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史랑방


비의(費禕)는 자(字)가 문위(文偉)이고 강하(江夏) 맹(鄳) 사람이다. (鄳의 음은 盲)



어려서 고아가 되어 족부(族父) 백인(伯仁)에게 의탁하였다. 백인(伯仁)의 고모(姑)가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의 모친이었는데 유장이 사자를 보내 백인을 영접하니 백인이 비의를 데리고 촉(蜀)으로 들어가 유학(游學)하였다.(※) 때마침 선주(先主)(→유비)가 촉을 평정하자 비의는 마침내 익주 땅에 머물게 되었고 여남(汝南)사람인 허숙룡(許叔龍) 및 남군(南郡) 사람인 동윤(董允)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당시 허정(許靖)이 자식을 잃으니(→<권38 허정전>에서는 허정의 아들 허흠(許欽)이 요절했다고 하였는데 아마 그를 가리키는 듯) 동윤이 비의와 더불어 함께 그 장소(葬所,장지葬地)에 가고자 하였다. 동윤이 부친인 동화(董和)에게 아뢰어 수레를 청하니 동화가 뒤쪽이 열려있는(開後) 녹거(鹿車,수레의 일종으로 사슴 한 마리를 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수레)를 보내주었다. 동윤은 수레를 타는데 난색을 표했으나 비의는 곧장 앞쪽으로 먼저 올라탔다. 장소(喪所)에 도착해보니 제갈량(諸葛亮) 및 여러 귀인(貴人)들이 모두 모여있었는데 차승(車乘,탈수 있는 수레)이 매우 화려하니 동윤의 신색(神色,안색)은 편안하지 못한 반면 비의는 안연자약(晏然自若,태연자약)하였다. 수레를 몰았던 이가 돌아온 뒤 동화가 그에게 물어 사정이 이와 같았음을 알고는 동윤에게 말했다,

“나는 늘 너와 문위(文偉)(→비의)의 우열(優劣)이 아직 확실히 구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후로 내 생각은 분명해졌다.”

 
※ 비의의 족부(族父) 백인(伯仁) – <비의전>에서는 마치 伯이 성이고 이름이 仁인 것처럼 기술했으나 비의의 족부라고 한 점과 <권45 양희전>의 계한보신찬에 유장 모친이 고모인 비관(費觀)이란 인물이 기술된 점을 볼 때(贊費賓伯 賓伯名觀, 江夏鄳人也. 劉璋母, 觀之族姑, 璋又以女妻觀./ 계한보신찬) 伯仁은 성명(姓名)이 아니라 자(字)인 것으로 보입니다. (곧 비백인費伯仁) 다만 양희전에서는 費觀의 字를 빈백(賓伯)이라 하고 있는데 1)별개의 2명(비백인 & 비관=비빈백)으로 서로 형제 또는 종형제 사이였거나 (姑와 族姑의 차이?) 2)동일한 한 명으로 어느 한 쪽의 기술오류 또는 字가 변경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관=비백인 or 비빈백) 참고로「삼국지사전」에서는 <費觀> <費伯仁>의 표제를 따로 두고 각각 양희전, 비의전의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주(先主)가 태자(太子)를 세우자 동윤과 더불어 비의를 함께 (태자)사인(舍人)으로 삼았다가 (태자)서자(庶子)로 올렸다.



후주(後主)가 제위에 오르자 황문시랑(黃門侍郎)으로 삼았다.



승상(丞相) 제갈량(亮)이 남정(南征)하고서 돌아올 때 뭇 신료들이 수십 리까지 나와서 그를 봉영(逢迎,영접)하였는데 (신료들 중) 대다수가 나이와 관위가 비의보다 위였음에도 제갈량이 특별히 명해 비의를 (수레에) 함께 태우니 이로 말미암아 뭇 사람들 중에 그를 가벼이 보는 이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제갈량이 남쪽으로부터 막 돌아온 뒤 비의를 소신교위(昭信校尉)로 삼아 오(吳)에 사자로 보냈다. 손권(孫權)은 성정이 골계(滑稽,언변이 좋고 익살스러움)하여 거침없이 남을 조롱하고 제갈각(諸葛恪)과 양도(羊衜) 등은 재주가 많고 과감하게 말을 잘하여 (비의를 향해) 논란(論難,변론과 힐난)이 어지러이(왕성하게) 쏟아졌으나 비의의 언사는 의(義)를 따르며 돈독하고 이치(理)에 의거해 답변하니 끝내 굴복시킬 수 없었다. [一] 손권이 그를 매우 높게 여기고는 비의에게 말했다,

