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마왕님의 이글루스


성양공왕(城陽恭王) 유지전(劉祉傳)

성양공왕(城陽恭王) 유지(劉祉)1)는 자가 거백(巨伯)이며, 광무제의 족형(族兄)인 용릉강후(舂陵康侯) 유창(劉敞)의 아들이다.


1) 『동관기(東觀記)』에 따르면, “처음에는 이름이 종(終)이었는데, 나중에 지(祉)로 고쳤다.”

유창의 증조할아버지는 절후(節侯) 유매(劉買)이며, 장사정왕(長沙定王)의 아들로서 영도현(零道縣) 용릉향(舂陵鄕)에 봉해져 용릉후(舂陵侯)가 되었다. 유매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대후(戴侯) 유웅거(劉熊渠)가 작위를 이었다. 유웅거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고후(考侯) 유인(劉仁)이 작위를 이었다. 유인은 용릉(舂陵)이 축축한 땅이 많고 산과 숲에는 나쁜 기운이 가득했으므로 상서를 올려 식읍을 줄이더라도 내지로 옮기기를 구했다.2)

2) 『동관기(東觀記)』에 따르면, “이때 고후 유인은 476호를 거느렸다. 그는 상서를 올려 식읍을 줄이더라도 봉지를 남양군(南陽郡)으로 옮기고, 아들 유남창(劉男昌)을 남겨 조상들의 묘를 지키게 하기를 원했다. 원제가 그것을 허락했다.”

원제(元帝) 초원(初元) 4년(기원전 45년), 남양군(南陽郡) 백수향(白水鄕)으로 옮겨 봉해졌는데, 여전히 용릉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으며, 사촌아우인 거록도위(鉅鹿都尉) 유회(劉回)를 비롯하여 종족들이 모두 옮겨가서 일가를 이루었다. 유인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유창(劉敞)이 작위를 이었다. 유창은 겸손하고 검소했으며 의로움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물려준 황금과 보석을 비롯한 재산들을 모두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형주자사(荊州刺史)가 그 의로운 행동을 위에 알려서 여강도위(廬江都尉)로 임명받았다.3) 한 해 남짓 지났을 때, 때마침 족형인 안중후(安衆侯) 유숭(劉崇)4)이 군대를 일으켰으므로, 왕망(王莽)은 유씨를 두려워하고 싫어하게 되어 유창을 불러 장안에 이르게 하여 그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5)



3) 남양군은 이때 형주에 속해 있었으므로 자사가 그 행동이 의롭다고 위에 알린 것이다. 『속한서(續漢書)』에 따르면, “후(侯) 등이 명당(明堂)의 제사를 도왔으므로 식읍을 이백 호씩 더해 주었는데, 유창은 행동에 의로움이 있었으므로 여강도위로 임명했다.”

4) 안중강후(安衆康侯) 유단(劉丹)은 장사정왕(長沙定王)의 아들이다. 유숭은 유단의 현손(玄孫)의 아들이다.

5) 『동관기(東觀記)』에 따르면, “유창이 여강군(廬江郡)에 부임하여 한 해 남짓 지났을 때, 때마침 가뭄이 들었다. 현을 돌아다니다가 보니 어떤 사람이 말라비틀어진 벼를 손에 들고 벼가 모두 말라 죽었다고 중얼거리는데, 관리가 억지로 조세를 재촉하고 있었다. 이에 유창이 말했다. ‘이건 태수의 책임이다.’ 이에 말라비틀어진 벼를 싣고 태수의 관소에 이르렀다. 술을 몇 잔 주고받은 후, 그 일을 말하니 태수가 답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러자 유창이 말라비틀어진 벼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태수가 말했다. ‘그것은 도위의 책임이 아닌가?’ 유창이 화를 내면서 태수를 꾸짖었다. ‘쥐새끼 같은 놈이 어딜 감히!’ 자사가 그를 천거해 올리니 왕망이 장안으로 불러들인 후 그 나라에 가지 못하게 했다.”

