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85권, 32년(1537 정유 / 명 가정(嘉靖) 16년) 10월 24일(경오) 2번째기사
양연·안사언·한숙 등이 김안로를 절도에 안치시킬 것을 아뢰자 윤허하다

(중략) 사신은 논한다. 양사(兩司)에게 김안로의 사독함과 권세를 독차지한 죄가 극악하다는 것과, 김근사가 악의 무리라는 형상을 자세히 아뢰자, 상이 즉시 윤허하였다. 이때 양연이 대사헌으로 이 의논을 먼저 주장한 것은 왕의 밀지(密旨)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보다 며칠 전에 상이 경연에서 ‘위태한데도 붙들지 않으니 그런 재상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라는 말을 하였고 또 우의정 윤은보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조정에 사람이 없음을 걱정한다는 뜻을 극론하였는데, 이는 대개 상이 김안로의 죄악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교시를 내려 조정에 은미하게 보인 것이다.
또 논한다. 김안로가 윤원로 등이 장차 자기를 해칠 것을 알고는 공론을 칭탁하여 사림에 전파하여 윤원로 등을 정죄(定罪)하였다. 윤원로 등이 김안로의 흉사하고 부도한 죄상을 몰래 상께 아뢰니, 상께서 매우 두려워하여 무사(武士)를 시켜서 김안로의 무리를 박살하려 했는데, 초친(椒親)18447) 윤안인(尹安仁) 등과 의논하여, 그렇게 하지 않고 윤임과 윤안인을 시켜 은밀히 양연에게 교시하였다. 양연이 즉시 양사를 거느리고 아뢰었는데 김안로의 일은 쾌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그 일이 조정에서 나오지 않고 외척에게서 나왔으므로 정대(正大)하지 못하다 해서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중종 37권, 14년(1519 기묘 / 명 정덕(正德) 14년) 12월 29일(기축) 4번째기사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해 중종이 홍경주에게 내린 밀지에 관한 사신의 논평

사신은 논한다. 조광조 등이, 정국 공신(靖國功臣) 중에 공이 없이 외람되게 기록된 자가 많다 하여 추삭(追削)하기를 청하여 논집(論執)하였다. 임금이 전에 이들을 치우치게 임용하였는데, 조정의 훈고(勳舊) 중에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고 임금도 그들을 꺼렸다. 이 논의를 일으키기에 이르러 남곤이 홍경주(洪景舟)를 부추겨 ‘위망(危亡)의 화(禍)가 조석에 다가와 있다.’고 공동(恐動)하니, 임금이 더욱 의구하여 홍경주에게 여러 번 밀지를 내렸는데, 그 밀지에는 글의 뜻이 알기 어려운 것이 있고 언서(諺書)를 섞은 것도 있으므로 이제 기록하지 않으나 그 대개는 이러하다. “임금이 신하와 함께 신하를 제거하려고 꾀하는 것은 도모(盜謀)에 가깝기는 하나, 간당(奸黨)이 이미 이루어졌고 임금은 고립하여 제재하기 어려우니, 함께 꾀하여 제거해서 종사(宗社)를 안정하게 하려 한다……”

