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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5세(1413 ~ 1422)


 1413년 왕위에 오른 헨리 5세는 25세의 위풍당당한 청년으로, 한때 아버지를 실망시켰던 거친 행동을 끝내고 심기를 바로 잡아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데 성공했으며, 주어진 의무를 충실하고 재간 있게 수행함으로써 탁월한 지도력을 과시했다. 그는 정력적이고 용기 있는 군인 왕이었는데, 중세의 군주로서는 이상적인 태도였다. 넘치는 야망을 가진 헨리는 자신에게 프랑스를 정복할 특별한 의무와 재능이 있으며, 이것은 신이 자신에게 내려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에 대한 십자군 원정에 나서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헨리의 호기 넘치는 태도는 온실 속 화초의 재잘거림은 아니었다. 그는 글린두어에 대한 전쟁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왕위에 올랐을 당시에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10년 이상의 군 지휘 경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에드워드 3세와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공동의 적에 대해 국력을 결집함으로써 잉글랜드를 통합할 수 있으며, 그때 비로소 잉글랜드 왕으로서의 영광과 명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헨리가 최대의 적국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다시 시작하자고 외쳤을 때, 영주들과 심지어 주교들까지도 전쟁의 개시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다. 왕국의 거의 모든 신민들은 젊은 왕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그가 벌일 기사왕의 영광스러울 전쟁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헨리는 오직 '프랑스의 정복' 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신의 치세 전부를 바쳤다.


 헨리의 호언장담처럼 하늘은 그를 돕고 있는 듯 했다. 1360년 무렵 되살아나기 시작했던 프랑스의 군사력은 이 즈음 다시 약화되었으며, 심지어 아주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할 샤를 6세는 정신병자 였을 뿐더러, 왕실은 두 당파로 갈려 심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당파의 우두머리는 부르고뉴의 무겁공(無怯公) 장(Jean sans peur)이었고 다른 당파는 왕의 아우 오를레앙 공을 따르는 무리였는데, 1407년 오를레앙 공이 부르고뉴파에게 살해되어 양 파의 더욱 격렬해 졌다.


 이러한 프랑스의 분쟁에 대해, 헨리 4세는 오를레앙파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으나 헨리 5세는 부르고뉴파에 지지를 보내었다. 헨리는 부르고뉴 파와 동맹을 확보했고, 귀족과 주교들의 지지를 받아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전쟁 준비에 전념했다. 하지만 야망에 불타면서도 주도면밀함을 잃지는 않았는데, 전쟁 준비를 은폐하기 위하여 아르마냑파(Armagnac), 즉 1407년 이후의 오를레앙파와 공개적인 협상을 벌였던 것이다. 


 이러한 협상은 어디까지나 눈가림과 명분을 확보하는 차원이었을 뿐이다. 1414년 8월 파리에 파견된 영국 왕의 사절은 '무엄하게도' 헨리와 샤를 6세의 딸 카트린(Catherine)의 결혼과 노르망디, 투렌, 멘, 앙주, 브르타뉴, 플랑드르, 그리고 아키텐 전체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요구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고려' 를 해보는것만으로도 프랑스 측 입장에서는 모욕이 될 만한 조건들이었으니, 프랑스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가스코뉴의 양도, 공주와의 결혼, 그리고 거액의 보상금 지불 등을 제시하며 적절히 영국을 달래려고 하였다. 하지만 헨리는 이미 마음을 굳힌 후 였기에, 1415년 6월 다시 유사한 요구를 내걸고 만일 프랑스가 이를 거부하면 무력으로 프랑스의 왕관을 차지할 것이라 호헌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협박이었다. 프랑스는 요구 조건을 거절했고, 이에 헨리는 사우스햄턴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왕의 야망과 놀라울 정도로 과감성에 민족주의적 감성이 싹 트고 있던 영국의 신민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열광을 보여주었다. 헨리의 야심은 영국인들의 기대를 충족시켰으며, 대영주들과 기사들은 이에 동참할 수 있다는 열정에 들떠 대규모 군대에 일부가 되는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왕국의 신민들은 전쟁을 위한 세금의 부과를 자주, 그리고 결코 인색하지 않는 규모로 찬성했으며, 왕은 지지를 얻기 위해 그가 이루어내려는 목표를 드러내놓고 설명 할 수 있었다. 해군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심지어 해협을 통제하기 위한 해군까지 건설할 수 있었고, 1420년 무렵에야 하원에서 프랑스 정복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지만, 이러한 열정은 헨리가 죽을 때까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1)


