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애鄧艾는 자가 사재(士載)이고, 의양군 극양현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며, 조조가 형주를 격파했을 때 여남으로 이사하여 농부가 되어 송아지를 길렀다. 열두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영천에 이르러 태군의 장 진식의 비문을 읽고 말했다.

"문장은 세인들의 모범이 되고, 행위는 선비들의 준칙이 된다."

등애는 마침내 스스로 이름을 범으로 바꾸고, 자를 사칙이라고 했다. 후에 종족 중에서 그와 이름이 같은 자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개명했다.

등애는 도위학사로 임명되었지만 가난하여 간좌(문서를 다루는 각 부서의 보좌관)도 할 수 없어 도전수총초리가 되었다. 같은 군 관리의 부친이 그의 집이 가난한 것을 불쌍히 여겨 재물을 후하게 주었지만, 등애는 처음부터 사례도 표하지 않았다.

그는 매번 높은 산과 큰 못을 볼 때마다 군영 설치에 적당한가 헤아려서 그림으로 나타냈는데,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비웃었다.

후에 전농강기가 되었으며, 상계리가 되었다. 때문에 태위 사마선왕을 만날 수 있었다. 사마선왕은 그가 보통 사람과 달리 기이한 면이 있음을 알고는 불러서 속관으로 임명했으며, 상서랑으로 승진시켰다. [1]

[1] 세어世語에서 이르길: 등애는 어려서 양성의 전농부민이 되었는데, 함께 관리로 있던 석포와 12,13세였다. 알자(謁者)인 양적(陽翟) 출신의 곽현신(郭玄信)은 무제(武帝)의 감군(監軍)이었던 곽탄(郭誕) 원혁(元奕)의 아들인데, 건안(建安: 후한 헌제 196-220년) 중에 소부(少府) 길본(吉本)이 허도(許都)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곽)현신이 이에 좌죄되어 형(刑)을 받아 집에 머물게 되었다. 전농(典農) 사마(司馬)에게 수레를 몰 사람을 청하니 (등)애와 (석)포가 수레를 몰게 되었는데 10여 리 길을 가면서 대화를 나누어보고는 이 두 사람이 모두 응당 원지(遠至,장래에 대성大成함)하여 좌상(佐相)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등)애는 뒤에 전농(典農)의 공조(功曹)가 되어 봉사(奉使,사자의 임무를 받듬)하여 선왕(宣王)(→사마의)에게 나아가니 이로 말미암아 알려져 마침내 발탁(拔擢)되었다.

길본이 전농사마에게 어자를 구하려고 하자, 등애와 석포를 주었다. 10여 리 가면서 말을 하더니 기뻐하여, 두 사람 모두 출세하여 대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등애는 후에 전농공조가 되어, 사자로 선왕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알려져 발탁된 것이다.

당시 밭을 개간하고 곡식을 저장하고, 적국을 멸망시키려는 계책을 세우고 등애를 진과 항의 동쪽인 수춘 지역까지 파견하여 시찰하도록 했다. 등애는 생각했다.

'토지는 좋지만 수원이 적어 땅의 이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겠군. 응당 운하를 개통해야 돼. 그러면 물을 끌어서 관리할 수 있겠어. 그렇게 되면 군대 식량을 대량으로 비축할 수 있고, 또 식량을 운송하는 길을 개통할 수 있지.'

그래서 <<제하론>>을 지어 그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거에는 황건적을 격파시킨 것을 계기로 둔전을 실행하고, 허도에 곡식을 비축하여 사방을 제어했었습니다. 지금 세 방면의 변방은 이미 평정되었으나, 회수 남쪽만 남아 있습니다. 매번 대군이 정벌하러 출동할 때, 식량을 운송하는 병사가 절반을 넘었고, 막대한 비용이 들어 거대한 노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과 채 사이의 땅은 낮고 밭은 기름지므로 허창 주위의 모든 논을 없애고 물을 대면 동쪽으로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화북의 둔병 2만 명과, 회남의 둔병 3만 명을 10명중 2명씩 돌려 가며 쉬게 하고, 항상 4만 명에게는 한편으로는 밭을 갈게 하고 한편으로는 지키도록 명령하십시오. 인원이 풍족하여 항상 서쪽 지역보다 세 배를 수확할 것이고, 경작 비용을 제외하고 계산해도 매년 5백만 석이 군대의 비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6,7년 사이에 3천만 석이 회수의 연안 지역에 쌓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10만 병사가 5년간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이런 역량으로 오나라를 공격하면 원정하더라도 승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마선왕은 그의 진언을 가상하게 여겼으며, 이 일을 모두 시행하였다.

정시 2년(241), 곧 운하가 넓게 개통되었는데, 매번 동남쪽에 일이 발생하면 대군이 출동하여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 장강과 회수에 도착하였고 그 때마다 물자와 식량이 회복되어 있고 수해가 없었으니, 이는 등애가 세운 공로였다.

