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마왕님의 이글루스

화희등황후(和熹鄧皇后): 화희황후(和熹皇后) [주:1] 등씨(鄧氏)는 휘가 수(綏 ;등수(鄧綏))이며, 태부 등우(鄧禹)의 손녀이다. 아버지 등훈(鄧訓)은 호강교위이고, 어머니 음씨는 광렬황후의 사촌여동생이다.

등수가 다섯 살 때, 태부(등우)의 부인이 그녀를 사랑해서 몸소 머리카락을 잘라 주려고 했다. 부인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웠으므로, 잘못해서 등수의 이마를 다치게 했지만 등수는 고통을 참고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묻자 등수가 말했다.

“아프지 않았던 게 아니에요. 태부인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머리를 잘라 주시려 했는데 어르신의 뜻을 상하게 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참았을 뿐이에요.”

여섯 살 때 이미 『사서』[주:2] 에 능통했고, 열두 살 때에는 『시경』과 『논어』에 통달했다. 여러 오빠들이 경전을 읽을 때마다 번번이 뜻을 드러내[下意][주:3] 어려운 부분을 물었다. 뜻을 전적(典籍)에 두고 집안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늘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해 말했다.

“네가 여공(女工, 길쌈질)을 익혀 의복을 이바지하지 않으나, 학문에 힘쓴다 한들 어찌 박사로 천거될 수 있겠느냐?”

등수(鄧綏)가 또다시 어머니의 말을 어기고, 낮에는 부업(婦業, 여자들의 일)을 닦고 밤에는 경전을 외우니 집안사람들이 등수를 “제생(諸生, 유생)”이라고 불렀다. 아버지 등훈은 그녀가 남다르다고 생각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상관없이 번번이 그녀와 더불어 깊이 의논했다.

[주:1] 채옹은 “『일주서』 「시법해」에 따르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 공이 있는 것을 희(熹)라 한다.”라고 했다.

[주:2] 『사서』는 주나라 선왕 때 태사 주가 대전(大篆)으로 지은 열다섯 편을 말한다. 『한서』에 따르면, “아이들을 가르칠 때 썼다.”

[주:3] 뜻을 내렸다[下意]는 것은 뜻을 드러냈다는 말이다.

영원 4년(92년), 선발되어 궁으로 들어왔다. 이때 등훈이 죽었는데, 등수는 밤낮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서 흐느꼈다. 그 후 삼 년 동안 소금에 절인 나물을 먹지 않았으므로 수척하고 파리해져서 얼굴이 크게 상해 가까운 사람조차도 몰라볼 지경이 되었다.

일찍이 등수가 꿈속에서 하늘을 어루만졌는데[捫天],[주:4] 넓디넓고 푸르디푸른 가운데 고드름[鍾乳] 같은 모양의 물건이 있어 고개를 들어 그것을 빨아 마셨다. 이에 점쟁이를 불러 꿈에 대해 묻자, 점쟁이가 말하기를 요(堯) 임금은 꿈에 하늘을 붙잡고 위로 올라간 바 있으며 탕 임금은 꿈에 하늘에 이르러 그것을 핥은[咶] 적이 있으니[주:5] 이는 모두 성왕의 전조로서 길하기가 말할 수조차 없다고 했다.

또 관상쟁이가 등수를 보고 놀라서 말했다.

“이분은 탕(湯) 임금의 관상을 타고났습니다.”[주:6]

이에 집안사람들이 몰래 기뻐하면서도 감히 그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등수의 작은아버지 등해(鄧陔)가 말했다.

“보통 일천 명의 생명을 구한 자는 자손을 봉한다고 들었습니다. 내 형님 등훈은 알자(謁者)가 된 후 석구하(石臼河)의 물길을 닦아 해마다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하늘의 도를 믿을 수 있다면, 우리 집안은 반드시 후손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또 이전에 태부 등우(鄧禹)가 탄식하면서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무리 백만을 거느렸지만 일찍이 단 한 사람도 헛되이 죽이지 않았으니, 후대에 반드시 흥성함이 있을 것이다.”

[주:4] 문(捫)은 모(摸), 즉 어루만진다는 뜻이다.

[주:5] 시(咶)는 음이 시(是)이다.

[주:6] 『속한서』에 따르면, “관상쟁이인 대조상공(待詔相工) 소대(蘇大)가 말했다. ‘이 분은 탕 임금의 골상을 타고났습니다.’”

영원 7년(95년), 등수가 다시 여러 집안의 여자들과 함께 선발되어 궁으로 들어갔다. 등수는 키가 일곱 자 두 치였으며 자태와 얼굴이 예쁘고 아름다워[姝麗][주:7] 다른 사람들보다 무척 뛰어났기 때문에 좌우가 다 놀랐다.

영원 8년(96년), 겨울, 액정으로 들어가 귀인이 되었다. 이때 나이가 열여섯 살이었다. 등귀인은 공손하면서도 엄숙하게 마음을 쏟았으며 움직임에는 법도가 있었다.

음황후를 받들어 섬길 때에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삼가 두려워하면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같은 반열의 사람들을 대할 때는 늘 자기를 버리고 그들의 아래처럼 행동했고, 비록 궁인들이 노비라 할지라도 모두 은총을 더해 주었다. 이에 황제가 매우 기뻐하면서 더욱 사랑을 쏟았다.

나중에 등귀인이 병이 들자 화제는 특별히 영을 내려 그 어머니와 형제들을 들어오게 하여 약 쓰는 것을 살피게 했는데 기한을 정하지 않았다. 등귀인이 화제에게 말했다.

“궁문의 금령이 지극히 무거운데, 외척[外舍][주:8] 들이 오랫동안 궁궐 안에 머물면, 위로는 폐하로 하여금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었다는 험담을 듣게 하고 아래로는 천첩으로 하여금 만족함을 모른다는 비방을 얻게 할 것입니다. 아래와 위가 서로 손해될 일을 하는 것은 제가 진실로 원하지 않는 바입니다.”

화제(和帝)가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몇 차례 궁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영예로 삼는데, 귀인은 도리어 이로 인해 근심하고 스스로 뉘우쳐 겸손하니 진실로 남들이 미치지 못할 바요.”

또한 매번 잔치가 있을 때마다 여러 귀인들은 앞 다투어 스스로를 꾸미고, 비녀[簪]와 귀고리[珥]를 빛나게 하며 저고리와 치마[褂裳]를 더 밝게 입었는데,[주:9] 오직 등 귀인만이 홀로 검소하게 몸이나 옷을 꾸미지 않았다. 게다가 혹시라도 옷에 음황후와 같은 색이 있으면 즉시 벗어 버렸으며, 음황후와 동시에 같이 나아가 알현할 일이 있으면 감히 몸을 바로 하여 앉지 않고 옆에 나란히 서고[離][주:10] 걸을 때에는 몸을 굽혀 스스로를 낮추었다. 화제가 묻는 바가 있을 때마다 늘 뒤로 물러서 나중에 대답했으며 감히 음황후보다 먼저 말하지 않았다. 화제가 등귀인이 마음을 다해 몸을 굽힘을 알고는 감탄하면서 말했다.

“덕을 닦는 어려움이여,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주:7] 주(姝)는 용모가 예쁘다는 뜻이다. 『시경』에 “저 예쁜 우리 님[彼姝者子].”이라는 구절이 있다.

