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대방의 남쪽이 있다. 동과 서로는 바다를 한계로 하고, 남으로는 왜와 접한다. 사방이 가히 4천리이다. 세 종족이 있는데 하나는 마한이고, 둘은 진한이며, 셋은 변한이다. 진한은 옛 진국으로, 마한의 서쪽에 있다. 
[집해1] 

[집해1] 정겸 왈, 삼한(三韓)에서는 마한(馬韓)이 가장 커서 그 땅으로 충청, 전라의 2도(道)와 경상도의 절반을 차지하였고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은 오직 경주 일대에 불과했을 것이다.

「조선사」에 의하면 비록 삼한이 분립했다고 칭해지나 실제로 진한, 변한 두 나라는 마한의 지배를 받았고 그 힘이 서로 필적하는 형세는 아니었다. 

//노필(삼국지집해 저자)이 보건대,「한서」조선전(朝鮮傳)에서 “진번(眞番),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해도 조선이 이를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했다.” 하였고, 안사고가 이를 注하여 “진(辰)은 진한(辰韓)의 나라를 일컫는다.” 하였다.

//「후한서」광무제기에서 “건무(建武) 20년(서기 44년) 가을, 동이(東夷) 한국인(韓國人)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군으로 와서 내부(內附)했다.” 하였고, 장회가 이를 주(注)하여 “동이(東夷)에 진한, 변한, 마한이 있어 이를 일컬어 삼한국(三韓國)이라 했다.” 하였다.

//「양서梁書」(권54 신라전)에서는 “진한에는 처음 6국이 있었으나 점차 나뉘어져 열둘이 되었고 신라(新羅)가 그 중 하나다.”라 하였고 (백제전에서는) “마한(馬韓)에는 54국(國)이 있었고 백제가 그 중 하나다.”라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권199 백제전)에서는 “백제국(百濟國)이 마한(馬韓)의 옛 땅”이라 하였다.

그 사람들은 토착 생활을 하며 곡식을 심고 누에를 칠 줄 알며 면포를 짓는다. 저마다 장수가 있어 우두머리들은 스스로 일러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며 성곽은 없다. 

마한의 나라로는

원양국과 모수국, 상외국, 소석색국, 대석색국, 우휴모탁국, 신분고국, 백제국, 속로불사국, 일화국, 고탄자국, 고리국, 노람국, 월지국, 자리모로국, 소위건국, 고원국, 막로국, 비리국, 점리비국, 신흔국, 지침국, 구로국, 비미국, 감해비리국, 고포국, 치리국국, 염로국, 아림국, 사로국, 내비리국, 감해국, 만로국, 벽비리국, 구사오단국, 일리국, 불미국, 지반국, 구소국, 첩로국, 모로비리국, 신소도국, 막로국, 고랍국, 임소반국, 신운신국, 여래비리국, 초산도비리국, 일난국, 구해국, 불운국, 불사분사국, 원지국, 건마국, 초리국이 있으니 무릇 50여국이다. [집해8]

[집해8] 범엽의「후한서」에서는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개 국이 있고, 그 북쪽은 낙랑(樂浪),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하였다. 

/「만주원류고」권2에서 “살펴보건대 삼한(三韓)의 총칭은 진국(辰國)이고 한나라 초부터 이미 보인다. 뒤에 신라, 백제에 의해 겸병되었다. 그 78국의 이름은 위지(魏志)(동이전)에 모두 실려 있는데, 감해비리, 내비리, 벽비리, 여래비리와 같이 비리(卑離) 두 글자에 연계된 국명이 많다. 만주어로 이를 고찰 해보면, 응당 비리는 패륵의 음이 변한 것으로 汗(한)이 와전되어 韓(한)이 된 것과 똑같으며, 3한이 여러 패륵을 통수하니 체제에 있어 흡사하고 서로 부합한다. 

※ 패륵 [貝勒] - 청나라 때 만주인 종실과 몽고의 외번들에게 봉해진 작위 가운데 하나를 이르는 용어. 청나라에서는 만주인 종실과 몽고의 외번들에게 여섯 가지의 작위를 나누어 봉했는데, 그 여섯 가지는 친왕•군왕•패륵•패자•진국공•보국공 등이었음. 이 가운데 패륵은 만주어로 부장(部長)이라는 뜻임. 

마한은 모한(慕韓)으로도 적고, 진한은 진한(秦韓)으로도 적고, 변한은 변진(弁辰)이나 변한(卞韓)으로도 적는다.「상서전」에서 부여한이라 아울러 칭했다. 당시의 비슷한 음으로 모두 한어(漢語)가 아니다. 

범엽이 처음으로 ‘한국(韓國)’, ‘한인(韓人)’이란 말을 썼고 위지(魏志)에서는 마침내 ‘한지(韓地)’, ‘한왕(韓王)’이란 말이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릇되이 ‘한씨(韓氏)’라 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변한(弁韓)도 삼한 중에 있었으나 그에 관해 기재한 바가 유독 적다.

