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원현님의 블로그



우후虞詡의 자는 승경升卿이며 진국陳國 무평현武平縣 사람이다. 조부 우경虞經은 군현의 옥리獄吏였는데, 법을 집행하는 것이 공평하고 타당하였으며 죄 지은 자를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에 힘썻다. 매년 겨울 달이 하늘에 뜨면 그 형상을 항상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일찍이 칭하기를,

 

"동해의 어공於公은 존경받아 이문里門이 세워졌고, 그의 아들 어정국於定國은 승상丞相에 이르럿다. 나는 십육 년간 옥사의 일을 결정했음에도 어공에 미치지 못했지만, 어찌하여 그렇게 됨을 감히 바라지 않겠는가! 내 자손이 어찌 반드시 구경에 오르지 못하겠는가?"

 

라 했다. 이로 인하여 우후의 자를 승경이라 하게 되었다.

 

 

우후는 열두 살에 능히 『상서尚書』에 통달했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조모에게 길러졌다. 현의 순손順孫으로 천거되니 국상國相은 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관리로 삼고 싶어했다. 우후는 말했다.

 

"조모의 연세가 아흔이라 제가 봉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상은 이에 우후를 관리로 삼으려던 것을 그쳤다. 뒤에 조모가 죽자 삼년상을 마친 후 태위太尉 이수李修의 부에 벽소되어 낭중郎中이 되었다.

 

 

영초永初 사 년, 강족羌이 반란하고 난리를 일으켜 병주幷州·양주涼州를 잔혹히 깨뜨렸다. 대장군大將軍 등즐鄧騭은 사방에서 군사로 부역했지만, 그 일은 서로를 돕지 못했다. 공경公卿들은 양주를 버리고 병주를 북쪽 변경으로 하고자 모여서 의논했다. 등즐은 말했다.

 

"비유하건대 이것은 마치 옷이 망가진 것과 같으니, 하나를 허물고 서로 도우면 오히려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지 않으면 장차 두 주를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와 의견이 같았다. 우후는 이를 듣고 이수에게 말했다.

 

"남몰래 들은 바로는 공경들이 양주를 버리자는 계책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리석은 계획으로 그를 따른다면 편안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선제先帝가 땅을 개척하여 수고로이 일한 뒤에야 그 땅이 편안해졌는데, 이제 작은 손실을 탄식하며 그것을 들어 버리려고 합니다. 양주를 버리면 곧 삼보三輔가 변방이 되고, 삼보가 변방이 되면 곧 원릉園陵이 홀로 바깥에 있게 될 것입니다. 선비들이 말하기를 '관서關西에서는 장군이 나오고 관동關東에서는 재상이 나온다.'고 합니다. 보아하니 그 병사들은 장하고 날래어 주가 주는 이익이 손실보다 큽니다. 지금 강족이 감히 삼보로 들어와 근거로 삼지 못하는 것은 심복의 해자害者가 양주의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땅의 사람들은 칼날을 잡고 날카로움을 밀어내어 돌아봄이 없는데, 그것은 그들의 한漢의 신하인 까닭입니다. 그 지경을 버리고 사람들을 여럿 옮기는 것은 편안한 땅을 거듭 옮기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다른 뜻이 생겨날 것입니다. 만일 호걸과 영웅을 모아 동쪽 자리에 거둔다면 맹분孟賁·하육夏育이 태공太公의 장수가 되더라도 두려워하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이 옷을 기워 완전하게 하려 한다면, 저는 그것을 두려워하여 등창이 나 밥을 먹을 때마다 침노함이 무한할 것입니다. 양주를 버리는 것은 바른 계책이 아닙니다."

 

이수가 말했다.

 

"내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했다. 미자微子의 말은 거의 패한 나라의 일이었는데, 그를 본받아 헤아린다면 마땅히 편안함이 있겠는가?"

 

우후가 말했다.

