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출처: 고원님 블로그

 


조운(趙雲)은 자()가 자룡(子龍)이고 기주 상산(常山) 진정()사람이다. 본래 공손찬(公孫瓚)에 속했는데 공손찬이 선주(先主-유비)를 보내 전해(田楷)를 도와 원소(袁紹)를 막게 하니 조운이 이에 수종(隨從)하여 선주(先主)를 위해 기병을 지휘했다. [1]

 

[1] 운별전(雲別傳)(조운별전) – 조운은 신장이 8척에 용모가 웅위(雄偉)하고 출신 군에서 천거되었는데 의종(義從-대의로서 좇는? or 이민족 귀순집단?) 관리와 병사들을 거느리고 공손찬에게로 나아갔다. 당시 원소가 기주목(冀州牧)을 칭하여 공손찬은 기주인들이 원소를 따르는 것을 심히 우려하였으니 조운이 귀부해 온것에 기뻐하여 조운을 놀리며() 말했다,


“듣기로 기주 사람들은 모두 원씨(袁氏)를 원한다던데 그대는 어찌 홀로 마음을 돌리고 미혹되어 이에 반()하는 것이오?”


조운이 대답했다,


“천하가 흉흉하여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으나 백성들이 거꾸로 매달리는 것과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여 비주(鄙州-자신의 주를 겸칭)에서 논의하기를 어진 정치가 있는곳을 따르기로 하였으니 그런 뜻에서 귀부한 것으로 원공(袁公)을 소홀히 하며 명장군(明將軍)을 사사로이따르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여 공손찬과 함께 정토(征討)했다. 당시 선주(先主) 또한 공손찬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늘 조운을 접납(接納)하니 조운이 심히 선주와 결탁하게 되었다. 조운의 형이 죽자 공손찬에게 말해잠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선주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손을 맞잡으며 애틋하게 작별했다. 조운이 말했다,


“끝내 덕()을 저버리지는 않겠습니다.”


선주가 원소(袁紹)에게로가자 조운이 업()에서 그를 만났다. (※)


삼국지집해 / 조운이 유비를 따른 시점 하작 왈조운전 본문에서는 선주가 평원상(平原相)일 때 조운이 이미 그를 수종하며 기병을 이끌었다 했는데, 별전(別傳)에서는 선주가 원소에게로 나아갔을 때 조운이 그를 업에서 만났다 하니 즉 건안 5(200) 뒤의 일이 된다. 이는 본전과 어긋나므로 믿을 수 없다.


/ 서로 직접적으로 배치되는 사안은 아니고별전의 기술이 본전(최초 수행 이후 형주 사이)의 공백을 메꿔주고 보완해 주는 경우로 볼 수있다 생각됩니다.


선주는 조운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잠잤으며, 은밀히 조운을 보내 무리를 모으게 해 수백명을얻었는데 이들이 모두 유좌장군(劉左將軍-좌장군 유비)의 부곡(部曲)이라 칭했으나 원소는 이를 알지 못했다.그리고는 선주를 따라 형주(荊州)에 이르렀다.

 

선주가 당양(當陽) 장판(長阪)에서 조공(曹公-조조)에게 추격당해 처자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나자, 조운이 몸소 어린 아이를 품에 안았으니 즉 후주(後主-유선劉禪)이고 감부인(甘夫人)을 보호했으니 즉 후주의 모친이었으며 이들이 모두 위난을 면할 수 있었다.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올랐다. 선주가 촉()으로 들어갈 때 조운은 형주(荊州)에 남았다. [2]

 

[2] 조운별전 당초 선주(先主)가패했을 때 조운이 이미 북쪽으로 떠났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선주가 수극(手戟)을 내던지며 말했다,


“자룡이 나를 버리고 달아났을리 없다.”


얼마뒤 조운이 도착했다. 강남(江南)을 평정하는데 종군하여 편장군(偏將軍)이 되고 계양태수(桂陽太守)를 겸하여 기존의 계양태수였던 조범(趙範)을 대신했다. 홀몸이 된 조범의 형수 번씨(樊氏)뛰어난 미모가 있었는데, 조범이 그녀를 조운에게 짝지어주려 했다. 조운이 사양하며 말했다,


“우리가 서로 동성(同姓)이니 경의 형이 곧 내 형과 같소.”


