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삼국지 - 주연전

주연朱然은 자가 의봉(義封)이고 주치의 누나 아들로서 본래의 성은 시씨(施氏)이다. 처음 주치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연의 나이가 13세가 되었을 떄 , 손책에게 주연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손책은 단양군에 명하여 양고기와 술을 마련하고 주연을 불렀다. 주연이 오군에 도착한 후, 손책은 융성한 예의로써 축하하였다.

주연은 일찍이 손권과 함께 공부하면서 은애의 정을 맺었었다. 손권이 정사를 통솔하게 되자, 주연을 여요현(餘姚縣)의 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주연은 19세였다. 이후에 그는 산음현의 령으로 승진했고, 절충교위(折衝校尉)의 관직을 더했으며, 다섯 현을 감독했다. 손권은 그의 재능을 남다르게 생각하고 단양군을 분할해 임천군(臨川郡)을 만들고, 주연을 그 곳의 태수로 임명해 병사 2천명을 주었다.


臣松之案:此郡尋罷,非今臨川郡。


신 송지가 생각건대 : 이 군(임천군)은 얼마후 폐지됐는데 지금의 임천군이 아닙니다. 

그 때 마침 산적들이 분분히 일어났다. 주연은 출병하여 그들을 토벌하러 갔는데, 1개월 쯤 지나서 평정해다. 조조가 유수로 침범해 왔을 때, 주연은 대오(大塢)와 삼관둔(三關屯)을 방비하고 있었고, 편장군으로 임명됐다. 주연은 건안 24년 (219) 에는 관우 토벌에 참가하여 별도로 반장(潘璋)과 같이 임저(臨沮)까지 가서 관우를 사로잡았다. 이 때문에 소무장군으로 승진하고 서안향후(西安鄕侯)로 봉해졌다.

호위장군 여몽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손권은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만일 일어나지 못한다면, 누가 대신할 수 있소?"

여몽은 대답했다.

"주연은 대담함과 지조에 있어서 남음이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를 임용할 만합니다."

여몽이 죽자, 손권은 주연에게 부절을 주고 강릉을 지키게했다.

황무 원년 (222), 유비가 병사를 들어 의도(宜都)를 공격해왔다. 주연은 5천명의 병사를 감독하여 육손과 협력해 유비에게 대항했다. 주연은 별도로 유비의 선봉대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그들의 퇴로를 차단시켰다. 유비는 그래서 패하여 달아났다. 손권은 주연에게 정북장군을 제수하고 영안후(永安侯)로 봉했다.

위나라가 조진•하후상•장합 등을 파견하여 강릉을 공격했고, 위문제는 직접 완성(宛城)에 머물면서 그들의 지원 세력이 되었다. 위나라 군대는 서로 이어져 주둔하여 강릉성을 포위했다. 손권은 장군 손성을 파견하여 1만 명의 병사를 인솔해 강릉 밖에서 방비하며, 강릉을 둘러 보루를 쌓아 주연의 외부 구원병이 되도록 했다. 장합이 병사를 이동시켜 손성을 공격하자 손성은 대항할 수 없었으므로 즉시 퇴각하였다. 장합은 강릉을 에워싸고 지키던 보루를 차지하였다. 그래서 주연은 안팎의 구원이 끊어지게 되었다. 손권이 반장과 양찬(楊粲) 등을 보내 포위를 풀도록 했지만, 적군의 포위망은 풀리지 않아다. 그 당시 주연의 성안에 있는 병사들은 대부분 종창을 앓고 있었고, 참고 싸울 만한 자는 겨우 5천명이었다. 조진 등이 흙산을 오르고, 땅굴을 파고, 성벽 가까이에 누대를 세우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댔으므로 장사들은 모두 안색을 잃었다. 그러나 주연은 침착하였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하며 적군의 약점을 찾아 진영 두 곳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위나라는 주연을 포위해 공격한지 총 6개월이 되었지만 물러가지 않았다. 강릉현의 령 요태(姚泰)가 병사들을 인솔하여 성 북쪽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밖의 병사는 많고 성안에는 사람이 적으며 식량이 바닥나려고하는 것을 보고 적과 내통하여 그들을 위해 안에서 호응하기로 음모했다. 그 음모가 시행되려고 할 때, 일이 발각되었다. 주연은 요태를 죽음으로 다스렸다. 하후상 등은 승리할 수 없게 되자, 곧 공격을 멈추고 퇴각하였다. 이로부터 주연의 명성은 적국에까지 떨쳤으며, 당양후(當陽侯)로 바뀌어 봉해졌다.

