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종(薛綜)은 자가 경문(敬文)이고 패군(沛郡) 죽읍(竹邑) 사람이다.


오록吳錄에서 이르길 : 그의 선조 제齊의 맹상군孟嘗君은 설薛에 봉해졌다. 진秦이 6국을 멸망시켜, 제사는 소홀해졌고, 자손들은 분산됐다. 한조漢祖가 천하를 평정하고, 제에 들러, 맹상군의 후손을 찾아서, 후손 전릉田陵, 전국田國 두 사람을 얻어, 그들의 봉지를 복구해주고자 했다. 전릉, 전국 형제는 서로 양보하며, 받지 않다가, 곧 떠나서 죽읍竹邑에 가서, 일가를 이루었기에, 마침내 설을 씨로 삼았다. 전국에서부터 설종까지, 대대로 주군州郡을 관장하며, 저명한 성이 됐다. 설종은 어려서 경학에 통달했고, 글을 짓는데 훌륭해, 뛰어난 재주를 가졌었다.


어린 시절 종족 사람을 따라 교주(交州)로 난을 피해 왔고, 유희(劉熙)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사섭(士燮)이 손권(孫權)에게 의지한 후, 설종을 불러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으로 임명하고, 합포(合浦)와 교지(交阯)의 태수(太守)를 제수했다. 당시 교주의 토지가 막 개발되기 시작하였으므로 자사(刺吏) 여대(呂岱)가 병사들을 이끌고 나아갔다. 설종은 그와 함께 행동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토벌하여 구진(九眞)까지 도착했다. 임무를 끝마치고 도성을 돌아와 알자복야(謁者僕射)를 겸임했다. 서쪽(西 : 촉나라)의 사자(使) 장봉(張奉)이 손권 앞에서 상서(尚書) 감택(闞澤)을 조롱했지만, 감택은 응답할 수 없었다. 설종은 자리를 떠나 사자에게 술을 주고, 술을 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말했다.

“촉(蜀)이란 글자는 무엇입니까? 견(犬)자가 있으면 독(獨)이 되고, 견(犬)자가 없으면, 촉(蜀)이 되며, 눈(目)이 옆으로 있고 몸을 구차하게(苟) 하니, 벌레가 뱃속에 있군요.”


신 배송지裴松之가 여러 서본書本을 보니 구신 苟身 을 혹 구신 句身 이라 쓴 경우가 있는데, 생각하기론 이미 “눈을 가로로 놓다 橫目”라고 일렀으니, 의당 “몸을 굽히다 句身”라고 해야 합니다.

장봉이 말했다.

“당신의 오(吳)란 글자에 대해서도 분석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설종은 이 소리에 응답하여 말했다.

“입(口)이 없으면 하늘(天)이 되고, 입이 있으면 오(吳)가 됩니다. 군주가 만방에 군림하며 천자의 수도가 됩니다.”

그러자 좌중에 있던 자들은 기뻐 웃었고, 장봉은 응대하지 못했다. 설종의 생각이 민첩한 것은 모두 이러한 유형이다.


[주] 강표전(江表傳): 비의(費禕)가 오나라에 사신으로 왔는데, 폐하를 만나고 공경대신들이랑 같이 자리에 앉아서,술자리를 열었다. 비의는 제갈각이랑 서로 농담을 주고 받았는데, 나중에는 오(吳)와 촉(蜀)의 글자까지 미쳤다. 비의가 물었다. 

"촉(蜀)의 글자는 어떻습니까?" 

제갈각이 대답했다. 

"水"가 있으면 탁(濁)이요 없으면 촉(蜀)이 됩니다. 눈목(目)이 누워있고, 몸은 꾸부정하고 굽어있고, 벌레가 그 몸속에 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비의가 또다시 물었다. 

"오(吳)글자는 어떤가요?" 

제갈각이 대답했다. 

"입구(口)가 없으면 하늘천(天)이요, 있으면 오(吳)입니다. 아래쪽에 창해(滄海)를 아우르고 있으니, 천자의 수도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는 본전(本傳)에 나온 이야기랑 다르다.

여대가 교주(交州)에서 불려왔을 때, 설종은 여대의 후임자로 적합한 자가 없음을 걱정하며 상소를 올렸다.

