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呂蒙)의 자는 자명(子明)이고 여남(汝南)군 부판(富阪)현 사람이다. 

어릴 때 남으로 강을 건너 매부인 등당(鄧當)에게 의지했다. 등당이 손책의 장수가 되어 수차례 산적을 토벌했다. 여몽의 나이가 열대여섯이었는데, 몰래 등당을 따라가 적을 공격하니, 등당이 돌아보고 크게 놀래서 꾸짖었지만 금지시킬 수 없었다. 돌아가 여몽의 모친에게 이를 알려주니, 모친이 성내며 벌주고자 하니, 여몽이 

"가난하고 천한 것에는 머물 수 없고, 잘못을 벗겨내 공을 세우면 부귀가 오게 될 것입니다. 또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 새끼를 잡겠습니까?"

라 했다. 모친이 애달파 여겨 용서해주었다. 이때 등당의 관리가 여몽의 나이가 어린 것으로 그를 경시하여 말하길 

"저 아이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고기를 호랑이에게 먹여주려는 것일 뿐입니다"

다른 날, 여몽과 만났는데 또 욕 보였다. 여몽이 대노해서 칼을 관리를 죽이고 달아나, 고을 사람인 정장(鄭長)의 집으로 도망쳤다. 

교위(校尉) 원웅(袁雄)에게 자수했는데, (원웅이) 틈을 타서 그를 위해 말해주자, 손책이 여몽을 불러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좌우에 두었다. 

여러 해가 지나 등당이 죽으니, 장소(張昭)가 여몽을 천거해 등당을 대신케 하니 별부사마(別部司馬)로 배수했다. 

손권이 일을 통령하게 되자. 여러 작은 장수들의 병사가 적거나 쓰임이 별로 없는 자들을 헤아려 한 데 병합시키고자 하였다. 여몽이 몰래 외상으로 돈을 빌려 병사들을 위해 진홍색 옷과 행전(行 )을 지어주고, 검열하는 날이 되어 사열함이 빛나고 병사들은 훈련이 익숙해져 있으니, 손권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병사를 늘려주었다. 단양(丹楊)을 토벌하는데 따라가 가는 곳마다 공을 세우니, 평북도위(平北都尉)에 배수되고, 광덕(廣德)현장을 맡게 되었다. 

황조(黃祖)를 정벌하는데 따라갔는데, 황조가 도독(都督) 진취(陳就)에게 역으로 수군을 이끌고 출전하게 했다. 여몽이 선봉을 맡고 있었는데, 친히 진취의 목을 효수하니, 장수와 병사들이 승세를 타고 그 성을 진공해 들어갔다. 황조는 진취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병사들이 추격해 사로잡았다. 손권이 말하길 이번 일의 승리는 진취가 먼저 잡힌 것 때문이다라 하며 여몽을 횡야(橫野) 중랑장으로 삼고, 1천만 전을 내려주었다. 

이해, 또 주유와 노숙 , 정보 등이 서쪽으로 오림(烏林)에서 조공을 격파하고, 남군에서 조인을 포위했다. 익주의 장군 습숙(襲肅)이 군대를 들어 내부(來附)하니, 주유가 표를 올려 습숙의 병사를 여몽에게 더해주라고 했는데, 여몽은 습숙이 담력이 있어 쓸 만하다고 크게 칭하고 또 귀화를 사모해 멀리서 내부해 왔는데 의리상 마땅히 늘려주었으면 늘려주지,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손권이 그 말을 칭찬하며, 습숙의 병사를 돌려주었다. 

주유가 감녕을 시켜 이릉(夷陵)을 앞서 점거하게 하자, 조인은 군사를 나눠 감면을 공격하니, 감녕은 곤궁하고 위급해져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게 했다. 여러 장수들이 병사가 적어 (이 병사를) 족히 (구원하기엔) 나눌 수 없다고 하니, 여몽이 주유와 정보에게 말하길 

"능공적(凌公績; 능통凌統의 자가 공적公績입니다.)을 남기고 저와 당신들이 가면, 위급한 포위를 푸는 것은 세력상 또한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 제가 보장컨대 능통은 능히 10일은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라 했다. 또 주유에게 병사 3백인을 나눠 파견해 땔나무로 험한 길을 끊어버리면, 적이 패주할 때 적의 군마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주유가 이 말을 따랐다. 

군대가 이릉에 도착하자, 그날로 교전이 벌어졌는데, 죽인 자가 절반이 넘으니, 적이 밤에 도망쳤다. 가다가 땔나무에 막힌 길을 만나니 기병들은 모두 말을 버리고 걸어서 달아났다. 병사들이 추격하여 말 3백 필을 얻었고, 배에 싣고 돌아왔다. 이에 장수와 병사의 형세가 절로 배가 되었고, 이에 강을 건너 둔영을 세우고 적과 서로 공격했다. 조인인 패주하니, 마침내 남군을 점거하고 형주를 위무, 평정하고 돌아왔다. 

