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단재 신채호에 관한 노트


경공(耿恭)의 자(字)는 백종(伯宗)이다. 경국의 아우 경광(耿廣)의 아들이다. 어려서 고아(孤兒)가 되었다.

강개(---慷慨: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정의심(正義心)이 복받치어 슬퍼하고 한탄(恨歎)함---)하고에 대략(大略)이 많고,장수(將帥)의 재능(才能)이 있었다.

영평(永平: 58-75) 17년 겨울,기도위(騎都尉) 유장(劉張)이 차사(車師)에 출격(出擊)하니,경공을 청(請)하여 사마(司馬)로 삼고,봉차도위(奉車都尉) 두고(竇固)와 종제(從弟)인 부마도위(駙馬都尉) 경병(耿秉)과 더불어 이를 깨뜨려 항복받았다.

처음으로 서역도호(西域都護)·무기교위(戊己校尉)를 두고 곧 경공을 무기교위로 삼고, 후왕부(後王部) 금포성(金蒲城)에 주둔(駐屯)하였으며 알자(謁者: ----알현(謁見)을 청하는 사람---) 관총(關寵)을 무기교위(戊己校尉)로 삼고 전왕(前王)의 유중성(柳中城)에 주둔하였으며 각기 주둔군 수백명을 두었다.

경공이 부(部)에 이르러 오손(烏孫---중국(中國)의 한(漢)나라 때에 천산 북로의 주변(周邊)에 살던 터키계 유목(遊牧)민족(民族)---)에 격문을 돌려 한(漢)의 위덕(威德)을 보이니,대곤미(大昆彌) 이하가 모두 기뻐하여 사절(使節)을 보내 명마(名馬)를 바치고 또 선제(宣帝) 때 하사(下賜)된 공주(公主)의 博具를 받들며 아들을 보내 입시(入侍)하기를 원(願)하였다.

경공은 곧 사절(使節)을 발하여 금백(金帛)을 주며 그 시자(侍子)를 맞았다.

명년(明年) 3월,북선우(北單于)가 그 좌녹려왕(左鹿蠡王)과 이만기(二萬騎)를 보내 차사(車師)를 쳤다.

경공은 사마(司馬)를 보내 병사 삼백인(三百人)을 거느리고 이를 구하게 하였다. 도중에 흉노(匈奴)의 기병(騎兵)들을 많이 만났는데 다 격파했다. 흉노(匈奴)가 곧 후왕(後王) 안득(安得)을 파살(破殺)하고 금포성(金蒲城)을 공격했다. 경공이 성(城)을 타고 박전(搏戰)을 하다 독약(毒藥)으로 화살을 바르고는, 흉노(匈奴)에게 사자를 펴견해서 말했다.


"한가(漢家)는 전신(箭神-화살의 신)이니 그 중에 창(瘡)이 난자는 필시 다른 점이 있으리라"


하였고,곧 강한 노(弩)를 발사했다. 적들이 화살에 맞은자 다 부어오르니 곧 대경(大驚)하였다.

하늘에서 폭풍우(暴風雨)를 만나, 비를 따라 적을 치니 ,살상(殺傷)이 심히 많았다. 흉노(匈奴) 진포(震怖-두려워 떪)하여 서로하는 말이 "한병(漢兵)은 신험(神驗)하니 정말 두려워 할만 하구나!"라 하면서 풀고 가버렸다.

경공은 소륵성(疏勒城)의 곁으로 사이 흐르는 물로 고수(固守)할 수 있음을 이용해 5월에 병력을 끌고 이에 의거하였다.

7월,흉노(匈奴)가 다시 와서 경공을 공격하니,경공이 뽑아 수천명을 뽑아서 곧바로 이로 달려가니 호기(胡騎-오랑캐의 기병)이 흩어져 달아나고 흉노(匈奴)가 곧 성(城) 아래에 사이물을 막고 끊었다. 경공이 성(城) 안에 우물 15 장(丈)을 파고도 물을 얻지 못해 관리와 사졸이 갈증으로 고생하여 말똥에 대롱을 달아 즙을 마셨다.

경공이 우러러 탄신하며


"듣건대, 옛날 이사(貳師) 장군(將軍)이 패도(佩刀)를 빼어 산(山)을 찌르니 비천용출(飛泉湧出-샘물이 솟음)했다는데 지금 한(漢)의 덕(德)은 신명(神明)인데 어찌 이리 궁(窮)하단 말이냐"


라 하고 곧 의복(衣服)을 정돈하고 우물을 향해 재배(再拜)하니 관리와 사졸을 위해 빌었다.

