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굉(張紘)은 자가 자강(子綱)이며 광릉 사람이다. 경도에서 유학을 했으며[주1] 본군으로 돌아와 무재로 천거되고 관부의 초빙을 받았지만 모두 나가지 않았다. [주2]



[주1] 오서에서 이르길 : 장굉은 태학에 들어가 박사 한종韓宗의 밑에서 경씨역京氏易을 배웠고, 외황外黃에서 복양개濮陽闓에게 한시韓詩와 예기禮記, 좌씨춘추左氏春秋를 배웠다
[주2] 오서: 대장군 하진(何進), 태위(太尉) 주준(朱儁), 사공(司空) 순상(荀爽)의 삼부(三府)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병을 핑개로 가지 않았다.

후에 난을 피해 강동으로 갔다. 손책이 창업하자, 곧 그에게 투항하여 의탁했다. 손책은 표를 올려 장굉을 정의교위(正議校尉)로 임명했다. 

[주] 吳書曰:紘與張昭並與參謀,常令一人居守,一人從征討,後呂布襲取徐州,因為之牧,不欲令紘與策從事。追舉茂才,移書發遣紘。紘心惡布,恥為之屈。策亦重惜紘,欲以自輔。答記不遣,曰:「海產明珠,所在為寶,楚雖有才,晉實用之。英偉君子,所游見珍,何必本州哉?」  

오서에 이르길 : 장굉과 장소(張昭)는 손책의 참모(參謀)였다. 항상 한 사람으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도록 하고 한 사람은 정벌에 따르도록 했는데 나중에 여포(呂布)가 서주(徐州)를 습격해서 서주목이 되고 장굉이 손책과 같이 일하지 못하도록 하고자했다. 그래서 여포는 장굉을 무재(茂才)로 추천하며 편지를 써서 장굉을 보내도록 했다. 장굉은 여포를 싫어했고 또한 그에게 굴복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손책 역시 장굉을 중히 여기고 있었고 자신을 위해 일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여포에게 편지를 써 보내면서 장굉을 보내지 않았다. 이르길 「바다가 명주를 만드는데 소재하는 곳에서 보물이 되며 초나라에 비록 재주가 있지만 진나라 실로 씁니다. 영위한 군자는 노니는 곳에서 진귀한 대접을 받으니 하필 본주에서 이겠습니까?」  

그는 단양토벌에 참가했다. 손책은 직접 전쟁터로 와서 싸움을 했다. 장굉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간언을 했다. 


"무릇 주장(主將)은 모략을 직접 만들어내는 자이며 삼군(三軍)이 운명을 걸고 있으므로 경솔하게 직접 소수의 적을 막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당신께서는 하늘이 부여한 자질을 귀중히 여기시고 사해의 기대에 부흥하여 국내의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시켜 위태롭거나 불안해하지 않도록 하시기를 원합니다."

건안 4년(199), 손책은 장굉을 허창궁으로 가서 장(章)을 바치도록 했는데, 그곳에서 머물며 시어사가 되었다. 소부 공융 등은 모두 그와 친밀하게 지냈다.


오서吳書에서 이르길 : 장굉이 이르러, 조정의 공경과 오랜 벗과 더불며 손책의 재지와 책략은 비범해, 3군郡을 평정하며, 바람이 부니 풀이 쓰러지듯이 백성들이 연이어 선함을 따랐고, 충성과 공경, 정답고 극진한 정성을 더하며, 왕실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조공曹公이 사공司空이 돼, 은혜를 두터이 더해줘서, 먼 곳의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하여, 심지어 표창하는 포고로 찬양하고 숭배하며, 호號를 고쳐주고 추가로 봉해줘서, 장굉을 벽소해 연掾으로 삼고, 고제高第로 추거하고, 시어사侍御史로 보임시키고는, 후에 장굉을 구강태수九江太守로 삼았다. 장굉은 속으로 이전에 입은 은혜를 그리워하여, 돌아가 복명함을 바래, 질병을 근거로 고사하였다.


조조는 손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사를 이용하여 오를 토벌하려고 했다. 장굉은 간언하여, 다른 사람의 상사를 틈타서 공격하는 것은 고대의 도의가 아니며, 만일 공격하여 승리하지 못한다면 원수가 되고 우호 관계는 찢어지게 될 것이니 이 기회에 두터운 예를 펴는 것만 못하다고 주장했다. 조조는 그의 말을 받아들여 즉시 표를 올려서 손권을 토로장군으로 임명하고 회계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조조는 장굉으로 하여금 손권에게 귀순하도록 설득시키려는 생각을 하고 장굉을 회계동부도위로 임명하여 지방으로 내보냈다.