편장군에 배수되었고, 심양(尋陽)령을 맡았다. 

노숙이 주유를 대신하게 되어, 마침 육구(陸口)로 가다 여몽의 둔영 아래를 지나게 되었다. 노숙이 항상 여몽을 경시하는 뜻이 있었는데, 어떤 자가 노숙에게 말하길 

"여장군의 공명이 날로 빛나 예전처럼 대할 수 있으니, 그대께서는 마땅히 (여몽에게) 들러 보십시오"

라 하니 마침내 여몽에게 향했다. 

술이 취하자, 여몽이 노숙에 물었다 

"그대가 중임을 맡아 관우와 이웃하게 되었는데, 장차 어떤 계략으로 불우(不虞)의 상황을 대비하고 계십니까? "

노숙이 경황 중에 응답하길 

"때에 따라 시의 적절하게 할 것이오"

라 했다. 

여몽이 말하길 

"지금 동서(유비와 손권)가 비록이 한 집안이 되었으나, 관우는 실로 곰과 범 같은 장수인데 어찌 계획을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라 했다. 이로 인해서 노숙을 위해 5가지 계책을 짜 주었다. 노숙이 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가, 그 등을 치며 말하길 

"여자명(자명은 여몽의 자), 경의 재략이 미치는 바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내가 미처 몰랐구료"

라 하면서 마침내 여몽의 모친에게 절하고, 우호를 맺고 헤어졌다. 

[주] 강표전(江表傳): 수불석권(手不釋卷) 그리고 괄목상대(刮目相對)

예전에 손권이 여몽과 장흠(蔣欽)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이제 큰 임무를 맡아 새 임지로 떠나니, 이제는 마땅히 공부를 많이 해서 견식을 넓히셔야 합니다". 이에 여몽이 대답했다. " 

여몽은 마음속으로, 

"독서는 공부하는 사람들의 일이다. 나는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서 이기면 되는 것이지 공부는 무슨 공부인가?"

라고 생각하고, 손권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부대의 일로 바빠서 공부할 여유가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손권이 말했다. 

"제가 여러분들보고 경전을 공부해서 박사(博士)가 되라고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경전을 읽어서 옛 사람들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았으면 해서 이러는 것이오. 경은 일이 많을 거라 말씀하셨는데, 저랑 비교해서 저만큼 바쁘겠소? 

저는 어렸을 때 「시경」, 「서경」, 「예기」, 「춘추좌씨전」, 「국어」등등 이것저것 다 읽어, 읽지 못한 것은 「주역」 정도 입니다. (손책이 돌아가시고 제가) 일을 떠맡은 이후에도, 삼사(三史), 사람들의 [諸家] 병서(諸家兵書)를 정독해, 스스로 도는 많이 안다고 자부합니다.

경들은 의지도 성질도 명랑이기 때문에, (학문을 하는데 적합한 성격이라서) 배우기만 하면 꼭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째서 하지 않으려 하십니까? 우선 먼저 「손자」, 「6도」, 「춘추좌씨전」, 「국어」 및 삼사를 읽으십시오.

공자께서도 말씀하셨는데, "하루 종일 안 먹고, 잠도 안자고 생각해도 다 무익한데, 오로지 배우는 것은 달랐다."고 하셨습니다. 子曰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以思 無益 不如學也 (자왈 오상종일불식 종야불침이사 무익 불여학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 일찍이 종일토록 밥을 먹지 않으며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서 생각하니, 유익함이 없었다.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 ---"내가 한때 온종일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골똘히 사색을 해봤지만 별로 업는 바가 없었다. 뭐니 해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으뜸이다." (논어 10편 위령공)

한나라의 광무제도 군대를 이끌고 다니면서도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手不釋卷. 조맹덕(조조)도 늙도록 책읽기를 좋아한다는데, 그대들은 왜 자기 개발에 힘쓰지 않는다는 말이오?"

여몽은 열심히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 뜻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여몽 주위의 사람들이 이제는 여몽을 학문적으로 이길 자가 없게 되었다.

나중에 (주유가 죽어) 노숙이 주유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오게 되었는데, 이때 여몽하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이때 수차례 여몽의 말솜씨에 꿀리게 되었다.

노숙이 여몽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여섯 살 적은) 동생이 단지 전략 밖에 가지고 있지 않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학식은 넓고 밝고, 더 이상 오하아몽 (吳下阿蒙)(오나라의 아몽(阿蒙: 멍청한 여몽이라는 그동안의 여몽의 별명)이 아니군요."

여몽이 말했다. 

