로 이름난 분이라 능히 다른 이의 위급함을 구해주시리라 믿기에 북해에서는 목을 길게 늘이고 그대를 믿고 의지하고 있으며, 저로 하여금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두터운 포위망을 돌파하여 지극한 어려움을 뚫고 군(君)께 구원을 청하게 한 것은 오로지 군(君)을 믿기 때문입니다.”

유비가 태도를 바로 하고 정색한 채 말했다,

“공북해가 세상에 유비가 있음을 알아주는구나!”

곧 정병 3천 명을 태사자에 딸려 보냈다. 황건적은 구원병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포위를 풀고 흩어져 달아났다. 공융이 구원을 받은 후 태사자를 더욱 귀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그대는 나의 어린 친구요”

사태가 수습되자 돌아가 모친에게 알리니 모친이 말했다,

“네가 공북해의 은혜에 보답했다니 기쁘구나.”
 
양주자사 유요는 태사자와 같은 군 사람인데 태사자가 요동에서 돌아왔을 때 아직 서로 만나보지 못했기에 잠시 장강을 건너 곡아로 가서 유요를 만나려는데,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때마침 손책의 군대가 이르렀다. 어떤 사람이 유요에게 태사자가 대장군 감이라며 권하자 유요가 말했다,

“내가 만일 태사자를 쓴다면 허자장(허소)이 당연히 나를 비웃지 않겠소?"

그는 단지 태사자에게 적군을 정찰하도록 했다.

그 때 태사자는 홀로 기병 한 명과 출발하였다 도중에 손책을 만났다. 손책은 기병 13명을 데리고 있었는데, 모두 한당, 송겸, 황개의 무리였다. 태사자는 즉시 앞으로 나아가 싸우다 손책과 정면으로 대적하게 되었다. 손책은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목덜미를 끌어당기며 수극(手戟)을 빼앗았고 태사자 역시 손책의 투구를 빼앗았다. 이때 양쪽의 군사들이 몰려왔기 때문에 흩어지게 되었다.
 
태사자는 유요와 함께 예장으로 달아나야 했는데 무호로 도망가 산속을 떠돌며 단양태수라 자칭했다. 그때 손책은 이미 선성 동쪽을 평정하고 단지 경현 서쪽의 6개 현만 아직 항복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태사자는 경현으로 나아가 둔부(屯府: 군사적인 행정기구)를 세웠는데 산월인들이 다수 귀부해왔다. 손책은 직접 공격하여 마침내 태사자를 포로로 잡았다.

손책은 즉시 태사자의 포박을 풀어주고 그의 손의 잡으며 말했다,

“신정(神亭)에서의 일을 기억하시오? 만약 그때 경이 나를 붙잡았으면 어떡하셨겠소?”

태사자가 대답했다,

“짐작할 수 조차 없습니다”

손책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대업을 마땅히 경과 함께 이루고자 하오”(1)

즉시 문하독에 임명하고 오로 돌아와서는 병력을 주고 절충중랑장에 임명했다.

(1) [오역] - 태사자는 신정싸움에서 패하고 손책에게 붙잡혔다. 손책은 평소 그의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즉시 결박을 풀어주고 만날 것을 청하여 적극적으로 나아가 일을 성취하는 방법에 관해 물었다. 태사자가 대답했다,

"싸움에 패한 군대의 장수에게는 함께 큰 일을 논의할 자격이 없습니다"

손책이 말했다,

"옛날 한신은 광무군(廣武君)에게 의견을 구하여 계책을 정했소. 지금 내가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현명한 이에게 묻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사양하시오?"

태사자가 말했다,

“주(州)의 군대가 방금 무너졌으므로 사졸들의 마음이 어지럽고 만약 이대로 흩어진다면 다시 모으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가서 은혜를 전해 안정시키고 싶지만 주군의 뜻에 맞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손책이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진실로 내가 바라던 일입니다. 내일 정오에 돌아오도록 하시오.”

여러 장수들이 모두 태사자를 의심했으나 손책이 말했다,

“태사자는 청주의 이름난 선비로 신의를 으뜸으로 여기니 결코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날, 여러 장수들을 청해 미리 술과 음식을 준비한 채 장대를 세워놓고 그림자를 살폈다. 정오에 태사자가 도착했는데 손책은 크게 기뻐하며 태사자를 항상 군무를 의논하는 자리에 참석시켰다.

<배송지의 의견> [오역]에서 말하길 태사자가 신정에서 싸워 패배해 손책에게 붙잡혔다고 하는데, 이는 본전(태사자전 본문)이 전하는 바와 크게 다른데 잘못된 내용인 것으로 생각된다.
 