[주] 吳書曰:權初承統,春秋方富,太夫人以方外多難,深懷憂勞,數有優令辭謝,付屬以輔助之義。紘輒拜牋答謝,思惟補察。每有異事密計及章表書記,與四方交結,常令紘與張昭草創撰作。紘以破虜有破走董卓,扶持漢室之勳;討逆平定江外,建立大業,宜有紀頌以昭公義。既成,呈權,權省讀悲感,曰:「君真識孤家門閥閱也。」乃遣紘之部。或以紘本受北任,嫌其志趣不止於此,權不以介意。初,琅邪趙昱為廣陵太守,察紘孝廉,昱後為笮融所殺,紘甚傷憤,而力不能討。昱門戶絕滅,及紘在東部,遣主簿至琅邪設祭,并求親戚為之後,以書屬琅邪相臧宣,宣以趙宗中五歲男奉昱祀,權聞而嘉之。及討江夏,以東部少事,命紘居守,遙領所職。孔融遺紘書曰:「聞大軍西征,足下留鎮。不有居者,誰守社稷?深固折衝,亦大勳也。無乃李廣之氣,倉髮益怒,樂一當單于,以盡餘憤乎?南北並定,世將無事,孫叔投戈[주1],絳、灌俎豆,亦在今日,但用離析,無緣會面,為愁歎耳。道直途清,相見豈復難哉?」權以紘有鎮守之勞,欲論功加賞。紘厚自挹損,不敢蒙寵,權不奪其志。每從容侍燕,微言密指,常有以規諷。  江表傳曰:初,權於群臣多呼其字,惟呼張昭曰張公,紘曰東部,所以重二人也。    


오서에 이르길 : 손권이 손책을 이어받았을 때는 나이가 청년이었고 손권의 어머니인 태부인은 바야흐로 외부가 다난(多難)했기 때문에 걱정과 노고를 깊이 품고 자주 아름다운 언사로 완곡해 거절하고는 보좌해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장굉은 항상 이러한 편지를 받고 감사의 답신을 보내며 오직 과실을 바로잡을 것을 유념했다. 매번 특이한 일로 긴밀히 의논한다거나 장표, 서신에서 사방에 친교를 맺는 일은 항상 장굉과 장소로 하여금 찬작을 초창하게 하였다.    


장굉은 파로장군 손견은 동탁을 패주시켜 한 왕실을 보좌한 훈공이 있고 토역장군 손책은 강남의 땅을 평정해 큰 사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응당 찬양하는 기록이 있어 공의를 밝혀야 한다고 여겼다. 문장이 완성되자 손권에게 헌상했다. 손권은 그것을 읽어보고 깊게 감동하여 「당신은 정말로 우리 집의 내력이나 공적에 대해 잘 알고 있다」라고 하면서, 장굉을 보내 부에 가도록 하였다. 어떤 사람이 장굉이 본래 북쪽에서 임명을 받아 뜻이 이곳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 혐의하였는데 손권은 의중에 두지 않았다.    


예전에, 낭야(琅邪)사람 조욱(趙昱)이 광릉태수(廣陵太守)였을 때 장굉을 효렴으로 천거했었는데 나중에 조욱이 착융(笮融)의 손에 죽었다. 장굉은 이를 너무 안타깝게 생각해서, 착융을 토벌하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조욱의 가문은 끊어졌고, 나중에 장굉이 동부(東部)에 있을 때 주부(主簿)를 파견하여 낭야(琅邪)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더불어 친척을 구해 후손을 잇게 하려고 낭야상 장선(臧宣: 장패(臧覇))에게 편지를 보냈다. 장선은 조욱의 문중에서 5살 자리 남자애를 찾아 조욱의 제사를 지내게 했고, 손권은 이를 크게 평가했다. 강하를 토벌하는데 이르러 동부에 일이 적기 때문에 장굉에게 거하여 지키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멀리서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공융은 장굉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길 「듣기에 대군이 서정하는데 족하께서는 남아서 진수한다고 합니다. 남아서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 누가 사직을 수호하겠습니까? 깊이 방어를 굳히는 것 역시 큰 공훈입니다. 아니면 이광의 기운이 늙을수록 더욱 노하여 즐거이 한번 선우를 당하여 남은 분을 다하겠습니까? 남북이 더불어 정해지만 세상은 장차 아무 일이 없을 테니 숙손통은 창을 버리고 주발과 관영이 예기 사이에서 노니는 것도 오늘날의 일입니다. 다만 이별하고 다시 얼굴 볼 일이 없는 것이 근심스러울 뿐입니다. 길이 올곧고 청명하니 서로 다시 보는 것이 어찌 다시 어렵겠습니까?」하였다. 


