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사 - 이순신은 과연 현대에 이르러 추앙된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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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순신은 광복 후에 미화되었다'는 식의 헛소리가 널리 퍼지는군요 ;;


“인재가 없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송 고종(宋高宗)의 중흥은 오로지 인재에 힘입은 것이었다.1547) 감사와 병사(兵使)를 모름지기 적합한 사람을 얻어 맡긴 뒤에라야 큰일을 할 수가 있는데, 항상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다. 일찍이 선조조(宣祖朝)에는 상신 노수신(盧守愼)이 권율(權慄)·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여 장수로 삼았는데, 이 또한 사람을 알아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큰 인재는 반드시 정규 관원 가운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니 한신(韓信)에게서 또한 볼 수 있다. 만일 재지와 용모가 영리한 것으로 취할 뿐이라면 반드시 저처럼 큰일을 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인조실록>


이순신(李舜臣)의 경우는 본디 미관 말직이었고 권율(權慄)은 명망이 없었으니, 혹시 때를 만나지 못하고 하급 관직에서 늙어 죽었더라면 사람들은 그들이 뛰어난 재주를 지닌 줄을 몰라 오늘날 그 이름이 소멸된 지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또 얼마나 많은 권율과 이순신 같은 인재가 늙어 죽어가고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비록 그 재주를 지녔더라도 관직으로 시험해 보지 않으면 또한 그런 사람을 얻을 수 없다고 봅니다.<효종실록>


상이 승지 이경억(李慶億)에게 이르기를,
“아침에 이순신(李舜臣)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 그 당시 청정(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효종실록>




참고로 조선시대 악비의 명성 = 오늘날 한국에서의 나폴레옹, 칭기즈칸, 알렉산더의 명성 ㅇㅇ

현종 5권, 3년(1662 임인 / 청 강희(康熙) 1년) 2월 2일(병오) 2번째기사
예조가 남해 노량의 이순신을 위해 세운 사우의 액호와 교서를 예문관으로 하여금 속히 지어 올리게 하라고 아뢰다


현종 10권, 6년(1665 을사 / 청 강희(康熙) 4년) 5월 1일(병술) 4번째기사
예관을 보내어 김장생·조헌·송상현·이순신에게 제사지내게 하다


숙종 45권, 33년(1707 정해 / 청 강희(康熙) 46년) 2월 6일(기축) 5번째기사
이순신·을지문덕 등의 사우에 호를 내리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지난 가을에 대신(大臣)들이 전라도(全羅道) 고금도(古今島)의 진인(陳璘) 도독(都督)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하는 일을 진달(陳達)하여 윤허받았는데, 나중에 듣건대 진 도독(陳都督)은 관왕묘(關王廟)15264) 를 창건하였고, 그후에 진 도독과 이순신을 동무(東廡)에 추향(追享)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왕묘와 지세가 너무 가까와서 담장으로 경계를 구획(區劃)할 수가 없으니, 지금 만약 사액(賜額)한다면, 곧 관묘(關廟)의 액호(額號)이어야 합니다. 관왕은 마땅히 지존(至尊)으로 더불어 뜰을 나누어 대등한 예절을 갖추어야 할 사람이니, 그 묘우(廟宇)에 사액함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진 도독 또한 중국의 사명을 받들었던 장수이므로, 우리 조정에서 신하로 예대(禮待)할 수는 없습니다. 이순신과 함께 향사(享祠)하고 치제(致祭)하는 것은 방애(妨碍)됨이 많으니, 청컨대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소서.”


