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張昭)의 자는 자포(子布)이며 팽성(彭城)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예서(隸書)를 잘 썼는데, 백후(白侯) 자안(子安)에게서 『좌씨춘추(左氏春秋)』를 수업 받고, 많은 책을 널리 보았으며, 낭야(琅邪)의 조욱(趙昱), 동해(東海)의 왕랑(王朗)과 같이 이름을 날리며 벗으로 사귀었다. 약관 때에 효렴으로 천거되었으나 가지 않고, 왕랑과 함께 옛 임금의 휘(諱)에 관한 문제를 논하니, 고향의 재사(才士)인 진림(陳琳) 등이 모두 잘했다고 칭찬하였다. 

時汝南主簿應劭議宜為舊君諱,論者皆互有異同,事在風俗通。昭著論曰:「客有見大國之議,士君子之論,云起元建武已來,舊君名諱五十六人,以為後生不得協也。取乎經論,譬諸行事,義高辭麗,甚可嘉羨。愚意褊淺,竊有疑焉。蓋乾坤剖分,萬物定形,肇有父子君臣之經。故聖人順天之性,制禮尚敬,在三之義,君實食之,在喪之哀,君親臨之,厚莫重焉,恩莫大焉,誠臣子所尊仰,萬夫所天恃,焉得而同之哉?然親親有衰,尊尊有殺,故禮服上不盡高祖,下不盡玄孫。又傳記四世而緦麻,服之窮也;五世袒免,降殺同姓也;六世而親屬竭矣。又曲禮有不逮事之義則不諱,不諱者,蓋名之謂,屬絕之義,不拘於協,況乃古君五十六哉!邾子會盟,季友來歸,不稱其名,咸書字者,是時魯人嘉之也。何解臣子為君父諱乎?周穆王諱滿,至定王時有王孫滿者,其為大夫,是臣協君也。又厲王諱胡,及莊王之子名胡,其比眾多。夫類事建議,經有明據,傳有徵案,然後進攻退守,萬無奔北,垂示百世,永無咎失。今應劭雖上尊舊君之名,而下無所斷齊,猶歸之疑云。曲禮之篇,疑事無質,觀省上下,闕義自證,文辭可為,倡而不法,將來何觀?言聲一放,猶拾瀋也,過辭在前,悔其何追!」    

