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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여, 혁명은 이제 그것이 시작된 본질 위에 확립되었고, 이로써 혁명은 완수되었다." (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혁명력 제 8년 헌법 공포 후 


"우리는 이제 프랑스 대혁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대혁명을 이룩한 사람들을 구하려 생각하는 지점까지 와 있다." (2)
스탈 부인 




브뤼메르18일


 1799년 11월 9, 10일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1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總裁政府)를 뒤엎고 독재체제를 구축한 사건. 


 1795년 이래 프랑스 총재정부는 정권을 장악하면서 이른바 산악파(山岳派) 소시민(小市民)과 왕당파로부터 협공을 받고, 전쟁 수행도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원정(遠征)한 사이 오스트리아에 많은 영토를 빼앗겼으며, 은행가 ·상업자본가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하는 등 불안정 속에 정권을 유지하였다. 프랑스혁명의 노웅(老雄)이라 할 시에예스 등이 이러한 총재정부를 전복할 계획을 진행하다가, 1799년 가을 나폴레옹이 단신(單身)으로 이집트에서 귀국한 것을 계기로 탈레랑, 뤼시앙, 보나파르트 등도 가세하여 구체화되었다.


 11월 9일(혁명력 8년 브뤼메르 18일) 나폴레옹은 그를 따르기로 맹약한 장군들과 함께 군대를 모아 파리의 요소에 배치하고, 테러리스트들의 봉기(蜂起)를 구실로 자신이 파리군 총사령관직을 맡도록 강요하여 오백인회(五百人會)와 원로원을 파리 교외의 생클루로 이전시켰다. 이어 총재정부의 고이에, 무랑, 바라스 등을 감금하거나 강제로 사퇴시켜 정부의 기능을 탈취하고, 10일에는 군대를 이끌고 생클루로 가서 오백인회마저 해산시켰다.


 또한, 그날 밤에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총재정부의 해체를 정식으로 승인하게 하고, 임시 통령정부(統領政府)를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나폴레옹 ·시에예스 ·뒤코스 등 3명이 임시통령에 선출되었다. 이로써 군인 나폴레옹은 정계(政界)에 첫발을 딛게 되고, 얼마 후 그는 제1통령에서 종신통령이 되어, 1804년 황제에 즉위하였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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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메르 18일 이전


나폴레옹의 실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를 지배하게 된 원인을 알고 싶다면, 보나파르트가 정권을 잡을 당시 프랑스가 처해 있던 상황에 조금만 눈을 돌리면 된다." by 샵탈 (3)


 툴룽 포위전(Siege of Toulon)과 방데미에르 13일 쿠데타의 시위대 진압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후 이탈리아 원정에서 경이적인 무훈을 세우며 전유럽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너무나 거대해진 그 명성은 프랑스 총재정부(Directoire)에 있어 위협이 되었고, 보나파르트 역시 단순한 군사적 성공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위인은 아니었다. 이러한 총재정부의 견제심리와, 나폴레옹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동양에 대한 동경, 정복 의지가 겹치며 그는 원정군을 이끌고 머나먼 이집트 - 시리아로 떠나게 된다.


 이 원정의 1차적 목적은 이집트를 점령하고 레반트(levant)에 이르러 프랑스의 무역을 보호하고 영국을 견제하는 것이었으나, 나폴레옹 본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아크레를 손아귀에 넣고, 자신의 병사들에게 터번을 두르고 터키식 바지를 입게 하며, 그들을 자신의 '성스러운 불사대' 로 삼아 '이수스 전투' 에서 대승하고, 동방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파리로 귀환" (4) 한다거나, 아니면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여 강화를 하고, 사파비 왕조 이란의 지지를 얻고, 인더스 강에 군세를 전개하여 영국을 인도에서 몰아내" (5) 버린다는, 세계의 운명을 바꿀 정도의 엄청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웅대한 계획은 1798년 8월 2일 나일강 해전(Battle of the Nile)에서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브뤼예스(Brueys) 제독의 함대를 아부키르 만(Aboukir Bay)에서 모조리 격파함으로써 제대로 실천도 하기 전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후 보나파르트는 이집트에 고립된 상태에서 피라미드 전투(Battle of the Pyramids) 등을 승리로 이끌고 각지를 평정,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며 경이적인 성공을 거듭했으나 대세를 바꿀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고, 아크레(Acre)에서 막히며 더 이상의 진격은 불가능해졌다. 군대의 힘도 부족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인 페스트 때문에 도저히 전투를 치룰 수 없었던 것이다.


 실패 끝에 프랑스 군이 카이로로 돌아왔을 때, 그 군대는 거의 절반 가량 줄어들어 있었다. 여기에 1779년 7월 5일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해상을 통해 아부키르 만에 접어들어 이 부대와 교전을 치루어야 했다. 나폴레옹은 이 아부키르 전투(Battle of Abukir)에서 두 배의 적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은 이미 실패로 돌아간 이집트 - 시리아 원정을 바꿀 힘은 없었지만, 보나파르트 개인의 위신을 다시 세우기에는  적절한 승리였다.


 아부키르의 승리 이후 이루어진 8월 2일 영국 - 오스만 연합군에 대한 포로교환 협정에서, 영국의 시드니 스미스(Sidney Smith)는 1799년 6월 10일자 『프랑크푸르트 가제트』와 『런던 통신』 신문을 보나파르트에게 전해주었다. 1년 이상 총재정부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얻지 못하던 나폴레옹은 이때서야 마침내 프랑스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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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를 넘는 수보로프 장군



프랑스의 혼란



 당시 프랑스의 행정부는 5명의 총재로 구성되어 있었고, 입법부는 원로원과 500인 의회의 양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구성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격렬했던 이전 의회에 속해 있던 의원들이었다. 그러나 1795년 이후 왕당파와 자코뱅파의 당원들은 헌법을 보호막으로 삼아 반정부 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정부는 우익이든 좌익이든 조금이라도 힘을 발휘하려고 하면 즉각 강경적인 대책으로 일관하여 1797년과 1798년에 걸쳐 대규모 숙청을 벌였고, 그러는 사이 생긴 국민들의 정치 환멸 기류를 감지하여 1795년의 헌법을 철회한 후 '프랑스 혁명 정신' 으로 되돌아가자는 정치인들과 1795년의 헌법을 수호하려는 일파 등 온갖 정치적 세력이 대립하여 분란이 지속되고 있었다.


 또한 방데 지역의 반란은 도무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영국의 아부키르 만 전투의 승리와 프랑스의 졸속 외교가 겹치며 3개의 전선이 발발하여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를 압박하고 있었다. 적군은 라인 강과 이탈리아를 차지했고 러시아의 명장 알렉산드르 수보로프(Aleksandr Suvorov) 장군은 신출귀몰한 전략을 발휘하여 장 빅토르 마라 모로(Jean Victor Moreau), 자크 마크도날(Jacques MacDonald) 등을 연거푸 패배시켰다. 모로는 이에 혀를 내두르며 수보로프에 대해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당신은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불굴의 지휘관이자, 자신을 포함한 휘하의 부대 전원이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퇴각하지 않게 만드는 장군을 뭐라고 부를 수 있겠소?" (6)  


 또한 오스트리아의 젊은 영걸 카를 대공(Erzherzog Karl)은 1차 취리히 전투에서 앙드레 마세나(Andre Massena)를 패배시키기도 했으며, 쇼토크아흐에서 장 바티스트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 역시 카를 대공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마세나는 2차 취리히 전투에서 승리했고,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 사이의 반목과 오스트리아의 비협조 때문에 수보로프가 물러나기는 했으나 전선의 압박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여기에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 부패와 향락, 치안의 부재 등이 겹치며 당시의 프랑스는 나락과도 같은 형국이었다. 물론 당시의 프랑스 체제가 무너지고 이후 시작된 통령정부 시대의 군사적 영광과 나폴레옹의 신화 때문에 많은 역사가들은 총재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이에 대비하여 과장하여 나폴레옹의 '독재' 에 정당성을 주는 용도로 사용하는 면이 있으며, 1797년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Coup of 18 fructidor)에서 추방된 카르노, 뢰벨, 메를랭, 프랑수아 드 뇌프샤토 등의 인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그러나 체제가 이미 기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1799년, 이런 혼란의 와중에 시에예스, 고이에, 물랭 장군, 그리고 뒤코가 새로 총재정부에 들어왔다. 허나 시에예스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시에예스는 혁명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삼부회와 1789년 국민회의의 지도적 일원이었고, 현명하게 은거하여 로베스피에르 공포정치 시대를 지나서도 살아남았다.


