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인에 대한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의 설명

북인은 동인의 분열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동인 내에서 유성룡과 우성전 등을 지지하는 세력은 남인, 이발·이산해·정인홍을 지지하는 세력은 북인이 되었다. 북인으로 지칭된 것은 『당의통략』에 의하면 영수인 이발이 북악산 기슭에 거처한 데에 따른 것이며, 북인의 주요 인물인 이산해 또한 한강 이북에 있었기 때문이다. 1588년의 실록 기사에는 ‘이때에 조정에 이미 남인·북인의 설이 있어, 서인을 편파적으로 대하며 배척하는 것을 북인이라 하고 동인과 서인을 고르게 등용하는 것을 남인이라 하였다’[『선조수정실록』 21년 8월 1일]고 하여 북인이 서인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했음을 알 수가 있다. 1589년 기축옥사는 남인과 북인의 분립을 가속시켰는데, 남인은 유성룡을 중심으로, 북인은 정인홍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기축옥사에 연루된 북인으로는 이발이길정언신정언지조인후 등이 있었다.
남인과 북인 분열의 핵심 요인은 유성룡의 처신이었다[『선조실록』 32년 1월 18일『선조실록』 32년 7월 21일]. 또한 북인은 다른 당파에 비해 자체 내에서도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대북과 소북, 대북 내 골북과 육북의 분열, 소북 내의 유당(柳黨)과 남당(南黨)의 분열이 그것이다. 북인의 분열이 심하게 일어난 것은 남인의 주축을 이룬 퇴계학파에 비해,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학자들이 느슨하게 당파를 이루어 학연적인 결속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것은 북인의 핵심 인사의 면모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이산해(李山海)는 서경덕의 문인인 이지함의 조카이자 제자였으며, 정인홍(鄭仁弘)과 최영경(崔永慶)은 조식(曺植)의 핵심 제자였다. 이산해와 정인홍 외에는 대부분 이들과 혈연, 지연, 인척 관계로 연결되거나, 이들에 의해 관직에 진출한 인물이었다. 학연적으로 약한 결속력은 북인 내의 분열을 가속화시켜 대북과 소북, 대북 내의 육북과 골북의 분열, 소북 내의 청북과 탁북의 분열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북인의 중심인물을 계파별로 분류하면, 이산해 계열로는 이홍로(李弘老)이경전(李慶全)임국로(任國老)이이첨 (李爾瞻)등이, 정인홍 계열로는 문경호(文景虎)문홍도(文弘道)박여량(朴汝樑)오여은(吳汝隱) 등이, 김신국(金藎國)과 남이공(南以恭) 계열로는 박이장(朴而章)박이서(朴彛敍) 등이, 유영경계열로는 최천건(崔天健)김대래(金大來)이효원(李效元) 등이 있었다. 선조와 광해군의 척신이면서 북인으로 활약한 인물로는 기자헌(奇自獻)유영경,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이이첨정창연(鄭昌衍) 등을 들 수가 있다.


분당 초기 북인은 이이()·성혼()과 교우 관계를 가졌거나, 그 문하에 출입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영남학파 중에서도 조식()의 문하생들이 그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분파 당시의 북인은 다음과 같다. 영의정 기자헌(, 1562~1624), 이조판서 남이공(, 1565~1640), 영의정 박승종(, 1562~1623), 박여룡(, 1541~1611), 좌의정 박홍구(, 1552~1624), 이조참판 유몽인(, 1559~1623), 영의정 유영경(, 1550~1608), 병조판서 유희분(, 1564~1623), 찬성 이덕형(, 1566~1645), 부제학 이발(, 1544~1589), 영의정 이산해(, 1539~1609), 예조판서 이이첨(, 1560~1623), 수찬 정여립(, ?~1589), 영의정 정인홍(, 1535~1623), 공조참의 조목(, 1524~1606), 최영경(, 1529~1590), 참찬 허균(, 1569~1618), 병조판서 홍여순(, 1547~1609). 이들 중에서 박여룡·정여립은 이이()의 학통을, 유몽인은 성혼()의 학통을, 이발은 민순()의 학통을, 이산해는 이지함의 학통을, 정인홍·최영경은 조식()의 학통을, 조목은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동인에서 분파된 북인은 정권을 잡은 뒤, 다시 분당되었다. 즉, 1599년(선조 32) 홍여순()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자 당시 정랑으로 있었던 남이공()이 이에 반대하여 대북()과 소북()으로 다시 갈라졌다.