잠깐 후,샘물이 나와 무리들이 다 만세(萬歲)를 불러 관리와 사졸에게 물을 날라 노(虜)들에게 보이라 령(令)하였다. 노(虜)들이 나와 뜻밖에 신명(神明)을 보고 돌려 가버렸다.

이 때,언기(焉耆)·구차(龜茲)가 도호(都護) 진목(陳睦) 공격하고,북노(北虜)들 역시 관총(關寵)을 유중(柳中)에서 포위했다.

현종(顯宗: 28-75)의 붕(崩)함을 만나,구원병이 이르지 않아 차사(車師)는 다시 배신하여 흉노(匈奴)함 함께 경공을 공격했다. 경공은 사졸 무리들을 독려하여 이를 쳐 달아나게 했다. 후왕(後王)의 부인(夫人)은 선세(先世)가 한인(漢人)으로 항항 사사로이 노(虜)들의 정황을 경공에게 고하였고 양향(糧餉-군량)도 대었다.

수월후,식량이 다해 곤궁(困窮)하여,개노(鎧弩-갑옷과 노)를 삶아 그 가죽을 먹었다. 경공과 사졸이 성심을 다해 생사를 함께 하니 다 다른 마음이 없어 점점 죽어가 남은 자 열명정도 였다.

선우(單于)는 경공이 이미 곤궁해짐을 알고 반드시 항복받고자 했다. 다시 사절을 보내 경공을 초무하며 말하길 "만일 항복하면 마땅히 봉(封)하여 백옥왕(白屋王)으로 삼고 여자도 구해주어 처(妻)로 삼게 하겠다"하였다.

경공이 곧 그 사절을 상성(上城)으로 유인하여, 손으로 때려 죽여 성(城) 위에 고기로 구웠다. 노(虜)들의 관속(官屬)이 이를 보고 호곡(號哭)하며 돌아갔다.

선우(單于)가 대노(大怒)하여 다시 병사를 더해 경공을 포위하나 함락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관총(關寵)이 상서(上書)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는데,이 때는 숙종(肅宗: 재위 75-88)이 새로 즉위(即位)한 때로 조(詔)하여 공경회의(公卿會議)를 열었다.

사공(司空) 제오륜(第五倫---제오는 성(姓)이고 윤(倫)은 이름이다. 字:伯魚(백어)---)은 구원이 마땅치 못해고 사도(司徒) 포욱(鮑昱)의 의론(議論)은


"지금 사람을 시켜 위난(危難)의 땅에 가서 급히 이를 버리라 하면 밖으로는 만이(蠻夷)의 폭악(暴惡)이 횡횡하고 안으로는 상사(傷死)難之臣。성령(誠令)으로 권해 변방에 후환이 없게 하는 것이 가(可)합니다. 흉노(匈奴)는 다시 새(塞)를 범하여 도둑질할 것 같은데 폐하(陛下)는 장차 어찌 장수를 시키시렵니까? 또 2 부(部)의 병사들이 각기 수십(數十)을 헤아리는데 흉노(匈奴)가 이를 포위하고 열흘이 되도록 함락을 못하니 이는 과약(寡弱)이 힘을 다한 효과입니다. 가히 돈황(敦煌)·주천(酒泉)의 태수(太守)에게 령(令)하여 각기 정기(精騎) 이천(二千)을 거느리고 기치(幡幟)를 달고 함께 가서 위급함에 달려갈만 합니다. 흉노(匈奴)의 극히 피폐한 병사는 마땅히 감당치 못하여 40일이면 족히 새로 돌아갈 겁니다. "


라 했다.

황제가 이를 긍정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 경병(耿秉)를 보내 주천(酒泉)에 둔병(屯兵)케 하고 태수(太守)의 일을 하게 했고, 진팽(秦彭)과 알자(謁者) 왕몽(王蒙) 그리고·황보원(皇甫援)를 보내, 지원차 장액(張掖)·주천(酒泉)·돈황(敦煌) 세 군(郡)과 선선(鄯善)의 병사 도합 칠천여를 보냈다.

건초(建初: 76-84) 원년(元年) 정월(正月), 유중(柳中)에서 만나 차사(車師)를 치고 교하성(交河城)을 공격해 삼천팔백급(三千八百級)을 참수(斬首)하고, 생구(生口) 삼천여인(三千餘人)과 낙타, 나귀, 말, 소, 양 삼만칠천 두(頭)를 획득하였다.

북노(北虜)들은 놀라 달아났고 차사(車師)가 다시 항복했다.

