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단재 신채호에 관한 노트


경엄(耿弇)의 자(字)는 백소(伯昭)이며,부풍(扶風)의 무릉인(茂陵人)이다. 그 선조(先祖)는 무제(武帝) 때 이천석(二千石)의 관리(官吏)로 거록(巨鹿)에서 이사를 한 것이다. 아버지 경황(耿況)으니 자(字)는 협유(俠遊)로 명경(明經)에서 랑(郎)이 되어,왕망(王莽)의 종제(從弟)인 급(伋)과 안구선생(安丘先生)에게서《노자(老子)》를 함께 배워 후에 삭조연솔(朔調連率-왕망의 개제로 상곡태수)이 되었다. 경엄은 어려서 배우기를 좋아하여 부업(父業)을 닦았다. 항상 군위(郡尉)의 기사(騎士)의 시험과 기고(旗鼓-깃발과 북)을 세우는 것 치사(馳射-달리며 활쏘기)를 익히는 것을 보며 이로 인해 항상 장수(將帥)의 일을 좋아했다.

왕망(王莽)이 패(敗)하고 갱시(更始---경시제: 23-25)가 서는 때에 미쳐,여러 장수들로 땅을 경략(經略)하는 자들이 전후로 많이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수령(守令)을 문득 바꾸곤 했다. 경황은 왕망의 둔 이래의 자리에 불안을 품었다. 이 때,경엄은 나이 21로 곧 경황의 봉주(奉奏)를 사(辭)하러 갱시(更始)에게 이르러 인하여 공헌(貢獻)을 바치며 그로써 자고지의(自固之宜)를 다지고자 했다.


송자(宋子)까지에 이르러 왕랑(王郎: 王郎)을 불러 성제(成帝)의 아들 자여(子輿)를 사칭(詐稱)하여 한단(邯鄲)에서 기병(起兵)함에,경엄은 관리(官吏) 손창(孫倉)·위포(衛包)를 따라 길에서 함께 공모(共謀)하며 말하기를


"유자여(劉子輿)는 성제(成帝)의 정통(正統)으로 이를 버리고 귀순치 않고 멀리 가면 어쩌리?"


라 했다. 경엄이 칼자루에 손을 대며


"자여(子輿)는 폐적(弊賊)일 뿐이며 결국 항노(降虜)가 될 것 뿐이다. 내가 장안(長安)에 이르러 국가(國家)와 더불어 어양(漁陽)·상곡(上谷)의 병마의 씀을 진(陣)하고 도로 태원(太原)·대(代)의 군(郡)으로 나와 반대로 수십일간 돌아와서 돌기(突騎)를 다시 발(發)하니 오합지중(烏合之眾)들의 삐걱임이 꺽이고 썩어 빠진 것과 같다. 공등(公等)이 이를 알지 못하고 거취(去就)함을 보니 멸족(滅族)이 머지 않았소!"


라 하였다. 창(倉)·포(包)는 따르지 않고 곧 왕랑(王郎)에게 도망해 항복했다.

경엄은 도중에 광무(光武)가 노노(盧奴)에 있음을 듣고 곧 북으로 달려 상알(上謁-알현)하니,광무(光武)가 하리(下吏)를 맡겼다. 경엄은 그래서 호군(護軍) 주우(朱祐)에게 말해 돌아가 발병(發兵)함을 구하여 이로써 한단(邯鄲)을 평정하였다.

광무(光武)가 웃으며


"어린 아이치고 대의(大意)가 있구나!"


라며 수번 불러 고고 은위(恩慰)를 더했다.

경엄이 인하여 광무(光武)를 따라 북으로 계(薊)에 이르렀다. 한단의 군사들이 바야흐로 도착함을 듣자 광무(光武)는 장차 남으로 돌아가기를 바래 관속(官屬)을 불러 의론을 붙였다.

경엄이 말하기를


"지금 군사들이 남쪽을 따라가는데 남행(南行)은 불가합니다. 어양태수(漁陽太守) 팽총(彭寵)은 공(公)의 읍인(邑人)이고 상곡태수(上谷太守) 는 경엄의 아비입니다. 이 양군(兩郡)을 발(發)하면 탄현(控弦-궁수) 만기(萬騎)가 있는데 한단은 족히 우려할 게 없습니다"


라 하였다.

