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史랑방

//집해를 번역한 것이 아니고 등애전을 번역하시면서 부족한 부분에 집해의 것을 추가한 형태입니다. 고원님의 번역인만큼 모든 배주는 번역되어 있고 번역의 퀄리티는 높으나 집해의 모든 것을 번역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으니 유의해주세요.(옮긴이)



등애(鄧艾)(or 등예.※①참고)는 자(字)가 사재(士載)이고 (형주의) 의양(義陽) 극양(棘陽) 사람이다.

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태조(太祖)(→조조曹操)가 형주(荊州)를 격파했을 때 여남(汝南)으로 옮겨져 농민(農民)을 위하여 송아지를 길렀다. 나이 12세에 [※②] 모친을 따라 영천(潁川)으로 가서 옛 태구장(太丘長)(→패국沛國의 태구현 현장縣長) 진식(陳寔)의 비문(碑文)에서 ‘문위세범(文爲世範) 행위사칙(行爲士則)’ (文으로 세상의 전범典範이 되고 行으로 선비들의 준칙이 되었다.)이라는 글을 읽으니 이에 (등)애는 스스로 범(範)으로 이름을 고치고 자(字)는 사칙(士則)이라 하였다. 뒤에 종족(宗族) 중에 같은 이름이 있었으므로 (다시 원래대로) 고쳤다.

도위(都尉)의 학사(學士)가 되었는데 말을 더듬어 간(幹)이나 좌(佐)는 되지 못하였다. 도전수총초리(稻田守叢草吏)가 되었다. [※③] 같은 군(郡) 출신 관리(吏)의 부친이 그의 집이 가난한 것을 불쌍히 여겨 재물을 매우 후하게 대어주었으나 (등)애는 당초에는 감사함을 표하지 않았다. 늘 높은 산과 큰 못을 보면 이를 헤아려서 군영(軍營)이 위치할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당시 사람들이 많이 비웃었다. 뒤에 전농(典農)의 강기(綱紀), 상계리(上計吏)가 되었는데 [※④] 이로 인하여 (상계上計하기 위해 조정에) 사자로 갔다가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司馬懿)을 만났다. [※⑤] (사마)선왕이 그를 높게 평가해(奇) 벽소하여 연(掾)으로 삼았고 [一] (뒤에) 상서랑(尙書郞)으로 올랐다.

[一]「세어世語」에서「등애(鄧艾)는 어려서 양성(襄城) 전농부민(典農部民)(→영천군 양성현 전농부의 둔전민)이 되었는데 석포(石苞)와 더불어 모두 나이가 12-13세쯤 되었다. 알자(謁者)인 양적(陽翟) 출신의 곽현신(郭玄信)은 무제(武帝)(→조조)의 감군(監軍)이었던 곽탄(郭誕) 원혁(元奕)(※성명이 곽탄이고 字가 원혁인 듯)의 아들인데, 건안(建安: 후한 헌제 196-220년) 중에 소부(少府) 길본(吉本)이 허도(許都)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⑥) (곽)현신이 이에 좌죄되어 형(刑)을 받아 집에 머물게 되었다. 전농(典農) 사마(司馬)(※관직 이름)에게 수레를 몰 사람을 청하니 (등)애와 (석)포가 수레를 몰게 되었는데 10여 리 길을 가면서 대화를 나누어보고는 이 두 사람이 모두 응당 원지(遠至,장래에 대성大成함)하여 좌상(佐相)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등)애는 뒤에 전농(典農)의 공조(功曹)가 되어 봉사(奉使,사자의 임무를 받듬)하여 선왕(宣王)(→사마의)에게 나아가니 이로 말미암아 알려져 마침내 발탁(拔擢)되었다.」라고 하였다.

[※①] 鄧艾 / 삼국지집해 – “집고록(集古錄)에서 ‘(등애)비에서는 (등애의 이름을 艾가 아닌) 乂(예)로 적었으니 응당 刈(예)처럼 읽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조명성(趙明誠)의 금석록(金石錄)에서 ‘위진(魏晉) 대의 사서에서 모두 (등애의 이름을) 艾로 적었는데 등애비(鄧艾碑)에는 乂로 적었다. 옛날에 艾는 또한 준예(俊乂) 삼예(芟乂) 예안(乂安)할 때의 글자와 통했으니 艾라는 이름은 그 음이 아마 이와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소애(蕭艾,쑥)할 때의 글자처럼 읽는 것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 鄧艾의 艾 자는 ‘쑥’이라는 뜻일 때는 五蓋切(五와 蓋의 반절음. 설문해자 ; 현대 자전상의 한글독음으로는 ‘애’)이고 ‘베다,다스리다’는 뜻일 때는 乂의 통자(通字)로서 魚廢切(설문해자 ; 현대 자전상의 한글독음으로는 ‘예’)로 읽습니다. 위의 집고록, 금석록의 설처럼 금석문에 乂로 표기되어있다면 ‘등예’로 읽는게 더 적절한 듯 한데 대부분 다 등애로 쓰고 있으니 그냥 그렇게 표기하겠습니다.

[※②] 등애의 생몰년 ? – 구체적인 근거는 모르겠으나「삼국지사전」과「이십육사대사전」등에서는 모두 등애의 생몰년을 (197년 – 264년)으로 명시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등애전의 이 대목을 근거로 한 것이라면(조조가 형주를 점령한 208년에 12살이니 197년생이라는 논리) 실제로는 조조의 형주 점령 뒤 여남으로 사민되고 그 뒤 어느 시점에 12살의 나이로 영천으로 다시 옮긴 것이므로 이것만 가지고는 확언할 수 없습니다. (등애전과 세어 기록 만으로 보자면 등애는 197년생 또는 +몇년) 한편, 뒤에 나오는 단작의 상소를 보면 죽을 무렵의 등애를 가리켜 ‘七十老公’이라고 표현하는데, 딱 70세라는 엄밀한 표현으로 보면 195년 생(또는 194년생)이라는 말이 되어 등애전 이 대목이나 세어의 기록과 모순되므로(195년 생이면 조조의 형주 점령 때 이미 14살) 그 경우는 아니고, ‘일흔 가까이 먹은 노인’이나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 정도의 수사적인 표현으로 보입니다.

[※③] 삼국지집해 – “간좌(幹佐)의 해설은 사마지전을 보라. (*幹, 佐는 문서를 주관하는 군현 소속의 하급관리 명칭임) 생각컨대 등애가 말을 더듬어서 간이나 좌가 되지 못했는데 어찌 도위의 학사가 될 수 있었을까? 속한지 백관지에 따르면 ‘삼로(三老)는 교화(敎化)를 관장한다. 무릇 효자(孝子), 순손(順孫,공순한 손자), 정녀(貞女,정조있는 여인), 의부(義婦,의로운 부인)가 있으면 재물을 넘겨주어 우환으로부터 구제해주며 아울러서 백성들에게 법식(法式)이 될만한 학사(學士)가 있으면 모두 그의 (집) 문에 편표(扁表,편액을 걸어 표창함)함으로써 선행(善行)을 밝힌다.’고 하였다. 또한 본지(→삼국지) 배잠전에 따르면 ‘문제가 제위에 오르고 (배)잠이 나가서 영천의 전농중랑장이 되고는 (기존 군국과 별개로 전농중랑장이나 전농도위 등이 주관하는 둔전민들로 편제된 전농부典農部에서도) 공거(貢擧,지방에서 인재를 추천하여 등용하는 것)를 통하게 하여 군국에 준하도록 하자고 상주했다.’고 하였으니, 이 (등애)전에서 말하는 도위는 곧 영천(潁川)의 전농도위(典農都尉)이며(*전농중랑장은 군국급, 전농도위는 현급이므로 정확히는 ‘양성 전농도위’인 듯) 학사(學士)라고 일컬은 것은 응당 향의 삼로가 천거한 학사일 것이다. (아래) 배송지 주석에서 인용된 세어에서 등애가 어려서 양성(襄城)의 전농부민(典農部民)이 되었다 한 것으로 가히 증명된다. 양성은 영천의 속현이다. 세설신어에서 “등애가 말을 더듬어서 말을 할 때 ‘애’, ‘애’라고 (자신을) 칭했다. 진문왕(→사마소)이 놀리며 말하길 ‘경이 애,애라고 하니 도대체 (등)애가 몇 명이오?’라 하니 ‘(논어에서 공자를 가리켜) 봉황이여 봉황이여 라고 (두번) 말하였으므로 봉황은 하나입니다.’라고 대답했다.”라고 하였다.”  / 그리고 도전수총초리(稻田守叢草吏)는 글자 뜻으로 볼 때 논농사나 숲이나 목초 따위를 관리하는 하급관리의 명칭으로 보입니다.

[※④] 典農綱紀(전농강기)와 上計吏(상계리) - 강기(綱紀)는 군현의 속관인 공조(功曹) 또는 주부(主簿)의 별칭입니다. (삼국지사전) 당시 전농부의 속관도 대체로 일반 군현의 예를 준용했던 것 같은데, 아래 세어에서 ‘典農功曹’라 한 것을 볼 때 여기서는 공조(功曹)의 별칭으로 보입니다.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趙一淸도 그렇게 보았음) 구체적으로는 ‘양성 전농도위 부의 강기(=공조)’였던 듯. / 상계(上計)는 정기적으로 각 지방군현에서 호구, 부세, 관리의 실적 등을 정기적으로 상경해서 보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상계하는 업무와 관련하여 상계리(上計吏), 상계연(上計掾)이라는 별개의 관직이 있으므로 아마 강기, 상계리를 차례로 역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⑤] 사마의가 태위를 지낸 것은 235년(위 명제 청룡 3년)-239년(경초 3년)

[※⑥] 길본(吉本)의 반란은 삼국지 무제기에 따르면 218년(건안 23년)의 일로, 당시 길본은 태의령太醫令이고 함께 봉기한 경기(耿紀)가 소부(少府)였습니다.「삼국지사전」등에 따라 등애를 197년 생으로 본다면 곽현신과의 일화(218년 이후 어느 때)는 20대 초반 쯤의 일이 됩니다.


당시 농경지를 늘리고 곡식을 비축하여 적(賊)을 멸할 자산으로 삼고자 하니 (등)애를 보내 진(陳)(→예주 진국 진현)과 항(項)(→여남군 항현)의 동쪽으로부터 수춘(壽春)에 이르기까지 순행하게 하였다. (등)애가 말했다,

“농토(田)는 좋으나 물이 부족하여 땅의 이로움(地利)을 다 활용하기에 충분치 않습니다. 의당 하거(河渠,수로)를 개통한다면 물을 끌어들여 요개(澆漑,관개灌漑)하여 군량(軍糧)을 크게 비축할 수 있고 또한 운조(運漕,물길로 운반하는 것.조운)의 길을 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제하론(濟河論)을 지어 그 뜻을 알렸다. 또한 말했다,


“예전에 황건(黃巾)을 격파한 것을 계기로 둔전(屯田)을 실시하여 허도(許都)에 곡식을 쌓음으로써 사방을 제어하였습니다. 이제 세 방면이 이미 평정되어 (싸울) 일은 회남(淮南)에 있는데 매번 대군(大軍)이 정벌전을 일으킬 때마다 (운용하는 병력 중에) 운병(運兵,군량을 운반하는 군사)이 절반을 넘고 공비(功費,사업에 소요되는 비용)가 매우 많으며 큰 노역이 됩니다. 진(陳), 채(蔡) 일대는 땅이 낮고 농토는 좋아 허창(許昌) 좌우(주변)의 여러 도전(稻田,벼를 심는 논)들을 줄인다면 물이 합쳐져 (풍부하게) 동쪽으로 흘러내려갈 것입니다. [※①] 회북(淮北)에 2만 명, 회남(淮南)에 3만 명을 주둔하게 하며 (그 중) 10분의 2는 휴식하게 한다면 항상 4만명이 있게 되니 이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수비하게 하십시오. [※②] 물(水)이 풍부하여(水豐) [※③] 항상 서쪽에 비해 3배의 곡식을 거둘 것이니 각종 비용을 헤아려서 제하고도 한 해가 끝날 때면 5백만 곡(斛)을 군자(軍資,군대에서 쓰이는 물자)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6-7년 동안 하면 회수 가에(淮上) [※④] 3천만 곡(斛)을 비축할 수 있는데 이는 곧 10만 군대의 5년 양식입니다. [※⑤] 이로써 오(吳)를 노린다면(乘) 어디를 가든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선왕(宣王)이 이 말을 좋게 여기고 (등애가 진언한) 일을 모두 시행하였다.(事皆施行) [※⑥] 이에 정시(正始) 2년(=241년)에 [※⑦] 조거(漕渠,조운漕運하는 수로)를 개광(開廣,개통하거나 넓힘)하니 매번 동남쪽에 일이 있을 때마다 대군(大軍)으로 군대를 일으켜 배를 띄워 아래로 내려가 장강(江), 회수(淮)에까지 도달하였고 자식(資食,물자와 식량)을 비축해두며 수해(水害)를 입는 일이 없었으니 이는 (등)애가 세운 공적이다.

 
[※①] 幷水東下(병수동하) / 호삼성(胡三省) 주석(자치통감음주. 자치통감 권74) – “여수(汝水), 영수(潁水), 낭탕거수(蒗蕩渠水), 과수(渦水)가 모두 진(陳), 채(蔡) 일대를 거쳐 동쪽으로 흘러 회수(淮水)로 들어간다.”

[※②] 호삼성 주석 – “5만명 중에서 (그 10분의 2인) 1만을 갈라 차례로 휴식하고 번갈아 복무하게 하며 (한바퀴를) 다 돌면 다시 시작하였으니 이는 항상 4만 명으로 둔전(屯田)한 것이다.”

[※③] 水豐(수풍) / 삼국지집해 – “水(수)는 歲(세)로 적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태평어람에서는 小(소)로 적었다.” / 歲로 본다면 ‘해마다 풍년이 들어’로 풀이됩니다.

[※④] 淮上(회상) / 삼국지집해 – “「진서晉書」식화지(食貨志)에서는 上(상)을 北(북)으로 적었다.” / 진서 중화서국 점교본(1974년)에 따르면 北이 아니라 土(토)로 되어있습니다. 아래 cf 참고.

