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周瑜)는 자가 공근(公瑾)이며, 여강군 서현 사람이다. 당조부 주경(周景)과 주경의 아들 주충(周忠)은 모두 한나라 태위를 지냈다. 부친 주이(周異)는 낙양현의 령을 지냈다. 


사승(謝承)의 후한서(後漢書): 주경(周景)의 자는 중향(仲嚮)이다. 여려서 염능(廉能)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학문에 능함에 따라 효렴에 추천 되어 삼공의 부(관공서)에 초대되었다. 후에 예주(豫州)자사가 되었을 때, 여남(汝南) 사람 진번(陳蕃)을 불러 별가(別駕)로 해, 영천(潁川)의 이응(李膺), 순곤(荀緄), 두밀(杜密), 폐국(沛國) 사람 주우(朱寓)를 종사로 삼았는데, 이들은 모두 천하 뛰어난 선비들이었다. 점차 승진해 상서령(尚書令)이 되어, 마침내 태위(太尉)의 지위에 올랐다. 


장번(張璠)의 한기(漢紀): 주경(周景)의 아버지는 주영(周榮) 이라고 하여, 장제(章帝), 화제(和帝)의 상서령(尚書令)이 되었다. 처음에 주경은 목이나·태수의 지위를 역임해, 선행을 좋아하고 선비들을 가까이해, 매년 효렴을 추천 할 때, (그 사람들을) 불러와 안방에 오르게 해 가족과 함께 연회를 즐겼다. 그러한 일은 3, 4회나 있고, 전별 금품을 보내기도 해서, 한층 더 그 사람의 자제를 임용해 주었고, 이렇게 말했다,


「移臣作子,於政何有?」
「신하를 옮겨서 자식으로 삼는다면 정치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단사편구라 의미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는데 생각건대 만약 신하를 자식처럼 여기고 천하의 정무를 한 집안의 가사처럼 생각해 치우치지 않은 마음으로 정치를 한다면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뜻인 것 같다.


그 이전, 사도(司徒) 한연(韓縯)이 하내태수였을 무렵, 공무를 유의해 사심 없었다. 그래서 그를 추천 한 사람에게 한마디 말해 줄 뿐 그 집안에는 (혜택을) 미치지 않았다. 말하려면,


「나는 좋은 인물을 추천 했던 것이지, 은애를 하나의 집편등 좁아.」


당시의 논자에게는 양쪽 모두를 비난 하는 사람이 있었다.


주유는 건강하고 자태와 용모가 빼어났다. 처음에 손견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할 때, 그는 집을 서현으로 옮겼다. 손견의 아들 손책은 주유와 나이가 같았으며, 두 사람의 우정이 남달랐다. 주유는 길 남쪽의 큰 저택을 손책에게 주고 방으로 들어가 그의 모친에게 배례했으며, 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융통하며 돕고 살았다. 주유의 당부 주상()이 단양태수로 있었는데, 주유는 그를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마침 손책이 역양까지 있었으므로 급히 편지를 써서 주유에게 알렸다. 주유는 병사를 인솔하여 손책을 맞이했다. 손책이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를 얻었으니, 순조로울 것이오.』

주유는 그래서 손책을 따라 횡강과 당리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그리고 또 강을 건너 말릉을 공격하고, 착융과 설례를 격파시켰으며, 방향을 도려 호숙과 강승을 공격하고 곡아로 진입하자 유요는 달아났으며, 손책의 병사는 수만 명이 되었다. 그래서 손책은 주유에게 말했다.
 
『나는 이 병력이면 오군과 회계군을 취하고 산월을 평정하기에 충분하오. 그대는 돌아가 단양을 지키시오.』
 
주유는 돌아왔다. 오래지 않아, 원술이 주상을 대신할 태수로 사촌 동생 원윤을 보냈으므로, 주유는 주상과 함께 수춘으로 돌아왔다. 원술은 주유를 부장으로 임용하려 했지만, 주유는 원술에게는 끝내 성취할 것이 없음을 보았기 때문에 거소현의 장이 되기를 구하여서 길을 빌려 강동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며, 원술은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주유는 거소에서 오로 돌아왔다. 이 해가 건안 3년(198년)이다. 손책은 직접 주유를 영접하고, 건위중랑장을 수여하고 즉시 병사 2천과 기마 50필을 주었다.


