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마왕님의 이글루스


광무(光武) 곽황후(郭皇后)는 휘(諱)가 성통(聖通)이고, 진정국(眞定國) 고현(槁縣) [주:1] 사람이다.

군(郡)의 저성(著姓, 이름난 가문) 집안이었다. 아버지 곽창(郭昌)은 논밭과 집 등 재산 수백만을 이복동생에게 양보했는데, 이 때문에 진정국 사람들이 그를 의롭다고 여겼다.

곽창은 군의 공조(功曹)로 벼슬길에 나섰으며, 진정공왕(眞定恭王) [주:2] 의 왕녀에게 장가들었는데, 이 때문에 왕녀는 곽공주(郭公主)라고 불렸다. 슬하에 딸 곽성통과 아들 곽황(郭況)을 두었다. 곽창은 일찍 죽었다.

곽공주는 왕가의 여식이었지만 예절 바르고 검소함을 좋아했으며 어머니로서 거동에 덕이 있었다.

경시(更始) 2년(24년), 봄, 유수가 왕랑을 공격하려고 진정국에 이르렀다. 이때 곽성통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총애가 있었다. 나중에 즉위한 후에 귀인(貴人)으로 삼았다.

[주:1] 고현(槁縣)는 옛 성이 지금 항주(恒州) 고성현(槁城縣) 서쪽에 있다.

[주:2] 공왕(恭王)은 이름이 유보(劉普)로 경제의 7대손이다.

건무 원년(25년), 곽귀인이 황자 유강(劉彊)을 낳았다. 광무제는 곽황(郭況)이 나이가 어린데도 근신하는 마음을 품고 있음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나이 열여섯에 황문시랑(黃門侍郎)으로 임명했다.

건무 2년(26년), 귀인 곽씨를 황후로 세웠다. 유강은 황태자가 되었고, 곽황은 면만후(綿蠻侯: 緜蠻侯)로 봉해졌다. 황후의 동생이 귀해지자 빈객들이 바퀴살 모이듯 몰려들었다. 하지만 곽황은 아랫사람에게도 공손하고 겸손하여 명성과 칭송을 크게 얻었다.

건무 14년(38년), 곽황이 성문교위로 승진했다. 이 무렵부터 곽황후는 [광무제의] 총애가 줄어들자 수차례 원망과 원한을 품었다.

건무 17년(41년), 마침내 곽황후가 폐위되어 중산왕태후(中山王太后)가 되었다. 황후의 둘째 아들 우익공(右翊公) 유보(劉輔)가 중산왕(中山王)으로 승진했고, 상산군(常山郡)이 중산국에 더해졌다. 곽황은 큰 나라로 옮겨서 양안후(陽安侯) [주:3] 로 봉해졌다.

황후의 사촌오빠 곽경(郭竟)은 기도위(騎都尉)로서 정벌에 나가 공이 있었으므로 신처후(新 郪 侯) [주:4] 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동해국의 재상에 이르렀다.

곽경의 동생 곽광(郭匡)은 발간후(發干侯) [주:5] 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르렀다. 황후의 작은아버지 곽량(郭梁)은 일찍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다. 그 사위 남양군 사람 진무(陳茂)가 은택을 입어 남련후(南䜌侯)에 봉해졌다.

[주:3] 양안현(陽安縣)은 여남군에 속한다. 옛 성이 지금 예주 낭산현(朗山縣)에 있으며, 옛 도국성(道國城)이다.

[주:4] 신처현(新郪縣)은 여남군에 속한다. 옛 성이 바로 지금 영주(潁州) 여음현 서북쪽에 있는 처구성(郪丘城)이다.

[주:5] 발간현(發干縣)은 동군에 속한다. 옛 성이 지금의 박주(博州) 당읍현(堂邑縣) 서남쪽에 있다.

건무 20년(44년), 중산왕 유보(劉輔)를 다시 패왕(沛王)으로 옮겨 봉하고, 곽후를 패국의 태후로 삼았다. 곽황이 대홍려로 승차했다. 광무제가 수차례 [곽황의 집에] 행차했는데, 공경제후들과 일가붙이들을 불러 모아 주연을 열고, 황금과 돈과 생명주[縑]와 비단을 상으로 내렸다. 그때마다 풍성함이 더할 수 없었으므로 낙양 사람들은 곽황의 집을 금혈(金穴)이라 불렀다.

건무 26년(50년), 곽황후의 어머니 곽 공주가 죽었다. 광무제가 친히 임해 상복을 입고 장사지내고, 백관들을 크게 불러 모은 후 사자를 보내 곽창(郭昌)의 상구(喪柩, 유골이 든 관)를 맞이하게 한 후 곽 공주와 함께 합장했다. 그러고는 곽창에게 양안후의 인수를 추증하고, 시호를 사후(思侯)라 하였다.

건무 28년(52년), 곽황후가 죽자, 북망산(北芒山)에 장사지냈다.

광무제가 곽씨를 불쌍히 여겨서 조서를 내려 곽황의 아들 곽황(郭璜)을 육양공주(淯陽公主)에게 장가보내고 낭(郎)으로 삼았다.

[중원 2년(57년)] (현종(顯宗))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곽황(郭況)은 황제의 장인인 음식(陰識), 음취(陰就)와 함께 특진(特進)이 되었는데, 몇 차례나 상을 내려 받았고, 은총이 함께 두터웠다. 명제는 예로써 음식, 음취, 곽황(郭況)을 모셨고, 매사에 반드시 공평하게 대했다.