"학자는 (배우는 사람은) 헤어져 3일이 지나면, 눈을 비빈 후에 다시 만나야 합니다.(사람은 삼일을 만나지 않으면 똑똑히 눈을 크게 뜨고 상대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뜯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 괄목상대(刮目相對) . 그나저나 형님(노숙)이 예전에 말씀하신 그 양후(穰侯)는 어떤 방법으로 되실 생각이십니까?

형(노숙)은 지금 공근(주유)의 후임이 되어, 그렇지 않아도 힘은 임무를 맡으셨는데, 그곳도 게다가 관우와 인접한 곳으로 말입니다. 관우는 워낙 출중하기도 하거니와 학문을 좋아해, 「춘추좌씨전」을 읽어, 거의 전부를 입으로 줄줄 외운다는데, 그런데 그는 강직하고 웅대한 기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한편으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 관우와 마주보게 되었으니까, 간단하건 복잡하든 [單複] 뭔가를 준비해서 그를 맞설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여몽은 은밀하게 노숙을 위해서 세 개의 책략을 말했고, 노숙은 공손하게 그것을 경청해, 비밀로 삼아 발설하지 않았다. 손권은 항상 탄식 하며 말했다.

"인간이라는 것은 어차피 성장하는 것과 동시에 향상해 가는 것이지만, 여몽, 장흠 정도로는 미치지 않을 것이다. 부귀와 명성을 손에 넣고 있으면서도, 더욱더 자제하면서 학문을 좋아해, 옛 책들을 즐기고 재화를 경시하고 도의를 존경하니, 이는 마땅히 따라야 할 규범이 되었으며, 모두 국사(國士: 나라의 선비)가 되었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 때 여몽과 성당(成當), 송정(宋定), 서고(徐顧)의 둔영과 차례대로 가까운데 있었는데, 3장수가 죽고 그들의 자제는 유약하니, 손권이 그 병사를 모두 여몽에게 병합시켰다. 여몽이 굳이 사양하며 계(啓)를 바쳐서 서고 등이 모두 나랏일을 부지런히 애썼는데, 자제들이 어리다고 폐할 수 없다고 했다. 글을 3번 올리자, 손권이 곧 들어주었다. 여몽이 이에 또 그들을 위해 스승을 선택해 그들을 보필하고 인도하게 하니, 그 조심함이 이와 같았다. 

위가 여강의 사기[廬江謝奇; 원문은 그냥 이런데, 인명과 지명의 구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강은 지명이 맞는데, 사기라는 사람은 전혀 안 오는 인물이라]를 기춘 전농[春典農; 기춘의 전농. 기춘이 현인지 군인지 전거는 불확실한데, 기춘태수가 있는 걸로 봐서 군(郡)같은데, 다른 곳에는 기춘장(長)이 나와서 현(縣) 같기도 하고, 모르겠습니다. 『후한서 군국지(郡國志)』에는 강하군(江夏郡) 휘하의 14성(城) 중 하나로 나옵니다. 전농(典農)은 『후한서 백관지』 대사농(大司農)조에 보면 『위지(魏志)』의 주에 조조가 전농중랑장, 전농도위, 전농교위를 두었다고 하는데, 여기의 전농이 정확히 어떤 직책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튼 권농관인 것은 확실합니다.] 환현의 들판에 주둔하면서 수차례를 변경을 노략질했다. 여몽이 사람을 시켜 그에게 회유했으나 따르지 않자, 곧 틈을 기다려 습격했다. 사기가 마침내 위축되어 퇴각하니, 그 부하인 손자재(孫子才) 송호(宋豪) 등은 노약자를 업고 여몽에게 가 항복했다. 

후에 손권을 따라 유수(濡須)에서 조공에게 항거할 때, 수차례 뛰어난 계책을 내었고, 또 손권에게 강물 입구를 끼고 둑을 세우라고 권했는데, 그 방비함이 매우 정밀하니, 조공이 항복시키지 못하고 퇴각했다. 

[주] 오록에 이르길: 손권이 보루를 만들려고 하자 부장들이 모두 말하기를, 

“해안 위로 올라가 적을 공격하고 나서 물을 건너 배로 들어오면 되는데, 보루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라고 했다. 여몽이 말하기를, 

“같은 병기에도 날카로운 것과 둔탁한 것이 있으며, 싸움에 있어서도 백 번 이기지는 못합니다. 만일 만에 하나 적의 보병과 기병이 육박하여 와서 물가까지 퇴각할 틈이 없게 될 경우에는 어떻게 배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라고 했다. 손권도 

“그렇소” 

라고 하고 그것을 만들었다.