등애는 지방으로 나가 참정서군사가 되었고, 남안태수로 승진했다.

가평 원년(249)에 등애는 정서장군 곽회와 함께 촉나라의 편장군 강유를 막아냈다. 강유가 물러나자, 곽회는 그 기회를 틈타 다시 서쪽으로 강인을 공격하려는데, 등애가 말했다.

"적군은 아직 멀리까지 가지 못했으므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응당 병사들을 나누어 의외의 일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마선왕은 등애를 남겨 백수 북쪽에 주둔하도록 했다. 3일 후, 강유는 요화를 파견하여 백수 남쪽으로부터 등애를 향하여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등애가 장수들에게 말했다.

"강유는 지금 갑자기 돌아왔고, 우리는 병사가 적소. 병법에 의하면 적은 당연히 물을 건너야 하지만 다리를 만들 수는 없소. 이것은 강유가 요화를 보내어 우리를 견제하여 돌아갈 수 없게 하는 것이오. 강유는 반드시 동쪽으로부터 조성을 습격할 것이오."

조성은 백수 북쪽에 있었으므로 등애와는 60리 떨어져 있었다. 등애는 밤에 몰래 군사를 움직여 곧장 조성에 이르렀다. 강유는 과연 물을 건넜지만 등애가 먼저 도착하여 조성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 등애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으며, 토구장군의 관직을 더하였고, 후에 성양태수로 바꿔 임명하였다. 이 당시 병주에 있던 우현왕 유표가 흉노를 합병하여 한 부족으로 받들자, 등애가 표를 올려 말했다.

<융적은 야수의 마음을 갖고 있으므로 도의로써 친하지 않습니다. 강대하면 침범하여 잔혹하게 굴고, 쇠약하면 중앙으로 향해 순종하며 의지합니다. 때문에 주선왕 시대에는 험윤의 침입이 있었고, 한나라 고조 시대에는 평성에서 흉노의 침입이 있었던 것입니다. 흉노가 일단 강성해질 때마다 이전 시대에는 중대한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선우가 중국의 밖에 있은 이후부터 그들의 부족장과 민중들을 견제할 수 없었습니다. 후에 그들을 유인하여 국내로 오게 하여 의탁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강이는 통솔자를 잃었고, 모이고 흩어지는 일에 만 리가 하나의 규범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지금 국경 내에 있는 선우의 권위는 나날이 감소해 가고, 외지에 있는 이민족들의 위엄이 점점 높아만 간다면, 북방 오랑캐에 대해 깊이 대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유표의 부하 중에서 반란을 일으킨 자가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반란을 틈타서 그들을 두 나라로 분할하여 세력을 나누도록 하십시오. 거비는 이전의 조대(무제 시대)에서 공적이 역력하였지만, 그의 자손은 사업을 이을 수 없었으므로 그의 자손들에게 고귀한 칭호를 더해 주어 안문에 거주하도록 하십시오. 흉노의 나라를 분리하여 세력을 약하게 하고, 옛날의 공훈에 대하여 추적하여 기록하는 것, 이것이 변방을 제어하는 장기간의 계책입니다.>

또 진술했다.

<강호 중 민중과 같은 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응당 축출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염치의 교화를 숭상하도록 하여 간사하고 악한 길을 막아야 합니다.>

대장군 사마경왕(사마사)은 이제 막 정치를 보좌하게 되었지만 등애의 건의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등애는 여남태수로 전임하였다. 등애가 여남에 이르자 과거에 자신을 후하게 대우했던 관리의 아버지를 수소문하여 찾았지만, 오래 전에 이미 죽었으므로 관리를 보내 그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그의 어머니에게 충분한 선물을 보내 주었으며, 그의 아들을 추천하여 계리로 임명했다. 등애가 다스린 곳은 황량한 벌판이 개간되었고, 군대와 백성은 모두 풍족한 생활을 했다.

제갈각이 합비의 신성을 포위하였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나 돌아갔는데, 등애가 사마경왕에게 말했다.

"손권은 이미 죽었고, 대신들은 새로운 군왕에게 아직 의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나라의 명가와 호족은 모두 자기의 사병을 갖고 있으므로 병사의 세력에 의지하면 제위를 찬탈하기에 충분합니다.

제갈각은 방금 국정을 담당하였고, 내부에는 아직 걸주가 없습니다. 그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어루만져 근본을 공고하게 할 생각은 못하고 외부의 일로 바쁘며, 그 백성들을 잔혹하게 사용하고, 나라의 전 병력으로 위나라의 견고한 성을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여 죽은 사람이 만여 명이나 되고, 화를 싣고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제갈각이 죄를 받을 날인 것입니다. 옛날에 자서, 오기, 상앙, 악의 등은 모두 당시의 군주에게 임용되었지만, 군주가 죽자 실각했습니다. 더욱이 제갈각의 재능은 네 명의 현인에 미치지 못하고, 큰 재난에 대한 근심도 없으니, 그의 멸망은 기다릴 만합니다."