광무(光武)와 관속(官屬)이 복심(腹心)으로 다 부정하면서 말하기를


"죽음에도 남수(南首)한다는데,어찌하여 북행(北行)하여 주머니 속에 든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광무(光武)가 경엄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는 내가 북도(北道)의 주인(主人)이라는 것이다"


라 했다. 계(薊)의 난리를 만나 광무(光武)는 곧 남쪽으로 달려 관속(官屬)들은 각기 분산(分散)했다.

경엄은 창평(昌平)으로 달려 경황에게 나가서 인하여 경황에게 구준(寇恂)을 시켜 동으로 팽총(彭寵)과 약속해 각기 돌기(突騎) 이천필(二千匹)과 보병(步兵) 천명(千名)을 발하게 했다.

경엄은 경단(景丹)·구준(寇恂)과 더불어 어양(漁陽)의 군사를 합군(合軍)하여 남으로 가서 지나며 왕랑(王郎)의 대장(大將)·구경(九卿)·교위(校尉) 이하의 사백여 수급을 참하고 인수(印綬) 125, 절(節) 2를 취했으며 삼만급(三萬級)을 참하면서 탁군(涿郡)·중산(中山)·거록(巨鹿)·청하(清河)·하간(河間) 등 무릇 22현(縣)을 얻어 곧 광무(光武)가 있는 광아(廣阿)로 갔다.

이 때,광무(光武)는 바야흐로 왕랑(王郎)을 공격하며 이군(二郡)의 병사들에게 전언(傳言)으로 한단이 온다들으니 모두가 두려워했다. 곧 영(營)에 이르러 상알(上謁)했다.

광무(光武)가 경엄 등을 보고 말하기를 "마땅히 어양(漁陽)·상곡(上谷)의 사대부(士大夫) 함께 이 대공(大功)을 함께 하여야 할 것이다"라 하자 모두가 이로 편장군(偏將軍)을 삼고 그 병사들을 통솔하여 돌아오게 했다.

경황에게 대장군(大將軍)·여의후(興義侯)를 더하며 편비(偏裨)를 스스로 쓰게 했다. 경엄 등은 곧 따라 한단(邯鄲)을 뽑아버렸다.

이 때,갱시(更始)가 대군태수(代郡太守) 조영(趙永)을 정벌(征伐)하니 경황은 조영을 권하여 부름에 응하지 말라 하며 광무(光武)에게 가라고 령(令)을 내렸다. 광무(光武)는 조영을 보내 군(郡)을 회복했다.

조영이 북쪽으로 돌아가니 대군(代郡)의 령인 대령(代令) 장엽(張曄)가 성에 근거하여 배반하면서 흉노(匈奴)·오환(烏桓)을 불러들여 서로 원조하였다. 광무(光武)는 경엄의 아우 경서(耿舒)를 복호장군(復胡將軍)으로 삼아 장엽를 치게 해 깨뜨렸다. 조영이 이렇게 군(郡)을 회복했다. 이때, 오교적(五校賊) 이십여만 명이 북쪽으로 상구(上谷)를 도둑질했고,경황이 경서와 더불어 연이어 이를 격파하니 적들은(賊黨) 모두 퇴주(退走)했다.

갱시(更始)가 광무(光武)의 위성(威聲)이 날로 성(盛)해감을 보고,군신(君臣)들이 의심하여 사신을 보내 광무(光武)를 세워 소왕(蕭王)으로 삼고, 령(令)으로 병사를 그치게 하여 제장(諸將)들 중 공(功)이 있는자들과 더불어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모증(苗曾)을 보내 유주목(幽州牧)으로 삼고,위순(韋順)은 상곡태수(上谷太守)로, 채충(蔡充)은 어양태수(漁陽太守)로 삼아 아울러 북(北)쪽의 부(部)를 처리했다.

이때,광무(光武)는 한단궁(邯鄲宮)에 거주하며 온명전(溫明殿)에 낮에 누웠다. 경엄이 들어가 상(床) 아래에 몰래 청(請)하여 말하기를 "