江表傳曰:策又給瑜鼓吹,為治館舍,贈賜莫與為比。策令曰:「周公瑾英雋異才,與孤有總角之好,骨肉之分。如前在丹楊,發眾及船糧以濟大事,論德酬功,此未足以報者也。」

강표전에 이르길 : 손책은 또한 주유에게 악대를 주고 관사를 꾸며 줬으며 상으로 내린 것으로 다른 사람과 비할 수 없었다. 손책이 명령을 내려 말하길 : 「주공근은 영준하고 빼어난 재능이 있으며 총각시절부터 나와 더불어 친분을 맺어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다. 일전에 단양에서 무리와 배, 식량을 발하여 큰일을 이루어낸 것 같은 경우는 논공행상을 통했다고 해서 충분히 보답한 것이 아니다.」


주유는 당시 24세였고, 오군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주랑이라고 불렀다.
 
주유의 은덕과 신의는 여강에서 빛났다. 손책은 그를 지방으로 내보내 우저를 지키도록 하고, 후에 춘곡현의 장을 겸임토록 했다. 오래지 않아, 손책이 형주를 취하려고 할때, 주유를 중호군으로 임명하고 강하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주유는 손책을 따라 환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시 교공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았는데, 모두 절색이었다. 손책 자신은 대교를 아내로 맞이했고, 주유는 소교를 아내로 맞이했다.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르길:손책이 주유에게 태연하게 장난을 걸며 말했다.


"교공의 두 딸이 비록 훤하게 잘났다지만, 우리 둘을 얻어 남편으로 삼았으니 그들도 아주 신이 날 것이오."


또 주유는 심양으로 진격하여 유훈을 격파시켰으며, 강하를 토벌하고 예장과 여릉으로 돌아와 평정하고 파구에 남아서 지켰다.


신송지가 살피니 손책은 이때 처음으로 예장과 여릉을 얻었으나, 아직 강하는 평정시킬 수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주유가 군대를 주둔시킨 파구는 현재의 파구현(강서성의 峽江[협강])에 있어야 되며, 후에 그가 죽은 파구(호남성의 岳陽[악양])와는 다른 곳이다.
 
건안 5년(200년), 손책이 죽자, 그의 동생 손권이 일을 맡았다. 주유는 병사를 이끌고 조상하러 갔다가 오에 머물러 중호군으로써 장사 장소와 함께 모든 일을 관장했다.
 
건안 11년(206년), 그는 손유 등을 인솔하여 마둔과 보둔 두 주둔지를 토벌하고, 그곳의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 나무에 매달았으며, 1만여 명을 생포해 군사를 돌려 궁정을 지켰다. 강하태수 황조가 부장 등룡(鄧龍)을 보내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시상으로 진입하도록 했다. 주유는 추격하여 토벌했으며, 등룡을 생포해 오군으로 보냈다.
 
건안 13년(209년) 봄, 손권이 강하를 토벌하고, 주유를 전부대독으로 임명했다. 


강표전(江表傳)에서 이르길:


조조(曹操)는 원소(袁紹)를 쳐부순 후 북방을 통일하고 점차 그 세력을 키워 갔다. 건안칠년(202년), 조조는 오나라 손권에게 서신을 보내 임자(任子; 이천석 이상의 관직의 사람이 동복형제나 아들을 추천해서 중앙직으로 보내는 것.)할 것을 질책하였다.

 

손권은 이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문무백관들을 소집하였다. 장소(張昭), 진송(秦松) 등 여러 사람들은, 미적거리며 결정을 못했다. 손권은 아들을 보내지 않고 장수 주유를 홀로 들어오게 하여 어머니(오부인) 앞에서 논의하여 정하게 하였다.


“예전에 초나라가 처음 책봉되었을 때 100리의 땅도 안 되었습니다. 후계자가 현명하고 유능하여 영토를 넓히고 경계지역을 개척해 마침내 형(荊)과 양(楊)으로부터 남해(南海)까지의 지역을 점거대업을 전하여 복을 이어가기를 900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장군은 아버지와 형님이 남겨준 밑천을 이어받아 6개 군의 무리를 아우르게 되어 군사는 날카롭고 양식은 많으며, 장수와 병사는 명령에 복종하고 있고 산에서 동(鑄)을 주조하고 바다를 끓여서 소금을 만들어 경계 지역 안에서는 부유하고 풍요로우니 민심이 안정되어 사람들은 난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교통이 편리하여 배를 타고 나가면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돌아올 수 있으니, 우리들의 군대는 강하고 용맹하여 가는 곳마다 적이 없을 것인데 무슨 핍박이 있어서 인질을 보내려 하십니까?


