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옹(顧雍)의 자는 원탄(元歎)이며 오군 오현 사람이다. 

[주 : 『오록(吳錄)』에 이르길: 고옹의 증조부는 고봉(顧奉)이며 자는 계홍(季鴻)인데, 영천태수를 지냈다

채백개(蔡伯喈=채옹(蔡邕))가 삭방(朔方)에서 돌아와서 일찍이 원수를 피해 오군에 있었는데, 고옹이 그를 따라 거문고와 글을 배웠다. 

[주 :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길: 고옹이 채옹(蔡雍)을 따 라다니며 학문을 배웠는데, 한결같이 청정하고 명민하여 가르침을 바꿀 정도였다. 채옹이 그를 귀하고 기이하게 여겨 말하길 “그대는 반드시 뜻을 이룰 것이니, 지금 내 이름을 그대에게 준다.” 라 했다. 그래서 고옹과 채옹의 이름이 같은 것은 이 때문이다.

『오록』에 이르길: 고옹의 자가 원탄인 것은 채옹이 감탄했던 바를 말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자로 삼았다.

주군에서 표를 올려 천거하니 약관의 나이에 합비(合肥)의 현장이 되고, 나중에 루(婁), 곡아(曲阿), 상우(上虞)현으로 전보되었으나, 모두 치도가 있었다.

손권이 회계태수를 맡게 되자, 그 군으로 가지 않고, 고옹을 군승으로 삼아 태수의 업무를 대행하게 하니, 도적들을 토벌해 없애 군의 경내가 편안하고 조용해지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귀복(歸復)하였다. 수년 후에 (내직으로) 들어가 좌사마(左司馬)가 되었다.

손권이 오왕이 되자, 누차 대리(大理), 봉상(奉常)으로 승진하였고, 상서령을 맡아 양수향후(陽遂鄕侯)에 봉해졌지만, 제후에 봉해준 것에 절하고 관사(館舍)로 돌아오니 집안사람들은 전혀 몰랐다가 후에 소문이 나자 이에 놀랐다.

황무(黃武) 4년(225) 모친을 오나라에서 맞이하였다. 도착하자, 손권이 가서 축하하고 뜰에서 모친에게 친히 절하였고, 공경대신들이 다 모였으며, 후에 태자 또한 가서 축하하였다. 고옹의 사람됨이 술을 마시지 않고, 말수가 적으며, 행동거지가 때에 맞았다. 손권이 한번은 감탄하며 말하길 

“고군(顧君)은 말을 잘하지도 않지만, 말하면 꼭 들어맞는 바가 있다”

라 했다. 술자리 연회에서 기뻐하고 즐길 때면 주변사람들은 술로 실수하면 고옹이 꼭 지켜볼까 두려워하여, 이로써 감히 제 방자하게 구는 사람이 없었다. 손권이 또한 말하길 

“고공(顧公)이 자리에 앉았거든,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못하게 한다.”

고 했다. 그 어렵게 여김이 이와 같았다. 

이 해에, (벼슬을) 고쳐 태상(太常)으로 삼고, 봉작을 올려 예릉후(醴陵侯)라 하고, 손소(孫邵)를 대신해 승상이 되어, 상서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문무의 장수와 관리들을 선발 등용하는 것이 각자 그 직임에 능한 바를 따르니, 자신의 마음을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없었다. 이 때, 민간(民間)에 보내어 널리 물었는데, 정사의 직임에 알맞은 것이 있으면 번번이 은밀히 보고하였다. 만약 받아들여 쓸만하면 곧 손권에게로 돌리고, 쓰지 못할 것이면 끝내 내세워 누설하지 않았다. 손권이 이 때문에 그를 중히 여겼다. 그러나 공적으로 조정에서 진언할 것이 있으면, 말과 안색은 비록 순해도 견지하는 태도는 엄정했다.

손권이 일찍이 정치의 득실을 자문했는데, 장소가 이로 인하여 들었던 것을 골라 진언하길, 자못 법령이 크게 빽빽해져 형벌이 약간 과중해져, 마땅히 없애고 덜어야 할 것이 있다고 했다. 손권이 묵묵히 있다가 돌아보며 고옹에게 묻길 

“그대는 어찌해야 한다고 보오?”

라 하니, 고옹이 대답하길 

“신이 들은 것 또한 장소가 진언한 바와 같습니다.”

라 했다. 이에 손권이 옥사를 의논하여 형벌을 경감했다. 