[주:8] 외사(外舍)는 외가를 말한다.

[주:9] 『설문해자』에 따르면, “잠(簪)은 계(笄), 즉 비녀라는 뜻이다. 이(珥)는 진(瑱), 즉 귀막이라는 뜻인데, 옥으로 귀를 채우는 것이다.” 『석명(釋名)』에 따르면, “여자들의 윗도리를 괘(褂)라 한다.”

[주:10] 리(離)는 병(並), 즉 나란하다는 뜻이다. 『예기』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거나 나란히 섰을 때에는 가서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離坐離立, 無往參焉].”라는 구절이 있다.

나중에 음황후(陰皇后)가 점차 황제가 소원하게 되자 등 귀인은 화제가 침소에 들려 할 때마다 번번이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이 당시 화제가 몇 번이나 황자들을 잃자, 등귀인은 후사를 이을 사람이 많지 않음을 근심하면서 항상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더니 몇 차례나 후궁들을 선발하여 황제의 뜻을 널리 펴도록 했다.

음황후는 등귀인의 덕에 대한 칭송이 날로 높아지는 것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끝내 저주하는 말을 지어서 해를 입히고자 했다. 일찍이 화제가 병들어 누웠다가 위독함이 심해지자 음 황후가 은밀하게 말했다.

“내가 뜻을 얻으면, 등씨들을 하나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등귀인이 그 말을 듣고, 좌우를 둘러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마음을 모으고 뜻을 다해서 황후 마마를 모셨으나 끝내 복이 없어서 이제 하늘에 죄를 짓게 되었다. 아내로서 남편을 따라 죽는 의로움은 없을지 모르나 주공(周公)은 자신의 몸으로 무왕(武王)의 생명을 대신하고자 했으며[주:11] 월희(越姬)는 마음으로 맹서하여[心誓] 반드시 함께 죽고자 했다.[주:12] 그로써 위로는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가운데로는 종족에게 끼칠 화를 없애고, 아래로는 음 씨로 하여금 인간 돼지[人豕][주:13] 를 기른다는 말을 듣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고는 즉시 독약을 마시려 했으나 궁인 조옥(趙玉)이 굳게 말리면서 몰래 속여 말하기를 사자가 왔는데 황상의 질병이 이미 나았다고 했다. 등귀인이 그 말을 믿고 더 이상 약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다음 날, 과연 황제의 병이 나았다.

[주:11] 무왕이 병들었을 때, 주공은 그를 위하여 대왕(大王), 왕계(王季), 문왕에게 명을 청하여 말했다. “만약 당신들 세 왕께서 하늘에 계셔 큰아들을 꾸짖고자 하신다면 단(旦, 주공의 이름)으로써 아무개의 몸을 대신하게 하소서.”

[주:12] 월희는 초나라 소왕(昭王)의 비로 월나라 왕 구천(句踐)의 딸이다. 소왕이 잔치를 열어 즐길 때, 월희가 곁에서 모셨다. 소왕이 월희에게 말했다.


“즐거운가?”


월희가 답했다.


“즐겁기는 즐겁습니다만,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바라건대 그대와 더불어 삶과 죽음을 같이하리라.”


그러자 월희가 말했다.


“군왕께서 즐겁게 놀러 와서 첩에게 죽음을 이야기하시니 감히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후에 왕이 병들었을 때, 붉은 구름이 나는 새처럼 해를 가렸다. 소왕이 주나라의 태사에게 그 뜻을 물었다. 태사가 말했다.


“이는 왕의 몸에 해가 있다는 뜻이니, 이를 장상(將相, 신하)에게 옮기소서.”


그러자 왕이


“나에게 신하들은 오직 고굉뿐이다.”


라고 말하고는 듣지 않았다. 월희가 말했다.


“크구나, 군왕의 덕이여. 첩은 왕을 따라 죽기를 바라나이다. 옛날에 놀러 가서 이 말을 들었을 때에는 감히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지금 군왕이 예를 되찾았으니 나라 사람들이 군왕을 위해 죽기를 청할 것입니다. 하물며 첩은 어떻겠습니까? 첩이 먼저 가서 땅 밑에서 여우와 삵을 쫓기 원합니다. 옛날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첩이 듣기에 믿는 자는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므로 ‘마음의 맹서[心誓]’라고 한 것이다. 이 일은 「열녀전」에 나온다.

[주:13] 한나라 고조 유방은 척부인(戚夫人)을 무척 총애했다. 고조가 붕어하자 여태후(呂太后)는 척부인의 팔다리를 자른 후, 눈을 뽑고 귀를 멀게 하여 변소에 살도록 한 후 “인간 돼지[人彘]”라고 불렀다.


영원 14년(102년), 여름, 음황후가 무고 사건을 일으켜 폐위되려 했다. 등귀인이 그녀를 구하고자 했으나 그럴 수 없었고, 화제는 더욱더 등 귀인에게 마음을 기울이고자 했다. 그러자 등귀인이 또다시 병이 심하다는 핑계로 스스로 깊이 문을 닫아걸고 왕래를 끊었다. 그때 담당 관리들이 상주하여 장추궁을 세우자고 했다. 황제가 말했다.

"황후는 존귀한 존재이다. 짐과 더불어 한 몸이고 종묘를 이으며 천하의 어머니가 되니 어찌 쉽게 정할 수 있겠는가! 등귀인은 덕이 후궁의 으뜸이니 능히 이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이 되자 황후로 세웠다. 등귀인이 세 번 그것을 사양한 연후에 즉위했다. 그러고 나서 손수 글을 써서 표를 올려 감사를 표하면서 덕이 없고 부족하니 후궁을 선발하여 채울 것을 진심으로 진술했다. 이때 사방의 나라에서 공물을 바치려고 하면서, 진귀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다투어 구했다. 등 황후가 즉위하자마자 영을 내려 이를 일절 바치지 못하게 한 후 세시(歲時)에 따라 종이와 먹만을 바치라고 했다. 또한 화제가 등씨(鄧氏)들의 관작을 올려 주려고 할 때마다 황후는 번번이 애걸하면서 그것을 겸손히 사양했으므로, 오빠인 등질(鄧隲)조차도 화제의 재위 중에는 관직이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에 지나지 않았다.

원흥 원년(105년), 화제가 붕어했을 때, 큰아들 평원왕(平原王)은 병들어 있었으며 여러 황자들 중 요절하여 일찍 죽은 자가 많아 전후로 십여 명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중에 태어난 황자는 번번이 백성들 사이에서 몰래 숨겨서 길렀다. 상제(殤帝)는 태어난 지 백 일밖에 되지 않았으나, 황후가 그를 맞이하여 황제로 옹립했다.

황후를 높여 황태후로 삼았다. 황태후가 조정에 나와 섭정했다.

화제를 장사지낸 후, 궁인들이 나란히 원(園)으로 되돌아갈 때, 황태후가 주(周)귀인과 풍(馮)귀인에게 책서를 내려 말했다.