옛날에 황제 순(舜)은 남쪽을 순시하는 도중 창오(蒼梧)에서 죽었습니다. 진(秦)은 계림군(桂林)ㆍ남해군(南海)ㆍ상군(象郡)을 설치했습니다. 이렇게 한즉 네 개의 군국은 중앙 정권에 귀속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이와 같습니다. 조타(趙佗)는 번우(番禺)에서 일어나 백월(百越)의 군주를 어루만져 항복시켰는데, 주관(珠官) 남쪽 지역입니다. 


한무제(漢武帝)는 여가(呂嘉)를 주살하고, 구군(九郡)을 열고 교지자사(交阯刺史)를 두어 진무하고 감독했습니다. 이러한 토지는 산천이 요원하고 습속이 통일되지 않았으며 언어가 서로 같지 않아 중복 번역을 거쳐야 비로소 통합니다. 백성들은 마치 금수 같고 어른과 어린이의 구별이 없으며, 머리는 정수리에 묶고 맨발로 걷고 머리에는 띠를 두르고 옷섶은 왼쪽으로 하고 장리를 설치하여 비록 있어도 마치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이래로, 중국의 죄인을 대량 옮겨 이들 사이에 섞여 살도록 하여 점차로 글을 배우도록 하여서 조략하게나마 언어를 알게 했으며, 사자나 역마를 왕래시켜 예의와 교화를 보도록 했습니다. 

후에 석광(錫光)이 교지태수(交阯)가 되고 임연(任延)이 구진태수(九真太守)가 되어서 그들에게 농사짓고 쟁기질하는 것을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모자를 쓰고 신을 신도록 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매관(媒官)을 설치하여 처음으로 정식 혼인 방법을 알게 했고, 학교를 세워 경전의 사상으로 그들을 훈도했습니다. 이 이후로부터 4백여 년의 시간 동안 중국 사람과 많이 유사해졌습니다. 그러나 신이 과거 나그네의 신분으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 주애(珠崖)에서는 주나 현의 결혼을 제외하면 모두 8월이 되어야만 호적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임 때마다 남녀가 자연스럽게 서로 몸을 허락하여 곧 부부가 되고, 부모도 이것을 제지할 수 없었습니다. 

교지군(交阯)의 미령(糜泠)ㆍ구진군(九真)의 도방(都龐) 두 현에서는 모두 형이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를 아내로 삼았는데, 대대로 이것을 습속으로 삼고, 장리들도 흘러가는 대로 방임하며 금지하거나 제한할 수 없었습니다. 일남군(日南郡)에서는 남녀가 알몸을 하고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로부터 말하면, 그들은 들짐승으로 단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땅은 광활하고 인구가 많으며 지세는 험준하고 산림은 좋지 못하므로, 이 조건을 이용하여 소란을 일으키는 일은 쉽지만, 이곳 사람들로 하여금 다스림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현의 관리들은 그들을 통치하면서 국가의 법령을 보여주어 명령에 복종하도록 하고, 농가의 조세와 부역은 재단하여 취하고 함께 분별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먼 곳의 진기한 보물(遠珍)ㆍ유명한 진주(名珠)ㆍ향약(香藥)ㆍ상아(象牙)ㆍ무소뿔(犀角)ㆍ대모(玳瑁)ㆍ산호(珊瑚)ㆍ유리(琉璃)ㆍ앵무(鸚鵡)ㆍ비취(翡翠)ㆍ공작(孔雀)ㆍ기 이한 물건(奇物)을 내오도록 하여 진귀한 장신구를 가득 채우는 것이지, 그들을 억눌러 부세를 받아 중국을 이롭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복(九) 밖에 있는 지역의 관리 선발에 있어서는 대체로 엄정하지 못합니다. 

한나라 때, 법령이 느슨하였기 때문에 관원들의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방자해졌으므로 여러 차례 법령을 위반 했습니다. 주애군(珠崖)이 피폐하게 된 것은 장리들이 그곳 사람들의 두발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것을 잘라 취해서 가발을 만든 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신이 본 것으로도 남해(南海)의 황개(黃蓋)가 일남태수(日南太守)가 되어 임지에 도착해서 수레에서 내리자마자 준비한 것이 풍족하지 못한다며 주부(主簿)를 죽였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들을 달아나게 하였습니다. 