 총재정부의 문제점은 재정적 취약성이었다. 그들은 국민공회로부터 어마어마한 빚과 인플레이션을 물려받았는데, 혁명시 지폐 아시냐는 1797년 그 가치가 1%로 하락했다. 총재정부는 국민공회 때 발생한 채무와 아시냐 지폐에 대한 지불을 모두  거부하고 화폐를 경화로 바꾸어 난국을 돌파하는 계기를 만들기는 했으나, 교회와 망명귀족들의 토지를 국유화애 이를 담보로 발행한 새 정부채권은 가치가 하락했다. 적자는 더욱 심해져 1799년에 이르면 4억 프랑에 이르고 있었다.


 빚이 이렇게 많아지다 보니, 끝없이 예산을 소모하는 군대의 상황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1793년의 암흑기에도 이보다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 여파가 남아 있던 1800년 1월 11일, 라인 및 스위스 파견군 사령관 모로 장군은 보고서에 이렇게 기술하였다.


 "병사들의 궁핍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그들의 반항을 억누르면서도, 그들의 반항도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치안을 유지해야 할 형사, 경찰 간부 모두 급료가 지급되지 않아 생활조차 힘겨웠으므로 경찰관의 사기 역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엉망인 상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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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베르


나폴레옹의 귀환


 이집트에 고립되어 있던 보나파르트는 이러한 사태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게 되자 곧바로 귀환을 준비하였다. 이미 이집트에서 그가 얻을 수 있는것은 사막의 모래 외엔 아무것도 없었으며,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자신이 과거에 이룩한 군사적 업적이 모두 상실될 판이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주둔 프랑스 군의 후임 사령관으로 클레베르(Jean Baptist Kleber)를 임명하고는, 그와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극비리에 프리깃함 2척과 소형선박 2척을 준비하여 8월 24일, 베르티에와 뒤로크, 외젠 드 오바르네와 학자 몽주, 베르톨레, 그리고 장 란, 마르몽, 뮈라 등을 데리고 이집트를 떠났다.


 보나파르트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서면으로 이집트 통치 지휘권을 넘겨준다는 원서를 받은 클레베르는 '보나파르트가 임무를 저버리고, 군대를 이집트 사막에 던져 놓고 도망' 쳤다고 여기며 극도로 분노하였다. 클레베르는 드제(Louis Charles Antoine Desaix)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투덜거렸다.


 "보나파르트가 이미 오랫동안 이 나라를 출세의 희생양으로 삼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소. 그 작자는 평소에 도망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고, 항복이라는 파국을 면하기 위해 달아난 것이오." (8)
   
 
 클레베르 뿐만 아니라, 뒤가 사단장은 폴 바라스(Paul Barras) 총재에게 불만을 호소하기도 했다.


 "시민 총재 각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보나파르트 장군이 돈도 화약도 탄약도 없는 상태에서 맨주먹의 병사들만 남겨놓고 우리를 버리고 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9)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집트에 버려두고 자신만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는 비겁한 행위에 가깝기는 하나, 사실 다른 방법도 없었다. 넬슨의 함대가 아부키르 만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이후 지구상의 서쪽에 알려진 거의 모든 바다는 영국 함대의 손아귀에 있었고, 출항을 비밀로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를 돌파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영국의 시드니 스미스가 잠시 키프로스 섬으로 보급을 위해 떠난 그 시기를 놓친다면 더 좋은 탈주 기회는 찾을 수도 없었다. 여하간 남은 이집트 원정군은 철저히 고립되었고, 헤리오폴리스 전투(Battle of Heliopolis)에서 승리하는 등 악전고투를 거듭했으나 클레베르가 이슬람 교도에게 암살당한 후 오스만 제국에 항복하였다.


 만일 보나파르트가 프랑스로 가던 도중 영국 순양함을 만났다면 그의 운명은 바로 끝장이 나게 되었지만, 보나파르트는 탁월한 행운의 덕택으로 안전하게 코르시카에 도달했다. 본래대로라면 이집트 방면에서 오는 배는 '검역 기간' 을 거쳐 패스트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 입증되어야만 했지만, 사람들이 나폴레옹에게 열광하여 그를 맞이했기 때문에 이는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잠시 코르시카에 머물며 역풍을 피하던 그는 배를 타고 나갈 수 있는 상황이 되자 곧바로 바다로 나가 프랑스에 도착하였다. 


 보나파르트가 프로방스에서 파리로 이르는 길은 열광과 환호의 도가니였다. 그가 지나는 곳 어디에서는 사람들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폴레옹이 아비뇽에 도착했을 때 민중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내며 저녁에 거처할 팔레나시오날 호텔까지 따라왔으며, 발랑스와 리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도시에 가나 시청 관리들은 인사를 왔고,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도 보나파르트의 귀국 소식은 대단한 뉴스거리였다. 어떤 인물은 자신의 아버지가 페리귀외에서 돌아와 보나파르트 장군의 귀국 소식을 알리자 사람들이 나타낸 반응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방에서 더할 수 없는 기쁨의 환호가 넘쳐났다. 농민들은 모두 집 밖으로 나와 흥분해서 서로 손을 맞잡았고, 교회의 종을 올리고 기쁨의 불을 지폈다." (10)    


 그만큼 당시의 나폴레옹은 어디에서든 프랑스인들의 존경과 경의를 받았다. 불라르 장군의 말에 따르자면, "이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는 프랑스를 구원할 영웅으로 보였다." (11) 그런면에서 볼때, 보나파르트가 거둔 1779년 7월 5일의 아부키르 전투 승리는 훗날의 아우스터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나 프리트란트 전투(Battle of Friedland) 못지 않은 의미가 있다. 이 승리는 원정군이 시리아 전역에서 겪였던 음울한 기억을 모두 날려버렸고, 패배를 거듭하던 프랑스 국민에게 있어 튀르크를 물리친 나폴레옹의 성과는 대단한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요컨데 승리자로서의 인상을 각인시켰다는 측면이 중요했다. 프랑스 국민에게 보나파르트는 아직도 '캄포 포르미오 조약(Treaty of Campo Formio)의 사나이' 이자 '승리와 평화' 를 의미하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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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랑 페리고르



정치 게임 


쿠데타를 계획하다



 프랑스 군대를 이집트라는 늪 속에 밀어 넣고 홀로 돌아온 보나파르트의 행위는 엄밀히 말하자면 부임지 이탈죄로, 군법으로 처벌 할 수도 있는 중대한 범죄행위였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귀환을 허가한 정부의 9월 서한에는 '이집트 주둔 프랑스 군대와 함께' 
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당시 전쟁장관이었던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Jean-Baptiste Barnadotte)는 보나파르트를 '페스트 검열 규정 방임 및 회피' 라는 혐의로 체포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총재들은 보나파르트의 인기를 두려워 해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파리에 돌아온 나폴레옹은 처음 며칠은 국내 정세의 파악해 집중하며 사태 파악에 주력,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부재 중인 동안 외도를 한 부인, 조제핀(Josphine de Beauharnais)과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었던 것이다. 조제핀의 사과와 그녀의 자식인 외젠 등의 설득, 한참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 시기에 이혼으로 평판을 더럽힐 수 없다는 정치적 이유 등이 겹쳐 그녀를 용서하기로 결정한 보나파르트는 본격적으로 정치 전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마르몽(Marmont)의 말에 따르자면 당시 눈치 빠른 사람들은 '그가 군을 지휘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정치를 움직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 틀림없다.' (12) 고 여겼다.  


 이에 보나파르트에게 도움을 받거나 혹은 그를 조종해 이득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접근해오기 시작했고, 이는 나폴레옹 스스로도 바라는 바였다. 가장 먼저 얼굴을 들이맨 사람은 나폴레옹과 연줄이 닿아 있던 정치인 탈레랑과 애콜 상트랄의 경제학 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인 피에르 루리 뢰드레르 등이었다. 자연스레 나폴레옹은 그들과 더불어 정권 진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폴레옹은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는지 물었다. 뢰드레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겠지요. 왜냐하면 4분의 3은 이미 다 이루어진 일이니 말입니다." (13)    


 보나파르트는 섣불리 행동하여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노력하며 파리에서 3주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는 거의 외출도 하지 않았고, 초대도 될 수 있으면 거절하고 있었다. 무례한 질문이나, 도저히 응할 수 없는 제의를 받거나, 여하간 문제거리가 될 모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폴레옹은 그렇게 몸을 사리며 정계의 상황을 주시하였다. 처음에는 5명의 총재 중 한 사람이 될 가능성도 열어놓았으나, 40세 이상이라는 나이 제한은 폐지될 기미가 없었다. 


 당시 정계는 크게 세 가지 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째는 주르당 장군을 위시로 한 자코뱅 파로 500인 회의의 다수파와 원로원 회의의 정력적인 소수파를 포용하고 있었다. 베르나도트 장군, 오주로 등과 총재 중 고이에와 물랭도 이쪽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또다른 세력은 소위 '중도파' 로 시예에스가 대표적이었다. 그 외에 나폴레옹과 과거에 관계가 깊었던 폴 바라스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패하고 멸시받고, 소외당하고 있었기에 보나파르트 역시 그와 손을 잡는 일은 고려하지 않았다. 