"짐이 귀인들과 더불어 [황제의] 배우자가 되어 후궁에 들어온 후, 함께 기쁨을 나눈 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하늘의 복을 얻지 못하여 황제 폐하께서 일찍 세상을 버리셨으므로, 혼자된 마음이 외롭디외로워[煢煢][주:14] 하늘을 우러러볼 수조차 없으니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회한을 품다가 가끔은 사무치는 슬픔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이제 옛 법에 따라 서로 떨어져서 궁 바깥의 능원[外園]으로 돌아가면, 참혹한 마음이 가슴에 맺혀 한탄이 날로 늘어날 것인데, 시 「두 마리 제비[燕燕]」로 어찌 이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겠는가?[주:15] 두 귀인에게 왕청개거(王靑蓋車), 빛깔 있는 수레[采飾輅], 곁마 각 한 필, 황금 서른 근, 잡백 삼천 필, 백월 사천 서를 하사하노라."

또 풍귀인에게는 왕이 다는 붉은색 인끈을 내리고, 머리에 아직 보요(步搖, 비녀에 꽂아 걸을 때 흔들리면서 빛을 뿌리는 장식.)와 환패(環珮, 걸을 때 소리 내는 옥으로 만든 고리)가 없는 것을 보고 각각 하나씩을 더해 주었다.[주:16]

[주:14] 경경(煢煢)은 무척 외로운 모습을 말한다. 『시경』에 “외롭디외로워 병이 들었네[煢煢在疚].”라는 구절이 있다.

[주:15] 『시경』 「패풍서(鄁風序)」에 “위장강(衛莊姜)이 돌아가는 첩을 전송했다.”라는 말이 있다. 그에 이어서 “두 마리 제비가 날고 있네. 오르락내리락 날갯짓하며[燕燕于飛, 差池其羽]. 그대 돌아가는 길, 멀리 들에 나와서 전송하네[之子于歸, 遠送于野]. 멀리 내다봐도 보이지 않으니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네[瞻望不及, 泣涕如雨].”라고 읊은 시가 있다.

[주:16] 『주례』에 따르면, “왕후의 머리 장식[首服]을 부(副), 즉 머리꾸미개라고 한다.” 머리에 붙여서[副] 꾸미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보요 같은 것이다. 『석명(釋名)』에 따르면, “황후의 머리를 꾸밀 때, 위에 옥구슬을 늘어뜨렸는데, 걸을 때마다 흔들리면서 빛을 뿌렸다.”

이때 새로 큰 근심을 만났으므로 법과 금령이 아직 정비되지 않았다. 그런데 궁중에서 큰 구슬 한 상자가 없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황태후는 이 일을 곰곰이 생각한 후, 조사하고 심문하여 반드시 죄 없는 사람을 밝히리라 결심했다. 이에 몸소 궁인들을 검열하여 얼굴빛을 관찰하니 즉시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린 자가 있었다.

화제가 총애했던 후궁 중 길성(吉成)이 있었다. 시종들이 함께 길성이 무고를 저질렀다고 거짓으로 고발했다. 액정에서 이에 대해 묻고 심문하니 말과 증거가 명백했다. 그러나 황태후는, 돌아가신 황제 곁에서 함께 모시고 은혜를 입었을 때 [길성이] 평소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숭상했는데 지금 반대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이는 사람의 정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에 다시 몸소 [당사자들을] 불러들여 사실을 따졌다. 그 결과 시종들이 억지로 꾸민 것이 밝혀졌다. 감탄하면서 승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이로써 성명(聖明, 임금의 밝은 지혜)이 널리 알려졌다.

귀신을 불러들이지 못하는 음사(淫祀, 예법에 맞지 않는 제사.)는 보통 복을 내리지 못했으므로 담당 관리에게 조서를 내려 여러 제사관 중에서 전례에 규정되지 않은 자들을 파직했다. 다시 조서를 내려 건무 이래로(광무제 이래로) 요사하고 간악한 죄를 범한 자들을 모두 사면했으며, 마씨와 두씨 일족 중에서 금고에 처했던 자들은 모두 되돌려 평민으로 삼았다.

태관(大官), 도관(導官), 상방(尚方), 내자(內者)[주:17] 에 영을 내려 의복과 수레와 음식과 반찬 중에서 사치하고 화려하여 만들기 어려운 것들을 줄이게 했으며, 스스로도 능묘(陵廟)에 이바지할 때가 아니면 기장쌀을 잘 골라 밥을 짓게 하고 아침저녁으로 고기반찬은 하나만 놓게 했다. 옛날 대관 중 하나인 탕관(湯官)은 보통[經][주:18] 한 해에 이만 냥을 썼는데, 황태후가 이처럼 칙서를 내려 그치도록 하니 날마다 맛좋은 음식을 마련하는 비용을 줄이고 없애서 몇천만 냥을 쌓을 수 있었다.

또한 군국에서 바치는 공물들을 모두 그 절반으로 줄이게 했다. 상림(上林)원에서 기르는 사냥매와 사냥개를 모두 물리쳐 팔아 버렸다. 촉군[蜀]과 광한군[漢]에서 금테를 두른 그릇[釦器]과 아홉 번 띠를 두른 패도(佩刀)를 대대로 바쳤는데,[주:19] 모두 다시는 징발하지 못하게 했다. 그림으로 장식하는 것 서른아홉 종류를 그만두게 했다.

또 어부(御府, 황제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상방, 직실에 영을 내려 금수(錦繡, 꽃무늬가 정교하고 선명하며 곱게 들어간 비단.), 빙환, 기곡(綺縠, 엷고 하늘하늘한 비단.), 금과 은으로 만든 세공품, 진주와 옥으로 꾸민 장식품, 코뿔소 뿔과 상아, 대모(玳瑁, 바다거북의 일종) 껍데기, 곱게 조각한 장난감 등을 모두 금지하여 다시는 만들지 못하게 했다. 이궁 별관에 쌓아 둔[儲峙] 말린 밥[糒]과 숯[주:20] 을 모두 없애게 했다.

또 여러 능원(陵園)의 귀인(貴人)들에게 조서를 내려 궁인들 중에 종실과 동족이면서 병들고 늙어서 사자를 맡길 수 없는 자들이 있다면 원감(園監)으로 하여금 실상을 파악하여 명단을 올리게 했다. 그러고 나서 몸소 북궁으로 행차해 기쁨에 차서 그 이름을 열람하여 살펴보고 질문한 후 임의로 능원을 떠나거나 머물거나를 택하게 하니 그날로 면천되어 떠난 자가 오륙백 명에 이르렀다.

[주:17] 『한관의』에 따르면, “대관은 반찬 바치는 일을 주관한다.” 『한서』 「음의」에 따르면, “도관은 쌀을 골라 제사에 이바지하는 것을 주관한다. 상방은 칼과 검을 만들거나 옥을 깎아 그릇을 만드는 일을 책임진다.” 『한관의』에 따르면, “내자는 휘장과 장막을 책임진다.” 모두 관서 이름이다.

[주:18] 경(經)은 상(常), 즉 ‘늘’이라는 뜻이다.

[주:19] 촉(蜀)은 촉군이다. 한(漢)은 광한군이다. 이 두 군은 주로 황궁에 바치는 그릇들을 만든다. 한나라 원제 때 공우(貢禹)가 상서를 올려 말하기를, “촉군과 광한군은 주로 금과 은으로 그릇을 만드는데, 각각 오백만 냥을 쓴다.”라고 했는데, 바로 이를 말한다. 구(釦)는 음이 구(口)인데, 금과 은으로 그릇에 테두리를 두르는 것이다.