조공이 주광(朱光)을 파견해 여강태수로 삼고, 환현에 주둔하면서 농지를 크게 개간하고, 또 간인(間人;첩자)을 시켜 파양( 陽)의 도적무리를 회유하여, 안에서 호응하게 했다. 여몽이 말하길 

"환현의 전토는 아주 비옥해서, 만약 익은 것을 한번 수확하면 저들의 군대는 더욱 늘어나게 되고, 이같이 여러 해가 되면, 조조가 모습을 드러나게 될 터이니, 마땅히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라 했다. 그리고 그 정상(情狀)을 갖추어 얘기했다. 이에 손권이 환현을 친히 정벌하고자, 여러 장수들을 불러 보고는 계책을 물었다.

오서에서 이르길 : 여러 장수가 모두 토산을 만들고, 공성기계를 보태길 권하니, 여몽이 빨리 나서 이르길 :


“공성기계와 토산을 정비하면, 필시 달이 지나야 완성될 것인데, 성의 방비는 이미 오래 되고, 밖의 구원이 필시 이를 것이라, 도모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빗물을 이용해 들어가도, 만약 지체돼 날이 지나면,물이 필시 말라서, 돌아오는 길은 괴롭고 고생스러울 것이라, 저 여몽은 삼가 이가 두렵습니다. 지금 이 성을 보니, 매우 견고할 수가 없어서, 삼군의 날카로운 기세로, 사면에서 함께 공격하면, 때를 늦추지 않고 점령할 수 있을 것이고, 물을 이용해 돌아올 수 있으니, 전승할 방도입니다.”


손권이 이를 따랐다.


여몽이 이에 감녕을 천거해 승성독(升城督)으로 삼아, 공격하며 전방에 서는 것을 독려하게 하고, 여몽은 정예병사로 그 뒤를 이었다. 새벽에 침입하여 진공하는데, 여몽이 손수 북채와 북을 쥐었으며 사졸들이 뛰어 오르니 , 밥 먹을 때쯤 적을 격파했다. 얼마 후 장료가 와서 돌을 끼고 있었으나, 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내 퇴각했다. 손권이 그 공을 기뻐하며, 곧 여강태수로 배수하고, 획득한 인마를 모두 나눠주고, 또 심양의 둔전하는 사람 6백 명과 관속 3백 명을 하사했다. 

여몽이 심양으로 돌아왔는데, 예기치 않던 여릉의 도적떼가 일어나, 여러 장수들이 토벌하고 공격했으나 능히 사로잡지 못하자, 손권이 말하길 

"사나운 새 수백 마리가 물수리 한 마리만 못하구나"

라 했다. 다시 여몽에게 토벌하라 영을 내렸다. 여몽이 돌아와 그 우두머리를 주살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다시 평민(平民)이 되게 했다. 

이 때 유비는 관우에게 영을 내려 진수하면서 형주를 독점하고 있으니, 손권이 여몽에게 명을 내려 서쪽으로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楊) 3군으로 공취하라고 했다. 여몽이 2군에 편지를 보내 귀복해 올 것을 바랬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普)만이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다 유비가 촉에서 친히 공안으로 와, 관우를 파견 3군을 쟁취하도록 했다. 

손권은 이 때 육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노숙에게 1만 명을 거느리고 익양에 주둔하며 관우에게 대적케 하고, 여몽에게 편지를 급히 보내 불러들이고 영릉은 버리고 급히 돌아와 노숙을 돕게 했다. 

처음에 여몽이 장사를 평정하고, 마침 영릉으로 가다가 영현을 지나면서, 남양(南陽)의 등현지(鄧玄之)를 수레에 태워 주었는데, 등현지는 학보의 옛 친구라 (그를 통해) 학보를 회유하려 했다. 

돌아오라는 글월을 받게 되자, 이것을 비밀로 하면서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계획을 일러주고 새벽이 되자 성을 공격하는데 등현지를 돌아보면 말했다. 

"학자태(子太; 학보의 자가 자태)는 세상에 충의의 일이 있음을 듣고, 또 이를 행하고자 했으나, 때를 알지 못하오. 좌장군(유비)은 한중에 있으면서 하후연(夏侯淵)에게 포위되었소. 관우는 남군에 있으나 지금 지존께서 몸소 직접 대하고 있소. 근자에 번성에 있는 본래 주둔지를 격파하여 영현을 구하려다, 오히려 손규(孫規)에게 격파되었소. 이것은 모두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며 그대가 직접 본 것이다. 

저들은 막 머리와 꼬리가 거꾸로 매달려 목숨을 구하려하나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여력이 남아 이 군영을 회복하겠소? 지금 나의 군사들은 모두 정예로써 사람마다 목숨을 바칠 것을 생각하고, 지존은 병사를 보내어서 (이어진 것이) 길에서 끊어지지 않고 있소. 

