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교(孫皎)는 자가 숙랑(叔朗)이고, 처음에는 호군교위(護軍校尉)에 제수되어 무리 2천 명을 통솔했다. 이 때 조공(曹公)이 여러 번 유수(濡須)를 공격했는데, 손교는 매번 달려나가 저항하여 정예(精銳)라는 호칭을 얻었고, 도호정로장군(都護征虜將軍)으로 승진했으며, 정보(程普)를 대신하여 하구(夏口)를 다스렸다. 황개(黃蓋)와 그의 형 손유(瑜)가 세상을 떠나자, 또다시 그들의 군대를 합병했다. 조정에서는 사이(沙羨)ㆍ운두(雲杜)ㆍ남신불(南新市)ㆍ경릉(竟陵)을 그에게 주어 식읍으로 삼도록 하고, 스스로 장리(長吏)를 두도록 했다.

/沙羨: 사선이라 읽어야 할 것 같지만 《한서》 지리지의 주석에 '羨의 음은 夷라.'라고 하여 사이라고 읽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손교는 재물을 가볍게 보고 베풀기를 잘하였으며, 교유를 맺는데 뛰어나 제갈근(諸葛瑾)과도 지극히 돈독하였다. 여강(廬江) 사람 유정(劉靖)에게는 일의 득실을 맡기고, 강하(江夏) 사람 이윤(李允)에게는 일반적인 사무를 맡겼으며, 광릉(廣陵) 사람 오석(吳碩)과 하남(河南) 사람 장량(張梁)에게는 군대를 맡기고, 이들을 마음까지 기울여 친하게 우대하니, 그들은 스스로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손교가 일찍이 정찰하는 병사를 파견하였는데 장수들이 위나라 변방의 장리와 미녀들을 붙잡아서 손교에게 바쳤다. 손교는 오히려 그들의 의복을 갈아입히고 돌려보내면서 부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지금 우리가 주살하려는 자는 조씨(曹氏)이거늘, 그의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지금부터는 그의 노약자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 장강(江)과 회수(淮) 일대의 많은 사람들이 귀의하였다. 손교는 일찍이 사소한 일로 감녕(甘寧)과 분쟁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감녕에게 간언하자, 감녕이 말했다.

“신하와 공자(子)는 하나의 항열이오. 정로장군(征虜)이 비록 공자이지만, 어찌하여 함부로 행동하고 사람을 모욕할 수 있겠소! 나는 영명한 군주를 만났으니, 마땅히 공적을 내고 목숨을 바쳐 군주에게 보답해야 할 뿐이거늘 진실로 세간의 관례에 따라 몸을 굽힐 수는 없소.”

손권이 이 말을 듣자, 편지를 써서 손교를 꾸짖어 말했다.

- 우리가 북방(北方 : 조조)과 적이 된 이래, 중간에 이미 10년이 지났으며, 처음에 서로 대치할 때는 네 나이가 어렸으나, 지금은 거의 30세가 되려 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서른 살이면 서게 된다.(三十而立)’는 것은 단지 오경(五經)을 학습하라는 것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그대에게 정예병을 맡기고, 그대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겨, 그대로 하여금 천 리 밖에 있는 여러 장수들까지도 감독하게 했으니, 이는 마치 초(楚)나라가 소해휼(昭奚恤)을 임명하여 북쪽 변경까지 위세를 떨치게 한 것과 같은 것이지, 그대로 하여금 사사로운 뜻을 현시하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요즈음 듣기로는 그대가 감흥패(甘興霸)와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술로 인하여 발작을 일으켜 그 사람을 능멸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여몽(呂蒙)의 감독하에 있기를 구했던 사람이다. 그 사람됨이 비록 거칠고 호방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지 못할 경우도 있지만, 그는 비교적 대장부라고 할 만하다. 내가 그를 가까이 했지만, 그를 사사롭게 대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를 가까이 하고 아끼는데, 그대는 그를 소원하게 하고 증오하고 있다. 그대는 매번 나와 어긋나기만 하니, 우리들의 대업이 오래갈 수 있겠는가? 대체로 공경하게 머물면서 행동을 간소하게 하면 백성들에게 임할 수 있고, 사람들을 아끼고 포용력이 많으면 무리를 얻을 수 있다. 오히려 이 두 가지 이치도 알 수 없는데, 어찌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통솔하여 도적을 막아 위험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성장하게 되어 특별히 중대한 임무를 받아 위로는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촉망하는 시선이 있고, 아래로는 부하들과 아침 저녁으로 논의해야 할 일이 있거늘 어찌하여 제멋대로 크게 성을 내는가? 잘못이 없는 어떤 사람도 그가 능히 고칠 수 있음을 귀하게 여긴다. 그대는 마땅히 이전의 허물을 되씹어 스스로 깊이 꾸짖어야 한다. 이제 일부러 제갈자유(諸葛子瑜 : 제갈근)를 번거롭게 하여 내 뜻을 거듭 알렸다. 편지에 임하니 마음은 매우 슬프고 서글퍼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손교는 편지를 받자, 상소하여 잘못을 사죄하고 마침내 감녕과 두터운 교분을 맺었다. 나중에 여몽이 남군(南郡)을 습격하려고 하자, 손권은 손교에게 명을 내려 여몽과 더불어 좌우 부대의 대독(大督 : 총 지휘관)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여몽이 손권을 설득하여 말했다.

“만일 폐하께서 생각하기로 정로장군(征虜 : 손교)이 능력이 있다면, 마땅히 그를 임용하십시오. 제가 능력이 있다면 마땅히 저를 임용하십시오. 옛날에 주유(周瑜)와 정보(程普)가 좌우 부대의 대독(左右部督)이 되어 함께 강릉(江陵)을 공격했을 때, 비록 일은 주유에 의해 결정되었지만, 정보는 스스로 노장(久將)이라고 생각하여 둘 다 모두 대독이 되어 결국 함께 일했지만 화목하지 못하여 국가의 대사를 거의 그르치게 했습니다. 이는 지금의 경계가 됩니다.”

손권은 깨달은 바가 있어, 여몽에게 감사해 하면서 말했다.

“그대를 대독으로 삼고, 손교로 하여금 후속 부대로 삼는다.”

후에 관우(關羽)를 붙잡고 형주(荊州)를 평정함에 있어서 손교는 능력을 세웠다.

건안(建安) 24년(219)에 세상을 떠났다. 손권은 그의 공적을 거슬러 기록하여 아들 손윤(胤)을 단양후(丹楊侯)로 봉했다. 손윤이 죽었으나 자식이 없어 그의 동생 손희(晞)가 작위를 계승하여 군대를 통솔하였으나, 죄를 지어 자살했으므로 봉국은 없어졌다. 손윤의 동생인 손자(咨)ㆍ손미(彌)ㆍ손의(儀)는 모두 장군이었고 후작(侯)에 봉해졌다. 손자는 우림독(羽林督)ㆍ손의는 무난독(無難督)이 되었다. 손자는 등윤(滕胤)에게 살해되었으며, 손의는 손준(孫峻)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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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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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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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5
15:16:07
(*.0.203.172)
이놈도 주석 없음돠 역시 오나라!

코렐솔라

2013.07.25
10:47:47
(*.0.203.141)
손호->손교로 바꾸고 말이 안 되는 문장 좀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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