 이 중에 가장 적극적으로 보나파르트와 손을 잡을 의사가 있는 인물은 바로 시에예스였다. 시에예스는 자코뱅파들은 프랑스 발전에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한다고 여겼고, 헌법 개정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강력한 정부를 만들어 혼란을 수습할 요량으로 의회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 자신의 칼이 될 강력한 장군을 필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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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단 왼쪽부터 순서대로 베르나도트, 주베르, 모로, 주르당, 보나파르트 



 당시 가장 명성을 떨치던 장군들 중 당초에 시에예스가 가장 염두에 두고 있던 장군은 바로 주베르 장군이었다. 그러나 주베르 장군은 노비 전투(Battle of Novi)에서 수보로프라는 강력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다른 대안으로 모로 장군이 있었으나, 나서길 싫어하고 군인으로서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소신을 가진 모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자코뱅적 성격이 있는 베르나도트는 쿠데타 같은 급진적인 형태의 변혁은 자신의 이상과 거리가 멀다며 가담하려 하질 않았다.


 남은 두 사람 중 주르당은 시에예스의 입장에선 자코뱅 파의 괴수와 같은 인물이니 권유 자체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에게 남은 선택의 길은 보나파르트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보나파르트와 같은 인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오히려 싫어하는 편에 가까웠다. 보나파르트가 자신을 무시하는 기색이 있으면, 시에예스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 작고 오만한 녀석을 처형하고도 남을 권한이 있는 나에게, 그 녀석이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14)


 시에예스가 보나파르트를 싫어한 것처럼 보나파르트 역시 시에예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시에예스를 말만 번지르르한 '형이상학(形而上學)' 적인 수다쟁이로 여겼으며, 부리엔(Bourienne)에게 "그 자는 내가 싫어하는 타입이야." (15) 라며 노골적인 혐오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시에예스보다도 자코뱅들을 더 싫어했으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혼란과 무질서에 대해 경멸감을 가졌다. 따라서 그로써도 시에예스와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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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예스


계획을 실천하다


 보나파르트에게는 정치적 행운도 따라주었다. 나폴레옹이 파리에서 활약하기 직전인 9월 13일, 500인 회의에서 자코뱅파의 주르당은 전쟁장관 베르나도트 등과 함께 '조국의 긴급 사태 선언' 을 요구하며 망명귀족의 친척을 투옥시킬 수 있는 인질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공포정치 시대' 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여기에 소득세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자본가와 부르주아를 놀라게 하였다. 9월 14일에는 헌법의 중단과 독재를 의미하는 계엄 선포 동의까지 내었고, 이 요구는 74표 차로 간신히 부결되었다. 만약 이 법안이 통과되었다면 다시 예전의 무질서적 공포정치로 돌아갈 수 있는 판이었다.


 이 시도가 좌절로 돌아간 후 시에예스와 중도파는 반격을 가했다. 베르나도트는 전쟁관 직에서 물러났고 10월 경 의회는 새 원로원과 500인 회의 의장을 선출시켰다. 그런데 이 새 500인 회의 의장은 다름 아닌 뤼시앵 보나파르트(Lucien Bonaparte)로 그는 나폴레옹의 동생이었기에 형을 도와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에예스와 나폴레옹 사이에 뤼시앵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오간 끝에, 그들은 11월 초 직접적인 접촉을 하여 쿠데타 계획을 논의하였다. 당초 시에예스는 보나파르트를 그저 한 자루의 칼로 쓰려는 생각이었다. 즉 잘 이용한 다음 버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당연히 쿠데타의 주체는 자신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물론 보나파르트가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는 주위 의견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는 보나파르트를 얕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 회담에서 쿠데타 이후 '3인 통령 정부' 즉 시에예스, 로제 뒤코, 그리고 나폴레옹으로 구성된 임시정부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주장했다. 너무나 완강한 보나파르트의 태도에 시에예스도 놀랐지만 그로선 이제와 다른 장군을 찾을 수도 없었다. 뤼시앵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다.


 "그의 냉정한 태도와 정연한 논리, 적극적인 주장에는 그 능구렁이 같은 시에예스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 같았다." (16) 


 쿠데타 계획은 손발이 잘 맞지 않았다. 시에예스와 보나파르트 모두 속에 능구렁이를 감추고 패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단 양 측은 모양새를 위해 최대한 '합법적' 으로 일을 추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계획은 헌법 제 102조, 즉 '원로원 회의는 의회의 소재지를 변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우 양원이 이전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와 시기를 지정한다. 이 문제에 대한 원로원 회의의 법령은 변경할 수 없다.' 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원로원 회의를 이용하여 입법의회를 파리가 아닌 '조용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시위꾼들이 쳐들어올 수가 없기 때문에 자코뱅 의원들은 상대적으로 힘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입법의회가 옮겨질 곳은 군대로 둘러싸여 있는 생클루 성이었다. 이후 쿠데타 세력의 계획대로 새로운 임시정부 체제를 수립하면 모든 일이 끝나게 된다. 


 여기에 더해 제 103조 법령 '법령이 제출된 날에는 원로원 회의도 500인 회의도 그 때까지 소재하고 있던 시읍면에서는 토론을 할 수 없다. 시읍면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의원은 공화국에 대한 반역죄로 처벌된다.' 와 '의회 이전에 관한 법령에 날인, 발포, 또는 송부를 지연시키거나 거부하는 총재부 직원 역시 반역죄로 처벌된다.' 는 법령 제 104호가 있기 때문에 일단 목적을 성공하면 이것이 번복될 우려는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렇게 되면 첫날은 회의 장소를 바꾸는데 소비되고, 다음 날 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단번에 끝내야할 쿠데타가 이틀 동안 벌어지는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자코뱅파들이 시위꾼을 데려오는것보다는 나아보였기에 이 계획에 양측은 동의하였다. 시에예스는 더 나아가 500인 회의 의원들 중 가장 위협적인 자코뱅 의원 20여명에게는 일부러 소집장을 보내지 않고, 회의장의 보초에게는 소집장을 가지지 않은 의원을 입장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자고 제안했으나, 이 일은 나폴레옹이나 뤼시앵 모두 너무 졸렬하다고 여겼기에 성사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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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셰



 한편 탈레랑은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경무대신 조제프 푸셰(Joseph Fouche)라고 하는 인물을 가담시켰다. 푸셰는 '뱀의 눈을 하고 손에는 피를 묻힌' 인물로 통했는데, 나폴레옹의 우세함을 보고 그쪽에 가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나폴레옹과 시에예스의 만남 등을 주선했고, '모든 사람을 알고 있는' 자신의 능력을 살려 예술적 경지의 사기와 협잡의 기술을 발휘, 공모자 조직망을 만들었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는 그의 약점을 빌미로 협박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근사한 약속을 하고, 유우부단한 사람은 설득하고, 겁 많은 사람은 위협했다. 


 보나파르트와 시에예스는 그를 끌어들이기는 했으나 '모든 비밀' 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푸셰가 바라스와 친분이 있다는게 걸리기도 했으나 푸셰라는 사람의 기질 자체가 더 걸렸다.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은 이렇게 술회했다.


 "그에게는 음모가 음식과 마찬가지로 필요했다. 때와 장소와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누군가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항상 누군가와 도당을 짜는 사나이였다." (17) 


 푸셰는 자신의 정치적 기민함으로 시작도 하기 전부터 '일이 잘못되었을때' 를 대비하고 있었기에, 그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푸셰는 총재인 고이에 등에게 '음모 같은 것은 없다.' 고 공언을 했고, 대신이 이러한 태도를 보였기에 경찰은 무엇인가 깨닫고 있어도 모른 채 하고 넘어갔다. 때문에 경찰의 보고서에는 항상 '새로 무엇인가를 기도하고 있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고 있으나 그렇게 할 용기가 있는 자는 하나도 없다.' 고 기록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라곤 쿠데타를 벌이기 직전 위협적인 주요 인물들을 적당히 떠보면서 의향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법무대신 캉바세레스(Cambaceres) 등은 쿠데타에 가담할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보나파르트가 염려하는 것은 강력한 군인들이었다. 쿠데타를 앞둔 이틀 전, 나폴레옹은 자신의 집에서 주르당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서 주르당은 현행의 제도에 대해 불만스러운 마음을 드러내고, 자코뱅파와 계속 함께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써 보나파르트는 주르당을 회유 내지 견제하는데 성공했다.


 다음은 베르나도트였다. 주르당과 이야기를 나눈 저녁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의 집에서 식사를 했고, 이 자리에서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베르나도트는 대단히 애매한 태도를 취하기는 했으나 적극적으로 반대파의 입장에 나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주르당과 베르나도트라는 자코뱅의 두 거물에 비해 다른 자코뱅 장군인 오주로는 성격이 단순하여 위협적인 상대는 아니었다.