굳게 사양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그녀를 맞아들이도록 권하는 사람이 있자 조운이 말했다,


“조범이 급박하게 항복했으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소. 천하에 여자가 적지 않소


그리고는 그녀를 취하지 않았다. 조범이 과연 도주하였으나 조운은 조금도 연루되지 않았다.


그 이전에 하후돈(夏侯惇)과 박망(博望)에서 싸워 하후란(夏侯蘭)을 사로잡았었는데, 하후란은 조운의 향리인(鄉里人) 으로 소소하게 서로 아는 사이였다. 조운은 선주에게 그를살려주도록 청하고 하후란이 법률에 밝다고 천거하여 군정(軍正)으로 삼게했으나 조운이 이로써 그를 가까이 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신려(愼慮-신중하고사려깊음)함이 이와 같았다.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가며 조운에게 유영사마(留營司馬)를 겸하게 했다. 이때 선주의 손부인(孫夫人)은 손권의 여동생으로 교만하고 횡포하여 오()의 관리와 병사들을 여럿 거느리고 거침없이 법을 어겼다. 선주는 조운이 엄중(嚴重)하니 필시 이를 정제(整齊)할 수 있으리라 여겨 특별히 내부의 일을 맡겨 관장하게 했다. 손권은 유비가 서쪽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배들을 대거 보내 여동생을 영접하게 했는데, 부인이 은밀히 후주(後主-유선)를 데리고 오로 돌아가려 하니 조운이 장비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강을 가로막고는 후주를 구해 돌아왔다.

 

선주(先主)가 가맹(葭萌)에서 환군해 유장(劉璋)을 공격하고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등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며 군현들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도착하자 조운을 나누어 보내 외수(外水)를 따라 강양(江陽)으로 올라가게(서진하게) 하니 성도(成都)에서 제갈량과 합류했다. 성도가 평정된 뒤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 [1]

 

[1] 조운별전 익주가 평정된 뒤 당시 사람들이 의논하여 성도의 옥사(屋舍-가옥)와 성 바깥의 원지(園地-과수원), 상전(桑田-뽕밭)을 제장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했다. 조운이 이를 반대하며 말했다,


“ (한무제가 집을 하사하자) 곽거병(霍去病)은 흉노(匈奴)를 아직 멸하지 못했으니 집이 쓸모없다고 하였는데 또한 나라의 적이 비단 흉노만이 아니니 아직 안락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천하가 모두 평정될 때를 기다려 각자 고향로 되돌아가 본래 땅에서 농사짓는 것이 마땅합니다. 익주(益州)의 인민(人民)들은 처음 전란을 겪었으니 논밭과 집들을 모두 되돌려주고 이제 이에 안거(安居)하며 생업에 복귀하게 한 뒤에 부역하게 하고 조(調)를 거둔다면 그들의 환심(歡心)을 얻을 것입니다.”


이에 선주가 이를 따랐다.

 

하후연이 패하자 조공(曹公-조조) 와서 한중 땅을 다투었고 북산(北山) 아래에 군량()을 운반하여 수천만 포대에 달했다. 황충(黃忠)이 가히 이를 탈취할 수 있다 하였고 조운의 군대가 황충을 수행해 군량을 탈취하려 했다.


황충이 기한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이 수십기()를 거느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위(-군사시설의 일종)를 나와 황충 등을 마중하며 상황을살펴보려 했다. 때마침 조공(曹公)이 양병(揚兵-거병;군세를 떨침)하여 대거 출전하니 조운이 조공의 전봉(前鋒)에 의해 공격받아 바야흐로 싸우는데 적의 대군이 도착하여 형세가 핍박되자 적진에 돌진하고 한편으론 싸우며 한편으론 물러섰다. 조공의군(조조군)이 패했다가 다시 합치니 조운이 적을 무너뜨리고는 위()로 달려 되돌아왔다.