[주:20] 저치(儲峙)는 쌓아 두는 것을 말한다. 비(糒)는 말린 밥이다.

상제(殤帝: 105-106)가 붕어하자 황태후는 궁중에서 계책을 정하여 안제(安帝)를 옹립하고, 친히 조정에 나와 섭정했다.

연이어 큰 근심[주:21] 을 만나 백성들의 노역이 매우 심했으므로, 상제를 강릉 방중(方中)에 비장할 때[祕藏][주:22] 여러 물품들을 하나하나 줄이고 생략하여 십분의 일로 하게 했다.

[주:21] 큰 근심이란 화제와 상제가 붕어한 것을 말한다.

[주:22] 방중은 능 안을 말한다. 무덤 안이므로 숨긴다[祕]는 말을 쓴 것이다.

조서를 내려 사예교위(司隷校尉), 하남윤(河南尹), 남양태수(南陽太守)에게 고했다.

이전 조정에 있었던 외척의 빈객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위엄과 권위를 빌려서 행동은 경박하고 말은 부박[謥詷][주:23] 하게 함으로써 나랏일을 흐리고 어지럽히는 데까지 이르러 백성들에게 근심과 고통이 되는 바가 많았다. 이는 허물이 있어도 법을 게을리 집행하여 번번이 그 벌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지금 거기장군(車騎將軍) 등질(鄧隲) 등은 공경과 순종의 뜻을 품었을지라도 그 문중이 광대하고 인척이 적지 않으며 빈객들이 간사하고 교활하여 법에서 금하는 바를 범하는[干][주:24] 바가 많다. 봉인한 칙서[檢敕]를 더하여 분명히 밝히노니 서로 용인하고 비호하지 말라.

이때부터 외척들이 죄를 저지를 때 너그러이 용서하는 바가 없어졌다.

황태후는 음 씨가 죄를 저질러 폐위된 것을 불쌍히 여긴 끝에 그 무리들을 사면하여 고향에 돌아가게 했으며, 칙서를 내려 그들의 재산 오백여만 냥을 돌려주게 했다.

영초 원년(107년), 태부인(등 태후의 어머니)에게 작위를 내려 신야군(新野君)으로 삼고, 일만 호를 탕목읍(湯沐邑)[주:25] 으로 주었다.

[주:23] 급하고 소홀하다[忽遽]는 뜻이다. 총(謥)은 음이 칠(七)과 동(洞)의 반절이다. 동(詷)은 음이 동(洞)이다.

[주:24] 간(干)은 범(犯), 즉 범한다는 뜻이다.

[주:25] 탕목(湯沐)이란, 그 구실과 조세를 취하여 목욕재계하는 데 쓸 수 있게 한 읍을 말한다.

원흥 2년(106년), 여름, 서울 낙양에 가뭄이 들자, 황태후는 친히 낙양시로 행차하여 원통하게 옥에 갇힌 사람이 있는지를 살폈다. 이때 죄수 중에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억지로 자백 당하는 바람에 감옥에 갇힌 자가 있었다. 지치고 곤핍하여 여위고 병든 몸으로 황태후가 탄 가마를 보았지만 관리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다가 황태후가 떠나려 하자 고개를 드는 것으로 스스로 하소연할 기회를 잡고자 했다. 황태후가 죄수들을 둘러보다가 그를 보고 할 말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에 즉시 불러서 문서를 살핀 후, 사실을 따져 밝히고는 즉시 낙양령을 잡아들여 하옥했다. 그러자 행렬이 미처 궁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단비가 크게 내리기 시작했다.

원흥 3년(107년), 가을, 황태후의 몸이 편안하지 못하자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당황하여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면서 축복을 말을 빌자고 청하고는 대신 죽을 자를 구하려고 했다. 황태후가 그 말을 듣고 즉시 꾸짖고 성내면서 액정령(掖庭令) 이하에게 엄히 명령을 내려 잘못을 사죄하고 복을 빌 뿐 망령되이 상서롭지 않은 말을 하지 못하도록 금했다.

옛 일에 한 해가 끝나면 잔치를 열어 돌아가는 위사(衛士)들을 위로했고,[주:26] 대나(大儺)를 벌여 돌림병을 쫓았다.[주:27] 황태후는 음과 양이 서로 화합하지 않았기에 군대가 몇 차례나 일어났다고 보고, 조서를 내려 잔치를 벌일 때 음악을 지어 연주하며 놀지 못하게 하고, 역병을 쫓는 진자(侲子)[주:28] 의 수를 절반으로 줄이게 했으며, 코끼리와 낙타 같은 것들은 모두 풀어 주게 했다. 그러자 풍년이 다시 돌아왔다.

황태후는 황궁에 들어온 후 조대가(曹大家, 반표의 딸로 『한서』를 완성한 반소를 말한다. 남편 조세숙(曹世叔)이 죽은 후, 화제가 자주 궁궐에 불러들여 황후와 비빈들을 가르치게 했으므로 모두 그녀를 존경해 조대가라고 불렀다.)를 좇아서 경서를 배웠으며, 천문(天文)과 산수(筭數)도 겸했다. 낮에는 왕의 정치를 살피고 밤에는 경전을 읽고 외웠으나 그 잘못된 곳을 근심하고 원본에서 동떨어진 것을 두려워했다. 이에 널리 유진 등 여러 유학자들을 비롯해 박사, 의랑, 사부의 속관 오십여 명을 선발하여 동관에 모이게 한 후 전해 오는 기록들을 대조하여[讎][주:29] 교감하게 했다. 일이 끝나서 황태후에게 바치자 그들에게 갈포(葛布)를 하사했는데 각자 차이를 두었다.

[주:26] 옛 일이란, 교대할 사람이 생겨 위사들이 돌아갈 때 황상이 친히 잔치를 열어 위로하는 것을 말한다. 『한서』 「개관요전(蓋寬饒傳)」에 따르면, “한 해가 끝나고 교대가 이루어지면, 황상이 친히 참석해서 잔치를 벌이고 돌아가는 호위 군사들을 위로한다.”라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말한다.

[주:27] 『예기』「월령」에 따르면,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대나를 벌이고, 사방의 문에 희생을 바쳐 제사지내며[旁磔], 흙으로 만든 소[土牛]를 파내서 차가운 기운을 내보낸다.” 정현은 『예기주』에서 “나(儺)는 음기이다. 이 달에는 해가 허성과 위성(危星)을 지나가므로, 무덤에 사성(四星)의 기운이 있으면 여귀(厲鬼, 돌림병을 퍼뜨리는 못된 귀신.)가 된다. 강한 음기를 좇아서 튀어나와 사람을 해친다.” 그러므로 나(儺)를 벌여 그것을 물리치는 것이다.

[주:28] 진자는 역병을 쫓는 사람이다. 진(侲)은 음이 진(振)이다. 설종은 「서경부」를 주해하면서 “진(侲)이란 말이 착한 것을 말한다. 착한 어린아이들이다.”라고 했다. 『속한서』에 따르면, “대나를 벌일 때에는 중황문의 자제 중에서 나이 열 살 이상 열두 살 이하로 백이십 명을 진자로 선발한다. 모두 빨간 두건을 쓰고 하얀 옷을 입고, 커다란 노도(路鼗, 악기의 일종)를 든다.”

[주:29] 수(讎)는 대(對), 즉 짝을 지어 대조한다는 뜻이다.

