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단재 신채호에 관한 노트


경병(耿秉)의 자(字)는 백초(伯初)이며 위용있는 몸을 있고 혁대가 팔위(八圍)였다. 서기(書記)일에 널리 통달해 《사마병법(司馬兵法)》을 설(說)하는데 능했고 더욱 장수지략(將帥之略)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랑(郎)의 임(任)을 맡자,추차례 군사의 일을 상언(上言)했는데, 항상 중국이 헛된 비용을 들이고 변수(邊陲-변방)은 안녕치 못한 것은 그 환란은 오로지 흉노(匈奴)에 있어서 그런 것이니, 이전거전(以戰去戰-전쟁으로 전쟁을 물리침)이 성왕지도(盛王之道)라 했다. 현종(顯宗)은 북벌(北伐)의 뜻이 있어 몰래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영평(永平) 년간에, 불러서 전후(前後)의 마땅한 방략(方略)을 묻고 그 알현자를 복야(僕射)로 삼아 곧 친히 행차하였다. 매번 공경(公卿)의 회의(會議)에 항상 경병을 이끌어 궁전(宮殿)에 오르게 해서 변방의 일들을 상의하여 황제의 마음을 많이 편히 했다.

15년,부마도위(駙馬都尉)를 배(拜)했다. 16년,기도위(騎都尉) 진팽(秦彭)을 부사(副使)로 삼아 봉차도위(奉車都尉) 두고(竇固) 등과 북흉노(北匈奴)를 정벌케 했다. 노(虜)들이 다 달아다서 싸우지 않고 돌아왔다.

17년 여름,조(詔)를 내려 경병(耿秉)과 두고(竇固)가 함께 만사천기(萬四千騎)를 합병(合兵)시켜 다시 백산(白山)을 나와 차사(車師)를 치게 했다. 차사(車師)에는 후왕(後王)·전황(前王)이 있는데 전왕(前王)은 곧 후왕(後王)의 아들로,그 궁정(宮廷)이 500여리가 떨어졌다.

두고는 후왕(後王)의 길이 멀고 산곡(山谷)이 깊고 사졸들이 추위에 떨것 같아 전왕(前王)을 공격하고자 했다. 경병은 먼저 후왕(後王)에게 달려가서 힘을 합치는 것을 근본(根本)으로 하니 전왕(前王)은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 하는 의견을 냈다.

두고의 계략이 결정되지 않자, 경병이 몸을 떨치며 일어나 말하기를


"청(請)컨대 앞으로 갑시다"


라며 말에 올라, 병사를 끌고 북쪽으로 들어가니 군사 무리들이 부득이 나아갔다. 아울러 병사들을 풀어 초략(抄掠)하여 수천급(數千級)을 참수(斬首)하고 우마(牛馬) 십여만두(十餘萬頭)를 거두었다.

후왕(後王) 안득(安得)은 진포(震怖-두려워 떪)하여 수백기(數百騎)를 따라 나가 경병을 맞이 하였다. 두고의 사마(司馬) 소안(蘇安)이 공(功)을 전부 두고의 공으로 하기 위해, 안득에게 말하길,


"한(漢)의 귀한 장수로는 오직 봉차도위(奉車都尉) 두고가 있으며 천자(天子)의 매형이며 작위(爵位)는 통후(通侯)다. 마땅히 먼저 두고에게 항복해야 한다"


고 하였다.

안득(安得)은 곧 돌아가서, 다시 령(令)으로 제장(諸將)들에게 경병을 맞게 했다. 경병은 대노(大怒)하여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그 정기(精騎)를 모아 곧바로 두고의 벽(壁)을 만들었다. 말하기를,


"차사왕(車師王)은 항복했고 지금 오지 않으니 이를 효수(梟首)하러 가길 청(請)합니다"


라고 했다.

두고는 대경(大驚)하여


"그치라. 장차 일을 망치겠다!"


라 했다. 경병은 언성을 높이며


"항복을 받는 것은 적에 맞서는 것과 같습니다"


로 하며 곧 달려가 이르렀다.