「사기」중의 주(注)에서 ‘番의 음은 普와 寒의 반절’이라 하였다. 요동에 번한현이 있었는데 혹 번한(弁韓)의 전음(轉音)인 듯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간혹 삼한(三韓)이 고려(高麗)가 되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이는「송사宋史」고려전에서 비롯된 것 같으니 “북송 휘종 숭녕(崇寧) 연간(1102-1106) 후 고려가 삼한통보(三韓通寶)를 주조했다”는 글이 있고 또한「요사」외기(外 紀)에 의하면 요(遼)나라 때에 늘 삼한국공(三韓國公)을 고려의 봉해진 호족들로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삼한 땅이 모두 고려에 편입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고, 고려의 지경이 또한 삼한이 통할하던 곳의 일부에 속함은 알지 못하였으니, 당시에 가차(假借)해서 쓴 것을 깊이 고찰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리고 요나라의 삼한현(三韓縣)은 고려의 포로를 취해 설치한 것으로, 그 옛 영역은 아니다.” 하였다.

큰 나라는 만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이니, 총 10여만 호다. 진왕은 월지국에서 다스린다. 신지(臣智)는 때로 우대하는 호칭이 더해져 신운(臣雲) 견지보(遣支報), 안야(安邪)(국의) 축지(踧支), 분신리아(濆臣離兒)의 불례(不例), 구야(拘邪) 진지렴(秦支廉)의 호칭으로 불리운다. 그 관직에는 위솔선(魏率善), 읍군(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 있다.

조선후 준이 참람하게 왕을 호칭하고서, 연의 망인 위만(衛滿)에게 공격받아 왕위를 빼앗기게 되었다. [집해11][1] 

[집해11] 정겸 왈, 기회(준왕)는 마한(馬韓)에서 왕 노릇했다.「조선사」의 말에 의하면 위만(衛滿)의 핍박을 피해 무리를 이끌고 금마군(金馬郡)을 빼앗아 그곳에서 거주하며 무강왕(武康王)이라 자칭했다. 금마군(金馬)은 본전(本傳)에서 말한 월지국이며 지금의 전라도 익산군(益山郡)이다.

[1] 「위략魏略」왈, 옛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하자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는, 조선후 또한 왕이라 자칭하고 군대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습하여 주 왕실(周室)을 받들려 하였으나, 그 나라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언하므로 그만두었다. 예(禮)를 서쪽으로 보내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침략하려는 것을 조선을 공격하지 않았다. 

뒤에 조선의 후손들이 점차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조선의 서쪽을 공격해 2천여 리 땅을 빼앗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그곳을 경계로 삼으니 마침내 조선(朝鮮)이 쇠약해졌다. 

그러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아우른 뒤 몽념(蒙恬)을 시켜 장성(長城)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조선왕 부(否)가 즉위해 진나라가 조선을 습격할까 두려워하여 대체로 진나라에 복속(服屬)했으나 조회(朝會)하려 하지는 않았다. 부가 죽고 그의 아들 준(準)이 즉위한 지 20여 년 만에 진승(陳勝), 항우(項羽)가 봉기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점차 준(準)에게로 달아나니 이에 준(準)이 그들을 조선의 서방(西方)에 두었다. 

그러다 한나라가 노관(盧綰)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은 노관의 봉국인 연(燕)과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집해15] 그러다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해 흉노로 들어가자 (※ 노관이 흉노에 투항한 것은「사기」노관전,「한서」고제기에 의하면 고조 12년인 B.C 195년 4월 유방이 죽은 뒤의 일입니다.)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오랑캐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준(準)에게로 와서 항복하고는, 준(準)을 설득하여 조선의 서쪽 경계에 거주하며 중국의 망명인 들을 거두어 조선의 울타리가 되기를 청했다. 준(準)이 그를 신임하고 총애하여 박사(博士)로 임명하고 규(圭, 홀)를 하사하며 백리 땅에 봉하여 서쪽 변경을 지키게 했다. 위만이 중국인 망명자 일당들을 꾀어 들여[집해17] 그 무리가 점차 많아지니 이에 사람을 보내 준(準)에게 거짓으로 고하길 ‘한나라 군대가 열 갈래 길로 쳐들어왔으니 왕궁으로 들어가 수비하기를 원한다.’ 하고는 마침내 되돌아가 거꾸로 준(準)을 공격했다. 준(準)이 위만(滿)과 더불어 싸웠으나 감당하지 못했다. [집해18]

[집해18] 노필이 보건대「위략」이 말하는 바는「사기」나「한서」의 조선전과 대체로 같으나 비교적 더 상세하여 가히「사기」나「한서」조선전의 빠진 부분을 보완해 준다. 

//정겸 왈, 조선사에서 서로 전하기로는 그 나라(조선)는 단군(檀君)으로부터 비롯되어 1,048년을 전하였고 주나라 초에 이르러 기자(箕)가 이를 대신해 흥하여 40세(世)를 전하다 연인(燕人) 위만(衛滿)에게 습격 받았고 위만이 그 땅을 점거하였다 한다. 반고의「한서」는 한나라 때의 일을 기록하였으니 이 때문에 (조선이) 위만에서 시작된 것으로 가탁하였다. 