[주:30] 동원은 부서 이름으로 소부에 속한다. 장례용품을 만드는 일을 담당했으므로, 귀신을 뜻하는 비(祕)라는 말을 쓴 것이다.

[주:31] 양암은 상중에 거하는 오두막집이다. 때때로 ‘양음(諒陰)’이라고도 한다. 양(諒)은 신(信), 즉 ‘진실로’라는 뜻이고, 음(陰)은 묵(默), 즉 침묵한다는 뜻이다. 근심 중에 거하면서 진실로 침묵하면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조서를 내려 중관들과 근신들을 동관에 모이게 하여 경전을 읽고 배우게 하여 이로써 궁인들을 가르치게 했는데, 좌우에서 글을 배우고 외는 소리가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얼마 후 신야군(新野君)이 죽었다. 황태후가 몸소 환자를 돌보았는데, 지극한 정성이 끝이 없었고 근심과 슬픔에 몸이 상할 지경이었으며 모시는 바가 평소보다 더했다. 장공주(長公主)의 예로서 붉은색 인끈, 동원(東園)의 비기(祕器),[주:30] 옥의(玉衣, 황후나 비의 수의.)와 수금(繡衾, 수놓은 이불)을 내렸으며, 더하여 베 삼만 필과 돈 삼천만 냥을 내렸다. 등질 등이 돈과 베를 끝내 사양해 받지 않았다. 사공에게 지절을 주어 보내 상사를 지키게 했으며, 의례는 동해공왕(東海恭王) 때에 견주게 하고 시호를 경군(敬君)이라 했다.

황태후가 양암(諒闇, 군주가 상중에 있을 때 거하는 방.)[주:31] 에서 거하는 것을 마쳤다.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되자, 황태후는 사흘 동안 낙양(洛陽)으로 행차하여 죄수들의 실상을 살피고 다시 심리하여 사형죄를 저지른 자 서른여섯 명, 내죄형을 저지른 자 여든 명을 석방했다. 또 그 나머지 우지형(右趾刑: 발을 자름) 이하 사구작에 이르는 자들의 죄를 감해 주었다.

원흥 7년(112년), 정월, 처음으로 태묘(太廟)에 들어가 이레 동안 재계한 후, 공경 이하 모든 관료들에게 은사를 내리되 각자 차이를 두었다.

경술일, 종묘(宗廟)에 고했다. 명부(命婦)들과 뭇 후궁들을 이끌고 의례를 치르도록 도왔다[相].[주:32] 황제와 함께 교대로 술을 바치고[交獻] 친히 공물을 올린 후, 예를 마치고 돌아왔다.[주:33] 조서를 내렸다.

지금 이바지하는 공물 중 새로운 맛을 내는 것에는 계절에 맞지 않는 음식이 많다. 어떤 것은 온실에서 강제로 숙성한 것[鬱養强孰]이고, 어떤 것은 억지로 싹을 틔운 것[穿掘萌牙]으로 맛이 지극함에 이르기 전에 억지로 성장시킨 것들이니 어찌 때에 순응하면서 길러 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논어』에 이르기를, “제철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주:34] 라고 했다. 지금부터는 마땅히 능묘(陵廟)에 제사를 올릴 때 쓰는 제물은 모두 시절에 맞는 것만을 올리도록 하라.

이에 모두 스물세 종류를 없앴다.

[주:32] 상(相)은 조(助), 즉 돕는다는 뜻이다. 『의례』에 따르면, “명부(命夫)는 남자 중에서 대부를 말한다. 명부(命婦)는 대부의 아내이다.”

[주:33] 『주례』에 따르면, 종묘에 제사하는 날 아침에 왕은 곤룡포와 면류관을 벗고 들어가서 동쪽 계단에 선다. 왕후는 아름답게 꾸민 후 왕을 좇아서 들어간다. 왕은 규찬(圭瓚, 옥이나 은으로 만든 술잔)에 울창주(鬱鬯酒)를 따라 조상의 신위에 바치고, 그다음 왕후가 장찬(璋瓚)에 울창주를 따라 조상의 신위에 바친다. 이를 일컬어 교대로 술을 바친다[交獻]라고 일컫는다. 제사가 끝날 때까지 모두 아홉 번 바친다.

[주:34] 『논어』에 “제때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不時不食].”라는 말이 있다. 제철에 난 것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서』에 「소신신전(邵信臣傳)」에 “제때에 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상하게 하므로 공양에 써서는 안 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황태후가 조정에 나와 섭정한 후로부터 홍수와 가뭄이 십 년 동안 계속되었고, 바깥에서는 사방의 오랑캐들이 쳐들어왔으며 안에서는 도적들이 일어났다. 매번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황태후는 아침에 이르도록 잠들지 못할 때도 있었으며 몸소 음식을 줄여서 재앙을 벗어나고자 했으므로 천하가 다시 평정되고 풍년이 되돌아왔다.

원초 5년(118년), 평망후(平望侯)[주:35] 유의(劉毅)가 태후가 덕 있는 정치를 많이 폈다는 말을 듣고, 이를 조금이라도 빨리 기록하여 남기고자 하여 안제(安帝)에게 상서를 올려 말했다.


"신이 듣기에 『역경』에서 복희씨(伏羲氏)와 신농씨를 기재하여 임금의 덕[皇德]이 뚜렷해졌으며,[주:36] 『서경』에서 요 임금과 순 임금을 기술하여 임금의 도가 높아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덕이 이미 밝히 드러났다 할지라도 공이 있으면 반드시 대나무나 비단[竹帛]에 기록했고, 피리 구멍과 악기 줄[管弦]에서 소리가 흘러나오게 했습니다.[주:37] 엎드려 생각건대 황태후께서는 마음은 큰 성인의 모습을, 몸은 하늘과 땅의 덕을 품으셨으니[주:38] 그 자취는 아황과 여영[虞妃]에 맞설 정도이며 그 공적은 태임과 태사[任姒]에 비견할 정도입니다.[주:39] [윗사람에게는] 효도하고 공경하며 [아랫사람에게는] 자애롭고 인자하신 데다 [일을 할 때에는] 성실하고 삼가면서 절제하고 검약하시어 사치의 근원을 막아 없애시고 탐욕의 조짐을 덮어 누르셨습니다. 이에 안에서 자리가 바로잡히니 교화가 사해(四海)에 흘러넘쳤습니다.[주:40]

[주:35] 평망현(平望縣)은 북해군에 속한다. 지금의 청주 북해현(北海縣) 서북쪽에 평망대(平望臺)가 있다. 일명 망해대(望海臺)라고도 한다.

[주:36] 『역경』 「계사전(繫辭傳)」에 따르면, “옛날에 포희씨(庖羲氏, 복희씨)가 천하의 왕이었을 때, 우러러서 하늘 모양을 관찰하고 구부려서 땅 모습을 관찰하여 처음으로 팔괘를 그렸는데, 이로써 천지 신령의 덕에 통달하고 만물의 정을 알아챌 수 있었다. 포희씨가 죽자 신농씨가 일어나서 나무를 깎아 보습을 만들고 나무를 구부려 쟁기를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보습과 쟁기의 이로움으로써 천하를 교화했다.” 복희씨와 신농씨는 삼황에 속하므로 황덕(皇德)이라고 한 것이다.