이산해와 홍여순이 영도하는 당을 대북이라 하였다. 기자헌()·이이첨()·정인홍()·허균()·한찬남()·이명()·이성()·백대형()·구의강()·홍식()·유몽인()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 소북은 남이공과 김신국()을 수령으로 하였다. 유영경()·유희분()·이경전()·이유효()·이효원()·박이서()·성준구() 등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대북과 소북으로 갈린 뒤, 북인의 대부분은 소북을 몰아내고 선조 말에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 정권을 굳혔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홍여순 사이에 알력이 생겨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골북()과 홍여순·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육북()으로 또다시 분파되었다. 여기에 영창대군()·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는 중북()이 탄생하였다.

유몽인을 수령으로 한 중북은 기자헌·정은·정창연()·이경전·이명·박승종() 등이 여기에 가담하였다. 한편, 대북에 밀려난 소북은 영수 격인 유영경이 영의정에 올라 한때 득세하여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죄를 대북 정인홍에게 전가해 화를 면하는 듯했다. 이후 광해군의 등극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광해군 때에 소북은 영수 격인 남이공과 유영경 사이에 틈이 벌어져 다시 분당되었다. 전자를 중심으로 한 파당을 청소북() 또는 남당()이라 하고, 후자를 중심으로 하는 당을 탁소북() 또는 유당()이라고 하였다.

선조 말에서 광해군에 이르는 시대는 여러 갈래로 분당, 대립된 대북 세력이 지배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대북의 전성기는 인조반정으로 끝나고, 소북은 일부가 서인·남인에 흡수되었다. 그리하여 인조 때는 좌의정을 역임한 바 있는 남이웅()이 그 잔존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잔여 세력도 효종·현종 때에 와서 남인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리고 경종 이후로는 남인과 운명을 같이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북인 [北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상이 북인에 대한 설명. 그렇다면 인조 반정 이후 살아남아 기용된 북인은 누가 있을까?


1. 남이웅 : 소북 계통(?). 친척인 남이공이 소북계통이니 남이웅도 소북으로 보는게 맞을듯

1623년 인조반정 뒤 오위장()·황해도관향사(使)·안악군수를 지내고, 이듬해 이괄()의 난 때 황주수성대장()으로 도원수 장만()을 도와 공을 세워 진무공신() 3등에 책록, 춘성군()으로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 뒤 소현세자()가 선양[]으로 끌려갈 때 우빈객()으로 시종하였고, 돌아와 부원군()에 봉해졌다. 1646년(인조 24) 우의정이 되어 민회빈() 강씨()의 사사()에 반대하고 사직했다가, 1648년 좌의정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이웅 [南以雄] (두산백과)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후 정인홍이이첨 등 대북의 대다수가 처형되거나 숙청당하면서 정치적으로 당파의 명맥이 끊어졌다. 그러나 대북에 비해 온건했던 소북은 김신국, 남이공 등이 인조반정 이후에도 계속 실무관료로서 활약하였다. 『당의통략』에서, ‘소북은 능히 자립할 수가 없어서 서인과 남인에게 많이 투항하여 붙었다.’고 라고 한 것이나, ‘북인은 오직 남이웅(南以雄)뿐이었는데, 일찍이 이조판서가 되어 임용 대상자를 천거하면서 서인, 남인, 북인을 나란히 등용하여 삼색도화(三色桃花)라고 이름하였다.’는 기록은 이러한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려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 심지어 이조판서 때에는 서인, 남인, 북인을 골고루 등용하여, 북인의 맥을 계속 이음


2. 남이공. 소북의 대표주자

1615년 이원익과 더불어 폐모론()을 반대하다 파직되어 평산()·해주()·송화()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1621년 풀려나와 전감군접반사(使)에 이어 체찰사 이경전()의 부사(使)가 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파직당했다.