지금 자태가 아침저녁에 달린 목숨으로 바랄 수 없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으니, 소 발자국에 물고기가 밟힌 것과 같고, 장강과 한수에 힘입기를 바라지만, 믿을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하오. 만약 자태가 사졸들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여 고립된 성의 수비를 보전하고 오히려 아침저녁으로 시간 끌어 구원할러 올 자들을 기다릴 것은 가(可)하오. 그러나 지금 나의 힘과 생각을 헤아려 보건대, 이곳을 공격하면 채 하루도 안 되어 성은 기필코 파괴될 것이고, 성이 파괴된 후에 자신이 죽어 무슨 이로운 일이 일을 테며, 백세가 되신 노모에게 백발을 엎고 주살 당하게 한다면 어찌 애통하지 않겠소? 이를 헤아려 보면 그는 바깥의 소문을 못 듣고 원병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서,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오. 그대는 만나볼 수 있으니, 화복에 관해 얘기해 보시구려"

라 했다. 

등현지가 학보를 만나, 여몽을 뜻을 갖추어 말해주니, 학보는 두려워하며 이를 따랐다. 등현지가 먼저 나와 여몽에게 보고하길, 잠시 후 학보가 뒤따라 올 것이라 했다. 여몽이 4 장수에게 미리 명령해, 각자 1백 명을 뽑아, 학보가 나오면 곧장 들어가 성문을 지키게 했다. 

잠시 후 학보가 나오자, 곧장 성문으로 들어가 지키고, 여몽은 환영하며 그의 손을 잡고서는 그와 같이 배에서 내렸다. 말이 끝나자, 편지를 꺼내 보여주고선, 손을 치며 크게 웃었는데, 학보가 그 글월을 보고 (지금 유비와 관우가 쳐들어오니 영릉에 있는 학보 같은 것은 내버려두고 빨리 되돌아와 익양에 있는 노숙을 도우라는 손권의 편지) 유비가 공안에 있고 관우는 익양에 있음을 알아 부끄러워 땅 속에 숨고 싶어 했다. 여몽은 손교(孫皎)를 남겨 뒷일을 맡겼다. 그날로 군대를 이끌고 익양으로 갔다. 

유비가 동맹을 청하니, 손권이 이에 학보 등을 돌려보내고, 상수(湘水)를 분할해 영릉을 돌려주었다. 심양과 양신(陽新)을 여몽의 봉읍으로 삼았다. 

군대가 귀환하고 나서 마침내 합비를 정벌하게 되었는데, 철군하게 될 때 장료 등에게 기습을 당하니, 여몽과 능통이 죽음으로 막아냈다. 후에 조공에 유수로 크게 출병하자, 손권은 여몽을 독으로 삼아 이전에 세워둔 제방을 먼저 점거하고, 그 위에다 강노(强弩) 1만 대를 설치하여 조공에게 대항했다. 조공의 선봉이 둔영을 채 세우지도 못했는데, 여몽이 이를 공격해 격파하니, 조공이 군대를 이끌고 퇴각했다. 여몽을 좌호군(左護軍) 호위장군(虎威將軍)으로 배수했다. 

노숙이 죽자, 여몽은 서쪽으로 육구에 주둔하며 노숙 군대의 인마 1만여 명이 모두 여몽에게 속했다. 또 한창태수(漢昌太守)에 배수되고, 하준(下雋) 유양(劉陽) 한창(漢昌) 주릉(州陵)을 식읍으로 했다. 관우와 땅을 나눠 접경하고 있었는데, 관우가 매섭고 빼어난데다 (오를) 병합하려는 마음이 있지만 또 그 나라가 상류에 있어 형세상 오래가기 어려움을 알았다. 

처음에 노숙 등은 조공이 아직 살아있음으로 해서 화난(禍難)이 이제 시작되었는지라 마땅히 서로 도와야지 같이 원수가 되어 잃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여몽이 은밀히 계책을 진언하길 

"정로장군(征虜將軍; 손교(孫皎))에게 남군을 지키게 하고, 반장(潘璋)은 백제(白帝)에 주둔하며, 장흠(蔣欽)은 유격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장강을 아래위로 순행하며 적이 있는 곳에 따라 대응하고, 저는 나라를 위해 양양을 먼저 점거하여 그렇게 된다면, 조조에 대해 걱정할 게 무어며 관우에게 힘입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관우는 신하인데 사기와 힘을 존숭하여 거꾸로 뒤엎는 것(反覆)이 있으니, 마음깊이(腹心)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금 관우가 바로 동쪽으로 향하지 못하는 것은 지존께서 성명(聖明)하고 저희 등이 있기 아직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강하고 성할 때 도모하지 않는다면, 하루아침에 엎어질 것이니, 다시 힘을 펴고자 해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 했다. 손권이 마음 깊이 그 계책을 받아들였는데, 또 애오라지 다시 그와 서주를 취할 뜻을 의논하였더니, 

