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처사군님의 블로그


여몽呂蒙의 자는 자명子明으로, 여남汝南 부피富陂 사람이다.

 

군국지 郡國志 : 예주豫州 여남군 부피富波는, 후국 侯國 이다. 영원永元 중 복구했다.

 

혜동惠棟이 이르길 : 십삼주지 十三州志 에서 이르길 : 화제和帝 영원 9년 여음汝陰을 나눠 설치했다. 상고하길 : 부피는, 한漢의 옛 현으로, 건무建武 중 없애고 여음과 병합했다가, 화제 때 복구했다. 역원郦元이 이르길 : 현에서 많은 저수지로 벼에 물을 대기에, 부피라고 했다. 손숙오비 孫叔敖碑 를 상고하니, 피 波 와 피 陂 는 고자古字가 통한다.

 

일통지 一統志 : 지금의 하남河南 영천부颍州府 부양현阜陽縣 남쪽이다.

 

사종영謝鍾英이 이르길 : 응당 지금의 하남 여녕부汝甯府 신채현新蔡縣 동북쪽이다.

 

여러서 남으로 건너와, 매형 등당鄧當에게 의존했다. 등당은 손책孫策의 장수로, 자주 산월山越을 토벌했다. 여몽이 15, 6세에, 몰래 등당이 도적을 공격하는데 따라가서,

 

조일청趙一清이 이르길 : 환우기 寰宇記 권 94 : 호주湖州 오정현烏程縣 서남쪽 30리에 석성산石城山이 있는데, 과거 오정의 호족 엄백호嚴白虎가 산 아래에서 돌을 포개 성으로 만들고, 여몽과 싸운 곳이다. 지금 산 아래에는 노대弩台가 있고, 봉화루烽火樓의 자취가 아직 존재한다.

 

등당이 돌아보고는 크게 놀라, 큰 소리로 꾸짖으나 금지할 수 없었다. 돌아와 여몽의 모친에게 고해서, 모친이 성내며 그를 벌하려 하니, 여몽이 이르길 : “가난하고 천함은 머물 만하다고 하기엔 어려우나, 만약 무심결에라도 공을 세우면, 부귀가 이를 수 있습니다. 또한 호랑이 굴을 찾지 않고, 어찌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가 이르길 : 두어 마디의 말이나, 일생의 정신이 여기에 있다.

 

모친이 슬퍼 그를 내버려뒀다.

 

여몽이 본디 지극히 효성스러움은, 감녕전 甘甯傳 에 보인다.

 

당시 등당의 직리職吏는 여몽의 나이가 어리다고 그를 가벼이 여기며, 이르길 : “저 풋내기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이는 고기를 호랑이에게 먹이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다른 날 여몽과 만나선, 또 그를 업신여기고 욕보였다.

 

치 蚩 는 업신여기다다.

 

여몽이 대노해, 도刀를 들고 관리를 죽이고는, 달아나, 읍내의 유생 정장의 집으로 도망갔다. 나와서 교위校尉 원웅袁雄을 통해 자수했는데, 중간에 그를 위해 말하는 은혜를 입어, 손책이 불러서 보고는 그를 기이하게 여겨, 끌어들여 좌우에 뒀다.

 

수 년 후, 등당이 죽어, 장소張昭는 여몽을 천거해 등당을 대신하게 하여,

 

어떤 이가 이르길 : 자포子布는 자경子敬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직 자명을 알아봤으나, 또한 대장으로 그를 편듬은 듣지 못했다.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했다. 손권孫權이 정사를 다스리며, 여러 소장小將을 헤아려 병사가 적고 비용이 적은 이는, 합치고자 하였다. 여몽은 은밀히 외상으로 사, 병사를 위해 진홍색 옷과 행등行縢을 만들어줬는데, 

 

고염무顧炎武가 이르길 : 시 詩 : 사폭邪幅이 아래에 있다. 전 箋 에서 이르길 : 지금의 행등과 같다. 정강이에 죄어 동여매는 것으로, 발에서부터 무릎까지다. 석명 釋名 : 핍 偪 이, 스스로 핍박하며 동여매는 것이라, 지금은 이를 행등이라고 이른다. 종아리를 얽어 싸맴으로써, 높은 곳으로 뛰어 오르며 가뿐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검열하는 날, 진열이 성하게 빛났고, 병사들은 익숙한 상태라, 손권은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그의 병사를 늘려줬다. 단양丹陽을 토벌하는데 종군해, 향하는 곳마다 공을 세워,

 

조일청이 이르길 : 방여기요 方輿紀要 권 25 : 여성呂城은 단양현 동쪽 54리에 있는데, 여몽이 쌓은 곳이라고 대대로 전하며, 성터는 아직 존재한다. 

 

평북도위平北都尉로 임명됐고,

 

평북도위는 한 사람으로, 오吳가 설치했다.

 

광덕장廣德長을 겸했다.

 

광덕은, 본지 비빈전 妃嫔傳 서부인전 徐夫人傳 에 보인다.

 

황조黃祖를 정벌하는데 종군했는데, 황조가 도독都督 진취陳就에게 역격하도록 해 수군으로 출전했다. 여몽이 선봉을 거느렸는데, 몸소 진취의 목을 베어 매다니, 장사들이 승세를 타고, 성으로 진공했다. 황조가 진취의 죽음을 듣고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 병사들이 추격해 그를 사로잡았다. 손권이 이르길 : “일이 이루어짐은, 진취가 먼저 잡혀서이다.” 

 

손권전 건안建安 13년에 상호 보인다.

 

여몽을 황야중랑장橫野中郎將으로 삼고,

 

황야중랑장은 한 사람으로, 오가 설치했다.

 

호삼성胡三省이 이르길 : 황야는 본래 장군호로, 자격이 아직 이르지 못하기에, 중랑장이 됐다.

 

전錢 천만을 하사했다.

 

원본 元本 에선 천 千 을 십 十 이라고 썼다.

 

이 해, 다시 주유周瑜, 정보程普 등과 서쪽으로 조공曹公을 오림烏林에서 격파하고, 조인曹仁을 남군南郡에서 포위했다. 익주益州의 장수 습숙襲肅이 군을 일으켜 와서 귀부하니,

 

원본에선 습 襲 을 공 龔 이라고 썼고, 통감 通鑒 에선 습이라고 썼다.

 

호주 胡注 : 감녕이 이전에 이릉夷陵을 취해, 즉 익주와 이웃이 되기에, 습숙이 군을 일으켜 항복했다. 습이 성이고, 숙이 이름이다.

 

주유가 상표하여 습숙의 병사를 여몽에게 더해주라 했으나, 여몽은 습숙이 담력과 재주가 있다고 몹시 칭찬하며, 또한 모화慕化하여 멀리서 왔으니, 도의에 의해 의당 더해줘야지 빼앗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하작何焯이 이르길 : 이러한 거동이 그가 만인독萬人督임을 증명한다.

 

손권이 그의 말을 옳다고 여겨, 습숙의 병사를 돌려보냈다. 주유가 감녕에게 전에 이릉을 점거하게 했는데, 조인이 무리를 나눠 감녕을 공격해, 감녕은 곤란하고 위급해,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했다. 여러 장수는 병사가 적어 나누기에 부족하다고 여겼는데, 여몽이 여러 장수에게 이르길 : 

 

송본 宋本 에선 “여몽이 주유, 정보에게 이르길”이라고 썼다.

 

“능공적淩公績을 남겨두고,

 

능통淩統의 자는 공적이다.

 

저 여몽과 군들이 가서, 포위를 풀고 위급함을 제거하는 데는, 형세가 또한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고, 저 여몽은 공적이 10일을 지킬 수 있다고 보증합니다.” 또한 주유에게 3백 명을 나눠 파견해 장작으로 험한 길을 끊게 하면, 적이 달아날 때 그들의 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주유가 이를 따랐다. 군이 이릉에 이르러, 당일 교전해, 죽인 바가 절반을 넘었다. 적이 밤에 달아났는데, 가다가 장작 길을 만나, 기병은 모두 말을 버리고 걸어서 달아났다. 병사들이 추격해, 말 3백 필을 얻고, 방선方船으로 싣고 돌아왔다. 이에 장사들의 형세가 자연히 배가 돼, 강江을 건너 둔영을 세우고, 서로 공격하니, 조인이 달아나, 마침내 남군을 점거하고, 형주荊州를 위무하며 평정했다.

 

임국찬林國贊이 이르길 : 남군은 형주의 하나의 군으로, 본전과 같다면, 남군이 여몽의 근거이고, 형주 또한 여몽에 힘입어 평정된 듯하지만, 이는 관우關羽가 격파된 후에 말했다면 옳으나, 조인이 격파된 후에 이를 말함은 잘못된 것이다.

 

돌아와,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됐고, 심양령尋陽令을 겸했다.

 

심양은, 손책전에 보인다.

 

조일청이 이르길 : 방여기요 권 85 : 구강부九江府 덕화현德化縣에 심양성이 있으니, 한漢 때는 현으로, 여강군廬江郡에 속했고, 오 때는 기춘군蕲春郡에 속해, 삼국시대에 독호督護의 요진要津이었다.

 

노숙魯肅이 주유를 대신하게 됐는데, 곧 육구陸口로 가려 하며,

 

육구는, 손권전 건안 15년에 보인다.