지금 갱시(更始)는 실정(失政)하고 군신(君臣)은 서로 음란(淫亂)하며,제장(諸將)들은 기내(畿內)에서 명을 멋대로 하여 귀척(貴戚)이 도내(都內)를 종횡(縱橫)한답니다. 천자(天子)의 명(命)은 성문(城門)을 나서지 못하고 목수(牧守)가 있으면 잠깐 동안 금새 바뀌여 백성(百姓)들은 따를 바를 알지 못하고 사인(士人)들도 감시 안정되지 못합니다. 재물(財物)의 노략(虜掠)고 부녀(婦女)의 겁략(劫掠)이 있고,금옥(金玉)을 품은 자는 살아이르지 못합니다. 원원(元元)들은 고심(叩心-가슴을 칢)하여 고쳐 망조(莽朝-왕망의 조정)을 생각하니다. 또한 동마(銅馬)·적미(赤眉)의 수십 무리는 그 수가 십백만(十百萬)으로 성공(聖公)은 능히 가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패(敗)함이 머지 않았으니 공(公)은 먼저 남양(南陽)을 일을 도모하여 백만(百萬)의 군대를 깨뜨리고 지금 하북(河北)을 정(定)하여 천부(天府)의 땅을 근거했습니다. 의(義)로써 정벌(征伐)하니 향응(響應)이 발호(發號)하고 천하(天下)에 격서(檄書)를 전하여 정합니다. 천하(天下)는 지중(至重)하여 다른 성(姓)에게 얻게 함은 불가합니다. 사신들로 서방(西方)을 따라 온자들에게 들으니 병사를 그친다하나 따를 수 없습니다. 지금 관리와 선비로 사망(死亡)하는 자들이 많고 경엄은 원(願)컨대 유주(幽州)로 돌아가 더욱 정병(精兵)을 발(發)하여 대계(大計)를 모으겠습니다"


라 하였다.

광무(光武)가 크게 기뻐하며 경엄을 대장군(大將軍)에 배(拜)하며 오한(吳漢)과 더불어 북으로 유주(幽州)의 10 군(郡)의 병사들을 발(發)하였다.

경엄이 상곡(上谷)에 도착해 위순(韋順)·채충(蔡充)을 거두어 참(斬)하였다. 오한 역시 묘증(苗曾)을 주살하였다.

이에 유주(幽州) 병사들을 다 발(發)하여 이끌고 남으로 가서 광무(光武)를 따라 동마(銅馬)·고호(高湖)·적미(赤眉)·청독(青犢)을 격파(擊破)하고 또 우래(尤來)·대창(大槍)·오번(五幡)을 원씨(元氏)에서 쫓아갔으며, 경엄)이 항상 정기(精騎)를 이끌고 군사의 선봉이 되어 이를 깨뜨려 달아나게 했다. 광무(光武)가 승전(勝戰)을 타서 순수(順水) 위로 가니, 노(虜)들이 위급(危急)하여 거의 죽기로 싸웠다. 이 때,군사(軍士)가 피폐(疲弊)하여 곧 대패(大敗)해 달아나 돌아와서 범양(範陽)에 벽(壁)을 쳤다. 수일 후에 떨쳐일어나 적도(賊徒)들도 퇴거(退去)하고 따라쫓아가 용성(容城)·소광양(小廣陽)·안차(安次)에 이르러 이를 연전연파(連戰連破)했다.

광무(光武)가 계(薊)로 돌아가 다시 경엄을 오한(吳漢)·경단(景丹)·개연(蓋延)·주우(朱祐)·비동(邳彤)·경순(耿純)·유식(劉植)·잠팽(岑彭)·제준(祭遵)·견담(堅鐔)·왕패(王霸)·진준(陳俊)·마무(馬武)의 13 장군(將軍)과 더불어 적당(賊黨)을 추격해 노동(潞東)과 평곡(平谷)에 이르러 재전(再戰)하게 해 수급(首級) 만삼천여(萬三千餘)를 참(斬)하고 곧 다 추격해 우북평(右北平)·무종(無終)과 토은(土垠)의 사이까지 가서 준미(俊靡)에 이르러 돌아왔다. 적당(賊黨)은 요서(遼西)·요동(遼東)으로 산입(散入)하여 혹은 오환(烏桓)·맥인(貊人)의 초격(抄擊)을 받아 모두 경략되었다.

광무(光武)가 즉위(即位)하자,경엄을 배(拜)하여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으로 삼았다.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경단(景丹)·강노장군(強弩將軍) 진준(陳俊)이 염신(厭新)의 적당(賊黨)을 오창(敖倉)에서 공격해서 다 깨뜨려 항복을 받았다.

건무(建武) 2년,다시 호치후(好畤侯)에 봉(封)하고,호시(好畤)·미양(美陽)의 2 현(縣)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3년, 연잠(延岑)이 무관(武關)에서 나와 남양(南陽)을 공격하고 몇 성을 함락했다. 양(穰) 사람 두홍(杜弘)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연잠을 따랐다. 경엄은 연잠 등과 양(穰)에서 싸워 이를 대파(大破)하고 삼천여급을 참수(斬首)하고 그 장사(將士) 오천여명을 생포(生捕)하며 인수(印綬) 삼백(三百)을 얻었다. 두홍(杜弘)은 항복하고 연잠은 수기(數騎)로 동양(東陽)으로 돌아 달아났다.