여몽이 대답하길 

"지금 조조는 멀리 북방에 있어, 새로이 여러 원씨(袁氏)를 격파해 유주(幽州)와 기주(冀州)를 위무하고 안집(安集)하느라 동쪽(동오)으로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서주 땅의 수비병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가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세가 육지와 통하고, 날랜 기병이 달리는 곳이라, 지존께서 지금 서주를 얻는다 할지라도 조조가 후일 반드시 와서 쟁패를 벌일 것이고, 비록 7~8만 명으로 수비한다 해도, 오히려 응당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관우를 취해 장강을 모두 점거하여 형세를 더욱 늘릴 만 못합니다"

라 했다. 손권은 이 말이 더욱 옳다고 여겼다. 여몽이 노숙을 대신하게 되어 처음으로 육구에 이르러서, 겉으로는 은혜와 후의를 더욱 닦아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후에 관우가 번(樊)성을 토벌하는데, 병사를 남겨 장차 공안과 남군을 수비하도록 했다. 여몽이 상소를 올려 말하길 

"관우가 번성을 토벌하며 수비병을 많이 남긴 것은 필히 제가 뒤에서 도모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병이 있으니, 병사를 나눠 건업(建業)으로 돌아가 병 치료를 명목으로 하고자 합니다. 관우가 이를 들으면, 반드시 수비병을 철수시켜, 다 양양(襄陽)으로 보낼 것입니다. 대군이 장강에 떠서 밤낮으로 말을 달려 그 빈틈을 습격하면 남군을 항복시킬 수 있고, 관우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라 했다. 

과연 병을 칭탁하니, 손권은 여몽을 소환해 들이라는 격문을 노출시키고, 은밀히 같이 계획을 도모하였다. 관우가 과연 믿고 점차 병사를 철수시켜 번성으로 가게 했다. 

위(魏)에서 우금(于禁)을 시켜 번성을 구하게 했지만, 관우는 우금 등과 인마(人馬) 수만을 다 잡아 들이고, 양곡이 부족함에 기탁해 상관(湘關)의 미곡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손권이 이를 듣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는데, 먼저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여몽이 심양(尋陽)에 이르러 그의 정병들을 모두 배 안에 숨겨두고, 백성들에게 노를 젓게 하여, 상인의 복장을 해 입고 밤낮으로 가서,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이르러,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이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士仁)과 미방(芳)이 모두 항복했다.  

[주]오서 왈, 장군 사인(士仁)이 공안(公安)에서 막아 지키니 여몽이 우번(虞翻)에게 명해 그를 설득하게 했다. 우번이 성문에 이르러 수비병에게 

“나는 너희 장군과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고 했으나 사인이 서로 만나기를 거부했다. 이에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현명한 자는 화가 싹트기 전에 방비하고 지혜로운 자는 장차 닥치려 할 때에 (미리) 근심거리를 헤아리는 법이니, 득실(得失)을 알면 가히 다른 사람을 위할 수 있고 존망(存亡)을 알면 족히 길흉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대군이 행군하였으나 척후가 행해지지 않고 봉화가 오르지 않았으니 이것이 천명(天命)이 아니라면 필시 내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장군은 미리 때(時)를 보지 못하고 또한 때가 이른 뒤에도 이에 응하지 않고 홀로 험요한 성을 지키며 항복하지 않으니, 죽도록 싸워봤자 종족을 훼멸하고 제사를 끊기게 하여 천하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여호위(呂虎威-호위장군 여몽)가 곧장 남군으로 향해 육로를 끊고자 하니 살아날 길이 하나같이 막혔고 이곳의 지형을 살펴보면 장군이 기설[箕舌-(곡식을 까부르는) 키의 혀(바닥)] 위에 있는 격이니 달아나도 화를 면할 수 없고 항복하면 의(義)를 잃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건대 장군이 불안할 것이나 익히 잘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사인이 서신을 읽어보고 눈물을 흘리며 항복했다. 우번이 여몽에게 말했다, 

“이는 휼병(譎兵-기만술에 의한 군사행동)이니 응당 사인을 데리고 가야 하며 군사를 남겨 (공안)성을 수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인을 데리고 남군으로 갔다. 남군태수 미방이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여몽이 사인을 그에게 보여주자 마침내 항복했다.

오록 왈, 당초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자못 많은 군사기물을 태웠다. 관우가 미방을 질책하자 미방이 내심 두려움을 품었는데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를 꾀자 미방이 몰래 서로 화합했다. 그러다 여몽이 (남군을) 공격하게 되자 쇠고기와 술을 지니고 성을 나와 항복했다.

여몽이 성에 들어가 점령하고, 관우 및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들을 다 잡았으나, 그들 모두를 위무(慰撫)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민가에 들어가거나 약탈하는 바가 없게끔 약속하였다. 

