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환(孫奐)은 자가 계명(季明)이다. 그의 형 손교(皎)가 이미 세상을 떠나자 대신 그의 무리들을 통솔하였고, 양무중랑장(揚武中郎將)의 신분으로 강하태수(江夏太守)를 겸임했다. 그는 재임한 지 1년 만에, 손교의 옛 행적을 좇아 유정(劉靖)ㆍ이윤(李允)ㆍ오석(吳碩)ㆍ장량(張梁) [주] 및 강하 사람 여거(閭舉)등을 예우했으며, 아울러 그들의 뛰어난 점을 받아들였다. 

주) 江表傳曰:初權在武昌,欲還都建業,而慮水道泝流二千里,一旦有警,不相赴及,以此懷疑。及至夏口,於塢中大會百官議之,詔曰:「諸將吏勿拘位任,其有計者,為國言之。」諸將或陳宜立柵柵夏口,或言宜重設鐵鎖者,權皆以為非計。時梁為小將,未有知名,乃越席而進曰:「臣聞香餌引泉魚,重幣購勇士 ,今宜明樹賞罰之信,遣將入沔,與敵爭利,形勢既成,彼不敢干也。使武昌有精兵萬人,付智略者任將,常使嚴整。一旦有警,應聲相赴。作甘水城,輕艦數千,諸所宜用,皆使備具。如此開門延敵,敵自不來矣。」權以梁計為最得,即超增梁位。後稍以功進至沔中督。    

강표전에 이르길 : 손권이 무창(武昌)에 있을 때, 수도를 건업으로 바꾸려고 하였는데, 건업(建業)에서 무창으로 이르는 수로를 2천 리나 거슬러 올라가야 하였으므로, 만일 긴급 사태의 발생을 알려오는 경보를 하여도 서로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회의적이었다. 하구까지 왔을 때, 오중에 백관들을 모집하여 이 일에 관해 논의하도록 하고 손권 자신이 조서를 내려    

‘부장들도 군리들도 그 관위나 임무에는 구속되지 말고 좋은 의견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말하시오’    

라고 했다. 부장들 중 어떤 이는 목책을 만들어 하구를 견고하게 지켜야 한다고 했고, 어떤 이는 물속에 철 그물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했는데, 손권은 모두 좋은 의견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장량은 작은 부대의 장수로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자리에서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신은 미끼는 연못의 물고기를 유인하고, 두터운 은혜와 상은 용사를 살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늘은 마땅히 상벌 규율을 분명하게 세워 장수들을 면수(沔水) 유역으로 보내 적과 이로움을 다투어 형세가 이미 이루어지면 저들은 감히 행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창에 정예병사 1만 명이 있게 하고 지략이 있는 사람에게 맡겨 장수로 임명하여 항상 엄숙하고 정제되게 합니다. 하루아침에 긴급 사태가 있으면 서로의 신호에 응해 달려오는 것입니다. 감수성을 만들어 가벼운 배 수 천척을 여러 장소의 마땅한데 이용하여 모든 준비가 갖춰지게 합니다. 이렇게 하면 문을 열고 적을 끌어들여도 적이 스스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

라고 했다. 손권은 장량의 계책이 최고 타당하다고 여겨 곧 장량의 직위를 (상례를) 초월하여 증가시켰다. 이후에 점차 공로로 진급하여 면중독에 이르렀다.

손환은 긴급한 상황에 대응하는 것은 잘 하지 못했으나, 맡은 일에 대해서는 기민하여 병사들과 백성들이 그를 칭송했다.

황무(黃武) 5년(226)에 손권(權)이 석양(石陽)을 공격할 때, 손환은 그곳의 태수였으므로 배속된 장수 선우단(鮮于丹)으로 하여금 5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회하(淮)의 길을 끊어 버리게 하고는, 자신은 오석(吳碩)ㆍ장량(張梁) 등 5천 명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고성(高城)을 항복시키고 세 장수를 붙잡았다. 대군을 이끌고 돌아올 때, 손권은 명을 내려 손환으로 하여금 군대를 멈추도록 하고는 말을 타고 그의 군대를 지나가 보니, 손환의 군대는 정제되어 있었다. 손권은 기뻐하며 말했다.

“처음에 나는 그가 더디고 아둔한 것을 걱정했는데, 지금 군대를 다스리는 것에 있어서는, 여러 장수들 중에서 그에게 미칠 수 있는 자들이 적으니, 나는 걱정거리가 없다.”

양위장군(揚威將軍)에 제수하고, 사이후(沙羨侯)에 봉했다. 오석과 장량은 모두 비장군(裨將軍)이 되어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손환 역시 유생들을 좋아하여 부하의 자제들에게 학업에 나아가라고 거듭 명을 내렸다. 후에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한 자는 수십 명이나 되었다. 그는 가화(嘉禾) 3년(234)에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손승(承)이 후사를 이었으며, 소무중랑장(昭武中郎將)이 되어 대신 병사를 통솔하고, 군(郡)을 다스렸다.

/沙羨: 사선이라 읽어야 할 것 같지만 《한서》 지리지의 주석에 '羨의 음은 夷라.'라고 하여 사이라고 읽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적오(赤烏) 6년(243)에 손승이 세상을 떠났으나 자식이 없었으므로 손승의 이복 동생인 손일(壹)을 봉하여 손환의 후인으로 받들게 한 후에 손환의 공업을 계승하여 장군이 되게 했다. 손준(孫峻)이 제갈각(諸葛恪)을 주살했을 때, 손일은 전희(全熙)ㆍ적(施績)과 함께 제갈각의 동생인 공안독(公安督) 제갈융(融)을 공격했다. 제갈융은 자살했다. 그 공로로 손일은 진남장군(鎮南)에서 진군장군(鎮軍)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가절(假節)을 받고 하구독(夏口督)이 되었다.

손침(孫綝)이 등윤(滕胤)과 여거(呂據)를 주살했을 때, 여거와 등윤이 모두 손일의 매부였으므로 손일의 동생 손봉(封) 또한 등윤과 여거가 음모를 꾸몄음을 알고는 자살했다. 손침이 주이(朱異)를 보내어 몰래 손일을 습격하도록 했다. 주이가 무창(武昌)에 이르렀을 때, 손일은 그 자신이 공격받을 것을 알고는 부하 천여 명과 등윤의 처자도 데리고 위(魏)나라로 달아났다. 위나라에서는 손일을 거기장군(車騎將軍)ㆍ의동삼사(儀同三司) [주] 로 삼았으며 오후(吳侯)에 봉하고는 이전 군주 조방(芳)의 귀인(貴人) 형씨(邢氏)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주]의동삼사는 간단히 의동(儀同)이라고도 일컫는다. 위나라에서는 이 관직을 설치했는데 촉ㆍ오나라에는 없었다.

형씨는 용모는 아름다웠으나 질투심이 깊어 아랫사람들이 명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마침내 손일과 형씨를 함께 살해했다. 손일은 위나라에 온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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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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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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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5
15:28:11
(*.0.203.172)
주석 추가하고 파란색으로 처리

코렐솔라

2016.05.20
13:50:44
(*.196.74.143)
장량에 대한 주석은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rexhistoria.net/dragonrz/15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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