 

"지금 양주의 땅이 동요하여 사람들의 뜻이 편안하지 못하는데, 남몰래 근심을 마치니 틀림없이 비상하게 변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정성으로 마땅히 네 부와 구경에게는 각각 저 주의 수많은 사람을 벽소하게 하며, 그 목수牧守의 장자와 형제를 모두 남아도는 관직으로 삼아 바깥의 일에만 힘쓰게 하고, 그들의 공훈에 답하여 내직內職에 이르게 한다면 그들의 간사함을 막을 수 있는 것을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이수는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다시 네 부를 모아 모두 우후의 의견을 논의하게 했다. 이에 서쪽 주의 호걸들을 벽소하여 연속掾屬으로 삼고, 목수의 장자와 형제들을 낭郎으로 삼아 위로했다.

 

 

등즐의 형제는 우후와 의견이 달랐으므로 그에 대해 불평하며 관리의 법으로써 해하고자 했다. 뒤에 조가朝歌에서 도적 영계寧季 등이 수천 명으로 장리長吏를 공격하여 살해하고, 그곳에 주둔하여 무리를 모아 여러 해를 있었다. 주와 군이 이를 금할 수 없자 우후를 조가의 장으로 삼았다. 우후의 오랜 친구들은 우후를 조상하여 말했다.

 

"어찌하여 조가에서 죽음을 얻으려 하는가!"

 

우후는 웃으며 말했다.

 

"뜻을 구하지 않기는 쉽지만 일은 피하기 어려운 게 신하의 직분이오. 서려 얽힌 뿌리와 어클어진 마디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날카로운 병기를 구별하겠소?"

 

비로소 도착하여 하내태수河內大守 마릉馬稜을 만났다. 마릉은 우후에게 권하여 말했다.

 

"군은 유자이니 마땅히 묘당에서 계책을 계획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돌이켜 조가에 왔는가?"

 

우후는 말했다.

 

"처음 떠나던 날에 사대부들이 모두 찾아와 조상했지만, 저는 그들을 속여 그들이 저를 무능하다고 알게 했습니다. 조가는 한韓·위魏 땅의 요충지라 태행산太行山을 등지며 황하黃河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오창敖倉이 백 리 거리에 있어 청靑州·기冀州의 유민 만 수가 도망했습니다. 적은 창고를 열 줄 몰라 군의 기세를 묶고 있으며, 창고의 병사를 위협하며 성을 지키고 놀고만 있습니다. 천하의 오른쪽 팔이 끊어져도 이에 대해 근심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지금은 그들의 기세가 새로 성하니 그와 더불어 칼날을 다투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병사를 물리기를 꾀하지 않으니, 잠시 법과 계책을 너그러이 처리하여 구애받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벼슬에 취임하여 세 개의 영을 내려 장사를 널리 구하고 연掾과 사史의 아래에서 각각 이를 추천하게 했다. 사람을 공격하고 위협하는 자는 상으로 삼고,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훔치는 자는 그다음으로 삼고, 상복에 띠를 매고 가업에 종사하지 않는 자를 하로 삼았다. 백여 명을 거두어들이자 우후는 잔치를 열고 그들의 죄를 모두 용서하며 그들로 하여금 적 가운데 들어가 적을 밖으로 꾀어내어 노략질하게 하고, 곧 복병을 두고 적을 기다려 적 수백 명을 살해했다. 또 빈민 중 바느질할 수 있는 자를 몰래 보내어 적의 옷에 표시를 꿰매게 했는데, 그것으로 저자의 사람 중 적이 드러나 관리들에게 빈번히 사로잡혔다. 적은 이로 말미암아 놀라 흩어지고 모두 우후를 신명이라 일컫었다. 회령懷令으로 옮겨졌다.





뒤에 강족이 무도武都를 약탈하자 등태후鄧太后는 우후에게 장수의 지략이 있다고 여겨 무도태수武都太守로 옮기고, 가덕전嘉德殿으로 불러 두터운 상을 내렸다.





강족이 수천의 기세로 진창陳食과 휴곡崤谷에서 우후를 막아서자 우후는 군사를 멈췄다. 우후는 글을 올려 병사를 청하고 모름지기 병사가 이르면 나아가려고 했는데, 강족은 이를 듣고 초방현鈔傍縣에서 나뉘었다. 우후는 병사를 흩어 주야로 쉬지 않고 백여 리를 나아갔다. 관리와 선비로 하여금 두 개의 아궁이를 만들게 하여 날마다 갑절을 더하자 강족은 감히 그를 핍박하지 못했다. 어떤 이가 우후에게 물었다.