 

여몽의 둔영 아래를 지났다. 노숙의 생각은 아직 여몽을 가벼이 여겼는데, 어떤 이가 노숙에게 말하길 : “여장군의 공적과 명예가 나날이 높아져, 옛 생각으로 대할 수는 없으니, 군께선 의당 그를 방문하셔야 합니다.” 마침내 가서 여몽을 방문했다. 주연이 무르익었을 때, 여몽이 노숙에게 묻길 : “군께선 중임을 받으셔, 관우와 이웃이 되셨는데, 장차 어떠한 계략으로, 뜻밖의 일을 방비하실 겁니까?” 노숙이 단박에 응답하길 : “때가 되면 알맞은 것을 시행할 것이오.”

 

어떤 이가 이르길 : 타인을 가벼이 여기던 사람이 질문을 받아, 생각하지 않고 답함을 묘사한 것으로, 핵심이 생생하게 보인다.

 

여몽이 이르길 : “지금 동서가 비록 한 집안이나, 관우는 진실로 곰과 호랑이인데, 계책을 어찌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안계李安溪가 이르길 : 추측하여 미리 알고 정하는 것이다. 

 

이어서 노숙을 위해 5 계책을 계획했다. 노숙이 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가, 그의 등을 치며 이르길 : “여자명, 나는 경의 재략이 미치는 바가 여기까지 이를 줄은 몰랐소.” 마침내 여몽의 모친에게 절하고, 결합해 친구가 돼서 헤어졌다.

 

강표전 江表傳 에서 이르길 : 애초에, 손권이 여몽과 장흠蔣欽에게 이르길 : “경들이 지금 나란히 당도當塗로 대사를 주관하니, 

 

호삼성이 이르길 : 당도는, 중요한 지위나 직분에 있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의당 배우고 익혀 자신을 계발해야 하오.” 여몽이 이르길 : “군중에서 항상 많은 직무들로 힘들어, 아마도 다시 독서를 함은 받아들이지 못할 듯합니다.” 손권이 이르길 : “고가 어찌 경들이 경학을 연구해 박사가 되길 원하겠소? 다만 응당 섭렵하여 지난 일을 보게 하려는 것일 뿐이오.

 

사고師古가 이르길 : 섭涉은 물을 건너는 것과 같고, 렵獵은 짐승을 사냥하는 것과 같아, 두루 보며, 정신을 집중하지는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경이 직무가 많다고 말하나, 어찌 고에 비교할 수 있겠소? 고가 어릴 때 시 詩, 서 書, 예기 禮記, 좌전 左傳, 국어 國語 를 두루 보고, 오직 역 易 을 읽지 않았소. 정사를 다스린 이래로는, 삼사三史, 제가諸家의 병서를 살폈는데,

 

하작何焯이 이르길 : 삼사는, 전국책 戰國策, 사기 史記, 한서 漢書 를 가리키는 듯하다.

 

반미潘眉가 이르길 : 이 때 사승謝承의 후한서 後漢書 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기에, 오주吳主가 이른 삼사란, 사기, 한서, 동관한기 東觀漢記 다. 위소 韋昭 의 오서 吳書 에선 유찬留贊이 삼사를 자주 읽었다고 칭했는데, 또한 같은 것이다. 수서 隋書 경적지 經籍志 에선 오의 태자태부太子太傅 장온張溫이 삼사략 三史略 29권을 지었다고 한다. 유지기 劉知幾 의 사통 史通 에선 한서, 동관한기를 반班, 동東 이사二史라고 지칭했다.

 

스스로 유익함이 컸다고 여기오. 경들 두 사람 같은 경우, 대저 바탕이 지혜가 밝아서 깨달음이 빨라, 배우면 반드시 이를 얻을 것인데, 어찌 응당 하지 않는 것이오? 의당 서둘러 손자 孫子, 육도 六韬, 좌전, 국어와 삼사를 읽어야 하오. 공자孔子께서 ‘종일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 않고 생각하나, 무익해, 배우는 것만 못했다.’라고 하셨소. 광무光武제는 병마에 관한 직무를 주관하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소. 맹덕孟德 또한 스스로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한다고 일렀소. 

 

어떤 이가 이르길 : 맹덕이 스스로 그의 아이에게 말했는데, 이 말을 어디로부터 인용한 것이겠는가? 그것이 늘리고 꾸며낸 것임이 명백하다.

 

경은 어찌 홀로 스스로 힘쓰지 않는 것이오?” 여몽이 비로소 학문을 배웠는데, 전념하며 지칠 줄 몰라서, 그가 두루 본 바는, 노학자도 이기지 못했다. 

 

조일청이 이르길 : 진분 陳芬 의 운창사기 芸窗私記 : 여몽이 독서할 때, 서관西館을 열어 준수한 이를 끌어들여선, 함께 서로 발양發揚하니, 식견이 나날이 진보해, 손권이 그를 더욱 중히 여겼다. 지금의 서관교西館橋다. 습유기 拾遺記 : 여몽이 오에 들어오니, 오주가 그에게 학업을 권해, 여몽은 곧 많은 책을 널리 읽었는데, 역 易 을 으뜸으로 삼았다. 항상 손책의 좌상座上에서 만취했는데, 갑자기 누워 자다 꿈 속에서 주역 周易 일부를 읊더니, 곧 놀라서 일어나, 무리는 모두 이를 물었다. 여몽이 이르길 : “이전 꿈에서 복희伏羲, 문왕 文王, 주공周公을 만나서 나와 더불어 국운이 흥망한 일, 해와 달이 운행규칙을 고수하며 항상 밝을 수 있는 도리를 논하며, 지극히 묘함을 공들여서 깊이 탐구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근원의 뜻을 갖추지 못했기에, 그 글을 헛되이 읊은 것일 뿐이오.” 한 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르길 : “여몽은 잠꼬대도 주역과 통한다.”

 

노필이 살피길 : 이 때 손책은 이미 요절했는데, 여몽이 어찌 다시 손책의 좌상에 있을 수 있겠는가? 설령 손책이 아직 죽지 않았더라도, 여몽이 손책의 좌상에서 만취할 수 있겠는가? 이는 진실로 허황된 말이라고 이를 수 있다. 조씨가 이 책을 즐거이 채용하나, 하나라도 잘못되지 않은 것이 없다. 양장거梁章钜가 비록 이를 옮겨 적으나, 또한 한 글자라도 시비를 분별해 잘못을 바로잡음이 없으니, 가히 이상야릇하구나.

 

후에 노숙이 올라와 주유를 대신했는데, 여몽에게 들러 의논하며, 항상 굴복당함을 좋아했다. 노숙이 여몽의 등을 치며 이르길 : “나는 대제大弟가 다만 무략이 있을 뿐이라고 여겼는데, 

 

주수창周壽昌이 이르길 : 대제, 대형大兄은, 사전史傳 안에서 간간이 보인다.

 

지금에 이르러선, 학식이 뛰어나고 해박해, 더 이상은 오하아몽吳下阿蒙이 아니오.”

 

고염무顧炎武가 이르길 : 포박자 抱樸子 : 예형祢衡이 허許 아래에서 놀며, 공경국사公卿國士부터 이하를, 예형은 처음에 그 관직을 칭하지 않고, 모두 아모阿某라고 지칭했고, 혹은 성을 가지고 모아某兒라고 불렀다. 삼국지 주 : 더 이상은 오하아몽이 아니오. 세설 世說 주 : 완적阮籍이 왕혼王渾에게 이르길 : “경과 이야기함은, 아융阿戎과 이야기하는 것만 못하오. (왕혼의 자식 왕융王戎이다.) 모두 어릴 때의 칭호다.

 

여몽이 이르길 : “선비란 3일을 헤어져도, 곧 도리어 괄목상대刮目相待하게 됩니다. 대형께서 지금 논하시며, 어찌 하나하나 양후穰侯에 저울질하십니까.

 

어떤 이가 이르길 : 양후 구절은 분명하지 않다.

 

대형께서 지금 공근을 대신해, 이미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고, 또한 관우와는 이웃입니다. 이 사람은 뛰어나며 학문을 좋아해, 좌전을 읽으면 대략 모두 매끄럽고, 강직하고 공명정대하며 씩씩한 기상이 있으나, 천성이 자부심이 상당하고, 자주 타인을 업신여깁니다. 지금 더불어 마주하고 있으니, 응당 단복單複을 가지고

 

본지 주방전 周鲂傳 에서 이르길 : 신은 옛 사람의 단복의 술수가 없음을 압니다.

 

위지 문기 文紀 의 주에서 인용한 전론 典論 자서 自敘 에서 이르길 : 단單으로 복複을 공격하다.

 

엄연嚴衍이 이르길 : 단복은, 표리表裏를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옷을 입음을 비유한 것으로, 국가가 비록 서촉西蜀과 연합해 화목하나,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워, 밖을 믿어 안을 소홀히 할 수는 없으니, 그가 타인을 방비하며 자신을 위해 대비해, 모름지기 두 마음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니, 옷을 입었을 때, 겉감이 있으면 반드시 안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를 대접해야 합니다.”

 

경 卿 은, 응당 향 鄉 이라고 써야하며, 향 向 과 같으니, 각각의 본이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은밀히 노숙을 위해 세가지 책략을 말하니, 노숙이 이를 삼가 받으며, 숨겨 공개하지 않았다. 손권이 항상 감탄하길 : “사람이 자라서 학식과 수양이 진보해도, 여몽, 장흠과 같은 수준에는, 아마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부귀하고 이름을 떨쳤는데도, 다시 평소의 뜻을 바꾸고 학문을 좋아할 수 있어, 서전書傳을 즐기고, 재물을 가벼이 하며 의를 숭상해, 행하는 바가 따를 만하고, 아울러 국사國士가 됐으니, 또한 훌륭하지 않은가!”