황무 6년 (227), 손권이 직접 병사들을 지휘하여 석양(石陽)을 공격했다. 군사를 돌릴 때에는 반장이 적군의 추격을 차단하는 일을 맡았다. 밤에 행군하는 사이에 혼란이 발생했고, 적군이 반장을 추격했다. 반장은 추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주연이 즉시 돌아와 주둔하면서 적군에게 대항하여 앞에 있는 배로 하여금 아주 먼 곳 까지 가도록 하고, 자신은 천천히 뒤에 출발했다.

황룡 원년 (229), 주연은 거기장군•우호군으로 임명되었고 연주목을 겸임했다. 오래지 않아 연주가 촉나라에 있게 되었으므로 주연이 맡았던 주목의 직책은 없어졌다.

가화 3년 (234), 손권은 촉나라와 기일을 약속하여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손권 자신은 신성으로 향했고, 주연과 전종은 각기 부월을 받아 좌우독(左右督)으로 임명됐다. 마침 관리와 병사들이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공격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적오 5년 (242), 조중(租中) (주) 정벌에 나섰다.

(주) 양양기(襄陽記)에 이르길 '조'자의 음은 조세(租稅)의 '租'와 같다. '조中' 은 상황현(上黃縣) 경계 안에 있으며, 양양(讓陽)으로부터 150리 거리에 있다. 위 시대, 이왕(夷王) 매부(梅敷) 형제 세 사람이 부족 1만여 호를 이끌고 이곳에서 주둔했으며, 중려(中廬)와 의성(宜城) 서쪽 산의 언(언)과 면(沔) 두 계곡 사이에 나누어 살았다. 토지는 평탄하였고 뽕나무와 마가 생장하고, 수전(水田)과 육전(陸田)이 양질이었으며, 면수 남쪽의 비옥한 토지였으르모 '조中'이라고 칭한 것이다.

위나라 장수 포충(蒲忠)과 호질은 각자 병사 수천 명을 이끌고 대항했는데, 포충은 요충지를 차단시켜 주연의 퇴로를 끊으려고 했고, 호질은 포충을 위해 계속적으로 지원했다. 이 때 주연이 지휘하는 병사들이 먼저 사방에서 나와 공격했으므로 위나라 군대가 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불러들일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주연은 수하의 현재 있는 병사 8백 명을 이끌고 역습했다. 포충은 싸움이 불리하게 되었고, 호질 등도 모두 물러났다. (주)

(주) 손씨(손성)의 이동평(孫氏異同評)에서 이르길: 《위서》와 ‘강표전(江表傳)’에서는 경초 원년(237년)과 정시2년(241년)에 두차례 출정하였으며, 호질과 포충을 격파시킨 것은 경초 원년이라고 했다. 《위지》는 <위서>에 의거하여 호질 등이 주연에게 격파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직접 주연이 물러갔다고 말했다. 《오지》에서는 적오 5년(242년), <위서>에서는 정시 3년(242)에 위나라 장수 포충이 주연과 싸웠는데, 포충은 싸움에서 불리했고, 호질 등은 모두 물러갔다고 했다. 《위지》의 <소제기>에도 <손권전>에도 이 해는 평온했던 것으로 서술됐다. 이것은 진수가 오나라의 가화 6년(237년)을 적오 5년으로 잘못 생각한 것뿐이다.

9년 (246), 주연은 재차 조중으로 출정하였다. 위나라 장수 이흥(李興)등은 주연이 깊숙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보병과 기병 7천 명을 이끌고 주연의 퇴로를 끊었다. 주연은 밤에 출격하여 이홍 등을 반격했다. 주연의 군대는 승리하고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귀의한 마무(馬戊)가 간사한 마음을 품었다가 발각되어 주살당했다. 손권은 이 일에 대해 매우 분노했다. 주연은 조중으로 출발하려고 하면서 상소를 올려 말했다.