인질이 한 번 들어가면 조씨와는 서로 머리와 꼬리가 되지 않을 수 없고, 더불어 서로 머리와 꼬리가 되면 곧 부르는 명령에 가지 않을 수 없고, 이와 같이 하면 즉 남에게 통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대접받는다 하여도 일개 후(侯)의 인(印)을 주고 종복 10여 명과 수레는 몇 승 그리고 말은 몇 필에 불과한데 어찌 더불어 남면(南面)해서 고(孤)를 칭하는 것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지 않는 것만 못하니 서서히 그 변화를 관찰하십시오. 만약 조씨가 의에 따라 천하를 바르게 할 수 있다면 장군은 그때 그를 섬겨도 늦지 않습니다. 만약 폭난(暴亂)을 일으키려고 도모한다면 군사는 불과 같아서 병사를 거두지 않으면 장수가 스스로를 불태울테니, 장군께서는 용맹을 감추고 위엄을 겨뤄 천명을 시다리시면 어찌 인질을 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손권의 어머니(오부인)가


"공근(公瑾)의 말이 옳다. 공근은 백부(伯符)와 같은 나이로 한 달이 적을 뿐이다. 나는 그를 아들과 같이 볼 터이니 너는 그를 형으로 섬겨라"


이에 인질을 보내지 않았다.


이 해 9월,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유종은 수하의 사람들을 들어 항복했다. 조조는 그의 수군을 얻게 되었으며, 그 결과 수병과 보병은 수십만 명이나 되었다. 오의 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두려워했다. 손권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계책을 물었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조는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사악하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기대어 천자를 끼고 사방을 정벌하고 움직이면서 조정의 뜻이라고 하는데, 오늘 그에게 저항한다면 일은 더욱 순조롭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조조는 장군에게 유리한 형세로 대항할 수 있습니다. 유표는 수군을 훈련시켰고 몽충이나 투함이 수천 대 인데, 조조가 이것을 모두 포획하여 장강가에 늘어놓고 아울러 보병도 움직여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내려온다면, 이때는 장강이 위험하게 되고, 이미 우리와 공동으로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쌍방의 세력은 현저하게 차이가 나므로 또 논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그를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저희들은 생각합니다.』
 
 주유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조는 비록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의탁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나라 조정의 적입니다. 장군은 신명스런 무위와 웅대한 재략을 갖고 있고, 겸하여 아버지와 형의 위세에 기대어 강동을 할거하고 수천 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병사는 정예이고 식량은 풍족하며 영웅들은 공업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응당 천하를 횡행하며 한왕조를 위해 잔폭하고 더러운 것을 제거할 때입니다. 게다가 조조는 직접 사지로 보내져왔는데,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장군을 위해 헤아려보기를 요청합니다. 지금 북방의 영토를 이미 안정시켰고 조조에게 내부의 근심이 없어 시일을 늘려 오랫동안 전쟁터로 와서 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또 우리와 수면 위에서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지금 북쪽 땅은 평안치 못하고, 게다가 마초와 한수가 오히려 동관 서쪽에 있으면서 조조의 후환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병을 버리고 수군이 기대어 오나 월과 다투는 것은 본래 중원에서는 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또 현재는 날씨가 추워 말에게 먹일 것이 없고, 중원의 병사들에게 멀리 강호의 땅을 건너도록 하였으므로 물과 땅에 익숙치 못하여 반드시 질병이 생길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는 용병의 근심거리입니다. 그러나 조조는 함부러 행동했습니다. 장군께서 조조를 잡으려고 하신다면, 족히 오늘이 마땅합니다. 저는 정예병 3만 명을 받아서 하구로 나아가 주둔하기를 원합니다. 장군을 위해 조조를 무찌를 것을 확신합니다.』
 
 손권이 말했다.
 
『사악한 적이 한왕실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로 일어서려고 한 지 오래되었소. 단지 원씨 두명, 여포, 유표와 나만을 꺼려했을 뿐이요. 지금 몇몇 영웅은 이미 소멸되었고, 오직 나만 여전히 남아있소. 나는 사악한 적과 양립할 수 없는 형세요. 그대가 당연히 공격해야 한다고 한 것은 나의 생각과 매우 부합하는 것이며,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준 것이오.』


강표전: 손권은 칼을 뽑아 앞에 놓은 책상을 때려 부수며 말했다.


"여러분 중에서 다시 조조를 맞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책상과 같이 될 것이오."