진번(眞番)은 본래 조선에 부속된 번부(番部)로 칠국 때(전국시대) 연나라에게 합병되었으며, 무제가 조선을 격파하고는 이를 고쳐 진번군(郡)으로 삼았다. 진번군의 치소는 잡현(霅縣)이었으니 지금의 봉천 흥경청(興京廳)의 변경 바깥에 있었고 동남쪽으로 압록강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패수(浿水)에는 둘이 있었다.

「신당서」고려전에서 “(고구려 왕성인 평양성은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연해있다.” 한 것은 대동강(大同江)을 가리키고, 이 동이전(傳)의 패수(浿水)는 모두 압록강을 가리키나, 지금 상고하는 자들이 다만 대동강이 패수라는 것만 알 뿐 압록강 또한 패수의 이름이란 것을 알지 못하였다. 대저 대동강은 평양의 남쪽에 있고 위만이 도읍한 왕험성(王險城)이 즉 평양이다. (그러나) 위만이 패수를 건넌 뒤에 이곳에 거처했으므로 즉 패수는 평양의 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첫째 증거이다. 

한무제 때 섭하(涉何)가 조선왕 우거(右渠)를 초유하고 한나라 조정으로 돌아가면서 분명 패수(浿水)를 거쳤으니 이것이 둘째 증거이다. 

좌장군(순체)이 (조선의) 패수서군(浿水西軍)을 격파하고 바야흐로 왕검성(王險)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셋째 증거이다. 

우거(右渠)의 태자가 조정으로 들어가 천자에게 사죄하려 하여 패수(浿水)에 도착한 뒤에 사람들을 이끌고 되돌아갔으니 이것이 넷째 증거이다. 

이를 보건대 동이전 중의 패수(浿水)는 모두 압록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임둔(臨屯) 또한 조선의 번부(番部)였다가 뒤에 임둔군(郡)이 되었는데 그 치소는 동이(東暆)(현)으로 지금의 조선 강원도 강릉부(江陵府)의 성이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후 준은 그의 측근들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달아나 바다로 들어가니, 한의 땅에 거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호칭하였다. [2]

[2] 위략이 말했다. “그 아들과 친척이 본국에 남아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성을 한씨라 하였다. 준왕은 바다 가운데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후손이 끊여 없어졌으나 지금 한인들로 오히려 그 제사를 받드는 자가 있다. 

그 뒤 절멸(絶滅)되었으나 지금도 한인(韓人) 중에 여전히 그의 제사(祭祀)를 받드는 이가 있다.[집해19]
 
[집해19] 정겸 왈,「동번기요」에 의하면, 마한이 나라를 세운 것은 조선왕 기회(箕淮)(준왕準王)가 처음으로서 한나라 혜제 원년(B.C 194)의 일이고 뒤에 백제왕 온조에게 멸망된 것은 신나라 왕망 2년 (※「삼국사기」권23 백제 온조왕 27년(서기9년) 조에 ‘마한 멸망’의 기사가 있고, 서기9년은 왕망 시건국 원년에 해당됩니다.)의 일이니 나라를 전한 것을 헤아려 보면 203년이다.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은 처음 어느 때에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뒤에 모두 신라왕(新羅王) 혁거세(赫居世)에게 멸망되었으니 이는 한나라 선제 오봉(五鳳,B.C 57-54) 이후의 일이다. 이 삼한(三韓)에 나라가 있었던 것은 모두 서한(전한) 때의 일이며 동한(후한) 초에는 삼한(三韓)은 이미 망한 뒤이니 어찌 하물며 조위(曹魏)를 논하겠는가? 

진씨(陳氏)(진수)의 이 삼국지 동이전은 진(晉)나라 초에 지어졌으나 여전히 삼한의 일을 말할 뿐 백제, 신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니 어찌된 일인가? 

내가 동이전의 글을 세밀히 살펴보고 조선사(朝鮮史)를 참조해 볼 때, 위에서 “그 뒤 절멸되었다.” 말한 것은 즉 백제(百濟)에게 멸망한 것이고 “한인(韓人) 중에 여전히 그의 제사를 받드는 이가 있다.” 말한 것은 즉「후한서」에서 “준왕의 후손이 절멸된 뒤 마한인이 다시 스스로 왕으로 즉위했다” 한 것을 가리킨다.
  
한나라 때는 낙랑군(樂浪郡)에 속하여 사시(四時)에 입조하여 알현하였다. [집해20][2]

[집해20] 범엽의「후한서」동이전에서 “후한 건무20년(서기 44년) 한인(韓人) 출신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군으로 와서 조공하니, 광무제가 소마시를 한(漢)나라의 염사 읍군(邑君)으로 봉해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자주 입조하여 알현토록 했다.” 하였다.  

[2]「위략」왈, 당초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으로 진국(辰國)으로 가니[집해21] 당시 그를 따라 이주한 백성이 2천여 호(戶)에 달했으며 또한 조선, 공번(※조선에 조공하던 번국)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집해21]「한서」에서 “한무제 원봉(元封) 3년(B.C 108) 여름, 니계상(尼谿相)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朝鮮王) 우거(右渠)를 죽이고는 와서 항복했다.” 하였다.

