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고원님 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史랑방 



강유(姜維)는 자(字)가 백약(伯約)이고 천수(天水) 기(冀) 사람이다. 소싯적에 고아가 되어 모친과 함께 살았다. 정씨학(鄭氏學)(※정현의 학문을 말합니다) 을 좋아하였다. [一]

 

(천수)군(郡)의 상계연(上計掾)으로 임관하였는데 주(州)에서 벽소하여 종사(從事)로 삼았다. 그의 부친인 강경(姜冏)이 예전에 군(郡)의 공조(功曹)를 지내다 강(羌), 융(戎)의 반란(叛亂)을 만나 몸소 군장(郡將,태수)을 보위하다 싸움터에서 죽었으므로 (강)유에게 중랑(中郞)의 관직을 사여하고 본군(本郡)(천수군)의 군사(軍事)에 참여하게 하였다.(※천수군의 참군參軍)

 

건흥(建興) 6년(=서기 228년),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의 군(軍)이 기산(祁山)으로 향하였는데 당시 천수태수(天水太守)는 때마침 (치소 밖으로) 나가 안행(案行,순행,순찰)하고 있었고 (강)유 및 공조(功曹) 양서(梁緒), 주부(主簿) 윤상(尹賞), 주기(主記) 양건(梁虔) 등이 종행(從行,수행)하고 있었다.

 

태수(太守)는 촉군(蜀軍)이 거의 당도하고 여러 현들이 (촉군에) 향응(響應,호응)한다는 말을 듣고는 (강)유 등에게 모두 딴 마음(배반하려는 마음)이 있을 것이라 의심하였다. 이에 밤중에 달아나 상규(上邽)를 보전하였다. (강)유 등은 태수가 떠난 것을 알아채고 뒤쫓았으나 늦어서 성문(城門)에 도착하니 성문은 이미 닫혀있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강)유 등은 서로 이끌며 기(冀)로 돌아갔는데 기(冀)에서도 역시 (강)유를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강)유 등은 이에 함께 제갈량(諸葛亮)에게로 나아갔다. 때마침 마속(馬謖)이 가정(街亭)에서 패하자 (제갈)량이 서현(西縣)의 천여 가(家) 및 (강)유 등을 뽑아서 거느리고 (촉한으로) 돌아가니 이 때문에 (강)유는 마침내 모친과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二]

 

(제갈)량은 (강)유를 벽소하여 창조연(倉曹掾)으로 삼고 봉의장군(奉義將軍)을 더하고 당양정후(當陽亭侯)에 봉하였는데 당시 나이가 27세였다. (※ 228년에 27세이므로 곧 202년 생) (제갈)량이 (당시 성도에 있던) 유부장사(留府長史) 장예(張裔), 참군(參軍) 장완(蔣琬)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강백약(姜伯約)은 시사(時事,당시의 정사政事)에 충근(忠勤,충실하고 부지런함)하고 사려(思慮)가 정밀(精密)하니 그가 가진 재주를 살펴보면 영남(永南)(→이소李邵의 字가 永南)나 계상(季常)(®마량馬良의 字가 季常) 등의 여러 사람이 그만 못합니다. 그 사람됨이 량주(涼州)의 상사(上士,뛰어난 선비)입니다.”

 

또 말하였다,

 

“먼저 (강유로 하여금) 중호보병(中虎步兵) 5-6천 명을 교련하게 해야 합니다. 강백약(姜伯約)은 군사(軍事)에 매우 기민한데다 담의(膽義,담력과 요령)를 갖추고 병(兵,용병;군사軍事)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한실(漢室)에 늘 마음을 두고 있는데다 재능을 겸비함이 남보다 뛰어납니다. 군대를 교련하는 일을 마치면 응당 궁(宮)으로 보내 주상(主上)을 뵙게 하십시오.” [三]

 

뒤에 중감군(中監軍)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올랐다. (※)

 

[ 중감군(中監軍) vs 호군(護軍) -「화양국지」권7 유후주지(劉後主志)에서는 건흥 8년(=230년)에 강유를 호군(護軍), 정서장군으로 삼았다고 하고(八年春,丞相亮以參軍楊儀爲長史,加綏遠將軍。遷姜維護軍,征西將軍。)「삼국지」권40 이엄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제갈량의 이엄 탄핵문(亮公文上尙書)에서도 건흥 9년(=231년) 기준으로 행호군(行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탄핵문 중에서 이미 유파(劉巴)를 정남장군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과 여기「삼국지」강유전,「화양국지」로 미루어볼 때 여기서 정남장군정서장군의 오기로 보이는데, 군직의 경우는「화양국지」와 탄핵문의 기사 및 여기에서 드러나는 군직 서열순 등 정황(중감군보다는 호군으로 파악할 때 이 전후로 강유의 관직 변천이 자연스러움)에 따르면 중감군이 아닌 호군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당시 등지鄧芝가 독좌부督左部 행중감군行中監軍이었음. 촉한의 군직 포스팅 참고) 그리고 탄핵문 상의 군직(軍職) 기술 예((행)중전좌우 호군은 이미 있고 그 뒤에 강유를 (行)護軍으로만 적고 있는 점.참고로 行은 監軍 이하의 군직에 일률적으로 다 붙어있음)에 따르면 구체적으로는 (행)후호군(後護軍)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 호군(구체적으로는 (행)후호군?) 정서장군.]

 

[一] 「부자傅子」에서「(강)유는 그 사람됨이 공명(功名,공업功業과 명성)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여 은밀히 사사(死士,죽음을 각오한 용사)를 양성하고 포의(布衣,벼슬이 없는 평민)의 업(業)을 닦지 않았다.(※생계를 위한 직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뜻인 듯)」라고 하였다.

 

[二] 「위략魏略」에서「천수태수(天水太守) 마준(馬遵)이 (강)유 및 여러 관속(官屬)들을 거느리고 옹주자사(雍州刺史) 곽회(郭淮)를 수행하여 우연히 서쪽으로부터(西)(※) 낙문(洛門)에 이르기까지 안행(案行)하다가 때마침 (제갈)량이 기산(祁山)에 이미 도착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곽)회가 (마)준을 돌아보며 이는 좋지 않은 조짐이오!라고 말하고는 말을 몰아 동쪽으로 상규(上 邽)로 돌아갔다. (마)준은 그의 치소인 기현(冀縣)의 지경이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점을 염려하고 또한 리민(吏民,관리와 백성)들이 난을 일으키려 할까 우려하여 마침내 그 또한 (곽)회를 따라 (상규로) 떠났다. 이때 (강)유가 (마)준에게 말했다, 명부(明府)(태수인 마준에 대한 경칭)께서는 응당 기(冀)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마)준이 (강)유 등에게 경들 또한 믿기 어렵소. 모두 적(賊)이오.라 말하고는 각자 행동하였다. (강)유 또한 (마)준을 어찌할 방법이 없는데다 집이 기(冀)에 있으므로 마침내 군리(郡吏)인 상관자수(上官子脩) 등과 함께 기(冀)로 돌아갔다. 기(冀)의 리민(吏民)들이 (강)유 등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곧 추천하여 (제갈)량을 만나보도록 하였다. 두 사람(강유와 상관자수) 은 어쩔 수 없어 함께 (제갈)량에게 나아갔다. (제갈)량이 그들을 만나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미처 사람을 보내 기(冀)의 사람들을 맞이하기 전에 때마침 (제갈)량의 전봉(前鋒,선봉)이 장합(張郃), 비요(費繇) 등에게 격파당하니 마침내 (제갈량은) (강)유 등을 거느리고 각축(卻縮,퇴각)하였다. (강)유는 (기冀로) 돌아갈 수 없어 마침내 촉(蜀)으로 들어갔다. 제군(諸軍)이 기(冀)를 공격하여 (강)유의 모친과 처자를 모두 붙잡았는데 또한 (강)유에게 본래 (조위를 배반하고) 떠날 마음은 없었으므로 그 집안을 적몰하지는 않고 (이들을) 다만 보관(保官,관리의 가족을 인질로 삼았다가 관리의 죄로 연좌되었을 때 가두는 감옥)에 가두어놓고 그(강유)를 불러들이고자 했다.」라고 하였다. (주석자인 배송지裵松之가 보건대 위략의) 이 이야기는 본전(本傳)(앞의 강유전 본문)과 서로 같지 않다.