[강표전] - 손책이 태사자에게 물었다,

“듣기로 지난 날 경은 태수를 위해 주(州)의 공문을 빼앗고 공융을 위해 유비에게 원군을 청해주었다고 하던데 이 모두가 의로운 일이고 천하의 지혜로운 선비라 할 만하나 다만 의탁할 합당한 주인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오.  사구참거를 옛사람들은 꺼리지 않았소이다

(※ 사구(射鉤)는 제환공이 왕자 규와 더불어 군주 자리를 다툴 때 당시 왕자 규의 수하에 있던 관중이 제환공의 허리띠를 활로 쐈던 일을 말하고, 참거(斬袪)는 발제가 진문공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소매자락만 칼로 벤 일을 가리킴. 자신을 해치려고 했었으나 그때 당시의 주인을 위한 일이기에 과거를 묻지 않고 중용한다는 의미)

나는 경의 지기(知己: 막역한 친구)가 되고자 하니 경의 뜻과 같지 않을까 염려하지 마오”

손책이 나가면서 말했다,

“용이 날아오르려면 먼저 척목(尺木: 용의 승천에 꼭 필요한 매개물)이 필요한 것이다”

후에 유요가 예장에서 죽자 그 수하의 무리 1만 여명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고, 손책은 태사자에게 명해 그들을 위로하도록 했다.(2) 좌우에서 모두 말했다,

“태사자는 북쪽으로 가면 필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손책이 말했다,

“자의가 나를 버리고 달리 누구와 함께 하리오?”

창문(昌門) 에서 태사자를 전송할 때 팔을 잡으며 말했다,

“언제 돌아올 수 있으시겠소?”

태사자가 답했다, “60일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약속한 대로 돌아왔다.(3)

(2) [강표전] - 손책이 태사자에게 말했다,

“이전에 유목(양주목 유요)이 내가 원씨(원술)를 위해 여강을 공격한 것을 책망했는데, 이는 매우 편파적이고 옳지 못하오. 어째서 그렇겠소? 선군(先君: 손견)의 수하 병사 수천여명이 줄곧 원공로(원술) 진영에 있었소이다. 나는 큰 뜻을 품고 있으니 부득이 원술에게 몸을 굽혀 예전의 병사들을 수습했고 거기서 천여명을 더 얻은 것이오. 거듭 여강을 공격하도록 원술이 명하니 그때 형편이 어쩔 수 없어 부득이 여강을 공격한 것이오. 그러나 그 후에 원술이 신하의 절의를 저버리고 사악하고 참람된 짓을 저지르니(황제를 칭한 일) 내가 이를 말렸지만 듣지 않았소.

무릇 대장부는 의로써 사귀되 큰 변고가 일어나면 부득이 헤어지는 법이고 내가 원술과 사귀다가 이후 절교하게 된 경위가 그러한 것이오. 이제 유요가 죽었는데 그가 살아 있을 때 이를 해명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소이다. 지금 그의 아들이 예장에 있는데 화자어(화흠)가 그를 어떻게 대우하지는 모르겠소. 경은 같은 주 사람이고 예전에 섬긴 적이 있으니 가서 그 아들을 만나보고 또한 나의 뜻을 그 부곡(部曲)에게 전해 주시오. 따라오기 원하는 자는 데리고 오고 그렇지 않은 자는 위무하도록 하시오. 또 화흠이 예장을 다스리는 방책(牧禦方規)이 어떠한지, 여릉과 파양의 백성들의 민심이 어떤지 살펴봐 주시오. 몇 명의 병사를 데리고 갈 지는 경의 뜻대로 하오.”

태사자가 대답했다,

“제가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으나 장군께서 제환공, 진문공과 같은 도량으로 과분하게 대우해주셨습니다. 옛 사람들은 죽음으로써 보답했으니 절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뿐입니다. 지금 병사들이 휴식 중이니 많이는 필요 없고 수십 명 정도면 충분합니다.”
 
(3) [강표전] – 처음 손책이 태사자를 파견할 때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태사자를 믿을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떤 자가 말하기를 화흠과 같은 주 출신이라 그쪽에 남아 계책을 꾸밀까 두렵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자가 의심하기를 서쪽으로 황조에 의탁하거나 길을 빌려 북쪽으로 갈 것이라는 등 태사자를 파견하는 것은 실책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손책이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잘못된 결정이라고 밀하나 나는 자세히 살핀 끝에 내린 결정이오. 태사자는 비록 용맹하고 담력이 크기는 하나 방자한 인물(縱橫之人)은 아니오. 그가 꾀가 많으나 그 뜻이 도의(道義)에 입각하고 약속을 중하게 여겨 일단 뜻으로 맺은 지기(知己)는 죽을지언정 배반하지 않을 사람이니 그대들은 걱정하지 마시오."