왕망(王莽) 지황(地皇:서기 20-23년) 때 염사착(廉斯鑡)이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였는데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고 인민들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말을 듣고는 달아나 낙랑으로 와서 항복하고자 했다. 그 읍락을 나왔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보았는데 그의 언어가 한인(韓人)의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물으니 남자가 말했다, 

“우리들은 한나라 사람(漢人)으로 제 이름은 호래(戶來)입니다. 우리들 무리 1,500명은 나무를 베다가 한(韓)의 습격을 받아 사로잡혔고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예가 된 지 3년이 되었습니다.” 

염사착이 말했다,

“나는 한나라의 낙랑에 항복하려 하는데 그대도 함께 가지 않겠는가?” 

호래(戶來)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리하여 염사착이 호래를 데리고 떠나 낙랑군 함자현(含資縣)에 도착했다.[집해23] 

[집해23] 양한지에 의하면 낙랑군의 현이고, 삼국시대의 위(魏)나라가 대방군(帶方郡) 소속으로 고쳐「진서」지리지에서는 대방군에 속한다.「일통지」에 의하면 그 옛 성이 지금의 조선 경기도 성 남쪽 지경에 있다 한다.

함자현에서 낙랑군에 보고하자 낙랑군에서는 염사착을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辰韓)으로 들어가 호래와 함께 항복한 무리를 맞이하여 천명은 되찾았으나 그들 중 5백 명은 이미 죽은 뒤였다. 염사착이 이때 진한(辰韓)을 깨우치며 말했다, 

“너희는 5백 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러지 않으면 낙랑(樂浪)이 1만 군사를 보내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칠 것이다.” 

진한(辰韓)이 말했다, 

“5백 명이 이미 죽었으니 우리는 그에 대한 보상을 치루겠습니다.” 

그리고는 진한 사람 15,000명과 변한포 15,000필을 내어놓았다. 염사착이 이를 거두어 곧바로 돌아왔다. 낙랑군(郡)에서는 염사착의 공의(功義)를 표창하여 농토와 집을 하사했다.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지나 후한 안제(安帝) 연광 4년(서기 125년)에 이르기까지 조세나 부역을 면제받았다.
 
(후한) 환제(桓帝), 영제(靈帝) 말(재위 146-189년), 한(韓), 예(濊)가 강성하여 한나라의 군현(郡縣)이 능히 통제하지 못하자 군현의 백성들이 다수 한국(韓國)으로 유입하였다.
 
후한 헌제 건안(建安: 196-220년)중,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거친 땅을 갈라 대방군을 세우고는[집해25] 공손모, 장창 등을 보내 유민(遺民)들을 거두어 모으고 군대를 일으켜 한(韓), 예(濊)를 치니 한국으로 유입했던 예전 백성들이 점차 한국으로부터 나왔고 이후로 왜(倭), 한(韓)이 마침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 
 
[집해25] 양한지에 의하면 낙랑군의 둔유현이다. 이조락 왈, 지금의 조선 평양성(平壤城) 남쪽이다. 

정겸 왈, 대방군의 치소가 있던 곳에 관해서 예전 사람들이 모두 언급하지 않았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 함자현에 대수가 있어 서쪽으로 흐르다 대방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경기도 북쪽 지역을 살펴보면 임진강이 있어 강원도 이천군 북쪽에서 발원해 개성(開城)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딱 낙랑(樂浪)의 남쪽이며 다시 그 남쪽이 바로 백제(百濟)의 지경이다. 이런 형세로 헤아려 볼 때 임진강이 바로 한나라 때의 대수(帶水)일 것이고 그러한 즉 이천군(伊川郡)이 한나라 때의 함자현이다. 진한의 거수가 먼저 함자현에 도착해 항복했으니 함자현이 실제로 진한에서 낙랑에 이르는 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이천군이 평양의 동남쪽에 위치하니 그 정형이 매우 잘 들어맞는다. 이로써 보면 임진강이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므로 개성이 대방군 땅이 있던 곳은 아니나, 지금 개성군을 대방으로 가정하면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은 듯하다.
 
경초(景初: 237-239) 중, 위나라 명제(明帝)가 은밀히 대방태수 유흔, 낙랑태수 선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두 군(郡)(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정했다. 그리고 여러 한국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의 인수를 수여하고 신지보다 아래 군장들에게는 읍장의 인수를 수여했다. 그 풍속이 의책(衣幘)을 좋아하므로 지배 하의 군민들이 군(郡)으로 입조해서 알현할 때마다 그들 모두에게 의책을 내리니 스스로 인수와 의책을 착용한 이가 천여 명에 달했다. 

부종사 오림이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떼어내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전하는데 다른 점이 있어 신지(臣智)와 한인(韓人)들이 분노해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했다. 

이때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대를 일으켜 이를 치다가 궁준이 전사했으나 2군(二郡)(낙랑군과 대방군)이 마침내 한(韓)을 멸했다.[집해26]
 
[집해26] 정겸 왈, 백제가 비록 마한을 멸했으나 마한 중에는 여전히 12개의 작은 부(部)가 있어 한왕(韓王)의 칭호를 이었다. 