예조 : 어 진린이 관우 사당 만들었는데, 이순신 사당이랑 경계가 겹침.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거 우리가 상국으로 모시는 진린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참고로 조선 시대 관우 인기 = 아르헨티나에서의 마라도나 인기(종교도 있음) = 우리나라에 전현직 모든 아이돌 그룹 x 100000 인기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는 말하기를,
“만약 선무사(宣武祠)15265) ·무열사(武烈祠)15266) 의 예를 쓴다면, 단지 관묘(關廟)에 아름다운 칭호(稱號)를 게시하고, 또 ‘선액(宣額)’이라는 두 글자를 빼는 것이 마땅할 듯하며, 제례(祭禮) 또한 선무사(宣武祠)의 의식(儀式)에 의거해야 합니다. 이순신에 이르러서는 이미 도독(都督)과 한 실(室)에 병향(並享)하였으니, 소중하게 여기는 뜻이 있습니다. 또 충성(忠誠)과 노고(勞苦)가 특이하여, 무릇 숭배하여 보답하는 데 관계된 은전(恩典)은 상격(常格)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으니, 관원(官員)을 차견(差遣)하여 제사를 지낼 즈음에 일체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아마도 국체(國體)에 손상됨이 없을 듯합니다.”



이유 : 약간만 수정하면 괜찮을듯?


의정(左議政) 서종태(徐宗泰)는 말하기를,
“새로운 묘우(廟宇)는 따로 세운 것이 아니고, 무우(廡宇)에서 향사(享祠)하는 것이라면, 한 묘우(廟宇) 안에서 무우에 편액(扁額)을 걸어두는 것은 일이 매우 불편할 것이니, 단지 관왕묘에만 큰 것을 걸어 일컫게 함이 마땅합니다. 제례(祭禮)에 이르러서는 도독의 제식(祭式)에는 향(香) 및 축사(祝辭)를 내리는 것과, 관원과 집사(執事)를 무열사·선무사의 예에 의하여 준행(遵行)함이 마땅합니다. 이순신(李舜臣)은 우리 나라 사람의 사액(賜額)한 사원(祠院)에 평소 향사(享祀)할 때에, 본래 조정에서 관원을 보낸 규례(規例)가 없으니, 단지 다른 사묘(祠廟)의 예에 의거하여 유생(儒生)·교생(校生)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비록 한 실(室) 안에 있다 하더라도 이는 후(厚)함과 박(薄)함의 차이가 있는 데에서 나온 소치이니, 아마도 방애됨이 없을 듯합니다.”

서종태 : 관우한테 격식 좀 더 갖추면 괜찮을듯

우의정(右議政)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만약 아름다운 칭호(稱號)를 하여 두 묘우(廟宇)의 뜻을 포괄하게 하려면, 관묘에 편액(扁額)을 내리면서 ‘사액(賜額)’ 두 글자를 빼버려도 그 뜻에 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이순신이 비록 우리 나라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첨사(僉使)로 하여금 일체로 거행하게 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김창집 : 약간 수정만 가하면 괜찮을듯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은 말하기를,
기자(箕子)의 예(禮)를 관묘에 준용(準用)함이 거의 옳을 것이요, 도독의 지위(地位)는 석성(石星)·이여송(李如松) 등 여러 공(公)의 반열(班列)에 참여할 수 있으므로, 묘우를 일컬어 편액(扁額)을 거는 것은 근거할 바가 없지 않으나, 단지 선액(宣額)이라 일컬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묘(文廟)에도 우리 나라의 선현(先賢)들을 많이 종향(從享)하였는데, 봄·가을의 석전(釋奠)에 관원을 차견(差遣)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대개 그 소중함이 성묘(聖廟)에 있기 때문입니다. 2품 이상의 무신(武臣)으로 조용(調用)되었다가 졸(卒)하였을 경우, 조정에서 또한 오히려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데, 이순신의 공로(功勞)는 국조(國朝) 이래로 없던 것이었으니, 비록 사묘(祠廟)에서 거행하는 향사(享祀)라 하더라도, 해마다 두 번 관원을 보내는 것이 숭배하여 보은(報恩)하는 도리에 지나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이명 : 이순신 키왕짱!