구진태수(九真太守) 담맹(儋萌)이 장인 주경(周京)을 위해 주인이 되어서 고급 관리들을 초청하였을 때도, 감미로운 음악이 연주되자 공조(功曹) 번흠(番歆)이 일어나서 춤을 추며 주경(京)에게도 청했는데, 주경이 일어나지 않자 번흠이 강제로 시키려고 하였으며 담맹은 분노하며 몽둥이로 번흠을 때리도록 하여 군의 관부 안에서 죽게 했습니다. 번흠의 동생 번묘(苗)가 병사들을 이끌고 관부를 공격하여 독이 묻은 화살을 담맹에게 쏘았으므로, 담맹 또한 죽었습니다. 

교지태수(交阯太守) 사섭(士燮)이 병사를 파견하여 번묘를 토벌하려고 했지만 끝내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또 옛날 자사(刺史)였던 회계(會稽)의 주부(朱符)는 고향 사람 우포(虞褒)ㆍ유언(劉彥)의 무리들을 분별하여 장리(長吏)로 삼았는데, 그들은 백성들을 침해하고 학대하고 백성들에게 강제로 세금을 걷었으며, 황어(黃魚) 한 마리에 쌀 한 석을 걷었었으므로 백성들은 원망하고 반란을 일으켜 산적들과 함께 나와서 주를 공격하고 군을 침범했습니다. 주부는 바다로 달아나 들어갔다가 표류하다 죽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남양(南陽)의 장진(張津)은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와 틈이 벌어져 있었는데, 그의 병력은 약했지만 적의 병력이 강하였으므로 해마다 군대를 일으켜, 장수들은 이를 매우 싫어하여 뜻대로 가든지 머물든지 했습니다. 

장진은 조금씩 정돈해 나갔지만 위엄과 무용이 부족했기 때문에 부하들에게 능멸과 모욕을 당했고 결국은 살해되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영릉(零陵)의 뇌공(賴恭)은 이전의 무리들 가운데 인자하고 근신했지만 당시의 일에 밝지 못했습니다. 

유표는 또 장사(長沙)의 오거(吳巨)를 파견하여 창오태수(蒼梧太守)로 임명했습니다. 오거는 무사로서 경솔하고 사나웠으므로 뇌공의 신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뇌공을 원망하고 한을 품더니 쫓아냈으며, 뇌공은 보즐(步騭)에게 구원을 요청 했습니다. 이때, 장신의 옛 장수였던 이요(夷廖)ㆍ전박(錢博)의 무리가 오히려 많았기 때문에 보즐은 하나씩 순서대로 조치해 나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기강이 비로소 안정되었는데, 마침내 중앙으로 불려 나가게 되었습니다. 

여대(呂岱)가 도착한 후에는 사씨(士氏)의 변란이 있었습니다. 월(越) 당의 군대가 남쪽으로 나아가, 반란군을 평정하는 날, 장리들을 바꿔 배치하여 천자의 법령을 드러내고 위풍을 만리에 더했으며 크고 작은 곳이 모두 교화를 받았습니다. 이로부터 말하면, 변방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확실히 적절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목(州)의 임명에 있어서는 마땅히 청렴하고 유능한 자를 선발해야 하는데, 그 까닭은 변방지역에서는 화와 복의 차가 더욱 심하기 때문입니다. 