위 동이전 기사에서 환제, 영제 말에 한(韓),예(濊)가 강성하다 건안 연간 뒤에 왜, 한이 대방(帶方)에 복속하였고 명제 때에 이르러 2군(二郡)이 마침내 한(韓)을 멸했다 하였으나 이는 모두 마한인이 자립(自立)한 작은 부(部)를 가리키는 것이지 삼한(三韓)의 전체 영역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삼한이 예전에는 모두 토착민들의 흩어진 여러 부(部)가 세력이 나뉘고 역량이 미약하였으니 이 때문에 낙랑이 이들을 복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백제와 신라가 크게 흥하자 땅이 크고 군대가 강하여 족히 고구려와 정립할 정도였고 중국의 군현이 능히 제어(制馭)할 수 있는 바가 결코 아니었다. 어찌 당시의 중국이 끝내 듣지도 묻지도 않고 막연히 해 두며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단 말인가. 

백제는 본래 마한 열국 중의 하나이고 신라는 변진 열국 중의 하나로서 비록 겸병하여 저절로 커졌으나 어찌 여전히 삼한으로 간주하여 특별히 구분하지 않았는가. 아, 소루(疏漏)함이 심하도다. 어찌 괴이하게도「진서」,「후한서」가 아울러 그 오류를 답습하며 이를 깨닫지 못했는가.
 
그 마한의 풍속은 기강이 허술하여 국읍(國邑)에 비록 우두머리들이 있으나 읍락(邑落)에서 읍락민들과 뒤섞여 살며 잘 제어하지 못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간에 무릎을 꿇고 절하는 예(禮)가 없다. 거처하는 곳은 초가집, 흙집을 지어 그 모양이 무덤과 같고 문이 윗부분에 있는데 온 집안 식구가 그 속에서 함께 살며 장유(長幼), 남녀(男女)의 구별이 없다. 
 
그들이 장례를 치를 때는 곽(槨)은 있으나 관(棺)은 없다. 소, 말을 탈 줄 모르고 소, 말을 모두 장례용으로 쓴다. 옥돌과 진주를 보배로운 재물로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에 걸거나 귀에 달기도 하나, 금은과 비단은 진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정은 굳세고 용맹하고, 머리카락을 틀어서 묶고, 맨머리를 드러내니[집해28] 그 모양이 번쩍이는 병기와도 같고,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는다. 

[집해28]장회가 후한서에 주를 달며 “이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맨머리와 같다. 머리카락을 얽어 둘러 과결(科結,또는 과계)을 만든다.
 
그 나라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할 때는 여러 용맹하고 건장한 젊은이들이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밧줄로 꿰고 또한 1장(丈) 남짓의 나무를 매달고는 온종일 떠들썩하게 소리 지르면서 일하며 이를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니, 이로써 작업을 권하며 또한 이를 씩씩한 것으로 여긴다.
  
늘 5월에 파종(씨뿌리기)을 마치면 귀신에 제사지내며 무리 지어 모여 가무, 음주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서서 서로 뒤따르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며 손, 발을 서로 맞추는데 그 가락은 중국의 탁무와 유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또한 이와 같이 한다. 
 
귀신을 믿으며 국읍에 각각 한 명씩을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며 그를 천군이라 부른다. 또한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이 있어 이를 소도라 부르며,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여러 도망자들이 그 곳에 도착하면 이들을 모두 돌려보내 처벌하지 않으니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이 소도를 세우는 뜻은 불탑과 유사하나 선을 행하냐 악의 행하냐의 차이가 있다.
 
그 북방의 중국의 군(郡)에 가까운 여러 나라(마한 중에서 북쪽에 있어 중국 군현과 가까운 나라)는 다소 예속(禮俗)을 깨우쳤으나 멀리 있는 나라들은 예속을 몰라 마치 죄수나 노비들이 서로 무리 지어 사는 것과 같다. 다른 보물은 없고 금수, 초목은 대체로 중국과 같다. 큰 밤이 나는데 크기가 배만 하다. 또한 세미계가 나는데 그 꼬리 길이가 모두 5척 남짓이다. 그 남자에게는 때때로 문신이 있다. 
 
또한 주호(州胡)가 마한 서해 중의 큰 섬 위에 있다.[집해31] 

[집해31] 정겸(丁謙) 왈, 주호(州胡)는 즉 지금의 제주(濟州)임에 틀림없다.

그 사람들은 다소 키가 작고 몸집이 작아 언어가 한(韓)과 같지 않고 모두 선비족처럼 머리를 깎고(곤두髡頭) 다만 가죽으로만 옷을 해 입고 소,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 옷에는 상의는 있으나 하의가 없어 대체로 벌거벗은 형세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과 교역을 한다.

○ 진한전(辰韓傳)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그 나라의 노인들이 대대로 전해진 옛이야기를 들며 스스로 말하길, 옛 망명한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노역을 피해[집해33] 한국(韓國)으로 오니 마한(馬韓)이 그 동쪽 지경의 땅을 갈라 주었다고 한다. 

[집해33] 범엽의「후한서」에는 “스스로 말하길 진나라의 망인(亡人)이 고역(苦役)을 피해”(自言秦之亡人避苦役)라 적혀 있다.
 