안득은 황공(惶恐)하여 문을 나와 모자를 벗고 말에서 내려 항복했다. 경병은 이로써 두고에게 이르렀다. 그 전왕(前王) 역시 명(命)에 귀순했고 곧 차사(車師)를 평정하고 돌아왔다.

명년(明年) 가을,숙종(肅宗)이 즉위(即位)하여 경병을 정서장군(征西將軍)에 배(拜)해 양주(涼州)의 변경(邊境)으로 순시차 보내, 위로(慰勞)하고 보새(保塞)의 강호(羌胡)를 사(賜)하며,나아가 주천(酒泉)에 둔병(屯兵)하여 무기교위(戊己校尉)를 구(救)하였다.

건초(建初: 76-84) 원년(元年)에,도요장군(度遼將軍)에 배(拜)하였다. 시사(視事) 7년,흉노(匈奴)가 그 은신(恩信)을 품었다. 정(征)하여 집금오(執金吾)로 삼으니 심히 친중(親重)함이 보였다.

황제가 매번 군국(郡國)들을 순수하고 행궁(幸宮)하며 보니 경병이 항상 좌우(左右)에서 금병(禁兵)을 영솔하여 숙위(宿衛)하였다.

세 아들을 제수(除授)해 낭(郎)으로 삼았다.

장화(章和) 2년,다시 정서장군(征西將軍)에 배(拜)하고 차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을 부사(副使)로 삼아 북흉노(北匈奴)를 쳐서 이를 대파(大破)했다.

그 일은 함께 《헌전(憲傳)》에 보인다. 경병을 미양후(美陽侯)와 식읍(食邑) 삼천호(三千戶)에 봉(封)했다.

경병의 성질은 용장(勇壯)하여 일은 간이(簡易)하였서,군사가 나가면 항상 갑옷을 입고 앞에 섰고 멈추어 쉬면 영(營)의 부(部)에 의지하지 않았고 그래서 멀리 척후(斥候)를 가면 맹세함이 명확했고 경계(警戒)할 상황에 군진(軍陳)이 세워지고 사졸(士卒)은 다 즐겨 죽었다.

영원(永遠) 2년,환우(桓虞)를 대신해 공록훈(光祿勛)이 되었다.

명년(明年) 여름 죽으니, 이 때 나이 50여세였다. 주관(朱棺-붉은 관)·옥의(玉衣)를 사(賜)하였고 대장(大匠)으로 무덤을 뚫어 고취하고,오영(五營)의 기사(騎士) 삼백여인(三百餘人)으로 장례를 전송했다. 시호(謚號)는 항후(恒侯)다.

흉노(匈奴)가 경병이 졸(卒)함을 듣자 나라전체가 호곡(號哭)하거나 혹은 낯을 베어 피가 흐르게까지 했다.

장자(長子) 경충(耿沖)이 사위(嗣位)하였다. 두헌(竇憲)의 패(敗)함에 미치자 경병이 두씨(竇氏)의 당(黨)이라하여 경국(耿國)을 없앴다. 경충의 관직(官職)은 한양태수(漢陽太守)에 이르렀다.


증손(曾孫) 경기(耿紀)는 어려서 미명(美名)을 가졌으며 공부(公府)에 갔는데 조조(曹操)가 심(甚)이 그를 존중하며 놀라서 차츰 소부(少府)로 옮겼다.

경기(耿紀)는 조조가 장차 한(漢)을 찬탈(篡奪)하려 하여 건안(建安) 23년 태의령(太醫令) 길평(吉平)·승상(丞相) 사직(司直) 위황(韋晃)과 기병(起兵)하여 조조를 주살할 것을 모의하다 이기지 못하고 삼족(三族)이 멸했다. 이에 의관(衣冠)의 성(盛)한 가문으로 경기(耿紀)와 연좌되어 화멸(禍滅)을 입은 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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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8.20
02: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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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마지막에 나오는 증손 경기는 삼국지의 경기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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