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역사문



양근(梁慬)의 자는 백위(伯威)이고, 북지(군) 익거(현) 사람이다. 아버지 양풍(梁諷)은 주州의 우두머리[자사]였다. 영원 원년(89)에 거기장군 두헌(竇憲)이 (북)흉노를 치러나가면서 양풍을 군사마로 삼고는 시키기를, 먼저 금비단[金帛]을 가져다가 북선우北單于에게 주어 (우리)나라의 쩌렁쩌렁한 너그러움[德]을 알려주라고 했다.

(그러자) 그 붙좇아 들어온 이가 1만 사람을 넘었다. 뒷날 두헌의 뜻은 (환관 따위에 의해) 꺾여 없어지고 (두헌은) 무위(군)에서 머리가 깎인 채 힘든 일[髡輸]을 해야하는 (벌을 받았는데) 무위태수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를 죽였다. 두씨가 싹 없애져버린 뒤에야 화제(和帝)는 그 두헌의 (허물이) 꾸며진 것임을 알고 양근을 불러 낭중(郞中)으로 삼았다.

양근(梁慬)은 날쌤이 있었고 늘 터질듯이 공명(功名)을 좋아했다. 처음엔 거기장군 정홍(鄧鴻)의 사마가 되었는데 다시 옯겨져 연평 원년(106)에 서역부도위(西域副校尉)가 되었다. (그리하여) 양근은 가면서 하서(河西)에 이르렀는데 마침 서역 여러 나라가 (한나라에) 등을 돌려 (서역)도호 임상(任尙)을 소륵에서 쳤다. 임상이 (조정에) 글을 올려 도움을 찾자 (조정은) 글을 내려 양근을 시켜 하서 4군의 강 오랑캐[羌胡] 5,000 기병을 거느리고 치달려 그 (임상을) 찾아가게 했다. 양근이 아직 다다르지 않은 채인데 임상은 벌써 흩어졌었다. (그리하여) 임상이(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나라로) 되돌아가게 되자, 기도위 단희(段禧)는 (서역)도호가 되고 서역장사 조박(趙博)은 기도위가 되었다.

단희와 조박(趙博)은 타건성(它乾城)을 지켰다. 타건성은 작아서 양근은 단단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구자왕 백패에게 그럴듯하게 말을꾸며 들어가서 함께 그 성을 지키고 싶다고 이야기 했고, 백패는 이를 들어주었다. (백패의) 벼슬아치[吏人]가 굳게 말렸으나 백패는 듣지않았다. 양근은 (성에) 들어가자 장수를 시켜서 둘러 단희와 조박을 맞아들이라고 하니 군사가 다해서 8∼9천 사람이었다.

(이에) 구자의 벼슬아치가 나란히 그 왕에게 등을 돌리고, 함께 등돌린 온숙 및 고묵의 몇 만 병사와함께 성을 에워쌌다. 양근 등은 나아가 싸워 그들을 크게 쳐부셨다. 병사가 늘어선지 몇달이 되자 오랑캐[胡] 무리는 져 달아났고, 이김을 타고 뒤쫓아가 치니 얼추해서 벤 것이 1만 머리요, 잡은 것이 포로[生口] 몇 천 사람과 낙타 따위의 가축 몇 만 마리였다. 구자는 이리하여 무던해졌다. 하지만 길은 아직도 막혀있어 알리는 글[檄書]이 뚫리지 못함이 1해남짓 지나자 조정은 이를 걱정했다. 대신[公卿]들이 이야기하기를 서역은 멀리 떨어져있는데다 자주 등을 돌리니, 병사가 밭일하며 머물게함은 그 쓸모가 벌써 없어졌다고 했다. 영초 1년(107), 마침내 도호를 물리고 기도위 왕홍王弘을 시켜 관중의 병사를 일으켜 양근•단희(段禧)•조박(趙博) 및 이오로(伊吾盧)[=이오, Hami]와 유중柳中[Turfan 최남단의 오아시스]에서밭일하며 머물고 있는 병사들을 맞이해 데려오라고 했다.