이곳엔 성책들이 있다. 그 언어가 마한과 같지 않아 국(國)을 방(邦)이라 하고 궁(활)을 호(弧)라 하고 도적을 구(寇)라 하고 행주(行酒,잔에 술을 부어서 돌림)를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를 때 모두 도(徒)라 하니 진나라 사람들의(秦人)의 관습과 유사하니 연(燕), 제(齊)만을 닮은 것만이 아니다. 

진한인들은 낙랑인들을 아잔(阿殘)이라 부르는데, 동방인들은 아(我,나)를 아(阿)라 하니 아잔은 ‘낙랑인들이 본래 그들의 잔여인(殘餘人)’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도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 부를 때가 있다. 처음에는 6국이 있었으나 점차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다.[집해36] 
 
[집해36] 범엽의「후한서」에는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고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한다.” 하였다.
 
진한과 마찬가지로 변진(弁辰) 또한 12국이다.[집해37] 

[집해37] 범엽의「후한서」에서는 변진(弁辰)이 진한(辰韓)의 남쪽에 있고 또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으로 또한 왜(倭)와 접한다고 하였다.

진한과 변진에는 또한 여러 작은 별읍이 있고 각기 우두머리가 있는데 세력이 큰 자는 신지(臣智)라 부르고, 그 다음에는 험측, 그 다음에는 번예(樊濊), 그 다음에는 살해(殺奚), 그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

진한과 변진의 나라로는 이저국과 불사국, 변진미리미동국, 변진접도국, 근기국, 난미리미동국, 변진고자미동국, 변진고순시국, 염해국, 변진반로국, 변진악노국, 군미국(변군미국), 변진미오사마국, 여담국, 변진감로국, 호로국, 주선국, (마연국), 변진구사국, 변진주조마국, 변진안사국, 변진독로국, 사로국[집해46] , 우유국이 있다. 변진과 진한 합하여 24국이다. [집해48]

[집해46] 사로는 즉 신라(新羅)이며, 바로 현지어의 한자 표기로 인해 변한 것이다.

[집해48] 정겸 왈, 진한, 변한의 두 나라는 지금의 조선 동남쪽인 경주(慶州) 일대에 있었다. 대체로 진한이 북쪽, 변한이 남쪽에 살았으나 중간에 두 종류가 섞여 거주하여 구분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변진을 합칭했다. 24국을 살펴보면 변진이라는 말이 앞에 붙은 11국이 응당 변한 소속일 것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진한에 속할 것이다.

대국의 호구 수는 4-5천 가(家), 소국은 6-7백 가(家)로 총 4-5만 호(戶)이다. 그 중 12국은 진왕(辰王)이 다스린다. 진왕은 늘 마한인이 맡아 대대로 서로 계승하며 진왕(辰王)이 스스로 즉위해 왕이 되지는 못한다.[3]
 
[3]「위략」왈, 그들(진한)은 분명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이기 때문에 마한(馬韓)의 통제를 받는 것이다.

진한은 토지가 비옥하고 오곡(五穀)과 벼(稻)를 심기에 적합하다.[집해49] 누에와 뽕나무를 알아 고운 비단으로 짠 피륙을 만들고 소와 말을 타거나 멍에를 채워 몬다. 혼인하는 예속은 남녀의 구별이 있다. 큰 새의 깃털을 써서 장례를 치르니 그 뜻은 죽은 자가 새처럼 날아오르게 하려는 것이다.[4] 

[4]「위략」왈, 그 나라는 집을 지을 때 나무를 가로로 포개어 지으니 그 모습이 감옥과 유사하다.

그 나라에서는 철이 산출되며 한(韓), 예(濊), 왜(倭)가 모두 이곳으로부터 철을 구한다. 여러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모두 철을 쓰니 이는 중국이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한 2군(낙랑군과 대방군)에도 철을 공급한다.
 
그 풍속은 가무(歌舞), 음주(飮酒)를 좋아한다. 슬(瑟)이 있으니 그 모습이 축(악기 이름)과 비슷하고 연주하는 음곡도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돌로 그 머리를 누르니 이는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려 하는 것이고 지금 진한인(辰韓人)들은 모두 편두(납작 머리)이다.[집해50] 

[집해50] 범엽의「후한서」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려고 모두 돌로 누른다.” 하였다.

「만주원류고」권2에서 “무릇 돌로 머리를 누르는 것은 장부도 감당하지 못할 일이니 막 태어난 어린 아이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실로 인정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주의 오랜 풍속에서는 아이가 태어나 수일 째가 되면 와구에 두어 아이가 위를 바라보게 하여 눕히니 오래 지나면 뇌골이 저절로 평평해져 머리 형태가 납작한 것처럼 된다. 이는 익숙해져 저절로 그리된 것이라 족히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니며 진한 또한 이와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한인(漢人)들은 아이를 낳으면 늘 옆으로 눕히니 오래 지나면 좌우가 모지고 평평해져 머리 형태가 좁은 것처럼 된다. 몽고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가죽 띠로 나무판에다 묶어 땅에 세워 두니 장성하면 넓적다리 형태가 미세하게 (곡식을 까부르는) 키 모양이 된다. 만약 위종(범엽)의 말대로라면 한인(漢人)과 몽고 또한 모두 돌로 눌러서 그 머리를 좁게 만들거나 넓적다리를 키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인가? 