[※⑤] 可積三千萬斛於淮上,此則十萬之衆五年食也 - 3천만 곡이 10만 군대의 5년 양식이면 1명이 1년에 60곡(1달에는 5곡)을 소비한다는 말이 됩니다. 당시 1곡(斛)은 대략 20리터인데 곡물을 담았을 때 무게를 15kg 정도로 추산한다면 1년에 무려 900kg을 먹는 셈이 되어 고대인이 현대인에 비해 곡물 소비량이 훨씬 컸다는 점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수치가 너무 큰거 같습니다. 참고로 왕망 즉위 초에 대규모 흉노원정을 계획할 때 엄우(嚴尤)가 이를 간하면서 ‘군사 1명이 300일 먹을 양식을 헤아려보면 비(糒,건량) 18곡이 든다’(計一人三百日食, 用糒十八斛 / 한서 흉노전)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곧, 1년에 약 21곡, 1달에 1.8곡) 시점 및 도량형의 차이나 糒의 특수성 등을 감안하더라도 그 차이가 너무 큽니다. 따라서 등애전의 이 말은 병력의 실제 소요양식을 말하는게 아니고 그 가족을 포함해서 나온 수치이거나 당시 회남 일대의 군둔(軍屯)에 종사하던 병사들에게 월 5곡 정도를 지급하였기에 이런 식으로 말한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⑥] 事皆施行(사개시행) / 삼국지집해


태평어람 권333에서 위지(魏志)를 인용하며 (事皆施行 대신에) ‘皆如艾計’(개여애계, 모두 등애의 계책대로 하였다)로 적었다. 그 아래에는 ‘遂北臨淮水 自鍾離西南橫石以西 盡沘水四百餘里 五里置一營 營六十人 且田且守 兼修廣淮陽 百尺二渠 上引河流 下通淮潁 大治諸陂於潁南潁北 穿渠三百餘里 溉田二萬頃 淮南淮北皆相連接 自壽春到京師 農官兵屯 雞犬之聲 阡陌相屬’(*진서 식화지와 거의 똑 같은 글이라 여기서는 번역을 생략함.)으로 총 97자가 있고 그 아래로 每東南有事(매동남유사) 운운하는 글로 이어진다. (이에 관하여) 하작(何焯)은 ‘책부원귀에서도 이를 인용하며 또한 등애전(鄧艾傳)이라 하였으므로 (현전하는 삼국지보다 글자가 더 많은 태평어람의 위지 인용문이) 모두 승조(承祚,삼국지 찬자인 진수의 字)의 본래 글이 맞으니 뒤에 (삼국지를) 간행할 때는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엄장명(嚴長明)의 설도 이와 같다. (그러나) 이자명(李慈銘)은 ‘이것은 진서 식화지의 글이다. 승조(承祚)의 본래 글은 간결함에 힘썼는데 이 (삼국지 등애)전은 머리와 꼬리가 완선(完善,완전)하고 글이 서로 승접(承接)하며 또한 (등애전에서) ‘事皆施行’ 운운한 글은 또한 (태평어람 인용문과) 서로 같지 않으니 필시 (태평어람에서) 인용한 바가 본전(本傳)(등애전)에서 탈락한 글은 아니다. 책부원귀에서 등애전이라 말한 것도 족히 신뢰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반미(潘眉)는 ‘두씨(두우)의 통전(通典)에서 이를 인용하며 하나는 (통전 식화전 중의) 조운(漕運) 부문에 적고 다른 하나는 둔전(屯田) 부문에다 적었으며, 하나(→屯田 부문의 글)는 진서 식화지에 의거하여 93자가 많고 다른 하나(→漕運 부문의 글)는 등애전에 의거하였다. 책부원귀에서 아울러 ‘등애전’으로 잘못 적었다. 하작과 엄장명이 이를 등애전의 일문(逸文,산실散失된 글)으로 본 것은 잘못되었다.’라고 하였다. 심가본(沈家本)은 ‘진서 식화지를 살펴보니 태평어람의 이 권(→권333)에서 인용한 글은 바로 진지(晉志)(→진서 식화지)의 글이지 위지(魏志)가 아니다. 그러므로 (태평어람) 822권(*821권의 오기임)에서 인용한 글과 서로 같지 않은 것이며(*태평어람 권821의 위지 인용문은 등애전과 거의 일치함) 이를 승조(承祚)의 본래 글로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 태평어람에서 晉(진)을 魏(위)로 잘못 적은데다가 책부원귀에서도 등애전(鄧艾傳)이라 잘못 적은 것으로 족히 근거로 삼을만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⑦] 정시 2년(=241년)(삼국지 등애전) or 정시 4년(=243년)(진서 식화지) -「자치통감」에서는 이 등애전 기사를 모두 권74 정시2년 조에 거의 그대로 수록하고 있는 반면에(등애의 이러저러한 진언이 있자 이 해(정시2년)에 조거를 개광하였다는 식의 기술로 등애전 취지와 일치함),「진서」식화지에서는 사마의가 제갈각의 침범을 격퇴한 정시 4년이나 그 직후의 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래 cf참고) 제갈각의 사건이 243년에 있었던 일이고 이와 연결하여 기술한 진서 식화지의 내용이 더 자세한 걸 볼 때 이쪽이 더 신빙성이 있지않나 생각됩니다.

cf.「진서」권26 식화지(食貨志)

정시(正始) 4년(=243년), 선제(宣帝)(→사마의)가 또한 제군(諸軍)을 감독하여 오(吳)의 장수 제갈각을 치고 그의 적취(積聚,비축해둔 물자)를 불태우니 (제갈)각이 성을 버리고 둔주(遁走)하였다. 선제가 이로 인하여 농경지를 넓히고 곡식을 쌓아 (천하를) 겸병할 계책으로 삼았다. 이에 등애(鄧艾)를 보내 진(陳), 항(項)의 동쪽으로부터 수춘(壽春)에 이르기까지 순행하게 하였다. (등)애가 말했다, “농토(田)는 좋으나(비옥하나) 물이 부족하여 땅의 이로움(地利)을 다 활용하기에 충분치 않습니다. 의당 하거(河渠,수로)를 개통한다면 군량(軍糧)을 크게 비축할 수 있고 또한 운조(運漕)의 길을 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제하론(濟河論)을 지어 그 뜻을 알렸다. 또한 말했다, “예전에 황건(黃巾)을 격파한 것을 계기로 둔전(屯田)을 실시하여 허도(許都)에 곡식을 쌓음으로써 사방을 제어하였습니다. 이제 세 방면이 이미 평정되어 (싸울) 일은 회남(淮南)에 있는데 매번 대군(大軍)이 정벌전을 일으킬 때마다 (운용하는 병력 중에) 운병(運兵,군량을 운반하는 군사)이 절반을 넘고 공비(功費)가 매우 많으며 큰 노역이 됩니다. 진(陳), 채(蔡) 일대는 땅이 낮고 농토는 좋아 허창(許昌) 좌우(주변)의 여러 도전(稻田)들을 줄인다면 물이 합쳐져 (풍부하게) 동쪽으로 흘러내려갈 것입니다. 회북(淮北)에 2만 명, 회남(淮南)에 3만 명을 주둔하게 하고는 그들을 나누어서 쉬게 하고 (나머지 복무하는 이들로 하여금) 농사를 지으면서 수비하게 하십시오. 물이 풍부하여 항상 서쪽에 비해 3배의 곡식을 거둘 것이니 각종 비용을 헤아려서 제하고도 한 해가 끝날 때면 5백만 곡(斛)을 군자(軍資)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6-7년 동안 하면 회수 일대의 땅(淮土)에 3천만 여 곡(斛)을 쌓아둘 수 있는데 이는 곧 10만의 군대가 5년 먹을 양식입니다. 이로써 오(吳)를 노린다면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선왕(宣王)이 이 말을 좋게 여기고 모두 (등)애의 계책대로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여강군 서현(舒縣)으로부터 / (∵) 진서 선제기, 삼국지 오주전] 북쪽으로 가서 회수(淮水)에 임하고는 (회수 가의) 종리(鍾離) 이남(而南=以南)과 횡석(橫石) 이서(以西)로 비수(沘水,회수의 지류)에 다다를 때까지 4백여리에 걸쳐 5리에 영(營) 하나를 두고 영(營)마다 60명을 두어 농사를 지으면서 수비하게 하였다. 아울러 회양(淮陽) 및 백척(百尺)의 2거(渠)(→회양거와 백척거)를 정비하고 넓혀 위로는 하수의 물길을 끌어들이고 아래로는 회수(淮水), 영수(潁水)와 통하게 하고 영남(潁南,영수 남쪽)과 영북(潁北,영수 북쪽)에 있는 여러 피(陂,둑;저수지)를 대거 정비하고 거(渠,수로)를 3백여 리 뚫으니 개전(溉田,물을 대는 농지)이 2만 경(頃)에 이르고 회남(淮南,회수 남쪽)과 회북(淮北)이 모두 서로 연접(連接)하게 되었다. 수춘(壽春)으로부터 경사(京師,수도)(→낙양)에 이르기까지 농관(農官), 병전(兵田)이 있고 닭과 개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천맥(阡陌,밭 사이에 난 길)이 서로 이어졌다. 매번 동남쪽에 일이 있을 때마다 대군이 출정하여 배를 띄워 아래로 내려가 장강(江), 회수(淮)에까지 도달하였고 자식(資食,물자와 식량)을 비축해두며 수해(水害)를 입는 일이 없었으니 이는 (등)애가 세운 공적이다.

 

(외직으로) 나가서 정서군사(征西軍事)에 참여하였다가(→정서장군征西將軍의 참군參軍) [※①] 남안태수(南安太守)로 올랐다.

가평(嘉平) 원년(=249년), 정서장군(征西將軍) 곽회(郭淮)[※②]와 함께 촉(蜀)의 편장군(偏將軍)[※③] 강유(姜維)를 막았다. (강)유가 물러나자 (곽)회가 이를 틈타 서쪽으로 가서 강(羌)을 공격하였다. (등)애가 말했다,

“적이 아직 멀리 가지 않았으니 혹 다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의당 제군(諸軍)을 나누어 불우(不虞,불의의 사태)를 대비해야 합니다.”

이에 (등)애를 남겨 백수(白水) 북쪽에 주둔하게 하였다. 사흘 만에 (강)유가 요화(廖化)를 보내 백수(白水)의 남쪽으로부터 (등)애를 향하며 군영을 세웠다. (등)애가 제장(諸將)들에게 말했다,

“(강)유가 이제 갑자기 되돌아왔는데 우리 군인(軍人)이 적으니 응당 강을 건너올 법도 하나 다리를 만들지 않고 있소. 이는 (강)유가 (요)화로 하여금 우리를 붙잡아 두어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필시 (강)유 자신은 동쪽으로 가서 조성(洮城)을 습취(襲取,습격하여 빼앗음)할 것이오.”

조성(洮城)은 (백)수 북쪽에 있었는데 (등)애의 군영으로부터 60리 떨어져있었다. 이에 (등)애는 밤중에 잠군(潛軍,은밀한 출군)으로 곧장 (조성에) 도착하였고 (강)유는 과연 강을 건너왔으나 (등)애가 먼저 도착해 성을 점거하였으므로 패하지 않을 수 있었다.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하고 토구장군(討寇將軍)을 더하였으며 뒤에 성양태수(城陽太守)로 올렸다.(※④)


[※①] 당시 정서장군 – 위(魏) 명제가 죽고 제왕이 즉위한 뒤에 조엄(趙儼)이 정서장군 도독옹량(주제군사)로 올랐다가 정시 4년(=243년)에 노환을 이유로 수도로 돌아갈 것을 청하자 불려와서 표기장군이 되었고(삼국지 권23 조엄전) 하후현(夏侯玄)이 정시 초에 산기상시, 중호군으로 여러 차례 승진했다가 그 얼마 뒤에 정서장군, 가절 도독옹량주제군사가 되었는데 (삼국지 권9 하후현전) 곧, 정시 4년에 조엄을 이어서 하후현이 정서장군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사동萬斯同의 위방진연표魏方鎭年表에서도 그렇게 정리함) 따라서 여기 등애전에서 말하는 정서장군은 이 둘 중의 한명일 것인데 아무래도 하후현일 가능성이 큰 듯하고 삼국지집해에서도 하후현으로 보았습니다. (正始四年夏侯玄爲征西將軍 / 삼국지집해)

[※②] 정서장군 곽회 / 삼국지 집해 – “곽회가 하후현의 뒤를 계승하였다.”(淮繼玄後.) / 곽회는 가평 원년에 정서장군, 도독옹량(주)제군사에 오름. (곽회전)

[※③] 偏將軍(편장군) – 편장군(偏將軍)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장군 명칭인데, 삼국지 강유전, 후주전 등에 따르면 당시 강유는 위장군(衛將軍)입니다. 軍 또는 偏이 연자(衍字)인 듯합니다.

[※④]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에 따르면 213년에 구주제를 부활하며 군현들을 대거 정비할 때 성양군은 서주 소속이고, 진서지리지에 따르면 청주 소속입니다.



당시 병주(幷州)의 우현왕(右賢王)[※①] 유표(劉豹)가 (흉노 5부部를) 하나의 부(部)로 아우르니 (등)애가 이에 관해 상언(上言)하였다,

“융적(戎狄)은 짐승의 마음을 품고 있어 의(義)로써 친할 수 없고 강하면 침범하고 약하면 내부(內附,귀부)하니 이 때문에 주(周) 선왕(宣王) 때에 험윤(玁狁)의 침범이 있었고 한조(漢祖)(→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 때에는 (흉노를 치러 갔다가 거꾸로) 평성(平城)에서 포위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흉노(匈奴)가 한번 번성할 때마다 전대(前代)에서 늘 무거운 우환이 되었습니다. 선우(單于)가 (국경)바깥에 있으면 장비(長卑)[※②]를 견제(牽制)할 수 없으므로 그들을 유인하여 불러오고 입시(入侍)하러 오도록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강이(羌夷)들이 실통(失統,기강을 잃음)하고 합산(合散,서로 합치거나 흩어짐)함에 있어 주인(主)이 없게 되었으며 선우(單于)가 (국경) 안에 있으니 만리(萬里) 땅이 (천자의) 궤범에 순응하였습니다. 지금 선우(單于)의 존엄이 날로 미약해지고 외토(外土)(의 다른 호로들)의 위엄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으므로 호로(胡虜,오랑캐)를 방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기로 유표(劉豹)의 부(部)에 반란을 일으킨 호(胡)가 있다 하니 이 반란을 틈타 두 나라로 분할함으로써 그들을 세력을 나누십시오. 거비(去卑)의 공(功)이 전조(前朝)(→한나라)에 현저하나 그 아들이 업(業)을 계승하지 못했으니 의당 그 아들에게 현귀(顯貴)한 호칭을 더해주고 그를 안문(鴈門)에 거주하게 해야 합니다. 나라를 분리시켜 구(寇)(→흉노)를 약하게 만들고 예전 공훈을 추록(追錄,추가追加하여 기록함)하는 것이 변경을 통제하는 장계(長計,좋은 계책)입니다.”

또한 진술하였다,

“강호(羌胡)가 민(民,편호編戶인 한족 일반백성)과 더불어 같이 거주하고 있으니 의당 이들(→강호羌胡)을 점차 내보내어 민(民)의 바깥에 거주케 하고 염치(廉恥)의 가르침을 존숭하게 하여 간귀(姦宄,범법작란犯法作亂)하는 길을 막아야 합니다.”

대장군(大將軍) 사마경왕(司馬景王)(→사마사司馬師)이 새로 보정(輔政)하게 된 뒤 [※③] (등애의 건의를) 다수 납용(納用)하였다.

여남태수(汝南太守)로 오르고 (임지에) 도착하여 예전에 자기를 후대해주었던 관리의 부친을 수소문했으나 이미 오래전에 죽은 뒤였다.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주고 그 모친에게 두텁게 선물해 주고 그의 아들을 뽑아 계리(計吏)의 관직을 주었다. (등)애가 재직한 곳에서는 황야(荒野)가 개벽(開闢,개척,개간)되고 군민(軍民)들이 모두 풍족해졌다.
 

[※①]「진서」유원해재기와「자치통감」권75에 따르면 우현왕이 아니라 좌현왕(左賢王)입니다.