 

[※ 점교본 표점에 고유명사 표기가 되어있지 않아 이렇게 풀었으나, 삼국지집해에서 노필은 여기의 西를 서현(西縣)으로 보았음.]

 

[三] 손성(孫盛)의「잡기雜記」에서「당초 강유가 (제갈)량에게로 나아가 모친과 서로 헤어졌을 때 다시 모친의 서신을 받아보니 그에게 당귀(當歸)를 청하는 내용이었다. (강)유가 말했다, 좋은 밭이 100경(頃)이라도 (내 밭은) 1무(畝)(※100畝=1頃)도 없으니 다만 원지(遠志)만 있을 뿐 당귀(當歸)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 당귀(當歸)와 원지(遠志)는 둘 다 식물의 이름인데, 강유의 모친이 마땅히 돌아와야 한다(當歸)는 한자 뜻을 빌어 다시 위나라로 돌아올 것을 권유한데 대해 원대한 뜻(遠志)만 있다며 그 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건흥) 12년(=234년), (제갈)량이 죽자 (강)유는 성도(成都)로 돌아와 우감군(右監軍) 보한장군(輔漢將軍)에 임명되어 제군(諸軍)을 통할하고 평양후(平襄侯)로 올려 봉해졌다.

 

연희(延熙) 원년(=238년), 대장군(大將軍) 장완(蔣琬)을 따라 한중(漢中)에 주둔하였다. (장)완이 대사마(大司馬)로 오른 뒤에 (강)유를 사마(司馬)로 삼으니 수차례 편군(偏軍)을 인솔해 서쪽으로 침입하였다.

 

(연희) 6년(=243년),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영(領) 량주자사(涼州刺史)로 올랐다.

 

[246년에 장완이 죽은 뒤] (연희) 10년(=247년), 위장군(衞將軍)으로 올라 대장군(大將軍) 비의(費禕)와 함께 상서의 사무를 총괄하였다. (녹상서사錄尙書事) 이 해에 문산(汶山)의 평강이(平康夷)(문산군 평강현의 이족夷族)가 반란을 일으키자 (강)유가 군대를 인솔해 이를 쳐서 평정하였다. 또한 농서(隴西), 남안(南安), 금성(金城)의 경계로 출병해 위(魏)의 대장군(大將軍)(※ 대장大將 or 장군將軍의 오기임) 곽회(郭淮), 하후패(夏侯霸) 등과 더불어 조서(洮西,조수洮水의 서쪽지역)에서 싸웠다. 호왕(胡王) 치무대(治無戴) 등이 부락(部落)을 들어 항복해오자 (강)유가 이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안처(安處)시켰다.

 

(연희) 12년(=249년)(※) (강)유에게 부절(節)을 내리니(가절假節) 다시 서평(西平)으로 출병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 「삼국지」후주전 및「화양국지」유후주지에서는 연희12년(=249년)의 옹주(雍州) 출병, 연희13년(=250년)의 서평(西平) 출병으로 구별해 기술하고 있고(서평군은 량주凉州 소속으로 옹주와는 별개임)「자치통감」에서도 그렇게정리하고 있습니다. 강유전은 이 두 사건 중 하나만을 기록한 것인데, 앞의 두 기록에 따르면 서평출병은 연희13년의 일이므로 여기서 12년은 아마도 13년의 오기나 와전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혹 12년에 부절을 내렸다. (13년에) 다시 서평으로 출병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의 형태일 수도 있구요.]

 

(강)유는 자신이 서방(西方)의 풍속(風俗)에 익숙하다고 여기는데다 자신의 무재(才武)를 믿고 여러 강(羌), 호(胡)를 유인하여 (촉한의) 우익(羽翼,보조하는 사람이나 역량)으로 삼고자 하고 농(隴)의 서쪽을 끊어서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매번 군대를 크게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비의(費禕)가 늘 재제(裁制)하며 따라주지 않아 그에게 만 명을 넘지 않는 병력을 주었다. [一]

 

[一]「한진춘추漢晉春秋」에서「비의(費禕)가 (강)유에게 말했다, 우리는 승상(丞相)(제갈량) 만 못하거니와 또한 많이 뒤떨어지오. 승상께서도 중하(中夏,중국,중원)를 능히 평정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우리들이겠소!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며 신중하게 사직(社稷)을 지키느니만 못하오. 공업(功業)을 세우는 것은 능력있는 자를 기다려야 할 것이며, 요행(徼倖)을 바라며 일거에 성패(成敗)를 결정하려 해서는 안되오. (그렇게 하다가) 만약 뜻대로 되지 못한다면 후회해도 다시 어쩔 수 없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연희) 16년(=253년) 봄, (비)의가 죽었다. 여름, (강)유가 수만 명을 이끌고 석영(石營)으로 출병하여 동정(董亭)을 거쳐 남안(南安)을 포위하자 위(魏)의 옹주자사(雍州刺史) 진태(陳泰)가 포위를 풀기 위해 낙문(洛門)에 도착하였고 (강)유는 군량이 다하여 퇴환(退還)하였다. (※ 그 뒤 254년 정월에 성도로 돌아옴 / 삼국지 후주전)

 

이듬해(=254년), 독중외군사(督中外軍事)가 더해졌다. 다시 농서(隴西)로 출병하자 수적도장(守狄道長)(농서군 적도현의 守(임시의 뜻) 현장縣長)(※) 이간(李簡)이 성(城)을 들어 항복하였다. 진군하여 양무(襄武)를 포위하고는 위장(魏將) 서질(徐質)과 교봉(交鋒,교전)하여 (적군의) 수급을 베고 적을 격파하니 위군(魏軍)이 패퇴(敗退)하였다. (강)유가 승세를 타 항복시킨 곳이 많았고 하관(河關), 적도(狄道), 임조(臨洮) 세 현(縣)의 백성들을 뽑아 (데리고) 돌아왔다. (※ 255년 봄에 성도로 돌아옴 / 후주전)

 

[※ 삼국지집해본에는 원문이 ‘復出隴西守狄道狄道長李簡擧城降’로 표기되어 있고 이에 관해 “守 자는 연자(衍字,빼야되는 군더더기 글자)다. 송본(宋本)에는 (守狄道 중) 狄道 두 자가 없다.”(제가 위에 제시한 원문과 같다는 말. 참고로, 중화서국 점교본이 주로 송본에 근거한 것임)라고 주해하였습니다. 이 삼국지집해 상의 원문과 노필의 설에 따라 번역하면 “다시 농서 적도로 출병하자 적도장 이간이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그 뒤 (연희) 18년(=255년), 다시 거기장군(車騎將軍) 하후패(夏侯霸) 등과 함께 적도(狄道)로 출병하여 위(魏)의 옹주자사(雍州刺史) 왕경(王經)을 조서(洮西)에서 대파하니 (왕)경의 군사들 중 죽은 이가 수만 명에 달했다. (왕)경이 퇴각해 적도성(狄道城)을 보전하니 (강)유가 이를 포위하였다. 위(魏)의 정서장군(征西將軍) 진태(陳泰)가 진병(進兵)하여 포위를 풀자 (강)유는 물러나 종제(鍾題)(※)로 가서 주둔하였다.