삼한의 명명에 관해서는 사서에서 차례로 마한, 진한, 변한[변진이라고도 한다]을 열거하였으나 한(韓)이라 칭한 뜻은 분명치 않다. 그런데 진수의 위지에선 곧바로 한지(韓地), 한왕(韓王)이라 하였고 어환의 위략(魏略)에서는 더욱이 조선왕 준(準)이 한씨(韓氏) 성(姓)을 사칭했다 하였으니, 그 부회(附會)함이 매우 심하도다. 

대저 만주어와 몽고어에서는 모두 군장(君長)을 한(汗, 흔히 아는 징기스'칸'의 칸)이라 일컫는다. 한(韓)은 한(汗)과 더불어 그 음이 서로 같으니 사서에 실린 삼한(三韓)의 각 수십 국은 당시에 필시 삼한(세 명의 汗)이 있어 이를 나누어 다스렸을 것이다. 그러나 사가(史家)들은 한(汗)이 임금(君)임을 모른데다 보잘것없고 비루하여 한(韓)을 족성(族姓)이라 자칭한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쟁반을 두드리고 피리를 어루만져 보고는 해(日)를 식별했다고 하는 장님과 어찌 다를 바가 있겠는가? 

또한 중외(中外)의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억지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 형세로다. 지금 무릇 위에서 하늘이 밝게 비추고 사람들은 모두 이를 우러르는데, 한어(漢語)에서는 이를 천(天)이라 하고 만주어에서는 이를 아복객이라 하고 몽고어에서는 이를 등격리라 하고 서번어에서는 이를 나목객이라 하고 회어에서는 이를 아사만이라 한다. 저 언어로써 이 언어를 말하면 서로 알아들을 수 없으나 사람이 공경하는 바와 하늘이 주는 감흥이 서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필히 일일이 한자(漢字)로 끌어 붙여 억측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불가능하겠는가? 무릇 한(韓)과 한(汗)은 음이 유사하나 뜻이 다른데도 헛소리를 하며 그르쳐서 왜곡하였음을 오히려 알 수 있다. 돌로 머리를 눌렀다는 헛소리의 경우에도 실로 이치에 어긋나므로 불가능한 말이다.

왜(倭)와 가까워 남녀가 또한 문신을 한다. 보전(步戰)에 능하고 병장기는 마한(馬韓)과 같다. 그 풍속에서는 길을 다니다 서로 마주치면 모두 멈추고는 길을 양보한다.

변진(弁辰)은 진한과 더불어 뒤섞여 살며 또한 성곽이 있다.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다. 언어와 법속은 진한과 서로 유사하나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에는 차이가 있고 부엌을 문의 서쪽에 둔다. 변진 중의 독로국(瀆盧國)은 왜(倭)와 경계를 접한다.[집해52] 변진 12국에는 또한 왕(王)이 있으며 그 사람들의 형체는 모두 크고, 의복이 청결하고 머리카락이 길다. 또한 폭이 넓은 고운 피륙을 만든다. 법속이 특히 엄격하다.
 
[집해52] 정겸 왈, 독로(瀆盧)는 응당 지금의 경상도 남쪽의 거제도일 것이다. 이 섬은 일본의 대마도와 동서 거리가 멀지 않으니 이 때문에 왜와 경계를 접한다 한 것이다.


============================================ 참고 자료 ====================================================
 
※[표3] 이병도(李丙燾)의《韓國古代史硏究 262~266쪽》와 천관우(千寬宇)의《마한 제국의 위치시론, 동양학 9, 1979》에 따른 마한 54국의 위치비정 (한국고전번역원 역주에서 인용함)

 

소국명

현재의 지명

이병도 설

천관우 설

원양국

경기 수원 음덕면 일대

경기 파주, 연천 일대?

모수국

경기 수원 일대

경기 양주

상외국

경기 수원 장안, 우강면 일대

경기 파주, 연천?

소석색국

경기 서해의 섬

경기 강화 교동

대석색국

소석색국 부근

경기 강화

우휴모탁국

경기 부천

강원 춘천

신분활국

경기 양성

경기 가평?

백제국

경기 광주

서울 강남

속로불사국

경기 통진 지방

경기 김포 대곶, 월곶

일화국

미상

경기 양평, 지평?

고탄자국

미상

경기 양평, 지평?

고리국

경기 양주 풍양

경기 여주?

노람국

경기 이천군의 음죽면 일대

경기 이천군?

()지국

충남 직산, 성환

평택 등지를 포함한 지역

자리모로국

경기 이천군의 일부(노람국과 인접)

충남 서산 지곡

소위건국

미상

충남 보령군

고원국

미상

충남 당진

막로국

미상

충남 예산, 덕산

비리국

전북 옥구군 회면 일대

충남 예산, 덕산

점리비국

전북 고부군?

충남 홍성군 결성

신흔국

충남 옛 진잠현?

충남 온양군?