손권은 장굉이 진수하는데 공로가 있으므로 공을 논해 상을 주고자 하였다. 장굉은 굉장히 스스로 겸손히 행동하여 감히 총애를 받지 않고자 하였기에 손권은 그 뜻을 빼앗지 않았다. 매번 종용히 옆을 지키며 작은 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항상 이로써 풍간하였다.    

강표전에 이르길 : 당초에 손권은 여러 신하들의 자를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직 장소를 부를 때는 장공(張公), 장굉을 부를 때는 동부(東部)라였고 이는 두 사람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주1] 삼국지집해를 보면 하작이 교감하면서 孫叔을 叔孫으로 고쳤다고 언급하고 있다. 생각건대 양웅의 解嘲에 ‘叔孫通起於枹鼓之間,解甲投戈,遂作君臣之儀,得也。’ 같은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하작의 견해가 맞는 것 같다.


장굉은, 파로장군 손견에는 동탁을 패주시켜 한왕실을 보좌한 훈공이 있고, 토역장군 손책은 강남의 땅을 평정해 큰 사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정의의 행동을 현창하기 위한 기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문장을 스스로 완성시켜서, 손권에게 헌상했다. 손권은, 그것을 읽어보고 깊게 마음을 움직여져 「당신은, 정말로 우리 집의 내력이나 공적에 대해 잘 알고 있다」라고 하면서, 장굉을 파견했다.

후에 손권은 장굉을 장사로 임명하여, 합비 정벌에 참가하도록 했다.


오서에서 이르길 : 합비성合肥城이 오래도록 함락되지 않아, 장굉이 계책을 진헌하길 :


“고대의 성을 포위함은, 한 방면을 열어둬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미혹시켰습니다. 지금 포위가 매우 조밀하며, 공격함이 또한 급해, 참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협력할까 두렵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적은, 진실로 갑자기 함락하기 어렵고, 구원은 아직 이르지 않았으니, 조금 느슨하게 하여서, 그들의 변화를 살필 만합니다.”


의논하던 이들은 의견을 합치지 못했다. 때마침 구원하려는 기병들이 이르러, 자주 포위망 아래에 이르러, 말을 타고 달리며 도전했다.


손권이 가볍게 무장한기병을 이끌고 가서 적을 무찌르려고 하자, 장굉은 이렇게 간언했다.

"병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구이고, 전쟁은 위험한 일입니다. 오늘 당신이 왕성하고 웅장한 기백에 의지하여 강대하고 포악한 적을 홀시한다면 삼군의 군사들 가운데 마은이 섬뜩하지 않은 자는 없을 것입니다. 비록 작군 장수의 목을 베고 깃발을 빼앗아 취하고, 적군의 전쟁터에서 위세를 떨친다고 할질라도, 이것은 단지 편장(偏將)의 임무이지 주장(主將)이 마땅이 해야만 되는 일은 아닙니다. 맹분과 하육의 용기를 억누르고 패왕(覇王)으로서의 계획을 마음속에 품기를 원합니다."

손권은 장굉의 간언을 받아들여 행동을 멈쳤다. 그는 돌아온 후, 이듬해에 다시 출병할 준비를 했다. 장굉은 또 간언하여 말했다. 


"옛날부터 제왕(帝王)은 천명을 받은 군주로서 비록 신령이 위에서 보좌하고 문덕(文德)이 아래에서 발양될지라도, 또한 무공(武功)에 의지하여 그들의 공훈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가장 귀한 것은 시기를 잡아 행동을 취한 후에 위세를 세우는 것뿐입니다. 현재 명공은 한 왕조 4백 년의 액운을 만나 위급함을 도운 공로가 있으니, 조용히 군대를 쉬도록 하면서 광범위하게 개간하여 파종하고, 현명한 자를 임용하고 재능있는 자를 등용하여서 관용과 은혜를 받드는 데 힘쓰며, 천명에 순응하여 처벌을 실행해야만 수고롭지 않도록 천하를 평정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손권은 행동하려던 것을 멈추고 출별하지 않았다. 장굉이 응당 오군을 나와 말릉군( 陵郡)에 수도를 정해야 한다는 계책을 제의하자, 손권을 그의 제의를 따랐다. 