 

당시 여몽과 성당成當, 송정 宋定, 서고徐顧가 주둔하던 곳이 접해 가까웠는데, 3 장수가 죽었고, 자제가 유약해, 손권은 모든 병사를 여몽에게 병합했다. 여몽이 고사하며, 서고 등이 모두 국사에 힘썼으니, 자제가 비록 어려도, 폐할 수 없다고 진계하였다. 3 번 상서하니, 손권이 이에 들어줬다. 여몽이 이에 다시 스승을 가려, 그들을 도와 올바르게 이끌도록 했으니, 그가 조심함이 대략 이와 같았다.

 

위魏가 여강廬江의 사기謝奇에게 기춘蕲春의 전농典農이 돼,

 

기춘은, 손권전 건안 18년, 황무黃武 2년에 보인다.

 

사종영謝鍾英이 이르길 : 사기의 일은 노숙이 주유를 대신한 후로, 주유는 건안 15년에 죽었으니, 즉 사기의 일은 응당 15년 후다.

 

노필이 살피길 : 사기의 일은 오塢를 세우기 전으로, 오를 세움은 건안 16년이니, 즉 사기의 일은 응당 이 해다.

 

환皖에 주둔하며 향에서 밭을 갈며, 자주 변경을 침입하는 외적이 됐다. 여몽이 사람을 보내 그를 꾀어내게 하나, 따르지 않아, 곧 기회를 엿봐 습격하니, 사기는 마침내 움츠려 후퇴했고, 그의 부오部伍 손자재孫子才, 송호宋豪 등은, 모두 노약자를 짊어지고, 여몽에게 이르러 항복했다.

 

손권전 : 건안 18년, 애초에 조공이 강에 인접한 군현이 손권에게 약탈당할까 두려워, 불러들이며 안으로 옮기게 하니, 백성들이 오히려 서로 놀라, 여강, 구강 九江, 기춘, 광릉廣陵의 호 10여 만이 모두 동으로 강을 건너, 강서江西는 마침내 비게 됐다. 합비合肥 이남은, 오직 환성만이 있었다.

 

후에 손권을 따라 조공을 유수濡須에서 막으며, 자주 기책을 진언했고, 또한 손권에게 수구水口를 끼고 오塢를 세우도록 권했기에, 대비가 매우 우수하여,

 

양장거가 이르길 : 원화군현지 元和郡縣志 에서 이르길 : 애초에, 여몽이 유수를 지켰는데, 조공이 장차 올 것을 듣고, 물을 끼고 오를 쌓으니, 형태가 언월偃月과 같아, 언월오偃月塢라고 지칭하였다. 여지지 輿地志 에서 이르길 : 책강구 柵江口 는, 고대의 유수구濡須口로, 오가 북안에 양쪽의 성을 쌓았고, 위가 남안에 작은 성을 설치했다. 

 

조일청이 이르길 : 방여기요 권 29 : 왕씨王氏 희선希先이 이르길 : “삼국이 정립하고, 남북으로 땅을 나눈 때, 양회兩淮 사이는 항상 전장이 됐다. 손중모孫仲謀가 오를 유수에 세우니, 조조가 먼저 계획하고 후에 싸우나, 다툴 수 없었다.” 왕씨의 말을 살피니, 자명의 계책이 훌륭함을 알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그가 형주를 습격해 취한 기이한 계책은 칭찬하며 부러워하나, 그가 강회江淮를 보장한 공이 큼은 알지 못한다.

 

손권전 건안 18년에 상호 보인다.

 

오록 吳錄 에서 이르길 : 손권이 오를 세우고자 하니, 여러 장수가 모두 이르길 : “상륙해 적을 공격하고, 발을 씻고 배에 타는데, 무엇 때문에 오를 씁니까? 여몽이 이르길 : “병사도 날카로움과 무딤이 있고, 전투에도 백승함이 없는데, 만약 뜻하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적의 보기가 사람들에게 닥쳐, 물에 이를 겨를도 없다면, 그들이 배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손권이 이르길 : “훌륭하오.” 마침내 이를 세웠다.

 

조공은 함락시킬 수 없어 돌아갔다.

 

조공이 주광朱光을 파견해 여강태수로 삼아, 환에 주둔하며, 논밭을 크게 개간하게 하고,

 

조일청이 이르길 : 환우기 寰宇記 권 125 : 오당피吳塘陂는 서주舒州 회녕현懷甯縣 서쪽 20리에 있으니, 환수皖水가 유입되는 곳으로, 이 둑은 바로 주광이 개설한 곳이다. 조일청이 살피길 : 유복劉馥이 양주자사揚州刺史가 돼, 더불어 오당吳塘을 정비하였으니, 즉 주광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기 記 에서 또한 이르길 : 여몽이 돌을 뚫고 물을 통하게 해, 논밭 3백여 경에 물을 대서, 공리功利가 사람들에게 미쳤다. 이전에 미처 사당을 세우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첨산灊山의 사당이 오피吳陂의 곁에 있어서, 지명해서 제사를 지냈다.

 

다시 간첩에게 파양鄱陽의 도적 우두머리를 불러 권해, 내응하게 했다. 여몽이 이르길 : “환의 경작지는 기름지고 좋아, 만약 한번 수숙收孰하면, 저들이 필시 많아질 것이고, 

 

호삼성이 이르길 : 수숙은, 벼가 익어 이를 거두는 것을 이른다. 양식이 있으면, 무리를 늘릴 수 있다. 숙 孰 은, 고대에 숙 熟 자와 통한다.

 

이와 같음이 수 년 지나면, 조조의 형태가 보일 테니, 의당 서둘러 제거해야 합니다.” 곧 그 형상을 상세하게 진술했다. 이에 손권이 친히 환을 정벌하며, 여러 장수를 불러 만나, 계책을 물었다. 

 

오서에서 이르길 : 여러 장수가 모두 토산을 만들고, 공성기계를 보태길 권하니, 여몽이 빨리 나서 이르길 : “공성기계와 토산을 정비하면, 필시 달이 지나야 완성될 것인데,

 

송본 宋本 에선 월 月 을 일 日 이라 썼고, 통감도 같다.

 

성의 방비는 이미 오래 되고, 밖의 구원이 필시 이를 것이라, 도모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빗물을 이용해 들어가도, 

 

통감에선 차 且 아래에 오 吾 가 있다.

 

만약 지체돼 날이 지나면,

 

하작은 일을 월로 교정했다.  

 

물이 필시 말라서, 돌아오는 길은 괴롭고 고생스러울 것이라, 저 여몽은 삼가 이가 두렵습니다. 지금 이 성을 보니, 매우 견고할 수가 없어서, 삼군의 날카로운 기세로, 사면에서 함께 공격하면, 때를 늦추지 않고 점령할 수 있을 것이고, 물을 이용해 돌아올 수 있으니, 전승할 방도입니다.” 손권이 이를 따랐다.

 

여몽이 이에 감녕을 승성독升城督으로 천거해,

 

승성독은, 전시에 설치해, 예사롭지 않은 일을 맡았다.

 

앞에서 공격을 통솔하게 하고,

 

감녕전 : 감녕은 명주를 손에 쥐고, 친히 성에 묶고는, 병사들을 위해 앞서나가, 마침내 주광을 격파하고 잡았다. 공을 헤아리니, 여몽이 으뜸이고, 감녕이 그 다음이었다.

 

여몽은 정예로 이를 뒤이었다. 새벽에 진공하며, 여몽이 손수 북채를 잡고 북을 치니,

 

부 枹 는, 음이 부膚다.

 

사졸이 모두 도약해 자연히 올라, 끼니 때 이를 격파했다.

 

손권전 건안 19년에 상호 보인다.

 

곧 장료張遼가 협석夾石에 이르렀으나,

 

협석은, 바로 협구夾口로, 위지 장제전 蔣濟傳 에 보인다.

 

호삼성이 이르길 : 협석은 지금의 안경부安慶府 동성현桐城縣 북쪽 47리에 있어, 지금의 이름은 서협산西峽山이다. 

 

조일청이 이르길 : 방여기요 권 26 : 남협수南硖戍는 동성현 서북쪽 47리에 있으니, 바로 협석산夾石山이다. 한 건안 19년, 손권이 환을 공격하니, 장료가 질주해 구원하나, 협석硖石에 이르러, 성이 이미 격파됨을 듣고는, 보루를 협석에 쌓고 돌아왔다. 환우기 권 125 : 남협수는 고대의 남여주南廬州라서, 남이라고 지칭했다.

 

성이 이미 함락됨을 듣고, 곧 물러났다. 손권이 그의 공을 기리며, 곧 여강태수로 임명하고, 얻은 인마는 모두 나눠 그에게 주며, 별도로 심양尋陽의 둔전민 6백 명, 관속 30 명을 하사했다. 여몽이 심양으로 돌아가, 한 해를 채우지 못하고 여릉廬陵의 도적이 일어나, 여러 장수가 토격하나 사로잡을 수 없어, 손권이 이르길 : “사나운 새가 수백이라도, 물수리 하나만 못하구나.”

 

악 鹗 을, 감본監本에선 효 鸮 라 썼으니, 오자다.

 

주수창이 이르길 : 한서 漢書 : 추양鄒陽이 오왕吳王에게 간하길 : “신이 듣기론 사나운 새가 수백이라도, 물수리 하나만 못하다고 합니다.” 오주는 바로 이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다.

 

노필이 살피길 : 이 이야기는 추양전에 보인다. 맹강孟康이 이르길 : 물수리는, 큰 독수리다. 사고가 이르길 : 사납게 공격하는 새는, 송골매의 부류다. 물수리는 진실로 큰 새면서 사나운 것일 뿐, 독수리가 아니다. 