[※②] 長卑(장비) / 삼국지집해 – “심가본(沈家本)은 ‘長卑(장비)는 미상이다. 혹 거비(去卑)의 와전일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 (삼국지집해 찬자인 노)필(盧弼)이 보건대 아래에 있는 글의 거비(去卑)는 별개의 다른 사람이다.” (沈家本曰 長卑未詳 或去卑之訛 弼按下文去卑爲別一人.) / 삼국지 점교본 표점에서는 사람 이름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문맥으로 볼 때 ‘고귀하거나 비천한 모든 흉노인들’ 정도의 뜻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③] 251년(가평 3년) 8월에 사마의가 죽자 아들인 사마사가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에 임명되어 보정함.

cf. 참고 사료

[삼국지 무제기] (건안 21년) 건안 21년(=216년) 가을 7월, 흉노 남선우 호주천(呼廚泉)이 그의 명왕(名王)을 거느리고 내조(來朝)하자 그를 객례(客禮)로 대우하니 마침내 위(魏)에 머물며 우현왕 거비(去卑)에게 그 나라를 감독하게 하였다.

[후한서 남흉노열전] (*원문과 번역문 중의 []는 이현의 주석)


선우 호주천(呼廚泉)이 흥평(興平) 2년(=195년)[헌제 초평5년을 흥평 원년으로 고쳤다.]에 즉위하였다. 형(→어부라於扶羅)이 쫓겨났으므로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부라 때처럼 평양平陽에 있으며) 여러 차례 선비족에게 약탈당했다. 건안(建安) 원년(=196년), 헌제(獻帝)가 장안(長安)으로부터 동쪽으로 돌아갈 때 우현왕(右賢王) 거비(去卑)가 백파적(白波賊)의 우두머리 한섬(韓暹) 등과 함께 천자를 시위(侍衛)하면서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를 막으며 공격하였다. 그러다 거가(車駕)가 낙양(洛陽)으로 돌아오고 또한 허(許)로 옮긴 연후에야 나라로 돌아갔다. [하동(河東)의 평양(平陽)으로 돌아갔다는 말이다.] 건안 21년(=216년), 선우가 내조하자 조조(曹操)가 이로 인하여 업(鄴)에 머물게 하고 [호주천(呼廚泉)을 업에 머물게 하고 거비(去卑)를 보내 평양(平陽)으로 돌아가 그 5부(部)의 나라를 감독하게 한 것이다.] 거비(去卑)를 돌려보내 그 나라를 감독하게 하였다.

[진서 유원해재기] 위무제(魏武帝)가 그 부중들을 5부(五部)로 나누고 (유)표를 좌부수(左部帥)로 임명하고 그 나머지 부(部)의 수(帥)(→우부수,남부수,북부수,중부수)들도 모두 (선우 일족인) 유씨(劉氏)가 맡게 하였다.

[진서 흉노전] 건안(建安,후한 헌제 196-220) 중, 위무제가 처음으로 그 부중들을 5부(部)로 나누고는 매 부(部)마다 그들 중에서 존귀한 자를 세워 (그 部의) 수(帥)로 삼고, 한인(漢人)을 뽑아 사마(司馬)로 임명하여 이를 감독하게 했다. 위(魏)나라 말에는 다시 수(帥)를 도위(都尉)로 바꾸었다. 그 좌부도위(左部都尉)는 약 1만여 락(落)을 거느리며 태원(太原)의 옛 자씨현(玆氏縣)에 거주하고, 우부도위(右部都尉)는 약 6천여 락(落)을 거느리며 (태원국太原國) 기현(祁縣)에 거주하고, 남부도위(南部都尉)는 약 3천여 락(落)을 거느리며 (평양平陽군) 포자현(蒲子縣)에 거주하고, 북부도위(北部都尉)는 4천여 락(落)을 거느리며 (신흥군) 신흥현(新興縣)에 거주하고, 중부도위(中部都尉)는 6천여 락(落)을 거느리며 (태원국) 대릉현(大陵縣)에 거주하였다.


제갈각(諸葛恪)이 합비(合肥)의 신성(新城)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퇴귀(退歸,퇴환)하였다. [※①] (등)애가 경왕(景王)(→사마사)에게 말했다,

“손권(孫權)이 죽은 뒤에 대신(大臣)들이 아직 (진심으로) 귀부(歸附)하지 않고 오(吳)의 명종(名宗,명망있는 종족) 대족(大族)들은 모두 부곡(部曲)을 가지고 있어 병(兵)과 세(勢)를 믿고서 족히 명을 세울 정도입니다.(建命) [※②] (제갈)각이 새로 국정(國政)을 잡아 안으로 그 주인이 없는데도(內無其主) [※③] 상하(上下)를 무휼(撫恤,위로하고 도와줌)하여 근기(根基,기초,토대)를 세울 생각을 하지 않고서 바깥의 일을 다투어 그 백성을 학용(虐用,혹독하게 부림)하고 나라의 모든 군을 견고한 성(城) 아래에서 꺾이게 하고 죽은 자가 만(萬)으로 헤아릴 정도에 달하여 화(禍)를 지닌 채 돌아갔으니 이제 (제갈)각이 죄(罪)를 얻을 때입니다. 옛날 (오)자서(伍子胥), 오기(吳起), 상앙(商鞅), 악의(樂毅)는 모두 당시 군주에게 신임을 받다가 그 군주가 죽은 뒤에 패망하였습니다. 하물며 (제갈)각은 그 재주가 이 네 명의 현인과 같지 않은데도 대환(大患,큰 근심)을 염려하지 않으니 그가 망하는 것을 가히 기대할만 합니다.”

(제갈)각이 돌아간 뒤 과연 주살당하였다.

연주자사(兗州刺史)로 오르고 [※④] 진위장군(振威將軍)이 더해졌다. 다음과 같이 상언(上言)하였다,

“나라의 급한 일은 오로지 농사(農)와 전쟁(戰)입니다. 나라가 부유하면 곧 군대(兵)가 강해지고 군대(兵)가 강하면 곧 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사가 바로 승리의 근본입니다. 공자(孔子)가 이르길, ‘족식족병(足食足兵)’이라 하며 식(食)을 병(兵) 앞에다 두었습니다. 위로는 작위를 설치하여 (공적있는 관리를) 권면함이 없으니 아래로 재물을 축적하는 공로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공적을 살펴 상을 주고 식량을 비축하며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데에 뜻을 둔다면 교유(交游,교제)의 길이 끊어지고 부화(浮華,실속없이 겉만 화려함)의 근원이 막힐 것입니다.”
 

[※①] 제갈각의 합비 공격은 253년(가평 5년)의 일.

[※②] 建命(건명) / 삼국지집해 – 자치통감에서는 違命(위명)으로 적었다. 관본고증(官本考證)에서 ‘建(건)은 違(위)로 적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 違命으로 두고 풀면 ‘족히 명을 어길 정도입니다.’…가 됩니다.

[※③] 內無其主(내무기주) – 손권을 이어 손량(孫亮)이 즉위한 상태이므로 말그대로 임금이 없다는 말은 아닐 것이고, ‘제갈각이 내심으로 주인(군주)을 위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거나 ‘오나라 내부적으로 권위를 갖춘 제대로 된 주인이 없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문맥상 앞서 기술한 내용도 그렇고, 여기의 內가 뒤의 外와 함께 서로 댓구를 이루는 걸 볼 때 후자로 보는게 맞지 않을까 짐작됩니다.

[※④] 삼국지집해 – “정원(正元) 원년(=254년)에 (사마사가 이풍, 하후현 등을 숙청하며) 연주자사(兗州刺史) 이익(李翼)을 죽였는데 (이)익은 이풍(李豊)의 동생이었다. 등애(鄧艾)가 이익(李翼)의 뒤를 이은 것이다.”


고귀향공(高貴鄕公)이 존위(尊位)에 오르자 방성정후(方城亭侯)로 올려 봉해졌다.

관구검(毌丘儉)이 난을 일으키고는 [※①] 건보(健步,걸음을 잘 걷는 사람)에게 글을 들려 (연주로) 보내 대중(大衆)들을 의혹(疑惑)하려 하니 (등)애가 그를 베어죽이고는 겸도(兼道,두배의 속도로 길을 감, 길을 서두름)하여 진군(進軍)해 먼저 낙가성(樂嘉城,예주 여남군 남돈현南頓縣 북쪽임)으로 달려가 부교(浮橋,배나 뗏목 등을 띄워 임시로 만든 다리)를 만들었다. 사마경왕(司馬景王)이 도착하자 이를 점거하였다. 문흠(文欽)이 뒤에 도착하였다가 성 아래에서 대군(大軍)에게 파패(破敗,격파되어 패전함)하니 [※②] (등)애가 이를 추격하여 구두(丘頭,개전초기 관구검이 진군해 점거했던 여남군 항현項縣의 동남쪽임)에까지 이르렀다. (문)흠은 오(吳)나라로 달아났다.

오(吳)의 대장군(大將軍) 손준(孫峻) 등이 10만 군대라고 칭하며 장차 (장)강을 건너려 하자 진동장군(鎭東將軍) 제갈탄(諸葛誕)이 (등)애를 보내 비양(肥陽)[※③]에 주둔하게 하였다. (등)애는 (비양은) 적의 세력과 서로 거리가 멀고 요해지(要害地)가 아니라 여겨 부정(附亭)으로 옮겨 주둔하고는 [※④] 태산태수(泰山太守) 제갈서(諸葛緖) 등을 보내 여장(黎漿,수춘의 남쪽임)에서 거전(拒戰,적군을 막으며 싸움)하게 하여 마침내 패주시켰다. [※⑤]

그 해에 (경도로) 불려와 장수교위(長水校尉)에 임명되었다. (문)흠 등을 격파한 공으로 방성향후(方城鄕侯)로 올려 봉해지고 행(行) 안서장군(安西將軍)에 임명되었다. [※⑥] 적도(狄道)에서 옹주자사(雍州刺史) 왕경(王經)이 포위당한 것을 풀자 강유(姜維)가 퇴각하여 종제(鍾提)에 주둔하니 이에 (등)애를 안서장군(安西將軍) 가절(假節) 영(領) 호동강교위(護東羌校尉)로 임명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대다수 (강)유의 역량이 이미 고갈되어 다시 출병하지 못할 것이라 말하였다. (등)애가 말했다,
 
“조서(洮西,조수洮水 서쪽)의 패배는 작은 손실이 아닙니다. 군이 격파되고 장수가 살해당하고 창름(倉廩,곳간)은 텅 비고 백성들은 유리(流離,정처없이 떠돌아다님)하여 거의 위망(危亡)할 뻔하였습니다. 이제 이를 헤아려 말하면, 저들에게는 승승(乘勝,승세를 탐)의 세(勢)가 있으나 우리에게는 허약(虛弱)의 실질이 있으니, 이것이 첫째입니다. 저들은 위아래가 서로 익숙하고 오병(五兵)[※⑦]이 단단하고 날카로우나 우리는 장수가 바뀌고 병사들은 새로 충원되고 기장(器杖,무기)이 아직 원상복구되지 못했으니, 이것이 둘째입니다. 저들은 배로 다니는데 우리는 뭍으로 행군하여 노일(勞逸,수고로움과 편안함)이 서로 같지 않으니, 이것이 셋째입니다. 적도(狄道), 농서(隴西), 남안(南安), 기산(祁山)에 각각 수비병이 있어야 하므로 저들은 한 곳에 전념하나 우리는 넷으로 (병력을) 나누어야 하니, 이것이 넷째입니다. 남안(南安)이나 농서(隴西)로 나올 때는 강(羌)의 곡식을 먹고 만약 기산(祁山)으로 향한다면 익은 맥(麥,밀 또는 보리)(밭)이 천 경(頃)이라 이를 현이(縣餌,멀리 떨어진 곳의 식량?. 참고로 자치통감에서는 外倉(외부의 창고)으로 바꿔 표기함)로 삼을 수 있으니, 이것이 다섯째입니다. 적이 교활한 술수를 갖추었으니 (이런 잇점들을 틈타) 반드시 쳐들어올 것입니다.”

얼마 뒤에[※⑧] (강)유가 과연 기산(祁山)으로 향하였는데 (등)애가 이미 방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에 방향을 돌려 동정(董亭)으로부터 남안(南安)으로 급히 향하니 (등)애는 무성산(武城山)을 점거한 채 서로 대치하였다. (강)유는 (등)애와 더불어 험지를 다투었으나 이기지 못하자 그날 밤에 위수(渭水)를 건너 동쪽으로 행군하여 상규(上邽)로 급히 향하니 (등)애가 단곡(段谷)에서 (강유와) 더불어 싸워 대파하였다. 감로(甘露) 원년(=256년)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역적(逆賊) 강유(姜維)가 여러해에 걸쳐 교힐(狡黠,교활)한 짓을 하니 민(民)과 이(夷)(→한족백성과 이민족)가 소동(騷動,혼란스럽고 동요함)하고 서쪽 땅이 안녕하지 못하였다. (등)애는 주획(籌畫,계획)함에 있어 반듯하고 충용(忠勇,충성과 용맹)으로 분발(奮發)하여 십(十)으로 헤아릴 정도의 (많은) 장수를 베고 천(千)으로 헤아릴 정도의 (많은 적병의) 수급을 베어 파(巴), 촉(蜀) 땅에 국위(國威)를 떨치고 강(江,장강), 민(岷,민산岷山) 일대에 무(武)를 드날렸다. 이제 (등)애를 진서장군(鎭西將軍) 도독농우제군사(都督隴右諸軍事)로 삼고 등후(鄧侯)[※⑨]로 올려 봉한다. (그의 식읍 중) 5백 호(戶)를 갈라 (그의) 아들 (등)충(鄧忠)을 정후(亭侯)로 삼는다.” [※⑩]

(감로) 2년(=257년), 장성(長城)에서 강유를 막았고 (강)유가 퇴환하였다.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오르고 그 앞뒤로 식읍을 늘려 총 6,600호가 되었다.