[주] 강표전(江表傳): 장굉이 손권에게 이르러 말하길, 

"말릉은 초나라 무왕이 치소(置)를 둔 곳으로 이름을 금릉(金陵)이라 했습니다. 지세(地勢)가 강부(岡阜: 땅이 비탈지고 약간 높음)하여 석두(石頭)에 잇닿고, 방문(訪問)하여 고로(故) 쇠하니(老), (구전에) 이르길 예전 진시황(秦始皇)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회계군을 지나 이에 마을에서 망기(望氣)라는 자가 금릉의 지형은 왕자의 도읍의 기가 있다고 일컬었습니다. 그래서 잇닿은 산등성이를 파내어 끊어버리고 말릉이라 이름을 고쳤습니다. 지금 머무는 곳이 구존(具存:빠짐없이 갖추어 있음)하고 땅에는 왕기가 있어 하늘이 명을 두는 바, 도읍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손권이 그 계책이 좋다고 여기고 장차 능히 따르려했다.

나중에 유비가 동쪽으로 말릉에서 머물며 두루 지형을 보고(觀), 또한 손권에게 말릉을 도읍으로 권했다. 손권이 말하길, 

"지자(智者)는 뜻이 같구나." 

하고 마침내 도읍이 되었다.

헌제춘추獻帝春秋에서 이르길 : 유비가 경京에 이르러, 손권에게 이르길 :

“오吳는 이곳에서 수백 리 떨어져, 만약 위험하고 긴박한 일이 있어도, 구원하러 가기 어려우니, 장군께선 경에 주둔할 뜻이 없으십니까?”

손권이 이르길 :

“말릉秣陵에 작은 강이 백여 리 정도 있어, 큰 배를 배치할 수 있기에, 저는 바야흐로 수군을 정리해, 곧 그리로 옮겨서 근거하려 합니다.”

유비가 이르길 :

“무호蕪湖는 유수濡須에 가까워, 또한 좋은 곳입니다.”

손권이 이르길 :

“저는 서주徐州를 도모하고자 하여, 의당 하류에 가까워야 합니다.” 

신 배송지裴松之가 여기기론 말릉이 무호와 더불어서, 거리는 비교해도 차이가 없는데, 북으로 침략함의 편의에서, 또한 어떤 다른 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서주를 엿보고자 하여, 말릉이 하류에 가까운 점을 탐낸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여러 사서에서 모두 유비가 말릉에 도읍하길 권했다고 이르나, 이 책에서 홀로 손권이 스스로 이곳에 도읍하고자 했다고 이르니, 또한 사실과 다르며 잘못된 것입니다.


손권을 장굉에게 오군으로 돌아와 식구를 맞이하도록 했는데, 길에서 병사했다. 그는 병세가 위독할 때 아들 장정(張靖)에게 유서를 주었느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

--- 옛날부터 나라가 있고 집이 있는 자는 모두 덕망있는 정치를 실행하여 융송한 세상에 이르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다스린 것에 이르면, 대부분 이상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결코 충성스런 신하나 현명한 보좌가 없어서가 아니며,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깨닫지 못해서도 아니다. 군주가 자신의 감정을 제지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수 없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의 감정을 어려움을 두려워하고 쉬운 쪽으로 향하며, 서로 같은 의견을 좋아하지만 상반된 의견을 싫어하는데, 이것을 정사를 다스리는 규율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경전에서 '좋은 것을 따르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과 같고, 나쁜 것을 따르는 것은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라고 한 것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의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군주는 몇 대의 기업(基業)을 계승하고 천연의 세력에 의지하여 전력의 위엄을 장악하고 있고, 쉬은 일을 하는 데 길들여지고 같은 의견을 듣도 다른 사람에게 빌리거나 취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충신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통치방식을 품고 있으며, 귀에 거슬리는 말을 토로하니 양자가 합쳐질 수 없는 것은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주례周禮 태재직太宰職에서 이르길 : 팔병八柄으로 왕을 보좌하고 신하들을 통제한다. 첫째는 작위로, 그들의 높은 지위를 통제한다. 둘째는 녹봉으로, 그들의 부유함을 통제한다. 셋째는 하사로, 그들이 받는 은총을 통제한다. 넷째는 임명으로, 그들의 행동을 통제한다. 다섯째는 보살핌으로, 그들의 복을 통제한다. 여섯째는 박탈로, 그들의 가난함을 통제한다. 일곱째는 파면으로, 그들의 죄를 통제한다. 여덟째는 형벌로, 그들의 허물을 통제한다.