영평 2년(59년), 곽황(郭況)이 죽자 추증하여 재물을 내린 것[贈賜]이 매우 두터웠으며, 황제가 친히 임하여 상을 치렀다. 시호를 절후(節侯)라 하고, 아들 곽황(郭璜)에게 작위를 잇도록 했다.

원화 3년(86년), 숙종(肅宗) 장제(章帝: 재위 75-88)가 북으로 순수(巡狩: 순찰)하다가 진정국(真定國)을 지나게 되자 곽씨들이 모두 모여서 조견하고 상수(上壽, 백 살 이상의 나이를 뜻하는 말로 장수를 빌었다는 뜻이다.)를 올린 후, [황제를] 따라 들어가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면서 크게 즐겼다.

[장제가] 태뢰를 갖추어 곽 공주의 무덤에 올려 제사지낸 후, 곡식 일만 섬과 돈 오십만 냥을 하사했다.

영원 초[89년 무렵], 곽황은 장락소부(長樂少府) [주:6] 가 되었으며, 그 아들 곽거(郭擧)는 시중(侍中)이 되었다. 곽황이 사성교위(射聲校尉)를 겸했다. 나중에 대장군(大將軍) 두헌(竇憲:?-92)이 주살당했을 때 곽거는 두헌의 딸을 맞아들인 사위로서 반역을 꾀하다 부자가 함께 하옥되어 죽었으며, 식솔들은 모두 합포군(合浦郡) [주:7] 으로 유배되고, 종족들 중에서 관직에 있던 사람들은 남김없이 파면되었다.

신처후(新郪侯) 곽경(郭竟)은 처음에 기장(騎將) [주:8] 이 되었다가 정벌을 따라가 공이 있었기 때문에 동해국의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영평 연간(58~75년)에 죽자 아들 곽숭(郭嵩)이 작위를 이었다. 곽숭이 죽고 나서 초왕(楚王) 유영(劉英)의 일에 연좌되어 나라가 폐지되었다. 건초 2년(77년), 장제가 곽숭의 아들 곽근(郭勤)를 이정후(伊亭侯)에 봉했다. 곽근에게 아들이 없자 나라를 없앴다.

발간후(發干侯) 곽광(郭匡)은 벼슬이 태중대부에 이르렀다. 건무 30년(54년)에 죽었다. 아들 곽훈(郭勳)이 작위를 이었고, 곽훈이 죽자 그 아들 곽준(郭駿)이 작위를 이었다. 영평 13년(칠십 년), 역시 초왕 유영의 일에 연루되어 나라를 잃었다. 건초 3년(78년), 다시 곽준을 관도후(觀都侯)에 봉했으나 죽었다. 아들이 없자 나라를 없앴다. 곽씨 중에는 제후가 셋이었는데, 모두 나라가 끊어졌다.

[주:6] 장락소부는 황태후궁(皇太后宮)을 담당하는데, 녹봉은 이천석이다. 황태후가 장신궁(長信宮)에 거하면 장신소부(長信少府)라 하고, 장락궁에 거하면 장락소부라고 한다.

[주:7] 합포군은 지금의 염주현이다.

[주:8] 『한서』에 따르면, “거장(車將), 호장(戶將), 기장은 광록(光祿)의 속관으로, 녹봉은 비 천석이다.”

논하여 말한다.

만물이 흥하고 쇠하듯 정(情)에도 역시 기복이 있으니 이치가 본래 그러한 것이다. 높임과 낮춤[崇替]의 오고 감이 이리도 심했던 것은 오직 총애를 얻고 잃은 것 때문이 아닐까? 대자리 깐 침상[床笫]에서 [황제를] 접하여 색으로써 승은을 입었을 때에는 비록 나쁜 마음[險情]을 품고 쓸데없는 행동[贅行] [주:9] 을 했더라도 덕을 행했다고 하리라.

그러나 [황제의] 마음과 사랑이 옮겨가고 사사로운 정이 흩어진 다음에는 비록 은혜로운 마음을 품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녔다 할지라도 도리어 추악하게만 여겨질 뿐이다.

사랑이 깊었을 때에는 천하라도 그 높임을 받아들이기에 부족했는데, 기쁨이 물러간 후에는 구복(九服, 황제가 다스리는 곳 바깥에 있는 모든 지역) 어디에도 그 목숨을 부지할 데가 없었다. 이것은 진실로 뜻있는 선비들이 [고난에] 빠지는 까닭이요, 임금이 억양(抑揚, 혹은 억누르고 혹은 끌어올림.)하는 이유로, 아직 누구도 이 운명에서 벗어난 사람이 없다.

곽후(郭后)는 사랑이 쇠하고 정이 멀어진 끝에 자리에서 끌어내려졌기에 성냄과 원망함이 무척 심했으나 황제는 오히려 따로 궁을 차려 주는 은사를 더했으며 그 일가붙이들에게도 끝없이 은총을 내렸다. 동해(東海, 동해국 재상이었던 곽경(郭竟)을 말함.)가 [관직과 작위의 진퇴 문제로] 우물쭈물하니 예에 따라 그 거취를 정하게 했다. 이로써 후세로 하여금 [황은의] 두터움과 엷음, 나아감과 물러섬 사이의 차이를 알지 못하게 했으니 역시 빛나는 옛일이 아니겠는가!

[주:9] 『설문해자』에 따르면, “췌(贅)는 우(肬), 즉 군더더기를 뜻한다.” 『노자』에 “찌꺼기 음식 군더더기 행동[餘食贅行].”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상공(河上公)은 『노자주(老子注)』에서 “행해도 당연함이 없는 것을 췌(贅)라 한다.”라고 했다. 『장자』에 “살에 붙은 혹과 매달린 사마귀[附贅懸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추악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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