 남은 문제는 모로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의 말에 따르면 모로는 11월 초 보나파르트의 집을 찾아와 나폴레옹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훗날 나폴레옹은 모로가 쿠데타에 가담했다면 일은 실패했었을 것이라 단언하였으나, 세인트헬레나에서의 회고에서 모로의 호엔린덴 전투(Battle of Hohenlinden) 승리 등을 "그런 것은 우연히 얻은 대승리여서 힘들이지 않고 얻어진 것이다. 모로는 창의력이 없고 그만큼 결단력도 없는 사람이다." (18) 정도로 매도하는 등 모로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심하게 드러내던 나폴레옹의 말이기에 확언할 수는 없다.


 그 외에 마크도날 장군 등은 적극적으로 보나파르트 진영에 참여했고, 주르당이나 베르나도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르페브르 역시 적극적으로 반대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보나파르트는 얼마 멀지 않은 날짜를 기다리며, 총재부에서 저녁을 먹는 자리가 있을 시 남들이 먹은 음식만 먹고, 독을 탈 방법이 없는 반숙 달걀을 먹으면서 극도의 경계심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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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나도트


 브뤼메르 18일


 음모의 시작


 나폴레옹이 브뤼메르 18일을 앞두고 취한 마지막 조치 중 하나는 총재 중 한 사람인 고이에를 부인인 조제핀의 이름으로 초대한 것이었다. 고이에가 조제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용하는 계략으로, 이를 이용해 고이에를 자신의 집 안에 가둘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 초대를 보내고 난 후 17일은 끝났고, 마침내 운명의 18일이 밝았다. 


 이날 새벽, 코르시카 출신의 세바스티아니(Horace Francois Bastien Sebastiani de La Porta) 대령이 이끄는 용기병 연대는 보나파르트의 집에서 경호를 하였다. 당시 전쟁장관이었던 크랑세(Edmond Louis Alexis Dubois-Crance)는 쿠데타의 움직임을 눈치 채고 세바스티아네에게 준비를 하다가 진압하라는 요지의 명령을 전달했지만, 세바스티아네는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만일 세바스티아네가 장관의 명에 따랐다면 브뤼메르 쿠데타는 제대로 실행조차 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로비고 공작 사바리는 훗날 자신의 회상록에서 보나파르트가 세바스티아니를 칭찬하며 "브뤼메르 18일, 그는 친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19) 라고 말했으며, 세바스티아네를 실각시키려는 움직임을 막았다고 했으나 뤼시앵은 오히려 나폴레옹이 "코르시카 녀석들은 거리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20) 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했다고 회고했다. 


 여하간 그런 상황에서 아침이 밝아오자 여러 장군들이 나폴레옹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나폴레옹이 미리 특별한 명령이라도 떨어진 양 헛소문을 퍼뜨려 장군들을 불러 모았던 것이다. 정작 모이고 보자 분위기가 이상해 다시 돌아가려는 장군들도 있었지만 용기병들은 이를 제지했고, 나폴레옹은 마음을 결정 하지 못해 근처에서 어슬렁 거리는 장군들을 설득하여 집으로 데리고 왔다.


 이렇게 가장 먼저 설득한 사람 중에 한 명이 훗날 나폴레옹 제국의 26 원수 중에 한명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Francois Joseph Lefebvre) 였다. 영문을 모르고 나온 르페브르는 나폴레옹의 설득을 듣고 처음에는 화를 내었으나,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전투를 하며 사용했던 샤벨을 주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폴레옹은 우선 르페브르를 자신의 방에 붙들어 놓았다. 이후 마크도날, 탈레랑, 뢰드레르 등 주요 인물들도 몰려들었다.


 그런데 미리 언질을 주었던 고이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상황을 눈치 챈 고이에가 사자굴로 기어들어가는 대신, 자신의 부인만 보내 초대에 응했던 것이다. 고이에가 없다면 그 부인 역시 여기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조제핀은 고이에를 설득하기 위한 몇 마디 언질을 주고는 그녀를 돌려보냈다. 


 다음으로 등장한 인물은 바로 베르나도트였다. 그러나 자리에 나타난 베르나도트는 장군의 옷 대신 사복을 입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장군들 사이에서 그 모습은 대단히 튀어보였는데, 보나파르트의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나타낸 것이다. 보나파르트는 베르나도트를 끌고 가 어르기도 하고 협박도 하며 그를 끌어들이려 안간힘을 썻으나, 베르나도트는 도저히 협조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별 수 없이 나폴레옹은 그를 적당히 회유하여 적어도 방해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려고 했다.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한 사림의 시민으로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그러나 정부가 도움을 원한다면, 정부를 지킬 것이다." (21)


 묵인은 하되 협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말이었다. 나폴레옹으로서는 우선 이 정도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장군들을 모으고 있을때, 시에예스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새벽 무렵 사람을 시켜 원로원 의원들에게 소집장을 주게 하면서, 가장 폭력적이고 선동적인 의원 12명에게는 일부러 소집장을 주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사람인 의원들을 시켜 폭력적인 음모가 진행 중이며,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회의장을 옮겨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여론을 만들게 했다. 시에예스와 한통속이었던 코르네 의원은 테러 음모를 고소하며 이렇게 연설하였다.


 "이 위험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한 순간이면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의원님들이 그 위기의 순간을 잡지 않으면 공화국은 사라지고 뼈다귀만 남은 잔재를 가지고 욕심쟁이들끼리 다툴 것입니다." (22)  


 뒤이어 또 다른 일당인 레니에 의원이 나서 위험을 경고하며 양원을 생클루로 옮기자는 의견을 내었다. 레니에 의원이 제시한 법안은 다음과 같았다.


 ① 의회는 생클루로 이전하고 양원은 궁전의 양쪽에 설치된다.

 ② 양원은 내일 브뤼메르 19일 정오에 이전한다. 그 이전까진 다른 장소에서 직무와 토의를 속행하는 것을 금지한다.

 ③ 이를 실시하는 임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게 부여된다.

 ④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은 원로원 회의에 출석하여 이 법령의 실시를 선서해야 한다.


 갑자기 등장하는 보나파르트의 이름은 의심스럽기 충분하였으나, 이미 계획적으로 반대파를 배제하여 출석시켰고 분위기를 한껏 잡아 놓았기 때문에 이유를 물어보는 사람조차 없어 이는 별 어려움 없이 통과되었다. 이 소식은 곧바로 집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나파르트에게 전해졌다. 혈기왕성한 장교들은 모아놓고 불안하게 시간만 보내던 보나파르트는 이 소식을 듣자 기뻐하며 곧바로 의회장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르는 인물은 르페브르, 모로, 뮈라, 마크도날, 브르농빌, 장 란, 몽세이 등이었고 이후 마르몽이 합류했다. 


 이윽고 원로원 의원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던 회의장에 나폴레옹은 무수한 장군들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등장했다. 나폴레옹은 이 자리에서 자신감 있게 법령의 선포를 선언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헌법' 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왜 헌법을 언급하지 않느냐는 소수 의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앞서 선언된 '생클루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토론이 금지된다.' 는 법안 때문에 이러한 질문은 묵살되었다. 


 일단 회의가 끝난 이후 나폴레옹은 시에예스와 만났다. 나폴레옹은 여러 장군들이 담당해야 할 보직을 지정했는데, 밖에 있던 병사들을 보더니 갑작스럽게 총재정부의 무능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열변을 토했다.


 "나는 정부를 위해 여러분 곁을 떠났다. 그런데 오늘 적들은 우리의 국경을 침범하고 있다!" (23)   


 이 말을 들은 시에예스가 당황했음은 물론이다. 나폴레옹은 교묘하게 주도권을 자기에게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 무렵 사태를 파악한 주르당과 오주로가 허겁지겁 나타나 보나파르트에게 합류했다.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열병하면서 또다시 비슷한 요지의 연설을 하여 분위기를 돋구었다.


 한편, 파리의 시내에서는 뢰드레르 등이 준비한 포스터가 붙여지고 있었다. 전부 교묘하게 보나파르트의 공적을 강조하고 현 상태를 타도해야 한다는 늬앙스가 들어있었던 것으로, 여론을 적당히 달궈 놓으려는 조치였다.



