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근(諸葛瑾)

제갈근은 자가 자유(子瑜)이며 낭야(琅邪)군 양도(陽都)현 사람이다.

『오서(吳書)』에 이르길: 그 선조는 갈씨(葛氏)는 본래 낭야군의 제현(諸縣)인데, 후에 양도현으로 이주했다. 양도현에 앞서 성이 갈씨인 자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제갈이라 부르니, 이로 인해 성으로 삼았다. 제갈근은 어릴때 경사(京師=수도, 당시 낙양)에 유학하여 『모시(毛詩)』, 『상서(尙書)』, 『좌씨춘추』를 익혔다. 모친상을 당하자, 상을 치루는데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계모를 섬기는데 공손하며 근면하여, 심히 자식된 도리가 있었다.


『풍속통(風俗通)』에 이르길: 갈영(葛嬰)은 진섭(陳涉)장군이 되어, 공을 세웠으나 주살되었는데, 효문제때 추록(追錄)되어 그 손자가 제현후(諸縣侯)에 봉해지니, 이로인해 아울러 성씨로 삼았다. (배송지) 이것(『풍속통』)과 『오서』에서 말하는 바가 같지 않다.

한말에 난을 피해 강동으로 왔다. 마침 손책이 죽었는데, 손권이 매형인 곡아(曲阿)사람 홍자(弘咨)가 그를 보고 빼어나다 여겨 손권에게 천거하니, 노숙 등과 함께 같이 빈객의 대우를 받았고, 후에 손권의 장사(長史)가 되었으며 중사마(中司馬)로 전보되었다.

건안(建安) 20년(215), 손권이 제갈근을 촉에 사신으로 보내 유비와 호의관계를 맺게 했는데, 그 아우 제갈량과 함께 공적으로 만나 상견(相見)하며, 물러나서는 사사로운 면이 없었다.

(제갈근이) 손건과 담소를 나눌 때면 비유로써 간언하는데, 일찍이 놀라게 직언한 적은 없었고, 은미하게 풍채를 내보이며, 뜻을 조잡하게 진언하였고, 합치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즉시 버리고 다른 것에 미쳐서, 천천히 다시 일을 가탁하여 단서를 만들어내 사물의 비슷한 것으로 서로 구하니, 이에 손권이 뜻이 종종 풀어졌다.

오군태수 주치(朱治)는 손권이 천거한 장수였다. 손권이 일찍이 그를 기대하였고 본래 공경을 더하여서, 직접 힐난하고 꾸짖기 어려웠기에 분노가 풀리지 않았다. 제갈근이 그 까닭을 헤아려 알았지만 감히 드러내놓고 진언하지 못하고, 이에 사사로이 직접 물어보고자 하는 뜻을 구하여, 마침내 손권의 앞에서 글을 써서 사물의 이치를 논하여, 이로 인해 자기의 마음으로 멀리 우회하여 (손권의 뜻을) 헤아려 보았다. 끝나자 (글을) 손권에게 바치니, 손권이 기뻐하여 웃으며 말하길


“내 뜻은 풀어졌소. 안씨(顔氏=안연)의 덕은 사람들이 더 친하게 했는데, 어찌 이것을 말하는 것이겠소?”


라 했다.

손권이 또 교위(校尉) 은모(殷模)를 의심하여 (벌을 주었는데) 그 죄가 헤아리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랫 사람들이 많이들 은막를 위해 말해주니, 손권의 노여움이 더욱 심해져, 저들과 서로 반복(反覆)하게 이르렀으나, 오직 제갈근만이 묵연히 있자, 손권이


“자유는 어째서 혼자 아무 말도 않는 거요?”


라 묻자, 제갈근이 자리를 피하며 말하길


“저와 은모 등은 본주(本州)가 뒤엎어지는 난리를 만나, 생명들은 거의 목숨을 잃었고, 분묘를 버리고 노약자들을 끌어안고 초목을 개척했지만, 성화(聖化)에 귀의하여 비록 떠돌아다니는 중이지만 생령이 이뤄지는 복을 입었지만, (그들을) 몸소 상대하여 독려하지 못하고 진언하는 것은 만분의 일도 답하지 못하여, 은모에게 혼자 은혜를 등지고 스스로 죄악에 빠지게 했던 것입니다. 신이 사과하려 하여도 그럴 틈이 없어, 실로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라 했다. 손권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이내 곧 말하길


“특별히 그대를 위해 사면하겠소.”