 

"손빈孫臏은 아궁이를 줄였지만 그내는 아궁이를 늘리고 있네. 병법에서 하루에 행군하는 것이 삼십 리를 못 넘게 하는 것은 일이 있기 전에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게 한 것인데, 오늘 또 이백 리를 나아간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후가 말했다.

 

"오랑캐의 군세는 많고 나의 병사는 적네. 천천히 행군한다면 곧 따라잡힐 것이지만, 빠르게 나아가면 저들은 우리의 행군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네. 오랑캐가 나의 아궁이가 날마다 늘어나는 것을 본다면 반드시 군의 병사가 와 영접한다고 말할 것인데, 아궁이는 많고 행군은 빠르니 반드시 우리를 뒤쫓기를 꺼릴 것이네. 손빈이 약하게 보인 것과 내가 강하게 보인 것은 지금 군의 세가 옛일과 같지 않기 때문이네."

 

군에 이르럿지만 병사의 수가 삼천을 채우지 못하자 강족은 만여 명의 군세로 적정을 포위하여 수십 일 동안 공격했다. 우후는 이에 군중에 영을 내려 강족 몰래 강노 대신 소노를 사용하게 했는데, 강족은 화살의 힘이 약하여 자신에게 이르지 못하자 급히 병사를 내어 우후를 공격했다. 우후는 이에 스무 강노로 한 명을 쏘게 했다. 표적에 맞지 않은 화살이 없자 강족은 크게 흔들려 물러났다. 우후는 이에 분발하여 성을 나가 강족을 쳐 수많은 자를 살상했다. 다음날 그 병사들로 진을 치고 동쪽 성곽의 문으로 나가 북쪽 성곽의 문으로 들어오게 했는데, 이를 의복을 바꾸며 수 번 반복했다. 강족은 병사의 수를 알 수 없어 서로 두려워하며 떨었다. 우후의 계책으로 적이 물러나자 우후는 몰래 오백여 명을 보내어 얕은 물에 매복하게 하고 닷새 동안 길을 달려갔다. 오랑캐가 과연 크게 달아나자 이를 엄습하여 크게 깨뜨리니 참획한 군세가 심히 많았다. 적은 이로 말미암아 패해 달아나 남쪽 익주로 들어갔다. 우후는 그들의 땅을 점거하여 나누고 백팔십 곳에 방벽을 쌓아 유민을 불러 돌아오게 했다. 임시로 빈민을 구호하니 군이 마침내 편안해졌다.

 

 

이보다 앞서 운반하던 길은 험준하여 다니기가 어렵고, 배도 수레도 통하지 못하여 당나귀와 말을 빌려 짐을 지웠는데, 한 마리의 품삯이 다섯 마리의 값에 이르럿다. 우후는 이에 스스로 장수·관리·선비와 함께 계곡과 내를 안행案行하여 저沮에서 하변下辯까지 수십 리를 나아갔는데, 돌을 모두 불사르고 나무를 모두 베니 조선의 길이 열렸다. 사람의 품삯이 바르게 되자 품파는 자를 고용하니, 이에 운송이 서로 통하여 한 해의 이익이 사천여 만 전이었다. 우후가 비로소 군에 이르니 호의 수가 겨우 만에 이르럿다. 땅이 편안해지자 남은 황무지에 유민을 불러 모았는데, 이삼 년을 보위하니 드디어 사만여 호에 이르럿다. 풍년이 들어 소금과 쌀의 값이 천해지니 수확량은 전해의 열 배였다. 연좌되는 법을 면했다.

 

 

영건永建 원년, 진선陳禪을 대신하여 사례교위司隸校尉가 되었다. 수 월을 보위하고 태부太傅 풍석馮石·태위 유희劉熹·중상시中常侍 정황程璜·진병陳秉·맹생孟生·이윤李閏 등을 상주하자 백관이 우후를 겉눈질하며 가혹하고 각박하다 일컫었다. 삼공이 우후를 탄핵하여 한여름에 묶어 두자 관리들은 이에 대해 근심했다. 우후는 글을 올려 상소했다.