이보다 전인 평제(平帝) 때, 유창은 유숭과 더불어 서울 장안에 입조하여 명당(明堂)에서 제사를 도왔다.6) 유숭은 왕망이 장차 한나라 황실을 위태롭게 할 것을 내다보고, 몰래 유창에게 말했다.


6) 평제 때 왕망이 정치를 보좌했을 때, 명당에서 협제(祫祭, 조상들을 시조와 함께 제사하는 것.)를 지냈는데, 이때 제후왕(諸侯王) 이십팔 명, 열후(列侯) 백이십 명, 종실의 자손 구백여 명을 불러들여 제사를 돕게 했다.

“안한공(安漢公, 왕망)이 나라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는데도 뭇 신하들이 굽혀 따르지[回從]7) 않을 수 없으니 사직(社稷)이 기울어져 엎어지기에 이르렀다. 태후께서는 연세가 많으시고, 천자 께서는 어리고 약하시니8) 고황제(高皇帝, 한 고조 유방)께서 자제들을 나누어 봉하신 까닭이 바로 이를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7) 회(回)는 곡(曲), 즉 굽힌다는 뜻이다.

8) 원후(元后)와 평제를 일컫는다.

유창이 마음속으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유숭의 일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유창은 두려워한 끝에 무리를 이루어 도움을 받고자 했다. 이에 유지를 장가보내 고릉후(高陵侯) 적선(翟宣)의 딸을 아내로 맞게 했다. 때마침 적선의 동생 적의(翟義)가 군대를 일으켜 왕망을 공격하고자 했으므로, 남양군에서는 적선의 딸을 잡아들여 죽이고, 유지를 연좌해 옥에 가두었다.9) 이로 인해 유창이 상서를 올려 죄를 사해 달라고 청한 후, 종족의 자제들을 이끌고 앞장서 사졸로 봉직하기를 원했다.


9) 적선은 승상 적방진(翟方進)의 아들로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동관기(東觀記)』에 따르면, “유창은 자신의 적자를 적선의 손녀 적습(翟習)에게 장가보내 아내로 맞게 했다. 적선은 적자 적희(翟姬)에게 딸을 시집보내려 [유지를] 문중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그로부터 스무 날 남짓 지났을 때, 적의가 군대를 일으켰다.”

신나라 거섭(居攝) 연간(6~8년) 왕망이 [유씨] 종실들을 위안한다는 이유로 유지는 형을 받고 주살당하는 것을 피했다.

[초시(初始) 원년(8년)] 왕망이 제위를 찬탈했을 때, 유씨들 중에서 후(侯)였던 자들은 모두 낮추어 그 호칭을 자(子)로 불렀으며, 고경(孤卿)의 녹봉을 주었다가10) 끝내 모두 그 작위를 빼앗았다. 유창이 세상을 떠났을 때 유지는 특(特)에서 폐위되었는데, 끝내 다시 관직을 얻지 못하고 아전[吏]이 되었다.


10) 고(孤)는 특(特), 즉 특별하다는 뜻이다. 공(公)보다는 낮고 경(卿)보다는 높은 자리로, 특별히 그것을 두었으므로 고(孤)라고 한 것이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상농부(上農夫, 좋은 농지를 경작하는 농부)는 아홉 명을 먹일 수 있는데, 제후의 하사(下士)는 상농부에 맞추고, 중사(中士)는 하사의 갑절로 하며, 상사(上士)는 중사의 갑절로 한다. 또 하대부(下大夫)는 상사의 갑절로 하며, 경(卿)은 대부의 네 곱절을 녹봉으로 한다.”

유지는 옛날 제후의 적자로서 행실이 온화하고 인정이 많았기 때문에 종실들이 모두 그를 공경했다.