경엄이 따라 춘릉(舂陵)에 행(幸)하고 인하여 보고 자청(自請)하여 북쪽으로 상곡(上谷)의 병사로 나가지 않은 자를 거두어 팽총(彭寵)을 어양(漁陽)에서 평정하였으며 장풍(張豐)을 탁군(涿郡)에서 취하고 돌아와 부평(富平)·획색(獲索)을 거두며 동쪽으로 장보(張步)를 공격해 제(齊)나라 땅을 평정코자 했다. 황제가 그 뜻을 장(壯)히 여겨 이를 허락하였다.

4년, 조(詔)는 내려 경엄이 어양(漁陽)으로 진공(進攻)하게 했다. 경엄은 아버지가 상곡(上谷)에 근거하고 본래 팽총(彭寵)과 같은 공이 있으며 형제(兄弟)로 경사(京師)에 있는자가 없어 스스로 의심하고 감히 혼자 나가지 않으며 글을 올려 낙양(洛陽)에 이르기를 구하였다.

조(詔)로 알리기를


"장군(將軍)은 출신(出身)이 조상대로 나라를 위했고 적을 미워하여 공효(功效) 더욱 있거늘,어찌 미워하고 의심하여 (求征)을 바라겠는가? 더욱 왕상(王常) 함께 탁군(涿郡)에 둔병해서 방량(方略)---일을 해 나갈 방법(方法)과 계략(計略)---을 생각함에 힘쓰라"


로 했다.

경황은 경엄이 정벌을 후함을 듣고 역시 스스로 불안하여 경서의 아우 경국(耿國)을 보내 입시(入侍: 대궐(大闕) 안에 들어가 임금에게 뵘)케 했다. 황제가 이를 착하게 여겨 나아가 경황을 봉(封)하여 유미후(隃糜侯)로 삼았다.

곧 명(命)을 내려 경엄이 건의대장군(建義大將軍) 주우(朱祐)·한충장군(漢忠將軍) 왕상(王常) 등과 더불어 망도(望都)·고안(故安) 서산(西山)의 적당(賊黨) 십여영(十餘營)을 쳐서 다 깨뜨렸다. 이 때,정노장군(征虜將軍) 제준(祭遵)이 양향(良鄉)에 주둔(駐屯)하고 효기장군(驍騎將軍) 유휘(劉喜)가 양향(陽鄉)에 주둔하며 이로써 팽총(彭寵)을 막았다. 팽총은 아우 팽순(彭純)을 보내 흉노(匈奴)의 이천여기(二千餘騎)를 거느리게 하고 팽총 스스로 수만(數萬)의 병력을 이끌고 양도(兩道)로 나뉘어 제준(祭遵)과 유휘(劉喜)를 쳤다.

호(胡)의 기병(騎兵)이 군도(軍都)를 거치고 경서가 그 무리를 습파(襲破)하여 흉노(匈奴)의 양왕(兩王)들을 참(斬)하니 팽총이 곧 퇴주(退走)하였다. 경황이 다시 경서와 함께 팽총을 공격해 군도(軍都)를 취(取)하였다.

5년,팽총이 죽으니 천자(天子)가 경황의 공(功)을 축하하며 광록대부(光祿大夫)에게 지절(持節)하게해 경황을 맞아 갑제(甲第)와 봉조청(奉朝請)을 사(賜)하였다. 경서를 봉(封)하여 모평후(牟平侯)로 삼고 경엄을 오한(吳漢)과 함께 보내 부평(富平)과 획색(獲索)의 적도(賊徒)를 평원(平原)에서 쳐서 대파(大破)하게 하니 항복한자가 4만여명이었다.

인하여 조(詔)를 내려 나아가 장보(張步)를 토벌케 했다. 경엄이 항졸(降卒)들을 다 수집하고 부곡(部曲)을 결맹시키고 장수와 관리를 두며 기도위(騎都尉) 유흠(劉歆)·태산태수(太山太守) 진준(陳俊)을 거느리고 병력을 끌어들여 동쪽으로 가서 조양(朝陽)에서 제하(濟河)에 다리를 두어 건넜다.

장보(張步)가 이를 듣고 곧 그 대장군(大將軍) 비읍(費邑)을 시켜 역하(歷下)에 군을 두게 하여 병사를 나누어 축아(祝阿)에 주둔하며 따로 태산(太山) 종성(鐘城)에서 병영(兵營) 수십을 들어세우며 경엄을 기다렸다.