중종 39권, 15년(1520 경진 / 명 정덕(正德) 15년) 4월 13일(경오) 2번째기사
홍경주를 좌찬성으로 삼다

사신은 논한다. 기묘년9918) 에 상이 사림(士林)이 하는 일을 싫어하여 비밀히 홍경주로 하여금 충훈부(忠勳府)의 직방(直房)에 입직(入直)하게 하였다가 인견하여 조정의 일을 물었는데, 홍경주도 외정(外廷)의 재집(宰執)과 함께 드디어 참소하기를 ‘조광조는 인망이 한때에 중하여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 붙으니 비상한 일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하였다. 그때 조광조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바야흐로 정국공(靖國功)9919) 4등을 삭제하자고 청하는 중이었으므로 상이 더욱 의심하여 밀지(密旨)를 홍경주에게 주어 재집들에게 보이게 하였는데 거기에 대략 ‘정국한 신하는 다 도와서 추대한 공이 있는데, 지금 4등을 공이 없다 하여 삭제하기를 청하니, 이는 반드시 그 사람을 구별하려는 것이다. 그런 뒤에 공이 있는 사람을 뽑아 내서 연산(燕山)을 마음대로 폐출한 죄로 논한다면, 경 등(卿等)이 어육(魚肉)이 되고 다음에 나에게 미칠 것이다.’ 하였다. 홍경주가 밀지를 소매에 넣고 다니며 재집들에게 보였는데, 정광필(鄭光弼)의 집에 가서 보였더니 정광필이 보려 하지 않고 말하기를 ‘공은 유자광(柳子光)의 일을 보지 않았느냐.’ 하므로 경주가 드디어 물러갔다. 그 나머지 제공(諸公)은 ‘상의 뜻이 이러한데 어떻게 어길 수 있느냐.’ 하였다. 그래서 상이 곧 홍경주와 함께 모의한 남곤(南袞)을 부르매 남곤이 신무문(神武門)을 거쳐 비현합(丕顯閤)에 들어가 제거할 명사(名士)를 뽑아서 벌여 적었고, 한 사람마다 무사(武士) 5명을 배정하고 궐정(闕庭)에 불러모아 쳐 죽이기로 의논이 이미 정해졌다. 그런데 정광필이 이르러서 아뢰기를 ‘신이 전에 폐조에 있을 때 참혹한 화를 자주 보았으며 십생 구사(十生九死)로 겨우 면하였는데, 성명(聖明)을 만나게 되어서도 어찌 다시 이런 일을 보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또 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위에 성명이 계시니 걱정없으리라.」 하여 그 하는 짓을 방자하게 해서 드디어 조정을 불안하게 하였으나, 그 수유(豎儒)가 뿌리를 뻗쳐 체결할 환난이 없으니, 그 죄를 다스리려면 한 옥리(獄吏)로도 넉넉할 것입니다. 신이 재주가 없으면서 수상(首相)의 직에 있어 이 젊은 사람이 함부로 방자하여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죄는 오로지 신에게 있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쟁하니, 상의 뜻이 조금 풀렸다. 정광필이 남곤이 그 모의를 주장한 것을 알고 그를 곧바로 보며 불평한 기색을 지으니, 남곤이 스스로 사문(斯文)의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여기고 뉘우쳐서 드디어 병을 핑계삼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뒤에 상이 정광필을 책면(責免)9920) 하고 드디어 남곤을 정승으로 삼았으며, 정부의 동벽(東壁)9921) 이 오래 비어 있었는데 홍경주를 특별히 제수(除授)하였다.

중종 40권, 15년(1520 경진 / 명 정덕(正德) 15년) 9월 17일(신미) 2번째기사
영의정 김전·좌의정 남곤 등이 김세준이 상소한 일을 의논하여 아뢰다
사신은 논한다. 언로(言路)가 트이고 막히는 것은 나라의 보존과 위망에 관계되는 것인데, 삼공으로서 굳이 국문(鞫問)하여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니, 이른바 쓸모 없는 자이다. 이유청(李惟淸)은 박직(朴直)하고 무식하며, 남곤(南袞)의 대절(大節)은 이미 북문(北門)에서 떨어졌으므로10277) 워낙 책망할 것도 없으나, 김전은 효행(孝行)과 청덕(淸德)이 있고 정직하고 평탄한 사람인데 이때에 이르러 역시 이런 말을 하니, 지식있는 사람들이 ‘김전은 어두운 병폐가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이 마땅하다.
사신은 또 논한다. 말한 것이 잘못되었더라도 말한 사람은 죄줄 수 없으며, 말을 가리지 않고 아뢴 것도 임금을 믿기 때문이니, 위언(危言)하여도 죄주지 않는 것이 어찌 치도(治道)의 빛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삼공이 김세필을 죄주도록 청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실록에는 조광조를 제거할 때와 김안로를 제거할 때 중종이 밀지를 내렸다고 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신하들을 통제할 수 없었기에 중종이 부득이하게 밀지를 내렸다. 고로 중종의 밀지는 상대적으로 약한 왕권을 보여준다'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몇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몇 가지 점을 살펴보면 그 한계점을 알 수 있습니다.