[주 :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길: 손권은 항상 중서랑에게 고옹에게 가서 자문해 보게 했다. 만약 고옹과 뜻이 합치되면 그 일은 시행되었고, 서로 반대되면 더 연구하고 논의하게 하여 술과 음식을 베풀어 주었다. 만약 뜻이 합치되지 않으면, 고옹은 정색을 하고 복장을 고쳐 입고, 조용히 말하지 않고, 베풀어지는 바라도 없으면 곧 물러나 고하였다. 손권이 

“고공이 기뻐하는 것은 일이 의당함에 합치되었다는 것이고, 말하지 않으면 일이 다스려지지 않은 것이니, 내가 응당 거듭 생각해 본다”

라 했다. 그 존경과 신임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강변의 여러 장수들이 각자 공을 세워 자신을 뽐내고자 하여, 많은 이들이 (전장 상황의) 편의를 진언하여 (북방을) 엄습(掩襲)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다. 손권이 고옹에게 물어보니 고옹이 

“신이 듣기로 병법에는 작은 이익을 경계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진언했던 바와 같으며, 공명을 구하며 자신을 위하고자 함이지, 나라를 위함이 아니니, 폐하께서는 마땅히 금지하고 제어해야 합니다. 실로 족히 위엄을 빛내고 적을 패배시키지 못할 것이면 마땅히 들어줘서는 안 됩니다”

라 했다. 손권이 이 말을 따랐다. 군국(軍國)의 득실을 따져 일을 행하기에 불가하면 스스로 직접 알현하지 않고 입으로는 일찍이 그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일(呂壹)과 진박(秦博)이 중서(中書)가 되어 여러 관부 및 주군의 문서를 맡아 교정하였다. 여일 등이 이로 인하여 차츰 위복(威福)을 이뤄, 마침내 술의 독점권을 방해하고 관장하는 이익을 차지하고, 죄상을 들어 간교한 일을 규찰하는 데는, 작은 일조차 꼭 보고하고 거듭하여 문서를 깊이 살펴 추악하게 무고하며, 대신들을 훼손하여 깎아 내리고 무고한 자를 비방하니 , 고옹 등은 모두 알현해 결백함을 들어보여야 했으나, 귀양 가거나 사직해야 했다. 여일 등이 후에 간사한 죄가 발각되어, 정위(廷尉=사법관)에게 잡혀 결박되었다. 고옹이 가서 옥사를 처결하였는데, 여일이 수인의 입장으로 보니 고옹은 온화한 안색을 띄며, 문서에 적힌 정상을 문죄하고는, 나가려 할 때 또 여일에게 말하길 

“너희들의 뜻에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느냐?”

라 했다. 여일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이 없었다. 이 때 상서랑 회서(懷敍)가 여일을 면전에서 능욕하니, 고옹이 회서를 꾸짖으며 

“관에는 정법(正法)이 있거늘, 어찌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라 했다. 

[주 : 『강표전』에 이르길: 손권이 조카딸을 시집보냈는데, 고옹의 조카에게 시집가니, 그래서 고옹 부자 및 손자 고담(顧譚)을 청해 불러왔는데, 고담은 당시 선조(選曹) 상서로써 귀중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이날 손권이 매우 즐거워했다. 고담이 술에 취하자 세 번 일어나 춤췄는데, 춤을 그칠 줄 몰랐다. 고옹이 속으로 화내었다. 다음날 고담을 불러 그를 꾸짖으며 말하길 

“군왕은 허물을 덮어두는 것을 덕으로 여기고, 신하는 공근(恭謹)하는 것을 절의로 여기니, 옛날 소하(簫何)와 오한(吳漢)이 모두 대공을 세웠지만, 소하는 매양 (전한의) 고제(古帝)를 알현할 때마다 그럴 듯 한 것이 있어도 능히 말하지 못했고, 오한이 (후한의) 광무제를 받들 때도 또한 삼가고 근면하였다. 네가 이 나라에서 차라리 한마지로(汗馬之勞)는 할지언정, 상서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단지 가문에 힘입어 마침내 총애와 신임을 받았을 뿐인데, 어찌 춤추는데 다시 그칠 줄 모르느냐? 비록 술 취한 후였는데도 또한 은혜만 믿고 공경함을 잊은 것으로 그랬다면, 겸허해도 부족하다. 내 집안에 피해를 입힐 자는 필히 너로구나.”

고 했다. 인하여 등지고 벽을 향해 누워 버리고, 고담은 한 동안 서 있었고, 그러고 나서 보내주웠다. 

