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방통(龐統)은 자(字)가 사원(士元)이고 양양(襄陽) 사람이다. 어려서 투박하고 둔하여 그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영천(潁川)사람인 사마휘(司馬徽)는 청아(淸雅)하여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안이 있었다. 방통이 약관의 나이 때 사마휘를 찾아가 만났는데, 사마휘는 나무 위에서 뽕잎을 따며 방통은 나무 아래에 앉아있게 한 채 낮부터 밤까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사마휘는 그를 매우 남다르게 여기고 방통이 응당 남주(南州) 선비의 출중한 인물이라 칭찬하니 이로 말미암아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주1) 

(주1) [양양기]襄陽記 – 제갈공명은 와룡(臥龍), 방사원은 봉추(鳳雛), 사마덕조(司馬德操-사마휘)는 수경(水鏡)이라 했는데 이는 모두 방덕공(龐德公)이 말한 것이다. 

방덕공은 양양 사람이다. 공명(孔明-제갈량)이 매번 그 집을 방문할 때마다 홀로 상(床) 아래에서 배례했고 방덕공은 이를 그만두게 하지 않았다. 

사마덕조(사마휘)가 방덕공과 일찍이 교유를 튼 것이 면수를 건너다 만나게 되었는데 (방덕공이) 올라가 선인의 묘에 제사지낸다고 하자 덕조가 서둘러 그의 집으로 가서 방덕공의 아내와 자식들을 불러내고는, 서둘러 상을 차리게 하면서, 

'서원직이 곧 손님이 오실 것이니 나더러 가서 방공에게 얘기하도록 하였소' 

라고 하였다. 그러자 방덕공의 처자가 나란히 늘어서 당하에서 절하고는, 분주히 준비를 하였다. 조금 있다가, 방덕공이 돌아와서, 바로 들어와 서로 만나게 되었는데, 누가 이 (온다는) 손님인지 알 수가 없었다.

덕조(德操)의 나이는 방덕공보다 열 살 적어 그를 형으로 섬기며 방공(龐公)이라 불렀으니,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방공이 방덕공의 이름인 줄 알았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방덕공의 아들은 방산민(龐山民)이고 또한 영명(令名-명성, 좋은 평판)이 있었으며, 제갈공명의 작은 누나에게 장가들었다. 위(魏) 황문이부랑(黃門吏部郎)을 역임했고 일찍 죽었다. 

(방산민의) 아들 방환(龐渙)은 자가 세문(世文)이고, 진(晉) 태강(太康: 사마염 280-289) 중에 장가(牂牁) 태수가 되었다. 방통은 방덕공의 종자(從子-조카)이다. 어려서 그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으나 오직 방덕공만이 그를 중하게 여겼다. 나이 18세 때 가서 덕조를 만나보도록 하니, 덕조가 그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어본 뒤 감탄하며 말했다, 

“방덕공은 실로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이 사람은 실로 성덕(盛德-훌륭한 덕)을 지녔다.”

(첨가) 방덕공에 관한 자세한 기술은 『후한서』 권 83 『일민(逸民) 열전』제 73 에 방공 항목이 실려 있습니다. 다른 자세한 것은 여기서 얘기할 필요는 없고 『후한서 일민열전』에도 『양양기』가 주석으로 실려 있는데, 대체적으로 『삼국지』와 같으나 약간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후한서』에 실린 『양양기』에 나머지 뒷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덕공의 아들은 방산민(龐山民)인데, 또한 아름다운 명성이 있었다. 제갈공명의 작은 누나를 아내로 맞았는데, 위나라의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되었으나 일찍 죽었다. 

(방산민의) 아들은 방환(龐渙)으로 자는 세문(世文)으로 진(晉)나라 태강(太康) 연간(280~289)에 장가(  )태수가 되었다. 

방통은 방덕공의 조카인데, 어려서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덕공만이 그를 중히 여겼다. 나이 18세 때, 사마덕조를 가 뵙게 했다. 덕조가 같이 얘기를 나눠 보고는 잠시 후 감탄하며 말하길 

"덕공은 실로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이 아이는 참으로 성덕(盛德)을 가졌다."

고 했다.

참고로 『후한서』와 『삼국지』는 서술대상의 시기는 『후한서』가 먼저지만, 실제 저술된 시기는 『삼국지』가 약간 빠릅니다.]