늘 교주는 비록 명목상으로는 평정되었지만, 여전히 고량군(高涼)에는 오래된 도적이 있으며, 남해(南海)ㆍ창오(蒼梧)ㆍ울림(鬱林)ㆍ주관(珠官) 네 군의 경내도 아직 안정되지 못하여 여전히 도적들이 활동하고 있고, 전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도망친 자와 법을 어기고 달아난 자가 모이는 곳이 되었습니다. 만일 여대가 다시 남쪽으로 오지 못한다면, 새로 부임하는 자사는 응당 정밀함을 갖추어야만 여덟 개 군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고, 지략과 지모를 갖추어야만 점점 접근하여 고량군의 사람을 징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게 권위와 총애를 주고 강대한 세력을 빌려주고서 탁월한 성과를 요구하면 여대의 빈 자리를 메꿀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만일 단지 평범한 사람을 임명하여 목전의 일반 규칙만 고수하고 기묘한 책략이나 비범한 기술이 없다면, 무리를 이루고 있는 나쁜 사람들은 나날이 발전하고 오랫동안 반드시 해로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안위는 임용된 사람에게 있으니, 이 점은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사사로이 조정에서 자사의 선출을 홀시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에 감히 어리석은 감정을 다하여 천자의 생각을 넓히려는 것입니다.


황룡(黃龍) 3년, 건창후(建昌侯) 손려(慮)가 진군대장군(鎮軍大將軍)으로 임명되어 반주(半州)에 주둔했으며, 설종은 장사(長史)로 임명되어 밖으로는 각종 사무를 관장했으며 안으로는 경전이나 전적을 전수했다. 손려(慮)가 세상을 떠나자, 설종은 궁궐로 들어가 적조상서(賊曹尚書)를 겸임했으며, 상서복야(尚書僕射)로 승진했다. 당시 공손연(公孫淵)이 투항한 후에 또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손권은 매우 화가 나서 자신이 직접 정벌에 나서려고 했다. 설종이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무릇 제왕(帝王)이란 만국(萬國)의 원수(元首)이며 천하의 운명이 걸려있는 바입니다. 이 때문에 머물 때는 문을 몇 겹으로 설치하고 딱다기(야경들 때 두드리는 나무)를 두들겨 뜻밖의 변고에 대비하고, 행동할 때는 길을 깨끗이 하고 속도를 조절하여 위엄스런 기세를 형성합니다. 이와 같이 하는 까닭은 온전한 복을 보존하여 사해의 민심을 진무하기 위해서 입니다.


옛날에 공자께서는 병이 났을 때, 뗏목에 실어 바다로 띄워 보낸다는 말에 기탁했는데, 계유(季由)는 듣고서 기뻐했고, 공자는 재목을 취할 곳이 없음으로써 그를 거절한 것입니다. 한원제(漢元帝)가 누선(樓船)을 타려고 하자 설광덕(薛廣德)은 목을 베어 피로 수레를 물들이기를 청했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물과 불은 가장 위험한 것이므로 제왕이 당연히 접촉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서 말하기를, ‘천금 같은 아들은 마루에 앉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대국의 군주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요동에는 융족과 맥족의 작은 나라가 있고, 성이나 연못의 견고함과 방어하는 방법도 없으며 무기는 예리하지 않고, 군대는 개나 양처럼 규율이 없어 가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니, 확실히 영명한 조서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지방은 춥고 척박하여 곡식이 자리지 못하며, 백성들은 말 타기가 습관화되어 규율 없이 왕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갑자기 대군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스스로 저항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깜짝 놀란 새나 짐승처럼 먼 곳으로 달아나 사람 한 명, 말 한 필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비록 빈 땅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지켜서 이익이 없으므로 이것이 행동할 수 없는 첫 번째 까닭입니다. 

게다가 또 흐르는 물이 깊고 넓고, 성산의 험난한 곳도 있으며, 바다의 항해에도 일정함이 없고 풍랑을 면하기 어려워 순식간에 사람과 배는 특이한 형세를 만나게 됩니다. 비록 요순의 덕행이 있을지라도 지모는 사용할 곳이 없으며, 맹분과 하육의 용맹이 있을지라도 역량을 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행동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게다가 짙은 안개가 하늘을 가득 덮고 있으며, 바닷물이 땅 속에서 증발하여 사람들은 쉽게 종기가 나, 서로 전염시킵니다. 바다를 건너는 자로서 이 질병에 걸리지 않는 자는 드뭅니다. 이것이 행동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인 것입니다. 

하늘은 신성한 천자를 내려보내고 상서로운 징조를 나타내 분명히 하고 반드시 환란을 평정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안녕되게 하도록 했습니다. 눈 앞의 길한 징조는 나날이 모여들고 있으니 천하는 장차 평정될 것이고, 천리를 거스른 자나 포악한 자의 멸망은 가까이 있습니다. 중국이 하나로 평정되면, 요동은 자연스럽게 멸망할 것이니, 단지 손을 잡고 기다릴 뿐입니다. 