 

[※ 종제(鍾題) 「삼국지사전」에서는 종제(鍾題)를 (城)의 이름이고 (등애전에서는) 鍾提로도 적었다. 옛 터가 지금의 감숙성 성현(成縣) 서북쪽에 있다. 강유가 예전에 이곳에 군대를 주둔한 적이 있다.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다른데서는 삼국지사전의 해설과 중국역사지도집의 비정이 대체로 잘 일치하던데 이 종제의 경우는 많이 다르네요. 역사지도집에서는 종제를 적도 남쪽으로 비정해놓은 반면(첨부그림 참고) 삼국지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무도군 하변 근처가 됩니다. 참고로「삼국지집해」에서는 적도의 서쪽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연희) 19년(=256년) 봄, (사자가 종제로) 나아가 (강)유를 올려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했다. 다시 융마(戎馬,군마;군대)를 정륵(整勒,정돈)하고는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호제(胡濟)와 상규(上邽)에게 모이기로 기약하였는데 (호)제가 서약을 어기고 도착하니 않으니 이 때문에 (강)유는 단곡(段谷)에서 위(魏)의 대장(大將) 등애(鄧艾)에게 격파되어 (군사들이) 별이 흩어지듯 유리(流離,떠돌고 헤어짐)하고 죽은 자들이 매우 많았다. (※ 그 뒤 성도로 돌아옴 / 후주전)

 

(촉한의) 많은 사람들이 이로 말미암아 (강유를) 원독(怨讟,원망하고 비방함)하였고 농(隴)의 서쪽 지역 또한 소동(騷動)을 일으켜 안녕하지 못하였다. (강)유가 사과(謝過)하고 책임을 져서 스스로 (관직을) 폄삭(貶削,깎거나 삭제함)할 것을 청하니 후장군(後將軍) 행대장군사(行大將軍事,대장군의 사무를 대행)로 삼았다.

 


(연희) 20년(=257년), 위(魏)의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제갈탄(諸葛誕)이 회남(淮南)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위나라에서) 관중(關中)의 군대를 나누어 (일부를) 동쪽으로 내려보냈다. (강)유가 이 헛점을 틈타 진천(秦川)으로 향하고자 하니 다시 수만 명을 이끌고 낙곡(駱谷)으로 출병하여 곧장 침령(沈嶺)에 도착하였다.

 

당시 장성(長城)에는 곡식을 매우 많이 쌓아놓았음에도 수비병은 적었으므로 (강)유가 바야흐로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군사들이 모두 황구(惶懼,당황하고 두려워함)하였다. 위(魏)의 대장군(大將軍)(※ 대장大將이나 장군將軍의 오기) 사마망(司馬望)이 강유군을 막고 등애(鄧艾) 또한 농우(隴右=농서)로부터 와서는 모두 장성(長城)에 주둔하였다.

 

(강)유는 전진하여 망수(芒水,강 이름.위수의 지류)로 가서 주둔하였는데 (전군이) 모두 산에 의지하여 영채를 세웠다. (사마)망과 (등)애는 위수(渭水) 가에서 위(圍,방호물로 둘러싼 군사시설)를 견고히 하였는데 (강)유가 여러 차례 내려와 싸움을 걸어도 (사마)망과 (등)애는 응하지 않았다.

 

[※ 사마망(司馬望)은 사마의(司馬懿)의 동생인 사마부(司馬孚)의 아들로, 백부인 사마랑(司馬郞)의 양자로 들어간 인물입니다. (곧, 사마의의 조카이자 당시 권신인 사마사,사마소의 사촌형제) 당시 사마망은 대장군은 아니고,「진서」사마망전이나「자치통감」에 따르면 정서장군(征西將軍) 지절(持節) 도독옹량이주제군사(都督雍涼二州諸軍事)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무렵 위나라 정서장군 계보는 곽회 – 진태 – 사마망 – 등애로 이어짐)]

 

경요(景耀) 원년(=258년), (강)유는 (제갈)탄이 파패(破敗,패배)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에 성도(成都)로 돌아왔다. 다시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다.

 

 

당초 선주(先主)(유비劉備)가 위연(魏延)을 남겨 한중(漢中)을 진수하게 할 때에 (한중 주변의) 여러 위(圍)에 모두 군사를 충실히 채워 외적을 막아, 적이 쳐들어오면 (한중의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244년에] 흥세(興勢) 전투에서 왕평(王平)이 조상(曹爽)을 막을 때에도 이 제도를 모두 (그대로) 계승하였다. (강)유가 건의하였다,

 

“여러 위(圍)를 조수(錯守,설치하여 수비함)하는 것은 비록「주역周易」에서 말하는 ‘중문(重門)’의 뜻에 부합하지만 적을 막을 수 있을 뿐 큰 이로움(대승)을 거둘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러 위(圍)에서 모두 군사를 거두고 곡식을 모아 한(漢), 낙(樂) 두 성(한성城과 낙성樂城)으로 물러나 적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아울러 중요한 관(關)을 진수(鎭守)하며 적을 막느니만 못합니다. 사고(변고,변화)가 있을 때에 유군(游軍,기군奇軍으로 활용하는 기동부대)으로 하여금 함께(*원문은 並.자치통감에서는 傍(측면으로부터)으로 기술) 진격해 그 허점을 노리게 해야 합니다. 적은 관(關)을 공격하여 함락하지 못하고 들에는 흩어져있는 곡식이 없어 천리 떨어진 먼 곳으로 군량을 운반해와야 하니 자연 피핍(疲乏,피폐)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적이) 군을 이끌고 퇴각하는 날이 되면 그 연후에 여러 성(城)에서 아울러 출격하여 유군(游軍)과 힘을 합쳐 그들을 공격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적을 전멸시키는 전술입니다.”

 

이에 독한중(督 漢中) 호제(胡濟)는 물러나 한수(漢壽)에 주둔하게 하고, 감군(監軍) 왕함(王含)은 낙성(樂城)을 수비하고 호군(護軍) 장빈(蔣斌)은 한성(漢城)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한 서안(西安), 건위(建威), 무위(武衞), 석문(石門), 무성(武城), 건창(建昌), 임원(臨遠)에 모두 위(圍)를 세워 수비하였다. (※)

 

[※ 使敵不得入平 이 대목을「자치통감」에서는 聽敵入平(적이 평지로 들어오도록 허용해주면서)으로 정반대의 뜻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문맥상「자치통감」쪽이 더 자연스러운 듯 합니다.]