경엄이 강을 건넌다음 먼저 축아를 치고,새벽부터 공성전(攻城戰)을 시작 해가 중천에 오르기전 이를 뽑아버렸다. 그래서 포위의 일각을 열어서 그 무리가 종성(鐘城)으로 도망해 귀순하게 했다. 종성(鐘城) 사람들은 축아가 이미 붕궤함을 듣고 크게 두려워해서 곧 벽을 비우고 도망하였다.

비읍(費邑)은 동생 비엄(費敢)을 나누어 보내 거리(巨裏)를 지켰다. 경엄이 병사들을 나아가게 해 먼저 거리를 위협하고 여럿을 시켜 수목(樹木)을 베게 하여 새(塞)와 참호를 메운다고 큰소리쳤다.

수일후,어떤 항복한 자가 말하기를, 비읍이 경엄이 거리를 공격한다고 하여 와서 이를 구(救)하기를 도모했다. 경엄이 곧 군중(軍中)에 엄한 령(令)을 내려 공성기을 준비하고 제부(諸部)들에 칙(敕)을 내리고 삼일후에 힘을 다해 거리성(巨裏城)을 마땅히 치려했다.

은밀히 생구(生口-포로)들을 풀어어 도망할 수 있게 하였다. 귀순하여 경엄의 기일(期日)을 비읍에게 고하니, 비읍이 날짜가 되자 과연 스스로 정병(精兵) 삼만여(三萬餘)를 거느리고 이를 구원하려고 왔다. 경엄이 기뻐 제장(諸將)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공성기를 닦으려 하는 바는 비읍을 유도코자 한 것이다. 지금 오니 그 구하는 바와 맞아떨어진다"며 삼천명을 나누어 거리를 지키고 스스로 정병(精兵)을 이끌고 언덕에 높이 올라 합전(合戰)을 치러 이를 대파(大破)하고 진(陳)에 임하여 비읍을 참(斬)하였다.

곧 수급(首級)을 거두어 거리성(巨裏城) 안에 보이니 성안이 흉흉해 두려워 했고 비엄(費敢)은 무리를 이끌고 장보(張步)에게로 도망했다. 경엄이 다시 그 쌓이고 모인 바를 거두어 병사를 늘여세워 다 쳤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평정한 것은 40여 영(營)이며 곧 제남(濟南)을 평정했다.

이 때,장보(張步)가 극(劇)에 도읍하여 그 아우 장람(張藍)에게 정병(精兵) 이만명을 거느리게 해 서안(西安)을 지키게 하고 제군(諸郡)들의 태수(太守)가 만여명을 합쳐 임치(臨淄)의 서로 40리 거리를 지키게 했다.

경엄이 그 한복판까지 진군(進軍)하여 두 성의 사이에 거소를 정했다. 경엄은 서안성(西安城)이 작고 견고함을 보고 그 장람의 병사가 정예임과, 임치가 이름은 크나 실제론 공격이 쉬움을 보고는, 곧 칙서(敕書)로 여러 교위(校尉)들을 모았다.

다음 닷새후 서안(西安)을 공격했다. 장람이 이를 듣고 새벽과 밤에 경계하였다. 약속한 야반(夜半)에 이르자,경엄이 칙(敕)을 내려 제장(諸將)들 모두가 욕식(蓐食)을 하게 하고 밝을 때 모여 임치성(臨淄城)에 이르렀다. 호군(護軍) 순량(荀梁) 등이 이와 다투며 마땅히 속히 서안(西安)을 공격코자 했다.

경엄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서안은 듣기로 내가 이를 공격할 것이라 하여 밤낮으로 준비한다. 임치로 가면 불의에 이르니 반드시 놀랄 것이니 내가 하루정도 공격하면 반드시 뽑아낼 수 있다. 임치을 뽑아내면 서안이 고립되며,장람(張藍)은 장장보와 더불어 격절(隔絕)되니 반드시 다시 망해 갈 것이다. 소위 한번쳐서 둘을 얻음이라는 것이다. 만약 서안을 먼저 공각한다면, 종내 함락치 못하고 병사를 길러 성을 견고히 하니 사상(死傷)이 반드시 클 것이다. 이를 뽑아버린다고 해도 장람이 군대를 끌고 돌아가 임치로 가서 병사를 보아 합세(合勢)하여 사람의 허실(虛實)을 보고 우리가 적지(敵地)에 깊이 들어 차를 돌이킬 수 없음을 십여일간에 싸우지 못하고 곤궁히 된다. 제군(諸君)의 말에서 마땅함을 볼 수가 없다"


며 곧 임치(臨淄)를 공격해 반나절에 이를 뽑아버리고 그 성에 입거(入據)했다. 장람(張藍)이 이를 듣고 크게 두려워해 곧 그 무리를 거느리고 망명해 극(劇)으로 되돌아갔다.