(1) 중종이 밀지를 내린 점은 사관들도 알고 있었다.

정조 어찰과는 달리, 중종이 신하들에게 밀지를 내렸다는 점은 사관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중종의 밀지는 사실상 밀지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중종이 밀지를 내려 신하들을 조종한다는 점을 신하들도 알고 있었던거죠. 실제로 중종이 밀지를 내린다는 점은 신하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중종 13권, 6년(1511 신미 / 명 정덕(正德) 6년) 4월 2일(신사) 1번째기사
헌납 조세창이 양현고에 음사를 배설한 일을 아뢰니 답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대간이 한형윤(韓亨允)·조연(趙演) 등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성세창(成世昌)이 아뢰기를,
“전번 문묘에 친행(親幸)하실 때 양현고(養賢庫)에 음사(淫祀)를 배설하신 일을 듣고 신 등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또 듣건대 내명(內命)3583) 으로 하였다 하니 더욱 실망입니다. 무지한 일반 백성이라도 학궁(學宮) 곁에 음사를 배설할 수 없는데, 하물며 나라에서 어찌 선성(先聖)의 사당 근처에 음사를 배설하여 설만(褻慢)을 부리겠습니까. 사필(史筆)로 기록됨이 또한 매우 아름답지 못합니다. 자전(慈殿)의 뜻이라 하더라도, 뒤에는 힘써 말씀드려 음사를 행하지 말게 하소서.”
하고, 장령 김협(金協)이 또한 이것으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고사(告祀)의 일은 내가 처음에 알지 못했고 또 예전의 준례가 있는 것도 몰랐는데 전에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상전(上殿)에 품의하고, 예전의 준례가 있는 줄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니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이미 하였으니 후회한들 무엇하겠는가.”


중종 37권, 14년(1519 기묘 / 명 정덕(正德) 14년) 11월 18일(무신) 1번째기사
대간이 명소하여 취직할 수 없음과 조광조 등의 일에 관해 아뢰다
(중략)대간이 또 아뢰기를,
조광조 등에게 죄줄 만한 일이 있더라도, 광명 정대하게 그 사람들을 모아서 분부하시기를 ‘곧은 논의를 듣기 싫어서가 아니고 사기를 꺾으려는 것도 아니며, 폐해가 이렇게까지 되었으므로 마지못해 죄주는 것이다.’ 하고, 한산(閑散)9602) 에 두거나 멀리 내치면, 그 사람들도 그 죄에 승복하고 중외(中外)가 모두 쾌하게 여길 터인데, 그러지 않고 늘 쌓아 두고 결단하지 않다가 한두 사람이 어두운 밤에 은밀히 아룀에 따라 이와 같이 죄주시는 것은 궤비(詭秘)가 심하여 나라의 일 같지 않습니다. 신 등이 어제 간사한 무리가 은밀히 아뢰었다고 들었는데, 이제 다시 들으니 상께서 홍경주(洪景舟)에게 비밀히 이르시기를 ‘조광조 등의 우익(羽翼)이 이미 이루어졌다. 당초 현량과(賢良科)를 두고자 할 때에 나도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실로 우익을 심은 것이므로 죄다 제거하려 하였으나, 경(卿)의 사위 김명윤(金明胤)도 그 가운데에 있으므로 하지 않았다.’ 하는데, 이 말이 이미 밖에 퍼졌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는 반드시 서로 정성으로 대하여 간격이 없고 뜻이 서로 맞아야 그 나라를 보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임금의 위엄으로 이 두세 선비를 죄주는 것이 무엇이 어렵기에 어두운 밤에 밀지(密旨)를 내려서 비밀히 하십니까? 신임한다면 정성으로 대하여 의심하지 않아야 하고, 죄가 있다면 분명하고 바르게 죄를 정해야 할 것인데, 밖으로는 친근히 하고 신임하는 듯이 보이고 속으로는 제거하려는 마음을 품으셨으니, 임금의 마음이 이러한 것은 위망(危亡)의 조짐입니다. 신 등은 통곡과 눈물을 견딜 수 없습니다. 김근사·성운의 일은, 지난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유생들이 상소하였을 때에 후설(喉舌)의 자리에 있으면서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저렇듯 막은 것이 매우 옳지 않으므로 아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대간이 잘못 들은 것이다. 나도 말하여 조정이 시원히 알게 하려 하였다. 당초에 홍경주(洪景舟)가 남곤(南袞)·송일(宋軼)·김전(金詮) 등의 집에서 들으니 무사(武士) 30여 인이 문사(文士)들을 제거하려 한다고 하더라 한다. 그러나 어찌 이것으로 고변(告變)할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 처치하면 될 것이다. 조광조 등의 마음은 옳더라도 궤격(詭激)이 버릇되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조정으로 하여금 그 사습(士習)을 바로잡게 하면 마땅한 처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육경(六卿)과 협의하여 아뢰었던 것이다. 정원(政院)에 이르지 않은 것은 궤비(詭秘)한 듯하며, 나도 그것이 그른 줄 스스로 안다. 밀유(密諭)하였다는 것은 잘못 들은 것이다. 김명윤의 일이 퍼진 것도 잘못된 것이다. 대저 현량과는 조종조(祖宗朝)에 해 온 일이 아니므로 반드시 할 것 없다고 하였을 뿐이다. 어찌 죄다 제거한다고 하였겠는가? 이는 잘못 전해진 것이다.”
하였다.