제갈각은 귀국하자 과연 주살되었다. 등애는 연주자사로 옮겼으며, 진위장군을 더하였다. 표를 올려 말했다.

<나라의 긴급한 업무는 오직 농업과 전쟁뿐입니다. 나라가 부강하면 병력이 강대해지고, 병력이 강대해지면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농업이 승리의 근본입니다. 공자는 정치에 대해 질문을 받자 '식량을 풍족히 하고 병사를 풍족히 하라'고 하여, 식량을 병사보다 앞에 두었습니다. 위에서 작위를 설치하여 경작을 권하지 않으면 아래서 재산 축적의 공이 없게 됩니다. 지금 정치적 업적을 고찰할 때의 상을 곡식을 축적하여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자를 중심으로 하여 내린다면, 교류의 길은 끊어지고, 겉 표면을 수식하는 풍조는 막히게 될 것입니다.>

고귀향공이 제위에 오르자, 등애를 승진시켜 방성정후로 봉했다.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고 달리기 잘 하는 병사를 파견하여 서신을 보내 대중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했는데, 등애가 그 사람을 죽이고 아울러 신속히 군대를 나가게 하고 우선 악가성으로 달려가 부교를 만들었다. 사마경왕이 도착하자, 그대로 악가성을 점거했다. 문흠의 대군은 위의 대군보다 늦게 왔으므로 성 아래에서 패배하였다. 등애는 그를 병두까지 추격하였고, 문흠은 오나라로 달아났다.

오나라 대장군 손준 등은 10만 대군이라고 외치며 장강을 건너려는 형세를 나타냈다. 진동장군 제갈탄은 등애를 보내 비양을 차지하도록 하였지만, 등애는 적군과 멀리 떨어져 있는 요해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신속하게 부정으로 옮겨 주둔하였으며 태산태수 제갈서등을 여장으로 파견해 막아 싸우도록 하여 적을 달아나게 했다.

정원 2년(255), 등애는 소환되어 장수교위로 임명되었으며, 문흠 등을 격파시킨 공로가 있었으므로 나아가 방성향후로 봉해졌으며, 안서장군을 대행했다. 등애는 적도에서 포위당한 옹주자사 왕경을 풀어 주었고, 강유는 물러나 종제에 주둔하였다. 그래서 등애를 안서장군으로 임명하였으며, 가절, 영호동강교위가 되었다.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강유의 병력은 이미 다하여 병사를 내어 다시 공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등애가 말했다.

"왕경이 조서에서 패배한 일은 작은 실책이 아닙니다. 우리 군을 격파시키고 장수를 죽였으며, 창고는 모두 텅 비었고, 백성들은 갈 곳을 잃어 떠돌아다녀 거의 멸망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지금 작전상에서 말하면, 적에게는 승기를 타고 공격하는 기세가 있으며, 우리는 허약한 체질입니다. 이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저들은 위아래가 서로 익숙하게 훈련되었고, 병기는 예리한데, 우리는 장수를 바꾸고 병사를 새로 증원하고 손상된 병기는 아직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적은 배로 행군하고 우리는 육로로 걸으니, 수고로움이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셋째 이유입니다.

적도, 농서, 남안, 기산은 각기 지켜야만 합니다. 적은 병력을 한곳에 집중시키지만, 우리는 네 곳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넷째 이유입니다.

남안과 농서를 향한다면 강인의 곡식을 먹을 수 있고, 만일 기산으로 향한다면 1천 이랑이나 되는 잘 익은 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적을 유인하는 먹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째 이유입니다.

적군은 교활하고 책략에 뛰어나므로 그들이 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오래지 않아, 강유가 과연 기산으로 향했는데, 등애가 이미 방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곧 동정으로 돌아가 남안으로 진군했다. 등애는 무성산을 점거하고 강유와 대치했다.

강유는 등애와 요충지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지만 이길 수 없었으므로, 그 밤에 위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산길을 따라서 상규로 달려갔다. 등애는 강유와 단곡에서 교전하여 크게 격파시켰다.

감로 원년(256), 조서를 내려 말했다.

<역적 강유가 해마다 교활한 행동을 하여 백성들과 만족을 동요시켜 서쪽 땅은 편안할 수 없었다. 등애는 이치에 맞는 계획을 세우고, 충절과 용기를 떨쳐 일어나 적장 20여명을 죽였고, 죽인 적군의 병사는 많다. 국가의 위엄을 파와 촉에 떨치고, 무용의 명성을 장강과 민강에 흐르게 했다. 지금 등애를 진서장군, 도독농우제군사로 삼고, 나아가 등후로 봉한다. 그의 식읍 5백 호를 떼어 아들 등충에게 주어서 정후로 삼으라.>

2년(257), 등애가 장성에서 강유를 방어하자 강유는 물러나 돌아갔다. 등애는 정서장군으로 승진하였으며 앞뒤로 증가한 식읍은 총 6천 6백 호나 되었다.