 

「법이 금하는 것은 픙속의 제방이고, 형벌은 백성의 재갈과 고삐입니다. 지금 주에서 말하기를 군에 맡겼다 하고 군이 말하기를 현에 맡겼다 하며 다시 서로에게 멀리 맡기니 백성은 원망이 다하여 절로 얼굴은 현인이 되고 다한 절개는 어리석음이 되려 합니다. 신이 이 허물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모두 들추니 두 부가 신이 아뢰는 것을 두려워하며 죄를 속여 더했는데, 신이 장차 사어史魚의 죽음을 따른다면 곧 시체로써 간할 것입니다.」

 

순제順帝는 그 글을 살피고 사공司空 도돈陶敦을 면직시켰다.

 

 

이때 중상시 장방張防이 특히 권세를 부려 매양 청탁을 받았는데, 우후는 이를 여러 번 안건에 올렸지만 번번이 전해지지 않았다. 우후는 그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결박하여 정위에게 가 아뢰었다.

 

"옛 효안황제孝安皇帝가 번풍樊豐을 임용하자 적통이 어지러워져 사직이 망했는데, 지금 장방은 다시 위엄과 권세를 희롱하니 장차 국가의 무거운 화가 될 것입니다. 신은 장방과 같은 조정에서 더불어 일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삼가 스스로 몸을 묶고 이를 알리니, 신으로 하여금 양진楊震의 발자취를 좇지 않게 해 주십시오."

 

글로 이를 아뢰니 장방은 눈물을 흘리며 황제에게 호소하고 우후를 좌론하여 좌교左校로 보냈다. 장방은 우후를 반드시 해하고자 하며 두 날 동안 네 옥사를 널리 살폈다. 옥리가 우후에게 스스로 자기의 죄를 시인하라고 권하자 우후가 말했다.

 

"편안히 엎드려 구도歐刀를 받아 멀고 가까운 곳에 보일 것이오."

 

벼슬아치 손정孫程과 장현張賢 등은 우후가 충성으로 죄를 얻은 것을 알고 서로 이끌어 황제에게 가 우후의 사면을 빌었다. 손정이 말했다.

 

"폐하가 비로소 신 등과 더불어 일을 이루려 하는데, 항상 간신이 병이 되어 나라를 기울게 합니다. 지금 사람이 자리에서 자신만을 위하고 있는데 폐하께서는 어찌 선제를 등지려 합니까? 사례교위 우후는 폐하의 극진한 충신이지만 지금 사로잡혀 묶여 있고, 상시 장방은 숨겨진 죄가 명확히 밝혀졌지만 오히려 충성스럽고 선량한 마음을 꾸며 내고 있습니다. 지금 객성은 우림을 지키고 있지만 그것이 차지한 궁 안에서는 간신이 있습니다. 마땅히 급히 장방을 사로잡아 옥으로 보내어 변방의 하늘이 변하게 해야 합니다. 조서를 내려 우후를 내보내고 인수를 돌려보내십시오."

 

이때 장방이 황제의 뒤에 서 있자 손정은 장방을 꾸짖어 말했다.

 

"간신 장방은 어찌하여 전에서 내려가지 않느냐!"

 

장방은 어쩔 수 없이 동상東箱으로 달아났다. 손정이 말했다.

 

"부득이 장방을 급히 사로잡아야 하니 그를 쫓게 하지 마시고 태후께 동상을 구하십시오."

 

황제는 여러 상서尚書에게 이 일에 대하여 물었는데, 상서 가랑賈朗은 본디 장방과 친히 지냈던 터라 우후의 죄를 증명했다. 황제는 의심이 들어 손정에게 말했다.

 

"우선 나가 있으시오. 나는 방도를 생각해 보아야겠소."

 

이에 우후의 아들 우의虞顗는 문생門生 백여 명과 더불어 깃발을 들고 닷새 동안 중상시 고범高梵의 수레에 머리를 짖찢어 피를 흘렸다. 그들의 호소하는 말에는 억울함의 형상이 있었다. 고범이 궁에 들어가 이를 말하니 장방은 변방으로 옮겨지고 가랑 등 여섯 명은 죽거나 쫓겨났다. 곧 이날 우후를 사면하여 내보냈다. 손정은 다시 상소하여 우후의 큰 공을 말했는데, 그의 말에는 곧음이 너무 심히 지나친 데가 있었다. 황제는 이에 깊이 느껴 깨달아 우후를 다시 불러 벼슬을 주는 것을 낭들과 의논했다. 수일 후에 상서복야尚書僕射로 옮겨졌다.