 

다시 여몽에게 이를 토벌하게 했다. 여몽이 이르러, 원흉을 주살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해, 다시 평민으로 삼았다.

 

이 때 유비가 관우에게 지키게 했는데, 혼자 형荊 땅을 가져, 손권이 여몽에게 서쪽으로 장사長沙, 영 零, 계桂 3군을 취하게 했다. 여몽이 2군에 서신을 보내니, 명망을 듣고 우러러 사모하며 귀순해 항복하나,

 

하작이 이르길 : 손씨는 무열武烈제가 장사태수가 되고부터, 구성區星을 토벌해 평정하고, 양리를 임용하며, 경계를 넘어 깊이 영, 계의 여러 도적을 토벌해서 다른 나라를 온전하게 해, 3군에선 이를 마음속에 간직했기에, 서신을 보내니 바로 함락됐다. 비록 소열昭烈제가 인심을 얻었으나, 그들이 본디 손씨에게 복종했던 것만 못했던 것이다. 자명은 소수였는데, 어찌 타인의 공을 빼앗을 수 있었겠는가?

 

오직 영릉태수零陵太守 학보郝普의 성은 지키며 투항하지 않았다.

 

학보는, 촉지 계한보신찬 季漢輔臣贊 에 보인다.

 

그리고 유비가 촉에서부터 친히 공안公安에 이르러, 관우에게 3군을 다투게 했다. 손권은 당시 육구陸口에 머무르며,

 

육구는 손권전 건안 15년에 보인다.

 

조일청이 이르길 : 수경 水經 강수주 江水注 : 강수는 다시 포기현蒲圻縣 북쪽으로 유입돼, 여몽성呂蒙城 서쪽을 경유한다. 과거 손권이 장사, 영, 계를 정벌하며 진압한 곳이다. 환우기 권 112 : 여몽성은 악주鄂州 포기현 서북쪽에 있으니, 바로 여몽이 쌓은 곳으로, 이곳에 병사를 주둔시켰다.

 

노숙에게 만 명을 거느리고

 

각각의 본에선 모두 “정보, 노숙의 만 명에게”라고 썼으니, 잘못된 것이다. 원본에선 “노숙의 만 명에게”라고 써서, 또한 잘못된 것이다. 통감에서 “노숙에게 만 명을 거느리게 하다”라고 썼으니, 옳다.

 

익양益陽에 주둔해 관우를 막게 했고,

 

익양은, 촉지 선주전 先主傳 건안 19년에 보이고, 또한 앞의 노숙전에 보인다.

 

호삼성이 이르길 : 익양현은 장사군에 속한다. 응소應劭가 이르길 : 익수益水의 북쪽에 있다. 여지지 : 지금의 담주潭州 안화현安化縣으로, 본래 한의 익양현이었다. 두우杜佑가 이르길 : 담주 익양현에서, 한의 옛 성은, 지금의 현 동쪽에 있다. 송백宋白이 이르길 : 익양의 옛 성은, 지금의 익양현 동쪽 80리에 있으니, 그 성은 노숙이 쌓은 곳이다.

 

급히 서신을 보내 여몽을 부르며, 영릉을 포기하고, 급히 돌아와 노숙을 돕게 했다. 애초에, 여몽이 장사를 평정하고 나서, 곧 영릉에 가려 해, 영酃을 지나다,

 

상동군湘東郡의 치소 영은, 손량전 孫亮傳 태평太平 2년에 보인다.

 

조일청이 이르길 : 방여기요 권 81 : 영주부永州府 영릉현에 여몽성이 있으니, 여몽이 쌓은 곳이다. 또한 권 80 : 영호酃湖는 형주부성衡州府城 동쪽 20리에 있는데, 호수의 둘레는 3 리고, 깊이는 8 척에, 물이 깊고 고요하며 푸르러, 물을 취해 술을 빚으면, 매우 감미로웠다. 진무제晉武帝가 오를 평정하고, 영주酃酒를 태묘太廟에 올렸다. 오도부 吳都賦 에서 “빨리도 잔을 가볍게 비우고 영록酃渌을 따른다”, 이 것이다.

 

남양南陽의 등현지鄧玄之를 실었는데, 등현지는, 학보의 친구여서, 학보를 꾀어내게 하려고 했다. 서신을 받아 응당 돌아가야 하나, 여몽은 이를 숨기고, 밤에 여러 장수를 불러, 방략을 내려주며, 새벽에 곧 성을 공격할 거라며,

 

영릉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등현지를 돌아보고 이르길 : “학자태郝子太는 세간에 충의로운 일이 있음을 들었고,

 

전대소錢大昭가 이르길 : 양희의 보신찬에서 “학보의 자는 자대子大”라고 했으니, 이 태 太 자는 오자로, 아래도 같다.

 

노필이 살피길 : 보신찬에선 자태라고 썼고, 통감도 같다. 전씨의 설이 잘못된 것이다.

 

또한 이를 하고자 하나, 시세를 알지 못합니다. 좌장군左將軍은 한중漢中에서, 하후연夏侯淵에게 포위됐습니다. 관우는 남군에 있는데, 지금 지존께서 친히 임하셨습니다. 근래에 번樊의 본진을 격파하고, 영을 구하나, 도리어 손규孫規에게 격파당했습니다.

 

어떤 이가 이르길 : 이 이야기는 해석할 수 없으니, 아마도 탈오가 있는 것이다.

 

이는 모두 눈앞의 일로, 군이 친히 보셨습니다. 저들은 한창 시종 위험에 처하여, 죽을 사람을 구원함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남은 힘이 있어 다시 이곳을 꾀하겠습니까? 지금 우리 사졸은 정예로, 사람들은 목숨을 바치는 것을 생각하고 있고, 지존께서 파병하심이, 길에서 연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자태는 절박한 목숨으로,

 

송본에선 자 子 를 여 予 라 썼으니, 오자다. 원본에선 자태라고 썼다.

 

진호陳浩가 이르길 : 자 子 자 아래는 아마도 태 太 자를 빠뜨린 것이다.

 

가망없는 구원을 기다려, 소의 굽 안의 물고기와 같고, 강江, 한漢에 의지하길 바라나, 그가 의지할 수 없음은 또한 명백합니다. 만약 자태가 반드시 사졸의 마음을 통일해, 고립된 성의 수비를 책임질 수 있다면, 오히려 위급함을 연기해서, 섬기는 자를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니, 괜찮습니다. 지금 우리가 힘을 헤아리고 예측하니, 이를 공격하면, 이에 오래 걸리지 않아, 성이 필시 격파될 것인데, 성이 격파된 후에는, 자신이 죽어도 사정에 무슨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백 세의 노모에게, 흰머리로 주살 당하게 할 것인데,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헤아리기론 이 사람이 바깥 소식을 얻을 수 없어,

 

호삼성이 이르길 : 이 사람은, 학보를 이른 것이다.

 

구원을 의지할 수 있다고 여기기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일 뿐입니다. 군은 그를 볼 수 있으니, 그를 위해 화복을 말해보십시오.” 등현지가 학보를 보고, 상세히 여몽의 뜻을 밝히니, 학보는 두려워 이를 들어줬다. 등현지가 먼저 나와 여몽에게 보고하고, 학보가 곧 뒤에 이르려 했다. 여몽은 미리 4 장수에게 명해, 각각 백 명을 선발해서, 학보가 나오면, 바로 들어가 성문을 지키게 했다. 잠시 후 학보가 나오니, 여몽은 영접하며 그의 손을 잡고, 함께 배에서 내렸다. 말을 마치고, 서신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고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학보가 서신을 보니, 유비는 공안에 있고, 관우는 익양에 있음을 알게 돼, 부끄럽고 원통해 땅을 파서 들어가고 싶었다. 여몽이 손하孫河를 남겨, 뒷일을 맡겼다.

 

통감고이 通鑒考異 에서 이르길 : 손하는 이미 죽었으니, 혹 다른 사람이 성명이 같은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주방형朱邦衡이 이르길 : 하 河 는 아마도 교 皎 를 쓴 것이다. 통감고이에선 그 사람을 깨닫지 못하고, 억지로 삼은 설이다.

 

노필이 살피길 : 손권전 : 손권이 여몽을 불러 노숙을 돕게 했는데, 여몽이 학보가 항복하도록 꾀어내, 3군의 장수와 태수를 모두 얻어서, 군을 이끌고 돌아와, 손교孫皎, 반장潘璋과 더불어 노숙의 병사와 합쳐 함께 나아가, 익양에서 관우를 막았다. 진실로 손교라고 씀이 옳다고 여겨진다. 

 

당일 군을 이끌고 익양으로 달려갔다. 유비가 맹약을 청해, 손권은 곧 학보 등을 돌려보내고,

 

조일청이 이르길 : 학보가 오에 들어가, 섬기며 정위廷尉에 이르나, 은번隱蕃의 일로 인해 책망당하고, 자살함은, 호종전 胡綜傳 에 보인다. 그리고 양희전에선 미방麇芳, 사인 士仁, 학보, 반준潘濬 4 배신자를 함께 밝혀, 그가 촉에 돌아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전에서 손권이 학보 등을 돌려보냈다고 이름은, 아마도 사실이 아니다.

 

노필이 살피길 : 보신찬에서 또한 학보가 오에 들어가 정위가 됐다고 일렀다.

 

상수湘水를 나눠, 영릉은 돌려줬다. 심양尋陽, 양신陽新을 여몽의 봉읍으로 삼았다.

 

심양, 양신은, 손권전 황초黃初 2년에 보인다.