당시 여남(汝南)의 주부(主簿)인 응소(應邵)가 옛 임금을 위해 휘해야 하는 문제에 관해 의논하였다는데 논자들이 다 서로 달랐으니, 이에 관한 일이 『풍속통(風俗通)』에 실려 있다. 응소가 저술한 것에 논하길「빈객이 대국의 의논과 사군자들의 논의를 보니 말하길 건무 기원 이래 옛 임금들의 명휘가 56명인데 이를 후생들이 같이 쓸 수 없다고 여겼다. 경론(經論)에서 취하고 여러 일에서 비유하니, 그 뜻은 높고 말은 아름다워 심히 훌륭하게 뛰어났다. 어리석고 얇은 소견으로는 적이 이것에 의심이 있다. 무릇 하늘과 땅이 나눠지고, 만물에 형상이 정해지니, 부자와 군신의 조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성인들은 하늘의 품성을 따라 예를 제정하고 존경하니 3가지 의(義: 곧 아버지, 스승, 임금)에 있어서는 임금이 실로 녹을 내려 먹이고 초상의 슬픔에 있어서는 임금이 친림하니 후함에 이보다 무거운 것이 없고, 은혜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어 실로 신하가 받들어 높이어야 되고, 만부(萬夫)가 하늘처럼 신뢰하는 바가 되니 어찌하여 같이 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친근한 사람을 친근하게 대하는 것에도 쇠해지는게 있고 존중할 만한 사람을 존중하는 것도 등급이 있어 예복은 위로 고조에 이르지 않고 아래로는 현손에 이르지 않는다. 또한 전기에 이르길 4세는 시마복을 입으니 상복의 끝이고 5세는 단문을 하니 등급을 내려 동성과 같이 한 것이고 6세는 친속의 개념이 끝난다. 또한 곡례에 부모를 섬기지 않았다면 조부모의 휘를 피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는 즉 피하지 않는 것은 곧 이름을 말한 것이고 이어짐이 끊어졌다는 뜻은 더불어 쓰는 문제에 구속되지 않는 다는 것인데 하물며 마침내 옛날의 임금 56명이겠는가! 주자가 회맹하고 계우가 돌아올 때 그 이름을 칭하지 않고 모두 자를 썼는데 당시에 노나라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어찌 신하가 임금의 휘를 피했다고 해석 할 수 있겠는가? 주 목왕의 이름이 만(滿)인데 정왕의 시대에 이르러 왕손만이란 사람이 있어 대부가 됐고 이는 신하가 임금과 이름을 더불어 쓴 것이다. 또한 주 여왕의 이름은 호(胡)인데 장왕의 아들의 이름이 호(胡)였으니 예를 들 수 있는 게 굉장히 많다. 무릇 일의 종류에 따라 건의하되 경에 명백한 근거가 있고 전에 증거가 될 만한 사안이 있은 연후에 나아가 공격하고 물러나 수비하면 절대 질 우려가 없으니 백세에 내보여도 영원히 잘못이 없다. 지금 응소가 비록 위로 옛 임금의 이름을 존경하나 아래로 끊어지는 것이 없으니 오히려 의문이 든다. 곡례의 편장에 의심나는 일에 대한 대답이 없으나 위 아래를 보건대 의미가 절로 증명되는데 문사를 가히 할 수 있고 창도하지만 본받지 않는다면 장래에 무슨 볼 것이 있겠는가? 언성이 한번 발해지면 오히려 땅에 떨어진 물을 수습하는 것과 같아 잘못된 말이 앞에 있으면 후회가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자사 도겸(陶謙)이 무재(茂才)로 천거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도겸은 자신을 얕본 것이라 생각하니, 마침내 체포되게 되었다. 조욱이 온 힘을 기울려 구하려 노력하니, 이로써 풀려날 수 있었다.

한말에 대란이 일어나, 서주지역의 사민(士民)들이 많이들 양주(楊州) 지역으로 피난했는데, 장소도 함께 남으로 장강을 건넜다.

손책이 창업을 하고서는 장소에게 명하여 장사(長史), 무군중랑장(撫軍中郞將)으로 삼아 당에 올라 그의 모친에게 절하고, 어깨를 나란히 했던 옛 친구처럼 대하며, 문무의 일은 일체 장소에게 위임했다. 

[주 : 『오서(吳書)』에 이르길: 손책이 장소를 얻고선 매우 기뻐하며 말하길

“내가 바야흐로 사방을 경략할 일이 있어 사인(士人) 중 현자를 높이는데, 내가 그대에 대해서 가벼이 할 수 있겠소”

라 하고, 이에 높인 자들을 교위로 삼고, 사우(師友)의 예로써 대하였다.

장소가 매번 북방의 사대부들과 서신을 교환하였는데, 한결같이 장소 자신에 대해 찬미함을 돌리는 것들이라, 장소는 조용히 하고 드러내지 않으면 사사로움이 있을까 두렵고, 드러내면 의당한 일이 아닐까 걱정되어 진퇴가 불안하였다. 손책이 이를 듣고, 기뻐 웃으며 말하길

“옛날 관중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자, 첫째도 중부(仲父)라 하였고 둘째로 중부라 하였더니, 환공이 패자 중에서 으뜸이 되게 하였소. 지금 그대가 나를 위해 현철함을 베풀고, 내가 능히 그것을 쓰니, 그 공명은 나에게만 있지 않소.”

라 했다.

손책이 임종할 때, 아우 손권을 장소에게 부탁하니, 장소가 관료들을 거느리고 손권을 세워 보좌했다. 