경원(景元) 3년(=262년), 또 후화(侯和)에서 (강)유를 격파하니 (강)유는 물러나 답중(沓中)을 보전하였다. [※⑪]

(경원) 4년(=263년) 가을, 제군(諸軍)에 촉을 정벌하라는 조령을 내리고 대장군(大將軍) 사마문왕(司馬文王)(→사마소司馬昭)이 모두 절도(節度,명령)를 지수(指授,지시)하니, (등)애에게는 (강)유와 더불어 서로 철련(綴連,붙어서 막음.견제한다는 뜻)하도록 하고 옹주자사(雍州刺史) 제갈서(諸葛緒)는 (강)유를 차단해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등)애는 천수태수(天水太守) 왕기(王頎) 등을 보내 (강)유의 군영을 직공(直攻)하게 하고 농서태수(隴西太守) 견홍(牽弘) 등은 그의 앞을 차단하도록 하고 금성태수(金城太守) 양흔(楊欣) 등은 감송(甘松)으로 향하게 하였다. (강)유는 종회(鍾會)의 제군(諸軍)이 이미 한중(漢中)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을 이끌고 퇴환(退還)하였다. (양)흔 등이 뒤를 쫓아 강천구(彊川口)[※⑫]에 이르러 크게 싸운 뒤 (강)유가 패주(敗走)하였고 옹주(자사 제갈서)가 이미 길을 막고 교두(橋頭)[※⑬]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공함곡(孔函谷)[※⑭]을 따라 북쪽 길로 들어가 옹주(자사 제갈서)의 뒤로 출군하려고 하였다. 제갈서(諸葛緒)가 이를 듣고 물러나 30리를 되돌아갔다. (강)유는 북쪽 길로 들어가 30여 리를 가다가 (제갈)서의 군이 물러났다는 말을 듣고는 곧이어 되돌아가 교두(橋頭)를 통과하니 (제갈)서가 급히 달려가 (강)유를 차단하려 했으나 약 하루 차이로 미치지 못하였다. (강)유는 이에 동쪽으로 물러나서 검각(劍閣)으로 돌아가 수비하였다. 종회(鍾會)가 (강)유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등)애가 상언(上言)했다,

“지금 적이 최절(摧折,좌절)하였으니 의당 승세를 타야 합니다. (만약) 음평(陰平)으로부터 사경(邪徑,좁은길)을 따라 한(漢)의 덕양정(德陽亭)을 경유해 부(涪)로 달려가 검각(劍閣)에서 서쪽으로 백리[※⑮] 떨어진 곳으로 출군한다면 이는 성도(成都)로부터는 3백여 리 떨어진 곳으로 기병(奇兵)으로 그 복심(腹心,배와 심장 ; 중요한 곳을 비유)을 치는 것이라 검각의 수비군은 필시 부(涪)로 돌아갈 것이니 (종)회는 방궤(方軌,평탄한 도로)를 따라 진격하면 됩니다. 만약 검각의 군(軍)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곧 부(涪)에 접응하는 병력이 적을 것입니다. 군지(軍志,군에 관한 기록, 곧 병서兵書라는 뜻으로 쓴 듯)에 ‘적이 방비하지 않는 곳을 공격하고(攻其無備) 적이 헤아리지 못한 곳으로 출병한다(出其不意)’라고 하였는데 이제 그 공허(空虛)한 곳을 엄습하는 것이니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①] 제왕(齊王) 조방(曹芳)이 사마사에 의해 폐위된 뒤 고귀향공(高貴鄕公) 조모(曹髦)가 황제로 즉위한 것은 254년(정원正元 원년) 10월 ; 관구검의 반란은 255년(정원 2년) 1월

[※②] 文欽以後大軍破敗於城下 (문흠이후대군파패어성하) – 이 글만으로는 어떻게 풀이할지 애매한데, 後를 ‘뒤에 도착하였다’는 뜻으로 파악한 삼국지집해의 설 (後謂後至也 / 삼국지집해) 및 같은 사건을 기록한 관구검전의 표현(大將軍遣兗州刺史鄧艾督泰山諸軍萬餘人至樂嘉,示弱以誘之,大將軍尋自洙至.欽不知,果夜來欲襲艾等,會明,見大軍兵馬盛,乃引還. / 관구검전) 등을 참고해 위와 같이 풀었습니다.

[※③] 肥陽(비양) / 삼국지집해 – “사종영(謝鍾英)은 ‘비양(肥陽)은 곧 비수(肥水)의 북쪽인 것으로 보인다. (*陽에는 ‘강의 북쪽’이란 뜻이 있음) 지금의 수주(壽州) 남쪽에 있는 작피(勺陂)의 북쪽이다.’라고 하였다”(謝鍾英曰 肥陽疑卽肥水之北 今壽州南勺陂北.)

[※④] 移屯附亭(이둔부정) / 삼국지집해 – “모본(毛本)에서는 移(이)를 以(이)로 적었다. 관본고증(官本攷證)에서 ‘附亭(부정)을 원본(元本)에서는 陽亭(양정)으로 적었다.’라고 하였다. 조일청(趙一淸)은 부정(附亭)이 곧 여장정(黎漿亭)이다. 附(부)는 近(근)으로 이 (여장)정 가까이로 옮겨 주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종영(謝鍾英)은 ‘부정(附亭)은 여장(黎漿)과 서로 가까웠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장정(黎漿亭)은 제갈탄전(諸葛誕傳)에 보인다.” (毛本移作以 官本攷證曰 附亭 元本作陽亭 趙一淸曰 附亭卽黎漿亭也 附近也 移屯近此亭也 謝鍾英曰:附亭當與黎漿相近 黎漿亭見諸葛誕傳.) / 중화서국본 표점과 삼국지사전, 중국역사지도집에서는 모두 ‘부정附亭’ 자체를 별개의 지명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附亭은 취락의 명칭으로, 옛 터가 지금의 안휘성 수현(壽縣)의 서남쪽 10km 되는 곳에 있다.’ / 삼국지사전) 참고로 제갈탄전에 나오는 것은 黎漿亭(여장정)이 아니라 黎漿水(여장수)인데, 이 黎漿水를 삼국지사전에서는 ‘강 이름으로, 옛날의 작피芍陂(지금의 안휘성 東湖와 瓦埠湖 사이)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흘러 비수(肥水)로 유입되었다. 주이(朱異)가 일찍이 이 강을 건너 위군을 맞아 싸운 적이 있다.’라 해설하고, 黎漿은 지명(안휘성 수현 남쪽. 그 용례로 바로 이 등애전의 제갈서 운운하는 대목을 예시) 또는 강 이름(앞과 同)으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⑤] 낙가전투로 관구검군이 붕괴한 뒤 제갈탄이 안풍진(수춘의 서남쪽 방향)을 건너 관구검의 본거지인 수춘을 점거하였는데 이무렵 오나라 손준이 관구검의 반란을 틈타 출병해 수춘에 도착했다가 제갈탄군이 선점한 것을 보고 퇴각하였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이때의 일입니다.

[※⑥]「삼국지」삼소제기 (정원 2년 8월) (정원 2년=255년 8월) 신미일(22일), 장수교위 등애를 행 안서장군으로 삼아 정서장군 진태(陳泰)와 힘을 합쳐 (강)유를 막도록 하였다.

[※⑦] 五兵(오병) – ‘다섯가지 병기’라는 뜻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시대나 논자에 따라 매우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안사고(한서 오구수왕전吾丘壽王 주석)는 모(矛), 극(戟), 궁(弓), 검(劍), 과(戈) ;「한관의漢官儀」(속한서 백관지 注引)에서는 궁노(弓弩), 극(戟), 순(楯,방패), 도검(刀劍), 갑개(甲鎧,갑옷)로 보았습니다. ‘각종 주요 병기’라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여기 등애전에서는 이 경우인 듯 합니다.

[※⑧] 강유의 기산출병과 단곡전투는 256년(위 고귀향공 감로 원년)의 일

[※⑨] 鄧侯(등후) - 등현(鄧縣)의 현후(縣侯)라는 뜻입니다. 등현은 후한서 군국지 상으로는 형주 남양군 소속이고 진서 지리지 상으로는 의양군 소속입니다. 진서 지리지 서두에서 위문제(조비)가 새로 설치한 군(郡) 중에 의양이 언급되고 실제 삼국지에서도 조비나 조예 대에 군국(郡國)의 명칭으로서 의양이 나타나는걸 볼 때(삼국지 명제기 경초원년 12월 조 分襄陽郡之鄀葉縣屬義陽郡 ; 삼국지 무문세왕공전 彭城王據, 建安十六年封範陽侯. 二十二年, 徙封宛侯. 黃初二年, 進爵爲公. 三年, 爲章陵王, 其年徙封義陽.) 위나라 초에 이미 남양군 남쪽을 갈라서 의양군을 신설하였고 등애가 등후로 봉해지던 당시에 등현은 의양군 소속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⑩]「삼국지」삼소제기 (고귀향공 감로원년=256년 가을 7월) 계미일(9일), 안서장군(安西將軍) 등애(鄧艾)가 촉(蜀)의 대장(大將) 강유(姜維)를 상규(上邽)에서 대파하니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병(兵)이 아직 극무(極武,무력을 남용함)하지 않았는데도 추로(醜虜,더러운 적)를 최파(摧破,격파)하고 적의 수급을 베거나 산 포로를 잡은 것이 걸핏하면 만(萬)으로 헤아리니 자경(自頃,근래)에 전극(戰克)함에 이러한 적이 없었다. 이제 사자를 보내 장사(將士)들을 호사(犒賜,호궤하고 포상함)하도록 하니 크게 잔치를 열어 몸소 참석하고 하루종일 음연(飮宴,실컷 먹고 마심)함으로써 짐의 뜻에 부합하도록 하라.”

[※⑪]「삼국지」삼소제기 (진류왕 경원3년=262년) 겨울 10월, 촉(蜀)의 대장(大將) 강유(姜維)가 조양(洮陽)을 침범하자 진서장군(鎭西將軍) 등애(鄧艾)가 이를 막았고 후화(侯和)에서 (강)유를 격파하니 (강)유가 둔주(遁走,도주)하였다.

[※⑫] 彊川口(강천구) / 삼국지집해 – “호삼성(胡三省)은 ‘강천구(彊川口)는 강대산(嵹臺山) 남쪽에 있었다. 강대산(嵹臺山)은 곧 임조(臨洮)의 서경산(西傾山)이다. 감인(闞駰)은 강수(彊水)가 음평(陰平) 서북쪽의 강산(彊山)에서 나오며 (강수를) 강천(彊川)으로도 부르는데 강유(姜維)가 돌아갈 때 등애(鄧艾)가 왕기(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여 강구(彊口)에서 패주시킨 곳이 바로 이 땅이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오희재(吳熙載)는 ‘강천(彊川)은 지금의 상초하(祥楚河)로 곧 백수(白水)의 근원이다.’라고 하였다. 사종영(謝鍾英)은 ‘강천(彊川)은 옛 조주(洮洲) 서남쪽의 서경산(西傾山)에 있었고 화석특(和碩特,호쇼트) 전두기(前頭旗)의 동쪽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 삼국지사전에서는 강천(彊川) 항목에서 ‘강 이름으로 다른 이름은 강수(强水)[=彊水]다. 강산(强山)(지금의 감숙성 珉縣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옛 조수(洮水)로 유입되었다. (입구入口는 지금의 감숙성 臨潭 서쪽)’이라고 하고 강천구(彊川口) 항목에서 ‘지명으로 곧 강천지구(彊川之口,강천이 (조수洮水로 유입되는) 입구)의 줄임말이다. 지금의 감숙성 臨潭 서쪽에 있었고 강유가 일찍이 위군에게 추격당하다 이곳에서 패하였다.’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역사지도집 및 삼국지사전에서 비정하는 바에 따르면 강천구는 답중(沓中), 감송(甘松)의 서북쪽 또는 북쪽에 해당하므로 여기 등애전이나 강유전 등에 기술된 당시 상황과 딱 들어맞지가 않습니다. (강유가 퇴환하다가 싸운 곳이 답중의 서북쪽?) 이 지명 비정들에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거나, 아니면 강유가 답중에 쭉 머물며 등애군을 맞이한게 아니라 위군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포착한 뒤에 답중으로부터 북진해서 등애군을 요격하기 위해 조서 방면으로 출진했던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왕기는 정면으로 강유군을 직공, 견홍은 강유군의 예상 진격로를 차단, 양흔은 감송 쪽으로 향하면서 강유군의 뒤를 끊으려는 움직임. 그러다 종회의 대군이 이미 한중지역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서둘러 남쪽 방면으로 퇴환하며, 선박을 이용해 조수-강수(강천)를 거쳐 백수를 타고 내려가려다 강천구에서 양흔 등과 조우해 전투?)

[※⑬] 橋頭(교두) / 삼국지집해 – “촉지(蜀志) 강유전(姜維傳)에서 (강)유가 후주에게 표문을 올려 의당 장익(張翼)과 요화(廖化)를 아울러 보내 제군(諸軍)을 감독하여 양안관구(陽安關口)와 음평교두(陰平橋頭)를 나누어 지키게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음평교두의 교두가) 곧 이 곳을 가리킨다. 수경(水經) 양수 주(漾水注)에 따르면 백수(白水)는 임조현(臨洮縣) 서남쪽의 서경산(西傾山)에서 나오고 동남쪽으로 흐르다 음평도(陰平道)의 옛 성 남쪽을 지나고 또한 동북쪽으로 흐르다 교두(橋頭)를 지나는데 옛날에 강유(姜維)가 장차 촉으로 돌아가려 할때에 옹주자사(雍州刺史) 제갈서(諸葛緒)가 이곳에서 차단했으나 늦어져서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강)유가 검각을 보전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종회(鐘會)가 (검각을 거쳐 촉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하였다. 두우(杜佑)는 ‘음평교두(陰平橋頭)는 문주(文州)의 경계에 있다.’라고 하였다. 통지(通志)에서는 ‘교두(橋頭)는 문현(文縣)의 동남쪽 1리 되는 곳에 있다. 백수(白水)의 급류 가운데에 돌로 된 길이 2개 있어 돌을 따라 기둥을 세우고 다리(橋)를 만드니 길이가 20여 장(丈)이다.’라고 하였다. 오희재(吳熙載)는 ‘교두(橋頭)는 지금의 감숙 계주(階州) 문현(文縣) 남쪽의 백수(白水) 가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⑭] 孔函谷(공함곡) / 삼국지사전 – “산골짜기의 이름이다. 지금의 감숙성 舟曲 동남쪽 20km 되는 지점으로 白龍江 중류의 기슭이다. 삼국 촉한 경요(258-263년) 말에 강유가 종회가 이미 한중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답중(지금의 舟曲 서북쪽)으로부터 군을 이끌고 퇴각하다가 제갈서가 교두에 주둔하며 길을 막았다는 말을 듣고 공함곡을 따라 북쪽 길로 들어가 제갈서를 뒤로 출군하려 하였는데 바로 이곳이다.”