경원 3년(262), 또 후화에서 강유를 격파시켰으며, 강유는 퇴각하여 답중을 지켰다.

4년 가을, 조서를 내려 각 군대가 촉나라를 정벌하도록 명령했고, 대장군 사마문왕이 모든 지휘를 하고, 등애로 하여금 강유와 전선에서 대치하도록 하였고, 옹주자사 제갈서에게 강유의 퇴로를 끊어 강유가 돌아갈 길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등애는 천수태수 왕기 등을 파견하여 직접 강유의 진영을 공격하게 했으며, 농서태수 견홍 등을 보내 강유 군대의 앞에서 싸우도록 하고, 금성태수 양흔 등에게 감송으로 가도록 했다.

강유는 종회의 군대가 이미 한중에 진입하였다는 것을 듣고 물러나 돌아갔다. 양흔 등은 강천구까지 추격하여 큰 싸움을 하였다.

강유가 패하여 달아났는데, 옹주가 벌써 길을 막고 교두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공함곡으로부터 북쪽 길로 들어가서 옹주 후방을 공격하려고 했다. 제갈서는 이 소식을 듣고 퇴각하여 30리를 돌아갔다.

강유가 북쪽 길로부터 30여리 진입하였는데, 제갈서의 군대가 퇴각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곧 돌아서 교두를 통과했다. 제갈서는 급히 강유의 퇴로를 차단했지만 하루 차이로 미치지 못했다. 강유는 곧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물러나 검각을 지켰는데, 종회가 강유를 공격하였지만, 이길 수는 없었다. 등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지금 적군의 역량은 찢겨지고 훼손되었으므로 응당 이 기회를 타서 음평으로부터 작은 길을 달려 한의 덕양정을 지나 부성으로 간다면, 검각의 서쪽 백 리를 지나 성도로부터 3백여 리 되는 곳에서 기습병이 적의 중심부를 뚫을 수 있습니다. 검각의 수비군은 반드시 돌아서 부성으로 달아날 것이고, 이와 같이 되면 종회는 곧 큰 길을 따라 전진할 수 있습니다. 검각의 군사가 돌아가지 않으면 부성을 구원하는 병사는 적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병서에서는 '적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공격하고, 적이 생각하지 못한 곳을 뚫어라'고 했습니다. 지금 적의 공허한 곳을 습격하면, 그들을 격파시키는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겨울 10월, 등애는 음평 길로부터 사람이 없는 땅을 7백여 리나 행군하였다. 산을 뚫어서 길을 통과하게 하고 계곡에는 다리를 만들었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었으므로 작업은 매우 어려웠고, 또 식량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거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등애는 모전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산기슭을 따라 내려갔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나무를 붙잡고 낭떠러지를 기어오르며 서로 이어서 전진하였다.

선두 진영이 강유(江由)에 도착하자, 촉나라 수비 대장 마막이 항복했다. 촉나라 위장군 제갈첨은 부성에서 면죽으로 돌아와 진영을 나란히 정렬하고 등애를 기다렸다. 등애는 아들 혜당정후 등충 등에게 적의 오른편에서 출격하도록 하고, 사마 사찬등에게는 적의 왼편에서 출격하도록 했다. 등충과 사찬은 전세가 불리했으므로 나란히 퇴각하여 돌아와서 말했다.

"적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등애는 화를 내며 말했다.

"존망의 구분은 이 한 싸움에 달려 있다. 어찌 불가능함이 있겠는가?"

곧 등충과 사찬을 질타하고 그들의 머리를 베려고 했다. 등충과 사찬은 급히 돌아가 다시 싸워 크게 격파시키고 제갈첨과 상서 장준 등의 머리를 베고, 락까지 진군했다. 유선이 사자를 보내 황제의 옥새와 인수를 받들고, 등애에게 편지를 써서 투항을 청했다.

등애가 성도에 도착하자, 유선은 태자와 제왕 및 신하 60여 명을 이끌고 결박을 하고서 군문에 출두했다. 등애는 부절(군사권)을 쥐고 결박을 풀고 관을 태우고, 그들을 받아들여 용서했다. 등애는 촉나라의 장수와 병사들을 조사하여 약탈한 일이 없고, 항복한 자를 받아들여 위로하고 옛 사업을 회복하도록 하였으므로, 촉나라 사람들은 등애를 칭찬했다.

후한 초, 등우의 이전 일에 따라서 전권을 발휘하여 유선을 행표기장군으로, 태자를 봉거도위로, 제왕을 부마도위로 임명했다. 촉나라 신하들은 각자 지위의 고하에 따라 왕의 관직으로 임명되었고, 간혹 등애 수하의 관직을 받기도 했다. 사찬을 익주자사대리로 임명하고, 농서태수 견흥 등이 촉나라 안의 각 군을 대신 관리했다. 사람을 보내 면죽에 누대를 건축하여 경관을 만들어 전공을 빛내는데 사용했다. [2]

[2] 적벽의 시체를 쌓아 흙으로 덮어 만든 것으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전쟁 중에 사망한 병사들은 모두 촉나라 병사와 함께 매장했다. 등애는 자신의 전공이 탁월하다고 뽐내면서 촉나라 사대부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다행스럽게 나를 만났기 때문에 오늘이 있을 수 있었을 뿐이다. 만일 오나라나 한나라 같은 무리들을 만났다면 이미 주살되었을 것이다."