그리고는 회견이 끝났다. 이날밤 주유가 배알을 요구해 말했다. 주유가 뵙기를 청하고 말하길:


"모든 사람들이 조조의 서신(조조가 손권에게 보낸 편지인데, 회의할 때 보여주자 오나라의 모든 신하들이 벌벌 떨었다고 한다)을 보고서 수군과 보병 80만이라는 말에 벌벌 떨고 있지만, 그 허실을 다시 헤아릴 필요도 없는 것으로, 이것에 대해 다시 회의를 여는 것은 더욱 무익한 일입니다. 지금 저들의 실제 (병력수를) 살펴보면, 중국(중원)인들은 불과 15- 16만명인데, 이 또한 군사들이 이미 오랫동안의 (전쟁으로) 지쳤으며, 유표의 군대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7-8만명 뿐이고 이들은 또한 의심을 품어 조조군에 완전히 편입된 것이 아닙니다. 지치고 병든 병사와 의심하는 병사들은 비록 군사가 많다고 하더라도 두려워 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 정병 5만명을 주시면 제압할 수 있으니, 장군께선 근심하지 마십시오."


손권은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공근!, 경이 이렇게 말을 해주니 내 맘이 풀어주는군요. 자포(子布: 장소(張昭))와 문표(文表; 진송秦松) 등등의 여러 사람들은 각각 자기 처와 아들딸를 돌아보는 등 사사로운 것만 생각하여, 나를 크게 실망시켰오. 단지 경과 자경만이 저에게 찬동 해 주었다. 이것은 하늘이 경들 두 명에 통해서 저를 도와 주고 있다고 봅니다. 5만의 군세를 갑자기 모으는 것은 곤란하지만, 이미 3만명을 선발해 놓았고, 함선·식량·무기 등은 모두 갖추어지고 있습니다. 경은 자경(노숙)과 정공(정보)과 함께 먼저 출발하시오. 저는 곧 뒤따라 군대를 출발시키겠소. 다량의 물자·식량을 탑재해 경의 후원을 돕도록 하겠오. 경은 조조군을 잘 다룰 사람이니 최선을 다해 싸우시오. 생각 했던 대로가 되지 않으면, 곧 바로 귀환해 저에게 달려와 주시오. 제가 고가 조조와 결판을 붙일 것이다."


신송지가 보건데 조조에게 대항할 방침을 세운 것은 사실상 노숙이었다. 당시 주유는 파양으로 파견되었었는데, 노숙이 주유를 불러서 손권에게 권하도록 했다. 주유가 파양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노숙과 은밀히 생각을 합쳤기 때문에 함께 공훈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전(주유전), 손권이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계책을 묻자, 사람들의 의견을 제지시키고, 혼자만 거절할 계책을 말했다고 했다. 이것은 노숙보다 앞서 도모한 것이 아니므로, 노숙의 공을 가로챈 것이다.
 
이때 유비는 조조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생각하였는데, 당양에서 노숙과 만나 함께 상의하고 계획하여 나아가 하구에 주둔하고는 제갈량을 파견하여 손권을 알현토록 했다. 손권은 곧 주유와 정보 등을 파견하여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두 군대는 적벽에서 만났다. 당시 조조의 병사들은 이미 질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처음 한 차례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는 패하여 장강 북쪽에 주둔했다. 주유 등은 남쪽 해안가에 있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가 말했다.
 
『지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기 때문에 오랜 시간 싸우는 것은 불리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조조군의 배는 앞뒤가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불을 질러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유는 몽충과 투함 수십 척을 취해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부어 휘장을 씌우고, 위에 아기를 세웠다. 그리고 먼저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알렸다.
 
이때 황개가 조조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다.
 
「저 황개는 손씨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며, 언제나 장수를 맡았고, 받은 예우는 얇지 않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천하가 이루어질 때에는 큰 형세가 있어야만 하고, 강동은 육군과 산월 사람들로 중국(중원)의 백만 병력을 감당한다는 것이 중과부적임은 천하가 모두 보고 있는 것입니다. 동방(오)의 부장들도 어리석든 어질든 간에 모두 불가능한 줄 알고 있습니다. 단지 주유와 노숙만이 편협되고 생각이 어리석어,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귀순하여 의탁하려는 것은 현실을 헤아린 것입니다. 주유가 이끄는 군대는 쉽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제가 선봉이 된다면, 정세를 보고 정확하게 판단하여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조조는 황개의 사자를 특별히 만나 자세히 묻고


“너희들이 속일까 두렵다. 황개가 만일 신실하다면 당연히 앞뒤를 뛰어넘는 작위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직접 말했다.
 
조조는 황개의 사자를 만나 자세히 묻고,


"너희들이 속이는 것이 아닌가 두렵다. 황개가 만일 진실하다면 당연히 전례를 뛰어넘는 작위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또 날랜 배를 미리 준비하여 각각 큰 배의 뒤에 매고 순서대로 함께 전진했다. 조조군의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목을 빼고 바라보며 황개가 투항한다고 말했다.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당시는 바람이 매우 사나웠으므로 해안 위의 진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 퍼졌고, 불에 타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조조의 군대는 결국 패하여 군사를 돌려 남군을 지켰다. 유비는 주유 등과 함께 힘을 합쳐 추격했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곧장 북쪽으로 달아났다.