 말하자면 헨리 5세는 사랑받는 군주였다. 그것도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의회가 괴세를 너그럽게 인정해 준 것은 헨리가 전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헨리는 유력 인사들의 '진심 어린' 지지와 통일 국가의 지원을 얻어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대적해야 할 프랑스의 상황은 실로 애처러울 정도였다. 샤를 6세는 1392년 열병을 앓아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는데, 이때를 시작으로 평생에 걸쳐 44번의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3개월에서 5개월 간격으로 발작을 일으켰으며, 한번 증세를 보이면 3개월에서 심지어 9개월 동안 증상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2) 


 이러한 상황이니 왕국은 지도력 따위를 찾아 볼 수도 없어졌고, 권력을 잡기 위한 종친 귀족들의 경쟁으로 나라는 내란 상태였다. 헨리는 이러한 프랑스의  상황을 주시하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의 야망이 실로 어마어마했다는 것은 그가 프랑스 북부의 대도시와 요새들을 조직적으로 정복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보여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헨리는 정복한 지역들을 잉글랜드의 수비본부로 하고 그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주변의 시골 지방을 정복할 대전략을 짜놓아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행정관과 세금 징수관이 병사들을 뒤따라 점령지에 들어가 전쟁 비용을 자체 조달한다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였다. 계획에서 보여지듯, 헨리는 그저 치기 어린 '불장난' 을 목표로 하고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 있었다. *3)


Schlacht von Azincourt



 1415년 8월, 마침내 헨리는 2,000여명의 중기병과 6,000여명의 궁병, 그리고 공성 포병대를 이끌고 사우스햄턴을 출항하였다. 센 강 어귀를 통해 프랑스에 침입한 헨리 5세는 9월 경 치열한 포위전 끝에 아르플뢰르(Harfleur) 항을 점령함으로써 노르망디에 하나의 거점을 마련 하는데 성공하였다. 오랜 포위 공격으로 병사들은 상당히 지친 편이었지만, 노련한 군사 지휘관인 헨리는 기세를 몰아 노르망디 동부와 퐁티외, 피카르디 서부 지방을 거쳐 칼레로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영국군보다 최소 두배, 혹 다섯 배가 더 많았으며, 우월한 기병을 거느렸던 프랑스군은 칼레 남쪽의 아쟁쿠르(Agincourt)에서 잉글랜드 군의 길을 가로막았다. 병력의 압도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그들은 사기가 드높았으며, 반면 영국군은 오랜 공성전과 쉴 틈 없는 기동으로 피로에 지쳐 있었던 상태였다. 이러한 양 측의 전력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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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지역은 울창한 산림으로 뒤덮여 있는 너비 900미터 정도의 움푹 들어간 들판이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숫자의 우위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0월 26일, 프랑스의 중무장한 기사들은 운명적인 전진을 시작하였다.


 그들의 돌진에 맞서 영국군은 세심하게 궁병들을 배치했고, 그 앞에 뾰족하게 깎은 장대를 꽂아 돌진하는 말들을 놀라게 함으로써 프랑스 기병들을 물리쳤다. 지난 날 크레시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안겨주었던 잉글랜드군의 장궁 부대에 선두의 프랑스 군이 무참하게 당하고 있을때, 중무장한 프랑스 보병들은 영국군의 보병들과 맞서기 위해 진흙탕 속으로 밀고 들어 들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진흙탕에서는 오히려 가볍게 무장하게 기동력을 발휘하는 잉글랜드의 보병들이 앞서고 있었다. 그들은 칼과 도끼로 적 보병들을 격퇴했고, 이때 영국군의 궁병들은 완전히 흐트러진 프랑스 군의 대열을 돌파해 뚫고 들어가 적을 섬멸하기도 했다. 궁병대가 적진을 돌파하는 상황이니, 이미 이 시점에서 전투는 완전히 종결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이 전투에서 압도적 우세의 전력을 가진 프랑스 군은 무려 5,000여명이 전사하였고, 게중에는 공작 3명, 백작 3명, 남작 90여명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밖에 1,0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절대적 열세였던 영국군은 오히려 전사자가 300명이 채 못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승리는 우수한 규율 및 조직의 덕택이었다.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는 영국의 전통적인 전술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놀라울 정도로' 뚜렷하게 입증해주었으며, *3) 거대한 유럽에서 변방 잉글랜드의 위신을 깊게 각인시켰다. 