또 말했다.

"강유는 본래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나를 만났기 때문에 곤궁해진 것일 뿐이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12월, 조서를 내렸다.

<등애는 군의 위엄을 나타내고 무력을 떨쳐서 적지 깊숙이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고 깃발을 빼앗고, 악한 사람들을 죽였다. 제왕이라고 참칭한 군주로 하여금 머리를 땅에 박고 목을 빼게 하였다. 몇 대를 걸쳐 처벌을 면제받았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평정되었다. 병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시간을 넘지 않았으며, 싸움에 있어서는 하루를 다 사용하지 않고, 구름을 자르고 자리를 마는 것처럼 파와 촉을 평정하였다. 비록 백기(전국 시대 秦의 명장)가 강대한 초나라를 격파하고, 한신이 강력한 조나라를 이겼으며, 오한이 자양(공손술)을 잡았고, 아부(전한 시대의 명장)가 일곱 나라를 멸망시켰을지라도, 공적을 계산하고 성과를 논하면 이번 훈공에 비교할 수 없다. 등애를 태위로 임명하고 식읍을 2만 호를 증가시키고, 아들 두 명을 정후로 봉하여 각기 식읍 천 호 식을 주도록 하라.> 


원자袁子에서 이르길: 제갈량(諸葛亮)은 중인(重人)이나 촉병(蜀兵)을 자주 사용하였으니 이는 소국(小國) 약민(弱民)이 오래 존속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국가(國家)가 일거(一擧)에 촉(蜀)을 멸하니 정벌(征伐)의 공(功)이 이처럼 쾌속한 적은 아직 없었다. 바야흐로 등애(鄧艾)가 1만 명으로 강유(江由)의 위험한 곳으로 들어갈 때 종회(鍾會)는 20만 군사로 검각(劍閣)에서 머물며 진격하지 못하고 삼군(三軍)의 군사들은 이미 굶주리고 있었으니 (등)애가 비록 전승(戰勝)하여 장수를 이겼으나 만일 유선(劉禪)이 며칠만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곧 두 장수의 군(軍)은 돌아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업(功業)을 세우기가 이와 같이 어렵도다. 국가(國家)에 앞에 수춘(壽春)의 역(役,사건,전투)이 있고 뒤에 촉을 멸하는 공로가 있으니 백성들은 가난해지고 창름(倉稟,창고)이 비었다. 그러므로 소국(小國)이 염려할 것은 늘 공을 세워 자존(自存)하는 것인 반면에 대국(大國)이 염려할 것은 승리한 뒤에 역량이 고갈되는 것이니 성공(成功)한 뒤야말로 경계하고 두려워할 때로다.

등애가 사마문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병사를 다룰 때에는 먼저 성세를 조성한 후에 실제 행동을 해야 합니다. 현재 촉을 평정시킨 형세를 타서 오나라를 공격하면, 오나라 사람은 놀라고 두려워할 것이니, 오나라를 멸망시킬 기회입니다. 그러나 크게 일으킨 이후이므로 장수와 병사들은 피로하여 곧 용병할 수 없으니, 이 일을 늦추십시오.

농우의 사병 2만 명과 촉나라 병사 2만 명을 머물게 하여 제염과 철주조를 흥성하게 하고, 군사와 농업의 긴급함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배를 만들어 물의 흐름을 따라가 공격할 준비를 한 연후에 사절을 보내 그들에게 이해관계를 설명하도록 한다면, 오나라는 반드시 귀환하여 정벌하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응당 유선을 후하게 대우하여 손휴를 오도록 하고, 촉나라의 병사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먼 곳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순하게 해야 합니다. 설령 곧 유선을 수도로 보내 오나라가 그를 버린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귀순하라고 다시는 권하지 못하게 됩니다. 응당 잠시 머물면서 다음해 가을과 겨울을 기다리면 오나라 또한 충분히 평정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유선을 부풍왕으로 임명하고, 재산과 재물을 내려 그의 수하들을 돌보도록 하십시오. 부풍군에는 동탁오가 있으므로 그에게 궁전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의 아들을 공작과 후작으로 봉하고 부풍군 내의 현을 다스리도록 하고 귀순하여 투항하면 총애를 받을 수 있음을 나타내십시오. 광릉, 성양을 열어서 오나라 사람을 기다리면, 당신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망에 감사하여 바람을 바라보고 따를 것입니다.>

사마문왕은 감군 위관으로 하여금 등애에게 말하도록 했다.

"이 일은 당연히 보고해야 하므로 즉시 시행하지는 못하오."

등애는 재차 상소를 올려 말했다.