(※ 한나라 때 양양은 원래 현 이름으로 형주 남군의 속현인데, 조조가 형주를 평정한 뒤 남군의 북쪽을 갈라 양양군을 새로 설치했으므로 방통을 양양 사람이라 한 것이다. 앞에서 방통이 공조로 복무했다는 ‘군’은 바로 앞과 연결해서 ‘양양군’으로 읽힐 수도 있으나, 시기로 볼 때 실제로는 ‘남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군(郡)에서 명하여 공조(功曹)로 삼았다. [功曹; 군의 보좌관으로 공훈을 조사해 기록하는 직책]
 
(※ 한나라 때 양양은 원래 현 이름으로 형주 남군의 속현인데, 조조가 형주를 평정한 뒤 남군의 북쪽을 갈라 양양군을 새로 설치했으므로 방통을 양양 사람이라 한 것입니다(군명을 기준으로 하는 게 원칙) 앞에서 방통이 공조로 복무했다는 ‘군’은 바로 앞과 연결해서 ‘양양군’으로 읽힐 수도 있으나, 시기로 볼 때 실제로는 ‘남군’을 말하는 것이겠죠)
 
그 성정은 사람을 견줘보는 것(人倫)을 좋아하고 길러서 양성하는데 부지런했다. 매번 칭찬하는 바가 그 재주를 넘어 과다하니 당시 사람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방통이 대답했다,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바른 도가 쇠퇴하니 선인이 적고 악인이 많습니다. 바야흐로 풍속을 일으키고 도업(道業)을 기르려 하는데, 그 칭술하는 말을 아름답게 하지 않으면 명성이 흠모하며 따르기(慕企)에 부족할 것이고, 흠모하여 따르기에 부족하면 착한 일을 하는 자가 적을 것입니다. 이제 열을 뽑아 다섯을 잃는다 해도 오히려 그 절반을 얻는 것이고, 세상의 교화를 높이고 뜻있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힘쓰게 할 수 있으니 또한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吳) 의 장수 주유(周瑜)가 선주(先主-유비)를 도와 형주를 차지하고 이로 인해 남군(南郡)태수를 겸했다. 주유가 죽자 방통은 상여를 운구해 오(吳)에 이르렀는데, 오인(吳人)들이 그의 명성을 많이 듣고 있었다. 방통이 서쪽으로 돌아가려 할 때 함께 창문(昌門-오군 서쪽의 곽문(郭門-외곽 문)으로 부차夫差가 만든 것/오주전 배송지 주)에서 모였는데, 육적(陸勣), 고소(顧劭), 전종(全琮)이 모두 참석했다. 
 
방통이 말했다, 

“육자(陸子-육적의 경칭)는 노마(駑馬-굼뜬 말)라 이를 만하니 매우 빠른 발의 힘을 지녔고, 고자(顧子-고소)는 노우(駑牛-굼뜬 소)라 이를 만하니 능히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까지 갈 수 있습니다.” (주2) 

(주2) 장발(張勃)의 오록(吳錄) – 어떤 이가 방통에게 물었다, 

“그대가 보기에 육자(陸子)가 가장 낫다는 것입니까?” 

방통이 말했다, 

“노마(駑馬)가 비록 빼어나지만 한 사람을 감당할 뿐입니다. 노우(駑牛)는 하루에 3백리를 가니 어찌 한 사람을 중함에 비하겠습니까!” 

고소가 방통의 숙소로 찾아와 대화하다가 물었다, 

“경은 사람을 알아보기로 유명한데, 저와 경을 비교하면 누가 더 낫습니까?” 

방통이 말했다, 

“세 속을 도야(陶冶)하고 인물을 견종(甄綜-품평)하는 데는 제가 경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제왕(帝王)의 비책(秘策)을 논하고 의복(倚伏-길흉화복 성패가 서로 인연이 되어 맞물려 도는 것)의 요최(要最-요체)를 파악하는 데는 제가 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고소가 그 말에 만족해하며 친근히 대했다.

전종에게 말했다, 

“경은 베푸는 것을 좋아하고 명성을 흠모하니 여남의 번자소(樊子昭)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주3) 

(주3) 장제(蔣濟)의 만기론(萬機論) – 허자장(許子將-허소許劭)의 포폄(褒貶-칭찬과 폄하)이 불공평하여 번자소(樊子昭)를 올리고 허문휴(許文休-허소의 종형인 허정許靖)를 억눌렀다. 유엽(劉曄)이 말했다, 

“번자소는 고수(賈豎-장사꾼)에서 발탁되어 나이 이순(耳順-60세)에 이르렀는데, 물러나서는 평정을 지키고 나아가서는 구차하지 않았습니다.(不苟)” 

장제가 답했다, 

“번자소는 실로 나이 들어서나 어려서나 온전하고 깨끗한 사람이나 그가 치아를 찧고 뺨을 세워 말을 내뱉는 것을 살펴보면 스스로 문휴(文休)의 적수가 아닙니다.” 胲의 음은 改

비록 지력(智力)이 많지는 않으나 또한 한 시대의 뛰어난 인물입니다.” 