ㅡ 마무는 소인입니다. 그가 감히 은혜와 양육을 저버렸습니다. 신은 오늘 천자의 권위를 받들어 전투에서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전리품으로 먼 곳과 가까운 곳을 진동시키고 빛내고, 배로 강을 가득 메꾸어서 장관을 만들어 오나라의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분노를 없애주고 싶습니다. 폐하께서는 신이 앞서 한 말을 기억하셨다가 신의 이후 행동의 결과를 꾸짖으십시오.

손권은 이 당시 주연의 상소를 공개하지 않았다. 주연이 승리를 알려오자 신하들은 천자에게 경하했다. 손권은 곧 주연을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였으며, 주연의 상소를 꺼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이전에 일찍이 표를 올렸었는데, 나는 그의 말대로 실현시키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소. 오늘 과연 그의 말과 같이 되었으니, 그는 일을 관찰하는 데 밝다고 할 수 있소.”
그는 사자를 파견하여 주연을 좌대사마(左大司馬)•우군사로 임명했다.

주연의 신장은 7척도 못됐지만,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한 태도가 분명했으며, 생활에서는 수양을 하여 청결했으며,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있어서는 오직 군대의 기계(器械)에만 실시했고 그 나머지는 모두 질박하게했다. 그는 하루종일 국가의 대사를 걱정했고, 언제나 전쟁터에 있었다. 그가 긴급한 사태에 직면했을 때도 대담하고 안정되었던 점은 특히 다른 사람들을 뛰어넘는 부분이다. 비록 세상에 일이 없을지라도 그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엄격한 규정에 따라 태고(太鼓)를 울리면, 그의 진영에 있는 병사들은 모두 행장을 꾸려 대오에 섰다. 주연은 이 방법으로 적군을 놀려 그들이 어떻게 방비해야 할지 모르게 했기 때문에 출전할 때마다 공로를 세웠다.

제갈근의 아들 제갈융과 보즐의 아들 보협은 비록 각기 부친의 직무를 계승했지만, 손권은 특별히 주연으로 하여금 군사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고 대독(大督)으로 삼았다. 육손 또한 죽게 되자, 공신이나 명장들 가운데 생존하고 있는 자는 주연뿐이었으므로 그와 견줄 만큼 융성한 대우를 받는 자는 없었다. 주연은 2년 간 병상에 누워 있었고, 이후로 점점 악화됐다. 손권은 낮에는 그 때문에 먹는 것이 줄었고, 밤에는 그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조정의 사자와 의약, 음식물을 그에게 보내면서 길에서 연락이 끊이지 않게 했다. 주연은 매번 사자를 보내 질병 상태를 보고했고, 손권은 그 사자를 불러 만나서 직접 질문을 했다. 사자가 궁궐로 들어오면 술과 음식을 내렸고, 궁궐을 나가면 삼베와 비단을 보냈다. 창업 공신으로 질병이 있을 때, 손권이 마음을 기울인 점에 있어서는 여몽과 능통에 대한 것이 가장 무거웠고, 주연은 그 다음이었다. 주연은 향년 68세, 적오 12년 (249) 에 세상을 떠났다. 손권은 상복을 입고 장례식을 거행했으며, 그를 위해 매우 슬퍼했다. 아들 주적(朱績)이 뒤를 이었다.