경엄이 곤 군중(軍中)에 영(令)을 내려 망동하여 극(劇)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여 장보(張步)가 이를 때 이를 취(取)하여 장보를 격노(激怒)케 했다.

장보가 듣고 웃으며 가로되


"우래(尤來)·대동(大彤)의 십여만 무리로도 내가 다 그 영에 맞서 이를 깨뜨렸다. 지금 대경(大耿)의 병력은 저보다 작고 또 모두 피로(疲勞)하니 족히 두려워할게 어찌 있으랴!"


라 했다.

세 아우 장람(張藍)),·장홍(張弘)·장수(張壽)와 옛 대동(大彤)의 거수(渠帥: 우두머리) 중이(重異) 등의 병사 이십만(二十萬)을 불러 임치(臨淄)의 대성(大城) 동쪽에 이르러 경엄을 공격하고자 했다. 경엄은 먼저 병사를 임수(淄水)위로 나오게 해 중이(重異)와 만났는데 돌기(突騎)는 늘어서려 하니 경엄이 그 예봉(銳鋒)을 꺽어 장보가 감히 진격하지 못할까 두려워 약함을 보여 기(氣)를 돋구어 소성(小城)으로 오게 유인해 병사들을 안에 진(陳)치게 했다. 장보는 기(氣)가 성(盛)하여 직접 경엄의 병영(兵營)을 공격했고 유흠(劉歆) 등과 더불어 합전(合戰)했으며,경엄이 왕궁(王宮)의 무너진 대(臺)에 올라 바라보는데 유흠 등 선봉이 교전하는 것이 보여 곧 스스로 정병(精兵)을 이끌고 장보의 진지(陳地) 동성(東城)아래로 돌격해 이를 대파(大破)하였다.

날아오는 화살에 경엄의 정강이가 맞아 패도(佩刀)로 이를 꺾었는데 좌우(左右)는 몰랐다. 저녁에 이르러 파(罷)하였다. 경엄이 다음날 새벽에 다시 병사를 정돈하여 나섰다. 이 때,제(帝)는 노(魯)에 있으면서 경엄이 장보의 공격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와 이를 구하려고 했으나 구할 수 없었다.

진준(陳俊)이 경엄에게 이르기를


"극(劇)의 노병(虜兵)은 성(盛)하여 영(營)을 닫고 병사를 쉬게하여 이로써 상(上)께서 올때까지 두고보자"


라 말하니, 경엄은


"승여(乘輿-임금의 수레)가 닿으면 신자(臣子)는 마땅히 소를 잡고 술을 걸러 백관(百官)을 맞아야 하는데,도리어 적노(賊虜)를 군부(君父)에 보내는 건 뭔가?"


라 반문했다.

곧 출병(出兵)하여 대전(大戰)을 치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시 이를 대파(大破)하니 살상(殺傷)한 것이 무수(無數)히 많고 성(城) 안의 구덩이와 참호가 다 찰 정도였다.

경엄은 장보가 곤궁하여 퇴각하려는 것을 알고 미리 좌우익(左右翼)을 두어 복병(伏兵)을 두어 이를 기다리게 했다. 인정(人定-통행금지) 때에,장보가 과연 끌고 나와서 복병(伏兵)이 일어나 이를 쳐서 쫓아가 거매수(鉅昧水) 위에 이르렀고,팔구십리에 강시(僵屍)가 서로 이어졌고 치중(輜重) 이천여(二千餘) 양(兩)을 수득했다.

장보는 극(劇)으로 돌아왔고 형제(兄弟)들이 각기 병사를 나누어 흩어져 버렸다.