라 했다.

후에 관우를 토벌하는데 종군하여, 선성후(宣城侯)에 봉하고, 수남장군(綏南將軍)으로써 여몽을 대신해 남군태수를 관할하여 공안에 머물렀다. 유비가 동으로 오를 정벌할 때, 오왕이 화친를 구하여, 제갈근이 유비에게 준 서한에


“문득 들으니, 깃발과 북소리가 백제(百帝)성에까지 이르렀다 하니, 혹자는 신과 의논하길 오왕이 이 주(州)를 침입하여 취하여 관우를 위해하여서, 그 원한이 깊고도 커서 화친에 의당 답하지 않을 것이라 걱정하니, 이것은 작은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이지 큰 것에 뜻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시험삼아 폐하를 위해 그 경중(輕重) 및 대소를 논해보자면, 만약 폐하께서 위세를 굽히고 분노를 버리시고, 이 제갈근의 말을 잠시 살피신다면 계책을 세워 결정할 수 있으니, 다시 후왕들에게 묻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관우와 친한 것이 선제(先帝)와 비교해서 어떻다고 보십니까? 형주와 천하 중 어느 것이 크고 작습니까? 모두 다 원수삼아 미워한다면, 어떤 것이 먼저고 어떤 것이 나중이 되겠습니까? 만약 이 수를 살피신다면, 일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라 했다.


신 송지가 말하건대 「유후(劉后=유비)가 애쓰느라 촉을 험한 요새(관하(關河=함곡관과 황하)로 삼고 형초(荊楚)를 줄기로 삼자, 관우는 병사를 면수와 한수 위로 올리니, 그 뜻이 상국(上國)을 능멸하려 했으니, 비록 주인을 바로잡고 패업을 정하고자 하였다 해도 그 공을 기필할 수 없었지만, 그 위세가 멀리까지 떨쳤고 그 경략한 땅을 가졌다. 손권이 앙심을 품고, 위(魏)를 도와 위해(危害)를 제거하니, 이것이 종실자제의 근왕(勤王)의 군대를 잘라버리게 되었고, 조공의 도읍을 옮기는 계책을 이행하게 되어서, 한을 돕는 계책은 여기에서 그치었다. 의기(義旗)가 가리키는 곳에는 의당 손씨가 있었다. 삼가 대의로써 유비를 꾸짖는다면 답할 게 없다는 게 무슨 걱정이겠는가! 또한 관우와 유비는 서로가 마치 손발과 같아, 분노와 통한이 너무 깊으니, 이 오만하고 성긴 편지가 군대를 되돌릴 수 있겠는가? 이 편에 실린 것은 실로 글의 낭비다.

이 때 어떤 자가 제갈근이 따로 친한 사람을 보내 유비와 서로 소식을 전했다고 말하자, 손권이 말하길


“나와 자유는 생사도 바꾸지 않을 맹세를 한 사이로, 자유가 날 배신하지 않는 것은 내가 자유를 배신하지 않는 것과 같다”


라 했다.


주 :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길: 제갈근에 남군에 있을 때, 사람들 중 은밀히 제갈근을 참소하는 자가 있었다. 이 말이 점차 밖으로 퍼져 나가자, 육손이 표를 올려 제갈근에게 이런 점이 없음을 분명하니, 마땅히 그런 의논을 없애야 한다고 보증했다. 손권이 보답하며