(영초) 2년(108) 봄, (양근(梁慬)은) 돈황까지 돌아왔다. 마침 뭇 강(羌)이 되돌아섰기에 조정은 병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에서 이들을 치게 하였다. (조정은) 미리 글을 내려 양근에게 삼가머물면서 여러 군(軍)을 도우라고 시켰다. 양근은 양근은 장액(군) 일륵(현)[감숙 산단山丹동남]에 이르렀다. 강(羌)의 여러 씨붙이[種] 10,000 남짓한 사람이 정후亭候[초소]를 쳐 아전[吏人]을 죽이고 빼앗았다. 양근은 병사를 내보내 쳐서 그들을 크게 깨고는 이김을 타고 소무(현)[감숙 장액 서북]까지 뒤쫓았다. 됫놈[虜]은 마침내 흩어져 달아났으나 여기서벗어날 수 있었던 이는 열에 둘∼셋이었다. (양근이) 고장[감숙 무위武威]까지 이르자 강姜의 높은 사람[大豪] 300 남짓한 사람이 양근을 찾아와 (머리를) 구부렸다. (양근은) 다 달래고 일깨워 옛 땅으로 돌려보내게 했다. 하서 4군郡은 다시 느긋해졌다.

양근은 (조정이) 시킨대로 마땅히 금성(군)[치소는 윤오允吾(감숙 난주蘭州서북)]에 머물고 있어야했는데, 강(羌)이 (이리저리) 옯겨가며 삼보(三輔)를 쑤셔대는데 (전한 임금의) 무덤떼[園陵] 가까이까지 몰려왔다함을 듣고는 곧 병사를 이끌고 찾아가 그들을 쳐 무공(武功)의 미양관(美陽關)[1]에서 (이리저리) 옯겨가며 싸웠다. 양근은 진에 있다가 (칼 따위에 맞아) 다쳤음에도 돌보지도 않고 잇달아 저들을 깨 달아나게 했다. (이리하여) 붙잡혀갔던 생구(生口)[포로]를 얻어 다 되돌려보냈고, 말을 비롯한 가축과 재물을 몹시 여럿 빼았으니, 강(羌)은드디어 흩어져 내뺐다. 조정은 이를 갸륵하다 하여 자주 옥새가 찍힌 글로 고달픔을 덜어주면서, 서쪽의 일을 맡겨 여러 군(軍)을 부리게 하였다.

[1] 주석에 “미양은 현의 이름이다. 옛 성은 무공현(섬서 무공 서북)에서 북쪽으로 7리 되는 곳에 있는데, 이 곳에 관(문)을 두었다.”고 했다.

영초 3년(109) 겨울, 남(흉노) 선우와 오환의 대인大人[추장]이 함께 돌아서니 대사농 하희(何熙)에게 거기장군 노릇을 한동안 하게하여 중랑장 방웅龐雄을 부(장)으로 삼고 우림오교에 딸린 병사1를 거느르게 했으며 게다가 가장자리땅 10 고을[郡]2의 병사 20,000 남짓한 사람을 일으켜 거느리게 했다.

또 요동태수 경기(耿夔)에게 선비의 여러 씨붙이[種]를 이끌고함께 저들을 치게하면서 글을 내려 양근(梁慬)에게 도요장군 노릇을 한동안 하게했다. 방웅과 경기는 함께 (남)흉노의 오건일축왕(奧鞬日逐王)을 쳐 그를 깼다. (남흉노) 선우는 이에 몸소 이끌고와 (사흉노)중랑장 경충(耿种)을 미직(美稷)[내몽고 준가르 북]에서 에워쌌다. 잇달은 싸움이 몇 달이었고, (흉노가) 이곳을 치는 것이 더욱 가파르게 되자 (경)충은 (서둘러야함을알리는) 글[檄]을 보내 도움을 찾았다.

이듬해(110) 1월, 양근은 8,000 남짓한 사람을 거느리고 (경충을) 치달려 찾아가 속국(도위)의 옛 성3까지 이르러 흉노 좌장군 및 오환 대인과 싸워 쳐부셨다. (그리하여) 이들의 높은이[渠帥]를 베고 3,000이 넘는 사람을 죽였으며,이들의 아내와 아들을 사로잡고 재물을 몹시 여럿 빼앗았다.