강표전: 싸움의 날, 황개는 미리 쾌속선 열척을 준비해, 건조한 물억새와 나무가지들을 배 한가운데 싣고서, 고기 기름을 땔감에 붓고, 붉은 휘장으로 가린채, 기·용번을 선상에 세웠다. 마침 동남의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그래서 열척을 선두에 세운 채, 장강의 한가운데에서 돛을 올렸다. 황개는 불을 손에 들고, 장교들에게 말해해 병사들에게 소리를 외치게 했다.


「항복이다!」


조조의 군인들은 모두 진영을 나와 서서 관람 하고 있었다. 조조군과의 거리가 2리 남짓 되었을 때에, 때를 같이 하고 불을 붙였다. 불은 격렬하고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배들은 화살처럼 미끄러져 들어갔다. 먼지는 날아 하늘을 뒤덮고, 북방의 배를 다 태워, 물가의 진영까지 연소했다. 주유 등이 경장으로 무장한 정예를 인솔해 적의 후방을 공격하며, 북을 치며 진격하였다. 북군은 대괴멸했고 조공은 철퇴 도주했다.


 
영웅기(英雄記)에 말하기를 “조조(曹操)가 진군(進軍)하여 강(江) 위쪽에 이르러 적벽(赤璧)을 따라 강을 건너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가 없어 대나무 뗏목[竹排]을 만들게 하여 부곡(部曲)들로 하여금 그것에 타게 하였다. 한수(漢水)를 따라서 아래로 내려와 큰 강으로 나왔고 포구(浦口)에 (뗏목을) 대어 놓고 아직 건너가지 아니하였다. 주유(周瑜)는 또 밤에 몰래 경선(輕船-날랜 배)과 주가(走舸-노를 젓는 큰 배) 100척으로 하여금 (조조군의) 뗏목을 불 지르게 하니 조조는 이에 밤을 틈타 달아났다.” 하였다.

- 태평어람 권771 -

영웅기(英雄記)에 말하기를 “주유가 강하(江夏)에 주둔하였는데, 조조(曹操)는 적벽(赤璧)을 따라 강남(江南)으로 건너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배가 없어 대나무 뗏목[氵+箄]을 타고 한수(漢水)를 따라서 아래로 내려와 포구(浦口)에 이르렀으나 아직 건너가지 아니하였다. 주유(周瑜)가 밤에 몰래 경선(輕船-날랜 배)과 주가(走舸-노를 젓는 큰 배) 100여척으로 하여금 배마다 50명을 두어 노를 젓게 하고 사람마다 횃불을 들게 하여, 불을 가진 사람 수천 명을 배 위에 세우고 (조조군의) 뗏목으로 모여 들었다. 도착하여 이내 (조조군의 뗏목에) 불을 놓았는데 불이 붙자 배를 돌려 달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천 개의 뗏목에 불이 일어나니 불빛이 하늘을 비추었고, 조조는 이에 밤을 틈타 달아났다.” 하였다.

- 태평어람 권868 -

주유와 정보는 또 남군으로 진군하여 조인과 서로 대치하였는데, 각군은 대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병사들이 아직 싸움을 하기도 전에(주) 주유는 감녕을 보내 공격하여 포위당했다. 감녕은 주유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주유는 여몽의 계획을 사용하여 능통을 남겨 그 뒤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여몽과 함께 감녕을 구하러 갔다.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고 조인과 결전할 날을 정했다.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맞아 상처가 대단히 심했으므로 곧 바로 돌아왔다. 후에 조인은 주유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주유는 직접 일어나서 군영을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했다. 조인은 이 때문에 후퇴했다.


[주]오록吳錄에서 이르길 : 유비가 주유에게 이르길 :


“조인이 강릉성을 지키는데, 성 안에 양식이 많아, 괴로운 재앙이 되기에 충분하오. 만약 장익덕이 천 명을 거느리며 경을 따르고, 경이 2천 명을 나눠 나에게 추가해줘, 서로 도우며 하수夏水로부터 들어가서 조인의 후미를 끊으면, 조인은 내가 들어간 것을 듣고 필시 달아날 것이오.”