(지원을 요청했던) 관총(關寵) 죽자,왕몽(王蒙)·등은 이 소식를 듣고 다시 병력을 이끌고 회군하려 했다. 먼저 번에,경공(耿恭)이 군리(軍吏)인 범강(範羌)을 돈황(敦煌)에 보내, 병사(兵士)의 겨울옷(寒服)을 받아 오게 했었다. 이 때문에 범강은 왕몽(王蒙)의 군사들과 함께 같이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범강이 굳게 경공을 맞이할 것을 강력하게 청하나, 제장(諸將)들은 감히 나가지 못했고, 이천명의 병사들을 나누어 범강과 함께 산의 북쪽을 따라 경공을 맞이하러 갔는데, 대설(大雪)을 만나 군대가 근근히 이르렀다.

성(城) 안의 밤중에 병마(兵馬)소리가 들려 노(虜)들이 온 것으로 대경(大驚)하였다.

범강은 아득히 부르며 말하길 "나는 범강(範羌)이다. 한(漢)이 군대를 보내니 교위(校尉)를 맞아라"라 하니 성안이 다 만세(萬歲)를 불렀다. 문을 열고 함께 서로 안고 울었다.

명일(明日)에,곧 서로 따르며 돌아갔다. 노(虜)의 병사들이 이를 추격해,때로 싸우고 때로 나아갔다.

관리와 사졸은 추리고 곤궁해서 소륵(疏勒)을 출발할 때 26명이었던 것이, 길을 따르다 사몰(死沒-사망)되었고,3월 옥문(玉門)에 이르니 겨우 13이었다. 옷은 누추하여 구멍이 있고 형용(形容)이 말라죽은 나무였다.

중랑장(中郎將) 정중(鄭眾)이 경공 이하를 위해 세수와 목욕을 시키고 의관(衣冠)을 도왔다.

상소(上疏)하여


"경공(耿恭)이 단병(單兵)으로 고립된 성을 굳게 지키다 흉노가 가득함을 당하여 수만명의 무리에 맞서고 다달이 지나 해를 넘기며 심력(心力)을 다했습니다. 산을 깍아 우물을 만들고 노(弩)를 삶아 양식을 삼아서 만번 죽어 하나도 남지 못할 희망에 나왔습니다. 전후에 추노(醜虜-외국 병사)로 살상(殺傷)한 것이 수천백을 헤아리며 사졸은 충용(忠勇)을 다했고 전혀 대한(大漢)에 수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경공의 절의(節義)는 고금(古今)에 없습니다. 마땅희 몽현(蒙顯)의 작(爵)으로 장수(將帥)를 권하십시오."


라 했다.

경공이 낙양(洛陽)에 이르니 포욱(鮑昱)이 주(奏)하여 경공의 절의가 소무(蘇武----중국 전한(前漢)의 충신. 무제(武帝)때 흉노(匈奴)의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지 19년 만에 귀국하였으므로 절개를 굳게 지킨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음---)보다 크니 몽(蒙)의 작위와 상이 마땅하다고 했다.

이에 배(拜)하여 기도위(騎都尉)로 삼고,경공의 사마(司馬) 석수(石修)를 낙양시승(洛陽市丞)에 삼고, 장봉(張封)을 옹영사마(雍營司馬)에, 군리(軍吏) 범강(範羌)을 공승(共丞)에, 남은 아홉 사람을 다 우림(羽林)에 보충하였다.

경공의 어머니가 먼저 졸(卒)하였는데 돌아와 상제(喪制)를 쫓아 행했다.

조(詔)를 내려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에게 소와 술을 바치고 의복(衣服)을 풀었다.

명년(明年),장수교위(長水校尉)로 옮겼다. 그 가을,금성(金城)·농서(隴西)의 강(羌)족들이 반(反)하였다. 경공(耿恭)이 상소(上疏)하여 방략(方略)을 말하니 조(詔)를 내려 불러들여 상황을 물어봤다. 곧 경공을 오교사(五校士) 삼천명을 거느리게 하고 차기장군(車騎將軍) 마방(馬防)을 부사(副使)로 삼아 서강(西羌)을 토벌(討伐)했다.

경공은 포한(枹罕)에 둔병(屯兵)하여,수회 강족들과 접전(接戰)을 치렀다.

명년(明年) 가을,소당강(燒當羌)이 항복해서 마방(馬防))은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경공이 머물며 복속하지 않은 자들을 쳐서 노(虜)들 천여명과 소와 양 4만 두(頭)를 얻고 늑저(勒姐)·소하강(燒何羌) 등의 13종(種)의 수만명이 다 경공에게 와 항복했다.