[주 : 『오력(吳歷)』에 이르길: 손책이 장소에 말하길

“만약 중모(仲謀=손권)가 임을 맡지 못하면, 그대가 편의대로 직접 취하시오. 다시 바로잡는 것에는 이겨내지 못했지만, 천천히 걸어 서쪽으로 돌아가니 또다시 더 생각할 바 없구나”

라 했다.


한(漢)왕실에 표를 올리고, 속성(屬城)들을 아래로 옮기고, 중외의 군교를 거느리며 각자 직무를 받들도록 영을 내렸다. 손권이 비통해 하며 정사를 보지 않자, 장소가 손권에게 말하길 “무릇 후사가 된 자로써 능히 선현의 앞길을 짊어져야 창성(昌盛)하고 아비의 사업을 이어받아서 훈업(勳業)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천하가 솥에서 끓고 있는 듯 하고, 뭇도둑들은 산에 가득한데, 효렴이 어찌 슬픔에만 겨워 필부의 정을 방자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라 하고, 이에 자신이 손권을 부축해 말에 태우고 병사들을 진열해 놓고 나오니, 그런 연후에야 민심이 돌아갈 곳을 알았다. 

장소가 다시 장사(長史)가 되었고 신임 받기가 이전과 같았다. 

[주 : 『오서』에 이르길: 이 때 천하가 분열되어 왕명을 천단하는 자가 많았다. 손책은 공업을 이룬지 일천하고 은택은 스며들지 않아,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릴 수 있으니, 사민(士民)들은 낭패하여 자못 같고 다른 마음이 있었다. 장소가 손권을 보좌하면서 백성들은 편안히 어루만지고, 제후와 빈객 및 더부살이 하는 선비들도 절로 편안하게 되었다. 손권이 매양 출정하면, 장소를 남겨 진수(鎭守)토록 하고, 막부(幕府)의 일을 통령하게 했다. 후에 황건적이 봉기하자, 장소가 이를 토벌하여 평정했다. 손권이 합비를 정벌할 때, 장소에게 명하여 따로 광기(匡琦)를 토벌하게 하고, 또한 여러 장수들을 감독하여 통령하도록 하며, 예장의 적이 이끄는 주봉(周鳳)을 남성(南城)에서 공격해 격파하였다. 이 이후로 다시 장수가 되는 일은 드물었고, 항상 좌우에 있으면서, 모신(謀臣)이 되었다. 손군이 장소를 오랜 신하라고 하여 대우함이 매우 중하였다.

후에 유비가 표를 올려 손권을 행 거기장군(行 車騎將軍), 장소를 군사(軍師)로 삼았다. 손권이 매양 사냥(田獵)을 할 때면 항상 말에 타서 범에 활을 쏘니, 범도 항상 앞으로 돌진하여 말안장을 끌어 잡았다. 장소가 안색이 변하여 앞에 나가 말하길

“장군께서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십니까? 무릇 인군된 자는 영웅들을 말 태우고 제현들을 몰아 가지, 어찌하여 들판에서 급히 쫓아가 맹수보다 더한 용맹함을 과시하는 것입니까? 만약 하루아침에 우환거리라도 생긴다면 천하가 뭐라 비웃겠습니까?”

라 했다. 손권이 장소에게 사죄하길

“나이가 어려 생각하는 깊지 못했고. 이 때문에 그대에게 부끄럽소”

라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후에도) 그치지 않았으니, 이에 범을 쏘는 수레를 만들어 이를 방목(方目)으로 삼고, 그 가운데 덮개를 두지 않고 한사람에게 몰게 하여, 자신이 직접 가운데 사격하였다. 이때 뒤쳐지던 동물들이 번번이 다시 이 수레를 범접하였으나, 손권은 매양 손으로 쳐내는 것을 즐겨 했다. 장소가 비록 간쟁했어도 항상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위나라 황초(黃初; 문제 조비 때의 연호) 2년(221), (조위에서) 사자 형정(邢貞)을 보내 손권을 오왕(吳王)에 배수했다. 형정이 궐문에 들어왔지만 수레에서 내리지 않았다. 장소가 형정에게 말하길

“무릇 예란 공경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래서 법은 행해지지 않음이 없소. 그러나 그대가 스스로를 존대(尊大)하고, 어찌 강남은 작고 약하다 여기나 마음의 칼마저 없다고 보는가!”