 

군이 돌아와, 마침내 합비를 정벌했는데, 군을 거두고 나서, 장료 등에게 습격당해, 여몽과 능통이 목숨을 걸고 막으며 지켜냈다. 후에 조공이 다시 유수로 대규모로 출병해, 손권은 여몽을 독督으로 삼아, 전에 세운 오에 근거하여, 그 위에서 강노 만을 배치하고 활시위를 당겨, 조공을 막았다. 조공의 선봉이 진을 침이 아직 끝나지 못했는데, 여몽이 이를 공파하여, 조공은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여몽을 좌호군左護軍, 호위장군 虎威將軍 으로 임명했다.

 

호삼성이 이르길 : 호위는, 아마도 손권이 설치한 것이다. 심약 沈約 의 지 志 에선 조위에서 40호의 장군을 뒀는데, 호위는 서열이 34라고 했다.

 

홍이손洪贻孫이 이르길 : 호위장군은 한 사람으로, 제 5품이다.

 

노숙이 죽고, 

 

건안 22년 죽었다.

 

여몽은 서쪽으로 육구에 주둔했는데, 노숙군의 인마 만여는 모두 여몽에게 속하였다. 다시 한창태수漢昌太守로 임명하고, 

 

한창군은, 손권전 건안 15년에 보인다.

 

식읍으로 하준下雋, 유양 劉陽, 한창, 주릉 州陵 을 하였다.

 

이 4현은 주유의 봉읍으로, 주유가 죽은 후 노숙에게 속했고, 노숙이 죽은 후 여몽에게 속했다.

 

관우와는 땅을 나눠 경계가 접했는데, 관우가 날래고 용감하며, 병탄하려는 마음이 있고, 또한 나라의 상류에 머물러서, 그 형세가 오래 가기 어려웠다. 애초에, 노숙 등은 조공이 아직 존재해, 재앙과 환난이 비로소 이루어져, 의당 서로 돕고 협력하며, 그들과 더불어 공동의 원수로 삼아야지, 틀어져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여몽이 곧 은밀히 계책을 진헌하길 : “지금 정로征虜가 남군을 지키고,

 

손교는 당시 정로장군이었다.

 

반장이 백제白帝에 주둔하고,

 

백제는, 선주전 건안 17년에 보인다.

 

호삼성이 이르길 : 이는 바로 감녕의 초관楚關을 점거하는 계책이다.

 

장흠이 유병遊兵 만 명을 거느리고, 강을 위아래로 돌아다니다, 적이 있는 곳에 응하고, 저 여몽이 국가를 위해 나아가 양양襄陽을 점거해, 이와 같다면, 조조에 대해 무엇을 근심할 것이고, 관우에게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또한 관우의 군신은, 그들의 속이는 힘을 자랑하며, 가는 곳마다 언행을 이랬다저랬다하니, 성심을 다해서 대우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관우가 아직 바로 동으로 향하지 않는 것은, 지존께서 덕이 거룩하고 슬기로우시며, 저 여몽 등이 아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력이 강성할 때 그를 도모하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엎어져 넘어진다면,

 

호삼성이 이르길 : 엎어져 넘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이른 것이다.

 

다시 진력하고자 해도,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하작이 이르길 : 형주를 얻길 모색함은, 여몽의 본래 모략이나, 이 전의 말은 다수가 믿을 수 없다. 앞서서 양양을 점거하거나, 형주를 취한 후 다시 양襄, 번 樊 으로 향한다고 해도, 만약 백제가 촉에 있다면, 반장은 무엇에 근거하여 곧 가서 머물 수 있겠는가? 동시에 이 때 여몽은 비로소 40을 넘어, 또한 곧 하루아침에 엎어지고 넘어진다고 헤아림은 아직 부합하지 못한다.


이안계李安溪가 이르길 : 사람의 식견과 지모가 같지 않음이 이와 같은데, 만약 오로지 할거하며 존호를 참칭하기 위해 모색한 자였다면, 여몽은 이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이다.

 

한모려韓慕廬가 이르길 : 자경의 뜻과 같은 경우, 어찌하여 장강을 나눠 이를 지키고자 했겠는가? 일각이라도 조조를 잊지 않아서이다. 여몽이 엿보던 바는 협소한 것으로, 먼 근심을 걱정하지 않고, 가까운 이익을 달게 여겨, 오, 촉의 전쟁이 벌어지게 된 실마리를 시작되게 했고, 조씨의 찬탈을 이루어지게 한데다, 손권 또한 신하를 칭하고 남에게 굽히며, 해마다 전쟁이 일어났다. 슬프구나! 공을 탐내다 어둠을 불러들여, 나라를 그르치게 함이 적지 않구나.

 

손권이 그의 계책을 깊이 받아들였고, 또한 내친김에 다시 더불어 서주徐州를 취할 뜻을 논하니, 

 

호삼성이 이르길 : 광릉廣陵부터 이상은, 모두 서주의 땅이다.

 

여몽이 대답하길 : “지금 조조가 멀리 하북河北에 있는데, 여러 원袁씨를 새로이 격파하고, 유幽, 기 冀 를 위로하고 모으느라, 동쪽을 돌아볼 틈이 없습니다.

 

하작이 이르길 : 원상 袁尚, 원희袁熙의 죽음은 건안 12년이고, 노숙의 죽음은 10년 후이나, 여기선 한창 “여러 원씨를 새로이 격파하고, 유, 기를 위로하고 모으다”라고 일렀으니, 어긋나지 않은가? 만약 여몽이 이 계책을 진술함이 노숙을 대신하기 전이라도, 조공 또한 멀리 하북에 있을 수는 없으니, 사서를 지은 이의 흉함이 심하구나.

 

주수창이 이르길 : 조조가 원씨를 격파함은, 이 때로부터 이미 10년 전이나 떨어져 있는데, 어찌 새로이 격파했다고 이른 것인가? 이 때 조조가 바야흐로 거소居巢에 군을 주둔시켰는데, 어찌 멀리 하북에 있다고 이른 것인가? 설령 적국에서 전해 들어 부실하더라도, 유, 기가 평정됨이 오래됐음을, 천하가 모두 아는데, 어찌 위로하고 모음이 있단 것인가? 진씨陳氏가 어찌하여 갑자기 이러한 잘못된 이야기를 가지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서徐 땅의 수비병이, 듣기로는 말하기에 부족하다고 하니, 

 

호삼성이 이르길 : 조조가 천하의 형세를 자세히 조사하고 정하며, 이를 염려함이 깊었다. 이가 병법의 소위 땅에도 지키지 못할 곳이 있다는 것이다.

 

가면 자연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세는 도로가 막힘 없이 통하여, 날랜 기병이 달리는 곳이라, 지존께서 지금 서주를 얻어도, 조조가 후에 열흘이 지나 필시 와서 다툴 것이니, 비록 7, 8만 명으로 이를 지켜도, 오히려 근심을 품게 될 것입니다. 

 

호삼성이 이르길 : 여몽은 스스로 오국의 병력을 헤아리니, 북으로 향해 중원을 다투기엔 부족했고, 기병의 땅이라, 남쪽 병사에겐 익숙한 곳이 아님을 알았던 것이다.

 

관우를 취해, 장강長江에 모두 의거하며, 형세가 더욱 성하게 되는 것만 못합니다.” 손권이 더욱 이 말을 옳다고 여겼다. 여몽이 노숙을 대신하게 돼, 처음 육구에 이르러, 겉으로는 더욱 은혜를 베풀고 후하게 대하며,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여몽, 육손陸遜이 모두 관우를 계략으로 속이나, 교만하고 자부심이 강한 용맹한 사내는 마침내 그들의 계략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애석하구나!

 

후에 관우가 번을 토벌하며, 병사를 남겨 장차 공안, 남군을 수비하게 했다. 여몽이 상소하길 : “관우가 번을 토벌하며 수비병을 다수 남겼는데, 필시 저 여몽이 그의 뒤를 도모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저 여몽은 항상 병이 있으니, 병사들을 나눠 건업建業으로 돌아가서, 병을 고치는 것을 명분으로 삼길 구합니다. 관우가 이를 들으면, 필시 수비병을 거둬, 모두 양양에 힘쓸 것입니다. 대군이 강에 배를 띄우고, 주야로 질주하며 올라가, 그의 공허함을 습격한다면, 남군을 함락할 수 있을 것이고, 관우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호삼성이 이르길 : 이 남군은, 강릉江陵을 이른 것이다.

 

마침내 병이 위독하다고 하니, 손권이 노격露檄으로 여몽이 돌아오도록 부르고,

 

호삼성이 이르길 : 노격은 관우가 이를 알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은밀히 더불어 계책을 모의했다. 관우가 과연 이를 믿고, 점점 병사를 거둬 번으로 향하게 했다.

 

호삼성이 이르길 : 과연 여몽의 계책에 빠졌다.

 

위가 우금于禁에게 번을 구하게 하나, 관우가 우금 등을 다 사로잡아, 인마가 수만이라서, 양식이 모자람을 핑계로, 멋대로 상관湘關의 쌀을 취했다.

 

호삼성이 이르길 : 오와 촉이 형주를 나누며, 상수를 경계로 삼았기에, 관을 설치했다.

 

조일청이 이르길 : 방여기요 권 75 : 오, 촉이 형주를 나눠, 상수를 경계로 삼고, 관을 물 위에 설치해서, 상인과 여행객을 통하게 해, 이를 상관이라고 일렀다. 또한 권 81 : 상구관湘口關은 영주부永州府 북쪽 10리에 있어, 소 潇, 상 두 물이 합류하는 곳이다.