주유가 2천 명을 그에게 더해줬다.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으로 제수하고, 남군태수를 겸임토록 했다. 하준, 한창, 유양, 주릉을 그의 봉읍으로 삼게 하고, 강릉에 주둔하여 지키도록 했다. 유비는 좌장군의 신분으로 형주목을 겸임하고 공안에 주둔했다. 유비가 경까지 와서 손권을 알현했을때 주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유비는 용맹하여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으며,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유비를 오군으로 불러놓고, 그를 위해 궁전을 성대하게 짓고 미녀와 진귀한 완구를 많이 주어서 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그들이 기반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고, 이 세 사람을 모아 함께 변방 땅에 있도록 한다면, 아마 교룡이 구름과 비를 얻어 끝내 연못 속의 물건이 안되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손권은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초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가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보았기에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당시 유장은 익주목에 임명되었는데, 밖으로는 장로의 약탈과 침략이 있었다. 주유는 경으로 가서 손권을 알현하고 말했다.
 
『지금 조조는 방금 좌절과 고통을 당하여 마침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으므로 아직은 장군과 병사를 이어서 서로 싸우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분위장군과 함께 촉을 취하러 나가기를 원합니다. 촉을 얻고 장로를 병합한 후에 분위장군을 남겨 그 땅을 단단히 지키도록 한다면, 마초와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와 장군과 함께 양양을 점거하여 조조를 추격한다면, 북방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손권은 주유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주유는 강릉으로 돌아와 행장준비를 하고 파구를 지날 때 병사했다.


신 배송지가 보기로, 주유가 촉을 취하려 들어 강릉으로 돌아와 治嚴하다 이곳에서 죽은 바, 지금의 파릉과 장소가 맞으며 앞서 "파구에서 진무한" 것과는 이름이 같을 뿐 장소는 다르옵니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손권은 소복을 입고 애도했는데, 주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주유의 영구가 오나라로 돌아오자, 손권은 또 무호로 가서 맞이했으며, 모든 비용을 일체 공급했다. 후에 영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와 정보의 집안에 있는 손님들에게는 부세와 요역을 묻지 말라.』
 
당초, 주유는 손책에게 좋은 친구로 대우받았고, 태비 또한 손권으로 하여금 형의 예로써 받들도록 했다. 이때 손권의 직위는 장군이었고, 그의 부장들과 빈객들의 그에 대한 예절은 오히려 간단했지만, 주유만은 일찍부터 존경을 다하여 신하로써의 예절을 지켰다. 주유는 성격이 너그럽고 넓어서 대체로 인심을 얻었는데, 오직 정보와는 화목하지 못했다.
 
강표전에 이르길: 정보는 자신이 연장자였으므로 자주 주유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러나 주유는 몸을 낮추고 끝까지 거역하지 않았다. 정보는 끝내 감복하여 친하게 지내는 동시에 존중했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주공근(주유)과의 사귐은 마치 향기나는 맛있는 술을 마시는 것 같아 스스로 취함을 느끼지 못한다."


고 했다. 주유가 겸양으로써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한때 조조는 주유가 나이가 어리면서도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들어, 설득시켜 마음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은밀하게 양주(揚州)에 사람을 파견해서 구강(九江)의 장간(蔣幹)으로 하여금 주유를 만나보게 하였다. 장간은 위엄 있는 풍채를 가졌고 재치와 말재간으로 칭송을 받았는데, 장강과·회수 지역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여서 아무도 그와 대등하게 맞겨룸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장간은)이에 평복에 갈건으로 [布衣葛巾], 사적인 여행를 구실로 주유를 방문했다. 주유는 그를 마중나갔지만, (옥외에) 선 채로 장간에 말했다.


"자익(子翼)! 멀리 강호까지 몸소 찾아오시다니, 조씨를 위해서 설객을 하시기 위해서 입니까?"


장간은 말했다.


"그대와 저는 동향 사람인데 당분간 떨어져 있다가, 멀리서 훌륭한 그대의 이야기를 들고, 옛 친구도 찾아보고, 우아한 교화도 구경해볼 겸 온 것일 뿐인데, 그런데도 설객이라고 하시다니, 억측이 아닌가?"(어설픈 번역)


기(夔):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황제(黃帝) 시대에 모습은 소처럼 생기되 머리에 뿔이 없고, 다리가 하나뿐이지만 나는 듯이 달리는 괴수가 나타났는데 그 이름을 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요(堯) 임금이 다스릴 때 음률에 정통한 악사(樂師)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도 전설의 괴수와 같은 기였다. 그가 연주하면 온갖 짐승들이 그 음률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고 한다. [출처] 일기이족 (두산백과)


사광(師曠): 춘추(春秋) 시대 진(晉)나라의 악사(樂師). 음율을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함


주유는 말했다.


"나는 기(夔)나 사광(師曠)에는 못 미치지만, 현을 듣고 소리를 맛보면, 좋은 곡을 분별할 정도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간을 불러 넣어 주식의 연회를 개최했다.