라 했다. 형정이 곧장 황급히 수레에서 내려, 장소를 수원(綏遠)장군으로 배수하고, 유권후(由拳侯)에 봉했다.

[ 주 : 『오록』에 이르길: 장소와 손소(孫紹), 등윤(縢胤), 정례(鄭禮)등이 주나라와 한나라에서 조정의 의례를 채용해 선정했다.

손권이 무창에 와서 조대(낚시대?)를 세우고 술을 마시다 크게 취했다. 손권이 사람을 시켜 그 자리에 모인 신하들에게 물을 뿌리며(즉 물을 뿌려서 술을 깨우며?) 말하기를,

"오늘 술자리가 흥겨우니, 취하여 이 대 위에서 떨어진 후에야 비로소 (술자리를) 그칠 것이오."

장소는 정색하며 말하지 않고, 수레 속에 앉아 밖으로 나갔다. 순권이 사람을 시켜 장소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손권이 말하길

“함께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을 뿐인데, 공은 어찌하여 화내시오?”

라 하니, 장소가 대답하길

“옛날 (하나라) 주(紂)왕이 술지게미를 언덕같이 쌓고 술로 된 연못을 만들어 긴긴 밤동안 마셔대었는데, 당시에도 또한 이를 좋아했지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손권이 묵묵히 그렇다 여겨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으니, 마침내 주연을 파했다.

처음, 손권이 당시 승상(丞相)을 두었으나, 여러 의논이 장소에게 귀착되었다. 손권이 말하길

“지금 일이 많아 통괄하는 직책의 사람은 책임이 막중하니, 걱정할 바 아니오”

라 했다.

후에 손소(孫邵)가 죽자, 뭇 신료들이 다시 장소를 천거하니, 손권이 말하길 “내가 어찌 자포에게 애정을 가지겠소? 승상의 일이 번잡하지만 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말하는 바를 따르지 않아 원한과 허물이 장차 생겨나는데, 이를 더할 수는 없소”라 했다. 이에 고옹(顧雍)을 등용했다.

손권이 존호를 칭하게 되자, 장소는 노병(老病)으로 해서 관위 및 통령하는 바를 위로 돌려보냈다.

[주 : 『강표전』에 이르길: 손권이 제위에 오르게 되자 백관들을 소집하고는 주유에게 공을 돌렸다. 장소가 홀(笏)을 들어 그의 공덕을 상찬(賞讚)하고 싶었으나 채 말하기 전에, 손권이 말하길

“만약 장공의 계책같이 했다면, 지금쯤 이미 밥이나 빌어먹고 있을 것이오.”

라 했다. 장소가 크게 부끄러워 땅에 엎드려 땀을 흘렸다. 장소는 충성스럽고 명석 강직하며, 대신(大臣)의 절개가 있어서 손권이 그를 존경하고 중하게 여겼으나, 장소가 재상의 재목이 아니라고 본 것은, 무릇 옛날 주유 노숙 등의 의논이 그릇되다고 논박한 것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 송지가 살피건대, 장소가 조공을 영접하는 것을 찬성하였다 하여, 어찌 (오나라를) 보전하는 것과 멀지 않았겠는가? 무릇 정색하고 손씨를 인질로 보내어서, 진실로 액운이 처음 생기고 도탄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할 때, 손책에서 손권에 이르기까지 재주와 계략을 족히 보좌하니 이로써 광필(匡弼)을 실로 다하여서 대업을 이루어서, 위로는 한실의 울타리가 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을 보전하게 되었다. 정치(鼎峙)의 계략은 본래 그의 뜻이 아니었다. 조공이 무력에 순응해 일어나, 의를 세운 공을 세웠고, 중화를 한번에 말끔히 쓸어버리기를 바래서, 형영(荊郢)지역을 개척해 평정하여 크게 평정하려는 때가 바로 그 때에 있었다. 만약 장소의 의견을 따르게 했다면, 천하가 하나가 되었으니, 어찌 병란이 일어나 화가 맺어져서, 마침내 전국(戰國)의 폐단이 생겨났겠는가! 비록 손씨에게 공은 없을 지라도 천하에는 크게 당연한 것이었다. 옛날 두융(竇融)이 한에 귀부할 때, 나라를 들어 항복했고, 장로가 위에 항복하자, 그 상(賞)이 대대로 이어졌다. 하물며 손권이 전 오나라를 들어 바람을 기다리며 순복(順服)했다면, 그 총애가 후했음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도다! 그러한즉 장소가 책모한 것이 어찌 충성스럽고 바르지 않단 말인가!