서위가 평하여 말하길 

“고옹은 여일에게 훼방을 입었으면서도 온화한 얼굴에 기쁜 언색을 띄었으니, 진실로 장자(長者)이다. 그러나 그의 뜻을 열어 끌어와 보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물었으니, 이것은 그릇된 것이다. 여일이 간험(姦險)하게 법을 어지럽히고 충현(忠賢)들을 폄훼하고 중상하자, 오나라 전체가 마음이 섬뜩해져, 태자 손등(孫登)과 육손 이하로는 절절히 간언조차 하지 못하였으니, 이로써 반준(潘濬)이 모인 틈을 타 손으로 찔러 나라의 우환거리를 제거하고 악한 이를 미워하고 주인에 충성하니, 의로운 형벌이 겉으로 드러나서 영을 내리게 된 것이다. 

만약 여일이 사곡(邪曲)한 일에 능하고 이치를 펴지 못하였다면, 옥사를 기록하는 본래 뜻이 아니다. 만약 말을 받들어 이를 주청하였다면, 오주는 혹시라도 승상이 말한 바로써 원래의 용서를 회복시켰을 것이니, 백언(伯言)과 승명(承明)은 부당하여 비분강개했을 것이다! 회서에겐 본래 사사로운 원한이 없었고 혐오하는 바도 없었기에, 그를 모욕한 것이고, 그의 악한 뜻을 싫어하며 불인(不仁)한 것을 미워했을 뿐이니, 어진(仁) 일이다. 계무자(季武子)가 죽으니, 증점(曾點)은 그 문에 기대어 노래 불렀고, 자위가 상처가 나자 자산(子産)이 영을 재촉해 직접 치료하였다. 이로써 말해보자면, 고옹은 부당하게 회서를 책망한 것이다."

고옹이 승상이 된지 19년, 나이 76세에 적오(赤烏) 6년(243)에 죽었다. 처음 병이 미미했을 때, 손권이 의원 조천(趙泉)에게 그를 살펴보도록 하고, 그의 막내아들 고제(顧濟)를 배수하여 기도위(騎都尉)로 삼았다. 고옹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말하길 

“조천은 생사를 잘 분별하는데, 나는 필히 다시 일어서지 못하겠구나. 그래서 상께서 내가 고제가 배수되는 것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라 했다. 손권이 소복을 입고 조문했고, 시호를 숙후(肅侯)라 하였다. 장자 고소(顧邵)가 일찍 죽고, 둘째 아들 고유(顧裕)는 병이 심했으므로, 막내아들 고제가 뒤를 이었으나 후사가 없어 끊어지고 말았다.

영안(永安) 원년(258) 조서를 내려 이르길 

“옛날 승상 고옹은 지극히 덕스럽고 충현(忠賢)하며 예로써 보국(輔國)하였다. 그러나 후사가 폐하여 끊어졌으니, 짐이 심히 민망하다. 고옹의 둘째 아들 고유에게 작을 이어 예릉후로 삼아, 옛 공훈을 밝게 드러내라”

고 했다. 

[주 : 『오록(吳錄)』에 이르길 「고유(顧裕)의 다른 이름은 고목(顧穆)으로 의도(宜都)태수로 죽었다. 고유의 아들은 고영(顧榮)이다」

『진서(晉書)』에 이르길 「고영(顧榮)의 자는 언선(彦先)이며 동남쪽 지역의 명사(名士)인데, 오나라에서 벼슬하여 황문랑(黃門郞)이 되었고, 진(晉)에 있을 때는 현달한 지위를 역임했다. (진) 원제(元帝)가 처음 강동을 진압할 때 고영을 군사마(軍司馬)로 삼고 매우 중하게 예우하였다. 그가 죽자, 표를 올려 시중, 표기장군(驃騎將軍), 의동삼사(儀同三司)를 추증했다. 고영의 형의 아들인 고우(顧禺)인데 자는 맹저(孟著)이며 어려서부터 명망(名望)이 있었고, 산기시랑(散騎侍郞)이 되었으나, 일찍 죽었다.」

『오서(吳書)』에 이르길: 고옹의 동모제(同母弟)는 고휘(顧徽)이다. 자는 자탄(子歎)이며 어려서부터 유학(遊學)하였다. 손권이 일을 다스리게 되자, 고휘에게 재변(才辯)이 있다는 것을 듣고, 불러서 주부(注簿) 일을 맡게 하였다. 일찍이 가까운 곳을 출행(出行)하였는데, 영군(營軍)에서 한 남자를 데려다가 시장에 이르러 형벌을 행하려 하는 것을 보고, 무슨 죄인가를 물었는데, 1백 전(錢)을 도둑질했다고 하자, 고휘가 말해 잠시 멈추도록 했다. 잠시 후 궁궐로 달려 들어가 진언하길 

“바야흐로 지금은 선비를 길러 북쪽 오랑캐를 도모해야 하는데, 이 병정이 장건한 자임을 보았고 또한 도둑질한 것은 적으니, 우견(愚見)으로 통촉해 주시길 바랍니다.”