1624년 관향사(使)로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대사간·대사헌·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627년 가도()에 주둔한 명장() 모문룡()의 접반사가 되었다. 이 때 용전()의 편리함을 깨닫고 주전()을 건의하였다. 1637년 절친한 사이인 좌의정 최명길()의 천거로 이조판서에 올랐고, 이듬해 동지경연사()를 겸했다.

1639년 다시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으나, 앞서 청나라에 인질로 보낸 왕제()와 대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보낸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1640년 죽음과 함께 복직되었다. 권모술수에 능하고 담론을 좋아했다. 저서로는 ≪설사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이공 [南以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2품 판서직까지 해봄. 


3. 김신국. 소북의 대표 주자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때의 훈작( : 공훈으로 얻은 관작)을 삭탈당했으나 그 뒤 다시 평안도관찰사로 기용되었다. 이 때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이에 대비해 평양성의 수축과 군량의 비축 등에 힘썼다. 이듬해 이괄()의 난에 연좌되어 국문()까지 당했으나 혐의가 없어 무사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호조판서로 이정구()와 함께 금나라의 사신과 화약을 맺었다. 공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듬 해 세자시강원의 이사()가 되어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를 배종해 심양()에 갔다가 1640년에 귀국해 기로소에 들어갔다. 1646년에는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신국 [金藎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호조,공조,형조 등 여러 곳에서 활약. 맡았던 실권직 중 가장 높은 자리는 정2품 판서직이며, 명예직까지 하면 정1품 영중추부사.


4. 이경전. 이산해의 아들인데 소북으로 분류되네요....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서인들에게 아첨하여 생명을 보전하고 주청사(使)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책봉을 요청하였다.

이어 한평부원군()에 진봉되고, 1637년에 장유()·이경석() 등과 함께 삼전도()의 비문 작성의 명을 받았으나 병을 빙자하고 거절하였으며, 1640년 형조판서를 지냈다. 문필이 뛰어나 이름이 높았으며 저서로는 『석루유고』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경전 [李慶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직이지만 정1품 부원군에 오르고, 실권직으로는 정2품 판서까지 해봄


5. 김세렴. 정확히 어떤 계열인지는 모르겠는데, 폐모론에 반대한 걸 보면 소북 또는 중북 계열인듯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수찬·헌납()·교리()를 거쳐, 이듬해 수의어사()로 충청도를 살폈으며, 지평()·교리·부응교()를 역임하였다.

집의()로 있을 때 공신 이귀()가 이조판서로 자천()하는 방자함을 왕에게 아뢰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1634년 현풍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636년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할 때 부사로 선발되어 다녀온 뒤, 사간을 거쳐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638년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지와 병조·형조·이조참의,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641년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원해 안변도호부사·황해도관찰사를 지내면서, 『근사』·『소학』·『성리자의()』·『독서록()』 등을 간행하고 향약을 실시하는 등 도민의 교화에 힘썼다. 1644년 평안도관찰사로 옮겼다가 대사헌으로 조정에 들어가 홍문관제학을 겸임했고, 바로 도승지를 거쳐 호조판서로 군현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세렴 [金世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2품 판서까지 찍어봄



6. 심열. 정확한 계열은 모르겠음


1623년 인조반정 이후 호조판서에 오르고 1638년(인조 16) 염철사(使)로서 선양[]에 건너가 물물교환을 하였으며, 같은 해 우의정을 거쳐 1643년 좌의정이 되고, 이어서 영의정에 올랐다.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심열 [沈悅] (두산백과)



무려 삼정승을 다 해봄.


7. 정온. 중북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석방되어 헌납에 등용되었다. 이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경상도관찰사·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였다. 결국 청나라에 굴복하는 화의가 이루어지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경남 거창군 북상면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죽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온 [鄭蘊] (두산백과)


종2품 이조참판까지 찍어봄


8. 정창연. 중북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차 좌의정이 되고 기로소()에 들어가 궤장()을 하사받았다. 광해군의 비() 유씨()가 생질녀였으므로 광해군 때 억울하게 옥사()에 관련된 자의 구명을 도와주어 신망을 얻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창연 [鄭昌衍] (두산백과)

정창연(鄭昌衍)을 영중추부사로, 이정구를 판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 예조 판서로, 조성립(趙誠立)을 전한으로, 임숙영(任叔英)을 홍문관 수찬으로, 박정(朴炡)을 홍문관 정자로, 이경석(李景奭)을 검열로 삼고, 남원 부사 정온에게 통정(通政)의 자급을 올려주었다.<인조실록>

좌의정, 영중추부사 등 정1품까지 찍어봄



9. 이명. 중북

이듬해 1623년 인조반정 후 전라도관찰사에 특진되었으며, 이듬해 이괄()의 난 때에 인조의 공주몽진을 도왔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경기도관찰사로서 전란수습에 공을 세웠고, 그 뒤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국경방비를 강화하였다.