손권이 장소를 다시 보오장군(輔吳將軍)으로 임명하고, 지위는 삼공 다음 가도록 했으며, 누후(婁侯)로 바꿔 봉하고 식읍 1만 호를 주었다. 그는 집안에서 일 없이 있었으므로 《춘추좌씨전해(春秋左氏傳解)》와 《논어주(論語注)》를 지었다.

손권은 일찍이 위위 엄준(嚴畯)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렸을 때 외운 책을 암송하고 있소? "

엄준은 그래서 《효경(孝經)》의 〈중니거(仲尼居)〉를 외었다. 장소가 말했다.

"엄준은 비루한 서생입니다. 신이 폐하를 위해 외우기를 청합니다."

그리고는 곧 〈군자지사상(君子之事上)〉을 외웠다. 모두들 장소가 암송하고 있는 부분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장소가 매양 조현(朝見)할 때면, 말하는 기운이 장려(壯厲)하고 의로써 안색의 형상을 삼는지라, 직언을 하다 왕의 뜻을 거슬러서, 도중에 진현(進見)하지 못하게 되었다. 후에 촉의 사산이 왔는데, 촉나라의 덕이 아름다움을 칭찬하자, 여러 군신들이 반박하지 못하니, 손권이 탄식하며 말하길

“장공이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는 꺾이지 않고 입을 다물게 했을 테니, 어찌 (사신이) 다시 스스로 과장할 수 있겠는가?”

라 했다. 다음날, 중사(中使)를 보내 위문하고 이로 인하여 장소를 부르도록 청하였다. 장소가 자리를 피하여 사죄하니, 손권이 무릎꿇어 그치게 하였다. 장소가 좌정하고 우러러 말하길

“옛날 태후와 (장사)환왕께서는 이 노신을 폐하에게 속하지 않게 하였는데, 폐하께서 노신을 부리시니, 이로써 신하의 절개를 생각해 다하였고, 보답으로 은혜를 후히 베푸시니, 세상이 망한 후에도 가히 칭술(稱述)할만 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뜻과 생각이 얕고 짧아 성지(聖旨)를 거슬렀기에, 스스로를 분별하기로 숨어있고 오랫동안 구덩이 속에 내처져서, 다시 인견(引見)할 것을 도모하지 않았는데, 장악(帳幄)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우둔한 생각으로는 나라를 섬기는 까닭은 그 뜻이 충성을 더하는 것에 있고, 명이 다했으나 물러나야 합니다. 만약 변심하고 생각이 바뀌어서 구차스레 영화로써 용납됨을 취하는 것은 이 신하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라 했다. 손권이 말로 그에게 사과했다.