“자유와 내가 종사(從事)한지 수년이나 되었는데, 그 은혜는 골육과 같고, 그 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사람됨이 도가 아니면 행하지 않고 의가 아니면 말하지 않소. 현덕이 옛날 공명을 오에 보냈는데, 내가 한번은 자유에게 말하길 ‘경과 공명은 형제이며 또한 동생을 형을 따르는 것이 의에 있어서 순리이니, 어찌 공명을 머무르지 않게 하겠소? 공명이 만약 여기에 머무르면 경을 따른다면 내가 응당 글월을 보내 현덕에게서 풀어주겠으니, 그 뜻은 자연히 사람을 따르는 것일 뿐이오’ 라 했더니, 자유가 내가 답하길 ‘아우 량이 남에게 남에게 절개를 굽히고 인질로 붙잡혀서 명분을 정하게 되어도, 의에는 두 마음이 없습니다. 아우가 머무르지 않는 것은 제가 (유비에게)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라 했더니, 그 말은 족히 신명(神明)스러움을 꿰뚫는 것이었소. 지금이라고 어찌 응당 이런 일이 있겠소? 내가 이전에 망령스런 글월을 받아 보자, 곧 이걸 걸어 자유에게 보여주고, 아울러 손으로 글을 써서 자유에게 주니, 곧장 그에 관한 답문을 얻었는데, 천하의 군신간 큰 절개와 한번 정해진 명분을 노하였소. 나와 자유는 가히 신령스런 사귐이라 할 수 있으니, 바깥의 말이 틈새에 끼일 수 없소. 경의 뜻이 이르렀음을 알고, 문득 온 표는 봉하여 자유에게 보여주어, 경의 뜻을 알게 했소”


라 했다.


황무(黃武) 원년(222), 좌장군으로 승진하고, 공안의 독이 되어 부절을 받고 완릉후(宛陵侯)로 봉해졌다. 


주 : 『오록(吳錄)』에 이르길: 조진(曹眞)과 하후상(夏侯尙) 등이 강릉에서 주연(朱然)을 포위하고, 주중(州中)을 나누어 점거하니, 제갈근이 대병을 이끌고 구원했다. 제갈근이 성품이 넒고 급하지 않아, 도리를 미루어 보고 계획을 맡기니, 끝내 기복 화복(禍福)이 생길한만한 술책은 내지 않고, 병사들이 오랫동안 해이해지지 않으니, 손권이 이것을 존경하였다. 봄물이 날 때쯤에 반장(潘璋) 등이 상류 물가에 성을 쌓고 제갈근은 부교를 띄워 진공하니, 조진 등은 퇴각해 패주하였다. 비록 큰 공훈은 없었지만, 또한 군대와 경내를 보전한 것을 공으로 삼았다.

우번(虞翻)은 고지식(狂直)하여 유배되었는데, 오직 제갈근만이 여러번 그를 위해 변설해 주었다. 우번이 친한 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길


“제갈근은 돈독하고 인자하니, 곧 하늘이 만물을 살리는 것이요, 우매한 자를 다스리는 데도 청론(淸論)을 하니, 분수를 지키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죄악이 깊이 쌓였고 꺼려짐은 당하는 것이 많지만, 비록 기로(祁老)의 구원이 있다 해도, 저는 양설(羊舌)의 덕은 없으니, 풀어지기를 도움받기 어렵습니다”


라 했다.


제갈근은 사람됨이 용모가 있으면서 사려깊었으니, 이 때 그의 크고 고아함 성품에 복종했다. 손권 또한 그를 중시하여 큰 일은 찾아 자문하고, 또 따로 제갈근에게 자문하길


“근래에 백언(伯言=육손)이 올린 표를 받아 보았는데, 조비(曹丕)가 이미 죽었기에 고통스런 난에 빠진 백성들이 응당 우리의 깃발만 보아도 와해될 것으로 여겼지만, 더욱 정연(靜然)해졌소. 듣기로 (위에서) 충량(忠良)한 자들을 선발해 등용하고, 형벌을 관대히 하며, 은혜를 베풀고, 부역은 덜고 줄여 백성을 기쁘게 하니, (위에 대한) 그 걱정됨은 조조때보다 더욱 심해졌다 하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오. 조조가 행한 것은 오직 죽이고 정벌한 것이 조금 지나쳤고, 골육사이를 이간질한 것에 미쳐 잔인할 뿐이었소. (조조가) 장수를 다스리는 것에 이르러서는 옛날부터 드문 점이 있었소. 조비는 조조보다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오. 지금 조예(曹叡)가 조비만 못하는 것은 조비가 조조만 못한 것과 같소. 그래서 작은 은혜를 힘쓰고 숭상하는 까닭은 반드시 그 부친이 막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 쇠미해질까 헤아려보고, 곤궁한 백성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까 두려했기에, 자신을 굽히는데 힘써 민심을 얻으려고 하니, 스스로 안주하고자 할 뿐이요, 어찌 이것이 점차 융성해지는 것이겠는가!