(남흉노) 선우는 다시 몸소 7∼8,000 기병을 거느리고 맞받아 쳐 양근을 에워쌌다. 양근은 갑옷을 입고 달려나와 치면서 다가오는 이를 다 깨버리니 (남흉노) 됫놈[虜]은 드디어 물러나 호택虎澤4으로 돌아갔다.

(영초 4년) 3월, 하희의 군(대)는 오원(군) 만백(현)[내몽고 Urat(烏拉特)]에 다다랐는데(하희가) 몹쓸 앓음에 걸려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이에) 방웅을 보내 양근 및 경충과 함께 보병과 기병 6,000 사람으로 호택을 치게했다. 병영이 잇달아서 차츰 앞으로 나아가자 (남흉노) 선우는 무서워 어쩔 줄 몰라해서 좌오건일축왕(左奧鞬日逐王) 을 보내 양근에게 찾아와 항복을 빌었다. 양근은 이에 병사를 크게 벌여 세워놓고 이를 받아들였다. (남흉노) 선우는 모자를 벗고 맨발로 얼굴이 앞으로 나오게끔 (두손을 뒤로) 묶인채 이마를 조아렸고, 볼모를 바쳤다.

마침 (하)희가 군대[師] 안에서 죽었기에 곧 양근을 도요장군으로 삼았다. 방웅은 되돌아와서 대홍려가 되었다. (방)웅은 파군[치소는 강주(江州) (중경重慶)] 사람인데 날래고 꾀가 있었으며 명장이라 일컬어졌다.

[1] 둔기屯騎, 월기越騎, 보병步兵, 장수長水, 사성射聲이라는 다섯 교위에 배속된 근위병.

[2] 주석에 따르면 10군郡이란 오원, 운중, 정양, 안문, 삭방, 대군, 상곡, 어양, 요서,우북평을 말한다.

[3] 『자치통감』호삼성 주에 “『한서』지리지에 서하(군) 미직현은 속국도위의 치소가 된다고 했다. 옛 성은 아마 미직현 경계에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4] 『자치통감』호삼성 주에 “『한서』지리지의 서하군 곡라穀羅현 (조에) 무택武澤은 서북쪽에 있다고 했다. (안)사고는 당나라의 휘諱를 피해 ‘호虎’를 ‘무武’로 삼은 것이다.”고 했다.

이듬해(111), 안정, 북지(北地), 그리고 상군이 다 강(羌)의 쑤셔댐을 입어 곡식은 값비싸지고 사람들은 (딴곳으로) 흘러나가니 (세 고을은) 스스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조정은) 양근 에게글을 내려 가장자리땅의 병사를 일으켜 (안정, 북지(北地), 상군) 세 고을[郡]의 태수를 맞아데려오게 하고, (아울러) 벼슬아치[吏人]를 데려다 (우)부풍(扶風) [섬서 흥평興平]의 가장자리로 옯겨 놓으라고 했다. 양근은 곧 남선우 형의 아들인 우고도노(優孤塗奴)를 시켜 저들을 맞아들이게 했다. 마치고 돌아오자 양근은 (우고)도노가 저들의 집안 사람을 맞아 모시는 데힘씀이 있었다하여 벌컥 강후(羌侯) 인수(印綬)를 주었다. (때문에 조정에 묻지도 않고) 제멋대로 한다는 죄에 걸려 불리어 감옥에 떨어져서 죄값을 받게 되었다. 이듬해(112), 교서랑 마융(馬融)이 글을 올려 양(근)과 호강교위 방참(龐參)은 (잘못이 없다고) 하소연하자, (조정은)글을 내려 형(벌)로부터 놓아주었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후한서』) 방참(열)전에 있다.

마침 강(羌)이 돌아서서 삼보를 쑤셔댔고 관중[섬서성]에선 도적떼가 일어나니 (조정은) 양근을 알자로 삼아 병사를 이끌고 그들을 치게 했다. (양근은) 호현(湖縣) [하남 영보(靈寶)시 서북의 문경閿卿진 서남]에 이르러 앓음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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