Paul Barras directeur

폴 바라스


총재정부의 붕괴



 이후 열병을 마친 나폴레옹은 경무 대신 푸셰, 법무 대신 캉바세레스, 외무 대신 레나르, 재무 대신 로베르 랑데, 그리고 시에예스 등과 원로원 회의 법령을 실시하기 위해 모였다. 여기서 총재 중 한 사람인 시에예스는 법령에 서명을 했는데, 그 때 마침 또다른 총재 두 사람인 고이에와 물랭이 나타났다. 고이에는 다섯 명의 총재, 즉 바라스와 시에예스, 고이에와 물랭, 그리고 뒤코 중 바라스는 추방되고 총재 정부는 유지되기를,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자리를 유지하길 원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나폴레옹과 보조를 같이한 온건파 정치인 불레 드 라 뫼르트 등은 5인 총재 정부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 단호하게 말했다. 놀란 고이에는 시에예스와 뒤코 등에게 아첨하며 어떻게든 마음을 돌리려 하였으나, 도저히 말이 통하자 않자 물랭과 함께 뤽상부르 궁으로 돌아갔다. 


 총재정부를 붕괴시키는 방법은 간단했다. 다섯명의 총재 중 과반수가 사직을 해버리면 유지가 안되는 것이다. 쿠데타 파인 시에예스와 뒤코는 사직을 할 테고, 반대파인 고이에와 물랭은 사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2 대 2의 팽팽한 상황이 되고, 남은 한 사람의 총재인 바라스가 중요해졌다. 우선은 고이에와 물랭이 바라스와 접촉하여 그를 설득하는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었기에, 나폴레옹은 군대를 동원하여 뤽상부르 궁의 출입구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이 임무는 모로가 담당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탈레랑을 바라스에게 보냈다. 탈레랑은 다짜고짜 바라스에게 사직을 권고했고, 자기 쪽에서 만들어온 사직서를 내밀었다. 바라스는 여기에 사인만 하면 될 뿐이었다. 바라스와 친했던 푸셰는 쿠데타 당일까지만 해도 여기저기에 발을 걸치고 있었으나, 분위기가 쿠데타 측에 유리하자 그 쪽에 완전히 넘어갔으므로 바라스로서는 더 버틸 재간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바라스는 사직서에 서명을 했고, 용기병들의 감시를 받으면서 그 날 곧바로 뤽상부르 궁을 떠나 파리의 성문을 나섰다. 체념한 바라스가 너무나 순순히 단념을 했기에 다른 사람들은 탈레랑 등이 그에게 상당한 보수를 주었다고 공공연하게 여겼지만, 바라스 본인은 이를 부정했다.


 "나는 돈을 거절하거나 성인인 척하고 분개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다. 아무튼, 도중에 탈레랑이 모조리 슬쩍했기 때문에 나는 돈 같은 것은 구경도 하지 못 했다." (24)


 이렇게 하여 한때 프랑스 정치계를 풍미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출세길에 큰 영향을 준 바라스는 역사의 전면에서 퇴장하였다. 총재 정부는 이렇게 간단하게 붕괴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시에예스와 다음 날의 일과 이후의 일에 대하여 토론을 했으나, 워낙 양측의 의견이 팽팽하여 별 성과는 없었다. 시에예스는 자코뱅 의원 중 위험한 40여명을 체포해버리자고 주장했으나, 자코뱅 파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을 베르나도트가 중립을 취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나폴레옹은 "나는 그런 연약한 놈들은 두려워 하지 않는다." (25) 고 거절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집으로 돌아와 그 날 하루를 마쳤고, 브뤼메르 18일에 벌어진 성과에 만족해하며 부리엔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그런 대로 괜찮았어." (26)


 그러나 자신만만한 보나파르트의 진정한 위기는 다음 날인 브뤼메르 19일이었다. 
  

Charles Pierre Francois Augereau

오주로



브뤼메르 19일


악화되는 형세


 브뤼메르 쿠데타 계획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바로 이틀에 걸쳐 진행된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자코뱅파가 끌고 오는 시위꾼들이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일을 염려한 조치였지만, 본래 쿠데타와 같은 음모는 속전속결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늘어짐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만일 쿠데타가 당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쳐도 시위꾼들이 몰려들어 쿠데타 세력을 척결했을지는 의문이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렸으며, 브뤼메르 18일의 불온한 움직임에도 시민들의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극초반부 부터 혁명의 폭력성과 갑작성, 어제는 환호하였다가 오늘은 목을 조르는 대중을 지켜본 시에예스로서는 이러한 시위에 노이로제 같은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첫날의 진행에 대해 '만족했다' 고 말했지만, 자연히 18일 저녁 무렵부터 자코뱅 의원들은 쿠데타 위협을 경계하고 있었다. 


 실상 보나파르를 위시로 한 쿠데타 세력은 19일 어떻게 움직일 지에 대해 명확한 계획이 없었다. 물론 의회를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쿠데타의 승인을 받으려는 계획은 가지고 있었지만, '어떻게' 이를 행할지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의회를 조종하는 일 정도는 손 쉬운 일이라고 자만하고 있었다. 캉바세라스는 이를 걱정했지만, 보나파르트는 500인 회의의 의원들은 전부 시시한 무리들이라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시에예스 등은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도망칠 길을 마련해 두었고, 캉바세레그와 푸셰는 만일을 대비해 다시 발을 여러 곳에 늘어놓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운명의 19일, 보나파르트를 태운 마차는 모든 것이 결정될 생클루 성으로 향하였고 그 비서 부리엔 등을 실은 마차가 뒤를 이었다. 마차는 루이 16세를 처형한 장소를 지났고, 이를 바라본 부리엔은 불쑥 친구인 라바예트에게 입을 열었다.


 "여보게. 내일 우리가 뤽상부르 궁에서 자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여기서 끝장날 것일세." (27)


 당시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손이 닿는 병사들을 이용해 성을 포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런데 문제의 생클루 성 홀은 아직 회의를 할만한 준비가 늦어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준비한 일이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바로 그러한 무렵 도착 했다. 


 "그는 부대 앞을 지나면서 전원에게 경례를 한 다음, 병사들에게 전투 대형을 취하게 했다.…… 그는 작은 모자를 쓰고 작은 검을 차고 걸어갔다. 그리고 혼자 계단을 올라갔다." (28)


 병사로서 나폴레옹과 함께 했던 쿠아녜(Jean-Roch Coignet)는 막 도착한 나폴레옹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위풍당당한 모습이었을 테지만, 정작 계단을 걸어가 회의장에 들어가려던 그 역시 회의에 필요한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에 나폴레옹은 따로 마련해 둔 작전 본부에 틀어박혔다. 그 작전 본부에는 보나파르트를 위시로 한 쿠데타 세력의 군인들이 모여있었지만, 일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 듯 하여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심사가 뒤틀린 나폴레옹은 엉뚱한 대대장을 하나 잡아 심하게 꾸짖으며 화풀이를 했다. 그 모습을 본 티에보(Paul Thiebault) 장군은 어이가 없어 다른 장군들에게 물어 보았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이런 광경을 보기 위해서였나?" (29)


 그러나 긴장하기는 보나파르트 못지 않던 다른 장군들 역시 쭈삣거리며 별다른 대답조차 못했고, 그 모습을 본 티에보는 화가 나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긴장 사태 끝에 회의가 마침내 시작된 것은 정오를 지난 한 낮이었다. 원로원 의회는 성의 회랑 쪽으로, 500인 회의 의원들은 본채에서 떨어진 초라한 건물 오랑주리로 안내되었다. 두 의회의 의원들을 갈라놓려는 쿠데타 파의 책략이었다. 


 500인 회의에서 먼저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은 쿠데타파 세력의 의원들이었다. 그들은 불시에 '자코뱅파의 음모', '비밀 집회', '군대 동원' 등의 단어가 포함된 살기등등한 연설을 했고, 이를 본 자코뱅파 의원들은 워낙 당혹스러워 잠시 할 말조차 잊었다. 그러나 살기등등한 것은 그저 말 뿐으로, 그다지 거친 맛이 없었던 쿠데타파 의원들은 분위기를 주도하지 못 했다. 정신을 차린 자코뱅파 의원들은 격렬하게 야유를 퍼부으며 반발했고, 그들은 '헌법에 대한 맹세' 를 하겠다고 나서며 한 사람, 한 사람 씩 단상에 올라와 헌법에 대한 선서를 하기 시작했다.


 이는 현재의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말로, 쿠데타를 반대하자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선서를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상당히 길었기 때문에 회의는 늘어지고 있었다. 500인 회의 의장 뤼시앵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500인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때, 원로원 회의 역시 2시경 시작 되었다. 그러나 원로원 의회는 500인 회의에서 회부되어 온 결의를 승인하거나 부결하는게 일이었으므로, 500인 회의가 저렇게 늘어지고 있는 한 달리 할 것도 없었다. 이때, 위협적인 인물로 간주되어 임시 회의의 소집장을 받지 못했던 의원들이 나서서 그 이유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고, 관리 위원들은 전원에게 소집장을 돌렸다고 거짓말을 하며 분쟁이 벌어졌다. 