[주:37] 죽(竹)은 간책(簡冊)을, 백(帛)은 흰 명주를 말한다. 황제(黃帝) 이하 육 대까지의 음악은 모두 공덕(功德)을 드러내 밝혔는데, 이것을 피리 구멍과 악기 줄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고 한 것이다.

[주:38] 『역경』에 “성인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친다.”라는 말이 있다.

[주:39] 우비는 순 임금의 아내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말한다. 임(任)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이고, 사(姒)는 주나라 무왕의 어머니이다.

[주:40] 『역경』 가인괘(家人卦)에 “여자가 안에서 자리를 바르게 한다[女正位乎內]. 집안이 바르면 천하가 평정되는 법이다[正家而天下定矣].”라는 말이 있다. 『예기』에 따르면, 동이,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을 일컬어 사해라고 한다.

그 후 원흥(상제의 연호)과 연평(안제의 연호) 무렵에 나라에 태자[儲副]가 없었을 때, 우러러 하늘 모양을 관찰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기리도록 한 후 폐하를 옹립하도록 도와 천하의 주인이 되게 하시고, 한나라 황실을 영원히 안정시켰으며 사해를 편안하게 하셨습니다. 또 큰 비를 만나 동쪽 여러 주의 백성들이 굶주렸을 때[주:41] 백성들에게 은혜를 내리시매 사자들이 길에서 서로 교차할 정도였고, 의복과 음식을 가볍게 함으로써 몸소 뭇 신하들을 이끄셨으며, 찬을 줄이고 곁마를 풀어 주어 백성들[黎苗][주:42] 을 구휼하셨습니다. 백성들에게 측은지심의 은혜를 베풀어 갓난아기[赤子]처럼 돌보신 것입니다.[주:43] 또한 사사로운 욕심을 누르고 온갖 허물을 떠안으셨으며 낮고 미미한 자들을 드러내 널리 이름을 떨치게 하셨습니다. 부드럽디부드러운[晏晏][주:44] 정치를 숭상하시고, 가르침을 펴되[敷] 너그럽게 하셨습니다.[주:45] 망해 가는 나라를 흥하게 하고 끊어졌던 후세를 이으셨으며 공신을 정하여 기록하고 종실을 되살리셨습니다. 귀양 갔던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셨으며 금고를 풀어 없애 주셨습니다. 정치가 은혜롭고 온화하지 않으면 마음에 생각조차 하지 않으시니 옛 법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면 조회할 때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 넓으신 덕은 바다를 넘치게 하고[洋溢][주:46] 우주를 채워 막히게 할 정도이며, 그 커다란 은혜는 풍성하고 성대하여 팔방에 흘러넘칠 정도입니다. 그리하여 중원은 교화를 즐거워하고 오랑캐들은 하나로 아우러졌습니다. 그 커다란 공적이 우리 한나라에서 우뚝하고 그 커다란 은혜가 백성들에게 더해졌습니다. 그 높디높은 업적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을 지경이며 그 넓디넓은 공훈은 이름 지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옛날의 제왕들은 모두 좌우에 사관을 두었습니다.[주:47] 한나라의 옛 법에도 대대로 기록을 남기게 했습니다.

[주:41] 연평 원년(106년), 안제가 즉위하자마자 여섯 주에 큰물이 들었다. 영초 원년, 사예교위, 연주, 예주, 서주, 기주 및 여섯 주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내려 주었다.

[주:42] 『광아』에 따르면, “묘(苗)는 중(衆), 즉 무리라는 뜻이다.”

[주:43] 은(隱)은 통(痛), 즉 아프다는 뜻이다. 『상서』에 “만약 갓난아기처럼 돌본다면[若保赤子], 그 백성들을 편안히 다스릴 수 있으니[惟人其康乂].”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44] 『상서』 「고령요(考靈燿)」에 “말투는 부드럽디부드럽고[文塞晏晏].”라는 구절이 있다.

[주:45] 부(敷)는 포(布), 펼친다는 뜻이다. 『상서』에 “다섯 가지 가르침을 너그럽게 펼치라[五敎在寬].”라는 말이 있다.

[주:46] 바다를 넘치게 한다[洋溢]는 것은 많다는 뜻이다.

[주:47] 『예기』 「옥조(玉藻)」에 따르면, “움직일 때는 좌사(左史)가 그것을 기록하고, 말할 때는 우사(右史)가 그것을 기록한다.”

무릇 도에는 낮음과 높음이 있어야 하며, 다스림에는 나아감과 물러섬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선한 정치를 기술해 두지 않고 세세한 이적들도 번번이 기록해 두지 않았다면, 요 임금이 홍수로, 탕 임금이 큰 가뭄으로 하늘의 꾸짖음을 받았으나 모두 큰 업적을 널리 떨쳐서 하늘의 아름다움에 이른 것[咸熙假天之美][주:48] 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또 은나라 고종(高宗)과 주나라 성왕이 까치가 울고 큰 바람이 부는 변고를 맞았지만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편안하게 한 공도 없어졌을 것입니다.[주:49] 『시경』과 『서경』을 상고해 보니, 순 임금에게는 두 왕비가 있었고, 주나라 왕실에는 세 어머니가 있어[주:50] 행실을 닦아 덕을 보좌하고[주:51] 생각은 문지방을 넘지 않았습니다[思不踰閾].[주:52] 이에 안으로 집안의 어려움을 만나고 바깥으로 재해를 만나는 일이 없었으며, 조정의 모든 일들을 세세히 기록하여[大麓] 열람하고 총괄하면서 천하 만물[天物][주:53] 을 경영하니 공덕의 높디높음이 이처럼 커다랗습니다. 마땅히 사관을 시켜 『장락궁주(長樂宮注)』와 『성덕송(聖德頌)』을 짓게 해 그 찬란한 업적을 널리 알리고 쇠와 돌에 그 공훈을 기록하여 해와 달보다 높이시고[주:54] 세상 끝까지 널리 펴심으로써[攄] 폐하의 두텁디두터운[烝烝] 효심을 높이소서.[주:55]"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주:48] 함(咸)은 개(皆), 즉 모두라는 뜻이다. 희(熙)는 광(廣), 즉 넓다는 뜻이다. 『상서』에 “여러 가지 공적이 모두 너르다[庶績咸熙].”라는 구절이 잇다. 요 임금의 정치는 여러 가지 공적이 모두 널리 퍼졌다는 말이다. 가(假)는 음이 격(格)으로 지(至), 즉 이르렀다는 뜻이다. 『상서』에 “우리 조상의 업적을 도와 하늘에까지 이르게 했다[祐我烈祖, 格于皇天].”라는 구절이 있다. 이윤이 탕 임금을 보좌하니, 그 공이 하늘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요 임금 때에는 아홉 해 동안 홍수가 났고, 탕 임금 때에는 일곱 해 동안 큰 가뭄이 들었다.