중종 37권, 14년(1519 기묘 / 명 정덕(正德) 14년) 12월 14일(갑술) 2번째기사
대사헌 이항이 현량과의 혁파와 안당·최숙생 등에 대해 아뢰다

대간 전원이 예궐(詣闕)하니, 임금이 양사(兩司)의 장관에게 명하여 편전(便殿)에 입대(入對)하게 하였다. 대사헌 이항(李沆)이 아뢰기를,
“요전 승전(承傳)에 ‘청선(淸選)의 중임(重任)은 한두 자급(資級)이 모자라더라도 차서에 의하지 아니하고 발탁해 쓰라.’ 하셨으므로 근래 관직이 외람되니, 조종(祖宗)의 구법대로 날짜를 계산해서 사일(仕日)을 주고 외람되게 제수된 자는 모두 개정하소서. 근래 조광조 등이 붕비(朋比)를 맺고 조정을 어지럽혔으므로 온 나라 안이 다 마음아파 하였으니, 죄를 정한 까닭이 아래에서 아뢰었기 때문이건 위에서 나왔건 다 광명정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중외(中外)에서 그 연유를 모르고 ’상께서 밀지(密旨)가 계셨다.’고도 하고 ‘대신이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와 아뢰었다.’고도 하니 조정(朝廷)의 일이 이처럼 애매하여 사람들이 모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현량과(賢良科)는 부득이 혁파해야 합니다. 당초에 듣건대, 김식(金湜)은 급제한 자가 아니건만 저들이 다 끌어들여서 경연관(經筵官) 또는 대사성(大司成)이 되게 하고자 하였으나 조종의 법이 아니므로 현량과라는 명목으로 저희가 아는 자들만을 뽑아서 시험하되 그 사람들의 이름 밑에 ‘경제(經濟)가 유여(裕餘)하다.’ 느니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다.’ 느니 주를 달았다 합니다. 대저 경제가 유여하다는 것은 능히 성인 지위에 도달한 자라야 그런 것입니다. 널리 베풀어서 뭇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요(堯)·순(舜)일지라도 잘할 수 없는 것인데, 이런 사람을 경제가 유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학문에 연원이 있는 것도 성인 지위인 사람입니다. 공자(孔子)의 제자 중에서 오직 안자(顔子)한 사람이 이에 해당하고 자유(子游)·자하(子夏)일지라도 잘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저런 자가 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 임금을 속인 것이며 그 나머지도 이와 같습니다. 임금께서 능히 깨달으시면 쾌히 결단하여 혁파해야 하고 이렇게 유난하셔서는 안 됩니다.”하고, 또 안당(安瑭)·최숙생(崔淑生)·이자(李耔)·유용근(柳庸謹)·신광한(申光漢)·정순붕(鄭順朋)·한충(韓忠)·정은(鄭譍)·최산두(崔山斗)·장옥(張玉)·이희민(李希閔)·이청(李淸)·양팽손(梁彭孫)·구수복(具壽福)·정완(鄭浣)·이연경(李延慶)·이약빙(李若氷)·권전(權磌)·파릉군(巴陵君) 이경(李璥)·시산 부정(詩山副正) 이정숙(李正叔)·숭선 부정(嵩善副正) 이총(李灇)·장성수(長城守) 이엄(李儼)·강녕 부정(江寧副正) 이기(李祺) 등 23인의 이름을 열거해 써서 아뢰기를,
“이는 다 박세희(朴世熹) 등과 같은 자들로 조광조와 붕비를 맺고 서로 한 집에서 잤으며, 정사(政事) 때의 의망(擬望)하는 것과 논박하는 것을 다 사론(私論)에서 예정하여 요란하기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그 죄를 같이하지 않으면 저 죄받은 자들도 마음이 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광조에게 붙은 자가 역시 많으나, 이것은 그 중에서 심한 자를 뽑아 적은 것일 뿐입니다. 