라 했다. 손권이 이를 허락하며 훌륭하게 여겼다. 동조연(東曹掾)으로 벼슬이 옮겨졌다. 혹 소문에 조공이 동쪽으로 향하고자 한다고 전해지니, 손권이 고휘를 불러 말하길 

“경은 나의 심복이니, 지금 조맹덕이 다른 뜻을 품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족히 이를 헤아려 볼 수 없으니, 경이 나를 위해 알아 봐 주오”

라 했다. 보의(輔義)도위로 배수하고 북쪽에 도착하여 조공과 서로 만났다. 조공이 경내의 소식을 갖춰 물으니, 고휘가 은근하고 온순하게 응대하면서, 이로 인해 강동이 대풍(大豊)이 들었고 산세가 머물기 적당하지 않으며, 모두 모화(慕化)하는 것을 선(善)으로 여겨 의로움을 발휘해 병사를 낸다고 말했다. 조공이 웃으며 

“나와 손장군은 한번 혼인을 맺어서, 같이 한실을 보좌하여, 의로움이 한 집안과 같은데, 그대는 어째서 이와 같이 말하는 거요?”

라 했다. 고휘가 

“진실로 명공(明公)과 주군(主君)께서 의를 반석처럼 굳건히 하고, 기쁨과 근심을 같이 하셔서, 꼭 강표(江表=강동)의 소식을 알고자 하신다면, 이로써 미칠 뿐입니다”

라 했다. 조공이 그를 후대하고 돌려보냈다. 손권이 동정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가 물으니, 고휘가 

“적국에서는 사정을 숨기고 있어 끝내 캐내어 살펴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제가 은밀히 캐물으니, 지금 원담과 전쟁으로 하느라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라 했다. 이에 고휘를 파동(巴東)태수로 배수하여 그를 크게 기용하고자 했으나, 때마침 죽었다.

(고옹의) 아들 고유(顧裕)는 자가 계칙(季則)이며 어려서부터 명성이 알려져, 지위가 진동(鎭東)장군에 이르렀다. 

고옹의 족인(族人)인 고제(顧悌)는 자가 자통(子通)으로 효제(孝悌)와 염정(廉正)으로 향당(鄕黨)에 소문이 났다. 나이 15세에 군의 관리가 되고 낭중(郎中)에 제수되었고, 차츰 승진하여 편장군(偏將軍)이 되었다. 손권이 말년에 적서(嫡庶)를 분간치 않기에, 고제가 수차례 표기장군 주거(朱據)와 같이 그 화복(禍福)에 관하여 진언했는데, 그 말이 절신하고 곧아서, 조정에서는 이를 꺼려했다. 아내를 대우함에 예를 갖추고 항상 밤에 들어와 새벽에 나가니, 그의 얼굴 보는 것이 드물었다. 한번은 병이 심하게 들어 아내가 나와 살피니, 고제가 주변에 명하여 부축해 일으키게 하고, 관을 쓰고 건을 두르고 옷 한 벌을 더 입고는, 일어서 대하며, 재촉하여 아내에게 돌아가게 했으니, 그 정결하여 더러워지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고제의 아버지 고향(顧向)은 4현의 현령을 역임했고, 노년(老年)으로 치사(致仕)했는데, 고제가 항상 아비의 책을 가져다가 씻고 청소하고, 의복을 정갈히 하며, 다시 책상을 설치하여 그 위에 책을 펴고, 절하며 무릎 꿇고 앉아 읽는데 매 구절마다 응낙이 있어야 끝내고, 자시 절하였다. 만약 아버지 질병의 동태에 관한 물음이 있으면, 곧 책을 대하다가도 눈물을 흘리며 말소리 내는 것이 목이 메었다. 아버지가 수를 다해 죽자 고제는 음식을 5일 동안 입에 넣지 않았다. 손권이 그를 위해 베옷 1습을 지어 주며 모두 거친 풀을 풀어 입히고, 강제로 고제에게 영을 내려 상복을 벗게 하였다. 고제가 비록 공의(公議) 때문에 직접 상을 풀긴 했지만, 오히려 아비 상을 당하지 않은 듯 하며, 항상 벽에 관의 그림을 그려 놓고 그 아래엔 신좌(神座)를 설치해 놓아, 매양 이를 대하면서 곡하고 읍하니, 상복이 채 끝나기 전에 죽었다. 고제에겐 네 아들이 있으니, 고언(顧彦), 고례(顧禮), 고겸(顧謙), 고비(顧秘)인데, 고비는 진나라 교주(交州)자사가 되었다. 고비의 아들 고위은 상서복야가 되었다.