 

[※ 서안, 건위, 무위, 석문, 무성, 건창, 임원 「삼국지집해」에서는 서안위(西 安圍)는 양희 보신찬 말미 왕사(王嗣)전에 보인다. 건위(建威)는 감숙성 계주(階州) 성현(成縣) 북쪽이고 제갈량전에 보인다. 무성(武城)은 감숙성 공창부(鞏昌府) 영원현(寧遠縣) 서남쪽에 있었고 등애전에 보이며, 그 나머지는 미상(未詳)이다. 조일청(趙一淸)은 이 성들은 지금의 계(階), 성(成), 봉(鳳), 면(沔) 사이에 있었다.고 하였다.라고 주해하고 있습니다. 한편「삼국지사전」에서는 건위를 지금의 감숙성 서화현(西和縣) 북쪽 3km 지점으로 비정하고 있으며, 그 나머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대략 지금의 감숙성과 섬서성 경계(당시로 보면 한중의 서북쪽이나 북쪽으로 위-촉의 경계 지역) 일대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요) 5년(=262년), (강)유가 군대를 이끌고 한(漢), 후화(侯和)로 출병하였다가(※) 등애(鄧艾)에게 격파되니 답중(沓中)으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강)유는 본래 기려(羈旅,객지생활하는 나그네) 신세로 나라에 의탁하였는데 여러 해 동안 공전(攻戰,공격하여 싸움)하였으나 공적(功績)을 세우지 못하였다. 그런데 환관(宦官) 황호(黃皓) 등이 내부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우대장군(右大將軍) 염우(閻宇)가 (황)호와 더불어 협비(協比,결탁)하니 (황)호는 은밀히 (강)유를 폐하고 (염)우를 심고자 하였다. (강)유 또한 이를 의심하니 이 때문에 스스로 위구(危懼,두려워함)하여 다시 성도(成都)로 돌아가지 않았다. [一]

 

[※ 여기서 한(漢)은 아마도 한성(漢城) 또는 한중(漢中)의 줄임말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 한(성) -> 후화…의 경로를 밟은 것으로 볼 수 있음) 그런데 강유전의 다른 대목들과는 달리 출병 목적지로 촉의 확실한 영지가 등장하는 게 다소 이색적으로 느껴지는데,「삼국지」후주전,「화양국지」유후주지,「자치통감」에서 모두 ‘후화’라고만 기술한 걸 볼 때 혹 단순히 연자(衍字)인지도 모르겠네요.]

 

(경요) 6년(=263년), (강)유가 후주(後主)에게 표(表)를 올렸다,

 

“듣기로 종회(鍾會)가 관중(關中)에서 치병(治兵)하여 진취(進取)할 틈을 엿본다고 하니 의당 장익(張翼)과 요화(廖化)를 아울러 보내 제군(諸軍)을 감독하며 양안관구(陽安關口=관성關城/삼국지사전)와 음평교두(陰平橋頭)를 나뉘어 지키게 하여 미연에 방비해야 합니다.”

 

(황)호가 신임하던 귀무(鬼巫,신들린 무당)을 부르자 (그가) 적이 끝내 스스로 쳐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후주(後主)에게 아뢰어 그 사안을(그 표문을 공론에 부쳐 의논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하니 뭇 신하들이 이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 종회(鍾 會)가 장차 낙곡(駱谷)으로 향하고 등애(鄧艾)는 답중(沓中)으로 침입하려 하니 그 연후에야 우거기장군(右車騎) 요화(廖化)를 보내 답중(沓中)으로 가서 (강)유를 위하여 원조하게 하고, 좌거기(左車騎)(장군) 장익(張翼)과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동궐(董厥) 등은 양안관구(陽安關口)로 가서 여러 위(圍)들을 위하여 바깥에서 돕도록 하였다. 음평(陰平)에 당도할 무렵 위(魏)의 장수 제갈서(諸葛緒)가 건위(建威)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이에 대처하기 위해) 주둔하며 기다렸다. 한달 여 뒤에(※) (강)유는 등애(鄧艾)에게 패한 뒤 음평(陰平)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 月餘를 어디에 붙여서 읽어야 될지 애매하네요.「자치통감」에서는 “장익, 동궐이 북쪽으로 가서 음평에 이르렀는데 제갈서가 장차 건위로 향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한달 여를 머물러 주둔하며 기다렸다.”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月餘를 앞글에 붙여서 읽고 이를 바탕으로 정리한 거 같은데, 저는 그냥 여기 점교본 표점에 따라 뒷글에 붙여서 풀었습니다. / 한편, 이 무렵 강유의 행보는 등애전이나 종회전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마 기록의 순서상 이미 상술했기 때문에 여기 강유전에서는 약술한 듯 한데 전문은 나중에 따로 번역하기로 하고 줄거리만 대충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등애는 강유를 공격하고 제갈서는 강유가 돌아가지 못하게 요격하는 포진 -> 종회군이 한중으로 이미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강유 퇴각(종회군이 야곡,낙곡,자오곡을 통해 한중지역으로 진입해서 한성, 낙성, 양안관구를 공략하던 무렵인 듯) -> 등애 휘하의 양흔(楊欣)이 이를 추격해 강천구(彊川口) 에서 크게 싸우고 강유 패주 -> 제갈서가 이미 길을 막고 교두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공함곡(孔函谷)을 따라 북쪽 길로 제갈서의 뒤로 출군하려 함 -> 제갈서가 이를 듣고 30리를 퇴각 -> 강유는 북쪽길로 30여 리를 가다가 제갈서군 퇴각한 것을 듣고 되돌아가 교두를 통과 -> 제갈서가 이를 뒤쫓았으나 약 하루 차이로 미치지 못함 -> 강유는 음평에서 군을 수습한 뒤 관성(關城=양안관구陽安關口)을 구원하러 갔으나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 듣고 백수(白水)로 퇴각.(호열이 양안관구를 함락한 직후인 듯) 장익, 요화 등과 합쳐서 검각에서 종회를 막음]]

 

종회(鍾會)가 한(漢), 낙(樂) 두 성(→한성과 낙성)을 공격하며 포위하고 별장(別 將)을 보내 (양안)관구(關口)로 진격하여 공격하게 하니 장서(蔣舒)가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고 부첨(傅僉)은 (적군과) 격투(格鬭)하다 죽었다. [二] (종)회는 낙성(樂城)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는데 관구(關口)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양안관구를 통해) 장구(長驅,멀리 달려감)하여 전진했다.

 

(장)익과 (동)궐이 이제 막 한수(漢壽)에 이르렀을 때 (강)유와 (요)화 또한 음평(陰平)을 버리고 퇴각하다가 (장)익과 (동)궐을 만나 서로 군대를 합치고는 모두 물러나 검각(劍閣)을 보전하며 (종)회를 막았다. (종)회가 (강)유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공후(公侯)는 문무(文武)의 덕을 갖추고 매세(邁世,세속을 초월함)의 지략을 품고 공을 세워 파(巴), 한(漢)을 구제하여 화하(華夏,중국)에까지 명성을 드날렸으니 멀고 가까운 이들 중 그대의 명성에 귀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소. 늘 지난날을 생각하면 일찍이 (그대와 나는 위나라의) 큰 교화를 함께 입었으며 오찰(吳札,오나라의 계찰季札)과 정교(鄭喬,정나라의 자산子産)가 우리의 우호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오.”

 

(강)유는 서신에 답하지 않고 군영을 벌려세우고 험요지를 수비하였다. (종)회는 이길 수 없고 군량을 운반하는 길이 매우 멀었으므로 장차 (군대를 물려) 귀환할 것을 의논하였다.

 

[一]「화양국지華陽國志」에서「(강)유는 황호(黃皓)가 자천(恣擅,방자하게 제멋대로 함)하는 것을 미워하여 후주(後主)에게 그를 죽이라고 아뢰었다. 후주(後主)가 말했다, (황)호는 추주(趨走,종종걸음으로 빨리 걸음)하는 소신(小臣)일 뿐이오. 예전에는 동윤(董允)이 이를 갈며 그를 몹시 미워해 내가 늘 이를 한스럽게 여겼었소. 그대가 어찌 족히 개의(介意)할 일이겠소! (강)유는 (황)호가 (후주와 더불어) 지부엽련(枝附葉連,가지가 붙고 잎이 서로 이어짐. 관계가 긴밀,밀접함을 비유)함을 보고는 실언(失言)하였음을 두려워하여 공손히 사례하고 물러났다. 후주(後主)가 (황)호에게 명하여 (강)유에게로 나아가 진사(陳謝,사죄하는 마음을 표함)하도록 하였다. (강)유는 (황)호를 설득하여 (스스로) 답중(沓中)으로 가서 맥(麥,밀 또는 보리) 농사를 할 것을 청함으로써 안으로부터의 핍박을 피하였다.」라고 하였다.