여몽 휘하의 병사 하나는 여남(汝南) 사람이었는데, 민가의 삿갓(笠) 하나를 가져다, 관의 갑옷(鎧)을 덮었다. 관의 갑옷이 비록 공적인 것이기는 하나, 여몽은 오히려 군령을 어겼으니,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법을 폐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참수했다. 이에 군중에 떨며 두려워해 길에서도 흘린 것을 줍지 않았다. 

여몽은 아침저녁으로 친근하게 노인들의 안부를 묻고 위로하고, 부족한 것을 묻고, 병에 걸린 자에게는 의약을 주고, 춥고 배고픈 자에게는 옷과 양식을 내려주게 했다. 관우의 관부에는 재물이 저장되어 있었지만, 모두 봉하여 닫아놓고, 손권이 오길 기다렸다. 관우가 돌아오면서 길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중을 두루 다니게 하며, 집집마다 묻게 하고, 혹은 손수 글월을 써서 신의를 보였다. 관우의 사람이 돌아오자, 사적으로 서로 참여하여 묻고는, 모두 자기 집에 무탈하다는 것을 알고, 평시보다 과하게 대우받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관우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얼마 후 손권이 오게 되자, 관우는 자신이 고립되어 곤궁해졌음을 알고, 이에 맥성(麥城)으로 달아나 서쪽으로 장향(漳鄉)에 이르자, 모두 관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 손권은 주연(朱然)과 반장에게 그 지름길을 끊게 하니, 곧 (관우)를 보두 붙잡고, 마침내 형주는 평정되었다. 

여몽을 남군태수로 삼고 잔릉후(孱陵侯)로 봉하였고, 1억 전(錢)과 황금 5백 근을 하사했다.

강표전 江表傳 에서 이르길 : 손권이 공안에서 성대한 회합을 가지나, 여몽은 질병으로 사양하였다. 손권이 웃으며 이르길 :

“관우를 사로잡은 공은, 자명의 모책이었는데, 지금 대공이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경사스러운 상이 아직 행해지지 않았으니, 어찌하여 즐겁지 못한 모양이란 말인가?”


이에 보기와 고취鼓吹를 더욱 주고, 칙서로 호위장군의 관속을 가리고, 남군, 여강 2군의 위의威儀를 아우르게 했다. 수여가 끝나고 영으로 돌아오며, 병마도종 兵馬導從, 전후의 고취가, 길에서 빛났다.

여몽은 금전을 굳이 사양했으나, 손권은 허락지 않았다. 봉작이 채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여몽에게 병이 생기게 되자, 손권은 마침 공안에 있었는데, (여몽을) 맞아들여 내전에 두고, 치료함에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여몽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자에게 천금을 내린다고 모집하였다. 어떤 때에 침(鍼)을 쓰면, 손권이 이를 아파했고, 여러 번 그의 안색을 보고자 했으나, 또 (그를) 힘들게 하고 움직이게 할까 두려워 항상 벽을 뚫어 들여다보고, 조금이라도 음식을 넘기는 것을 보면 기뻐하여 주위를 돌아보며 웃으며 말하고, 그러지 못하면 탄식하며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병이 좀 낫자, 그를 위해 사면령을 내리고, 신하들은 하례를 올렸다. 나중에 다시 위독함이 더해지자, 손권이 직접 가서 살폈으며 도사(道士)들에게 명을 내려 성신(星辰) 아래서 그를 위해 천명을 청하도록 했다. 

나이 42세에 마침내 내전에 죽었다. 이때 손권은 매우 애통해하며, 그를 위해 먹는 가짓수를 줄였다. 여몽이 아직 죽기 전에 금이나 보물 같은 여러 하사받은 것을 모두 관부의 창고(府藏)에 넣고, 관리자에게 자신이 죽는 날 모두 상부에 돌려주도록 명령하고, 초상은 검약하게 하라고 했다. 손권이 이를 듣고 더욱 비통해했다. 

여몽이 젊었을 경전을 익히지 않아, 매양 큰일에 대해서 진언할 때면 항상 말로써 상소했다. 항상 부곡(部曲)의 일로 강하(江夏)태수 채유(蔡遺)가 (그의 잘못을) 아뢰는 일을 당했지만, 여몽은 원망하는 뜻이 없었다. 

예장(豫章)태수 고소(顧邵)가 죽자, 손권이 쓸 만한 자를 물었더니, 여몽이 채유를 천거하며 직무를 받드는 뛰어난 관리라 하자, 손권이 웃으며 

"그대가 기해(祁奚; 춘추시대때 사람, 늙어서 관직에서 물러나자 자신과 원수이던 해호(解狐)를 천거한 고사)가 되려 하오?"

라 하면서 이에 그를 등용했다. 