<저는 명령을 받아 출정하여 지휘 계책을 받든 결과, 원흉은 이미 항복하였습니다. 조서를 받고 임시 관원이 되기를 청하여 새로 귀순한 사람들은 안무한 것은 당시 형세에 부합되는 조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촉나라 백성들은 전부 귀순하였고, 영토는 남해에까지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오회에 접해 있으니, 응당 빨리 진압하여 평정해야만 합니다. 만일 국가의 명령을 기다린다면, 길가에서 오가며 시간을 끌 뿐입니다.

<<춘추>>의 대의는, 대부는 국경을 나와 사직을 안정시키고 국가에 이익을 줄 수 있을 경우에는 독단적으로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오나라는 아직 순종하지 않고 있고, 그 지세는 촉나라와 이어져 있으므로 일상적인 규정에 구애되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병법에서는 나아가 명성을 구하지 않고, 물러나 죄를 피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 등애는 비록 고인의 절의는 갖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불만으로 인해 나라에 손해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종회, 호열, 사찬 등은 모두 등애의 행동은 반역에 해당되고 변란의 징조가 있다고 아뢰었다. 조서가 내려져 죄인을 수송하는 수레로 등애를 불렀다. [3]

[3] 위씨춘추魏氏春秋에서 이르길: 등애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나 등애는 충신이거늘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백기의 잔혹한 운명이 오늘 또 재현되었구나."

등애 부자가 이미 구금된 후, 종회는 성도로 가서 먼저 등애를 보낸 후에 반란을 일으켰다. 종회가 벌써 피살된 후, 등애의 본 진영의 장수와 병사들은 등애를 가둬 싣고 가는 수레를 추격하여 등애를 영접하여 돌아왔다. 위관은 전속 등을 파견하여 등애를 토벌하도록 하고, 면죽 서쪽에서 만나 등애를 죽였다. [4]

[4] 한진춘추에서 이르길: 처음에 등애가 강유(江由)로 내려갈 때, 전속이 전진하지 않았으므로 목을 베려고하다 그만두었다. 위관이 전속을 보낼 때, 그에게

"강유의 치욕을 갚을 수 있지요"

라고 했다. 두예는 사람들에게

"백옥(위관의 자)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 몸은 명사에 나열되었고 높은 지위와 인망을 갖추고 있지만 이미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또 정의에 의거하여 부하를 통솔하지 못했다. 이것은 소인이면서 군자의 겉모양새를 딴 것이다. 어떻게 그 책임을 감당하겠는가? "

라고 했다 위관은 그 말을 전해 듣고, 수레를 기다리지 않고 사죄했다. 사찬 또한 등애와 함께 죽었는데, 그는 성격이 급하고 은혜가 적었기 때문에 죽는 날 몸에 상처를 입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들 등충은 등애와 함께 죽었고, 낙양에 있는 그 밖의 아들은 전부 살해되었다. 등애의 처와 손자는 서역으로 옮겨 살도록 했다.

당초, 등애가 촉나라를 토벌할 때, 산 정상에 앉아 흐르는 물을 보는 꿈을 꾸었었다. 진로호군 원소에게 이 꿈에 관해 묻자, 원소가 말했다.

"<<역>>에 괘에 의하면, 산위에 물이 있는 것을 건이라고 합니다. 건의 괘사에는' 건은 서남쪽에는 유리하고 동북쪽에는 불리하다'고 했고, 공자는 '건이 서남쪽에 유리하다는 것은 전진해 공로가 있는 것이고, 동북쪽에 불리하다는 것은 그 길이 다했다는 의미이다.' 라고 했습니다. 가면 반드시 촉나라를 무찌를 수 있지만, 아마 돌아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등애는 망연한 채 불쾌했다. 


순작(荀綽)의「기주기冀州記」에서 이르길: (원)소(爰邵)는 (군현의 하급관리인) 간리(幹吏)로부터 시작해 그 지위가 위위(衞尉)에 이르렀다. 장자(長子) (원)한(爰翰)은 하동태수(河東太守)를 지내고 중자(中子) (원)창(爰敞)은 대사농(大司農)을 지냈다. 소자(少子) (원)천(爰倩)은 자(字)가 군유(君幼)이고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여 기국(器局,기량;도량)이 있었고 당세(當世)(의 시무)에 부지런하여 기주자사(冀州刺史)와 태자우위솔(太子右衞率)을 역임하였다. (원)한의 아들 (원)유(爰俞)는 자(字)가 세도(世都)이고 청정(淸貞,맑고 곧음) 귀소(貴素,소박함을 귀히 여김?)하고 논의(論議)에 언변이 좋아 공손룡(公孫龍)의 말을 따와 미리(微理,미묘한 도리)를 담론하였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다는 명성이 있어 태위부(太尉府)에 벽소되고 점차 현위(顯位,높은 지위)를 거쳐 시중(侍中) 중서령(中書令)에 이르고 (중서)감(中書監)으로 올랐다.