손권은 공손연(公孫淵)이 칭번(稱藩)하자, 장미(張彌), 허안(許晏)을 보내 요동으로 가서 공손연을 연왕(燕王)으로 배수하게 하니, 장소가 간언하길

“공손연은 위나라를 배신하여 토벌될까 두려워하여, 멀리서 와서 구원을 요구하는 것으로 본래 의도가 아닙니다. 만약 공손연이 계획을 바꿔 위나라와 다시 친하게 된다면, 두 사신은 돌아오지 못하고 또한 천하에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라 했다. 손권과는 의견이 서로 상반되자, 장소의 뜻은 간절하였다. 손권이 참지 못하고, 칼을 어루만지며 노하여 말하길

“오나라 사인(士人)들이 궁에 들어오면 나(孤)에게 절하지만, 궁을 나가면 그대에게 절하고, 내가 그대를 공경하는 것이 또한 지극한데, 수차례 중신들 앞에서 내 뜻을 끊어 놓으니, 내가 일찍이 계책을 잃을까 두렵소”

라 했다. 장소가 손권을 자세히 쳐다보면서 말하길

“비록 신의 지혜와 말을 써주시지 않아도, 매번 어리석은 충정을 다하였던 것은 시로 태후께서 붕어하실 때, 여러 신하들속에서 이 노신을 불러 조칙으로 고명(顧命)의 말씀을 남기셨던 것 뿐입니다”

라 했다. 이로 인하여 눈물을 흘렸다. 손권은 칼을 땅에 내던지고 장소와 마주하여 울었다. 그러나 끝내 장미와 하안을 보냈다.

장소는 자신의 생각과 말이 채용되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손권이 이를 한스러워 하여, 흙으로 그 문을 막자, 장소 또한 안쪽에서 흙으로 봉했다. 공손연이 과연 장미와 하안을 죽였다. 손권이 수차례 장소를 위로하고 사과하였으나, 장소는 끝내 일어나지 않으니, 손권이 이에 그 문을 넘어 들어가 장소를 불렀지만, 장소는 병으로 사양했다. 손권이 그 문을 불지르게 하여 그에게 겁주고자 하였으나, 장소는 다시 문을 닫았다. 손권이 사람을 시켜 불을 끄게 하고 문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자, 장소의 여러 아들들이 함께 장소를 부축해 일으켜 나오니, 손권이 그를 수레에 태워 궁으로 돌아와, 심히 스스로를 자책했다. 장소가 어쩔 수 없게 되자 그런 후에 조회에 참석하였다. 

[주 : 습착치(習鑿齒)가 이르길: 장소가 이렇게 한 것은 신하답지 못하다! 무릇 신하란 자는 세 번 간언해서 따라주지 않으면 자기 몸을 추슬러 물러나고, 생명이라도 구차히 끊어지지 않게 해야 되는데, 어찌하여 원한을 품고 있는가? 또한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간언을 어겨가면서 마침내 서융(西戎)을 쟁패했고, 진(晉)나라 문공(文公)은 분노를 잠시 미뤄두고 마침내 대업을 이루었다. 남긴 맹세는 후회와 과오로써 보아 새겨졌고, 호언(狐偃=진 문공의 신하)는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도) 원망하고 죽는다는 말이 없었으니, 군신의 도리가 크고 상하가 함께 영화로웠다. 지금 지금 손권은 후회하여 잘못했다 하며 장소를 구하고, 후에 더욱 생각을 돌려 마음으로 항복했고, 멀지 않아 회복시켰으니, 이것은 잘한 것이다. 장소는 인신(人臣)된 자로 권한을 헤아리지 않고 도를 얻어, 훗날의 실수를 바로잡았으나, 아침저녁으로 게을러져 이내 자기 생각이 채용되지 않자, 그 죄를 임금에게 돌려 문을 닫고 왕명을 거절하면서 가만 앉아 불타 없어지길 기다렸으니, 어찌 패악하지 않은가!

장소의 용모는 엄숙하고 위풍이 있으니, 손권이 항상 말하길

“내가 장공과 말을 하면 감히 잊지 않는다”

라 하니, 온나라가 삼갔다. 나이 81세 가화(嘉禾) 5년(236) 죽었다. 영을 내려 폭건(幅巾)을 관을 희게 덮고, 시복(時服)으로 염하게 했다. 손권이 소복을 입고 직접 조문하여, 시호를 문후(文侯)라 했다. 장자 장승(張承)은 이미 자신이 제후에 봉해져 있기에, 막내 아들 장휴(張休)에게 작위를 잇게 하였다. 