듣자하니, 진장문(陳長文=진군)과 조자단(曹子丹=조진) 같은 무리들을 임용했다 하는데, 혹은 문인이나 유생이며, 혹은 종실 척신(戚臣)이니, 어찌 능히 영웅 호걸 같은 장수들을 거느려서 천하를 제압하겠소? 무릇 위세와 권력(柄)을 전단(專斷)하지 않으면, 그 일이 어그러지게 마련이니, 옛날 장이(張耳)나 진여(陳餘)같은 인물은 서로 돈독히 화목하지 않으면 안되어서, 권세를 잡게 되면 돌아서 서로 적이 되었으니, 일의 이치가 그러게 한 것이오. 또한 장문의 무리가 옛날에 능히 선(善)함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조조가 그들의 머리를 잡고 있어서 조조의 위엄을 두려워 했기에 마음과 뜻을 다하여서 감이 그른 짓을 하지 않았던 것 뿐이요. 조비가 왕업을 계승하기에 이르르자, 나이는 이미 많아져, 조조의 뒤를 이어 은정(恩情)을 더했기에 등용해도 의를 품을 수 있었소.


지금 조예는 유악하고, 사람들을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니, 이 무리들은 반드시 이로 인하여 농단하고 교만한 행태를 보일 것이오, 당을 만들어 서로 귀부하는 자들을 도울 것이오. 이같이 되는 날, 간사함과 아첨이 아울러 일어나고, 다시 서로 궁지에 몰아넣고 원망할 것이니, 점차 싫어하고 두 마음을 품게 될 것이오. 이미 이렇게 되어 간다면, 뭇아랫사람들이 이익을 다투어도 군주는 유악하여 제어하지 못할 것이니, 그들이 패망할 것이 어찌 오래 걸리겠소? 그렇게 되는 것을 아는 까닭은 예부터 지금까지 네다섯 사람이 권력과 형정(刑政)을 쥐면, 헤어져 상처를 입히고 서로 짓밟고 깨무는 것이 아니겠소! 강자는 응당 약자를 능멸하고, 약자는 응당 구원을 찾을 것이니, 이것이 어지러워져 망하는 길이요. 자유, 경은 다만 귀 기울여 들으시오. 백언이 항상 계교(計校)에는 뛰어났지만, 이 일 하나는 작은 단점이 있는지 걱정이오”


라 했다.

신 송지가 살피건대 위 명제(明帝=조예)는 한때의 뛰어난 군주로써 정사는 자기에게서 나왔고, 손권이 이를 논하면서 끝내 증거가 없는데, 사서에서 이를 실었던 것은, 장차 군주는 유약해지고 나라는 혼란스러워져 권력이 하나로 되지 않고, 어지러워져 망하는 형세를 보였던 것은 손권의 말과 같았으니, 의당 기록을 보존하여 경계로 삼았던 것이다. 혹 응당 명제에게서 실수했지만, 그 일을 제왕(齊王=조방(曹芳))때에 드러났지만, 제왕의 치세는 가히 징험했다 할 수 없다! 감히 드러내지 않아도 이 표의 작은 글로도 족하다.


손권이 존호(尊號)를 칭하게 되자, (제갈근을) 대장군, 좌도로(左都護)에 배수하고, 예주목을 맡게 하였다. 여일(呂壹)이 주살되자, 손권이 또한 조서를 내려 제갈근 등에게 절차(切磋)하였는데, 이 말이 『손권전』에 있다. 제갈근이 번번이 이 일로 인해 답변하니, 그 말리 바르고 순리에 맞았다.

제갈근의 아들은 제갈각(諸葛恪)인데, 그 명성이 당대에 융성하였고, 손권이 심히 그를 빼어나게 여겼다. 그러나 제갈근은 항상 그를 싫어하여, 집안을 보전할 자식이 아니라고 여겨, 매양 걱정하였다.

『오서(吳書)』에 이르길: 처음, 제갈근이 대장군이 되었을 때, 아우 제갈량은 촉의 승상이 되었고, 두 아들인 제갈각과 제갈융(諸葛融)은 모두 군대를 맡아 장수들을 감독하였고, 족제(族弟)인 제갈탄(諸葛誕) 또한 위에서 명성을 드러내고 있었서, 한 가문이 세 지방에서 영달하니, 천하가 이를 영예롭게 여겼다. 제갈근의 재략이 비록 아우에게 미치지 못하여도, 그 덕행은 더욱 순했다. 아내가 죽자 고쳐 장가들지 않고, 사랑하는 첩이 있어서 아들을 낳았어도 그 아들을 천거하지 않으니, 그 독실한 정이 모두 이와 같았다.