고소(顧邵)의 자는 효칙(孝則)인데, 경전을 널리 일고 인물평(人倫)하기를 좋아했다. 어려서 외삼촌 육적(陸績)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했고, 육손(陸遜), 장돈(張敦), 복정(卜靜) 등은 모두 그에 버금갔다. 

[주 : 『오록』에 이르길: 장돈(張敦)의 자는 숙방(叔方)이고, 복정(卜靜)의 자는 현풍(玄風)으로 모두 오군 사람이다. 장돈은 덕량(德量)이 깊고 아름다웠으며, 청허(淸虛) 담박(淡泊)하며, 또한 문사(文辭)를 잘했다. 손권이 거기(車騎)장군이 되자, 불러서 서조연(西曹掾)으로 삼았다가 주부(注簿)로 전임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보해(補海) 현령이 되었는데, 은혜로운 교화가 있었다. 나이 32세에 죽었다. 복정은 섬현(剡縣) 현령으로 죽었다.

주군의 대현(大賢=庶幾) 및 사방의 인사들이 왕래하며 서로 만나고, 혹자는 의논을 말하고 떠나고 혹자는 결의를 두텁게 맺고 떠나니 명성이 바람처럼 흘러 소문이 나서 원근에서 그를 칭송하였다. 손권이 손책을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나이 27세에 집안을 일으켜서 예장(豫章)태수가 되었다. 선현(先賢)인 서유자(徐孺子)의 묘에서 수레에서 내려 제사지내고, 그의 후손들을 두터이 대우했다. 음사(淫祀)와 예에 맞지 않는 제사를 금지했다. 젊은 관리 중 자질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번번이 취학(就學)하도록 영을 내리고, 그 중 뛰어난 자를 뽑아 중요한 직책에 발탁하여 두고, 선행을 들어 가르치니, 풍속이 교화되어 크게 행해졌다.

애초, 전당(錢唐)현의 정서(丁諝)는 병졸(役伍) 출신이고, 양의(陽羨)현의 장병(張秉)은 서민출신이었으며, 오정(烏程)의 오찬(吳粲), 운양(雲陽)의 은례(殷禮)는 미천한 지위에서 일어났으니, 고소가 모두 발탁하여 벗으로 삼았으며, (그들을) 위해 명예(聲譽)를 세워주었다. 장병이 대상(大喪)을 만나니, 친히 그를 위해 상복을 입고 질(紩)을 맺었다. 고소가 예장으로 가려고 할 때, 가까운 길에서 출발했는데, 때마침 장병은 병이 걸렸었고, 이 때 전송하는 자가 수백 명이었는데, 고소는 빈객들에게 사과하길 

“장중절(張仲節)이 병에 걸려 만약 이별하러 올 수 없다면 그를 보지 못하는 게 한탄스럽고, 잠시 돌아가 그와 작별하겠으니, 제군들은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라 했다. 그렇게 아래 선비들에게 마음을 썼고, 가는 곳마다 오직 선을 행하니, 모두가 이와 같은 종류였다. 정서는 전군중랑(典軍中郞)에 이르렀고, 장병은 운양태수, 은례는 영릉(零陵)태수에 이르렀으며, 


주 : 은례의 아들 은기(基)가 지은 『통어(通語)』에 이르길: 은례(殷禮)의 자는 덕사(德嗣)인데 약해서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점차 지식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어려서 군의 관리가 되었다가 19세에 오현 현승(縣丞)이 되었다. 손권이 왕이 되자, 불러서 낭중에 제수하였다. 후에 장온(張溫)과 함께 촉에 사신으로 갔는데, 제갈량이 매우 그를 칭찬하고 감탄했다. 점차 승진하여 영릉태수에 이르고, 관직에 있다 죽었다.