합쳐질 수 없으면 없으면 모순이 있게 되고 아첨하는 자들이 빈 틈을 타서 들어오면, 군주는 작은 충성에 미혹되며 소인의 은애에 연연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가 뒤섞이고 연장자와 연소자는 순서를 잃게 된다. 이런 상황이 생신 원인은 인정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명한 군주는 이 이치를 깨다독 굶주리거나 갈증이 나는 것처럼 현명한 자를 구하며 간언을 받아들임에 있어서는 만족할 줄 모르고 감정을 누르고 사욕을 줄이며 의(義)로써 은(恩)을 벤다.


위로는 편파적이고 황당한 요구가 없고 아래로는 그릇된 데로 들어가려는 기도가 없다. 너는 응당 세 번 생각하고 치욕을 참아내어 인(仁)을 이루고 천하의 대업을 이루어야만 한다.---

그 당시 그는 60세의 나이로 죽었다. 손권은 그의 유서를 되새기면서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장굉은 시•부(賦)•명뢰(銘 :죽은 사람의 공덕을 기린글) 10여편을 지었다. 

[주] 吳書曰:紘見柟榴枕,愛其文,為作賦。陳琳在北見之,以示人曰:「此吾鄉里張子綱所作也。」後紘見陳琳作武庫賦、應機論,與琳書深歎美之。琳答曰:「自僕在河北,與天下隔,此閒率少於文章,易為雄伯,故使僕受此過差之譚,非其實也。今景興在此,足下與子布在彼,所謂小巫見大巫,神氣盡矣。」紘既好文學,又善楷篆,與孔融書,自書。融遺紘書曰:「前勞手筆,多篆書。每舉篇見字,欣然獨笑,如復睹其人也。」    

오서(吳書)에 이르길 : 장굉은 남류침(柟榴枕)를 보고서는 그 문채를 좋아하여, 부(賦)를 지었다. 진림(陳琳)이 북방에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서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나와 같은 고향 출신인 장자강이 쓴 것입니다.」    

나중에 장굉은 진림이 쓴 무고부(武庫賦), 응기론(應機論)을 보고서는 진림에게 편지를 써서 그의 글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했다. 진림이 답장을 해서 말했다.    

「저는 하북(河北)에 있어서 거의 세상과는 떨어져 삽니다. 이곳에는 대체로 글 쓰는 이들이 많지 않은 까닭에 쉽사리 다른 이들의 눈에 띄곤 합니다. 지금 경흥(景興: 왕랑(王朗))은 여기에 있고, 경과 자포(子布: 장소(張昭))는 그곳에 있으니, 저는 마치 작은 무당(小巫)이 큰 무당(大巫)을 만난 것처럼 신기(神氣)를 다 잃었습니다.」    

하였다. 장굉이 이미 문학을 좋아하고 또한 해서와 전서에 능했기에 공융에게 보내는 편지를 직접 썼다. 공융이 장굉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하길

「전에 수고롭게 쓰신 문자에 전서가 많았습니다. 매번 들어 문자를 보면 흔연히 홀로 웃음을 지으니 마치 다시 그 사람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의 아들 장현(張玄)은 남군태수 •상서까지 관직이 올랐다.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르길 : 장현張玄은 맑고 고결하며 고상한 행동을 했으나, 재주는 장굉에 미치지 못했다.

장현의 아들 장상(張
)은 손호 때, 시랑으로 임명되었다가 말이 분명하고 명쾌한 것으로써 알려져 시중•중서령으로 발탁되었다.

강표전에서는 장상張尚이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고 칭찬했다.

손호가 장상에게 금슬을 타도록 하자 장상은 이렇게 대답했다.


"본래부터 탈 줄을 모릅니다."

손호는 장상에게 배우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후에 연회 석상에서 금슬의 정묘함에 대해 순서대로 말할 때 장상을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평공이 사광을 시켜 맑은 각음을 타도록 했을 때, 사광은 '우리 군주의 덕행은 엷기 때문에 이것을 듣기에는 부족하다' 고 했습니다."