주적은 자가 공서(公緖)이고, 아버지로 인해 랑으로 임명됐으며, 후에 건충도위(建忠都尉)로 제수되었다. 숙부 주재(朱才)가 죽자, 주적이 그의 병사들을 통솔하게 되었으며, 태상 반준을 수행하여 오계(五溪)를 토벌하러 갔고 담력으로 칭찬을 받았다. 그는 편장군영하독(偏將軍營下督)으로 승진했고, 도적들에 관한 일을 겸임했다. 그는 법을 집행하면서 한쪽으로 기우는 일이 없었다. 노왕(魯王) 손패는 주적과의 교제에 마음을 두고 있다가, 일직이 주직의 관서까지 와서 그와 같은 앉아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그러나 주적은 땅으로 내려가 일어서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주연이 세상을 떠난 후, 주적은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여 평위장군(平魏將軍)•낙향독(樂鄕督)으로 임명됐다. 그 다음해, 위나라의 정남장군 왕창이 병사들을 이끌고 강릉성으로 공격해 왓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주적은 분위장군 제갈융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ㅡ 왕창은 먼 곳에서 와 피곤한 상태이며 그의 말들은 먹을 것이 없고 병력은 줄어들어 달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추격하는 병력은 적으므로 병사들을 인솔하여 서로 잇도록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그들을 공격할테니, 당신은 뒤에 이어서 공격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어찌 한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겠습니까? 마땅히 두 사람이 마음을 합쳐 금을 자르는 정신인 것입니다.

제갈융은 주적에게 허락한다는 대답을 했다. 주적은 곧바로 병사들을 인솔하여 기남(紀南)까지 왕창을 추격했다. 기남은 강릉성으로부터 30리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적은 처음에는 싸워서 승리했지만, 제갈융이 앞으로 나오지 않았으므로 후에는 불리하게 되었다. 손권은 주적의 생각을 매우 칭찬했었으므로 제갈융을 심하게 질책하고 노여워했다. 그러나 제갈융은 형 대장군 제갈각이 권세가 있었기 때문에 면직되지는 않았다. 애당초 주적은 제갈각•제갈융과 화평하게 지내지 못했다. 이 일이 발생한 후, 쌍방의 틈은 더욱더 깊어졌다.

건흥 원년 (252), 주적은 진동장군으로 승진됏다.

2년 (253) 봄, 제갈각이 신성으로 향하면서 주적에게 힘을 합쳐 싸울 것을 요청하며 그를 반주(半州)에 머물러 있게 하고, 제갈융으로 하여금 주적의 임무를 겸하도록 했다. 겨울, 제갈각과 제갈융이 살해되었고, 주적은 다시 낙향으로 돌아왔으며 부절을 받았다.

태평 2년 (257) 에 주적은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 손침이 정권을 쥐게 되자, 대신들은 의심하고 다른 마음을 가졌다. 주적은 오나라는 틀림없이 혼란스럽게 될 것이고, 중원이 그 틈을 타고 차지하려고 할 것을 걱정하고, 곧 은밀히 편지를 보내 촉과 연락을 취하여 (위나라에 의해) 겸병될 걱정을 하도록 하였다. 촉은 우장군 염우(閻宇)를 파견하여 병사 5천 명을 인솔해 백제의 수배를 늘리고 주적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했다.

영안 초년, 주적은 상대장군•도호독으로 승진했고, 파구로부터 서릉(西陵)까지의 지역을 관할했다.

원흥 원년 (264), 주적은 좌대사마로 승진했다. 처음에 주연은 주치의 상을 마쳤을 때, 본래의 성을 회복하기를 원했지만 손권이 허락하지 않았다. 주적은 오봉(五鳳) 연간에 표를 올려 성을 시씨(施氏)로 바꾸었다. 그는 건형 2년 (270) 에 세상을 떠났다.

분류 :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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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3.05.01
11:53:41 (*.99.12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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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6
14:26:51
(*.0.203.140)
배주 추가 배송지가 군에대해 설명한 게 전부군요.

구라뱅뱅

2013.08.05
18:28:15
(*.49.168.253)
臣松之案:此郡尋罷,非今臨川郡。

배송지 : 위에 언급된 임천군(臨川郡)을 찾지 못하였으나 현재의 임천군은 아니다. (부드럽게 의역)

코렐솔라

2013.08.05
18:35:28
(*.131.108.250)
감사합니다. 반영했습니다.

dragonrz

2016.05.27
21:58:44
(*.226.145.238)
臣松之案:此郡尋罷,非今臨川郡。이 부분의 오역을 바로잡는 수정을 했습니다.

dragonrz

2016.11.09
03:26:57
(*.226.145.238)
포와로님의 블로그 내용(http://sunheung7.blog.me/220361691068)에 의거해 해당 부분을 "(위나라에 의해) 겸병될 걱정을 하도록 하였다."로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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