그 뒤 여러 곳의 관찰사를 거쳐 호조·병조·형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뒤에는 다시 호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전란 후 고갈된 재정을 잘 수습하였다. 말년에는 지중추부사로 전의제조(調)를 겸임하였으며,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명 [李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2품 판서 및 지중추부사까지 찍어봄


참고로 북인 계열 인물들 중 남인에 흡수되어 활약한 인물로는 사문난적(...)으로 유명한 윤휴(아버지 윤효전이 서경덕의 학풍을 이었으며, 중북 계통인 정구에게 사사 받음)와 허목이 있습니다.

특히 서경덕을 존숭하여 서경덕()의 문집인 《화담집()》의 간행에 참여했으며, “서경덕의 저술 1권은 다른 학의 10권의 책에 비길 만하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의 당색()은 북인임에는 틀림없으나, 《숙종실록》에서는 대북()으로는 윤휴의 문집인 《백전서()》에는 소북()으로 파악하여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그가 광해군 초기에는 유희분()의 사주를 받아 임해군의 처단을 주장하는 등 소북의 정치노선을 따랐으나, 1618년(광해군 10)경 이후로는 이이첨()의 대북 세력에 가담하였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효전 [尹孝全] (두산백과)

허목의 가계는 소북()계로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대 북인 정권이 몰락하자 남인에 편입된 근기남인()이다. 동인에서 퇴계학파의 남인과 갈라진 북인은 남명 조식( , 1501~1572년)계와 화담 서경덕( , 1489~1546년)계의 연합체로서 비순수 성리학적 학풍을 갖고 있었다. 허목은 화담학에 연원을 둔 가학()과 외조인 백호 임제( , 1549~1587년)의 은자()적 처세의 영향을 받아 초야에 묻혀서 성리학뿐 아니라 도가() 사상 등 다양한 학문적 편력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수 허목 [眉叟 許穆] - 육경학에서 실학의 근거를 제시한 도덕주의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2002. 12. 10., 현암사)


이렇듯 북인(중북, 소북 계열)은 분명 인조 반정 이후에도 관료로써 능력 및 지위를 인정 받아 고위직에 계속 포진됩니다. 물론 효종 이후로는 완전히 남인 등에 흡수되어 독립된 붕당으로 존재하지는 못 하지만, 이는 북인에 대한 정치적 탄압의 결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북인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북인은 타 붕당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위에서 이미 언급되었듯이, 북인은 서인이나 남인과는 달리 학맥으로 끈끈히 연결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황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이, 성혼에게 사사 받은 인물들까지 있었으니;; 게다가 심열은 아버지가 무려 서인을 탄생시킨 심의겸이죠 ㄷㄷ 북인은 정치적 환경(서인에 대한 처벌) 때문에 탄생하였기 때문에, 단기간에 걸쳐 사분오열이 되어 이황으로 비교적 똘똘 뭉칭 남인이나 뒤늦게 이이, 성혼 등을 받아들인 서인에 비하면 이합집산이었습니다. 따라서 북인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있을 때에는 권력을 통해 어떻게든 집단을 유지했지만, 권력에서 밀려나 야당 신세가 되었을 땐 북인이라는 집단은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웠습니다. 

혹자는 '그렇다면 인조 반정 때문에 북인이 주도권을 놓쳤으니, 탄압 받은게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 있는데, 이미 언급한 것처럼 북인은 권력을 잃었지만 여전히 전문 관료로써 정국에 계속 참여했으며, 야당 생활한 기간은 남인이 훨씬 깁니다(....) 북인은 그래도 광해군 15년 동안 헤게모니라도 잡았지, 남인은 예송논쟁 때 잡은 권력이 10년도 못 가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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