『문사전(文士傳)』에 이르길: 은례의 아들 은기는 무난독(無難督)인데, 재학(才學)으로 유명해졌고, 『통어』수십 편을 지었다. 세 아들이 있었다. 은거(
)의 자는 원대(元大)로 재기(才器)가 있었고, 처음 오의 편장군이 되었고, 집안의 부곡들을 통솔하여 하구(夏口)에 성을 쌓았으며, 오가 평정된 후에는 창오(蒼吳)태수가 되었다. 막내아들은 예우(祐)인데 자는 경원(慶元)이며 오군태수이다.

오찬(吳粲))은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고소에게는 인물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고소는 관직에 있은 지 5년만에 사망했다.

아들로는 고담(顧譚)과 고승(顧承)이 있었다.

고담의 자는 자묵(子黙)이며, 약관의 나이 때 제갈각(諸葛恪) 등과 함께 태자의 네 벗이 되었고, 중서자(中庶子=태자중서자, 태자속관의 하나로 시중(侍中)같은 관직이며, 관질은 6백석)에서 보정(輔政)도위가 되었다. 

[주 : 육기(陸機)가 손담을 위해 지은 전(傳)에 이르길: 태자의 바른 위치를 동궁(東宮)에 펴는 것은 천자가 바야흐로 훈도(訓導)의 뜻을 높여서 준언(俊彦)한 자를 잘 골라 뽑아 좌우에 두어 강학한다. 이때 사방의 빼어난 인물들이 다 모여드니, 태부(太傅) 제갈각 등 웅걸한 기재들이 무릇 많았는데, 고담은 청직(淸職)하고 절륜(絶倫)한 것으로 혼자 중한 추대를 받았다. 태위 범신(范愼), 사경(謝景), 양휘(羊徽)의 무리들이 모두 그 빼어남으로 그의 명성을 칭송했으니, 모두들 고담의 아래에 있었다.

적오(赤烏) 연간에, 제갈각을 대신해 좌절도(左節度)가 되었다. 

[주 : 『오서』에 이르길: 고담이 처음에 관부에 나아갈 때, 진언할 일을 상소하니, 손권이 식사를 물리며 잘했다고 칭찬하고 서상(徐詳)에게 허물이 있다고 여겼다. 아름다움 성품은 높고도 밝으며, 득의한 마음을 내세우지 않으니, 혹자들이 이것으로 그에게 기대하였다. 그래서 손권이 그 재능을 열어 대우함이 매우 융성하였고, 여러 차례 상사(賞賜)를 입게 하고, 특별히 불러 청을 들어주었다.

매번 관부의 문서를 살피는데, 일찍이 주판을 사용치 않고, 모두 손가락을 굽혀 마음으로 헤아려 의심과 착오를 다 밝혀내니, 아랫 관리들이 이 때문에 복종하였다. 봉거(奉車)도위 벼슬이 더해졌다.

설종(薛宗)이 선조(選曹)상서가 되었는데, 한사코 고담에게 사양하며 말하길 

“고담은 몸과 마음이 정밀하며, 도를 꿰뚫은 것이 미세한 데까지 통달했고, 재주는 인물들을 비춰주며, 덕은 중망(衆望)을 채우니, 진실로 어리석은 이 신하가 넘어설 바가 아닙니다.”

라 했다. 나중에 끝내 설종을 대신했다.

조부 고옹이 죽은 지 수개월 만에 태상(太常)에 배수되고, 고옹을 대신하여 상서의 일을 맡아보았다. 이때 노왕(魯王) 손패(孫覇)가 성대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태자 손화(孫和)와 나란히 하니, 고담이 상소를 올려 말하길 

“신은 듣기에 나라가 있고 집안이 있는 자는 필히 적서(嫡庶)의 본원을 밝혀야 하고, 존비(尊卑)의 예를 달리해서, 고하(高下)에 차등이 있게 하며, 계급 넘어 멀리하게 하여, 이같이 하면 골육(骨肉)의 은혜가 생겨나고, 분수에 당치 않은 바램(覬覦)가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옛날 (전한 文帝때) 가의(賈誼)가 치안의 계책을 진언하고 제후의 형세를 논했는데, 그 세력이 중하면 비록 친근하게 하더라도 필히 역절(逆節)의 위험이 있고, 세력이 가벼우면 비록 소원하다 하더라도 필히 보전하게 될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옛 회남(淮南)왕은 (전한 문제의) 친 아우였지만, 끝내 봉국에서 누리지 못했으니, 세력이 무거운데서 잃었던 것이며, 오예(吳芮)는 소원한 신하였지만, 장사(長沙)에서 그 지위를 전했으니, 세력이 가벼운데서 얻었던 것입니다. 