 전쟁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왕에게 지지를 보내던 영국인들은, 경이적인 승리 이후 자신들의 왕을 영광스러운 영웅으로 인정하였다. *4) 헨리 5세와, 아쟁쿠르 전투의 그 날에 대한 기억은 그 후에도 영국인들에게 가슴 깊이 남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나오게 된 헨리 5세의 대사는, 그 날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일종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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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의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해질 것이다.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성 크리스핀의 날,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니,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오늘부터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 우리는 이 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우리들,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기에 행복한 우리들,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들은 모두 한 형제이니라.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그들은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오늘부로 그 신분 귀족이 될 것이고,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지금 영국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여기 있지 못했던 것,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며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그들은 자신의 용기를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다.』
 



 1417년 헨리는 다시 프랑스에 침입하여 캉, 바이외, 팔레즈, 셰르부르 등 노르망디의 도시들을 파죽지세로 공략했고, 마침내 노르망디의 수도 루앙을 점령했다. 지칠 줄 모르는 군주는 여세를 몰아 일 - 드 - 프랑스까지 위협했다. 헨리의 성공이 너무나 압도적이었기에 프랑스의 두 당파는 한때 서로 타협을 모색하였으나, 1419년 프랑스 왕세자의 추종자가 부르고뉴 공을 살해하자 새 부르고뉴의 필리프 선량공(Philippe le Bon)은 복수를 맹세하고 헨리와 동맹하여 1420년 정신병이 재발한 왕을 종용, 트르와 조약(Treaty of Troyes)을 맺게 하였다. 이 조약으로 헨리는 샤를 6세의 사후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기로 했으며, 샤를의 딸 카트린과 결혼하여 그때까지는 섭정으로 있기로 하였다. 


 결혼 후 카트린은 장차 헨리 6세(Henry VI of England)가 될 아이를 낳았다. 이렇게 하여 왕세자 샤를, 즉 훗날의 샤를 7세(Charles VII)는 왕위계승권을 박탈 당하였지만, 남부 프랑스는 여전히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조약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1421년 헨리의 동생인 클래런스 공 토머스가 보제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하여 살해되자, 헨리는 또다시 프랑스로 침입하여 드뢰를 점령하였으며, 르와르 강 이북의 프랑스 땅 전체가 그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그러나 위대함의 절정에 오르는 듯 했던 헨리 5세는 모(Meaux) 시에 대한 포위 공격 도중 건강을 돌보지 않고 무리 했던 탓으로 이질에 걸렸고, 1422년 고작 35세의 나이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왕의 치세는 고작 9년이었으나, 그 9년은 변방 잉글랜드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유능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권위주의적인 그는, 심지어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에 있는 동안에도 통치력이 확고한 활기에 넘쳐 있었으며, 그의 지도력 아래에서 랭커스터 왕조와 영국은 최대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왕의 사후 수십년은 그토록 치솟았던 잉글랜드 왕의 권력과 위엄이 최저로 떨어진 시기였다. 




*1) 옥스퍼드 영국사 pp. 236 ~ 237

*2) 김현수 이야기 영국사 pp. 186

*2) Ibid pp. 187

*3) 옥스퍼드 영국사 pp. 237

*4) 나종일, 영국의 역사 pp.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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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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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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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

2013.09.12
02:09:29
(*.148.42.15)
아아 그 유명한 아쟁쿠르 전투가 여기 등장하는군요.

얍얍

2013.09.13
14:35:09
(*.162.206.40)
항상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다음도 기대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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