죄받은 자들과 그 죄를 같게 하소서. 또 안당·최숙생은 나이가 이 사람들과는 같지 않고 교결(交結)한 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안당은 처음으로 정승이 될 때에 재상들이 공천한 것이 아니라 자제로 인연해서 저들과 교통하여 얻은 것입니다. 최숙생은 한 해 안에 초천(超遷)하여 숭정(崇政)에 이르렀으니 그 사이에 간사한 일이 없었겠습니까? 박세희의 죄보다 한 등을 낮추어서 죄주소서. 또 종친은 조정의 정사에 간여할 수 없는 것인데, 시산 부정 등은 조사(朝士)와 교통하고 또 동류(同類)의 말을 들어 상소까지 하였는데, 그 소의 뜻도 매우 그르며 공론이 아닙니다.이성언(李誠彦)을 죄주려던 상소이다.】 또 파릉군은 조광조 등이 죄받던 날 종친부(宗親府)에 가서 종친을 죄다 모아서 아뢰어 구제하려다가 못하고 또 궐정(闕庭)에 나아가 한 밤에 무리로 모여서 아뢰어 구제하려 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저들과 그 죄를 같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박영(朴英)의 가자(加資)를 개정하소서. 올 가을 별시(別試)도 혁파해야 하나 지금 시관(試官)을 추고하는 중이므로 추고를 끝낸 뒤에 다시 아뢰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창선의 중임은 차서에 의하지 아니하고 발탁해 쓰라는 승전은 다시 거행하지 말도록 하라. 조광조 등이 한 일은 상하가 다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힌 것이라 하며 대신이 발론하려 하나 능히 하지 못하므로, 깊은 밤이기는 하나 특별히 서문을 열게 하고 병조(兵曹)의 입직한 당상(堂上)에게 명하여 일을 맡게 한 것이다. 어두운 밤에 하였으므로 부당한 듯은 하나 부득이한 때문이었다. 또 조광조 등이 이토록 극심하기에 이르렀는데도 대신이 일찍이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이것도 매우 옳지 않다.”
하고, 드디어 황이옥(黃李沃)의 상소를 이항 등에게 주고 이르기를,
“유생(儒生)의 소의 뜻이 이러하다. 조정에 공론이 있다면 유생이 상소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 유생은 조광조의 죄를 분명히 바루지 못했으므로 이렇게 한 것이나, 그 말대로 저들의 죄를 결단하면 지나칠 것이다.”
하매, 이항이 아뢰기를,
“무릇 일에 있어서 우유(優游)하여 사정(邪正)을 가리지 않는 것은 이미 옳지 않거니와 구태여 지나치게 강단(剛斷)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저들의 죄는 법대로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으나, 조사를 대우하는 도리를 그렇게 하는 것은 조종조에서 없던 일이며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유생의 말이 지나치니 좇아서는 안 되며, 임금께서 짐작해서 하셔야 합니다. 또 조광조가 대사헌에 제배된 이래로 소민(小民)으로서 법금(法禁)을 범한 자는 모두 버려 두어 구차하게 그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니, 이는 도리를 어기고 명예를 구한 것이므로 그 마음쓰는 것이 간사합니다. 김정은 시인(猜忍)9663) 하고 우혹(愚惑)하며, 김식은 잔혹하고 각박합니다. 