수일 후에,황제의 수레가 임치(臨淄)에 이르러 스스로 군(軍)을 위로하여,군신(群臣)들의 대회(大會)를 열었다. 황제가 경엄에게 이르기를


"옛날 한신(韓信)이 역하(歷下)를 깨뜨려 기초(基初)를 열었는데 지금 장군이 축아(祝阿)를 공격해 그 자취를 발(發)했소. 이는 다 제(齊)의 서계(西界)이므로, 공(功)이 족히 한신과 짝이 될만하오. 또 한신(韓信)이 이미 항복한 적을 습격(襲擊)했는데, 장군(將軍)은 홀로 경적(勁敵-억센 적)을 뽑아버리니 그 공(功)은 곧 한신보다 더 뛰어나오. 또, 전횡(田橫)은 역생(酈生)을 향(亨-삶음)하였는데, 전횡(田橫)이 항복함에 미쳐, 고제(高帝)가 조(詔)를 위위(衛尉)에게 내려 원수가 되는 것을 듣지 않았소.

장보(張步)는 전에 역시 복륭(伏隆)을 살해했는데 장보가 내귀(來歸)하여 명(命)을 받는다면 나는 당연히 조(詔)를 대사도(大司徒)에 내려 그 원한을 풀고 더욱 같이 잘 지낼 것이다. 장군(將軍)은 전에 남양(南陽)에서 이 대책(大策)을 세울 때 항시 낙락이합(落落難合)이었는데 뜻있는자가 일을 성취할 것이오!"


라 했다.

경엄이 그로 인하여 다시 장보를 추격했고 방보는 평수(平壽)로 도망했으며 웃옷을 벗고 군문(軍門)에 부질(斧锧)을 걸었다. 경엄이 장보를 전하여 행재소(行在所-임금의 있는 곳)로 가서 병사를 정돈해 그 성으로 들어갔다. 12 군의 깃발과 북을 심고,장보의 병사들에게 각 군(郡)에 이르러 깃발을 내리게 령(令)을 내리니 무리 무려 십여만(十餘萬),치중(輜重) 칠천여(七千餘) 양(兩)이 다 그치고 그 향리로 돌아가게 했다.

경엄이 다시 군사를 끌고 성양(城陽)에 도달해서 오교여당(五校餘黨)의 항복을 받으니,제(齊)이 땅이 다 평정되었다. 진려(振旅)하여 경사(京師)에 돌아왔다.

6년,서쪽으로 외오(隗囂)를 막아 칠(漆)에 둔병(屯兵)했다. 8년,상(上: 황제)을 따라 농(隴)에 갔다. 다음 해,중랑장(中郎將) 내흡(來歙)이 부(部)를 나누어 안정(安定)·북지(北地)의 제영(諸營)의 보(保)로 가서 다 함락했다.

경엄이 평정한 군(郡)이 무릇 46, 성(城)을 도륙한 것이 300으로 좌절됨이 없었다.

12년,경황이 질병(疾病)이 있어 승여(乘輿-임금의 수레)가 수차 임행(臨幸-임금의 행차)했다. 다시 경국(耿國)의 아우 경광(耿廣)을 들어 중랑장(中郎將)으로 삼았다.

경엄의 형제(兄弟) 여섯 사람이 다 청자(青紫-높은 자리)를 입고 의약(醫藥)의 대접을 받아서, 당대(當代)에 이같은 영화(榮華)를 누렸다. 경황이 죽하자 열후(烈侯)의 시호(謚號)를 내리고 작은 아들 경패(耿霸)가 경황을 습작(襲爵)하였다.

13년,경엄의 호읍(戶邑)을 늘이고 대장군(大將軍)의 인수(印綬)를 올렸다가 파(罷)하고 열후(列侯)로서 봉조청(奉朝請)을 주었다. 매번 사방(四方)의 다른 의론이 있으면 불러들여 주책(籌策)을 물었다. 나이 56인 영평(永平) 원년에 죽으니, 시호(謚號)를 민후(湣侯)라 하였다.

아들 경충(耿忠)이 사위(嗣位)하였다. 경충은 기도위(騎都尉)로 흉노를 천산(天山)에서 깨뜨리는데 공(功)이 있었다. 경충이 죽자, 아들 경풍(耿馮)이 사위(嗣位)하였다. 경풍이 죽으니, 아들 경량(耿良)이 사위(嗣位)하니 일명(一名) 무금(無禁)이다.

연광(延光: 122-125) 년간에,안제(安帝)의 누이동생인 복양장공주(濮陽長公主)에 상(尚-장가듦)하여 위(位)가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경량이 죽으니, 아들 경협(耿協)이 사위(嗣位)하였다.