당초,경공이 농서(隴西)를 나가며 상언(上言)하기를 "옛 안풍후(安豐侯) 두륭(竇融)은 옛날 서주(西州)에서 심히 강호(羌胡)의 복심(腹心)을 얻었다. 지금 대홍려(大鴻臚) 두고(竇固)는 곧 그 자손(子孫)이다. 예전에 백산(白山)에서 공격할때 공으로 삼국(三軍)의 관을 이으니 마땅히 대사(大使)를 받들어야 하니 량부(涼部)를 진무(鎮撫)하십시오. 령(令)을 차기장군(車騎將軍) 마방(馬防)에 내려 군을 한양(漢陽)에 주둔케 해 위엄을 높이십시오"라 했다.

이 때문에 마방(馬防)에게 크게 거슬렸다. 마방이 돌아오자,감영(監營)의 알현한 자로 이담(李譚)이, 경공이 군사(軍事)를 근심치 않고 조(詔)에 대해 원망(怨望)한다고 알렸다. 연좌로 정(征)하여 하옥(下獄)시켜 관직을 면하고 본군(本郡)으로 돌아가 집에서 졸(卒)하였다.

아들 경부(耿溥)는 경조호아도위(京兆虎牙都尉)를 삼았다.

원초(元初) 2년,반란한 강족들을 정해성(丁奚城)에서 쳤는데 군대가 패(敗)하여 곧 쓰러졌다. 조(詔)하여 경부(耿溥)의 아들 경굉(耿宏)과 경엽(耿曄)을 낭(郎)으로 삼았다.

경엽(耿曄)의 자(字)는 계우(季遇)다. 순제(順帝: 재위 126-144) 초(初)에,오환교위(烏桓校尉)가 되었다.

이 때, 선비(鮮卑)가 연변(緣邊)을 도둑질하고 대군태수(代郡太守)를 살해했다. 경엽은 오환(烏桓)과 제군(諸郡)의 사졸을 거드리고 새(塞)를 나가 토벌하여 이를 대파(大破)하였다. 선비(鮮卑)는 진포(震怖)하였고,수만명이 요동(遼東)에 이르러 항복했다. 이후, 빈번히 빈번히 나가 북방(北方)에 위력을 떨쳤고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옮겼다.

경씨(耿氏)는 중흥이후(中興已後) 건안(建安) 말년에 이르러,대장군(大將軍) 2명,장군(將軍) 아홉명,경(卿) 13명,상공주(尚公主) 3명,열후(列侯) 19명,중랑장(中郎將)·호강교위(護羌校尉)·자사(刺史)·이천석(二千石)은 수백명이니 한(漢)과 흥회(興衰-흥성과 쇠망)을 함께 했다고 한다.

논(論)한다. 내가 처음 《소무전(蘇武傳)》을 읽을 때 터럭을 먹고 궁벽하였던 것에 감동받았는데,이는 대한(大漢)의 수치가 아니다. 후에 경공(耿恭)의 소륵지사(疏勒之事)를 열람하니,눈물이 따르지 않음을 알지 못함을 탄식한다. 놀랍다. 의(義)가 생(生)보다 중(重)하여 이에 이른 것이라니!"라 하였다. 옛날 조자(曹子: 조말 曹沫)는 가(柯)의 맹(盟)에서 인질을 抗하였고,상여(相如)는 위엄을 하(河-황하)의 표(表)에서 신장하여 대개 하루 아침의 승부를 결정하니 백사지지(百死之地-여럿이 죽는 땅)가 다름이 있다. 이한(二漢-양한 왕조)이 마땅히 놆은 작위와 10 세(世)를 너그럽게 대하여 소군(蘇君)의 은사(恩賜)는 사위(嗣位-자손에 물림)에 미치지 않고 경공은 역시 종내는 마구간에서 마쳤다. 용사지장(龍蛇之章)을 따라 읊으며 이로써 탄식(嘆息)한다.

찬(贊)한다. 시경무(畤經武)를 좋아하고 능히 병사(兵事)를 그렸다. 연(燕)나라 사졸을 가서 거두고 와서 한영(漢營)에 불렀다. 조전(趙殿-조왕의 궁전)에서 청(請)하여 술을 거르는 제성(齊城). 하물며 경서가 거느려 따르고 역시 성취가 있었다. 나라의 오랜 계책을 도모하여 이 흉적(兇狄)을 나누었다. 경병은 호정(胡情-오랑캐 실정)에 잘 다루고,경기는 노(虜)들의 발자국을 쫓았다. 겸겸(慊慊-만족하지 못함)한 백종(伯宗),마른 샘에서 물을 쏟게 하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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