 

[二]「한진춘추漢晉春秋」에서「장서(蔣舒)가 장차 성을 나가 항복하려고 부첨(傅僉)을 속이며 말했다, 지금 적이 당도했는데 공격하지 않은 채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부)첨이 말했다,성을 보전하라는 명을 받았으니 오로지 (성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공을 세우는 것이오. 이제 명을 어기고 출전(出戰)하였다가 만약 상사(喪師,싸움에 져 군대를 손상시킴)하여 나라를 저버리게 된다면 (내 한 몸이 용감히 싸우다) 죽는다 하더라도 아무 이득이 없는 것이오. (장)서가 말했다, 그대는 성을 보전하여 온전하도록 지키는 것을 공을 세우는 것으로 여기고 나는 출전하여 적을 이기는 것을 공을 세우는 것으로 여기니, 청컨대 각자 자신의 뜻대로 행하도록 하십시다. 그리고는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부)첨은 그(→장서) 가 싸우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장서는) 음평(陰平)에 이르러 호열(胡烈)에게 항복하였다. (호)열이 헛점을 틈타 성을 습격하자 (부)첨이 격투(格鬭)하다 죽으니 위(魏)나라 사람들이 그를 의롭게 여겼다.」라고 하였다.「촉기蜀記」에서「장서(蔣舒)는 무흥독(武興督)을 지내며 그 사무에 있어 별다른 칭찬을 받지 못하였다. 촉(蜀)에서 다른 이에게 명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고는 (장)서를 (소환하지 않고) 남겨두어 한중(漢中)의 수비를 돕게 하였다. (장)서가 이를 한스러워 하였으므로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등애(鄧艾)가 음평(陰平)으로부터 경곡도(景谷道)를 거쳐 측면으로 침입하여 마침내 면죽(緜竹)에서 제갈첨(諸葛瞻)을 격파했다. 후주(後主)가 (등)애에게 항복을 청하니 (등)애는 전진하여 성도(成都)를 점거하였다.

 

(강)유 등이 처음 (제갈)첨이 격파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혹 후주(後主)가 성도를 굳게 수비하려 한다고 듣거나 혹 동쪽으로 오(吳)로 들어가려 한다고 듣거나 혹 남쪽으로 건녕(建寧)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으니 (무엇이 정확한 소식인지 몰라) 이에 군을 이끌고 광한(廣漢) 및 처도(郪道)(or (동)광한군 처현郪縣의 도로)를 거치며 그 허실(虛實)을 파악하려고 하였다.

 

얼마 뒤 후주(後主)의 칙령(敕令)을 받자 이에 과(戈)를 던지고 갑옷을 벗어놓은 뒤 부(涪)에 있던 종회군 앞으로 나아가니 장사(將士,장졸)들이 모두 분노하여 칼을 뽑아 돌을 베었다.[一]

 

[一] 간보(干寶)의「진기晉紀」에서「(종)회가 (강)유에게 “(항복하러) 오는 것이 어찌 이토록 늦었소?”라고 말하자 (강)유가 정색(正色)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 사람을 오늘 보는 것만도 빠른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종)회가 그를 매우 높게 여겼다.」라고 하였다.

 


(종)회가 (강)유 등을 후대하여 모두에게 (원래 촉한으로부터 사여받았던) 그들의 인호절개(印號節蓋,관인官印,관호官號,부절과 거개車蓋(or 부절을 받은 대장이 사용하던 거개))를 임시로 돌려주었다. (종)회는 (강)유와 함께 밖으로 나갈 때는 같은 수레를 타고 좌정할 때는 같은 자리()에 앉았다. 장사(長史) 두예(杜預)에게 말했다,

 

“백약(伯約)(강유)을 중토(中土,중원,중국)의 명사(名士)에 비교하자면 공휴(公休)(제갈탄諸葛誕의 字가 공휴)나 태초(太初)(하후현夏侯玄의 字가 태초)가 그보다 더 낫지는 못할 것이오.” [一]

 

(종)회가 등애(鄧艾)를 무함한 뒤에 (등)애가 함거(檻車,죄인을 호송하는 수레)로써 소환되었다. 이로 인해 (강)유 등을 거느리고 성도(成都)로 가서 익주목(益州牧)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고는 [二] (강)유에게 군사 5만 명을 주어 그를 전구(前驅,선봉)로 삼으려 하였다. 위(魏)의 장사(將士,장졸)들이 분노하여 (종)회와 (강)유를 죽이고 (강)유의 처자식이 모두 복주(伏誅,주살)되었다. (※ 강유 생몰 : 202 – 264년)

 

[一] 세어(世語) 왈 : 당시 촉의 관속(官屬)들이 모두 천하(天下)의 영준(英俊)이나 (강)유보다 나은 자는 없었다. (※)

 

[※ 삼국지집해 조일청(趙一淸)은 (촉) 위에 征(정) 자가 탈락된 것으로 의심된다.라고 하였다.(趙一淸曰, 蜀上疑落征字) / 조일청의 설에 따르면 당시 촉을 정벌한 관속들이 모두…”로 풀이됩니다.]

 

[二]「한진춘추漢晉春秋」에서「(종)회가 은밀히 다른 뜻을 품고 있었는데 (강)유가 만나보고 그 마음을 알아채고는 요란(擾亂,혼란)을 일으킴으로써 극복(克復,회복,수복)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에 (종)회를 속이며 설득하였다,


듣기로 그대는 회남(淮南)(에서 활약한) 이래로 계책에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하니 (※①) 진(晉)의 도(道)가 극창(克昌,창대,창성)한 것은 모두 그대의 역량 덕분입니다. 이제 또한 촉(蜀)을 평정하여 위덕(威德)을 세상에 떨치니 백성들은 그 공을 높게 여기고 군주는 그 지모를 두려워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찌 (조위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무릇 한신(韓信)은 요양(擾攘,혼란,소란)한 때에 한나라를 배신하지 않았다가 천하가 평정된 뒤에 의심을 받았고 대부종(大夫種)은 범려(范蠡)가 오호(五湖)에서 (서신을 보내 월왕 구천을 떠날 것을) 권하는 말을 따르지 않았다가 끝내 복검(伏劍,칼로 자결함)함으로써 허망하게 죽었는데 그들이 어찌 우매한 군주와 어리석은 신하여서 그랬겠습니까? 이해(利害)(득실)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 그대의 공(功)은 이미 세워지고 큰 덕(大德)은 이미 현저하니 어찌 도주공(陶朱公)(→범려)이 (월왕 구천에게서 달아나) 배를 띄워 자취를 끊음으로써 공적과 몸을 보전한 것을 본받거나 아미(峨嵋)의 산봉우리에 올라가 적송(赤松)(→적송자赤松子.유명한 신선의 이름)을 뒤따라 떠돌지 않으십니까? (종)


회가 말했다,


그대의 말이 심오하여 내가 능히 행할 수 없소. 또한 지금을 위한 방도로 혹 아직 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 같소.