[※⑮] 百里 / 삼국지집해 – “百里(백리)를 태평어람에서는 四百里(사백리)로 적었다.” (百里御覽作四百里)

cf.「진서晉書」권2 문제기(文帝紀)

(경원 4년=263년) 여름, (문)제(文帝)(→사마소司馬昭)가 장차 촉을 치려고 하니 이에 뭇 신료들과 모의하였다, “수춘(壽春)(에서 제갈탄)을 평정한 이래 6년 동안 전쟁을 쉬고 치병(治兵,훈련) 선갑(繕甲,병기를 수선함)하며 2로(虜)(→촉,오)를 견주어보았소. 오를 취하는 것을 대략 헤아려본다면 전선(戰船)을 만들고 물길을 통하게 해야 하니 천여 만(千餘萬)의 공력을 써야 하는데 이는 10만 명의 백 수십일 동안의 일이오. 또한 남쪽 땅은 지세가 낮고 습기가 많아 필시 질역(疾疫,역병)이 생길 것이오. 지금 의당 먼저 촉을 취하고 3년 뒤에 파촉의 (장강 물길의) 순류(順流)의 기세를 이용하여 수륙으로 병진한다면 이는 바로 (춘추시대에) 우(虞)를 멸하고 괵(虢)을 평정하고 (전국시대에) 한(韓)을 삼키고 위(魏)를 병탄한 세(勢)와 같소. 촉(蜀)의 전사(戰士)를 헤아려보면 9만 명인데 성도(成都)를 거수(居守,그곳에 머물면서 지킴)하고 다른 군(郡)을 방비하는 군사가 4만 아래는 아닐 것이므로 남은 군사는 5만을 넘지 않을 것이오. 지금 강유(姜維)를 답중(沓中)에 묶어두어 동쪽을 돌아보지 못하게 한 채(→한중의 촉군과 접응하지 못하도록 하고는) 곧장 낙곡(駱谷)으로 향하여 그들의 공허한 땅으로 출병함으로써 한중(漢中)을 습격해야 하오. 저들이 만약 성을 둘러싸고 수험(守險,험한 곳을 수비함)한다면 병세(兵勢)가 필시 분산되고 머리와 꼬리가 끊어질 것이오. 대중(大衆,대군大軍)으로 성을 도륙하고 예졸(銳卒,정예한 군사)을 풀어 (성 바깥의) 들을 약탈한다면 검각(劍閣)은 수험(守險)할 겨를이 없고 관두(關頭)는 자존(自存)할 수 없을 것이오. 유선(劉禪)이 우매한데다 바깥으로 변경의 성들이 격파된다면 안에서는 사녀(士女,백성)들이 진동할 것이니 그 나라가 망할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소.” 정서장군(征西將軍) 등애(鄧艾)는 (촉한에) 아직 틈이 없다며 여러 차례 이의(異議)를 진술하였다. (문)제가 이를 우려하여 주부(主簿) 사찬(師纂)을 (등)애의 사마(司馬)로 삼고는 그를 효유하니 (등)애가 명을 받들었다. 이에 사방의 병사 18만을 징발하고 등애(鄧艾)에게 적도(狄道)로부터 답중(沓中)에서 강유(姜維)를 공격하도록 하고 옹주자사(雍州剌史) 제갈서(諸葛緒)는 기산(祁山)으로부터 (진군해) 무가(武街)에 주둔하여 (강)유의 귀로를 끊게 하고 진서장군(鎭西將軍) 종회(鍾會)는 전장군(前將軍) 이보(李輔), 정촉호군(征蜀護軍) 호열(胡烈) 등을 통수하여 낙곡(駱谷)으로부터 한중(漢中)을 습격하도록 하였다. 가을 8월, 군이 낙양(洛陽)을 출발하니 장사(將士,장졸)들을 대뢰(大賚,후하게 상을 내림)할 것이라고 진사(陳師,군대를 정렬시킴)한 채 군사들에게 맹세했다. 장군(將軍) 등돈(鄧敦)이 촉을 아직 칠 수 없다고 말하자 (문)제가 그를 베어죽이고 (그 수급을) 조리돌렸다. 9월, 또한 천수태수(天水太守) 왕기(王頎)에게 (강)유의 군영을 공격하게 하고 농서태수(隴西太守) 견홍(牽弘)에게는 그의 앞의 차단하게 하고 금성태수(金城太守) 양흔(楊欣)에게는 감송(甘松)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종회(鍾會)는 (자신이 거느리는 군을) 2대(隊)로 나누고 야곡(斜谷)으로부터 들어가서는 이보(李輔)에게 낙성(樂城)에서 왕함(王含)을 포위하게 하고 부장(部將) 역개(易愷)에게는 한성(漢城)에서 장빈(蔣斌)을 공격하게 하였다. (종)회는 곧장 양안(陽安)으로 향하니 호군(護軍) 호열(胡烈)이 관성(關城)을 공격해서 함락했다. 강유(姜維)가 이를 듣고 군을 이끌고 돌아오니 왕기(王頎)가 추격하여 강천(彊川)에서 (강)유를 격파하였다. (강)유는 장익(張翼), 요화(廖化)와 군을 합쳐 검각(劍閣)을 지키고 종회(鍾會)가 이를 공격하였다. …(중략: 10월에 사마소가 진공晉公에 책봉)… 11월, 등애(鄧艾)가 만여 명을 통수해 음평(陰平)으로부터 절험한 곳을 건너 강유(江由)에 도착하고 촉장 제갈첨(諸葛瞻)을 면죽(緜竹)에서 격파하고 (제갈)첨을 베어 그 수급을 (경도로) 보냈다. 낙현(雒縣)으로 진군하니 유선(劉禪)이 항복하였다. 천자가 진공(晉公)(→사마소)에게 명해 상국(相國)으로 백규(百揆,백관百官)를 총괄하게 하니 이에 (문제가) 절전(節傳,진서사전과 zdic한전에서는 주례의 정현 주석을 근거로 ‘새절璽節과 전신傳言’으로 풀이하고 삼국지사전에서는 한서 문제기의 장안 주석을 근거로 ‘부신符信’으로 풀이했는데 후자가 맞는 듯)을 (반납하여) 올리고 시중(侍中), 대도독(大都督), 녹상서(錄尙書)의 호칭을 없앴다. 표문을 올려 등애(鄧艾)를 태위(太尉)로 삼고 종회(鍾會)를 사도(司徒)로 삼았다. (종)회가 몰래 반역을 꾀하니 이로 인해 은밀히 사자를 보내 (등)애를 참소하였다. 함희(咸熙) 원년(=264년) 봄 정월, 함거(檻車)로써 (등)애를 소환하였다. 을축일(4일), (문)제가 천자를 받들고 서정(西征)하여 장안(長安)에 주둔하였다. 당시 위(魏)의 여러 왕후(王侯)들은 모두 업성(鄴城)에 있었는데 종사중랑(從事中郞) 산도(山濤)에게 명하여 행군사마(行軍司事)로 업(鄴)을 진수하게 하고 호군(護軍) 가충(賈充)을 보내 지절(持節) 독제군(督諸軍)으로 한중(漢中)을 점거하게 하였다. 종회(鍾會)가 마침내 촉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감군(監軍) 위관(衞瓘), 우장군(右將軍) 호열(胡烈)이 (종)회를 공격하여 그를 베어죽였다. 당초 (종)회가 촉을 정벌할 때 서조속(西曹屬) 소제(邵悌)가 (문)제에게 말했다, “종회는 믿기 어려우니 그를 보내서는 안됩니다.” (문)제가 웃으며 말했다, “촉을 취하는 것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쉬운데 뭇 사람들이 모두 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오직 (종)회만이 나와 더불어 얘기해보니 그 뜻이 같았소. 촉을 멸한 뒤에는 중국(中國)(→위나라)의 장사(將士)들은 저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것이고 촉의 유려(遺黎,남은 백성,유민)들은 오히려 진공(震恐,두려움)을 품을 것이니 설령 (종회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오.” 결국 (문제가) 헤아린 바와 같았다.

겨울 10월, (등)애가 음평(陰平)으로부터 무인지경의 700여 리 길을 가며 산을 뚫고 길을 열며 교각(橋閣,잔도棧道)을 만들었다. [※①]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지극히 난험(艱險,험난)하였는데 또한 운반해온 양식이 장차 떨어지려 하고 자주(頻)[※②]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등)애는 전(氊,모전毛氈,펠트)으로 스스로를 감싸고는 몸을 굴려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장사(將士,장졸)들이 모두 나무를 붙잡고 벼랑을 따라가며 생선이 꿰어져 있듯 (한 줄로 줄지어) 진군하였다. [※③]

선등(先登,선두,선봉)이 강유(江由)에 이르자 촉(蜀)의 수장(守將,수비하는 장수) 마막(馬邈)이 항복하였다. 촉(蜀)의 위장군(衞將軍) 제갈첨(諸葛瞻)이 부(涪)로부터 면죽(緜竹)으로 돌아가 진(陳)을 벌여세우고 (등)애를 기다렸다. (등)애는 아들인 혜당정후(惠唐亭侯) (등)충(鄧忠) 등을 보내 그의 오른쪽으로 출군하게 하고 사마(司馬) 사찬(師纂) 등은 그의 왼쪽으로 출군하게 하였다. (등)충과 (사)찬이 싸워 불리하자 아울러 퇴환하고는 말했다,

“적이 (강하여) 가히 공격할 수 없습니다.”

(등)애가 노하여 말했다,

“존망(存亡)의 구별이 이 일거(一擧)에 달려있는데 어찌 불가(不可)함이 있겠는가?”

이에 (등)충과 (사)찬 등을 꾸짖으며 장차 그들을 베어죽이려 하였다. (등)충과 (사)찬이 급히 되돌아가서 다시 싸워 적을 대파하고 (제갈)첨 및 상서(尙書) 장준(張遵) 등의 수급을 베었고, 진군하여 낙(雒)에 이르렀다. 유선(劉禪)이 사자를 보내 황제(皇帝)의 새수(璽綬,옥새와 인끈)를 받들게 하고는 전(箋,글,서신)을 지어 (등)애에게 가서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①] 호삼성 주석 (자치통감 권78) – “지금의 융경부(隆慶府) 음평현(陰平縣) 북쪽 60리 되는 곳에 마각산(馬閣山)이 있는데 (산세가) 매우 높고 험하여 극도로 간험(艱險,곤란하고 위험함)하다. 등애군(鄧艾軍)이 행군하여 이곳에 이르러 길이 통하지 않으므로 이에 현거속마(懸車束馬)하며 잔각(棧閣,잔도)을 만들고 비로소 강유(江油)로 통하였으니 이로 인해 마각(馬閣)이라 불리었다. 또한 문주(文州)의 청당령(靑塘嶺)(→등애 당시 음평 부근)으로부터 용주(龍州)(→등애 당시 강유江油 부근)에 이르기까지 150리 길이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갈 때에 (그 지세로 인해) 오른쪽 어깨로는 쉽게 짐을 짊어질 수가 없으므로 이를 좌담로(左擔路,左擔은 ‘왼쪽으로 짐을 짊어진다’는 뜻)라 불렀는데 또한 (등)애가 촉을 정벌한 길이다. 종회전에 따르면 (등)애는 한(漢)의 덕양정(德陽亭)으로부터 강유(江油) 좌담도(左擔道)로 들어갔다 하였으니 곧 덕양정(德陽亭)도 아마 마각산(馬閣山)의 길에 면해있었을 것이다.” (今隆慶府陰平縣北六十里有馬閣山 峻峭崚嶒 極爲艱險. 鄧艾軍行至此 路不得通 乃懸車束馬 造作棧閣 始通江油 因名馬閣. 又自文州靑塘嶺至龍州百五十里 自北而南者 右肩不得易所負 謂之左擔路 亦艾伐蜀路也. 據鍾會傳 艾自漢德陽亭入江油左擔道 則德陽亭蓋當馬閣山之路.)

[※②] 頻(빈) - 자치통감에는 瀕(빈)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풀면 “운반해온 양식이 장차 떨어지려 하여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가 되는데 이쪽이 더 자연스러운 듯 합니다.

[※③] 호삼성 주석 – “산의 절벽이 험하고 좁아 한 줄로 서로 이어지며 나아가니 (그 모습이) 생선을 꿰어놓은 것과 같았다.”

(등)애가 성도(成都)에 도착하자 (유)선이 태자(太子)와 여러 왕(王)들 및 뭇 신하 60여 명을 이끌고 면박여츤(面縛輿櫬)[※①]하여 (등애의) 군문(軍門)으로 나아갔다. (등)애가 부절을 지닌 채 묶은 것을 풀어주고 관을 불사르고 (항복을) 받아들이고 용서해주었다. 장사(將士)들을 검어(檢御,단속)하여 노략질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항부(降附,항복,귀부)한 이들을 수납(綏納,위무하며 맞아들임)하며 본래의 업(業)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니 촉인(蜀人)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그리고는 등우(鄧禹)의 고사(故事,전례)에 따라 승제(承制,관작봉배 따위를 편의에 따라 임의로 하는 것)하여 (유)선을 행(行) 표기장군(驃騎將軍), 태자(太子)를 봉거(奉車)(도위), 여러 왕들을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임명하였다. 촉(蜀)의 뭇 사(司,관서,관리)들은 높고 낮음에 따라 (황제가 아닌) 왕(王) 아래의 관직으로 (낮춰서) 임명하였고 때로 (등)애의 관속(官屬)을 겸하기도 하였다. 사찬(師纂)을 영(領)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삼고 농서태수(隴西太守) 견홍(牽弘) 등은 촉(蜀) 중의 여러 군(郡) (태수를) 겸하게(領) 하였다. 사람을 보내 면죽(緜竹)에 대(臺)를 쌓고 경관(京觀)을 만들어 전공(戰功)을 드러내었다. (위나라의) 사졸(士卒) 중에 죽은 자들을 모두 촉병(蜀兵)과 함께 매장하였다. (등)애는 몹시 스스로 긍벌(矜伐,공로를 뽐냄)하니 촉(蜀)의 사대부(士大夫)들에게 말했다,

“제군(諸君,여러분)들은 모(某,자기자신을 가리키는 겸칭)를 만난 덕분으로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후한 광무제 때의) 오한(吳漢)과 같은 부류를 만났다면 이미 진멸(殄滅,멸절)되었을 것입니다.” [※②]

또 말했다,

“강유(姜維)는 본래 일시(一時,당대)의 웅아(雄兒,뛰어난 남아)인데 (하필) 모(某)와 서로 만났기 때문에 궁지에 몰린 것 뿐입니다.”

식견이 있는 자들이 이를 비웃었다.


[※①] 面縛輿櫬 (면박여츤) – 면박(面縛)은 두예(杜預)의 설에 따라(面縛 縛手於後 唯見其面也.) ‘얼굴을 보이고 상대를 향한 채 손을 뒤로 묶는 것’으로 보는게 일반적이고(호삼성, 사마정, 현대의 각종 자전) 여츤(輿櫬)은 ‘수레에 관을 싣는다’는 말입니다. 적에게 저항을 포기한다는 의사를 표시하며 항복을 청하는 고대의 의식입니다. 한편 면박(面縛)에 관하여 이와 정반대로 ‘상대를 등진 채 손을 묶는 것’으로 보는 안사고(顔師古)의 설도 있고(面縛亦謂反偝而縛之. 杜元凱(→두예)以爲但見其面 非也.) 삼국지집해에서 노필은 이 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삼국지사전에서는 面=首로 보아 목이나 머리를 묶는 것으로 보았음.) 그러나 설령 안사고의 설이 이 고대의식의 원형에 관한 더 정확한 해석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촉한의 항복 무렵 당대인들의 인식이나 실제 행해진 의식에 관하여는 동시대인인 두예의 설대로 보는게 더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②] 삼국지집해 – “오한(吳漢)이 성도(成都)를 격파하고서 공손술(公孫述)의 처자식을 죽이고 군사를 풀어 대대적으로 약탈하며 (공손)술의 궁실을 불태웠다. (吳漢破成都 夷公孫述妻子 放兵大掠 焚述宮室.)