적오(赤烏) 4년(241), 나이 68세로 죽으니, 칠하지 않은 소관(素官)에 평상시 복장으로 염하도록 하고, 장례는 절약하도록 유명을 남겼다.

제갈각은 이미 스스로 제후에 봉해졌기에, 그래서 아우 제갈융(諸葛融)이 작위를 이어, 군사업무를 잡고 공안(公安)에 주둔했다.


주 : 『오서』에 이르길: 제갈융(諸葛融)의 자는 숙장(叔長)인데, 총귀하게 태어나 서려서부터 교만하고 놀기 좋아했고, 학문은 장구(章句)를 주로 했으며, 널리 익혔으나 정밀하지 않았고, 성품은 관용(寬容)하며, 기예(技藝)가 많고, 수차례 포의(布衣)로써 봉조청(奉朝請)이 되었다가 후에 기도위에 배수되었다. 적오 연간에 여러 군에서 부(部)의 군대를 내니, 신도(新都) 도위 진표(陳表), 오군 도위 고승(顧承)이 각자 영솔하던 사람들을 거느리고 전비릉(佃毗陵)에서 모였는데, 남녀 각각 수만명이었다. 진표가 병사하자, 손권이 제갈융에게 진표를 대신하게 했는데, 후에는 부친 제갈근이 관할하던 것도 대신하게 했다.

부곡과 이사(吏士)들이 그에게 친부(親附)하였다. 변경에 일이 없으므로, 가을겨울에는 곧 수렵하고 강무(講武)하였으며, 봄여름에는 빈객들을 초빙해 높은 연회를 베풀고, 관리와 병졸들에게 휴가를 주니, 혹자는 불원천리하고 찾아왔다. 매번 연회때마다 번번이 빈객들에게 돌아다니며 물어 그 재능을 말하게 하고, 탑(榻)을 합치고 자리롤 오도록 당겨, 적수를 헤아려 상대하게 하니, 혹자는 쌍륙(雙六)을 하고 바둑을 두며, 혹자는 저포(樗蒲)를 하거나 투호(投壺), 궁탄(弓彈)을 하는데 부분을 나누었고, 이에 단 과일이 계속 들어오고 청주는 서서히 들었다. 제갈융이 두루 돌아다니며 관람하는데, 하루 종일토록 지겨워하지 않았다. 제갈융의 부친과 형은 질박하고 소박하여, 비록 군대에 있어도 몸에는 장식있는 옷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제갈융은 무늬있는 비단으로 옷해입고, 혼자 사치스런 옷을 입었다. 손권이 죽자, 분위장군으로 옮겼다. 후에 제갈각이 회남을 정벌하는데, 제갈융에게 부절을 내려주어 군대를 이끌고 면수로 들어가서 서쪽에서 병사를 공격하도록 영을 내렸다. 제갈각이 이미 주살되자, 무난독(無難督) 시관(施寬)에게 장군 시적(施績), 손일(孫壹), 전희(全熙) 등을 데려다가 제갈융을 잡아 오도록 했다. 제갈융은 마침내 병사들이 이르렀단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는데, 병사들이 도착해 성을 포위하자 약을 먹고 죽었고, 그의 세 아들도 모두 복주(伏誅)되었다.

『강표전』에 이르길: 이에 앞서 공안에는 영험한 악어 울음소리가 있었는데, 동요(童謠)에 이르길


“흰 악어가 울고, 거북 등(背)은 평평하니, 남군의 성중은 오래 살수 있지만, 지키다 죽으니 의를 저버리지 않지만 이룬 것이 없어라”


고 했다. 제갈각이 주살되자, 제갈융이 과연 금인장의 거북을 깎아서, 이를 복용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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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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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3.05.01
01:19:25 (*.52.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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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05
01:05:11
(*.52.89.88)
싫다->실다로 수정합니다.

코렐솔라

2013.07.16
13:26:05
(*.0.203.140)
모두 번역되어 있네요. ~~했다. 만 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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