연회의 끝나고, 그를 전송하면서 말했다.


"정확히 오는 기밀의 일이 생겨서. 우선은 자리를 관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이 끝나는 대로, 재차 맞이합시다."


3일 후, 주유는 장간을 불러 함께 군대의 내부를 보고 돌아, 창고의 물자나 무기까지 시찰했다. 돌아오고 연회를 열어, 시종이라든가 복식이라든가 진품이라든가라고 하는 것을 그에게 보이게 하고는 장간에게 말했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온 이상, 자기 주군을 만났으면, 외면에서는 군신의 도리에 따르고, 내부적으로는 은혜를 묶어, 말과 행동이 그에 따르고 화복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소진(蘇秦)(중국 전국 시대(全國時代)의 책사(策士))나 장의(張儀)(중국 전국시대 위나라의 모사)가 다시 살아나고, 역이기(酈食其)나 육가(陸賈)가 다시 태어나, 지금 날 설득한다해도, 난 그들의 등을 어루 만지면서 그들의 설득을 거절했을텐데, 왜 자네같은 애송이가 남들을 설득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까?"


장간은 단지 웃을 뿐으로, 결국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장간은 (북방으로) 귀환하였고, 주유의 아량과 고상함을 칭찬하며, 말로써 주유를 이간시키는 것을 그만 두었다.


유비가 경(京)으로부터 되돌아갈 때, 손권은 (날아가는 구름 무늬가 있는 飛雲) 배에 타고서, 장소,·진송,·노숙 등 열 명 남짓과 함께 유비를 전송해, 대연회를 개최하고 이별을 고했는데, 장소, 노숙 등이 자리를 비운 뒤, 손권 한 명이 남고 유비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유비는) 이야기가 흘러 나와 주유를 찬미 하며 말했다.


"공근의 문무 계략은 만명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 기량의 광대함을 생각하면, 필시 오랫동안 신하의 상태로는 없을 것입니다."


주유가 위군을 격파했을 때, 조공은 말했다.


"나는 도주를 수치로 하지 않는다."


후에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적벽에서의 패배는, 정확히 질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배를 불태우고 스스로 철수했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주유에게는 그와 같은 위명을 주게 되어 버렸어."


주유의 위신과 이름이 먼 곳에서도 소리 높았기 때문에, 조공, 유비는 모두 의혹을 심으려고 그를 비방했던 것이다.


(주유가) 빨리 죽자, 손권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공근은 왕좌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홀연히생명이 다했다. 난는 무엇을 의지하면 좋단 말인가? "


후에 손권은 천황, 황후, 황태자등의 칭호를 칭했을 때, 공경들에게 말했다.


"주공근이 없었다면, 나는 제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주유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정통하였다. 비록 술을 많이 마신 후일지라도 연주한 음악에 틀린 부분이 있으면 주유는 반드시 그것을 알아냈고, 그것을 알아내면 반드시 돌아보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가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곡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주랑(주유)이 돌아본다.』
  
주유는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었다. 딸의 배필은 태자 손등이었다. 아들 주순(周)은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기도위로 제수되었고 주유의 풍모가 있었는데, 요절했다. 주순의 동생 주윤()은 처음에 흥업도위로 임명되었고, 종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병사 1천 명을 인솔하여 공안에 주둔했다.
 
황룡 원년(229년), 도향후로 봉해졌으며, 후에 죄를 범하여 여릉군으로 옮겼다.
 