12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등)애가 요위(曜威,위엄을 빛냄) 분무(奮武,무를 떨침)하여 노(虜,적 또는 오랑캐)의 정(庭)(→촉한의 중심인 성도)으로 깊이 들어가서는 (적의) 장수를 베고 깃발을 뽑아버리고 그 경예(鯨鯢,고래의 암컷과 수컷. ‘흉악한 적’을 비유함)를 효수함으로써 참호(僭號,황제를 참칭함)한 군주로 하여금 머리를 조아리고 계경(係頸,목에 밧줄을 묶음.항복을 뜻하는 표현)하게 하니 역세(歷世,누대累代)의 포주(逋誅,주벌을 피해 달아남)(한 죄인)이 하루 아침에 평정되었다. 용병(兵)이 한 계절을 넘지 않고 싸움(戰)은 하루가 걸리지 않아 운철석권(雲徹席卷,구름을 없애고 자리를 말아올림)하듯 파촉(巴蜀)을 탕정(蕩定,평정)하였다. 비록 (전국시대 秦나라의) 백기(白起)가 강력한 초(楚)나라를 격파하고 (한고조 때의) 한신(韓信)이 굳센 조(趙)나라를 이기고 (후한 광무제 때의) 오한(吳漢)이 자양(子陽)(→공손술公孫述의 字가 子陽)을 무찌르고 (전한의) (주)아부(周亞夫)가 7국을 멸하였으나 공을 헤아리고 아름다움을 논하면 이 (등애의) 공훈에 비하기에는 부족하다. 이제 (등)애를 태위(太尉)로 임명하고 식읍을 늘려 2만 호로 하며 그의 아들 2명을 정후(亭侯)로 봉해 각각 식읍을 1천 호로 한다.” [一]

(등)애가 사마문왕(司馬文王)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용병(兵)에는 ‘성(聲,성세聲勢)을 먼저 하고 실(實,실제 군사행동)을 뒤에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先聲而後實)[※①] 이제 촉(蜀)을 평정한 기세를 타고 오(吳)를 노린다면 오인(吳人)들이 진공(震恐,떨면서 두려워함)할 것이니 석권(席卷)할 수 있는 (좋은) 때입니다. 그러나 대거(大擧,대규모의 거행) 뒤라 장사(將士)들이 피로(疲勞)하여 곧바로 부릴 수 없으니 잠시 서완(徐緩,늦춤,지연시킴)해야 합니다. 농우병(隴右兵) 2만 명과 촉병(蜀兵) 2만 명을 남겨두고 소금을 만들고 대장간일(冶)을 흥하게 하여 군대와 농사를 위하여 요긴하게 사용하고 [※②] 아울러 배를 만들어 (장강의) 순류(順流)를 타고 내려갈 일에 미리 [대비하고는] [※③] 그 연후에 사자를 보내 이해(利害)로써 고하면 오(吳)는 반드시 귀화(歸化)할 것이니 정벌하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의당 유선(劉禪)을 후대함으로써 손휴(孫休)를 (유인하여) 부르고 (촉의) 사민(士民)들을 안무함으로써 멀리 있는 사람들(→오나라 사민들)이 오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곧장 (유)선을 경도(京都)로 보낸다면 오(吳)는 이를 유사(流徙,유배,귀양)로 여길 것이니 곧 향화(向化,귀화)하려는 마음을 권할 수 없게 됩니다. 의당 (경도로 보내지 말고) 임시로 머물게 하며 내년 가을 겨울까지 기다린다면 그때 쯤이면 오(吳) 또한 족히 평정될 것입니다. (유)선을 부풍왕(扶風王)으로 봉하여 그에게 자재(資財,금전과 물자)를 내리고 좌우(左右,주변사람)를 대어주고, (부풍)군(扶風郡)에 동탁(董卓)의 오(塢)가 있으니 [※④] 이를 (유선의) 궁사(宮舍,궁실)로 삼고 그의 아들에게 작위를 내려 공(公)이나 후(侯)으로 삼아 (부풍)군 안의 현(縣)을 식읍으로 줌으로써 귀명(歸命,귀순)한 이가 누리는 총애를 분명히 드러내십시오. 광릉(廣陵)과 성양(城陽)을 열어 오인(吳人)들을 기다린다면 [※⑤] 외위회덕(畏威懷德,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그리워함)하여 망풍(望風,명망을 듣고 우러러봄)하며 따를 것입니다.”

문왕(文王)이 감군(監軍) 위관(衞瓘)을 보내 (등)애에게 효유하였다,

“이 일은 응당 회답을 기다려야 하고 바로 시행해서는 안되오.”

(등)애가 다시 말했다,

“명을 받아 정행(征行,원정,출정)하고 지수(指授,지시)한 계책을 받들어 원악(元惡,악행의 주모자,원흉)(→유선)이 이미 항복하였습니다. (제가 임의로 관작을) 승제배가(承制拜假)한 것은 이로써 막 귀부한 이들을 안무하였으니 권의(權宜,그때그때 가변적인 상황에 따른 적합성)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촉(蜀)이 온 백성을 들어 귀명(歸命)하였는데 그 땅이 남해(南海)에 다다르고 동쪽으로는 오회(吳會)와 접하니 의당 조속히 진정(鎭定)시켜야 합니다. 만약 나라의 명(命)을 기다린다면 길을 왕복하다가 시간을 끌게 됩니다.「춘추春秋」의 의(義)에 따르면 ‘대부(大夫)가 국경을 나갔을 때는 사직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이롭게 할 수 있다면 독단으로 행하여도(專) 가하다.’고 하였습니다. [※⑥] 지금 오(吳)가 아직 복종하지 않고 있는데 그 지세가 촉(蜀)과 더불어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상규에 얽매어 사기(事機,일을 행할 적절한 시기)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병법(兵法)에서 나아가서는(進) 명성을 구하지 않고 물러나서는(退) 죄를 피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⑦] (저 등)애가 비록 옛사람의 절조는 없지만 스스로 (의심받을까봐) 꺼려서 나라에 손해를 끼치는 일은 끝내 없을 것입니다.”

종회(鍾會), 호열(胡烈), 사찬(師纂) 등이 모두 ‘(등)애가 한 짓이 패역(悖逆)하고 변흔(變釁,변란의 단서 또는 징조)이 이미 맺어졌다’(變釁以結)[※⑧]고 아뢰었다. 조서를 내려 함거(檻車,죄수 호송용 수레)로 (등)애를 소환하도록 하였다. [二]

[一]「원자袁子」에서「제갈량(諸葛亮)은 중인(重人)[※⑨]이나 촉병(蜀兵)을 자주 사용하였으니 이는 소국(小國) 약민(弱民)이 오래 존속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국가(國家)(→위나라)가 일거(一擧)에 촉(蜀)을 멸하니 정벌(征伐)의 공(功)이 이처럼 쾌속한 적은 아직 없었다. 바야흐로 등애(鄧艾)가 1만 명으로 강유(江由)의 위험한 곳으로 들어갈 때 종회(鍾會)는 20만 군사로 검각(劍閣)에서 머물며 진격하지 못하고 [※⑩] 삼군(三軍)의 군사들은 이미 굶주리고 있었으니 (등)애가 비록 전승(戰勝)하여 (적의?) 장수를 이겼으나 만일 유선(劉禪)이 며칠만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곧 두 장수(→종회와 등애)의 군(軍)은 돌아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업(功業)을 세우기가 이와 같이 어렵도다. 국가(國家)에 앞에 수춘(壽春)의 역(役,사건,전투)이 있고 뒤에 촉을 멸하는 공로가 있으니 백성들은 가난해지고 창름(倉稟,창고)이 비었다. 그러므로 소국(小國)이 염려할 것은 늘 공을 세워 자존(自存)하는 것인 반면에 대국(大國)이 염려할 것은 승리한 뒤에 역량이 고갈되는 것이니 성공(成功)한 뒤야말로 경계하고 두려워할 때로다.」라고 하였다.

[二]「위씨춘추魏氏春秋」에서「(등)애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며 말했다, “(나 등)애는 충신(忠臣)인데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秦나라 때) 백기(白起)가 혹독한 일을 당한 것을 오늘 다시 보게 되는구나.”」라고 하였다.

[※①] 先聲而後實(선성이후실) / 자치통감 호삼성 주석 – “한나라 초 이좌거(李左車)가 이 말을 하며 한신(韓信)을 설득하였다. 등애가 그 말을 본받아 진공(晉公)에게 말한 것이다.” (漢初李左車以是說韓信 艾祖其說以言於晉公.) / 원 출전은「사기」회음후열전으로 한신이 조나라를 격파한 뒤에 항복한 이좌거(광무군)가, 다음으로 연나라와 제나라를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에 관하여 한신에게 진언하는 말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좌거의 진언은 대략 ‘조나라를 공격하느라 지친 군사들을 이끌고 성급하게 공격해서는 안되고 군사들을 일단 쉬게 하며 재정비하고 점령한 조나라 백성들을 충분히 안무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 뒤에 사자를 보내 설득한다면 쉽게 항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게 바로 先聲而後實이다’라는 내용입니다. 등애 진언 중에서 오히려 ‘그러나’ 이후의 뒷구절과 서로 상통하는거 같아 위와 같이 끊어서 풀었습니다.

[※②] 煮鹽興冶 爲軍農要用(자염흥야 위군농요용) / 호삼성 주석 – “촉에는 염정(鹽井,소금기 있는 우물)이 있고 주제(朱提)에서는 은(銀)이 나오고 엄도(嚴道)와 공도(邛都)에서는 동(銅)이 나오고 무양(武陽), 남안(南安), 임공(臨邛), 면양(沔陽)에서는 모두 철(鐵)이 나와 한나라 때에 염관(鹽官)과 철관(鐵官)을 두었었는데 (등)애가 그 이익을 복구하고자 한 것이다.”

[※③] 豫順流之事(예순류지사) / 삼국지집해 – “원본(元本)에는 豫(예) 아래에 備(비)자가 있다.(*豫備順流之事) 자치통감에는 豫(예) 아래에 爲(위)자가 있다.(*豫爲順流之事)” (元本豫下有備字 通鑑豫下有爲字.)

[※④] 郡有董卓塢(군유동탁오) / 호삼성 주석 – “동탁(董卓)이 부풍(扶風) 미현(郿縣)에 오(塢)를 쌓았다.” (董卓築塢於扶風郿縣.)

[※⑤] 삼국지집해 – “호삼성(胡三省)은 ‘광릉(廣陵)과 성양(城陽)을 왕국(王國)으로 열어 손휴(孫休)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광릉(廣陵)은 서주(徐州)에 속하고 성양(城陽)은 청주(靑州)에 속했는데 아마도 위나라 때 광릉군(廣陵郡)의 치소는 회음(淮陰)의 옛 성이고 성양군(城陽郡)의 치소는 거(莒)였고 두 군(郡) 땅의 경계가 실제로 서로 접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노필이 안컨대 두 군이 실제로 접하지는 않아 호씨의 설이 잘못되었다. 사종영(謝鍾英)은 ‘오지(吳志) 서성전(徐盛傳)에 따르면 (서)성이 낭야 거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곧 거현(莒縣)은 응당 낭야에 속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호씨가 이를 성양군의 치소라고 한 것은 잘못되었다.”  /  중국역사지도집(위나라 청주, 서주 지도)에 따르면 광릉군과 성양군이 서로 접하지 않는 것은 맞는데 -비록 치소는 아니지만- ‘낭야국 거현’이 아닌 ‘성양군 거현’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진서 지리지에도 성양군 거현으로 되어있는데, 호삼성의 설명이나 역사지도집의 비정도 대개 여기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서성전에서 ‘낭야 거 사람’이라고 한 것은 서성이 비교적 초기 인물이니까 실제 출생한 시기를 바탕으로 하여 전승되던 그에 관련된 정보(서성은 어디 어디 출신)가 서성전에 그대로 수록된 것으로, 아마 후한 때 기준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⑥] 호삼성 주석 –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나오는 말이다.”

[※⑦] 삼국지집해 – “손자(孫子)가 이르기를 ‘장수의 지극한 임무이니 잘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서는 명성을 구하지 않고 물러나서는 죄를 피하지 않는다. 오로지 백성들을 보전하고 군주를 이롭게 하는 것을 추구하니 (이런 장수가) 나라의 보배이다.’라고 하였다.”

[※⑧] 變釁以結(변흔이결) / 삼국지집해 – “以와 已는 옛날에 서로 통하는 글자였다.” (以已古通)

[※⑨] 중인(重人) –「삼국지사전」에서는 重人을 ‘정권을 장악한 대신’으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문맥이나「원자」의 찬자인 원준(袁準)이 원래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는 점으로 볼 때 ‘신중한 사람’, ‘진중한 사람’ 정도의 뜻을 지닌 일종의 평가어일 가능성도 있는 듯 합니다.

[※⑩] 삼국지집해 – “이 몇마디 말을 볼 때, 촉을 평정한 것이 실제로는 (등)애 한 사람의 공이었고 당시에도 그러한 공론(公論)이 있었다.”


(등)애 부자(父子)가 갇힌 뒤에 종회(鍾會)가 성도(成都)로 가서는 먼저 (등)애를 (경도로) 압송한 뒤에 난을 일으켰다. (종)회가 죽은 뒤 (등)애 본영(本營)의 장사(將士)들이 뒤쫓아가서 (등)애를 함거에서 꺼내준 뒤 영접하여 돌아왔다. (위)관(衞瓘)이 전속(田續) 등을 보내 (등)애를 치게 하니 면죽(緜竹) 서쪽에서 만나 그를 베어죽였다. 아들 (등)충이 (등)애와 더불어 함께 죽었으며 낙양(洛陽)에 있던 나머지 아들들도 모두 주살되고 (등)애의 처자(妻子)와 손자를 서역(西域)으로 유배하였다. [※①] [一]

[一]「한진춘추漢晉春秋」에서「당초 (등)애가 강유(江由)를 내려갈 때 (전)속(田續)이 진격하지 않으므로 베려고 하다가 얼마 뒤에 그만둔 적이 있다. (위)관(衞瓘)이 (전)속을 보낼 때에 말했다, “강유(江由)에서의 모욕을 갚으시오.” 두예(杜預)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백옥(伯玉)이 화를 면치 못하겠구려! [※②] 몸은 명사(名士)이고 위망(位望,관위와 명망)이 이미 높은데 덕음(德音,미덕을 갖춘 착한 말)이 없으면서 또한 아랫사람을 정도(正道)로 다스리지 않으니 [※③] 이는 (주역에서 말하는) 소인(小人)이 군자의 기구(수레)(君子之器)에 올라타있는 격이라 장차 어찌 자신의 책무를 감당하겠소?” (위)관이 이를 듣고는 (타고 갈) 수레를 기다리지 않고 (두예에게로 가서) 사과했다.」라고 하였다.「세어世語」에서「사찬(師纂) 또한 (등)애와 함께 죽었다. (사)찬은 성정이 급하고 은혜로움이 적어 죽는 날에 (신체가 훼손되어) 몸에 성한 피부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①] 바로 앞에서 나머지 아들들을 다 주살했다 했으므로 여기 妻子 중의 子는 잘못 들어간 연자(衍字)로 보입니다.「삼국지집해」에서도 그렇게 보았으며「자치통감」권78의 해당대목에서도 子를 뺀 채 妻로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치통감에서 西域(서역)은 西城(서성)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②] 호삼성 주석 – “위관은 행(行) 진서군사(鎭西軍司)이고 두예(杜預)는 진서장사(鎭西長史)(→진서장군 종회의 장사長史) 였으므로 (둘은) 동료(同僚)였는데 군사(軍事)는 (위)관의 임무였다. (위)관의 자(字)가 백옥(伯玉)이다.”/「진서」위관전에 따르면 촉한 원정을 나설 당시에 위관은 ‘지절(持節) 감애회군사(監艾會軍事)(→등애,종회의 감군監軍) 행(行,대행의 의미) 진서군사(鎭西軍司)(→진서장군 종회의 군사軍司)’입니다.

[※③] 호삼성 주석 – “전속(田續)을 격동시켜 등애에게 보복하게 함으로써 그 사사로움을 행한 것을 가리킨다.”