예조(禮曹)에서 또 아뢰기를,
“경중(京中)에서는 관왕묘의 제일(祭日)을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을 쓰니, 봄·가을에 각각 이날로 설행(設行)한다는 뜻을 또한 지위(知委)하소서. 그리고 찬품(饌品)은 한결같이 선무사(宣武祠)의 규례에 의거할 것이며, 향(香)가 축문(祝文)은 경중(京中)에서 내려보냄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비록 성묘(聖廟)의 규례로 말하더라도,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따로 축문(祝文)을 고하는 일은 없었으니, 관묘(關廟)의 축문(祝文) 말단(末端)에 진 도독과 이순신을 배식(配食)한다는 뜻을 첨입(添入)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숙종실록>

예조 :ㅇㅇ 그럼 같이 하죠

숙종 : ㅇㅋ

영조 118권, 48년(1772 임진 / 청 건륭(乾隆) 37년) 2월 5일(경오) 6번째기사
예관을 보내 고 통제사 이순신에게 치제하게 하다

정조 42권, 19년(1795 을묘 / 청 건륭(乾隆) 60년) 5월 11일(신유) 2번째기사
임금이 지은 고 충신 이순신의 상충 정무비 인본을 나누어 주다


생각건대, 신라ㆍ고려 때에 왜구가 우리 서해(西海)를 여러 번 침범했고, 만력 임진년과 정유년 난리에는, 다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힘을 입어서, 왜적이 울두홍(熨斗谼)을 넘지 못했다. 만약 그때에 왜적이 이곳을 넘었더라면 나주 열두 섬이 맨 먼저 뱀과 돼지 같은 놈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경세유표 - 정약용(남인)>


계속해 정다운 편지를 받으니, 영남이 멀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겠는데, 이어 고을을 잘 다스려서 그 고장 백성들이 순종한다는 것을 살핀 데이겠는가. 즐거운 나의 마음이 어찌 사(私)를 위해서일 뿐이겠는가.
나는 금년에 노쇠가 더욱 심하여 실로 직무(職務)를 감당할 수 없네. 전임(銓任)에서는 비록 해면(解免)되었지만 시골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으니, 밤낮 근심과 두려움으로 마치 깊은 골짜기로 떨어지는 것 같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갑자기 중임을 맡았으니, 어찌 하자(瑕疵)가 없으리라고 보장하겠는가마는, 그의 지성무사(至誠無私)한 마음이라면 귀신이 보증할 수 있는데, 끝내 어찌 될는지 모르겠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비석을 세우는 일은 참으로 성대한 일이니, 그 비석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어찌 영광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응대에 바쁘고 병으로 신음하다 보니 실로 붓을 잡을 겨를이 없네. 송 동래(宋東萊 송상현(宋象賢))의 비석도 다 다듬어 놓고 기다린 지가 이미 몇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글씨를 써 주지 못하였으니, 장차 휴가를 얻어 차례로 써 드려야 할 형편이네. 그러므로 보낸 사자(使者)는 우선 돌려보내네. 그리고 정으로 주신 물건은 감사히 받았네. 이만 줄이네<동춘당집 - 송준길(서인)>

이것은 이순신(李舜臣)이니, 순신이 통제사(統制使)로서 삼도(三道)의 수군을 총괄하여 6년 동안 왜병을 방어하면서 전후에 10여 만의 군사를 격파하였습니다. 대개, 왜군이 능히 청ㆍ제(靑齊) 지방으로 건너가 직접 중원(中原)을 두드리지 못한 것은 순신이 그 길목을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담헌서 - 홍대용>

이순신이 패잔병을 수합하여 진린(陳璘)과 함께 남해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싸워 대파하자, 행장과 안돈오가 달아나니 바닷가에 주둔하였던 모든 적이 각기 후퇴하였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싸우다 죽었다.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서쪽으로 향할 뜻이 없게 한 것은 그의 힘이었다<미수기언 - 허목(남인)>

이순신 = 나라 구한 영웅이라는 생각은 붕당 상관 없이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관념이었습니다.


일제 때에도 이순신은 추앙 받았습니다. 1931년에 이광수는 동아일보에 이순신을 소재로 한 소설을 연재했으며, 1930년 동아일보에는 아래의 칼럼도 연재됐었습니다


조선을지은이들 聖雄(성웅) 李舜臣(이순신) (十九(십구))

  • 1930.11.06
  • 동아일보
  • 5면
  • 생활/문화
  • 기사(칼럼/논단)




진짜 이순신은 광복 이후에 과장 됐다는 떡밥은 정말 지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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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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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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