“그대는 천하의 숙덕(淑德,아름다운 덕)(을 지닌 사람)이라 필시 촉(蜀) 조정(蜀朝)의 고굉(股肱,중신重臣)이 될 것이라 (우리 오나라에 사신으로) 여러 번 오지 못할까 걱정이오.”[二]

 

돌아온 뒤에 시중(侍中)으로 올랐다.

 

(제갈)량이 북쪽으로 한중(漢中)에 주둔하고는 (비)의에게 청하여 참군(參軍)으로 삼았다. 사자의 명을 받들어 칭지(稱旨,임금의 뜻에 부합함)하며 빈번히 오(吳)에 사자로 갔다.



건흥(建興) 8년(=230년), 중호군(中護軍)으로 전임하였다가 뒤에 또 사마(司馬)가 되었다.

 
군사(軍師) 위연(魏延)이 장사(長史) 양의(楊儀)와 더불어 서로 증오하니 매번 함께 자리해 쟁론(爭論)할 때마다 때로 위연이 칼을 뽑아 양의를 겨누고 양의가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는데 비의가 늘 그들의 좌석 사이로 들어가 간유(諫喻,간언하여 깨우침)하여 분별(分別)하였으니, 제갈량 생전에 위연과 양의를 각각 다 (그들의 재능껏) 잘 쓸 수 있었던 것은 비의의 광구(匡救,바로잡음)하는 역량 덕분이었다.



제갈량이 죽자 비의는 후군사(後軍師)로 임명되었다. 그 얼마 뒤에 장완(蔣琬)을 대신하여 상서령(尙書令)이 되었다.[三]



장완이 한중에서 부(涪)로 돌아온 뒤 비의는 대장군(大將軍)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올랐다.

 
[一] 비의별전(禕別傳) 왈 : 손권(孫權)이 매번 따로 좋은 술을 따라 비의에게 먹여 그가 이미 취한 것을 보고는 그 연후에 국사(國事)에 관하여 물으며 아울러 당세지무(當世之務,당세에 힘쓸 일)를 논하여 사난(辭難,논란論難)이 여러 차례 쏟아졌다. 비의는 (그럴 때마다) 늘 술에 취했다고 말하고 물러나서는 질문 받은 바를 순서대로 적고 사안마다 조목조목 답변하여 일실(遺失,빠뜨리거나 놓침)되는 바가 없었다.

 
[二] 비의별전 왈 : 손권이 이에 수중에 늘 지니고 있던 보도(寶刀)를 주자 비의가 답하였다,


“신이 재주가 없으니 어찌 명명(明命=존명尊命)을 감당하겠습니까? 그러나 도(刀)는 부조(不庭,조정에 조현하지 않는 자 ; 반역자)를 치고 폭란(暴亂)을 금(禁)하는 것으로 다만 대왕께서 공업(功業)을 세우는 데 힘써 (저희와) 함께 한실(漢室)을 돕기를 원하니 신이 비록 암약(闇弱,어리석고 미약함)하나 끝내 동쪽을 돌아보는 것(東顧)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三] 비의별전 왈 : 당시 군국(軍國,통군統軍과 치국治國)에 일이 많아 공무(公務)가 번외(煩猥,번잡,번다)하였는데 비의의 식오(識悟,식별하고 깨달음)가 남보다 뛰어나 매번 서기(書記)를 성독(省讀,살펴서 읽음)할 때마다 눈을 들어 잠시 보면 이내 그 의지(意旨,취지,뜻)를 통달하니 그 속도가 남들보다 몇 배에 달하였으며 또한 끝내 잊지 않았다. 늘 조포[朝晡,조시朝時(=진시辰時.am7-9)와 포시晡時(=신시申時.pm3-5)]에 청사(聽事,정무를 처리함)하고는 그 사이에 빈객(賓客)들을 접납하여 먹고마시며 노는데다가 박혁(博弈,육박六博과 위기圍棋)까지 두었는데, 매번 남을 즐겁도록 다하면서도 일 또한 폐하지 않았다. 동윤(董允)이 비의를 대신하여 상서령(尙書令)이 되자 비의의 소행(所行)을 본받으려 하였는데 열흘 안에 일이 대부분 건체(愆滯,잘못되거나 지체됨)되었다. 이에 동윤이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의 재력(才力)이 서로 동떨어진(다른) 것이 이처럼 매우 머니 이는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나는) 하루종일 청사(聽事)하여도 여전히 여유가 없을 것이다.”