감녕은 난폭하고 살생을 좋아해, 이미 늘 여몽의 뜻을 잃었고, 또 때때로 손권의 명령을 어기기도 해서, 손권이 노하였으나, 여몽이 번번이 청원하며 말하길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 감녕 같은 장수는 얻기 어려우니, 마땅히 용서해야 합니다라 했다. 손권이 감녕을 후히 대하매, 마침내 그 쓰임을 얻게 되었다. 

여몽의 아들 여패(呂覇)가 작위를 이었는데 그에게 식읍 3백여 호를 주고, 전지 50경(頃)의 조부를 면제시켜 주었다. 여패가 죽자 형인 여종(呂琮)이 후작을 이었고, 여종이 죽자, 아우 여목(呂睦)이 뒤이었다. 

손권이 육손과 함께 주유, 노숙 및 여몽에 대해 논평하기를 

"공근(주유)은 웅렬(雄烈)하고 담력과 재략이 남들보다 뛰어나 마침내 맹덕을 격파하고 형주를 개척하여, 멀리 그를 잇기 어려웠는데, 그대가 지금 그의 뒤를 잇고 있소. 공근은 예전에 자경(노숙)이 동으로 오기를 기다려, 나에게 오도록 해서 내가 연회에서 얘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곧바로 대략 제왕의 기업에까지 미치었으니, 이것이 한 가지 유쾌한 일이었소. 

후에 맹덕이 유종의 세력을 얻을 것을 기회로 막 수십만의 보병과 수병이 함께 (동오로) 내려온다고 과장해 말했소. 내가 널리 여러 장수들을 청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자문했는데, 먼저 대책을 적절히 말하는 자가 없었고, 자포(子布; 장소張昭)와 문표(文表; 진송秦松)에 이르러선 의당 사신을 보내 격문을 받아 영접해야 한다고 같이 말했으나, 자경은 불가하다고 반박하며 나에게 급히 공근을 불러 대임을 맡겨 거꾸로 쳐야한다고 말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유쾌한 일이었소. 또 그 결정한 계책은 장의나 소진을 멀리 넘는 것이었소. 훗날 비록 나에게 현덕에게 땅을 빌려주라고 권했으나, 이것은 한 가지 단점 일뿐, 그의 두 가지 장점을 훼손하기엔 부족했소. 주공(周公)은 한사람에게서 완비함을 구하지 않았으니, 그래서 내가 그 단점을 잊고 장점을 귀히 여겼고, 항상 (노숙을) 지금의 등우(鄧禹; 후한 광무제를 도와 후한 창업을 도운 인물)에 비견했소. 

또 자명(여몽)이 젊을 때, 나는 (그가) 아주 힘든 일도 사양치 않고, 과감하여 담력이 있을 뿐이라 생각했소. 나중에 장성하니 학문은 더욱 열리고 늘어나 지략이 기이한데까지 이르렀으니, 공근에 다음간다고 할 수 있고, 다만 언변의 뛰어남이 (공근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오. 관우를 취하는 것을 도모함은 자경보다 나았소. 자경은 나에게 답서를 보내길 제왕이 흥기함에 모두 구제(驅除)함이 있었으니, 관우는 꺼릴 바가 못됩니다라 했는데, 이것은 자경이 안으로는 능히 갖출 수 없었으면서 밖으로 큰소리 친 것일 뿐이며, 나 또한 용서하고 책망하지 않았소. 그러나 그가 군영을 지음에는 둔영에는 실수가 없고, 군령은 금지사항들이 실행되고, 부대 경계에서는 군령을 폐하는 자가 없고, 길에 떨어진 것조차 줍지 않게 했으니, 그의 법 또한 아름다웠소.

평하여 말한다. ― 조조는 한나라 승상의 지위를 이용하여 천자를 옆에 끼고 군웅들을 소탕하였고, 막 형주성을 평정하고 위세에 기대 강동을 협박하였다. 그 당시 논의하는 자들 중에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주유와 노숙이 독자적으로 결단내려 고명한 생각을 건의한 것은 일반 사람들을 뛰어넘음을 나타낸 것이며, 확실히 비범한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여몽은 용감하고 지모가 있었으며, 군사의 계책을 결단할 줄 알았다. 학보를 속여 관우를 붙잡은 것은 가장 절묘한 것이었다. 당초 그는 비록 경솔하고 사람을 헛되이 죽이곤 했지만, 끝내는 자신을 억누를 수 있게 되어 한 나라를 짊어질 기량을 갖추게 되었다. 어찌 단순히 무장일 뿐이겠는가! 세 사람에 대한 손권의 논의는 우열이 공정하기 때문에 여기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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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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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5
16:36:16
(*.0.203.172)
집해가 있기에 따로 안 합니다.

코렐솔라

2013.07.16
01:44:13
(*.52.89.88)
부족한 주석은 집해에서 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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