[주 : 『전략(典略)』에 이르길: 내가 예전에 듣기로 유형주가 일찍이 직접 글을 써서 손백부(孫伯符=손책)주려고 하여 예정평(禰正平=예형(禰衡))에게 보여주었더니, 정평이 이를 얕보며 말하길

“이같은 글이면 손책 막하의 어린아이에게 읽게 하려는 것이지, 장차 장자포에게 보여주려고 하십니까?”

라 했다. 정평의 말처럼 자포의 재주는 높았다. 비록 그렇지만, 오히려 직접 전아(典雅)함을 쌓아 써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덧붙여 듣기로, 오중에서는 그를 중부(仲父)라 칭한다 하니, 이처럼 그 사람들은 한때의 뛰어난 재주임을 믿었으나, 높은 곳에서 자질을 펴지 못하고, 이내 회계(會稽)지역에서 (재주를) 베푼 것이 한탄스럽다.

장소 동생의 아들인 장분(張奮)은 나이 20세 때 성을 공격하고 대공거(大功車)를 만드니, 보즐(步騭)에게 천거되었다. 장소가 이를 원하지 않고 말하길

“네 나이는 아직 어리니, 어찌 자신을 군대에 맡길 수 있겠느냐”

라 했다. 장분이

“옛날 동왕(童汪)은 죽는 것이 어렵다 했고, 자기(子奇)는 아(阿)현을 다스렸는데, 저는 실로 재주가 부족할 따름이지, 나이가 어린 것은 아닙니다”

라 했다. 마침내 병사를 통솔해 장군이 되어, 연이어 공을 세우니, 반주(半州) 도독에 이르고, 악향정후(樂鄕亭侯)에 봉해졌다.

장승(張承)의 자는 중사(中嗣)이며 어려서부터 재학(才學)으로 유명해져, 제갈근(諸葛瑾), 보즐(步騭), 엄준(嚴畯)과 서로 친하게 지냈다. 손권이 표기장군이 되자, 서조연(西曹掾)으로 불려졌고, 나가서는 장사(長沙) 서부도위가 되었다. 평산적(平山賊)을 토벌하고, 정병 1만 5천명을 얻었다. 후에 유수(濡須)도독, 분위(奮威)장군이 되었고 도향후(都鄉侯)에 봉해졌으며, 부곡 5천명을 거느렸다. 장승은 사람됨이 굳세고 충직하며, 인물에 대한 평가를 잘했다. 팽성(彭城)의 채관(蔡款), 남양의 사경(謝景)을 고미(孤微)의 어린아이들 틈에서 발탁하니, 후에 모두 국사(國士)가 되었다. 채관은 위위에 이르렀고, 사경은 예장태수가 되었다.

 [주 : 『오록(吳錄)』에 이르길: 채관(蔡款)의 자는 문덕(文德)이며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고, 당세에 밝고 곧게 현달하였다. 후에 위위 영 중서령(令 中書令)이 되고,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두 아들은 채조(蔡條)와 채기(蔡機)이다. 채조는 손호때 당시 관위가 상서령 태자소부에 이르렀고, 채기는 임천(臨川)태수가 되었다. 사경에 관한 일은 『손등전(孫登傳)』에 보인다.

또한 제갈각(諸葛恪)의 나이가 어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빼어난 재주를 기이하게 여겼지만, 장승이 말로 여러 제갈씨를 끝내 패배시켰다. 학업을 닦아 정진하는데 부지런하고, 사물의 유별(類別)에 독실하여, 무릇 많은 학파를 접하니, 일문을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나이 67세, 적오(赤烏) 7년(244)에 죽으니, 시호를 정후(定侯)라 하였다. 아들 장진(張震)이 후사를 이었다. 처음 장승이 아내를 잃으니, 장소가 여러 제갈근의 여식 중에서 골라 삼으려 했고, 장승 또한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있었으나, 일이 어려워지자 손권이 이를 듣고 권유하여, 마침내 결혼하게 되었다.