 원로원 회의는 격렬하기 짝이 없는 500인 회의에 비해서는 분위기가 차분했으므로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별안간 회의장을 옮긴 이유에 대해 좀 더 분명한 설명' 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떠들썩했다. 3시 경, '고이에와 물랭, 바라스 등 사퇴를 하였다. 따라서 총재 정부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에,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는 총재 정부 비서의 편지가 도착했다. 총재 정부 비서 라가르드는 시에예스의 심복이었다. 고이에와 물랭은 그저 감금을 당하고 있을 뿐이기에 이는 사실이 아니었지만, 소식을 들은 원로원 회의는 새 총재로 지명할 사람들의 명단 작성을 위해 500인 회의를 재소집 하겠다는 통보를 보내는 것으로 일단 휴회에 들어갔다.


 분위기가 그다지 순조롭지 못한 것이 회의장 밖으로까지 느껴졌고, 시에예스, 로제 뒤코 등과 함께 작전 본부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폴레옹은 초조해서 어쩔 줄 몰랐다. 본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일을 싫어하는 그는 끊임없이 "안돼,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 만은 없어. 빨리 끝내야 해. 도저히 더는 못해, 절대로." (30) 같은 소리를 웅얼웅얼 대고 있었다.


 그날 눈치를 보며 다른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코뱅 장군 주르당과 오주로는 분위기가 보나파르트에게 불리해 보이자 재빨리 생클루에 도착하였다. 만일 보나파르트가 끝장이 나게 되면 자신들이 정부의 중심이 될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밖에서 머뭇거리며 병사들의 이야기를 듣던 오주로는, 나폴레옹이 있는 작전 본부에 들어섰다. 그는 원로원 회의가 나폴레옹에게 군 지휘권을 위임한 브뤼메르 18일의 결정은 헌법 위반이므로, 지금이라도 지휘건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주로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긴 나폴레옹은 그에게 일침했다.


 "이봐, 오주로. 자네는 아르콜 다리의 전투를 생각하게. 그땐 지금보다 더 절망적이었네. 쓸데없이 나서다가 다치지 말고 가만히나 있게. 30분만 지나면 사태는 달라질 테니까." (31) 


하지만 자제심을 잃은 나폴레옹은 이윽고 직접 원로원 회의에 난입하여 의원들을 설득하겠다고 나섰다. 이는 분명한 위법 행위였다. 의원을 제외하고는 의회의 요청이 없다면 누구도 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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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개입 


 나폴레옹이 원로원 회의에 나타난 것은 오후 4시 였다. 의회는 휴회여서 의원들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나 보나파르트가 등장하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모든 의원들의 눈은 보나파르트에게 집중되었다.


 보나파르트는 무수한 명언과 격언을 만들었고 이는 현재까지도 인상 깊게 전해진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말은 상관, 장군, 지도자, 황제, 그리고 영웅으로서 지위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견본으로 삼아 하는 '충고' 에 가깝다. 말하자면 그는 인상적인 짦은 경구로 병사들이나 사람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으나, '충고' 나 '명령' 이 아닌 '설득' 과 '선동' 을 해야할 정치가로서의 연설에는 별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입을 열어 뭐라고 웅얼거리는 나폴레옹의 말은 서투르고 목조리도 잘 조절되지 않았으며, 동작은 너무 딱딱했고 문장은 불규칙적이고 단편적이었다. 


 "시민 대표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화산 위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군인답게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어제 제가 파리에서 한가하게 지내고 있는데 여러분의 부름이 있었습니다. 법령에 따라 의회를 이전하는 얘기와 그것을 도우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저는 즉시 전우들을 모아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갖은 욕설을 당하며 카이사르와 크롬웰의 재래라는 비난까지 받았습니다. 제가 군사정부를 원했다면 여러분의 명령에 따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꾸물거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시급히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프랑스 공화국에는 이제 정부가 없습니다. 총재들은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지금 500인 회의는 분열하고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원로원 회의 뿐입니다. 빨리 손을 쓰집시오. 자유를 구합니다! 평등을 구합니다!" (32)


 말하자면 총재들은 사임해서 정부가 끝장이 났으니 쓸데없는 토론은 그만두고 어서 임시정부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연설은 압도하는 호소력이 전혀 없었고, 누군가는 여기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렇게 한다면, 헌법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33)


 그러자 욱한 보나파르트는 이성을 잃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헌법은 바로 당신들이 무의미하게 만들었소. 프뤽티도르 18일에도, 플로레알 22일에도, 프레리알 30일에도 당신들은 헌법을 위반했소. 그 헌법을 존중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소!" (34)


 이윽고 그는 미친 사람처럼 자신의 주위에서 음모가 있으며, 자신이 귀국한 다음부터 모든 당파가 자신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거기에 관여되지 않았다고 말하며 음모가 가득하니 어서 움직여야 한다고 서투른 말로 길고 산만하게 늘어놓았다. 긴장하고 흥분한 그는 말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고, 그러다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이 보이자 군부에 직접적으로 호소를 늘어놓았다.


 "내가 무법자라는 둥 그런 이야기가 들리면 나는 귀관들, 즉 나의 용감한 전우들에게 호소할 것이다. 나는 승리의 신, 행운의 신과 함께 진군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35)


 이것은 명백한 헛소리로, 군사 쿠데타의 가능성에 대해 경계하고 있는 원로원에게 이보다 나쁜 인상을 주기도 힘들었다. 또한 그는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은 거기에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무심코 사실을 말해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나폴레옹의 장광설을 듣던 원로원 의원들도 흥분하여 '음모가 주위에서 있었다고 했는데, 그 이름을 대라. 쿠데타의 실체를 말해라' 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놀란 나폴레옹은 또다시 자기도 모르게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다섯 명의 총재 중 바라스와 물랭이 개인적으로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나에게 접근했고, 나를 거사의 지도자로 삼았소." (36)   


 그 말에 납득하지 못한 자코뱅 성향의 의원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좀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날 나폴레옹이 보인 추태에 대해 스탈 부인은 이런 평을 남겼다.


 "본래 보나파르트 장군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워낙 말주변이 없고, 말을 잘할 때라고는 남을 매도할 때뿐인데, 그런 그가 의회를 설득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연설을 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37)


 스탈 부인이 열렬한 반 보나파르트주의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나폴레옹이 말을 잘할 때는 남에게 욕설을 퍼부을 때 뿐.' 이라는 평가는 다소 부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최측근이었던 부리엔 역시 그 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보나파르트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만큼 지리 멸렬 했고 그가 우물거리면서 한 말에는 손톱만큼의 일관성도 없었다." (38)


 그러나 나폴레옹은 지치지도 않고 여전히 장광설을 지껄이려고 했다. 보다 못한 부리엔은 나폴레옹을 잡고 끌어 내렸다.


 "장군님, 장군님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나 아세요?" (39)

  
 결국 그는 부리엔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오다 싶이 회의장을 나서게 되었다. 가히 개입할 수 있는 최악의 방식으로 개입한 것으로, 원로원 의회에서 무엇인가를 이루는것은 끝장 나 보였다. 다음 문제는 500인 회의였지만, 이 쪽도 전망이 밝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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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시앵 보나파르트


500인 회의와 나폴레옹의 위기


 미친 사람마냥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던 나폴레옹은 회의장 바깥에 있는 병사들의 환호를 듣자 어느정도 진정하였다. 그는 잠시 감정을 추스리면서 사람을 시켜 조세핀에게 아무 문제도 없다는 이야기를 전하게 했고, 마음을 굳게 먹고 500인 회의를 향해 걸어갔다.


 한편, 당시 500인 회의는 끝없이 이어지던 헌법에 대한 선서가 마침내 끝났을 무렵이었다. 500인 회의에도 원로원 회의처럼 총재들의 사퇴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졌으며, 이에 놀란 의원들이 '바라스의 사퇴에 비정상적인 부분에 있는것 아닌가' 라는 의문을 제시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은 뮈라, 르페브르 등을 거느리고 회의장에 도착했고, 그들을 입구에 남겨 둔 채 혼자 걸어들어 갔다. 


 그러나 이는 불이 난 자리에 되려 기름을 부어대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나폴레옹이 500인 회의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에예쓰는 아찔한 기분이 되어 통탄했다.