[주:49] 고종은 은나라 왕으로 소을(小乙)의 아들이며 이름은 무정(武丁)이다. 탕 임금을 제사할 때, 꿩이 날면서 솥[鼎]의 귀에 앉아서 우니 고종이 덕을 닦아 은나라의 도가 다시 흥하게 되었다. 주나라 성왕이 주공을 의심하자 우레가 울고 벼락이 치면서 큰 바람이 부는 변고가 일어났다. 이에 성왕이 잘못을 고치니 형벌이 거의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주:50] 『서경』에 “두 딸을 규수(嬀水) 어귀로 내려 보내 우(虞, 순 임금)에게 시집보냈다.”라는 구절이 있다. 세 어머니란 후직의 어머니 강원(姜嫄),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 주나라 무왕의 어머니 태사(太姒)를 말한다. 『시경』 「대아」에 따르면, “그 처음 사람을 낳은 분은 바로 강원이시라네[厥初生人, 時維姜嫄].”라는 구절이 있다. 또 “태임이 잉태하여 문왕을 낳으셨도다[太任有身, 生此文王].”라는 구절이 있다. 또 “태사가 아름다운 명성을 이어받으니 많은 아들을 낳았구나[太姒嗣徽音, 則百斯男].”라는 구절이 있다.

[주:51] 『시경』에 “공덕 높으신 아버님께 제물 올리고, 문덕 높으신 어머님께도 제물 올린다[旣有烈考, 亦有文母].”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이 바로 덕을 보좌했다는 뜻이다.

[주:52] 역(閾)은 문지방을 말한다.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아녀자들은 사람을 맞거나 보낼 때 문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므로 형제를 만날 때에도 문지방을 넘지 않았다.”

[주:53] 록(麓)은 록(錄), 즉 기록한다는 뜻이다. 황제의 세세한 정치를 모두 기록한다는 말이다. 『서경』에 “큰 숲으로 들어가시니[納於大麓].”라는 구절이 있다. 또 “천하 만물을 함부로 죽이다[暴殄天物]”라는 구절이 있다.

[주:54] 『역경』에 “하늘의 현상 중 가장 밝게 드러나는 것은 해와 달보다 큰 것은 없다[縣象著明, 莫大於日月].”라는 말이 있다.

[주:55] 『광아』에 따르면, “터(攄)는 서(舒), 즉 편다는 뜻이다.” 공안국은 『상서주』에서 “증증(烝烝)은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進進]이다.”라고 했다.

원초 6년(119년), 등태후가 조서를 내려 화제의 동생인 제북왕(濟北王)과 하간왕(河閒王)의 아이들 중 나이 다섯 살 이상 사십여 명과 등씨의 가까운 친척 자손 삼십여 명을 불러들인 후 그들을 위하여 저제(邸第, 관사)[주:56] 를 열고 경서를 가르치고 배우게 하고는 몸소 나아가 시험을 치렀다. 아직 어린아이들은 사보(師保)를 두고 아침저녁으로 궁궐에 들어오게 하여 잘 달래어 따르게 하고 가르쳐 이끌도록[詔導][주:57] 하니 은혜와 사랑이 무척 두터웠다. 또 사촌오빠인 하남윤 등표(鄧豹)와 월기교위 등강(鄧康) 등에게 조서를 내렸다.

"내가 여러 아이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을 위하여 학교를 설치한 것은 요즈음 세태가 대대로 이어진 폐단을 받듦으로써 시중 풍속은 천박해져서 거짓됨이 넘쳐 나며 오경은 쇠퇴하고 이지러져서 교화로써 이끄는 바가 없어지니 장차 [문명이] 쇠락하려 하므로 성인의 도를 기리고 높여 잃어버린 풍속을 바루고자 한 것이다. 『논어』에 말하지 않았던가! “온종일 배불리 퍼먹고 마음을 쓰는 바가 없다면 어렵구나!”[주:58] 지금 귀척의 후예들은 봉록을 누리는 집안에서 태어나 따뜻한 옷과 맛있는 밥을 먹고 튼튼한 수레를 타고 좋은 말을 몰고 있으나[乘堅驅良][주:59] 도리어 배우는 데는 힘쓰지 않아 벽에 얼굴을 마주한 것 같고[面牆][주:60] 좋고 나쁜 것조차 구별할 줄 모르니 이것은 반드시 재화와 패망을 불러들일 것이다. 영평 연간(58~75년)에 사성소후[주:61] 에게 영을 내려 태학에 입학하게 한 후 속된 것을 바로잡고 소박한 것을 장려하니 그들이 돌이켜 충성과 효도를 바치게 되었다. 돌아가신 공[先公]은 무로써 공을 세워[武功] 죽백에 이름이 오른 데다 문으로써 덕을 베풀어[文德] 자손을 교화하셨다.[주:62] 그러므로 스스로 마음을 닦아 자신을 바룰 수 있다면[束脩][주:63] 법의 그물에 저촉됨이 없으리라. 진실로 아이들에게 영을 내리노니 위로는 조상의 훌륭한 공적을 진술하고, 아래로는 조서의 본래 뜻을 생각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힘쓸지어다!"

[주:56] 『창힐편』에 따르면, “저(邸)는 사(舍), 즉 집이라는 뜻이다.”

[주:57] 조(詔)는 고(告), 즉 알린다는 뜻이다.

[주:58]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사람이 하루 종일 배불리 먹을 뿐, 도의에는 마음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렵구나!”라고 한 것은 끝내 멀고 큰 뜻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주:59] 견(堅)은 좋은 수레를, 량(良)은 좋은 말을 일컫는다. 『묵자』에 따르면, “성스러운 임금은 옷 짓는 법을 만들었고, 튼튼한 수레와 좋은 말이 귀한 줄 몰랐다.”

[주:60] 『서경』에 “배우지 않으면 벽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弗學牆面].”라는 구절이 있다.

[주:61] 사성소후에 대한 풀이는 「명제기」에 나온다.

[주:62] 선공(先公, 황제나 제후의 선조를 높이는 말.)은 등우를 말한다. 등우는 아들이 열세 사람이었는데, 각각 한 가지 재주를 익히게 했으므로 문으로 덕을 베풀었다[文德]고 한 것이다.

[주:63] 스스로 수양하여 잘못된 것을 바루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말한다.

등강(鄧康)은 황태후가 오랫동안 섭정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크게 두려워하면서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황태후가 궁궐 안 사람을 시켜 그를 문병하게 했다. 이 무렵 궁중 시녀들이 드나들 때, [바깥 사람을] 헐뜯거나 기리는 바가 많았고, 그중 나이가 많은 자[耆宿]을 모두 중대인(中大人)이라 불렀다. 이에 사자가 등강의 집에 이르러 먼저 시비를 보내면서 역시 스스로를 중대인이라고 칭했다. 등강이 그 말을 듣고는 그를 꾸짖어 말했다.

“너는 내 집에서 나가라. 네가 감히 어찌하여 이리 간사한가!”

이에 궁궐 시비가 크게 화를 내고 궁으로 돌아가서는 등강이 꾀병을 부리는 데다 불손한 말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황태후가 등강의 관직을 면직했으며, 그 나라로 돌려보낸 후 호적에서 이름을 없앴다.

영녕 2년(121년), 2월, 병들어 눕는 날이 점점 많아지자 황태후는 전전(前殿)에서 가마에 올라탄 후 시중과 상서를 알현하고 북쪽으로 가서 태자가 새로 궁궐을 수리하는 곳에 이르렀다. 돌아오다가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여러 능원의 귀인들, 왕들, 공주들, 뭇 신료들에게 돈과 옷감을 하사하되 각자 차이를 두었다. 조서를 내렸다.