연희(延熙) 7년(=244년), 위군(魏軍)이 (침공하여) 흥세(興勢)에 도착하자 비의에게 절(節)을 내리고(假節) 군대를 인솔해 가서 막도록 하였다. 광록대부(光祿大夫) 내민(來敏)이 비의에게 가서 작별인사를 하며 함께 위기(圍棊=圍棋)를 두자고 청했다. 당시 우격(羽檄,깃털을 꽂아 긴급함을 표시한 문서)이 번갈아 날아들고 (출정하기 위해) 인마(人馬)는 갑옷을 입고 수레를 엄비하는 일도 이미 다 마친 상태였는데 비의가 내민과 더불어 마주하여 놀이하는데(→위기를 두는데) 유의(留意,유념,열중)하며 염권(厭倦,싫증냄)하는 기색이 없었다. 내민이 말했다,

“잠시 그대를 관시(觀試,관찰하며 시험함)해 보았을 뿐이오! 그대는 확실히 (이 임무에) 적합한 사람(可人)이니 필시 적(賊)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오.”

비의가 도착하자 적이 마침내 물러났다. 성향후(成鄕侯)에 봉해졌다. [一] 장완이 주직(州職)(→주자사 직)을 굳게 사양하자 비의가 또한 익주자사(益州刺史)를 겸하였다.(영領 익주자사) 비의의 당국(當國,국사國事를 맡음)과 공명(功名,공로와 명망)이 대략 장완에 비견되었다. [二]



(연희) 11년(=248년), 나가서 한중(漢中)에 주둔하였다. 장완으로부터 비의에 이르기까지 비록 스스로 몸은 (수도) 바깥에 있었으나 경상형위(慶賞刑威,포상과 형벌)를 모두 먼저 멀리 (그들에게) 자단(諮斷,자문하여 판단함)한 연후에 실행하니 그들을 추임(推任,높이 받들며 신임함)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뒤에 (연희) 14년(=251년) 여름에 성도(成都)로 돌아왔는데, 성도(成都)의 망기(望氣,기운을 살펴 길흉을 점침)하는 이가 도읍에 재상(宰相)의 자리가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겨울에 다시 북쪽으로 가서 한수(漢壽)에 주둔하였다.

 
연희 15년(=252년), 비의에게 개부(開府)하도록 명하였다.

 
(연희) 16년(=253년) 세수(歲首,새해 초)에 큰 모임(大會)이 있었는데 위(魏)의 항인(降人)(→위나라로부터 항복해온 사람) 곽순(郭循)(※)이 그 자리에 있었다. 비의가 환음(歡飮)하여 몹시 취하였다가 곽순이 지니고 있던 칼에 해를 입었다. 시호를 내려 경후(敬侯)라 하였다.

 
아들인 비승(費承)이 후사를 이었고 황문시랑(黃門侍郎)을 지냈다. 비승의 동생인 비공(費恭)은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다. [三] 비의의 장녀(長女)는 태자(太子) 유선(劉璿)의 배필이 되어 (태자)비(妃)가 되었다.

 
[一] 은기(殷基)의 통어(通語) 왈 : 사마의(司馬懿)가 조상(曹爽)을 주살하자 비의는 갑을론(甲乙論)을 펼치며 그 시비(是非)를 평하였다. 갑(甲)의 의견은 이러하다.