(강)유가 말했다,


그 나머지 방도야 그대의 지력(智力,지혜와 역량)으로 능히 헤아릴 수 있으니 이 노부(老夫,늙은이)가 번거로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②) 이로 말미암아 정호(情好,우정과 교분)와 환대하는 마음이 깊어졌다.」라고 하였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서「(강) 유는 북쪽에서 온 (위나라의) 제장(諸將)들을 주살하도록 (종)회에게 가르치고 (제장들이) 죽은 뒤에 천천히 (종)회를 죽이고 위병(魏兵)들을 모두 파묻어 죽임으로써 촉조(蜀祚,촉의 제위帝位)를 원래대로 복구하고자 하니 은밀히 후주(後主)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원컨대 폐하(陛下)께서 며칠동안만 모욕을 참으시면 신이 사직이 위태로우나 다시 안전하게 하고 일월(日月)이 빛을 읽었으나 다시 밝게 빛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③)

 

손성(孫盛)의「진양추晉陽秋」에서


(손) 성이 영화(永和: 동진東晉 목제穆帝의 연호 345-356년) 초에 안서장군(安西將軍)(→환온桓溫)을 따라 촉(蜀)을 평정할 때에(※④) 여러 고로(故老,노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길) 강유가 이미 항복한 뒤에 은밀히 유선(劉禪)에게 표소(表疏,주장奏章)를 올려 종회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섬기고 이를 틈타 그를 죽이고 촉 땅을 회복하고자 한다.라고 말했으나 때마침(會) (※⑤)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마침내 민멸(泯滅,멸절,멸망)되기에 이르렀으니 촉인(蜀人)들이 지금도 그를 안타깝게 여긴다고 하였다. (손)성이 생각건대, 옛 사람이 이르길 시달릴 바가 아닌데 시달리면 이름이 반드시 욕되고 의거할 바가 아닌데 의거하면 몸이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이며, 욕되고 또한 위태로워지면 죽을 날이 장차 닥칠 것이다. 하였으니 바로 강유(姜維)를 일컫는 말이로다! 등애(鄧艾)가 강유(江由)로 들어올 때 사중(士衆,군사)들이 매우 적었으나 (강)유는 나아가서는(進) 면죽(緜竹) 아래에서 절의를 떨치지도 못하고 물러나서는(退) 다섯 장수를 총수(總帥)하여 촉주(蜀主)를 옹위(擁衞)하지도 못하였고, 뒷날 도모할 계책을 생각하다가 역(逆)과 순(順) 사이에서 반복(反覆,이랬다저랬다 함)하였으며 기대하기 어려운 기회에서 물정에 어긋나는 것(違情)을 희망함으로써 나라를 쇠약(衰弱)하게 만들며 삼진(三秦≒관중關中)에서 여러 번 관병(觀兵,군세를 과시함)하였고, 이미 나라가 멸망한 뒤에 이치를 넘은(理外) 기거(奇擧,대단한 성공)를 바랐으니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신 송지(→ 주석자인 배송지裵松之)가 보건대, (손)성이 (강)유를 비난하는 말이 또한 합당하지 않다. 당시 종회(鍾會)의 대중(大衆,대군大軍)이 이미 검각(劍閣)에 이르자 (강)유가 제장들과 더불어 군영을 벌려세우고 험요지를 수비함으로써 (종)회가 진격할 수 없어 이미 되돌아갈 계획을 의논하였으니 촉을 온전히 지키는 공이 거의 이루어졌었다. 다만 등애(鄧艾)가 궤도(詭道,기만술)로 측면으로 침입하여 그 배후로 출병하니 제갈첨(諸葛瞻)이 패한 뒤에 성도(成都)는 스스로 무너졌을 뿐이다. (강)유가 만약 회군(回軍)하여 내부를 구원했다면 곧 (종)회가 그의 배후를 틈탔을 것이다. 당시의 사세로 어찌 양쪽을 다 구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강)유가 면죽 아래에서 절의를 떨치지 못하거나 촉주를 옹위하지 못했다고 책망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않는 말이다. (종)회는 위장(魏將)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강)유에게 중병(重兵,대군)을 주어 전구(前驅,선봉)로 삼고자 하였다. 만약 위장(魏將)들이 모두 죽고 병사(兵事,군사軍事)가 (강)유의 손에 주어졌다면 (종)회를 죽이고 촉을 회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무릇 이치를 넘어(理外) 공이 이루어진 연후에 이를 가리켜 기(奇)라 하는 법이니 그 일에 차아(差牙,차질)가 있었다고 하여 그리 해서는 안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설사(만약) 전단(田單)의 계책(※)이 좋지 않은 때를 만났다면(®이루어지지 못했다면) 또한 그를 가리켜 어리석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 자치통감 호삼성 주석(자치통감음주) 제갈탄을 평정한 것을 가리킨다.(謂平諸葛誕也)

 

(※②) 삼국지집해 – “(자치통감음주에서) 호삼성(胡三省)이 이르길, “(말할 필요도 없는 다른 방도라는 것은) 난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강)유가 실로 지혜로워 족히 종회를 손바닥과 허벅지 위에서 갖고 놀 정도였으나, 시세에 핍박당하고 운명에 제지되었으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삼국지집해 지은이인 노)필(盧)이 보건대, (종)회가 (강)유를 임용한 것은 그가 사마씨(司馬氏)의 일당이 아닌데다 망국의 장수로서 그 재주가 또한 임용할만 했기 때문이다.” (胡三省曰 言爲亂也 維之智固足以玩弄鍾會於掌股之上 迫於時制於命 柰之何哉 弼按會之用維 以其非司馬氏之黨 且爲亡國之將而其才亦可用也)

 

(※) 자치통감 호삼성 주석 – “강유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을 위하였으니 천년의 세월 동안 단(丹)처럼 밝게 빛나는구나. 진수(陳壽), 손성(孫盛), 간보(干寶)가 그를 기폄(譏貶.폄하)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姜維之心 始終爲漢 千載之下 炳炳如丹 陳壽孫盛干寶之譏貶 皆非也.)

 

(※④) 삼국지집해 – “하작(何焯,청淸)은 ‘영화3년(=347년)에 이세(李勢)가 파멸(破滅)되었으니 이 해는 정미년(丁未)으로 촉이 망한 경요6년(=263년) 계미년(癸未)으로부터 도합 65년만의 일이다.” (凡六十五年. 何焯曰 永和三年 李勢破滅 是年丁未 去蜀亡景耀六年癸未 凡六十五年.) / 같은 支의 해는 12년 간격으로 반복되니 65년이란 숫자는 애초에 나올 수가 없죠. 하작이 이런 기초적인 걸 틀릴 리가 없고 단순히 오타를 냈거나, 삼국지집해에서 인용하며 八을 六으로 오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서기로 환산해서 계산해보면 84년 뒤의 일이며(263년-347년) 하작 식으로 표현하면 +1해서 ‘85년만’이 맞습니다.

 

(※) 점교본 표점에서는 고유명사로 보지 않아서 그에 따라 이렇게 풀었는데, 종회의 會로 보고 종회의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로 볼 여지도 있는거 같습니다.

 

(※⑥) 전단(田單)의 계책 전단(田單)은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연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의 침입으로 제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가 펼친 계책 중에 연나라에 첩자를 보내 악의(樂毅)가 전쟁을 일부러 질질 끌면서 자신이 제나라 왕이 되려 한다는 이간책을 써서 악의를 소환당하게 한 일이 있는데, 그 내용이 서로 똑같지는 않지만 아마 원정하러 온 적군의 대장과 그 본국을 이간시킨다는 점에서 강유와 비슷한 사례로 배송지가 거론한 듯 합니다.