신 송지(松之)가 보건대, 건(蹇)의 단사(彖辭)에서 건리서남(蹇利西南)은 왕득중야(往得中也)라고 하였지 ‘유공(有功)’이라 말하지는 않았고, 그 아래에서 ‘리견대인(利見大人)을 왕유공야(往有功也)라고 하였다.


태시 원년(265), 진 왕실이 제위에 오르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옛날에 태위 왕릉은 제왕을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하였고, 제왕은 결국 그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정서장군 등애는 공훈을 과시하여 절의를 잃었으므로 사실상 당연히 큰 죄를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체포하라는 조서를 받았을 때는, 부하들을 멀리 보내고 손을 묶어 죄를 받았다. 살기를 구하고 악한 일을 한 자와 비교하면 진실로 또 다르다. 지금 대사면을 내리니 그들의 가솔들을 돌아오게 하라. 만일 자손이 없는 경우에는 후사를 세우게 하여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

3년(267), 의랑 단작이 상소를 올려 등애를 변호하는 말을 했다.

<등애는 지극히 충성스런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반역자라는 이름을 짊어지게 되었고, 파와 촉을 평정했지만 전 가족이 주살되는 죄를 받았으므로, 신은 사사로이 그를 애도하고 있습니다. 등애가 모반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유감입니다!

등애는 성격이 강직하고 급하였으므로 고아한 사람과 속인을 쉽게 범하여 동료들과 합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은 감히 등애가 모반할 수 없는 실정을 말씀드립니다.

옛날 강유가 농우를 끊으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을 때, 등애는 수비를 정돈하고 엄격히 지키며 곡물을 축적하고 병력을 강하게 했습니다. 흉작과 가뭄이 있는 해에는, 등애는 직접 경작을 하고, 검은색 옷을 입고, 손에는 보습을 쥐고 장수와 병사들을 인솔하였습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은 서로 감동을 받아 힘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등애는 지절을 갖고 변방을 수비하고 수만 명을 통솔하였는데, 노복으로 하여금 수고롭게 하지 않았으며, 관리와 백성들의 노역을 가중시키지 않았습니다. 절의를 갖고 충성과 근면함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낙문과 단곡의 싸움에서는 적은 병력으로 많은 수의 적을 공격하여 강한 적을 격파시켰던 것입니다.

이전의 황제께서는 그가 임용될 만한 사람임을 아시고, 조정의 승리를 위임하고 훌륭한 책략을 주셨습니다. 등애는 명령을 받고는 자신의 몸을 잊고 말을 메어 놓고 수레를 이어서 직접 사지에 몸을 던졌는데, 그의 용기는 구름을 덮었고, 병사들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나아갔으므로 유선의 군신들로 하여금 직접 손에 결박을 하게하고, 우리에게 두 손의 손가락을 서로 어긋나게 끼고 무릎을 꿇도록 하였습니다. 등애의 공명은 벌써 이루어졌으므로, 마땅히 그의 공적을 대나무나 비단에 적어 만세까지 전해야만 됩니다. 일흔 살의 노인이 모반을 하여 무엇을 구하려 했겠습니까!

등애는 실제로 양육의 은혜에 기대어 마음속에는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 없었으며, 잘못 전해진 명령이 조정의 조서라고 말하고 받아 사직을 안정시키려고 도모했습니다. 비록 통상적인 법령을 위배할지라도 옛날 의미에 부합되는 것이 있으며, 그의 본심에 근거하여 죄를 정하면 본래 상의할 만한 것은 있습니다. 종회가 등애의 위엄과 명성을 시기하여 이런 일을 만든 것입니다. 충성을 했지만 주살 당하고, 신의를 다했지만 의심을 받은 것입니다. 등애의 머리를 말 시장에 걸고 아들들이 함께 참수되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탄식을 했습니다.

폐하께서 제위에 올라 커다란 도량을 분명하게 하시어 갖가지 의혹들을 풀어 주었으며, 주살 당한 사람의 가족 또한 구애됨이 없이 임용했습니다. 과거 진나라 백성들은 백기의 무죄를 불쌍하게 여겼고, 오나라 사람들은 자서의 억울한 참변을 가슴 아파하고, 모두 그들에게 사당을 세워 주었습니다. 지금 천하의 백성들이 등애를 애도하고 통한해 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신은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들판에 버려져 있는 등애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하고, 그 전택을 유족에게 돌려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촉나라를 평정한 공훈으로써 계속하여 그의 손자들을 봉하고 관을 덮은 후에 시호를 정하게 하시면 죽었지만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황천에 있는 등애의 영혼을 사면시켜 주시고 후세에 신의를 얻게 하십시오. 한 사람을 안장하여 천하 백성들이 당신의 덕행을 흠모하게 하고, 한 영혼을 매장하여 천하 사람들이 당신의 인의로 돌아오도록 한다면, 하시는 일은 적지만 기뻐하는 자는 많을 것입니다.>

9년(273), 조서를 내렸다.