‘조상(曹爽) 형제는 범품(凡品,평범)의 용렬한 사람들인데 실로 종자(宗子,황제의 자제)의 지속(枝屬,방계旁系 친속親屬)으로 고명(顧命,임금이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함)의 임무를 받을 수 있었으나 교사참일(驕奢僭逸,교만사치하며 참람함)하여 적당하지 않은 자들(非其人)과 교제하고 사사로이 붕당(朋黨)을 심어 나라를 어지럽힐 것을 도모하였습니다. (사마)의가 분격해 이를 주토(誅討,주벌)하여 하루아침에 모두 멸하니 이는 바로 (사마의) 자신의 임무에 부합한 것이며 사민(士民)들의 바람에 부응한 것입니다.’


을(乙)의 의견은 이러하다.


‘(사마)의가 조중(曹仲)(→위魏 명제 조예曹睿를 가리킴. 조예의 字가 元仲)이 자기에게 부탁한 것이 하나가 아님을(→조상에게도 함께 부탁한 것을?) 원망하였으니(憾) [※집해] 어찌 조상과 더불어 서로 상관하였겠습니까? 사세(事勢)상 (사마의 혼자 정권을) 오로지하지 못하므로 이런 까닭에 (조상의) 자하(疵瑕,하자,허물)를 은밀히 조성한 것입니다. 당초 충고(忠告,성심으로 권고함)하거나 강직하게 가르치는 일도 없이 하루아침에 도륙(屠戮)하였으며 그들의 불의(不意,예상치 못함)를 틈타 찌르니 이것이 어찌 대인(大人)이 나라를 경영하며 근본을 두터이 여기는 일(행동)이겠습니까! 만약 조상에게 정말로 임금을 도모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대역(大逆)할 계획이 이미 세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의가) 군대를 일으킨 날에 또한 (황제인) 조방(曹芳)이 조상 형제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상황에서 사마의 부자는 뒤로부터 성문을 닫아걸고 거병하고는 강박하며 조방에게로 향하였으니 필시 수녕(悉寧)(조방이 완벽하게 안녕함?)이 없었을 것인데 (어찌) 이를 충신(忠臣)의 임금을 위한 심려(深慮)라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미루어보건대, 조상에게 대악(大惡)(→대역大逆의 계획)은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만약 조상이 사참(奢僭,사치하고 참람함)하다고 사마의가 여겼다면 그를 폐하거나 형벌을 내리는 것은 가하나, 그 척구(尺口,갓난아기)까지 멸하여 불의(不義)의 이름을 씌우고 자단(子丹)(→조상의 부친인 조진曹眞의 字가 子丹임)의 혈식(血食)을 끊으며 아울러 하안(何晏)의 아들은 위(魏)(황실)의 친 외조카임에도 또한 함께 주륙되니 참람(僭濫)의 (죄에 대한 형벌로는) 부당합니다.’

[※집해] 삼국지집해에서는 憾(감)으로 표기하고 “송본(宋本)에서는 憾을 感으로 적었으나 이는 잘못이다.”(宋本憾作感誤)라고 하였습니다. 중화서국본은 아마 송본에 따라 感으로 표기한 듯한데, 저는 이 삼국지집해의 설에 따라 憾으로 두고 풀었습니다.

 
[二]비의별전 왈 : 비의는 아성(雅性,본성)이 겸소(謙素,겸손하고 검소함)하여 집에 재물을 쌓지 않았다. 자식들에게 모두 포의(布衣)을 입히고 소식(素食)하도록 하며 출입할 때에 거기(車騎,수레와 말)가 뒤따르지 못하게 하니 범인(凡人,평범한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 곽순(郭循) – <촉서 후주전>과 여기 <비의전>에는 郭循(곽순)으로 표기되어 있는 반면, <위서 삼소제기> 및 <촉서 장억전>에는 郭脩(곽수)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한편「자치통감」에는 郭偱(곽순)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호삼성은 ‘郭脩로 적어야 맞다’고 주석하였습니다. (모두 중화서국본 기준임)

 
[三]비의별전 왈 : 비공(費恭)은 상서랑(尙書郎)을 지내고 당세(當世,당대,당시)에 이름을 드러내었으나 일찍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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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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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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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5.26
00:3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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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전 오리지널을 이걸로 대체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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