 "보나파르트의 저 섣부른 행동이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다.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준비한 모든 계획들을 수포로 만들 것이다." (40)


 실제로 이 행동은 그야말로 최악의 행동이었다. 회의에 외부인이 난입하는것은 그자체로 불법 행위일 뿐만 아니라, 자코뱅파 의원들은 비교적 얌전한 원로원 회의와 달리 살기등등했다. 나폴레옹의 개입은 간신히 진정된 그들을 다시 격동시켰고, 보나파르트는 그들의 앞에 서서 원로원 회의때 처럼 뭐라고 연설을 하려고 했으나 말도 꺼내기 전부터 사방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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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어 격노한 의원들은 나폴레옹을 포위하고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건장한 체격의 데트랑 의원등은 나폴레옹의 멱살을 붙잡고 주먹을 휘둘러 대었으며, 뤼시앵의 증언에 따르자면 그들은 심지어 "단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회의장에서 단도까지 등장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어찌되었건 그다지 체격이 좋지 않던 나폴레옹으로서는 봉변을 당한 것 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놀란 뮈라와 르페브르 등은 나폴레옹을 구출하기 위해 입구에서 달려들었지만, 워낙 난장판이 되어 있어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비고네 의원은 보나파르트의 팔을 붙들고 소리쳤다.


 "당신 지금 뭐하고 있소? 뻔뻔스러운 사람! 당장 나가시오! 당신은 신성한 법의 성소를 침범하고 있소!" (41)


 이런 혼란 속에 병사들은 간신히 나폴레옹의 몸을 붙들고 그를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게중에는 완전히 군복이 찢겨진 사람들도 있었다. "압제자는 가라. 독재자는 가라. 법을 어겼다." (42) 라는 아우성이 들려오는 가운데,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쫒겨나온 나폴레옹은 너무나 놀라 파랗게 질려 떨고 있었고, 모든 힘을 상실해 버렸다. 측근들은 그를 뒤코와 시에예스 곁으로 데리고 갔지만, 기가 질린 보나파르트는 완전히 의지를 상실했는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시에예스를 향해 맥없이 중얼거렸다.


 "장군, 저 놈들은 나한테서 법의 보호를 박탈했어요." (43)


 물론 보나파르트에게 "형이상학자" 라는 야유를 받던 시에예스는 장군이 아니다. 당황하여 헛 말을 내뱉는 나폴레옹을 본 시에예스는 이제 강경책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호한 행동을 원하기는 뮈라 등이 더하였다. 쿠데타가 실패할 경우 총재라는 신분이었던 시에예스야 거물이니 어떻게 빠져나간다 쳐도, 뮈라나 세바스티아니, 르클레르 등은 응분의 대가를 당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아직까지 합법적인 수단을 취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여 머뭇거리고 있었다.


 한편 보나파르트가 들쑤시고 나간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압제자 나폴레옹을 타도하자는 목소리로 가득찼다. 거의 모든 의원들은 나폴레옹을 탄핵하기 위한 표결을 요구했다. 그들이 걱정하는것은 생클루 주변에 병사들이 많다는 점이었기에, 서둘러 표결을 해서 나폴레옹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파리로 돌아가는것이 최선이었다. 따라서 서둘러 표결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일단 파리로 돌아가면 부대가 함부로 개입하기도 힘들고, 여차하면 시위꾼들을 불러모아 밀어내면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나폴레옹을 '법의 보호' 로부터 박탈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는 사실상의 최후를 뜻하는 이야기로서, 그 유명한 로베스피에르를 파멸시킨 외침도 '법의 보호를 박탈' 하자는 것이었다. 


 수백명의 적대자 속에서 쿠데타 파의 의원들은 겁에 질려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나폴레옹을 구한 것은 그의 동생 뤼시앵이었다. 500인 회의에 의장이었던 뤼시앵은 필사적으로 의장석에 매달리는 육탄공세로 의장석을 지켜 표결을 막았다. 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나폴레옹에게서 법의 보호를 박탈하려는 시도를 제지했고, 간신히 기회를 잡아 연설을 하였다.


 "나 또한 그 제안을 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장으로서 한마디 주의해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원들은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장군이 정식으로 발언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그토록 무공을 세운 장군을, 그토록 조국을 위해 봉사한 장군을 이렇게 매도 하여도 되는 것인가?" (44)


 사방에서 자코뱅파 의원들의 야유와 조롱이 쏟아졌지만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혼란은 끝이 보이지 않았으며, 쿠데타 파의 볼레 등은 다른 사람에게 얼굴을 두들겨 맞았다. 그런 모습을 본 뤼시앵은 갑자기 붉은 모자와 제복을 내던져 버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 회의장에는 자유가 없다. 아무도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나는 이 의사당에 애도를 표하기 위하여, 국민이 선출해 준 의원의 표시를 이 연단에 벗어 던졌다."  (45) 


 이 퍼포먼스는 수백만 마디의 말보다 효과가 있었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해졌다. 뤼시앵에게 달려와 생각을 바꾸라고 설득하는 의원들이 있었고, 간신히 한숨 돌린 쿠데타 세력의 의원들은 의회가 끝장났으니 어서 폐회를 해야 한다고 목소를 높였다. 자코뱅파 의원들은 다시 아우성을 질러대기 시작했으나, 뤼시앵은 그 틈에 회의 관리 위원에게 부탁하여 자신을 구출해달라는 부탁을 나폴레옹에게 전하게 했다. 


 이때까지 머뭇거리고 있던 나폴레옹은, 그러나 탈레랑 등으로부터 '로베스피에르를 파멸시켰던 그 외침' 이 나왔다는 말을 듣자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말을 하나 가져와 달라고 부탁하였으며, 용기병들과 의회 친위대를 정렬시켰다. 이에 앞서 긴장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얼굴을 마구 긁었는데, 어찌나 세게 긁었는지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이는 병사들에게 '사령관이 공격을 당했다' 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며, 장교들 역시 500인 의회에서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용기병들에 비해 의회 친위대는 나폴레옹에게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으나,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같이 움직이게 되었다.


 이윽고 500인 회의장을 떠난 뤼시앵이 그 자리에 도착했다. 뤼시앵의 요청을 받은 10여명의 병사들이 그를 데리고 온 것이었는데, 뤼시앵은 그 순간에도 연단에 매달려 떠나지 않겠다는 듯한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도망친다' 는 인상을 주지 않고 무사히 도주할 수 있었다. 만일 슬금슬금 도망치려 했다면 의원들에게 잡혀 봉변을 당했을 것이다. 


 병사들의 앞에 선 뤼시앵은 말에 올라 타 당당하게 연설했다.


 "프랑스 병사들이여, 500인 회의 의장으로 말하건데 지금 대다수의 의원들은 단검을 가진 몇명의 의원들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다. 그들은 지금 연단을 포위하고 동료 의원들을 죽인다고 협박하면서 무서운 일을 토의하려고 획책하고 있다. 그들은 영국에게 돈으로 매수된 반역자들로, 500인 회의를 배신하고 법령을 집행할 임무를 가진 장군에게서 법의 보호를 박탈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이런 자들에게 희생되고, 농락되어 온 국민의 이름으로 지금 저 안에 갇혀 있는 우리 국민의 대표들을 해방시킬 임무를 그대들 전사들에게 위임하는 바이다. 장군, 병사 여러분! 그리고 모든 시민들! 끝까지 오랑주리에 머물면서 법의 보호를 박탈하자고 버티는 자가 있다면 힘으로 배제하자. 그런 자들은 더 이상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단검의 대표일 것이다."  (46)


 이 연극조의 표현이야말로 당시 가장 필요한 연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회 친위대의 반응이 시원찮자 뤼시앵은 갑자기 칼을 나폴레옹에게 겨누며, 만일 그가 프랑스의 자유를 손상시킨다면 자신의 손으로 가슴을 찌르겠다고 맹세했다. 이에 감동한 의회 친위대 역시 환호하였다. 일단 500인 회의 의장이 합류한 이상, 그들은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의회에 개입해도 쿠데타가 아닌 의사 심의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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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모습을 본 나폴레옹은 매우 도취되어 자신도 연설을 했다. 의회 친위대의 장교들은 나폴레옹의 말에도 환호하였으나, 흥분한 나폴레옹은 또다시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를 따르라! 나는 태양의 신이다!" (47)


 기껏 연설을 해서 분위기를 돋구었는데, 여기서 다시 쿠데타에 나서는 독재자와 같은 말을 하는 나폴레옹을 본 뤼시앵은 깜짝 놀라 일침했다. 


 "형님, 형님이 지금 이집트에서 맘루크를 상대하는 줄 아십니까?" (48)


 그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연설을 멈추었고, 바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여기까지 이른 이상 더 이상 지체될 것은 없었다. 뮈라는 척탄병을 이끌고 회의장에 난입했으며, 의회가 회산되었다고 외쳤다. 이윽고 '근위병들은 진격하라' 는 명령이 내렸고, 병사들은 달려들었다. 놀란 500인 의원들은 참새 때처럼 산산히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고, 병사들은 총검을 앞으로 하고 의원들을 밖으로 밀어냈다. 의자를 붙들고 버티는 자는 양손으로 허리를 잡아 끌어내고, 창문을 열고 도망가는 자는 함성으로 배웅했다. 대부분의 의원들이 예복과 모자를 벗어던지는 바람에 풀밭은 이러한 쓰레기로 가득찼다.