 

 

이때 장리와 이천 석의 관리들은 속전을 받고 귀양에 처한 백성을 면죄시키곤 했다. 이를 일컽어 의전義錢이라 했다. 이들은 빈민에게 청탁을 받아 재물을 쌓았으며, 수령守令은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거두어들였다. 우후가 상소하여 말했다.

 

「원년元年이 왔지만 가난한 백성 중 글과 말을 장리에게 받아 취한 자는 백만이 넘습니다. 흉흉한 민심을 막지 못하여 귀양에 처한 자가 수만에 이르럿지만, 삼공과 자사들은 이것을 줄여 말하고만 있습니다. 영평永平·장화章和 연간에 주와 군의 주졸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사공이 탄핵당하자 주와 군현들은 모두 그와 연좌되어 지위가 떨어졌습니다. 이제는 마땅히 앞의 법을 좇아 권위와 법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에 우후의 글에 조서를 내려 주와 군들을 크게 책망했으며, 귀양에 처한 자들이 속전을 내는 것을 그치게 했다.

 

 

이보다 먼저 영양寧陽의 주부主簿가 궐에 이르러 현령縣令의 사특함을 호소했지만, 예닐곱 해가 지나도록 살피지 않았다. 주부는 글을 올려 말했다.

 

「신은 폐하의 아들이고 폐하는 신의 부친입니다. 신은 글을 백 번이나 올렸지만, 폐하가 살피지 않으니 어찌 북쪽의 선우單于에게 가 이 원망을 고하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이에 크게 노하여 그 글을 상서에게 보이자 상서는 주부를 대역이라 탄핵했다. 우후는 이를 논박하여 말했다.

 

"송사당한 주부가 부군을 원망했지만, 백 번을 올려도 닿지 않았으니 이는 맡은 관리의 과오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나 주살하기에는 부족합니다."

 

황제는 우후의 말을 받아들여 훈계를 할 뿐이었다. 우후는 여러 상서에게 말했다.

 

"소인에게 원망이 있어 천리가 멀다 않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살가죽을 벗기며 궐에 이르러 호소했는데, 이를 다스리는 자가 없으니 어찌 이가 신하의 의로움인가? 군들과 저 혼탁한 장리가 어찌하여 친하겠는가?"

 

이 말을 들은 자들은 모두 부끄러워했다. 우후는 또 상소하여 말했다.

 

"태랑台郎이 직에 나타났으니 섬기는 자로 섬돌을 오르내리게 해야 하지만, 지금은 한 군과 일고여덟 주에도 사람이 없습니다. 마땅히 한결같이 공평히 하여 따르게 함으로써 천하가 기대하게 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이 황제에게 아뢰어 의논하고 많은 자를 발탁하여 기용했다.

 

 

우후는 낱낱이 간하는 것을 좋아하여 법을 어기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러 번 권세 있는 외척을 거슬럿다. 아홉 번 견책을 당하고 세 번 형벌을 만났지만 굳세고 바른 성품은 늙어서도 굽혀지지 않았다. 영화永和 초 상서령尚書令으로 옮겨지고 관직의 임기가 끝나자 벼슬을 떠났다. 조정은 그의 충정을 생각하여 다시 조정으로 불렀지만 우후가 때마침 죽어 불러오지 못했다.

 

 

우후는 임종에 이르자 그의 아들 우공虞恭에게 말했다.

 

"나는 군자의 곧은 길로 부끄러움 없이 다녔지만, 아직도 조가의 장일 때 수백 도적을 살해한 것을 뉘우친다. 그들 중 어찌 원통하지 않은 자가 있겠느냐. 스스로 이십여 년 동안 가문을 일 구도 더하지 않으며 살아왔지만, 이것은 하늘에서 죄가 될 것이다."

 

 

우공은 준걸의 재주가 있었다. 관직은 상당태수上黨太守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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