육적, 고소가 방통에게 말했다, 

“천하가 태평해지면 응당 경과 더불어 사해(四海-천하)의 선비들을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방통과 서로 깊이 친교를 맺고 되돌아갔다.
 
선주(先主-유비)가 형주(荊州)를 다스리게 되자 방통을 종사(從事-주목의 속관) [從事; 주 자사를 보좌하는 관직으로 주로 문서담당]로 삼고 뇌양령(耒陽令-계양군 뇌양현의 현령)을 맡게 했는데, 현에 있으면서 제대로 다스리지 않아 면관(免官)되었다.
 
오(吳)의 장수 노숙(魯肅)이 선주에게 서신을 보냈다, 

“방사원은 백리재(百里才-사방 백리를 다스릴 재주. 범상한 인물)가 아니니, 치중(治中), 별가(別駕)의 임무를 맡겨야 비로소 그 뛰어난 재능을 충분히 펼칠 것입니다.” 
 
제갈량도 또한 선주에게 이를 말하자 선주가 방통을 만나 얘기를 나누어보고 크게 평가하여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삼았다. (주4) 

(주4) [강표전]江表傳 – 선주는 방통과 함께 종용(從容-여유있음; 풍족함)히 연회를 열어 대화를 나누었다. 방통에게 물었다, 

“경이 주공근(周公瑾-주유)의 공조(功曹)였을 때 내가 오(吳)에 갔었소. 듣기로 이 사람이 은밀히 중모(仲謀-손권)에게 말해 나를 머물러 두게 할 것을 권했다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소? 주인에 속해 있을 때는 그 주인을 위하는 법이니(在君爲君) 경은 숨김없이 말해 보시오” 

방통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유비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그때 위급하여 응당 요청할 것이 있어 이 때문에 갈 수 밖에 없었는데, 하마터면 주유의 손을 벗어나지 못할 뻔 했구려! 천하의 지모 있는 선비들은 그 소견이 대체로 같소이다. 그때 공명이 내가 가면 안 된다고 간언하며 그 뜻이 홀로 독실했으니 또한 이 일을 우려한 것이었소. 나는 중모(仲謀)가 방비하는 곳은 북쪽이니 응당 내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 때문에 (오로 갈 것을) 결의(決意-결심)하고 의심하지 않았소. 실로 위급한 지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만전의 계책은 아니었소.” 

친밀히 대우함이 제갈량에 버금갔고 마침내 제갈량과 함께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았다. (주5) 

(주5) [구주춘추]九州春秋 – 방통이 유비를 설득했다, 

“형주는 황폐해져 사람과 물자가 고갈되었고, 동쪽으로 오(吳)의 손권이 있고 북쪽으로 조씨(曹氏)가 있어 정족지계(鼎足之計)의 뜻을 펼치기에 곤란합니다. 지금 익주(益州)는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강성하여, 호구수 백만에 사부 병마(四部兵馬)로 나오는 바가 잘 갖춰져 있으니 보화(寶貨)를 밖에서 구할 필요 없이 지금 임시로 빌려 대사를 정할만 합니다.”

유비가 말했다,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急)하면 나는 관(寬-너그러움)하고 조조가 포(暴-사나움)하면 나는 인(仁)하고 조조가 휼(譎-속임)하면 나는 충(忠)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지금 사소한 이유(小故)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방통이 말했다, 

“권변(權變-형편에 맞추어 대응함)할 때는 오직 한 가지 길로 평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겸약공매(兼弱攻昧-약한 자를 아울러 강한 자를 공격함)는 오백(五伯-춘추오패)이 했던 일입니다. 역취순수(逆取順守-역리로 취하되 순리로 지킴)하여 의리로 보답하고 대사가 이룬 뒤 대국(大國)에 봉해 준다면 어찌 신의에 위배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끝내 남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 

유비가 마침내 이를 행했다.
 
제갈량은 남아서 형주를 진수하고 방통은 (선주를) 수종(隨從)해 촉으로 들어갔다.
 