유미후(隃麋侯) 경패(耿霸)가 죽으니,,아들 문금(耿文金)이 사위(嗣位)하였다 .문금(耿文金)이 죽으니,,아들 희(耿喜)가 사위(嗣位)하였다. 희(耿喜)가 죽으니,,아들 현(耿顯)이 사위(嗣位)하여 우림좌감(羽林左監)이 되었다. 현(耿顯)이 죽으니,,아들 원(耿援)이 사위(嗣位)하였다. 환제(桓帝)의 누이동생 장사공주(長社公主)에 상(尚)하여 하동태수(河東太守)가 되고, 후에 조조(曹操)가 경씨(耿氏)를 주륙(誅戮)할 때 오직 손자 홍(耿弘)만을 도와 보존되었다.

모평후(牟平侯) 경서가 죽으니,,아들 경습(耿襲)이 사위(嗣位)하였다. 현종(顯宗)의 딸 융려공주(隆慮公主)에 상(尚)하였다. 경습(耿襲)이 죽자 아들 경보(耿寶)가 사위(嗣位)했다.

경보(耿寶)의 여동생이 청하효왕(清河孝王: 劉慶)의 비(妃)가 되었다. 청하효왕의 아들인 안제(安帝)가 들어섰을 때에,아버지를 효왕(孝王)이라 하고, 어머니를 효덕황후(孝德皇后)로 높여부르고, 비(妃)---였던 경희(耿姬)---를 감원대귀인(甘園大貴人)이라 불렀다.

안제가 경보가 원구(元舅: 임금의 외삼촌)으로 중용함으로 해서 우림좌기(羽林左騎)를 감(監)독하게 시켜 위(位)가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고 내총(內寵)있는 자와 중상시(中常侍) 번풍(樊豐)과 황제의 유모(乳母) 왕성(王聖) 등에 붙어서 황태자(皇太子)를 참소하여 폐하여 제음왕(濟陰王)이 되게 하며, 태위(太尉) 양진(楊震)을 배척해 헐뜯어서 이에 대해 의논하는 자들이 원망하였다.

경보(耿寶)의 조카 경승(耿承)이 공주(公主)를 습작(襲爵)하여 임려후(林慮侯)가 되어 위((位)가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안제(安帝)가 붕(崩)하여 염태후(閻太后)가 경보 등이 총애있는 자들에 아부(阿附)하며 함께 부도(不道)를 행함을 들어 경보와 경승(耿承)을 면직하고 다 작위(爵位)를 낮춰 정후(亭侯)라 해서 경국으로 나아가게 했다. 경보가 도중에 자살(自殺)하여 경국을 없앴다.

대귀인(大貴人) 경희(耿姬)가 여러번 경씨(耿氏)를 위해 청(請)을 했고,양가(陽嘉) 3년에 순제(順帝)가 곧 경보의 아들 경기(耿箕)를 모평후(牟平侯)에 봉(封)하고 시중(侍中)을 삼았다. 경항(耿恒)으로 양정후(陽亭侯)로 삼고, 경승(耿承)으로 우림중랑장(羽林中郎將)으로 삼았다.

그후 대귀인은 죽었고,대장군(大將軍) 양기(梁冀)가 경승(耿承)에게 부탁해서, (죽은) 대귀인 경희의 진귀한 보물[珍玩]들을 얻어 갈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에 양기(梁冀)가 노(怒)하여 주(奏)하여 경승의 봉작(封爵)을 빼았도록 했다. 경승은 황공(惶恐)하여 곧 양(穰)으로 도망갔고 그곳에서 숨었다.

수년후, 양기가 도착하여, 경씨의족속 가문 10여인을 없앴다.

논(論)하여 말한다. 회음(淮陰-회음후 한신)이 이어 항왕(項王-항우)를 논(論)하는데,세(勢)의 이룸을 깊이 생각하니 고조(高祖-한고조 유방)의 묘승(廟勝)함을 알았다.

경엄(耿弇)이 쾌(決)히 하북(河北)을 도모하고,남양(南陽)을 헤아려 평정하니,그 역시 광무(光武)의 업(業)이 이루어짐을 본 것이다. 그리하여 경엄은 스스로 극복하여 제(齊)의 전부를 뽑아버리고는 다시 척촌(尺寸)의 공(功)도 얻지 않았다. 무릇 그 어찌 품은 바가 없겠는가? 시세를 헤아리니 서로 용납하는 것이 부족(不足)했을까? 삼세(三世)가 장군(將軍)이 된다는 것은 도가(道家)가 꺼리는 일이나,경씨(耿氏)는 누엽(累葉-여러 대)토록 공명(功名)으로 종신하였다. 그 용병(用兵)은 죽임으로써 죽임을 그치려는 것인가? 어찌 그 혼자만 능히 융성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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