지금 필연적인 규율을 위배하면서 지극히 위태로운 험난함을 찾고, 구주의 안정을 홀시하고 하루아침의 분노를 발설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계책이 아니며, 또 창업 이래 일찍이 있은 적이 없던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신하들이 몸을 기울여 탄식하고 먹어도 단맛을 모르며 잠을 자도 자리가 편안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오직 폐하께서 우레와 같은 위세를 억누르고 치밀어 오르는 노여움을 인내하며, 교량을 지나는 것 같은 안전에 기대에 얇은 빙판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위험을 멀리한다면, 신하와 자제들은 당신의 복에 의지하고, 천하도 매우 행복해 할 것입니다.

당시 각 신하들이 대부분 간언을 했다. 그래서 손권은 출정하지 않았다.

정월 22일, 손권은 설종에게 칙명을 내려 조상에 대한 축사(祝)에는 상투적인 문장을 사용하지 말도록 했다. 설종은 조서를 받아 창졸간에 문장의 내용을 구상해냈는데, 언어에는 신의가 있었고 문채는 찬란했다. 손권이 말했다.

“다시 앞과 뒤 두 단락을 더하여 세 부분으로 채우도록 하시오.”

설종은 다시 두 단락의 축사를 썼는데, 언사가 새로워 사람들은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적오(赤烏) 3년(240), 설종은 선조상서(選曹尚書)로 승진했다. 5년(242), 설종은 태자소부(太子少傅)로 임명되었고, 선조상서의 직책은 이전과 같이 겸했다.

오서吳書에서 이르길 : 후에 손권이 설종에게 자줏빛 수낭綬囊을 하사하여, 설종이 자색은 마땅히 몸에 찰 바가 아니라고 말하며 사양하니, 손권이 이르길 : “태자의 나이가 어리고, 도리를 섭렵함도 일천해, 군이 응당 문文으로 그를 넓게 하고, 예禮로 그를 말려야 하며, 모토茅土하여 봉했는데, 군이 아니면 누구겠소?” 이때 설종은 이름난 학자로서 사부師傅의 지위에 머물렀고, 여전히 선거選舉를 겸해, 대단한 특별 대우를 받았다.

6년(243) 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지은 시(詩)ㆍ부(賦)ㆍ논변(論)은 몇 만 글자인데, 이름을 사재(私載)라고 했다. 또 오종도술(五宗圖述)ㆍ이경해(二京解)를 완성시켰는데, 모두 세상에 전해졌다.

설종의 아들 설후(珝)는 관직이 위남장군(威南將軍)까지 올라갔고, 교지(交阯)로 출정했다가 돌아올 때 길에서 병사했다.

한진춘추: 손휴(孫休)시절에 설후는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이 되어 촉나라에 말을 구하러 갔다가 되돌아왔다. 손휴가 촉나라의 정치 상황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주군은 암우(闇愚: 어둡고 어리석음)해서 자기 잘못을 모르고, 신하들은 보신에 급급해 하고, 조정에 들어와서도 정론을 들으하려 하지 않고, 그땅의 촌야를 지나가도 백성들의 표정에는 굶주린 모습입니다. 처마 끝에 사는 제비 부자가 자신들의 안전을 즐기고 있을때, 돌연히 마룻대가 타오르기 시작했지만, 제비는 마음이 들뜬 채로 재난의 도리를 깨닫지 못했다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설영전]]으로 분리
분류 :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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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01:35:02 (*.52.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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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01
14:12:28
(*.104.28.55)
설우에서 설후로 수정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7.01
14:13:32
(*.104.28.55)
솔영->설영 으로 수정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7.10
14:46:46
(*.104.141.18)
한문 주석 추가

설종의 선조 맹상군에 관한 번역은 처사군님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768469

구신에 대한 배송지의 평은 처사군님 것으로 게시글 주소는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814830

자주빛 수낭에 대한 것은 처사군님 번역으로 원글 주소는 이렇습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814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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