장수 장저(張著)가 상처를 입자 조운이 다시 말을 달려 적의 ()으로 되돌아가 장저를 맞이했다.조공의 군이 추격해 위()에 이르렀다.이때 면양장(沔陽長) 장익(張翼) 조운의 위() 안에 있었는데 장익이 문을 닫고 막아 지키려 하였으나 조운이 영()으로 들어와서 다시 문을 활짝 열고는 깃발을 내리고 북치는 것을 멈추었다. 조공의 군은 조운이 복병을 두었을까 의심하여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조운이 하늘을뒤흔들 듯 북을 울리며 오로지 뒤에서 조공의 군에게 융노(戎弩)를 쏘아대니조공의 군이 놀라고 어지러워져 자기들끼리 서로 짓밟았고 한수(漢水)에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선주(先主)가 다음날 아침 조운의 영위(營圍)로 친히 와서 전날 싸운 곳을 둘러보고 말했다,


자룡(子龍)은 일신이 모두 담덩어리()로다.


음악과 술자리를 베풀어 저녁까지 이어졌고, 군중(軍中)에서는 조운을 일컬어 호위장군(虎威將軍-범 같은 위용을 갖춘 장군)이라 했다.

 

손권이 형주(荊州)를 습격하자 선주가 대노해 손권을 치려 했다.조운이 간언하며 말했다,


나라의 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니며 게다가 먼저 위()를 멸하면 오()는 저절로 복종해올 것입니다. 조조는 비록 죽었으나 그의 아들인 조비가 찬탈했으니 응당 뭇사람들의 마음에 의거해 조속히 관중(關中)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수와 위수 상류를 점거해 흉역한 자들을 토벌하면 필시 관동(關東)의 의사(義士)들이 양식을 싸매고 말을 채찍질해 달려와 천자의 군대를 영접할 것입니다. ()를 내버려두고 먼저 오()와 싸워서는 안됩니다. 병세(兵勢)가 한번 엇갈려 교전하게 되면 급히 풀 수 없습니다.


선주가 이를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동쪽을 정벌했고 조운을 남겨 강주를 감독하게 했다. (독강주督江州) 선주가 자귀()에서 실리(失利)하자 조운이 진병해 영안(永安)에 도착했는데 오군(吳軍)은 이미 물러난 뒤였다.

 

건흥 원년(223), 중호군(中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하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했다가 진동장군(東將軍)으로 올렸다.

 

건흥 5(227), 제갈량을 수행해 한중에 주둔했다.

 

그 이듬해(228), 제갈량이 출군하여 야곡도(斜谷道)를 거친다고 양성(揚聲-널리 소문냄)하자 조진()이 대군을 보내 이를 당적했다. 제갈량은 조운과 등지(鄧芝)로 하여금 가서막게 하고 자신은 기산(祁山)을 공격했다. 조운, 등지의 군사들은 약하고 적은 강하여 기곡(箕谷)에서 실리(失利-불리함,싸움에 짐)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이 퇴각한 뒤 진군장군(軍將軍)으로 강등되었다. [2]

 

[2] 조운별전 제갈량이 말했다,


“가정(街亭)의 군이 퇴각할 때는 병졸과 장령들을 다시 서로 수습하지 못했는데 기곡(箕谷)의 군이 퇴각할 때는 병장(兵將)들이 처음처럼 잃은 바가 없으니 어찌된 까닭이오?” 등지(鄧芝)가 대답했다, “


조운이 몸소 뒤를 끊고 군자(軍資-군수물자)와 집물(什物-집기)조차 함부로 버린 일이 거의 없으니 병장(兵將)들을 잃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조운의 군자(軍資)에 여유분의 비단()이 있어 제갈량이 장사(將士-장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니 조운이 말했다,


“군사에이로움이 없었는데(이기지 못했는데)어찌 하사품이 있을 수 있습니까? 청컨대 그 물건들은 모두 적안(赤岸)의 부고(府庫)에 넣어두었다 10월이 되길 기다려 겨울 하사품으로 삼으십시오.”


제갈량이 이를 매우 옳게 여겼다.

 

건흥 7(229)에 죽었다. 시호를 추증해 순평후(順平侯)라 했다.