당초 (등)애가 촉을 정벌하기로 되어 있었을 때 산 위에 앉아 있는데 흐르는 물이 있는 꿈을 꾸니 이에 관하여 진로호군(殄虜護軍) 원소(爰邵)에게 물었다. (원)소가 말했다,

“역(易)(→주역)의 궤(卦)에 따르면 산 위에 물이 있는 것을 건(蹇)이라 합니다. 건(蹇)의 주(繇,괘사卦辭)는 ‘건리서남(蹇利西南) 불리동북(不利東北)’입니다. (이를 풀이하여 건蹇의 단사彖辭에서) 공자(孔子)가 이르길, ‘건리서남(蹇利西南)은 가서 공을 세우는 것이고(往有功也) 불리동북(不利東北)은 그 길이 다하는 것(其道窮也)’이라 하였으니 가서 반드시 촉을 이길 것이나 다만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등)애가 무연(憮然,크게 낙심하여 허탈해함)하며 기뻐하지 않았다. [一]

 
[一] 순작(荀綽)의「기주기冀州記」에서「(원)소(爰邵)는 (군현의 하급관리인) 간리(幹吏)로부터 시작해 그 지위가 위위(衞尉)에 이르렀다. 장자(長子) (원)한(爰翰)은 하동태수(河東太守)를 지내고 중자(中子) (원)창(爰敞)은 대사농(大司農)을 지냈다. 소자(少子) (원)천(爰倩)은 자(字)가 군유(君幼)이고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여 기국(器局,기량;도량)이 있었고 당세(當世)(의 시무)에 부지런하여 기주자사(冀州刺史)와 태자우위솔(太子右衞率)을 역임하였다. (원)한의 아들 (원)유(爰俞)는 자(字)가 세도(世都)이고 청정(淸貞,맑고 곧음) 귀소(貴素,소박함을 귀히 여김?)하고 논의(論議)에 언변이 좋아 공손룡(公孫龍)의 말을 따와 미리(微理,미묘한 도리)를 담론하였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다는 명성이 있어 태위부(太尉府)에 벽소되고 점차 현위(顯位,높은 지위)를 거쳐 시중(侍中) 중서령(中書令)에 이르고 (중서)감(中書監)으로 올랐다.」라고 하였다. / 신 송지(松之)(→주석자인 배송지)가 보건대, 건(蹇)의 단사(彖辭)에서 건리서남(蹇利西南)은 왕득중야(往得中也)라고 하였지 ‘유공(有功)’이라 말하지는 않았고, 그 아래에서 ‘리견대인(利見大人)을 왕유공야(往有功也)라고 하였다.

 
(참고) 주역 蹇 (위키문고에서 인용)

水山蹇 坎上艮下

蹇:利西南,不利東北;利見大人,貞吉。

彖曰:蹇,難也,險在前也。 見險而能止,知矣哉!蹇利西南,往得中也;不利東北,其道窮也。 利見大人,往有功也。 當位貞吉,以正邦也。 蹇之時用大矣哉!

태시(泰始) 원년(元年)(=265년)에 진실(晉室,진나라 왕실)이 제위에 올라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예전에 태위(太尉) 왕릉(王淩)이 제왕(齊王)(→위나라 3대 황제 조방曹芳)을 폐위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제)왕은 끝내 족히 지위를 지킬만하지 못하였다. 정서장군(征西將軍) 등애(鄧艾)는 공을 뽐내고 절조를 잃었으니 실로 대벽(大辟,사형)에 처해 마땅하였다. 그러나 (체포하라는) 조서를 받은 날에 (그 휘하의) 많은 이들을 파견(罷遣,해산시키고 보냄)하고 (저항하지 않은 채) 속수(束手)하고 죄를 받았으니 살기를 원해 (죄를 회피하려는) 악행을 저지른 경우에 비교하면 실로 또한 서로 같지 않다. 이제 대사면령이 내려 (등애의 가족들이 경도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는데 만약 자손(子孫)이 없다면 (양자를 들여서라도) 후사를 세워 제사(祭祀)가 끊기지 않도록 허락한다.”

(태시) 3년(=267년), 의랑(議郞) 단작(段灼)이 상소(上疏)하여 (등)애를 변명하였다(理),

“(등)애의 심회(心懷,마음속의 생각)가 지극히 충성스러운데도 반역(反逆)했다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파촉(巴蜀)을 평정하고서도 이멸(夷滅,멸족)되는 주벌을 받았으니 신의 소견으로는 이를 슬픈 일로 여깁니다. 등애가 반역을 했다고 말하다니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등)애의 성정이 강급(剛急,강직하고 급함)하여 아속(雅俗,아인雅人과 속인俗人,뭇 사람)들을 경솔히 범하고 붕류(朋類,동료)들과 협동(協同)하지 못했으므로 아무도 그를 변명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이 감히 (등)애가 반역하지 않았다는 상(狀,정상情狀,정황)이 있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예전에 강유(姜維)에게 농우(隴右)를 끊을 뜻이 있자 (등)애가 (요새를) 수치(脩治,정비)하여 비수(備守,수비)하고 곡식을 쌓고 군대를 강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해에 흉한(凶旱,심한 가뭄)이 들자 (등)애는 구종(區種,일정한 구획을 정해 파종하던 당시의 농법.=구전區田)을 행하였는데 몸소 오의(烏衣,검은색의 옷으로 고대 빈천한 자의 복장을 가리킴)를 입고 손에는 뇌사(耒耜,농기구)를 들고 장사(將士,장졸)들을 인솔하니 위아래가 모두 감동하여 진력(盡力)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등)애는 부절을 지니고(持節) 변경을 수비하며 통수하는 군사가 만(萬)으로 헤아렸는데도 복로(僕虜,노복,종)나 사민(士民)의 노역(勞役)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절조를 지키며 충근(忠勤)한 이가 아니라면 누가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그러므로 낙문(落門)과 단곡(段谷) 전투에서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쳐서 강한 적을 최파(摧破,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선제(先帝)(→사마소)께서 그가 임무를 맡기에 적당하다는 것을 아셨으므로 (등)애에게 묘승(廟勝,조정에서 미리 정해놓은 적을 제압할 책략)을 맡기고 장책(長策,좋은 계책)을 주셨습니다. (등)애가 명을 받자 자기 몸을 잊고서 속마현거(束馬縣車,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함.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것을 묘사하는 수사적인 표현)하며 스스로 사지(死地)에 몸을 던지니 용기(勇氣)가 하늘을 찌르고(陵雲) 사중(士衆)들이 승세(乘勢,기세를 탐)하여 유선(劉禪)의 군신(君臣)으로 하여금 면박(面縛)한 채 차수(叉手,가슴 앞에서 두손을 맞잡아 공경함을 표하는 것)하며 굴슬(屈膝,무릎을 꿇음.굴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등)애의 공명(功名)이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이를 죽백(竹帛)에 적어 만세에 전함이 마땅합니다. 칠십(七十)의 노공(老公)[※①]이 도리어 무엇을 얻고자 했겠습니까! (등)애는 실로 (조정이) 양육(養育)해준 은혜를 믿고서 내심 스스로 의심하지 않고 교명(矯命,명을 받았다고 사칭함) 승제(承制)하여 임시로 사직(社稷)을 안정시켰습니다. 비록 상과(常科,통상적인 규정)를 위배하였으나 옛 뜻(古義)에 부합하는 점이 있으니 원심정죄(原心定罪,본심을 조사해 죄를 정함)하여 근본으로부터 (상세히) 논의해야 합니다. [※②] (실제 사건의 전말은) 종회(鍾會)가 (등)애의 위명(威名)을 꺼려 그 사건을 구성(搆成,무함하여 만듬)한 것입니다.

충성스러웠으나 주벌당하고 신의를 갖추었으나(信) 의심을 받아 마시(馬巿)에 머리가 내걸리고 여러 아들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니 이 일을 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은 탄식(歎息)하였습니다. 폐하(陛下)께서 용흥(龍興)한 뒤로 대도(大度)를 천홍(闡弘,널리 천명함)하여 여러 혐기(嫌忌,싫어하고 꺼림)를 없애고 주벌받은 집안이라도 서용(敍用)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옛날 진(秦)나라 백성들은 백기(白起)에게 죄가 없음을 불쌍히 여기고 오(吳)나라 사람들은 자서(子胥)(→오자서伍子胥)가 억울하게 혹독한 일을 당한 것을 슬퍼하니 모두 (그들을 위해) 사당을 세워주었습니다. 이제 천하의 민인(民人,인민)들이 (등)애를 위해 도심(悼心,마음아프게 여김)하며 통한(痛恨)해 하니 또한 이 (옛날의) 일들과 같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등)애의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초토(草土)에 버려졌으니 의당 시상(尸喪,시신;유실된 시신)을 수습하고 그의 전택(田宅,농지와 집)을 돌려주고, 촉을 평정한 공으로써 (그를) 이어 그의 손자를 (작위에) 봉하여 (등)애의 관뚜껑을 닫게 한 뒤에 시호를 정해준다면 그 죽음에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황천(黃泉)에 있는 억울한 혼(魂)을 용서하며 후세(後世)에 신의(信義)를 거두니, 한 사람을 안장해주어 천하가 그의 행적을 흠모하게 하고 혼(魂) 하나를 묻어주어(埋)[※③] 천하가 그의 의(義)에 귀부하게 하는 것이라 이는 하는 바는 적으나 기뻐할 것은 많은 일입니다.”


(태시) 9년(=273년),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등)애에게 공훈(功勳)이 있고 죄를 받고서 형(刑)으로부터 도피하지도 않았는데 자손들이 민(民)의 노비(隸)가 된 점을 짐은 늘 불쌍히 여겼도다. 이제 그의 적손(嫡孫) (등)랑(鄧朗)을 낭중(郞中)으로 삼는다.”



[※①] 七十老公 (칠십노공) – 서두에서 이미 말했듯이, 등애가 죽을 당시에 나이가 딱 70이라는 말은 아니고 ‘일흔 가까이 먹은 노인’이나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 정도의 뜻으로 보입니다. 삼국지사전 등에 따라 등애를 197년생으로 보면 68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②]「진서」단작전(段灼傳)에서 ‘原心定罪 事可詳論’으로 기술한 점을 참조해서 위와 같이 풀었습니다. 참고로, 서로 비교해보면 진서 단작전에 기재된 상소문이 더 자세하고 좀더 조리있는 논리전개를 보여주는거 같아 발췌해서 아래에 따로 번역해두었습니다.

[※③] 삼국지집해 – “하작(何焯)은 ‘埋(매)는 理(리)로 적어야 한다. 위에서 ‘아무도 그를 변명해주려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何焯曰 埋應作理 上云莫肯理之是也.) / 하작의 설에 따라 풀면 “혼 하나를 변명(신원)해 주어”…가 됩니다.

cf.「진서」권48 단작전

단작(段灼)은 자(字)가 휴연(休然)이고 돈황(敦煌) 사람이다. 대대로 서토(西土)의 저성(著姓,저명한 성씨,가문)이었는데 과직(果直,과단성있고 곧음)하고 재변(才辯,재주와 언변)이 있었다. 소싯적에 주군(州郡)에 임관하였다가 점차 승진해 등애(鄧艾)의 진서사마(眞西司馬)(→진서장군 등애의 사마)가 되었고 (등)애를 따라 촉을 격파하는데 공을 세워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지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의랑(議郞)이 되었다. 무제(武帝)(→진무제 사마염)가 즉위하자 (단)작이 상소하여 (등)애를 거슬러올라가 변명하였다(追理), “옛 정서장군 등애는 심회(心懷)가 지극히 충성스러운데도 반역(反逆)했다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파촉(巴蜀)을 평정하고서도 삼족(三族)이 주살되는 죄를 받았으니 신의 소견으로는 이를 슬픈 일로 여깁니다. (등)애가 반역을 했다고 말하다니,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등)애의 성정이 강급(剛急)하며 긍공벌선(矜功伐善,공을 뽐내고 장점을 자랑함)하고 붕류(朋類)들과 협동하지 못하고 경솔히 아속(雅俗)들을 범하여 군자(君子)의 마음을 잃었으므로 아무도 그를 변명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등애가 반역하지 않았다는 상(狀)이 있는 까닭을 말하고자 합니다. (등)애는 본래 둔전(屯田)하며 송아지를 관장하던 사람인데 선황제(宣皇帝)(→사마의)께서 농리(農吏) 가운데서 그를 탁용하여 재부(宰府,재상의 부서)의 직(職)으로 현달시키셨습니다. 내외(內外)의 관직과 문무(文武)의 직임을 맡아 부임하는 곳마다 늘 명적(名績,명성과 공적)이 있었으니 실로 선황제(宣皇帝)의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때마침 조서(洮西)의 역(役)에 이르러 관병(官兵)(→위나라 군대)이 실리(失利)하고 자사(刺史) 왕경(王經)이 포위당한 성 가운데에서 곤란을 겪었습니다. 당시에 2주(州)가 위구(危懼,두려워함)하고 농우(隴右)가 늠름(懍懍,위태로운 모양을 묘사)하여 (2주나 농우가) 거의 국가(國家)가 소유가 아니게 될 뻔 하였습니다. 선제(先帝)(→사마사)께서 이를 깊이 우려하고 무겁게 근심하니 변경을 안정시키고 적을 죽이는데 있어 (등)애보다 더 나은 이는 없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에게 병마(兵馬)를 주고 적도(狄道)의 포위를 풀게 하셨습니다. 포위가 풀린 뒤 상규(上邽)에 머물며 주둔하였는데 관군(官軍)이 대패한 뒤라 사졸들은 파담(破膽,간담이 깨어짐,용기를 잃고 두려움에 빠졌다는 말)하고 장리(將吏)들은 기백이 없고 창고(倉庫)는 텅 비고 기계(器械)는 탄진(殫盡,고갈)하였습니다. (등)애는 곡식을 쌓고 군대를 강하게 하려 함으로써 유사시에 대비하였습니다. 이 해에 비가 적으니 또한 구종(區種)의 법을 행하여 몸소 뇌사(耒耜)를 잡고 장사(將士)들을 솔선(率先)하니 통수하는 군사가 만으로 헤아렸음에도 몸소 복로(僕虜)의 로(勞)를 떼어놓지 않으며 친히 사졸(士卒)의 역(役)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낙문(落門)과 단곡(段谷) 전투에서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쳐서 강한 적을 최파(摧破)하여 만으로 헤아리는 적병의 수급을 벨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등)애에게 묘승(廟勝)과 성도(成圖,기성의 계획)을 맡기고 장책(長策)을 주었습니다. (등)애가 명을 받자 자기 몸을 잊고서 용양린진(龍驤麟振,용이 머리를 들고 날아오르고 기린이 떨쳐일어남)하니 앞에는 (그를 막을 수 있는) 견고한 적이 없었습니다. 촉 땅이 매우 험하고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은데 (등)애는 2만이 채 되지 않는 보승(步乘,보병과 수레(치중병)라는 뜻인 듯)으로 속마현거(束馬懸車)하며 스스로 사지(死地)에 몸을 던지니 용기(勇氣)가 하늘을 찌르고(陵雲) 장사(將士,장졸)들이 승세(乘勢)함으로써 유선(劉禪)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품게 만들고 군신(君臣)들이 면박(面縛)하게 하였습니다. 군(軍)(을 부린 것)이 한 계절을 넘지 않았는데도 파촉(巴蜀)을 탕정(蕩定)하니 이 또한 선제(先帝)께서 (등애에게) 임무를 잘 맡기셨음을 드러내기에 실로 충분합니다. (등)애의 공명(功名)이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또한 이를 죽백(竹帛)에 적어 만세에 전함이 마땅합니다. 칠십(七十)의 노공(老公)이 다시 무엇을 얻고자 했겠습니까! (등)애는 (유)선이 막 항복하고 멀리 있는 군(郡)이 아직 귀부하지 않았으므로 교명(矯命) 승제(承制)하여 임시로 사직(社稷)을 안정시켰습니다. 비록 상과(常科)를 위배하였으나 옛 뜻(古義)에 부합하는 점이 있으니 원심정죄(原心定罪)하여 그 일을 상세히 논의해야 합니다. 옛 진서장군(鎭西將軍) 종회(鍾會)에게는 천하를 삼킬 마음이 있었는데 (등)애의 위명(威名)을 두려워하고 (그가 자신과) 함께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으므로 그가 의사(疑似,의심스러워 보임)함을 틈타 그 일을 구성(構成)하였습니다. (등)애가 (처벌한다는) 조서를 받자 곧 강병(强兵)을 보내 몸을 묶고 결박함에도 감히 고망(顧望,이리저리 생각하며 망설임)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스스로 떳떳하므로) 실로 선제(先帝)를 뵙는다면 필시 사형에 처해질 리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종)회가 주살된 뒤 (등)애의 참좌(參佐) 관속(官屬)과 부곡(部曲) 장리(將吏)들이 어리석게도 서로 모여서는 자기들끼리 함께 (등)애를 뒤쫓아 가서 함거(檻車)를 파괴(破壞)하고 그 수집(囚執,수금囚禁)된 것을 풀어주었습니다. (이에) (등)애가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니 이로써 낭패(狼狽,난감한 궁지에 몰림)하고 실거(失據,의지할 바를 잃고 난처해짐)하게 되었습니다. 무릇 반역은 작은 일이 아니니 만약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응당 호걸(豪傑)들과 더불어 일을 꾀한 연후에야 비로소 대중(大衆,대군)을 흥동(興動)할 수 있는 법인데 (등)애에게 복심(腹心,심복)이 한명이라도 있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죽음에 이르러 입으로 나쁜 말 하는 일 없이 홀로 복배(腹背)의 주벌을 받았으니[“복(腹,배)은 앞에 있고 배(背)는 뒤에 있다. 앞뒤(前後)로 모두 주벌됨을 면하지 못했음을 말한다.”(腹在前 背在後 謂前後皆不免於誅) / 호삼성 주석]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일을 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은 탄식(歎息)하였습니다. 이는 가의(賈誼)가 한문제(漢文帝) 때에 (비분)강개(慷慨)하며 천하의 일이 가히 통곡(痛哭)할 만하다고 한 것과 같은 것으로 실로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입니다. 폐하(陛下)께서 용흥(龍興)한 뒤로 대도(大度)를 천홍(闡弘,널리 천명함)하여 주벌받은 집안이라도 서용(敍用)하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등)애의 후사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여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옛날 진(秦)나라 백성들은 백기(白起)에게 죄가 없음을 불쌍히 여기고 오(吳)나라 사람들은 자서(子胥)가 억울하게 혹독한 일을 당한 것을 슬퍼하니 모두 (그들을 위해) 사당을 세워주었습니다. 이제 천하의 사람들이 (등)애를 위해 도심(悼心)하며 통한(痛恨)해 하니 또한 이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등)애의 문생(門生,본래 문하에서 수업하는 생도를 일컫는 말인데 후한 말 이래 그 휘하에 투탁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임) 고리(故吏,휘하에 봉직했던 예전 관리)들이 (등)애의 시신을 수습하여 관에 안치하고 구묘(舊墓)로 돌아가 매장하는 것을 허락해주고 그의 전택(田宅)을 되돌려주고 촉을 평정한 공으로써 그의 후손을 이어서 봉하고 (등)애의 관뚜껑을 닫게 한 뒤에 시호를 정해준다면 그의 죽음에 여한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황천(黃泉)에 있는 억울한 혼(魂)을 용서하고 후세(後世)에 신의(信義)를 거둔다면 곧 천하의 순명지사(徇名之士,명예를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선비)들이 공을 세운 신하를 생각하여 필시 끓는 물과 뜨거운 불에라도 몸을 던지며 폐하를 위해 기꺼이 죽을 것입니다!” (무)제가 표문을 읽어보고는 그 뜻을 매우 가상히 여겼다.
 