 

[三]「세어世語」에서「(강)유가 죽었을 때에 몸이 쪼개어졌는데 쓸개(膽)가 한 승(升) 크기만 했다.」 라고 하였다.(※)

 

[※ 삼국지집해 호삼성(胡三省)은


한 두(斗)는 몸이 담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니 응당 升(승)으로 적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라고 하고 하작(何焯)은


옛升(승) 자는 斗(두) 자와 (모양이) 서로 비슷하였다.


라고 하고 정림(亭 林)(→고염무顧炎武의 호가 亭林) 또한 그렇게 말하였다. (胡三省曰 斗非身所能容 恐當作升 何焯曰 古升字與斗字相類 亭林亦云) / 10升=1斗인데 1斗는 사람 쓸개 크기로는 너무 커서 말이 안된다는 뜻입니다. 여기 점교본에서는 이 호삼성과 고염무의 설에 따라 원문의 斗를 升으로 이미 교정해두었습니다. (從胡三省顧炎武說. / 점교본 교감기)]

 

극정(郤正)이 논(論)을 지어 다음과 같이 (강)유를 논하였다.

 

“강백약(姜伯約)은 상장(上將)의 중요한 지위에 의거하고 뭇 신하들 중 으뜸되는 지위에 처하였으나, 택사(宅舍,주택)는 폐박(弊薄,해어지고 누추함)하고 자재(資財,재물)는 남은 게 없었고 측실(側室)에서는 첩잉(妾媵,첩실)을 총애함이 없고 후정(後庭)에서는 성악(聲樂,음악)을 즐기는 일이 없었으며 의복(衣服)은 제공된 것을 입고 여마(輿馬,수레와 말)는 준비된 것을 타고 음식(飮食)은 절제되어 사치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았으며 관(官)에서 공급하는 비용(費用)은 손에 주어지는대로 소진(消盡)하였다. 그가 그렇게 한 까닭을 살펴보면 탐오한 이들을 격동시키고 혼탁한 이들을 권면하기 위하여 정(情)을 억제하고 자할(自割,자제自制)한 것은 아니고, 다만 이와 같이 하여 (스스로) 만족함으로써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상한 사람들의 담론에서는 늘 성공을 기리고 실패를 비방하며 높은 지위를 부축하고 낮은 지위를 억누르는 법이라 모두 강유(姜維)가 투조(投厝,시신을 매장함)할 곳조차 없이 몸은 죽고 종족은 멸하였으니 이로써 폄삭(貶削,여기선 문맥상 폄하의 뜻으로 쓰인 듯)하며 다시 (다른 점을) 헤아려주거나 들추어내지 않는데, 이는「춘추春秋」에서 말하는 포폄(褒貶,칭찬하거나 폄하함)의 (진정한) 뜻과 다르다. 강유(姜維)가 학문을 즐기며 싫증내지 않고 청소(淸素,청렴) 절약(節約)한 것과 같은 것은 당연히 일시(一時,당시,당대)의 의표(儀表,모범)이다.”

 

[一] 손성(孫盛)이 말했다,


괴상하구나, 극씨(郤氏)(→극정)의 논(論)이여! 무릇 선비가 비록 백가지의 (온갖) 행실을 하고 만가지의 서로 다른 (각양각색의) 업(業)에 종사하더라도 충효절의(忠孝義節)야말로 백행(百行)의 관면(冠冕,으뜸)이다. 강유(姜維)가 위실(魏室,위나라)에 책명(策名,몸을 맡겨 임관함)하였으나 바깥으로 촉조(蜀朝,촉나라)로 달아나 임금을 저버리고 이로움을 좇았으니 충(忠)이라 일컬을 수 없다. 육친을 버리고 구면(苟免,구차하게 화를 면함)했으니 효(孝)라 일컬을 수 없다. 예전 나라에 해를 가했으니 의(義)라 일컬을 수 없다. 싸움에 패하고도 사난(死難,국가의 위난에 처하여 죽음)하지 않았으니 절(節)이라 일컬을 수 없다. 게다가 (촉한이) 덕정(德政)을 아직 펼치지도 못했는데 제마음대로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고 어모(禦侮,바깥으로부터의 모욕을 막아낸다는 뜻으로 적을 막는다는 말)하는 임무를 맡았으면서도 적을 불러들여놓고 수비를 그르쳤으니 필부의 지(智)와 용(勇)에 관하여도 말할 것도 없다. 무릇 이 여섯 가지(→충효절의지용) 중에 (강)유에게는 한 가지도 없다. 실로 위(魏)의 포신(逋臣,도망한 신하)이자 망국(亡國)의 난상(亂相,나라를 어지럽힌 재상)인데 다른 사람의 의표(儀表)라 말하니 이 또한 미혹된 말이로다. 설령 (강)유가 책을 좋아하고 미미하게 조결(藻潔,청렴함)이 있었다 한들, 도둑질한 이가 재물을 나누어주는 의(義)나 (소인배에 불과한) 정정(程鄭)이 지위를 낮추는 방법(降階)에 관하여 질문한 선(善)과 어찌 서로 다르겠는가? (※)

 

신 송지(松之)가 보건대, 극정의 이 논(論)은 칭찬할 만한 것만 취했을 분 (강)유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행사(行事)가 준칙(準則)이 될 만하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일시(一時)의 의표(儀表)라 말한 것은 (강유가) 학문을 좋아하며 검소(儉素)했다는 점에 그친다. 본전(本傳)(→강유전 본문)과「위략魏略」에서 모두 (강)유에게 본래 배반하려는 마음이 없었으나 급하게 내몰려 촉에 귀순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손)성이 (강유를) 기폄(譏貶,질책하고 폄하함)한 것 중에 오직 그가 모친을 저버렸다는 것만은 가히 질책받을 만하나 그 나머지는 지나치게 가혹하며, 또한 극정(郤正)을 비판할 바는 아니다.

 

[※ 而程鄭降階之善也 점교본의 표점(程、鄭)이 잘못되었고 정정(程鄭) 전체가 사람 이름인 것으로 보입니다.「삼국지집해」에서 노필은 사기 화식열전에 나오는 정정(程鄭,한나라 초 부유한 상인) 관련 기사를 인용하며 주해하고 있으나, 맥락으로 볼 때 그보다는「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정정(춘추시대 晉)의 降階(강계) 관련 기사를 전제로 깔고서 한 말 같습니다.

(춘 추좌씨전 양공襄公 24년 조) 晉侯嬖程鄭,使佐下軍。鄭行人公孫揮如晉聘,程鄭問焉,曰:“敢問降階何由?”子羽不能對,歸以語然明。然明曰:“是將死矣。不然,將亡。貴而知懼,懼而 思降,乃得其階。下人而已,又何問焉?且夫既登而求降階者,知人也,不在程鄭。其有亡釁乎!不然,其有惑疾,將死而憂也。”

진후(晉侯)가 정정(程鄭)을 총애하여 하군(下軍) 부장으로 삼았다. 정(鄭)나라의 행인(行人) 공손휘(公孫揮)가 진나라를 방문하니 정정이 그에게 물었다, 감히 묻건대 어찌해야 지위를 낮출 수 있습니까? 자우(子羽)(→공손휘)가 대답하지 못하고 (정나라로) 돌아가서는 연명(然明)에게 이에 관해 말하였다. 연명이 말했다, 이 사람은 장차 죽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장차 도망칠 것입니다. 귀해지면 두려움을 알게 되고 두려워지면 내려갈 것을 생각하게 되니 이에 알맞은 지위를 얻어 남의 아래가 되면 그뿐인데 또 어찌 새삼 묻는단 말입니까? 게다가 무릇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 지위를 낮추는 방법을 구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정정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에게 도망칠 만한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 의심하는 병이 있는 것이니 장차 걱정하다 죽을 것입니다.]