옛 전한 문제가 신부인(愼夫人)과 황후를 동석하게 했는데, 원왕(袁盎)이 신부인을 자리에서 끌어내리자 황제가 대노한 기색을 띠니, 원앙이 상하의 의례를 분별하고 사람돼지(人彘=한 고조의 총애를 받던 척부인(戚夫人)이 고조가 죽은 뒤 여후(呂后)에 의해 팔다리가 잘리고 돼지우리에서 돼지 취급을 받아가 죽은 일) 의 교훈을 진언하니, 황제가 기뻐하였으며 신부인 또한 깨달았습니다. 지금 신이 진언하는 바는 편벽된 바가 있는 것이 나이면, 진실로 태자를 안정되게 하며 노왕에게도 편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 했다. 이로 말미암아 손패와 고담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당시 맏공주의 사위인 장군 전종(全琮)의 아들 전기(全寄)가 손패의 빈객이 되었는데, 전기는 본래 간사한 경향이 있어 고담에게 용납되지 않았었다. 이에 앞서 고담의 아우 고승(顧承)과 장휴가 함께 북으로 수춘(壽春)을 정벌했는데, 전종이 당시 대도독이 되어 위의 장수 왕릉(王淩)과 작피(芍陂)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군세가 불리하니, 위의 병사가 승세를 타고 오영장(五營將) 진황(秦晃)의 군대를 함몰시키자, 장휴와 고승이 분격하여 싸웠다. 마침내 위나라 군대를 주춤거리게 했다. 

당시 전종의 아들은 전서(全緖)와 전단(全端)도 모두 장수가 되었는데, 적이 물러가는 틈을 인하여 이에 진격하였고, 왕릉의 군대는 퇴각하게 되었다. 당시 논공행상을 하는데, 적을 머뭇거리게 한 것을 큰 공이라 하고, 적을 퇴각시킨 것을 작은 공이라 여겨, 장휴와 고승은 모두 잡호(雜號)장군이 되었고, 전서와 전단은 편장군이나 비장군에 그칠 뿐이었다. 전기 부자가 더욱 원한을 품어 함께 고담을 얽어맬 계책을 짰다. 

[주 : 『오록(吳錄)』에 이르길: 전종(全琮)의 부자는 누차 작피(芍陂)의 전역에서 전군(典軍) 진순(陳恂)을 위해 장휴(張休)와 고승(顧承)의 공을 속이고, 장휴와 고승은 진순과 통정하였다고 말했다. 장휴는 옥사에 연루되었고, 손권의 고담 때문에 침잠하여 결정치 아니하고, 고담에게 영을 내려 사죄토록 하고 석방하고자 하였다. 큰 연회에 이르러 고담에게 물으니, 고담이 사죄치 않으며 말하길 

“폐하, 참언(讒言)이 흥하고 있습니다!”

라 했다.

『강표전』에 이르길: 유사가 고담의 무망(誣罔)하여 대불경(大不敬)하며 그 죄는 대벽(大辟=사형)에 해당한다고 주청했다. 손권이 고옹 때문에 법으로 다스리지 않고, 모두 귀양 보냈다.

고담은 연좌되어 교주로 유배 갔고, 조용히 하면서 발분(發憤)하여 『신어(新語)』 20편을 지었다. 그 중 『지난편(知難篇)』은 무릇 스스로 처지를 슬퍼한 것이다. 유배된 지 2년 만에 나이 42세에 교지(交阯)에서 죽었다.

고승의 자는 자직(子直)이며 가화(嘉禾) 연간에 외숙 육모(陸瑁)와 함께 예로써 불려졌다. 손권이 승상 고옹에게 하사한 글에 이르길 

“귀손(貴孫)인 자직은 아름다운 명성이 있음을 들었는데, 서로 같이 보게 되니, 물든 것보다 더 뛰어나니, 그대를 위해 기뻐하는 바이오”

라 했다. 기도위에 배수하고, 우림병(羽林兵)을 통솔하도록 했다. 후에 오군 서부도위가 되어, 제갈각과 함께 산월(山越)족을 평정하고, 따로 정병 8천명을 얻어, 돌아와 군대를 장갱(章阬)에 주둔시켰다. 내직으로 들어가 시중이 되었다. 작피의 전역으로 분위(奮威)장군에 배수되어, 나와서는 경하독(京下督)을 맡았다. 수년이 지난 후 형이 고담, 장휴 등과 함께 교주로 귀양 가서 나이 37세에 죽었다.