 

손권이 이를 듣고, 마침내 행하며, 먼저 여몽을 앞서 파견했다. 여몽이 심양에 이르러, 그의 정병을 큰 배 안에 모두 숨기고,

 

호삼성이 이르길 : ?는 거居와 후侯의 반절이다. ?는 노盧와 곡谷의 반절이다. 박아 博雅 에서 이르길 : ??는 배다.

 

조일청이 이르길 : 수경 감수주 贛水注 : 곡록주谷鹿洲는 바로 요자주蓼子洲로, 과거 큰 배를 만든 곳이다. 북당서초 北堂書鈔 에서 이르길 : 예장성豫章城 서남쪽에 ??주洲가 있으니, 여몽이 ?? 큰 배를 만든 곳이다.

 

백의에게 노를 젓게 하고, 장사꾼의 복장인 척하게 하고는, 주야로 서둘러 가, 관우가 배치한 강변의 초병에게 이르러, 모두 잡아 묶었기에, 관우는 들어서 알지 못했다.

 

호삼성이 이르길 : 초병이 비록 잡혀 묶였어도, 만약 미씨麋, 부傅씨가 반심이 없었다면, 관우는 오히려 듣고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남군에 이르니, 사인 士仁, 미방麋芳이 모두 항복했다. 

 

사인, 미방은, 모두 계한보신찬에 보인다.

 

오서에서 이르길 : 장군 사인이 공안에서 수비했는데,

 

보신찬에서 이르길 : 사인은 공안에 머물며, 관우의 통제 아래 속했는데, 관우와 틈이 있어, 배반하고 손권을 영접했다.

 

여몽이 우번虞翻에게 그를 설득하게 했다.

 

우번전 : 여몽은 관우를 취할 것을 도모하여, 질병을 칭하며 건업으로 돌아왔다가, 우번이 의술도 아울러 알아서, 자신을 따르게 하도록 청했다. 

 

우번이 성문에 이르러, 수비병에게 이르길 : “나는 그대의 장군과 이야기하고자 하오.” 사인이 서로 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서신을 쓰길 : “현명한 이는 변고가 일어나기 전에 재앙을 막고, 지혜로운 이는 앞으로의 전망에서 근심을 헤아려, 득실을 알아, 더불어 타인을 위할 수 있고, 존망을 알아, 길흉을 구별하기에 충분합니다. 대군이 행군하는데, 척후를 실시하지 못했고, 봉화도 일으키지 못했으니, 이가 천명이 아니라면, 필시 내응이 있어서입니다. 장군이 때를 미리 내다보지 못하고, 때가 이르렀는데도 이에 응하지 못하며, 홀로 영대萦帶한 성을 지키며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 죽으면 선조에 대한 제사를 헐어 없애며,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여호위呂虎威가 남군으로 곧장 이르러,

 

여몽은 당시 호위장군이었다.

 

육로를 단절하면, 활로는 요새 하나뿐이나, 그 지형을 상고하니, 장군은 기설箕舌 위에 있게 될 뿐이라,

 

시 詩 소아 小雅 대동편 大東篇 : 남쪽에 기箕가 있어, 그 혀를 끈다.

 

정전 鄭箋 에서 이르길 : 흡 翕 은, 끌다와 같다. 혀를 끔은, 상성上星이 서로 가까운 것을 이른 것이다.

 

달아나도 면할 수 없고, 항복하면 의를 잃게 될 것이라, 삼가 장군을 생각하니 불안하므로, 곰곰이 잘 생각하시길 바라옵니다.” 사인이 서신을 얻고, 눈물을 흘리며 항복했다. 우번이 여몽에게 이르길 : “이는 기만하는 병사니,

 

호삼성이 이르길 : 여몽이 간사하게 남을 속이는 꾀로 용병했음을 이른 것이다.

 

응당 사인을 데리고 가며, 병사를 남겨 성을 지켜야 합니다.” 마침내 사인을 데리고 남군에 이르렀다. 남군태수 미방이 성을 지키다, 여몽이 사인을 그에게 보이니, 마침내 항복했다.

 

하작이 이르길 : 중상仲翔이 미방을 욕보임을 보면, 오서는 의심스럽다.

 

오록에서 이르길 : 애초에 남군성 안에서 실수로 불을 냈는데, 병장기를 자못 태웠다. 관우가 미방을 책망하니, 미방이 내심 무섭고 두려웠는데, 손권이 듣고 그를 유혹해, 미방은 몰래 서로 잘 어울렸다. 여몽이 공격하니, 곧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나와 항복했다.

 

촉지 관우전 : 미방, 사인은 본디 모두 관우가 자신들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싫어했는데, 관우가 출군하고, 미방, 사인이 군수품을 공급하나, 모두 서로 돕지 않아, 관우는 돌아가면 응당 이를 다스릴 거라고 말했다. 미방, 사인이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했는데,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 사인을 꾀니, 미방, 사인이 사람을 보내 손권을 영접했다.

 

여몽이 성에 들어와 점거하고, 관우와 장사들의 가속을 다 잡았는데, 모두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군중에게 인가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요구하는 바가 있을 수 없도록 명령하겠다고 약속했다. 여몽의 휘하 병사가, 여남 사람이었는데, 민가에서 삿갓 하나를 취해서, 관부의 갑옷을 덮었는데, 관부의 갑옷이 비록 공공의 기물이나, 여몽은 오히려 군령을 범해, 고향 때문에 법을 폐할 수는 없다고 여겨,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그를 참살했다. 이에 군중에선 진율하여, 길에서도 남이 잃은 물건을 줍지 않았다. 여몽은 아침 저녁으로 친근한 이를 보내 기로耆老를 돌봐주며, 부족한 바를 묻게 했고, 질병에 걸린 이에겐 의약품을 줬고, 기한饑寒한 이에겐 옷과 양식을 하사했다. 관우의 부장府藏의 재화와 보물은, 모두 봉폐封閉하고 손권이 이르는 것을 기다렸다. 관우가 돌아오며, 길에서, 자주 사람을 보내 여몽과 서로 물었는데,

 

어떤 이가 이르길 : 한조漢祖가 팽성彭城에 들어가니, 항우項羽는 주야로 쉬지 않고 가서 한을 격파했는데, 여몽이 남군에 들어갔는데도, 관우는 속히 돌아가지 않았고, 또한 사람을 보내 탐문했으니, 의당 그가 패한 것이다.

 

노필이 살피길 : 관우는 이 때 대적이 앞에 있어, 나아가거나 물러났어도 거점을 잃었을 것이니, 설령 돌아가 강릉을 구했어도, 이미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여몽이 번번이 그 사자를 후대하고,

 

여몽은 이전에 처음 육구에 이르러, 겉으로는 더욱 은혜를 베풀며 후하게 대해, 관우와 우호를 맺었고, 지금 이미 공안, 남군을 얻고서는, 관우의 사자를 후대했으니, 여몽의 속임수가 심하구나.

 

성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방문해, 어떤 이는 손수 글을 써 확실히 믿을 만함을 보였다. 관우의 사자가 돌아와, 사사로이 서로 섞여 물었는데, 

 

호삼성이 이르길 : 신 訊 은, 묻다다.

 

모두 가문에 별 탈이 없고, 대우를 받음이 평소보다 낫다는 것을 알게 됐기에, 관우의 관병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호삼성이 이르길 : 여몽이 관우를 사로잡게 된 것은, 기세를 꺾어서일 뿐이다.

 

때마침 손권이 곧 이르러, 관우는 스스로 곤궁함을 알게 돼, 곧 맥성麥城으로 달아났다가, 서쪽으로 장향漳鄉에 이르니,

 

맥성, 장향은, 모두 손권전 건안 24년에 보인다. (손권전에선 장 漳 을 장 章 이라고 썼다.)

 

무리는 모두 관우를 버리고 항복했다. 손권이 주연朱然, 반장에게 그의 지름길을 끊게 해, 곧 부자는 모두 사로잡혀,

 

관우전 : 손권이 장수를 파견해 관우를 역격하게 하여, 관우와 자식 관평關平을 임저臨沮에서 참살했다.

 

손권전 : 반장의 사마司馬 마충馬忠이 관우와 그의 자식 관평, 도독 조루趙累 등을 장향에서 사로잡았다.

 

형주는 마침내 평정됐다.

 

이안계가 이르길 : 이로 인해 마침내 중모가 자환子桓에게 칭신하게 하여, 볼모를 강요하며 조정으로 징소하게 돼, 자주 낭패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만약 선주의 군신의 대의가 본디 밝아서, 뜻을 굽히고 위와 화친할 수 있음이 어려운 경우가 아니었다면, 백제의 둔영은 철수하지 않고, 동서의 우호는 정돈되지 못해, 손권은 굴하여 위에 편입됨이 머지않았을 것이다. 여몽의 요행스러운 계책은, 또한 위태로웠던 것이니, 어찌 성패로 사람을 논해, 노자경의 생각이 진실로 여몽보다 부족하다고 여길 수 있겠는가!

 

여몽을 남군태수로 삼고, 잔릉후孱陵侯로 봉하며,

 

잔릉은, 촉지 유장전 劉璋傳 주에 보인다.

 

조일청이 이르길 : 방여기요 권 78 : 여몽성은 형주부 공안현 북쪽 25리에 있으니, 여몽이 일찍이 잔릉에 주둔해, 이곳에 성을 쌓았다. 또한 잔릉성은 공안현 서쪽 25리에 있어, 한漢 때 현은, 무릉군武陵郡에 속했다.

 

강표전 江表傳 에서 이르길 : 손권이 공안에서 성대한 회합을 가지나, 여몽은 질병으로 사양하였다. 손권이 웃으며 이르길 : “관우를 사로잡은 공은, 자명의 모책이었는데, 지금 대공이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경사스러운 상이 아직 행해지지 않았으니, 어찌하여 즐겁지 못한 모양이란 말인가?” 