 

※ <후주전>에의하면 조운의 시호 추증은 경요 4=261년의 일

 

당초 선주(先主) 때에는 오직 법정(法正)만이 시호를 받았다. 후주(後主) 때에는 제갈량은 공덕이 세상을 덮고 장완(蔣琬), 비의()는국가의 중임을 떠맡았으니 또한 시호를 받았다. 진지(陳祗)는 총애를 받아 특별히 특별한 포장이 더해졌고 하후패(夏侯霸)는 멀리 와서 국가에 귀부했으므로 또한 시호를 받았다. 그러다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과 조운이 시호를 추증받았으니 시론(時論)에서는 이를 영예로운 일로 여겼다. [1]

 

법정, 제갈량,장완, 비의, 진지, 하후패는 죽은 뒤에 바로 시호를 받았으며, 그 뒤 이미 오래전에 죽은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경요3)과조운(경요4)에게 특별히 시호를추증한 것입니다. 한편 하후패에 관해서는 기록이 거의 없고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조운전 이 대목을 시간순서대로 기술한 것으로 보면 진지가 죽은 경요 원년(258)~ 관우 등이 시호를 추증받은 경요 3(260) 사이에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1] [조운별전]에 기재된 후주(後主)의 조서에서 이르길,


조운이 지난 날 선제(先 帝-예전 황제 즉 유비)를 뒤따르며 공적(功積)이 이미 현저했고, 짐이 나이어려 간난(艱難)을 겪을 때 그의 충순(忠順)에 힘입어 위험에서 구제되었다.무릇 시호는 그 으뜸되는 공을 잘 드러내야 하는 법이니 바깥에서 조운에게 합당한 시호에 관해 의논하도록 하라.


고 했다. 대장군 강유(姜維) 등이 의논하여 말했다,


조운이 지난 날 선제(先 帝)를 뒤따르며 공적이 이미 현저했고 천하를 경영하며 법도를 준봉했으니 그의 공효(功效)가 가히 기록될 만하며 당양(當陽) 싸움에서는 의로움이 금석(金石)을 꿰뚫듯 하였습니다. ()으로 윗사람을 보위하면 임금이 그에게 상줄 것을생각하고 예()로써 아랫사람을 후대하면 신하는 자신이 죽을 것을 잊게되니, 죽은 자에게 지각이 있다면 족히 불후(不朽)할 것이고 산 자들은 은혜에 감격하여 족히 몸바칠 것입니다. 삼가 시법(諡法)을 살펴보건대, 유현자혜(柔賢慈惠)를 순()이라 하고 집사유반(執事有班)을 평()이라 하며 극정화란(克定禍亂)을 평()이라 하니 조운의 시호로는 순평후(順平侯)가 마땅합니다.

 

조운의 아들 조통(趙統)이 후사를 이었고 관직이 호분중랑(虎賁中),독행령군(督行領軍)에 이르렀다.차자(次子-차남) 조광(趙廣)은 아문장(牙門將)으로 강유(姜維)를 수행해 답중(沓中)에서 싸움에 임하다 전사했다.

 

평한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범 같은 신하)이었다. 관우는 조공(曹公)에게 힘써 보답하고 장비는 의()로써 엄안()을놓아주었으니 아울러 국사(國 士)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강이 굳세고 자부심이 강하고 장비는 난폭하고 은혜롭지 안하여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치의 상례로다. 마초는 융족과 용력에 의지해 자신의 일족을 망쳤으니 애석하구나! 곤궁함에 처하여 이로 인해 태평함으로 나아갔다면 더 낫지 않았겠는가! 황충, 조운은 굳세고 사납고 씩씩하고 용맹하여 아울러 조아(爪牙-발톱과 어금니. 용맹한 무장을 비유)가 되었으니 관(-관영灌嬰), (-등공 하후영夏侯嬰)의 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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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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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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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기사

2014.01.04
03:44:59
(*.110.228.228)
잘 읽었습니다. 중간에 북산의 일신도시담 일화부터 이릉 부분까지는 본전이 아니라 운별전의 내용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재원

2014.01.04
06:29:35
(*.148.50.70)
확인해보니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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