<등애는 공훈이 있고, 벌을 받았을 때 형법을 피해 달아나지 않았으나 자손들은 평민이나 노예가 되었다. 나는 항상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지금 장손 등랑을 낭중으로 임명하라.>

등애가 서쪽에 있을 때, 변방의 경계선이 되는 성벽의 관새를 수리하고 성과 보루를 쌓았다. 태시 연간, 강족이 큰 반란을 일으켜 여러 차례 자사를 살해하고 양주로 통하는 길을 끊었다. 관리와 백성들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등애가 쌓은 성과 보루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등애와 같은 주의 출신인 동료 남양의 주태 또한 공업을 세우기를 좋아하고 용병에 뛰어났다. 관직은 정로장군과 가절도독강남제군사까지 이르렀다.

경원2년(261)에 세상을 떠났고, 위장군으로 추증했으며, 시호를 장후라고 했다.



세어世語에서 이르길: 당초 형주자사(荊州刺史) 배잠(裴潛)이 (주)태(州泰)를 종사(從事)로 삼았고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司馬懿)이 완(宛)을 진수하고 있었는데 (배)잠이 여러 차례 (주태를) 보내 선왕(宣王)에게 가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선왕(宣王)이 그를 알게 되었다. 그러다 (선왕이) 맹달(孟達)을 정벌할 때 (주)태 또한 군(軍)을 이끌었고 마침내 (선왕이 주)태를 벽소하였다. (주)태가 자주 상을 당해 부친, 모친, 조부를 위해 9년간 거상(居喪)하였는데 선왕은 (주태의 자리를) 결원으로 남겨두고 그(가 복귀하기)를 기다렸다. (거상을 마치고 복귀하자) 36일만에 탁용(擢)하여 신성태수(新城太守)로 임명했다. 선왕이 (주)태를 위해 모임을 열었는데 상서(尙書) 종요(鍾繇)를 시켜 (주)태를 놀리게 하였다,


“그대는 석갈(釋褐,평민의 복장인 ‘갈옷을 벗는다’는 뜻으로 ‘처음 관직에 부임한다’는 말)하고 재부(宰府,재상의 부서)에 오르더니 36일 만에 휘개(麾蓋,의장용 깃발과 거개車蓋)를 가진 채 병마(兵馬)를 관장하며 (태수로서) 군(郡)을 [맡게 되었소] [※③] 걸아(乞兒,구걸하는 아이)가 소거(小車)에 오르더니 어찌 이토록 빨리 달린단 말이오?”


(주)태가 말했다,


“실로 그런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명공(名公)의 자식으로 어려서부터 문채(文采,아름다운 문장 ; 문학의 재주)가 있었으므로 리(吏)의 직임을 맡았습니다. 원숭이가 토우(土牛)를 타고 달리듯 또한 어찌 이토록 (진급이) 늦단 말입니까!”


뭇 빈객들이 모두 (웃으며) 즐거워하였다. 뒤에 연주자사(兗州刺史)와 예주자사(豫州刺史)를 역임하였는데 부임하는 곳마다 주산(籌算,모책과 계산)과 적효(績效,공적)가 있었다.

분류 :
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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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19
등록일 :
2013.05.04
14:16:11 (*.52.89.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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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23
00:18:41
(*.52.89.87)
고원님 블로그에서 주석 채워넣었습니다.

KM학생

2014.01.08
20:44:39
(*.226.158.112)
오타발견

후에 전농강기가 되었으며, 상계리가 되었다. 때문에 태위 사마선왕을 만날 수 있었다. 사만선왕은 그가 보통 사람과 달리 기이한 면이 있음을 알고는 불러서 속관으로 임명했으며, 상서랑으로 승진시켰다. [1]

사만선왕 → 사마선왕 입니다. ㅎㅎ

코렐솔라

2014.01.08
21:28:24
(*.52.91.73)
넵, 감사합니다. 반영했습니다.

코렐솔라

2018.08.14
10:38:41
(*.112.38.51)
http://rexhistoria.net/161532 에 따라 조양현에서 극양현으로 수정.

구라뱅뱅

2019.10.21
11:24:01
(*.21.49.97)
https://cafe.naver.com/sam10/583360
삼도에서 오역에 대한 글 입니다.

漢晉春秋曰:初艾之下江由也,以續不進,欲斬,旣而捨之。
4] 한진춘추에서 이르길: 처음에 등애가 강유(江由)로 내려갈 때, 전속이 전진하지 않았으므로 목을 베려고 했지만 이미 달아나 버렸다.

捨 부분이 달아나다가 아닌, 그만 두다 이므로,
등애가 목을 베려던 것을 그만 두었다는 말이네요.

코렐솔라

2019.10.21
11:28:24
(*.46.174.164)
전속이 전진하지 않았으므로 목을 베려고 했지만 이미 달아나 버렸다. ->전속이 전진하지 않았으므로 목을 베려고하다 그만두었다.
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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