익주목 유장(劉璋)이 선주와 부(涪-광한군 부현)에서 만났다. 방통이 계책을 올렸다, 

“지금 이 모임을 틈타 유장을 붙잡는다면 장군께서는 용병의 수고로움 없이 앉아서 한 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선주가 말했다, 

“이제 막 다른 나라로 들어와 은혜와 신의를 아직 드러내지 못했는데 그리 할 수는 없소” 
 
유장이 성도로 돌아간 뒤 선주가 유장을 위해 북쪽으로 한중(漢中)을 정벌하려 했다. 
 
방통이 다시 설득했다.
 
- "은밀히 정병을 뽑아 밤낮으로 겸도(兼道-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감)해 곧바로 성도를 습격하십시오. 유장은 불무(不武-굳세지 못함. 무략이 없음)한데다 또한 평소 대비가 없어, 대군이 창졸간에 도착하면 일거에 평정할 수 있으니 이것이 상계(上計-상책)입니다. 
 
양회(楊懷), 고패(高沛)는 유장의 명장으로 각각 강병들을 거느리고 관두(關頭-관문, 요긴한 길목)를 점거해 지키며, 듣기로 여러 차례 유장에게 전(牋-상주문, 서신)을 올려 장군을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간언했다 합니다. 장군께서 이르기 전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고 형주에 위급한 일이 있어 되돌아가 이를 구원하려 한다고 하며, 아울러 행장을 꾸려(裝束) 겉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하십시오. 이 두 사람은 장군의 영명(英名)함에 감복하고 있었던 데다 또한 장군이 떠난다는 것에 기뻐하여 필시 경기(輕騎-가벼운 차림의 말)를 타고 만나러 올 것이니, 장군께서 이 틈을 타 그들을 붙잡고 진격하여 그 군사를 차지하고 이내 성도로 향하십시오. 이것이 중계(中計-중책)입니다. 
 
백제(白帝)로 물러나 형주와 연결하고 서서히 돌아와 도모하는 것이 하계(下計-하책)입니다. 만약 망설이며 거행하지 않으면 장차 오래지 않아 큰 곤란을 겪을 것입니다.” 
  
선주는 중계(中計)를 옳게 여겨 양회, 고패를 참수하고 군사를 되돌려 성도로 향했고 지나는 곳마다 번번이 이겼다. 
 
부(涪) 에서 큰 모임을 열어 술을 차리고 음악을 연주케 했다. 방통에게 말했다, 

“오늘 모임이 가히 즐겁구려.” 

방통이 말했다, 

“남의 나라를 치고 즐거워하는 것은 어진 이(仁者)의 군대가 아닙니다.” 

선주가 술에 취해 있었는데 노하여 말했다, 

“무왕(武王)이 주(紂)를 치며 그 앞뒤로 노래 부르고 춤췄는데 그도 어진 이가 아니었단 말이오? 경의 말이 맞지 않소. 속히 일어나 나가시오!” 

이에 방통이 머뭇거리며 물러났다. 
 
선주는 곧 후회하고는 되돌아오도록 청했다. 방통이 다시 예전 자리로 돌아왔으나 돌아보고 사죄하지 않으며 태연자약하게 먹고 마셨다. 선주가 말했다, 

“조금 전의 논의에서 누가 잘못한 것이오?” 

방통이 대답했다, 

“군신(君臣)이 함께 잘못했습니다.” 

선주가 크게 웃으며 당초처럼 술자리를 즐겼다. (주6)
 
(주 6) 습착치(習鑿齒)가 말했다 – 무릇 패왕(霸王)은 필히 인의(仁義)를 갖추어 이를 근본으로 삼고 신순(信順)에 기대어 이를 근원으로 삼으니, 한 가지라도 갖추지 못하면 그 도가 어그러지는 법이다. 이제 유비가 유장의 땅을 습격하여 빼앗고 권(權-권도, 권의)으로 일을 이루니, 신(信)을 저버리고 정(情)에 어긋나 덕의(德義)가 함께 잘못되었다. 비록 이로 말미암아 공(功)이 융성하다 하나 의당 크게 상하고 패한 것으로, 비유컨대 손을 끊어 몸을 보전한 격이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방통은 이 말이 설선(泄宣-누설)될까 두렵고 그 주인이 필히 깨우칠 것임을 알아 이 때문에 뭇 사람들 속에서 그 실수를 바로잡으니, 상겸(常謙-늘 겸손함)의 도를 갖추지 않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건악(蹇諤-기탄없이 간언함)의 기풍을 다하였다. 무릇 위에서 잘못했을 때 능히 바로잡을 수 있으면 이는 신하가 있는 것이고(有臣), 납승(納勝-나은 것을 받아들임? 바쳐올림?)하여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치에 따르는(從理) 것이다. 신하가 있으면(有臣) 폐륭당고(陛隆堂高-섬돌이 융성하고 당이 높아짐?)하고 이치에 따르면(從理) 군책(群策-여러 모책들)이 모두 거행된다. 한마디 말로 세 가지 선(善)이 겸하여 밝혀지고 잠시 간언하여 백대에 걸쳐 의를 밝히니 가히 대체(大體-큰 줄거리)에 통달했다 이를 만하다. 작은 손실을 아까워하여 큰 이로움을 폐하고 지나친 말을 조심하여 스스로 직언을 끊고 멀리하면서 능히 대업을 이루고 일을 성공시킨 자는 일찍이 없었다. 
 