태사자가 예장으로부터 돌아오니 비로소 의논하던 사람들이 승복했다. 태사자가 손책에게 말했다,

“화흠은 착하고 유덕하나 주략(籌略: 계획, 계책)을 갖춘 인물은 아니어서 별다른 방책없이 스스로를 지킬 뿐이었습니다. 또 단양사람인 동지(僮芝) 가 여릉을 차지하고 조정의 조서를 사칭해 태수 행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파양민의 우두머리는 따로  종부(宗部,주로 종족들로 결성된 部)를 세워 군대에 의지하여 경계를 지키면서 화흠이 파견한 관리를 거부하며 말하길, “나는 별도로 군(郡)을 만들었고 한조정이 파견한 진짜 태수가 오면 마땅히 영접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화흠은 여릉, 파양과 화합하지 못해 근처 해혼(海昏)의 상료(上繚)에 보루를 세워 5-6천 가구를 묶어 다만 세금만을 거두었고, 초청했으나 한 명도 응하지 않았는데도 화흠은 그냥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손책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고 겸병(兼幷)할 뜻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예장을 평정했다.
 
유표의 조카 유반은 사납고 용맹했는데 여러 차례 애, 서안 등 여러 현을 침략했다. 이에 손책은 해혼, 건창 주변의 6개 현을 나누어 태사자를 건창도위로 임명했는데 태사자는 해혼에 관소를 설치하고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유반에 맞섰다. 유반은 자취를 감추고 다시는 침입하지 않았다.
 
태사자는 키가 7척 7촌에 수염이 아름다웠고 원숭이같이 긴 팔에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일찍이 손책을 따라 마보(麻保)의 도적을 토벌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둔영 안의 어떤 도적이 망루 위에서 욕을 했는데 손으로 망루의 기둥을 잡고 있었다. 태사자가 활을 끌러 그를 쏘았는데 화살이 손을 관통하여 기둥에 박히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훌륭한 활솜씨가 이와 같았다.

조공(조조)이 태사자의 명성을 듣고 서신을 보냈는데, 상자를 열어 보니 안부를 묻는 글은 없고 단지 당귀(當歸)가 쌓여 있을 뿐이었다. 손권이 집권한 뒤 능히 유반을 제압하리라 여겨 태사자에게 남쪽의 일을 맡겼다.

41세, 건안 11년(206)에 죽었다. (4)아들 태사향(享)은 관직이 월기교위에 이르렀다.(5)
 
(4) [오서] – 태사자가 죽을 때 탄식하여 말했다,

“무릇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7척의 검을 차고 천자의 계단을 올라야 마땅하다. 그 뜻을 아직 이루지 못했는데 어찌 죽을 수 있겠는가!”

손권이 그의 죽음을 애석해했다.
 
(5) [오서] – 태사향의 자는 원복(元復)이고 상서, 오군태수를 역임했다.

논평하여 말한다. 태사자는 신의가 두텁고 열렬해 옛사람의 정의가 있었다.

분류 :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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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30
09:54:00 (*.148.4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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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4.30
11:55:20
(*.52.89.88)

태사향의 이름 표기는 향(享)과 형(亨)이 모두 나타나는데, 청대의 고증에 따르면, 향(享)은 오기로 형(亨)이 옳고 자인 원복과도 통한다. 그러나 현대에 널리 쓰이는 중화서국본에서는 향(享)으로 나오며, 또 삼국지연의에서 향으로 나오므로 일반에는 향으로 알려져 있다. 실 享과 亨은 원래 亯이란 한 글자에서 갈려나온 문자라, 둘로 나뉘고서도 모양이 비슷해 쉽게 헷갈린다. 는 것이 엔하위키에다가 태사향 항목을 올리고서 알아낸 정보입니다. ㅋ

rigvedawiki.net/r1/wiki.php/태사형

코렐솔라

2013.06.28
02:32:10
(*.52.89.88)
고원님이 수정해주셔서 새로운 수정판으로 바꿨습니다.

코렐솔라

2013.07.16
16:45:25
(*.0.203.140)
고원님의 것이니 새로 추가할 내용은 없으리라 보고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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