적오 2년(239년), 제갈근, 보즐이 이름을 나란히 하여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의 아들 주윤은 지나친 칭찬을 받아 장군으로 봉해졌습니다. 그는 특별히 두터운 대우를 받을 수 없을 때는 공을 세우려고 생각하였으나, 도리어 방종하고 사용에 집착하여 매우 빨리 죄를 지어 처벌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신들의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주유는 과거 총애와 신임을 받았고, 안으로는 들어오면 심복이 되었고, 밖으로 나가면 보좌하는 장수가 되었으며, 명을 받아 출정하면 죽음을 보고 돌아오는 것처럼 했습니다. 때문에 적벽에서 조조를 패배시키고, 강릉에서 조인을 도망치게하여 국가의 위험과 은덕을 떨쳐 전국이 진동하였으며, 우매한 만현 중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주의 방숙, 한의 한신인 영포일지라도 진실로 그를 뛰어 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적군을 꺾고 국가의 어려움을 막아낸 신하로서 옛날부터 제왕들에게 귀하게 여겨지고 중요시되지 않은 자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한고조는 작위를 봉하는 서약서에서 말하기를, "설사 황하가 어리띠처럼 되고, 태산이 마모된 돌처럼 되더라도, 그들의 봉국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하여 후배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한다." 고 했습니다. 아울러 붉은 글로써 맹서 의식을 융숭히 하고, 종묘 속에 넣어 두고 영원히 전해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공신의 후배들로 하여금 대대로 계승하여 자손뿐 아니라 더욱 먼 후대까지도 관심을 기울려 신하의 공덕에 보답하고 표창하려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것은 후세의 사람들에게 권하고 경계하여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신하가 되어 죽어도 후회가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하물며 주유가 죽은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 주윤을 강등시켜 평민이 되게 하였으니, 더욱 더 슬픕니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폐하께선 고대의 일을 고찰하여 정사를 영명하게 처리하며, 제후국을 일으키고 후계자를 세우는 것을 매우 중시하고 있으므로 주윤을 위해 청하니, 그의 죄를 사면시켜 주시고 병사들을 돌려주고 작위를 회복시켜 주어서 아침을 잘못 알린 닭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울 수 있도록 하고, 죄 지은 신하도 이후에 효락을 펼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손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심복이 되어 이전에 공을 세우고 나와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한 자 중에는 주공근이 있었는데, 확실히 잊지 못하오. 옛날 주윤이 나이가 어렸으며, 처음에는 공로가 없었는데도 정예 병사를 받아 지휘하고 왕후장군의 작위로 봉해진 것은 주공근을 생각하여 주윤에게 미쳤던 것이오. 그런데 주윤은 이러한 것에 기대어 주색에 빠져 스스로 방자하였으며, 앞뒤로 몇 차례 말하여 깨우치게 하였지만, 일찍이 고친 일이 없었소. 나와 주공근과의 정의는 당신들 두 사람과의 것과 같은데, 주윤이 성취하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 어찌 멈춰 있겠소? 주윤의 죄악을 구명하여 즉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그로 하여금 고통을 받게 하여 스스로 알도록 하려는 것이오. 지금 당신들 두 사람이 한고조의 황하와 태산의 맹서를 간절히 인용하니, 나는 부끄럽소. 비록 나의 덕행은 한고조와 같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오. 주공근의 자식이고 두 사람이 중간에 있으니, 고치도록 할 수 있다면 또한 무슨 근심이 있겠소!』
 
제갈근과 보즐은 누차 표를 올렸고, 주연과 전종 또한 함께 진술하여 요청하였으므로 손권은 비로서 이를 허락했다. 이때 주윤은 병으로 죽었다.
 
주유의 조카 주준(周峻) 역시 주유의 탁월한 공로 때문에 편장군으로 임명되었고, 관리와 병사 1천 명을 인솔하게 되었다. 주준이 죽자, 전종은 표를 올려 주준의 아들 주호를 장수로 임명하려 했으나, 손권이 말했다.
 
『이전에 조조를 달아나게 하고 형주를 개척한 것은 모두 주공근이 한 일이니, 영원히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처음 주준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때 주호를 임용하려고 했지만, 주호의 품성과 행실이 음험하다는 것을 들었다. 그를 관리로 임명하면 화란을 만들 것이기에 이 생각을 멈추었다. 그러나 내가 주공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찌 그침이 있겠는가?』

분류 :
오서
조회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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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3.05.01
01:38:30 (*.52.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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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5.01
10:53:18
(*.0.203.41)

오타 하며금->하여금 수정과 주석에 "추가 하고 개행

코렐솔라

2013.06.01
22:05:30
(*.52.89.87)
세웠따와 교현 등의 몇 가지 오류 수정

코렐솔라

2013.06.23
16:11:13
(*.52.89.88)
주석 엄청 빠져있더군요. 대량으로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7.02
00:00:45
(*.52.89.88)
하역므->하여금

코렐솔라

2013.07.15
16:29:34
(*.0.203.172)
모든 주석 추가

코렐솔라

2013.09.04
19:34:46
(*.52.91.247)
장비-주유 얘기는 처사군님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75458897

코렐솔라

2013.09.07
12:17:59
(*.52.91.247)
所向無敵 고사는 내용이 원문과 많이 달라서 몇 개 끼워 맞춰서 수정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코렐솔라

2013.10.04
10:46:46
(*.166.245.168)
주유 죽을 때 파구는 글라우룽님 번역입니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amgugji&no=269797&page=

코렐솔라

2016.02.01
02:22:34
(*.55.70.71)
신하를 자식처럼 여긴다는 부분과 강표전에서 손책이 주유에게 단양의 일을 보답 못할 것이라는 부분은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이것으로 모든 주석이 번역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코렐솔라

2018.10.17
21:37:06
(*.74.126.228)
작융->착융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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