[지황(地皇) 3년(22년)] 광무제가 군대를 일으켰을 때, 유지의 형제들이 잇따라 종군하자 전대대부(前隊大夫) 견부(甄阜)는 그 집안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완현(宛縣)의 옥에 가두었다. 한나라 군대가 소장안(小長安)에서 패했을 때, 유지는 몸을 빼내 극양현(棘陽縣)으로 돌아와 지켰는데, 견부가 그의 어머니와 동생, 아내와 자식을 모조리 살해했다.

[경시(更始) 원년(23년)]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이 세워졌을 때, 유지는 태상장군(太常將軍)이 되었으며, 용릉후(舂陵侯)에 이어 봉해졌다. 서쪽을 따라 관중으로 들어간 후, 정도왕(定陶王)에 봉해졌다.

[건무(建武) 원년(25년)] 따로 장수들을 거느리고 임경현(臨涇縣)에서 유영(劉嬰)을 공격해 무찔렀다. 경시제 유현이 적미적(赤眉賊)에게 항복하자 이에 유지는 샛길을 통해서 낙양으로 도망쳐 왔다. 이때 종실 중에서 유지가 가장 먼저 이르렀으므로 광무제는 그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11)


11) 『동관기(東觀記)』에 따르면, “유지는 건무(建武) 2년(26년) 3월 회궁(懷宮)에서 [광무제를] 알현했다.”

건무 2년(26년) 성양왕(城陽王)으로 봉했다. [천자의] 가마, 물건, 수레와 말, 의복 등을 하사받았다. 유창을 추증하여 강후(康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건무 11년(35년) 유지는 병이 들자 성양왕의 옥새와 인수를 올려 보내고, 열후가 되어 돌아가신 선조들의 제사를 받들 수 있게 해 주기를 원했다. 광무제가 몸소 임하여 그 병을 돌보았다. 유지가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마흔세 살이었으며, 시호를 공왕(恭王)이라 했다. 끝내 그 나라로 가지 못하고 낙양 북망산(北芒山)에 장사지냈다.

건무 13년(37년) 유지의 적자 유평(劉平)을 채양후(蔡陽侯)로 봉하여 유지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또 유평의 동생 유견(劉堅)을 고향후(高鄕侯)로 삼았다. 그 이전인 건무(建武) 2년(26년)에 황조(皇祖, 황제의 할아버지)와 황고(皇考, 황제의 아버지)의 묘를 창릉(昌陵)으로 삼고, 능령(陵令)을 두고 살피게 했다. 나중에 [능의 이름을] 장릉(章陵)으로 고치니, 이 때문에 용릉향(舂陵鄕)이 장릉현(章陵縣)이 되었다.


건무 18년(42년) 고후(考侯)와 강후(康侯)의 사당을 원릉(園陵) 곁에 세우고 색부(嗇夫)12)를 두었다. 영릉군(零陵郡)에 조서를 내려 절후(節侯)와 대후(戴侯)의 사당에 제사하도록 하였는데, 해마다 사시(四時, 사계절)와 납(臘)13)에 다섯 번 모시도록 했다. 색부와 좌리(佐吏) 각 한 사람씩 두었다.

12) 색부는 본래 향(鄕)의 관리로, 주로 조세와 노역의 많고 적음을 알아 그 차이를 고르게 하는 일을 한다. 원릉에 그것을 둔 것은 제사(祭祀)나 징구(徵求, 물건이나 곡식 등을 징발하는 것.)를 둘러싼 여러 일들을 알기 위해서이다.

13) 납(臘)은 매년 마지막 날에 제사지내는 신(神)의 이름이다.

유평이 여러 왕들과 서로 교통한 죄를 짓자 그 나라를 없앴다.

영평(永平) 5년(62년) 명제가 다시 유평을 경릉후(竟陵侯)로 봉했다.

유평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유진(劉眞)이 작위를 이었다. 유진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유우(劉禹)가 작위를 이었다. 유우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유가(劉嘉)가 작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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