신이 듣건대, 김식은 강변에 사는 사람이 조사(朝士)에 의지하여 폐단을 부린다 하여 형조(刑曹)로 하여금 잡아다가 신문하게 하여 한 집의 5인이 다 죽게 하였으니 잔혹하기가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율문(律文)대로 죄주어도 아까울 것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죄가 크니, 처음에는 율문대로 죄주어도 아까울 것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짐작해서 하였다. 율문대로 한다면 조정에서 조사를 대우하는 데에 불가한 바가 있어서 한때의 해가 될 뿐 아니라 혹 후세에 폐단을 끼치게도 될 것이므로, 저렇게만 하고 말았다. 큰 무리의 도둑을 다스리더라도 그 무리를 죄다 다스릴 수는 없으므로, 옛 사람도 이르기를 ‘위협에 못이겨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다. 근자에 조정과 인심도 거의 안정되었고 조광조 등은 이미 다 죄를 다스렸으니, 이런 사람들을 죄다 다스릴 수는 없다.”안당 등 23인을 가리킨 것이다.】
하매, 대사간 이빈(李蘋)이 이뢰기를,
송(宋)나라가 위망(危亡)하게 된 것은 오로지 인후(仁厚)만 넉넉하고 강단이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임금께서는 강단으로 조처하소서. 지금 만약에 잡목[荊榛]을 가리지 않고 뒤섞여 있게 하면 유위(有爲)하고자 하는 조사가 안심하지 못할 것이니, 임금께서 멀리 염려하여 조처하셔야 합니다. 지금 시비의 논의를 상께서 정하지 않으시므로 대신들도 의논을 정하지 못합니다. 예전에 왕안석(王安石)이 처음에는 나라를 그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그 마음은 본디 저러한 짓을 하고자 하지 않았으나, 채경(蔡京)의 무리가 어지러이 화창(和唱)하여 문란하게 된 것이므로, 예전에 역사를 만든 사람은 안석을 열전(列傳)에 썼습니다. 지금조광조 등도 그 마음은 본디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았으나, 이 무리가 어지럽게 하여 마침내 이렇게 되었으니, 모두 죄주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안당 등의 일은 대신과 의논해야 하겠으나, 그 죄를 죄다 다스릴 수는 없다.”
하매, 이빈이 아뢰기를,
“만약에 이 무리가 무슨 짓을 하겠는가 하고 생각하여 그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뒤에 반드시 큰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임금께서 쾌히 결단하시면 대신들의 의논도 정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중종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정보가 세어나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중종이 밀지를 통해 정치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대사헌 이항 같은 경우에는 중종의 막후 정치를 비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종은 이후에도 밀지를 통해 김안로를 제거합니다. 이 때에도 밀지를 내린 점이 세어나갔죠. 하지만, 조광조와 김안로 세력 모두 중종을 막지 못 합니다. 신권이 우세했다면, 과정의 부당함을 꼬투리 삼아 중종을 제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그렇지 못 합니다. 즉, 신하들은 모르고 중종에게 당한게 아니라 알고도 방법이 없어 중종에게 당한 셈. 심지어 이항이나 기타 대간들도 '사람들이 다 알게 정치를 해야 한다' 정도로 중종을 비판했지, '부당한 방법으로 조광조를 죽이는 행위는 잘못됐다'라고 중종을 막지는 못 합니다. 