[주 : 「신 송지가 살피건대, 장승과 제간근은 같이 적오연간에 죽었으니, 장승의 나이를 헤아려보면 제갈근보다 4살 적을 뿐이다.

딸을 낳으니, 손권이 아들 손화(孫和)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손권이 여러 차례 손화에게 영을 내려 장승에 대한 공경을 닦으라 하니 자서(子壻)의 예를 갖추었다. 제갈각이 주살될 때 또한 죽었다.

장휴(張休)의 자는 숙사(叔嗣)이며, 약관 때에 제갈각, 고담(顧譚)등과 함께 태자 손등의 신하친구가 되어, 『한서』를 손등에게 가르쳐 주었다. 

[주 : 『오서(吳書)』에 이르길: 장휴가 나아가 수업할 때는 문의(文意)를 지적하고 사물을 분별하되, 아울러 조장(條章)이 있었다. 매번 연회자리에 참석할 때면, 술이 무르익으면 음악을 지었고, 손등도 번번이 자신을 낮추어 같이 음악을 즐거워했다. 장휴의 사람됨이 남들보다 해박하고 통달하여, 손등이 그를 심히 사랑하니, 항상 좌우에 두었다.

손권이 일찍이 사냥을 나갔는데, 해가 저물고서야 돌아오자, 장휴가 상소를 올려 경계하는 간언을 하자, 손권이 크게 좋게 여겨 장소에게 이를 보여주었다. 손등이 죽은 후에 시중이 되고, 우림도독(羽林都督)에 배수되어 전군(典軍)의 일을 셋으로 다스리고, 양무(揚武)장군으로 승진했다. 노왕(魯王)의 제패한 당파에 참소를 당하게 되자, 고담, 고승과 함께 균파(芍陂)의 논공한 일 때문에, 장휴, 고승은 전군(典軍)의 진순(陳恂)과 통정하여 거짓으로 그 공훈을 늘렸다고 하여 모두 교주(交州)로 옮겨졌다. 중서령 손홍(孫弘)이 아첨과 위선으로 음흉한 짓을 꾸미니, 장휴는 본래 원한을 품게 되었다.

[주 : 『오록』에 이르길: 손홍은 회계 사람이다.

손홍孫弘은 이 때문에 장휴를 참소했다. 당시 41세로 장휴는 명을 받아 죽었다.
분류 :
오서
조회 수 :
7044
등록일 :
2013.05.01
01:12:38 (*.52.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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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6
12:42:16
(*.0.203.140)
맨위에 예에 관한 일을 빼면 모든 배주가 번역되어 있습니다.

명장황개

2014.01.05
22:51:17
(*.176.94.154)
보오장군 임명 이야기가 빠진 것 같습니다.
강표전 주석 바로 아래에 보충 내용입니다.

손권이 장소를 다시 보오장군(輔吳將軍)으로 임명하고, 지위는 삼공 다음 가도록 했으며, 누후(婁侯)로 바꿔 봉하고 식읍 1만 호를 주었다. 그는 집안에서 일 없이 있었으므로 《춘추좌씨전해(春秋左氏傳解)》와 《논어주(論語注)》를 지었다.
손권은 일찍이 위위 엄준(嚴畯)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렸을 때 외운 책을 암송하고 있소? "
엄준은 그래서 《효경(孝經)》의 〈중니거(仲尼居)〉를 외었다. 장소가 말했다.
"엄준은 비루한 서생입니다. 신이 폐하를 위해 외우기를 청합니다."
그리고는 곧 〈군자지사상(君子之事上)〉을 외웠다. 모두들 장소가 암송하고 있는 부분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코렐솔라

2014.01.05
23:13:50
(*.166.245.152)
헉 그렇네요. 주석도 아니고 본전이 빠져있다니 죄송합니다. 지금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6.05.22
10:49:26
(*.196.74.143)
휘에 대한 주석의 내용을 dragonrz님의 번역으로 바꿨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rexhistoria.net/156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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