손호는 마음속으로 장상이 이것을로 자신을 비유하고 있다고 샹각하고 불쾌해했다. 후에 다른 일이 쌓이자 옥에 가두고 모든 것을 이 일에 의거하여 죄명을 정하여 건안(建安)으로 보내 배를 만들도록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자 사형에 처했다.

환씨(環氏)의 오기(吳紀): 언젠가 손호는 장상에게 

"시경에는 범피백주(汎彼柏舟: 튼튼하고 좋은 저 잣나무 배)라는 말이 있는데, 왜 배의 재료는 잣나무로만 만듭니까?"

하고 물으면, 장상은

"시경에 회즙송주(檜楫松舟: 노 달린 소나무 배)라는 말이 있는 걸로 봐서, 소나무(松)도 사용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손호는 "새 중에서 제일 큰 것이 학(鶴)이고 제일 작은 것은 참새(雀)입니까?"

라고 물으면, 장상은 

"(시경에 나오는 새중에서) 큰 새는 (대형의) 독수리(禿鶖)가 있고, 작은 것으로서는 굴뚝새(鷦鷯)가 있읍니다"

라고 대답했다. 손호는 타인이 자기보다 잘난 것을 기피하는 성격이었으므로, 이와 같이 하나 하나 정정해 오는 장상이 마음에 안들고 불쾌하고 원한을 더해갔다.


손호가, 

"나의 술을 먹는 모습은 누구와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라고 물으면 장상은, 

"폐하에게는 백의 잔을 [百觚之量] 다 마시는 주량이 있읍니다"

라고 대답했다. (참고: 공자도 백잔(百觚)을 마시는 재주가 있었음) 손호는 

"장상은 공자(孔子)가 왕(王)이 되지 못한 것을 알고는, (나보고도) 일생동안 공자처럼 떠돌아 다니라고 비꼬는 것이구나."

하고는 장상을 포박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장상이 포박 된 것을 알자, 상서(尚書) 잠혼(岑昏)이 공경 백여명이 궁중에 참내해 머리를 조아리고, 관대한 처분을 청하였고, 장상은 사형은 면하게 되었다.

당초 장굉과 같은 군의 사람 진송(秦松)은 자가 문표(文表)고 진단(陳端)은 자가 자정(子正)으로 모두 장굉과 손책에게 대우를 받았으며 대계(大計)을 정하는 일에 참여했다. 이들은 각기 요절했다.

진수의 평: 장굉(張紘)은 문리(文理)가 통하고 생각이 바르며, 이 시대의 영재이다. 손책(孫策)이 장소(張昭)에 버금가게 그를 대우했던 것은 진실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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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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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5.01
01:28:16
(*.52.89.88)

이것을 들기에는 부족하다->듣기에는 부족하다로 수정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5.01
01:30:19
(*.52.89.88)

본래부타->본래부터; 스에게 -> 장상에게

코렐솔라

2013.05.17
10:54:18
(*.52.89.212)

디는->되는 오타수정

코렐솔라

2013.07.10
14:09:53
(*.104.141.18)
오타 수정 및 한문 주석 추가

팔병에 대한 설명, 장현에 대한 강표전의 강표전의 장상 설명은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667853

수도에 대한 손숸과 유비의 말과 그것에 대한 배송지의 평도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667773

장굉의 합비 공략책은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667726

장굉을 구강태수로 삼았음에도 돌아간 것도 처사군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667680

장기튀김

2013.08.19
04:10:07
(*.121.129.101)
吳書曰:紘入太學,事博士韓宗,治京氏易、歐陽尚書,又於外黃從濮陽闓受韓詩及禮記、左氏春秋。
오서에서 이르길 : 장굉은 태학에 들어가 박사 한종韓宗의 밑에서 경씨역京氏易을 배웠고, 외황外黃에서 복양개濮陽闓에게 한시韓詩와 예기禮記, 좌씨춘추左氏春秋를 배웠다.

코렐솔라

2013.08.19
09:23:01
(*.52.91.247)
감사합니다. 반영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9.09
15:44:52
(*.0.203.44)
秦松字文表,陳端字子正 여기에 진송과 진단의 자를 모두 생략했네요.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6.05.20
14:07:42
(*.196.74.143)
여포가 장굉을 꾄 이야기 조욱에 관련된 이야기 진림에 대한 이야기는 dragonrz님의 번역(http://rexhistoria.net/151742)으로 해당문서의 모든 주석이 번역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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