(2) 고위 관리들의 무력화



영의정, 우의정, 심지어 중종의 명을 받은 이조판서 남곤마저 조광조의 사사를 반대하는데, 중종은 기어이 조광조를 죽이는데 성공합니다.

이후에도 중종은 한명회 보다 권세가 강했다는 김안로 세력을 와해시키고요. 신권이 강하다면, 반정까지는 못 가더라도 최소한 반대 여론을 형성해 왕의 살인을 견제해야 하는 되는게 정상 아닌지?

애초에 저 고위 관리들은 모두 중종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던 사람들. 남곤, 심정, 홍경주, 양연 등은 중종의 밀지에 따라 움직였고. 중종에게 힘이 부족했으면 저들이 중종의 밀지대로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권세가에게 붙어버리지. 심지어 조광조, 김안로는 중종에 의해 권세가가 되었다가 중종에게 버림받자 바로 목숨을 잃죠.

실제로 남곤 정도를 제외한 중종 떄의 권신들은 권력을 잡았다가 실각한다는거(ex. 심정, 김안로. 심지어 정광필도 한 때 퇴출되고...). 이게 과연 우연일련지.


(3) 정조도 막후 정치를 했다

정조가 힘이 약해서 밀지를 통해 정치를 했을까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밀지 자체가 왕권의 약화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여기기는 힘듭니다. 밀지는 하나의 통치 수단일뿐. 오히려 중종은 밀지가 까발려져도 별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중에도 계속 밀지를 사용하죠.

투입-산출 과정이 보편화되고, 체계화된 현대 민주주의 국가와는 다르게, 전근대 군주정에서는 정치 과정이 '상대적으로' 체계적이지 않습니다. 떄문에 이런 비공식적 방법이 많이 이용되었고, 또 통치자의 성격에 따라 정치 과정이 자주 뒤바뀌기도 했습니다(ex. 의정부 서사제, 육조 직계제). 따라서 '공식적 체계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이 왕은 왕권이 약했다'고 단정짓는 행위는 매우 위험합니다. 그나마 법치를 지향하던 조선이니깐 전근대 국가 치고 공식적인 틀이 체계적으로 잡혀 보이는거지. 이 조선도 현대 법치 국가들과 비교하면 비공식적 정치 행위가 상당한 편입니다. 당장 위의 조광조, 김안로도 왕이 여론 조성해 죽여버리니;;

또한 '공식적 체계에 따르지 않고 변칙적 방법으로 신하를 제어한다'는 관점에 따르면, 조선 후기의 왕들은 모두 왕권이 약해버리게 됩니다. 현종, 숙종, 경종, 영조 모두 환국이라는 변칙적 방법으로 신하들을 통제했거든요. 정조도 밀지를 통해 신하들을 제어했고. 정작 저 왕들은 모두 신하들을 제압한다는거. 물론 통치자의 개인 특성상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 스타일 문제지, 권력 자체는 충분히 넘쳤습니다



그렇다면 중종은 왜 밀지를 사용했을까요. 바로 연산군의 실패를 밟지 않기 위해서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연산군은 넘치는 권력을 주체하지 못 하고, 권력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 하여 폭주하고 말았습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결국 신하들은 연산군을 폐위합니다. 즉, 연산군은 여론을 아얘 무시하는 정치를 펼쳤기에 몰락합니다.

중종은 연산군의 몰락으로 인해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때문에 연산군의 실패 요인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실패 요인이 바로 '여론'. 따라서 중종은 밀지를 통해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형성하고자 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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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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