"짐이 덕이 없으면서 어머니로서 천하를 맡았으나 박복하여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한 탓에 일찍이 황제를 잃고 커다란 근심에 처하게 되었다. 연평 무렵(상제가 죽었을 때), 천하에 주인이 없어 백성들이 액운을 만나고 나라는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다.[주:64] 이에 간절하게 애쓰고 감히 만승(萬乘: 천자)을 즐거움으로 삼지 않으면서 위로는 하늘을 속여 돌아가신 황제께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거슬러 본래 품었던 마음[宿心]을 저버리지 않으려 했다. 오직 마음을 다해 백성을 구제함으로써 유씨 황실을 편안히 하려 한 것이다. 스스로는 하늘과 땅에 정성이 통했으니 마땅히 복을 입기 바랐으나 오히려 안팎[주:65] 으로 상을 당해 상심과 비통함이 끊이지 않았다. 요즈음 병들어 누워 일어나지 못한 날이 계속되어 오랫동안 제사를 모실 수 없었다. 내 힘으로 원릉(광무제의 능)에 오르고자 했으나 기침이 목구멍을 거슬러 올라 피를 토하는 지경에 이르러 끝내 낳지 않을 것 같다. 살고 죽는 것은 모두 천수에 달려 있으니 감히 어찌할 수 있으랴. 공경 백관들은 모두 충성과 공경을 다해 그 직분에 힘써서 조정을 보좌하라."

3월, 황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황후에 오른 지 스무 해 만이었으며, 나이는 마흔한 살이었다. 순릉(順陵)에 합장했다.

[주:64] 『설원』에 따르면, “진(晉)나라 영공(靈公)이 교만하고 사치스러워 아홉 층 누대를 짓게 했다. 이에 나라는 궁핍해지고 백성들은 가난해졌으며 공을 이루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일이 진척되지 않았다. 이에 영공이 영을 내려 말했다. ‘좌우에 간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목을 베어라.’ 이에 순식(荀息)이 알현을 청했다. 영공이 말했다. ‘간하려고 하는가?’ 순식이 답했다.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신이 바둑알 열두 개를 쌓고, 그 위에 달걀 아홉 개를 더 얹을 수 있음을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영공이 말했다. ‘그건 위태롭다.’ 순식이 말했다. ‘그보다 더 위태로운 것이 있습니다. 왕께서 아홉 층 누대를 짓느라고, 백성들이 밭 갈고 길쌈하기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직이 한 번에 망하고 나면, 왕께서는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영공이 말했다. ‘모두가 내 잘못이다.’ 이에 짓던 누대를 무너뜨려 버렸다.”

[주:65] 안팎이란 신야군이 죽고 화제와 상제 두 황제가 붕어한 것을 말한다.

논하여 말한다.

등황후는 죽을 때까지 섭정하면서[稱制], 스스로 명을 내리고 영을 반포했다.

입으로는 이전 시대 정치[前政]의 어짊을 사양해 말했으나, 몸으로는 군주[辟]를 밝히는 의로움을 빠뜨렸다.[주:66]

또 물려받은 자[嗣主]로 하여금 곁눈질하게 하고 빈 그릇[虛器][주:67] 에 옷깃을 여미게 하는 데 이르니

곧은 유생들[直生]이 분개하여 대궐 문[象魏]에 투서를 내걸었다.[주:68]

빌림[借]의 의례가 그 미혹함을 가깝게 했구나[殆其惑哉]![주:69]

건광 이후 권력[王柄]이 황제에게 돌아가자[주:70]

끝내 이름난 현자들은 죽임의 치욕[戮辱]을 당하고

아첨꾼[便孽]들이 무리를 이루어 앞에 나서게 되었다.[주:71]

쇠퇴와 패망[斁]이 다가오니 어찌 징조가 자주 있지 않겠는가.[주:72]

[주:66] 전 시대의 정치[前政]는 주공을 말한다. 벽(辟)은 군(君), 즉 임금이라는 뜻이다. 『서경』에 “그대 밝은 임금님께돌려 드립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주공이 섭정하다가 주나라 성왕에게 다시 제위를 돌려준 것을 말한다. 이때 등 태후는 돌려주지 않았으므로 빠뜨렸다[闕]고 한 것이다.

[주:67] 기(器)는 신령한 그릇[神器], 즉 황제의 자리를 비유한 말이다.

[주:68] 상위는 궐(闕), 즉 궁궐을 말한다. 곧은 유생이란 두근(杜根) 등이 상서를 올려 등 태후가 안제에게 정권을 돌려주라고 청한 것이다.

[주:69] 차(借)는 가(假), 즉 빌린다는 뜻이다. 태(殆)는 근(近), 즉 가깝다는 뜻이다. 등 태후가 결국 안제에게 정치를 돌려주지 않았으므로 미혹에 가까워졌다고 한 것이다.

[주:70] 등 태후가 건광 때 붕어하고 나서야 정치가 안제에게 돌아왔다.

[주:71] 황제가 유모 왕성 및 그 딸 백영(伯榮)을 총애해 후궁에 드나들게 했으므로 그를 통해 간악한 재물들을 전달하니 태위 양진 및 등질 등이 모두 중관(상시 이하의 환관)들의 참소를 받아 주살되었다.

[주:72] 역(斁)은 패(敗), 즉 패망한다는 뜻이다. 안제가 정치에 임하고 나서 쇠락과 패망이 더욱 심해졌으므로 징조가 있다고 한 것이다.

권력을 쥔 것은 헐뜯음을 끌어들이고 총애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는 바가 아니다.

마음을 다해 우환을 없애고, 정신을 가다듬어 나라만을 위해야 한다.[주:73]

이때 반씨(班氏)가 어머니에 대해 한마디 말을 하자 집안이 일을 사양할 수 있었다.[주:74]

또 사랑하는 조카는 작은 죄를 저질렀을 때 머리카락을 잘라 사죄하게 했다.[주:75]

그러나 두근(杜根)이 주살당했을 때에는 어찌 믿음[誠]이 아직 미치지 못했단 말인가![주:76]

소가 밭을 가로질렀다 해서 그것을 빼앗는 것은 심한 짓이 아닌가![주:77]

[주:73] 조정 권력을 쥔 것이 비방하는 무리를 불러들이고, 총애를 내리는 것이 자신의 몸을 위하는 바가 아니니 오직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74] 등 태후의 오빠 대장군 등질이 모친상을 당하자 상서를 올려 물러날 것을 청했으나 등 태후가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소(班昭)를 보내 물어보자 그것을 허락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반소전(班昭傳)」에 나온다.

[주:75] 등질의 아들 등봉은 황제의 유명을 받았으나 일이 누설되었다. 그때 등질은 끝내 아내와 등봉의 머리카락을 잘라 천하에 사죄하게 했다. 이 말은 「등질전(鄧騭傳)」에 나온다.

[주:76] 성(誠)은 신(信), 즉 믿는다는 뜻이다. 아직 황태후가 믿지 못했음을 말한다.

[주:77]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말로, 신숙시(申叔時)는 “소를 끌고 남의 밭을 질러가면 밭주인이 그 소를 빼앗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를 끌고 밭을 가로질러 가는 것은 참으로 죄를 짓는 것이지만, 그 소를 빼앗는 것은 벌이 너무 무겁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근에 비유한 것이다. 상서를 올린 것이 비록 죄가 있다 할지라도 태후가 그를 죽인 것은 잘못이 심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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