 

(강)유가 예전에 함께 촉()에 온 양서(梁緒)는 그 관직이 대홍려(大鴻臚)에 이르렀고 윤상(尹賞)은 집금오(執金吾), 양건(梁虔)은 대장추(大長秋)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모두 촉이 망하기 전에 죽었다.

 


(評)한다. 장완(蔣琬)은 방정(方整,반듯하고 단정함)하며 위중(威重,위엄과 진중함)이 있었고 비의(費禕)는 관제(寬濟,너그럽고 남을 도움)하며 박애(博愛,널리 사랑함)하였는데, 모두 제갈(諸葛)(→제갈량)의 성규(成規,작성된 규칙이나 제도)를 계승하여 인순(因循,답습)하며 고치지 않았으니 이로써 변경에는 근심거리가 없고 방가(邦家,국가)는 화일(和一,하나로 화합함)하였으나 작은 나라를 다스릴 때 의당 해야 할 바와 (함부로 일을 벌이지 않고) 거정(居靜,고요하게 거처함)하는 도리에는 미진한 점이 있었다. [一] 강유(姜維)는 대체로 문무(文武)를 갖추고 공명(功名)을 세우는데 뜻을 두었으나 군사들을 경시하며 군대를 남용하고 분명하게 결단하였으나 주밀하지 못하여 끝내 운폐(隕斃,사망)하기에 이르렀다. 노자(老子)가 이르길,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구구(區區)한 최이(蕞爾,작은 나라를 비유)에서 여러 차례 요란한 일을 벌였음에랴! [二]

 

[一] 신 송지(松之)가 보건대, 장완과 비의는 재상으로서 획일(畫一,정제整齊됨)(의 도리)를 능히 준봉하였으며 일찍이 공(功)을 좇아 망동(妄動,망령되어 행동함)한 적이 없었다. 휴상(虧喪,손상을 입음)한 바가 있다면 밖으로는 낙곡(駱谷)의 군대(→촉한을 침범해 온 위나라 조상曹爽의 부대)를 물리치고 안으로는 (내부의 반란을 진압해) 영집(寧緝,안녕되게 모음)의 실질을 보전한 것이었으니(→위연의 반란을 진압한 일을 가리키는 듯) 작은 나라를 다스릴 때 의당 해야 할 바와 거정(居靜)의 도리에 있어 어찌 과오가 있다는 말인가! 지금 (진수가) 그들을 비판하여 미진(未盡)하다 하면서 그 (구체적인) 사건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으므로 읽는 이로 하여금 무엇을 말해야 할 지 알 수 없도록 만든다.

 

[二] 간보(干寶)가 말했다,

강유(姜維)는 촉상(蜀相)이 되어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모욕을 당했음에도 죽지 않았다가 종회(鍾會)의 난(亂) 때에야 죽었으니 애석하구나! 죽는 것(死)이 어려운 게 아니라 죽음에 (올바로) 처하는 것(處死)이 어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옛 열사(烈士)들은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절의를 던지는 것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편안하게) 하며 죽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니, 실로 명(命)이 길지 않음을 알고서 그 마땅한 바를 얻지 못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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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12

2018.12.22
14:03:11
(*.120.150.52)
* 강유와 종회의 난 자치통감 번역 (번역: 권중달)

정축일(16일)에 종회는 호군, 군수, 아문기독 이상의 관원과 촉한의 옛 관리를 다 초청하고, 조당에서 태후를 위하여 발상하면서 태후의 유조를 고쳐서 종회로 하여금 병사를 일으켜 사마소를 폐출하게 하였다고 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 보게 하고 내려 보내어 의논하게 하고, 이 일을 마치자 판에다가 써서 부서를 배치하였는데, 가까이 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여러 부대를 대신 거느리게 하였다.

청하여서 왔던 여러 관리들을 모두 익주의 여러 관청 건물에 가두어놓고 성문과 궁문을 다 걸어 잠그고 병사들이 엄하게 지키도록 하였다. 위관은 몸이 몹시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나가서 밖에 있는 관사로 갔다. 종회는 그를 믿고 다시는 꺼리지 않았다.

강유는 종회로 하여금 북쪽에서 왔던 제장들을 다 죽이게 하고, 자기는 이를 통하여 종회를 죽이고 위나라 병사를 다 파묻어버리고 한나라를 다시 세우고 싶어서 비밀리에 유선에게 편지를 썼다.

"바라건대 폐하께서 며칠 동안만 더 치욕스러운 일을 참아내십시오. 신이 위태로워진 사직을 다시 안정시키고 어두워진 해와 달을 다시 밝히겠습니다."

종회는 강유의 말을 좆아서 제장들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미적미적하면서 결정하지 못하였다.

종회의 장하독 구건은 본래 호열에게 소속되었었는데, 종회가 그를 아끼고 믿었다. 구건은 호열이 홀로 관사에 앉아 있는것이 민망해서 종회에게 말하여 친병 한명을 들어오게 하여 이 사람이 나가서 음식을 가져올 수 있도록 허락하게 하니, 여러 아문에서 예에 따라서 각기 한 사람씩 받아들이게 하였다.

호열은 친병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의 아들 호연에게 편지를 전해주게 하여 말하였다.

"구건이 비밀리에 소식을 전해왔는데 종회가 이미 큰 구덩이를 만들고, 흰 나무 방망이 수천개를 만들어 놓고서 밖에 있는 병사를 다 불러 들여 그들에게 흰 모자를 내려주어 산장으로 삼아 차례로 몽둥이로 때려죽이게 하여 구덩이에 집어 넣는다고 한다."

여러 아문의 친병들도 모두 이러한 말을 하니, 하룻밤 사이에 서로 서로 알려주어서 소문이 쫙 퍼졌다. 기묘일(18일) 점심 때 호연이 그의 아버지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번개처럼 북을 울리며 아문을 나서자, 여러 군사들은 기약하지도 않았는데 전고 울리는 소리가 나오니, 일찍이 독촉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다투어 먼저 성으로 달려갔다.

그때 종회가 바야흐로 강유에게 갑옷과 무기를 주고 있었는데, 밖에서 흉흉한 소리가 들렸지만 아마도 실화인 것 같다는 말하더니 잠시 후 병사들이 성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다고 말하였다.

종회는 놀라서 강유에게 말하였다.

"병사들이 달려오니 나쁜 짓을 하려는 것 같은데 마땅히 무엇이라고 하여야 하겠소?""

강유가 말하였다.

"다만 그들을 마땅히 공격해야 할 뿐입니다."

종회는 병사들을 파견하여 여러 아문에 갇혀있는 장령들과 군수를 다 죽이고자 하니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함께 책상을 들어서 문을 막았고 병사들은 문을 부수었지만 문이 깨지지 않았다. 이러한 사이에 성 밖에서 사다리에 의지하여 성으로 올라와 어떤 사람들은 성안의 집에 불을 놓고 개미떼처럼 어지럽게 들어왔는데, 화살은 비 오듯 하였고, 아문에 있는 군수들은 각기 갇힌 사무실을 나와서 그들의 군사들과 만나게 되었다.

강유는 종회의 좌우 사람들을 거느리고 싸웠는데, 손으로 5~6명을 죽이니 무리들이 강유를 쳐서 목을 베고 다투어 앞으로 가서 종회를 죽였다. 종회의 장사로서 죽은 사람이 수백명이었고, 한나라의 태자였던 유선과 강유의 처자를 죽였고 군사들은 불 지르고 약탈하니 죽은 사람이 널려 있게 되었다. 위관은 제장들을 여러 부로 나누자 며칠이 지나서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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