 어떤 의원은 원로원 회의로 달려가 음모가 있다고 소리쳤으나, 곧 뤼시앵이 나타나 그 말을 가로막고 나폴레옹을 죽이려 한 자코뱅파의 잘못을 지적하는 연설을 했고, 500인 회의에서 폭력을 행사한 비고네, 데트랑, 그랑메종 등을 추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곧 이어 뤼시앵은 아직도 근처에서 어정거리는 500인 의원들을 잡아모았다. 일부는 아직도 앞마당에서 눈치를 보거나, 혹은 생클루 거리의 음식점이나 선술집에 모여 있었다. 그리하여 결의안을 마련해서 원로원 회의에 전달했고, 마침내 시에예스 - 보나파르트 - 뒤코로 이어지는 3인 임시 집정 정부가 탄생했다. 


 마침내 쿠데타는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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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랭고 전투


결과 


 이 쿠데타의 진행 과정에서 나폴레옹이 끼친 영향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그가 가진 '영웅' 으로서의 명성을 제외하면, 브뤼메르 18일과 브뤼메르 19일 그가 한 일은 거의 없었으며, 브뤼메르 19일에는 오히려 스스로의 실책으로 큰 낭패를 볼 뻔했다. 미오 드 멜리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우리는 보나파르트가 자기 권력의 기초를 세운 그 날, 수행한 너무나 작은 몫에 무엇보다도 놀랐다." (49)  고 이야기했다. 뤼시앵은 두고두고 나폴레옹이 원로원 회의와 500인 회의에 난입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합법적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브뤼메르 쿠데타의 최대 공신은 단연 뤼시앵으로, 그는 혼자서 1인 20역을 해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브뤼메르 쿠데타' 는 엄밀히 말하여 두 개의 쿠데타로 나뉘어야 한다. 하나는 18일과 19일, 자코뱅파에 대항한 시에예스를 따르던 '브뤼메르파' 의 승리이고, 두 번째는 그 다음달 '혁명력 제 8년 헌법' 공포로 끝나는 시에예스 쪽 브뤼메르 파에 대한 나폴레옹의 승리이다. 나폴레옹은 19일까지 주인공이 아니었지만, '브뤼메르 20일' 부터 자신이 정국을 주도하며 제1 통령이 되어 권력을 독차지 하였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보나파르트의 제일 통령 등극' 이 모든 일의 끝은 아니다. 그가 가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열광시킬 만한 승리가 필요했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두가 바라는 '평화' 였다. 나폴레옹은 이후 오스트리아의 마랭고 전투(Battle of Marengo)에서 패망 직전에 몰렸지만, 드제의 활약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체결된 뤼네빌 조약(Peace of Luneville), 그리고 더 나아가 아미앵 조약(Treaty of Amiens)으로 최대의 숙적인 영국과 '잠시동안 이라도' 휴전을 체결하였을때, 사명을 완수한 보나파르트의 지위는 마침내 견고히 유지되게 된 것이다.  




(1) Felix Markham, Napoleon. 이종길 옮김, 길산출판사 pp. 123 (이하 나폴레옹 전기)

(2) Georges Bordonove, Napoleon Bonaparte. 나은주 옮김, 열대림. pp. 156(이하 나폴레옹 평전)

(3) Ibid pp. 156

(4) J. Christopher, BONAPARTE IN EGYPT 中

(5) Ibid

(6) Latimer, Jon (December 1999). War of the Second Coalition. 《Military History》, 68  

(7) 長塚隆二, ナポレオン人心掌握の天才. 문용수 옮김, 오늘 pp. 256 (이하 영웅 나폴레옹)

(8) 나폴레옹 전기, pp. 103

(9) 영웅 나폴레옹, pp. 77

(10) 나폴레옹 평전, pp. 159

(11) Ibid pp. 159

(12) 영웅 나폴레옹 pp. 104

(13) 나폴레옹 평전, pp. 161

(14) Isser Woloch, Napoleon and his Collaborators. 차재호 옮김, 홍익출판사 pp. 73 (이하 싱크탱크)

(15) Ibid pp. 73 

(16) 영웅 나폴레옹, pp. 122

(17) Ibid pp. 130

(18) Ibid pp. 396

(19) 長塚隆二, ナポレオン人心掌握の天才. 문용수 옮김, 오늘 pp. 142 (이하 영웅 나폴레옹)

(20) Ibid pp. 142

(21) Ibid pp. 146

(22) Georges Bordonove, Napoleon Bonaparte. 나은주 옮김, 열대림. pp. 162 ~ 163(이하 나폴레옹 평전)

(23) Felix Markham, Napoleon. 이종길 옮김, 길산출판사 pp. 116 (이하 나폴레옹 전기)

(24) 영웅 나폴레옹. pp 161

(25) 나폴레옹 전기. pp. 116

(26) 나폴레옹 평전. pp. 163 

(27) Felix Markham, Napoleon. 이종길 옮김, 길산출판사 pp. 116 (이하 나폴레옹 전기)

(28) The Note-Books of Captain Coignet 中 

(29) 長塚隆二, ナポレオン人心掌握の天才. 문용수 옮김, 오늘 pp. 174 (이하 영웅 나폴레옹)

(30) Georges Bordonove, Napoleon Bonaparte. 나은주 옮김, 열대림. pp. 164(이하 나폴레옹 평전)

(31) 영웅 나폴레옹, pp. 180

(32) Ibid pp. 182

(33) Isser Woloch, Napoleon and his Collaborators. 차재호 옮김, 홍익출판사 pp. 79 (이하 싱크탱크)

(34) 나폴레옹 평전 pp. 165

(35) 나폴레옹 전기 pp. 117

(36) 생크탱크 pp. 79

(37) 영웅 나폴레옹 pp. 186

(38) Ibid pp. 186

(39) 나폴레옹 전기 pp. 117




(40) Isser Woloch, Napoleon and his Collaborators. 차재호 옮김, 홍익출판사 pp. 80 (이하 싱크탱크)  

(41) Ibid pp. 80

(42) Georges Bordonove, Napoleon Bonaparte. 나은주 옮김, 열대림. pp. 165(이하 나폴레옹 평전)

(43) 長塚隆二, ナポレオン人心掌握の天才. 문용수 옮김, 오늘 pp. 195 (이하 영웅 나폴레옹)

(44) Ibid pp. 193

(45) Ibid pp. 194 

(46) Ibid pp. 203

(47) Ibid pp. 205

(48) Ibid pp. 205

(49) Felix Markham, Napoleon. 이종길 옮김, 길산출판사 pp. 120

분류 :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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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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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9.18
18:29:47
(*.166.245.166)
나폴레옹은 볼 때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군요.

재원

2013.09.20
14:50:49
(*.148.42.15)
저렇게해서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때가 만 30살일 때였다고 하죠?

맘평화

2013.09.20
14:59:32
(*.129.54.218)
나폴레옹은 진짜 전쟁사에 있어서 그가 온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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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역사 베테랑과 신병의 전투력 차이 [1] 재원 2013-09-23 4500
43 역사 수신기에서 고의로 자료를 왜곡했을까요? [1] 이전만성 2013-09-22 2767
42 역사 주 5일제의 시행은 헨리포드로부터 출발했군요 [1] 재원 2013-09-22 2918
» 역사 보나파르트, 마침내 프랑스를 손아귀에 쥐다.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3] 신불해 2013-09-18 7566
40 역사 어원으로 살펴보는 율곡 이이의 10만양병설(십만양병설) [4] 미백랑 2013-09-12 8649
39 역사 아부키르 만의 사투가, 전 유럽을 잠에서 깨우다 ─ 나일강 해전 [1] 신불해 2013-09-12 5345
38 영국사 [영국의 역사] (18) 헨리 5세와 영국의 영광 [2] 신불해 2013-09-09 6107
37 역사 전근대 이전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외교적 문헌의 내용과 이로 인한 촌극 [2] 신불해 2013-09-06 3260
36 영국사 [영국의 역사] (17) 헨리 4세의 분투와 랭커스터 왕가 신불해 2013-09-06 5126
35 영국사 [영국의 역사] (16) 리처드 2세의 몰락과 14세기 잉글랜드의 사회상 [1] 신불해 2013-09-04 6189
34 영국사 [영국의 역사] (15) 리처드 2세와 농민반란 신불해 2013-09-03 5259
33 영국사 [영국의 역사] (14) 백년전쟁의 첫번째 국면과 의회의 발달 신불해 2013-09-01 5548
32 2차 포에니전쟁 리비우스 21권 3권 [1] 재원 2013-08-30 4171
31 영국사 [영국의 역사] (13) 에드워드 3세와 백년전쟁의 서막 신불해 2013-08-28 5531
30 영국사 [영국의 역사 : 외전] (7) 결정적인 승리 [3] 신불해 2013-08-27 4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