 

읍읍 邑邑 과 읍읍 悒悒 은 같다. 읍읍은, 즐겁지 못하다다.

 

이에 보기와 고취鼓吹를 더욱 주고, 

 

고취는, 촉지 유봉전 劉封傳 에 주해가 보인다.

 

조일청이 이르길 : 송서 宋書 악지 樂志 : 고취는, 군악이다. 지금의 뒤를 따르는 고취는 기취騎吹로, 두 곡은 다르다. 위, 진晉대에 장수에게 수여함과 아문牙門의 악곡은 대략 고취악으로, 이 때는 이를 고취라고 일렀다. 

 

칙서로 호위장군의 관속을 가리고, 남군, 여강 2군의 위의威儀를 아우르게 했다. 

 

여몽이 이전에 환을 격파한 공으로 여강태수에 임명됐고, 이 때에 다시 공안, 강릉을 격파한 공으로 남군태수에 임명됐기에, 2군의 위의를 아울러 갖추었다.

 

속백관지 續百官志 : 태자세마 太子洗馬 는, 직분이 알자谒者와 같다. 태자가 나가면 당직자는 앞에서 위의를 이끌었다.

 

진서 晉書 도간전 陶侃傳 : 위의를 갖추고, 모친을 관사에서 영접하니, 향리에서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수여가 끝나고 영으로 돌아오며, 병마도종 兵馬導從, 전후의 고취가, 길에서 빛났다.

 

전 1억, 황금 5백 근을 하사했다. 여몽이 금과 전을 고사하나, 손권은 허락하지 않았다. 봉작이 아직 내려지지 못했는데, 때마침 여몽의 발병해, 손권은 당시 공안에 있으며, 맞이해 내전內殿에 두고서, 만방으로 치료하고 돌보고, 경내에 여몽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자를 모집하며, 천금을 하사했다. 당시 병세가 바느질이 가해지는 것 같으면,

 

엄연嚴衍이 이르길 : 병세가 바느질이 가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통감에서 가침 加針 이라고 쓴 것은, 잘못된 것이다.

 

손권은 그를 위해 염려하고 근심했으며, 자주 그의 안색을 보고자 하나, 또한 고달프게 움직이게할까 두려워, 항상 벽을 뚫어 그를 바라봤고, 조금이라도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면 기뻐하며, 좌우를 돌아보고 웃었고, 그렇지 않으면 탄식하며,

 

호삼성이 이르길 : 돌 咄 은, 당當과 몰沒의 반절로, 탄식하는 것이다. 차 唶 는, 자子와 야夜의 반절로, 탄식하는 것이다.

 

밤에 잘 수 없었다.

 

하작이 이르길 : 손권은 진실로 구천句踐의 풍도를 가졌던 것이니, 비록 연로해 혼미해져 의심이 많아졌으나, 당시에는 사력을 다하지 않고자 해도, 그럴 수 있었겠는가?

 

병을 앓는 가운데 좋아지면,

 

추 瘳 는, 병이 낫다다.

 

사면령을 내렸고, 신하들이 모두 하례했다. 후에 다시 위독해져, 손권이 친히 임해 살피며, 도사에게 성신星辰 아래에서 그를 위해 수명을 청하도록 명했다. 42세에, 마침내 내전에서 죽었다.

 

여몽은 건안 24년 죽었으니, 응당 광화光和 원년에 태어났고, 손권보다 4 세 연장자다.  

 

하작이 이르길 : 주공근은 36세에 그쳤고, 노자경은 46, 여자명은 42였다. 만약 자경이 10년을 더 살며 죽지 않았다면, 오의 동맹은 여전히 단단해, 양, 번에서 흥기하며 한실漢室은 부흥했으리라. 이가 공명孔明이 애도하는 의식을 거행한 까닭이다.

 

왕무횡王懋竑이 이르길 : 강목 綱目 에선 “겨울 10월, 여몽이 강릉을 습격해 취하고, 12월, 여몽이 죽었다”라고 썼으나, 그의 관직을 없앴으니, 아마도 이를 기뻐한 것이다.

 

조일청이 이르길 : 환우기 권 112 : 악주鄂州 가어현嘉魚縣에 여몽묘呂蒙墓가 있다. 강하기 江夏記 에서 이르길 : “포기현蒲圻縣 남쪽으로 육계陸溪 육로구陸路口를 마주하는데, 일명 도환산刀環山으로, 물길을 거슬러 80리를 올라가면, 여몽성이 있고, 성 안에 여몽묘가 있다.” 성굉지 盛宏之 의 형주기 荊州記 : “장사 포기현에 여몽총呂蒙冢이 있고, 안에 두개골 하나가 있어, 매우 큰데, 여몽의 형체가 크니, 아마도 바로 여몽의 두개골일 것이다.”

 

당시 손권의 애통함이 심해, 이 때문에 식사를 줄였다. 여몽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 얻은 금과 보물, 여러 하사품을 모두 부장에 넘기고, 주관하는 이에게 명이 끊어지는 날 모두 위로 돌려보내고, 상사는 검소하게 하도록 했다. 손권이 이를 듣고, 더욱 슬퍼하였다.

 

여몽은 어려서 전적을 익히지 않아, 매번 대사를 진언하며, 항상 전소箋疏를 말로 전달했다. 항상 부곡의 일로 강하태수江夏太守 채유蔡遺에게 탄핵당했는데, 여몽은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 예장태수 고소顧邵가 죽어, 손권이 임용할 이를 물으니, 여몽이 채유가 공직에 종사하며 훌륭한 관리라고 천거해, 손권이 웃으며 이르길 : “군은 기해祁奚가 되고자 하시오?”

 

좌전 左傳 양공襄公 3년 : 기해가 늙어서 퇴직을 원하니, 진후晉侯가 그를 이을 이를 물었는데, 해호解狐를 칭찬했으니, 그의 원수였다.

 

이에 그를 임용했다. 감녕은 난폭하며 살인을 좋아해, 이미 일찍이 여몽의 뜻을 잃었고,

 

감녕이 부엌의 아이를 죽인 일은 녕전 甯傳 에 상세히 보인다.

 

또한 이따금 손권의 명령을 어겨, 손권이 노했는데, 여몽은 번번이 사정을 말하며 간청하길 :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했는데, 감녕과 같이 용맹하고 싸움에 능한 장수는 얻기 어려우니, 의당 그를 용인하시옵소서.” 손권이 마침내 감녕을 후하게 대해, 끝내 그의 능력을 얻었다.

 

주연전 : 호위장군 여몽의 병이 위독해, 손권이 묻길 : “경이 만약 일어나지 못하면, 누가 대신할 수 있겠소?” 여몽이 대답하길 : “주연은 담력과 절조에 여유가 있으니, 어리석은 저로선 맡길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여몽이 죽고, 손권이 주연에게 절節을 수여하고, 강릉을 지키게 했다.

 

여몽의 자식 여패呂霸가 습작해, 묘지기 3백 가, 부세를 면해준 밭 50 경을 수여했다. 여패가 죽고, 형 여종呂琮이 후를 이었다. 여종이 죽고, 동생 여목呂睦이 대를 이었다. 손권이 육손과 더불어 주유, 노숙과 여몽을 논하길 : “공근은 굳세고 맹렬하며, 담력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나, 마침내 맹덕을 격파하고, 형주를 개척해, 아득하여 계승하기 어려웠는데, 

 

통감에선 동류가 될 이가 적고 아득했다라고 썼다.  

 

군이 지금 이를 계승하였소. 공근은 과거 자경이 동으로 오길 요구하고, 고에게 보내, 고와 더불어 한담하며, 곧 큰 모략과 제왕의 업에 미쳤으니, 이가 첫 번째 즐거운 일이었소. 후에 맹덕이 유종의 세력을 얻고서, 장차 수십 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수군과 보병이 함께 내려올 거라고 큰 소리를 쳤소.  

 

호삼성이 이르길 : 장언張言은, 거창하게 말하는 것이다.

 

고가 과거 여러 장수를 청해, 의당 해야 할 바를 자문하나, 적합하게 먼저 대답함이 없었고, 

 

호삼성이 이르길 : 적합하게 먼저 대답함이 없었다는 것은, 적합하게 먼저 대답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적 適 은, 음이 적的이다.

 

자포, 문표 文表 에 이르러선,

 

진송秦松의 자는 문표로, 장굉전 張纮傳 에 보인다. 

 

모두 의당 사자를 파견해 격문을 갖추고 이를 영접해야 한다고 말하나, 자경이 곧 논박하며 안 된다고 하고,

 

호삼성이 이르길 : 박 駁 은, 거스르다로, 다른 뜻을 세우고 무리의 뜻의 잘못을 규명하고 논박하는 것이다. 박은, 북北과 각角의 반절이다.

 

고에게 급히 공근을 불러, 무리를 맡겨서, 역격하라고 권했으니, 이가 두 번째 즐거운 일이었소. 또한 그가 계책을 결단함은, 뜻이 장의張儀, 소진蘇秦을 넘어 심오했으니, 후에 비록 나에게 현덕에게 땅을 빌려주라고 권함은 그의 한 가지 단점이었으나,

 

이안계가 이르길 : 자경이 현덕에게 땅을 빌려주라고 권했는데, 이 책략은 또한 단점이 아니다. 대략 형주가 새로이 따라, 그 형세는 의당 이와 같아야 했다. 만약 두 영웅이 서로 다투었다면, 북방의 적에게 이로웠을 것이다.