<진수의 평: 고옹은 평소의 대업을 지모에 의거하여 운용하였기 때문에 영예와 지위가 최상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분류 :
오서
조회 수 :
5740
등록일 :
2013.05.01
01:15:09 (*.52.89.88)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784/630/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784

코렐솔라

2013.07.16
13:03:25
(*.0.203.140)
주석 몇 개 추가하고 ~한다 는 다 지웠습니다.

무명

2013.08.21
22:50:28
(*.97.212.25)
[주: 禮子基作通語曰:禮字德嗣,弱不好弄,潛識過人。少為郡吏,年十九,守吳縣丞。孫權為王,召除郎中。後與張溫俱使蜀,諸葛亮甚稱歎之。稍遷至零陵太守,卒官]

[주 : 예자기(禮子基)가 지은 『통어(通語)』에 이르길 「은례의 자는 덕사(德嗣)인데 약해서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점차 지식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어려서 군의 관리가 되었다가 19세에 오현 현승(縣丞)이 되었다. 손권이 왕이 되자, 불러서 낭중에 제수하였다. 후에 장온(張溫)과 함께 촉에 사신으로 갔는데, 제갈량이 매우 그를 칭찬하고 감탄했다. 점차 승진하여 영릉태수에 이르고, 관직에 있다 죽었다」고 한다.

코렐솔라

2013.08.21
22:51:20
(*.52.91.247)
오, 미천한 출신의 은례에 대한 것이군요. 바로 반영하겠습니다.(이게 어째서 빠져있는지는 의문이긴 하군요)

무명

2013.11.08
03:45:10
(*.39.89.201)
음, 생각해보니 예자기가 아니라 은례의 아들 기인데... 수정을...

무명

2013.11.08
04:03:37
(*.39.89.201)
추가로 첫째 아들은 거(巨)라고 나온
제가 어디서 찾은 번역에는 예자기라고 써놔서...
지금 보니 아차 싶더군요...

코렐솔라

2013.11.08
09:09:53
(*.166.245.132)
그러고보니 통어를 지은 사람은 은기군요! 전 이게 은례의 아들 은기라는 뜻이면 문사전에는 기라고만 써있을 것 같은데 여기도 례자기라고 써 있어서 예자기가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을;;; 제보 감사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코렐솔라

2013.11.08
09:12:03
(*.166.245.132)
그렇네요. 巨字元大 ->큰아들의 자는 원대라고 번역을 해놨기에 이것도 수정했습니다. 막내아들도 은우로 수정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10.27
01:43:02
(*.166.245.132)
무명님의 제보를 보고 고서->고제로 수정합니다. ,強令悌釋服 자료건의는 웬만하면 자료건의에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코렐솔라

2013.11.25
01:33:39
(*.52.91.73)
으악 전종 부자와 진순 관련은 오서->오록으로 수정합니다. 죄송합니다 ㅜㅠ

코렐솔라

2013.11.25
01:52:30
(*.52.91.73)
통정하였다->통정하였다고 말했다로 수정합니다. 屢言 에서 말했다 부분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군요. 에잇 몰라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촉서 촉서 목차 링크 재원 2013-07-08 172203
공지 위서 위서 목차 링크 [1] 재원 2013-06-29 180056
공지 오서 오서 목차 링크 [3] 재원 2013-06-28 130705
30 오서 주유전 [9] 견초 2013-05-01 20177
29 오서 설종전 [3] 견초 2013-05-01 4727
28 오서 감택전 [2] 견초 2013-05-01 4135
27 오서 정병전 [2] 견초 2013-05-01 3878
26 오서 엄준전 [2] 견초 2013-05-01 3854
25 오서 장굉전 [8] 견초 2013-05-01 4953
24 오서 보즐전 [2] 견초 2013-05-01 5258
23 오서 제갈근전 [2] 견초 2013-05-01 6485
» 오서 고옹전 [10] 견초 2013-05-01 5740
21 오서 장소전 [4] 견초 2013-05-01 7040
20 오서 손환전 [6] 견초 2013-04-30 5146
19 오서 손소전 [5] 견초 2013-04-30 6172
18 오서 손광전 [2] 견초 2013-04-30 4506
17 오서 손익전 [4] 견초 2013-04-30 4617
16 오서 손보전 [1] 견초 2013-04-30 4562
15 오서 손분전(오서 6권, 손견의 형의 아들) [4] 견초 2013-04-30 5573
14 오서 손환전 [2] 견초 2013-04-30 4191
13 오서 손교전 [2] 견초 2013-04-30 4979
12 오서 손유전 [1] 견초 2013-04-30 4465
11 오서 손정전 [1] 견초 2013-04-30 5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