/ 신 송지가 보건대(주석자인 배송지의 견해), 유장을 습격하도록 꾀한 것은 그 계책이 비록 방통에게서 나왔으나, 의로움을 거슬러 공을 이루고 본래 궤도(詭道-부정한 방법, 속임수)에 말미암은 것이라 내심 꺼림칙하여 즐거운 마음은 절로 그치게 마련이니, 이 때문에 유비가 즐거워하는 말을 듣고 무심결에 경솔하게 대답한 것이다. 유비가 술자리를 한창 즐긴 것은 시의에 맞지 않아 그 일은 화를 즐기는 것(樂禍)과 같은데, 자신을 무왕에 비교하며 더더욱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유비의 잘못이고 방통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군신이 함께 잘못한 것’이라 말한 것은 아마도 (유비에게 향할) 비방의 말을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습씨(習氏-습착치)의 견해는 추연(推演-미루어 넓힘)한 말로 유탕(流宕-문장이 막힘없이 유창함)한 말을 한 것에 가깝다.
 
진격하여 낙현(雒縣- 광한군 낙현)을 포위했다. 방통은 군사를 이끌고 성을 공격하다 날아온 화살(流矢)에 맞아 죽으니 그때 나이 36세였다. 선주가 통석(痛惜-몹시 애석하게 여김)해 하니 말할 때 눈물을 흘렸다. 

방통의 부친을 의랑(議郎)으로 삼고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승진시켰으며 제갈량이 친히 임명했다. 방통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정후(靖侯)라 했다. 
 
방통의 아들 방굉(龐宏)은 자가 거사(巨師)이고 강직 대범하며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었다. 상서령 진지(陳祗)를 경오(輕傲-경멸함)하여 진지에게 억눌림을 받았고 부릉(涪陵)태수로 재직 중에 죽었다. 
 
방통의 동생 방림(龐林)은 형주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진북장군 황권(黃權)에 참여해 오(吳)를 정벌했는데 군이 패하게 되자 황권을 따라 위나라로 들어갔다. 위나라에서 열후로 봉했고 관직이 거록태수에 이르렀다. (주7)
 
(주 7) [양양기]襄陽記 – 방림(龐林)의 부인은 같은 군(郡) 사람인 습정(習禎)의 누이동생이다. 습정의 일은 양희(楊戱)의 (계한)보신찬(輔臣贊)에 있다. 조공(曹公-조조)이 형주를 격파하자 방림의 부인은 방림과 헤어져 10여 년 동안 수절하며 어린 딸을 길렀는데, 그 뒤 방림이 황권을 따라 위나라에 항복하니 비로소 다시 모일 수 있었다. 위(魏) 문제(文帝-조비)는 이를 듣고 어질게 여겨 상장(床帳-침상의 휘장), 의복(衣服)을 하사해 그 의절(義節)을 현창했다.

진수의 평: 방통은 평소 인류(人流-사람을 견줘보는 것)와 경학(經學), 사모(思謀-모책을 생각함)를 좋아하니 형(荊), 초(楚) 땅에서 그를 고준(高俊)이라 일컬었다. 법정은 일의 성패(成敗-성공과 실패)를 보는데 뛰어나고 기획(奇畫-기이한 꾀), 책산(策算-계책,계산)을 지녔으나 평소 덕이 있다 칭송되지는 못했다. 위나라 신하에 견주자면 방통은 순욱의 중숙(仲叔-형제, 막상막하)이고 법정은 정욱, 곽가의 주려(儔儷-견줄만한 짝, 동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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