 

하작이 이르길 : 노씨, 여씨는 그들의 시세를 다르게 여겼다. 조조의 기세가 아직 쇠하지 않아, 자주 소호巢湖로 출병하는 때를 만났기에, 응당 유씨와 함께 우호를 맺고 그의 세력을 나눠야 했었고, 조조가 늙어 오를 쳐서 멸망시킬 뜻이 없어지고는, 정족의 형세가 이루어졌으나, 상류에 근거하지 못해서, 또한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 다만 촉과 거듭 동맹한 때에 당면해선, 양, 번을 취하길 꾀하며, 서방徐方까지 논의가 미친 것일 뿐이다.

 

그의 두 장점을 훼손하기엔 부족했소. 주공周公은 한 사람에게 완벽하게 갖추어짐을 구하지 않았기에,

 

논어 論語 에 실린 주공이 노공魯公에게 말한 말이다.

 

고는 그의 단점을 잊고 그의 장점을 귀하게 여기며, 항상 등우鄧禹에 비유하였소.

 

호삼성이 이르길 : 등우가 방책을 마련해, 광무光武제가 중흥하는 업을 열어줬으나, 그 후 적미赤眉를 평정할 수 없었기에, 노숙을 그에 견주었다.

 

한담韓菼이 이르길 : 자경은 늘 큰 모략을 분명히 알고, 자질구레한 성패와 득실을 서로 견주어 살피는 데는 있지 않아서, 공근의 재기가 두드러지게 뛰어남에 견주면, 혹 미치지 못하나, 그의 성정이 차분히 가라앉고 조용함은 명백한 듯하다. 등우에 비유함은, 진실로 남이 자신을 알아주는 말이다. 등씨가 관중을 서둘러 취하지 않음은, 또한 완전함을 꾀한 것일 뿐, 그의 재주가 과연 풍이馮異만 못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자명이 어릴 때, 고는 곤란함을 사양하지 않고,

 

극 劇 은, 재앙이다.

 

과감하며 담력이 있을 뿐이라고 여겼으나,

 

풍본 馮本 에선 담 膽 을 첨 瞻 이라고 썼으니, 오자다.

 

장대하게 자라고 나니, 학문하며 일깨워져, 계책과 모략은 지극히 기이하니, 공근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으나, 언사의 재기가 두드러지게 뛰어남이 그에게 미치지 못했던 것일 뿐이오. 관우를 도모하여 취함은, 자경보다 훌륭하오. 자경이 고에게 답하는 서신에서 ‘제왕의 흥기에는, 모두 화난을 제거함이 있으니, 관우는 꺼리기에 부족합니다.’라고 하였는데,

 

호삼성이 이르길 : 관우의 강함은, 오가 제거하기에 알맞고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는 자경이 속으로는 바로잡을 수 없으면서,

 

통감에선 판 辦 이라고 썼다.

 

겉으로 큰 소리를 친 것일 뿐이나, 고 또한 이를 용서하고, 구차하게 책망하지 않았소. 그러나 그가 군을 일으키며, 둔영은 틀어짐이 없었고, 금지를 명령하면, 구역 안에선 직무를 등한시하는 허물이 없었고, 

 

호삼성이 이르길 : 구역 안에서, 직분을 폐해 처분함이 없음을 이른 것이다.

 

어떤 이가 이르길 : 부 負 는 아마도 무 務 를 쓴 것이다.

 

길에서 남의 잃어버린 물건을 줍지 않았으니, 그의 법 또한 훌륭하였소.

 

하작이 이르길 : 자경의 군을 일으킴은, 공명의 법에 가까워, 두 사람이 과거 서로 가까이하기에 충분했다.

 

평하길 : 조공이 한의 승상이란 바탕을 이용해, 천자를 끼며 준걸들을 제거하고, 새로이 형성荊城을 허물어뜨리고, 위세에 의지해 동으로 내려오니,

 

송본에선 하 下 를 하 夏 라고 썼다.  

 

당시 의논하던 이들은 의심하며 두 마음을 가지지 않은 이가 없었다. 주유, 노숙만이 홀로 결단한 영명한 견해를 건의해, 무리를 넘어섬이 특출하니, 진실로 기이한 재주로다. 여몽은 용맹하며 모책이 과감했고, 군의 계책을 알았으니, 학보를 속이고, 관우를 사로잡음은, 그의 기묘함 중 으뜸이다.  

 

하작이 이르길 : 학보를 속임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나, 관우를 사로잡은 것과 나란히 논함은, 그가 남군을 취함 또한 기만하는 병사여서다. 

 

처음에 비록 경솔하여 과연 함부로 살인하였으나, 끝내 극기克己하여, 국사國士의 기개와 도량을 가졌으니, 어찌 다만 무장일 뿐이겠는가! 손권의 논평에서, 우열함이 진실로 맞기에, 여기에 실어 올렸다.

 

왕무횡王懋竑이 이르길 : 손권이 주유를 파견해 선주와 협력하여 조조를 막게 하나, 적벽의 전투에선, 주유 홀로 공이 있었고, 그가 남군을 공격하며 또한 선주와는 함께 하지 않았다. 선주가 도리어 그 사이 남으로 4군을 거둠은, 주유의 뜻이 아니었다. 주유가 전승한 위세를 타고, 조조는 두려워하기엔 부족하다고 여겼으나, 선주를 의심하고 꺼림은 특별히 심했고, 손권측은 새로이 조조를 격파해서, 조조가 필시 와서 공격할 거라 여겨, 이에 선주를 가리키며 협력하고자 했으니, 그들의 뜻이 조금 달랐다. 그러므로 손권이 여동생을 선주에게 시집보냈고, 선주 또한 경京에 이르러 손권을 보며, 손권에게 말릉秣陵으로 치소를 옮기길 권했다. 진지 陳志 에서 긴밀하게 은정을 나눴다라 일렀으니, 대략 실상이 이와 같다. 손권은 진실로 “유예주劉豫州가 아니면 조조에 대적할 수 없다”고 했고, 융중에서 계책을 정하며, 또한 “손권은 더불어 원군이 될 수 있어 도모해서는 안된다”라고 일러, 이 때는 결코 아직은 서로 도모하려는 뜻이 없었다. 손권이 주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서, 주유가 죽은 후, 마침내 노숙을 따르며, 남군을 선주에게 빌려줬으니, 대략 정보는 남군을 지킬 수 없다고 근심했고, 조조가 오직 선주만을 꺼리는 것은, 천하가 모두 아는 바였기에, 그의 힘을 빌려 조조를 막고자 한 것이다. 조조가 남정하며, 유수를 향하고 남군은 향하지 않아, 선주를 피하며 공격하지 않았으나, 손권의 헤아림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건안 18년에 이르러, 조조가 유수를 공격하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19년, 손권이 다시 여강에서 이기고, 주광朱光을 사로잡았으나, 조조는 더불어 다툴 수 없었다. 이에 손권 또한 조조가 두려워하기엔 부족하고, 선주로부터 도움을 받은 바가 없음을 알게 돼, 마침내 형주를 도모해 취하려는 뜻을 가지게 됐다. 때마침 선주가 이미 익주를 얻었으나, 남군을 오로 돌려보내지 않아, 손권의 분하고 한스러움이 점점 심해졌고, 또한 관우가 남군에 있어서, 공격할 수 없을 거라 헤아렸기에, 여몽을 파견해 3군을 습격해 취하도록 했다. 후에 별안간 형주를 반으로 나누나, 여몽의 계책은 이로부터 쓰일 수 있었으니, 일찍이 하루도 남군을 잊지 않았고, 관우가 소홀히 하며 이를 방비하지 못해, 여몽은 마침내 그 틈을 노려 이를 취했다. 무릇 이러한 간극이 시작됨은, 주유에게서부터 시작해서 여몽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나, 만약 손권이 전후로 교활한 계책을 스스로 가지고, 따르거나 따르지 않은 것이라면, 또한 타인으로 인해 바뀐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주유가 길에서 병사하지 않았다면, 필시 촉을 취해, 선주는 거의 발붙일 땅이 없을 뻔했다. 또한 만약 손권이 형주를 얻은 후 조조가 죽지 않았다면, 응당 선주가 오를 정벌할 때, 조조가 필시 대군으로 오에 닥쳐, 위가 밖을 공격하고, 촉이 안을 공격해, 강동의 성패의 갈림길은, 거의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모두 운명으로, 사람의 힘이 간여할 바가 아니다. 세상에서 모두 형주를 도모해 취함을 여몽의 공이라고 여기나, 그가 거의 강동의 패업을 무너지게 할 뻔했다는 것은 알지 못하니, 이는 특별히 천운이 있었던 것일 뿐이다. 대저 오의 여러 신하 중, 주유의 웅략은 손백부와 비슷해, 중원을 병합하고 삼킬 뜻이 있어, 오로지 스스로를 지키는 데 있지 않았고, 노숙은 대세에 밝아, 오, 촉을 합쳐 조조를 막아, 삼분의 계책을 이루고자 했으나, 여몽측에 이르러선 한 번의 속임수를 부림을 자신의 이로운 계책으로 여겼으나, 그 후를 돌아보지 못했으니, 비록 공격하고 싸우는 재능은 있으나, 주유, 노숙에 견줄 바는 아니다. 손권이 남군을 얻고부터, 위에 항복하길 청해, 굴욕이 매우 심했는데, 만약 남군을 도모하지 않고 촉과 친교를 맺었다면, 그의 굴욕이 어찌 여기까지 이르렀겠는가? 그 후 손권이 마침내 위와 단절하고, 촉과 더불어 친교를 맺음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으니, 대략 또한 여기에 교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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