(등)애가 서쪽에 있을 때 장새(障塞,요새)를 수치(修治,정비)하고 성오(城塢,城과 塢 or 작은 성보城堡를 통칭하는 말)를 쌓았다. 태시(泰始: 晉무제 265-274년) 중에 강노(羌虜)가 대거 반란을 일으켜 빈번히 자사(刺史)를 죽이고 량주(涼州)의 길이 끊어졌는데, 리민(吏民,관리와 백성)들 중에 안전했던 경우는 모두 (등)애가 쌓은 오(塢)를 보전한(=塢에 의지한) 덕분이었다. [一]

[一]「세어世語」에서「함녕(咸寧: 진무제 275-280) 중에 적사장군(積射將軍) 번진(樊震)이 서융아문(西戎牙門)(장군)이 되어 (황제를) 알현해 작별인사를 하였다. 무제(武帝)가 (번)진이 어디를 거쳐 진격할 것인지를 묻자 (번)진이 (답변하던 도중에) 일찍이 등애(鄧艾)가 촉을 정벌할 때 (자신이 그의) 장하(帳下,휘하)의 장수였다고 스스로 진술하였다. 이에 (무)제가 (등)애에 관하여 묻자 (번)진이 (등)애의 충성에 관해 구신(具申,잘 갖추어서 아룀)하고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앞서 (등)애의 손자 (등)랑(鄧郞)을 단수령(丹水令)(→형주 순양군順陽郡 단수현의 현령)으로 임명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정릉령(定陵令)(→예주 양성군襄城郡 정릉현의 현령)으로 올렸다. 차손(次孫,둘째 손자)인 (등)천추(鄧千秋)는 시망(時望,당시의 명망)이 있었으므로 광록대부(光祿大夫) 왕융(王戎)이 벽소하여 연(掾)으로 삼았다. 영가(永嘉: 晉회제 307-313년) 중에 (등)랑을 신성태수(新都太守)로 삼았는데 미처 부임하기 전에 양양(襄陽)에 불이 나 (등)랑 및 그의 모친, 처자와 온 집안이 불에 타 죽고 다만 (등랑의) 아들인 (등)도(鄧韜)의 아들 (등)행(鄧行)만이 화를 면했다. (※) (등)천추는 (일찍이) 먼저 죽었으나 그의 두 아들 또한 불에 타 죽었다.」라고 하였다.

※ 惟子韜子行得免(유자도자행득면) – 子韜의 子行 (곧, 등행은 등랑의 손자)인지 子韜+子行(등랑의 아들 등도 및 등행)인지, 이 기사만으로는 헷갈리네요. 삼국지사전 사전 찬자도 애매했는지 등행 항목에서 그냥 ‘등애의 후예’라고만 해설해놓았습니다. 등애가 197년 무렵에 출생했으니 나이나 세대로 따져볼 때 영가 연간에 고손자가 존재하는게 불가능하진 않고, 제 생각으로는 후자인 경우를 표현하려 했다면 子를 굳이 한번 더 덧붙일 필요없이 ‘惟子韜行得免’으로만 적어도 되고 (전자의 경우로 본다면, ‘惟孫行得免’과 같이 표기하지 않고 저런 식으로 적은 것은 子韜(등랑의 아들 등도)라는 정보를 포함시키기 위해?) 또 점교본 표점에 따로 병렬표점(、)이 없는걸 볼 때 전자로 읽은 듯해서 그냥 위와 같이 풀었습니다.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등)애의 주리(州里,같은 州 출신)이자 시배(時輩,당시의 이름있는 인물)인 남양(南陽) 출신의 주태(州泰) 또한 공업(功業)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고 용병(用兵)을 잘해 관직이 정로장군(征虜將軍) 가절도독강남제군사假節都督江南諸軍事)에 이르렀다. 경원(景元) 2년(=261년)에 죽었는데 위장군(衞將軍)을 추증하고 시호를 장후(壯侯)라 하였다. [一]

[一]「세어世語」에서「당초 형주자사(荊州刺史) 배잠(裴潛)이 (주)태(州泰)를 종사(從事)로 삼았고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司馬懿)이 완(宛)을 진수하고 있었는데 (배)잠이 여러 차례 (주태를) 보내 선왕(宣王)에게 가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선왕(宣王)이 그를 알게 되었다. 그러다 (선왕이) 맹달(孟達)을 정벌할 때 [※①] (주)태 또한 군(軍)을 이끌었고 마침내 (선왕이 주)태를 벽소하였다. (주)태가 자주 상을 당해 부친, 모친, 조부를 위해 9년간 거상(居喪)하였는데 선왕은 (주태의 자리를) 결원으로 남겨두고 그(가 복귀하기)를 기다렸다. (거상을 마치고 복귀하자) 36일만에 탁용(擢)하여 신성태수(新城太守)로 임명했다. 선왕이 (주)태를 위해 모임을 열었는데 상서(尙書) 종요(鍾繇)(종요의 아들인 ‘종육鍾毓’ 또는 ‘종회鍾會’의 오류.※②참고)를 시켜 (주)태를 놀리게 하였다, “그대는 석갈(釋褐,평민의 복장인 ‘갈옷을 벗는다’는 뜻으로 ‘처음 관직에 부임한다’는 말)하고 재부(宰府,재상의 부서)에 오르더니 36일 만에 휘개(麾蓋,의장용 깃발과 거개車蓋)를 가진 채 병마(兵馬)를 관장하며 (태수로서) 군(郡)을 [맡게 되었소] [※③] 걸아(乞兒,구걸하는 아이)가 소거(小車)에 오르더니 어찌 이토록 빨리 달린단 말이오?” (주)태가 말했다, “실로 그런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명공(名公)의 자식으로 어려서부터 문채(文采,아름다운 문장 ; 문학의 재주)가 있었으므로 리(吏)의 직임을 맡았습니다. 원숭이가 토우(土牛)를 타고 달리듯 또한 어찌 이토록 (진급이) 늦단 말입니까!” 뭇 빈객들이 모두 (웃으며) 즐거워하였다. 뒤에 연주자사(兗州刺史)와 예주자사(豫州刺史)를 역임하였는데 부임하는 곳마다 주산(籌算,모책과 계산)과 적효(績效,공적)가 있었다. 」라고 하였다. [※④]

[※①] 사마의의 맹달 공격은 227년 12월 – 228년 1월의 일.

[※②] 尙書鍾繇(상서 종요) / 삼국지집해 – “태평어람에서는 (종)요(繇)를 (종)육(毓)으로 적었다. 진호(陳浩)는 ‘종요(鍾繇)는 태화4년(=230년)에 이미 죽었으므로 주태를 놀린 것은 응당 종육(鍾毓)일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하작(何焯)은 ‘(삼국지) 종육전을 검토해보니 (고귀향공) 정원(正元) 연간(254-255년)에서야 상서(尙書)가 되었고 제왕(齊王) 초에는 바야흐로 황문시랑(黃門侍郞)(※‘산기상시散騎常侍’의 오류임)에 부임하였다. 세어(世語)에서는 응당 그 뒤에 역임한 직으로써 칭한 것이리라. 만약 주태가 (신성)군을 맡았을 때에 종육이 이미 일찍이 팔좌(八座)(※ 당시 상서령,상서좌복야,우복야,5조상서의 합칭)에 올랐다면 (당시 팔좌는 청요직이므로 위의 세어에 나오는 대화에서와 같이) 굴체(屈滯,오래도록 하위직에 머뭄)하였다고 놀릴 수 없다. 세어가 기록한 바가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전대소(錢大昭)는 ‘진경운(陳景雲)이 이르길, 선왕(宣王)이 주태를 탁용하여 신성(新城)을 맡긴 것은 응당 (宣王이) 어린 황제를 보좌하며 조정을 관리할 때(→제왕 때인 정시正始 연간을 말함)일 것인데 (그때) 종요는 이미 죽은지 오래 되었다.’고 말하였다. (* 원전을 못 봐서 진경운을 인용한 글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어 문맥으로 대충 때려잡아 여기서 끊었습니다.) 태평어람에서는 종육(鍾毓)으로 적었으나 또한 잘못되었다. 종육은 정원(正元) 연간에 상서가 되었으며 (만약) 주태가 (신성)군을 맡았을 때에 종육이 이미 일찍이 팔좌에 올랐다면 굴체(屈滯)하였다고 놀릴 수 없다. 응당 상서랑(尙書郞) 종회(鍾會)가 맞을 것이다. 종회는 정시(正始) 연간에 상서랑이 되었는데 (상서랑은) 자질과 명위가 아직 얕으므로 하사(下士)에 머문다는 이유로 (주태가 되받아치며) 배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삼국지 집해 찬자인 노)필(盧弼)이 보건대, 주태가 사마의를 따라 맹달을 정벌한 것이 (위 명제) 태화(太和: 227-232년) 초이고 거상 9년을 끝낸 때가 딱 (위 명제) 청룡(靑龍: 233-236년) 무렵일 것이니 주태가 (신성)군을 맡았을 때는 종육은 아직 팔좌(八座)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러니 육(毓)으로 적든 회(會)로 적든 모두 통할 수 있다.”

/ 대화의 시점이나 제반 정황으로 볼 때 저 대화의 주체가, 태위를 거쳐 226년 이래 태부를 지내다 230년에 죽은 조위의 최고위급 인사인 종요일 수는 없으니 오류임이 분명합니다. 삼국지집해에 소개된 설들처럼 종육 아니면 종회의 와전으로 보이는데, 주태의 신성태수 임명 및 위의 대화가 이루어진 시점을 언제로 보는 지가 핵심 관건인 듯합니다. 주태가 맹달의 반란(227 –228) 이후에 사마의에 의해 벽소되고 도합 9년의 거상을 거쳤지만 부친, 모친, 조부가 주태가 벽소되자마자 딱딱 3년 간격으로 죽었을 것으로 보는건 너무 무리한 추정이므로 실제 소요된 총시간은 좀더 길게 잡아야하고 노필의 설처럼 청룡 연간으로 보는건 너무 이르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만약 청룡 연간으로 본다면 225년 생으로 당시 10살 전후인 종회는 아닌 것이 됩니다. 참고로 종회는 제왕 정시 연간에 비서랑으로 시작합니다.) 제왕 때인 250년(가평 2년,삼국지 왕창전), 251년(가평 3년, 삼국지 삼소제기)에 ‘新城太守州泰’라는 기록이 있는 걸 볼 때 이 시기가 하한이 될 것인데, 위의 진경운의 설처럼 대략 제왕 초(대략 240년대 초중반)로 보는게 적정한 거 같습니다. 이때 종육은 산기시랑 또는 산기상시였고 종회는 비서랑 또는 상서랑이었습니다. 둘다 가능하지만 태평어람의 기록이 있으니 종육 쪽이 더 가능성이 큰 듯하고, 세어에서 ‘상서’로 표기한 것은 위의 하작의 설처럼 뒤에 역임한 관직으로 칭한 것으로서 서술하는 사건의 시점과는 맞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종회가 맞는 것으로 본다면 이건 ‘상서랑’의 오기가 됩니다.

[※③] 守兵馬郡(수병마군) / 삼국지집해 – “태평어람에는 郡 위에 典자가 있다.” (御覽郡上有典字.) (* 守兵馬典郡)

[※④] 삼국지집해 – “주태(州泰)는 (고귀향공) 감로(甘露) 4년(=259년)에 양양(襄陽)을 진수하였다.「진서晉書」문제기(文帝紀)에 보인다.” (州泰甘露四年鎭襄陽 見晉書文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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