지침국

충남 대흥 지방

충남 예산군 대흥

구로국

충남 청양군?

충남 청양군

비미국

옛 비인현(충남 서천의 일부)

충남 서천군 비인

감해비리국

충남 홍성군

충남 공주군

고포국

미상

충남 부여군

치리국국

충남 서산군 지곡면 일대

충남 서천군 한산

염로국

미상

전북 익산군 함열

아림국

충남 서천군?

충남 서천군

사로국

충남 홍성군 장곡면

충남 논산군 은진?

내비리국

미상

충남 대덕군 유성

감해국

전북 함열

전북 익산군

만로국

충남 보령군의 일부인 남포

전북 옥구군

벽비리국

전북 김제 전남 보성군 복내면 일대

전북 김제군

구사오조국

전남 장성군 진원면 일대

전북 김제군 금구

일리국

미상

전북 부안, 태인?

불리국

전남 나주군

전북 부안, 태인?

지반국

미상

전북 부안, 태인?

구소국

위명(僞名)으로 간주

전북 정읍군 고부

첩로국

미상

전북 정읍군

모로비리국

전북 고창군

전북 고창군

신소도국

충남 태안(서산)

전북 고창군 흥덕

막로국

중출(重出)로 간주

전남 영광군

고랍국

전북 남원군

전남 장성군

임소반국

전북 옥구군

전남 광산, 나주?

신운신국

충남 천안군?

전남 광산, 나주?

여래비리국

전북 여산 지방

전남 화순군 능주

초산도비리국

전북 정읍군

전남 진도군 군내면

일난국

미상

전남 영암군

구해국

전남 강진군

전남 해남군 마산

불운국

충남 공주의 서부?

전남 보성군 복내 이복성?

불사분야국

전북 전주군

전남 승주군 낙안

원지국

미상

전남 여수군

건마국

전북 익산군

전남 장흥군

초리국

미상

전남 고흥군 남양


 
※ [표4] 이병도(李丙燾)의《韓國古代史硏究 274~276쪽》와 천관우(千寬宇)의《진ㆍ변한 제국의 위치 시론, 백산학보 20, 1976》에 따른 진한과 변진 24국의 위치비정 (한국고전번역원 역주에서 인용함)
 

 

소국명

현재의 위치

이병도의 설

천관우의 설

이저국

경북 안동군

경북 영주군 풍기(기목)

불사국

경북 창녕군

경북 안동

변진미리미동국

경남 밀양군

경북 예천군 용궁, 상주군 함창 포함

변진접도국

경남 칠원

미상(경북 상주?)

근기국

경북 영일군

경북 청도

난미리미동국

경북 의성군

경남 창녕군 영산

변진고자미동국

경남 고성군

경남 고성

변진고순시국

미상

경남 사천, 삼천포

염해국

경남 울산군

미상(경북 대구?)

변진반로국

경북 성주군

미상(경남 합천?)

변릭노국

경남 하동군 악양면 일대

미상(경남 진주?)

군미국

미상

경북 칠곡군 인동

변군미국

경남 사천군

경북 칠곡군 약목, 성주

변진미오야마국

경북 고령 지방

경북 고령, 성산 포함

여담국

경북 군위군

경북 의성군 탑리, 군위

변진감로국

경북 금릉군 개령 일대

경북 금릉군 개령, 선산 포함

호로국

경북 상주군 함창면 일대

경북 영천

주선국

미상

미상(경북 경산군 자인, 경산?)

마연국

미상

경남 밀양

변진구야국

경남 김해 일대

경남 김해

변진주조마국

경북 금릉군 조마면 일대

경남 함안군 칠원, 마산

변진안야국

경남 함안군

경남 함안

변진독로국

경남 동래군

경남 동래

사로국

경북 경주

경북 경주

우유국

경북 청도군

경북 울진


출처: 史랑방

분류 :
위서
조회 수 :
13656
등록일 :
2013.05.04
15:16:20 (*.148.48.73)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2722/f91/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2722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촉서 촉서 목차 링크 재원 2013-07-08 235921
공지 위서 위서 목차 링크 [2] 재원 2013-06-29 235889
공지 오서 오서 목차 링크 [3] 재원 2013-06-28 166080
184 위서 관로전 [5] 견초 2013-05-04 7569
183 위서 주선전 [2] 견초 2013-05-04 5375
182 위서 주건평전 [1] 견초 2013-05-04 5468
181 위서 두기전(공량) [3] 견초 2013-05-04 5836
180 위서 화타전 [5] 견초 2013-05-04 10365
179 위서 동이전(8) 왜 재원 2013-05-04 10837
» 위서 동이전(7) 한(한반도) 재원 2013-05-04 13656
177 위서 동이전(6) 동예전 재원 2013-05-04 7931
176 위서 동이전(5) 읍루전 재원 2013-05-04 8167
175 위서 동이전(4) 동옥저전 재원 2013-05-04 7560
174 위서 동이전(3) 고구려전 재원 2013-05-04 15109
173 위서 동이전(2) 부여 [1] 재원 2013-05-04 10379
172 위서 동이전(1) 개요 재원 2013-05-04 9940
171 위서 가비능전 재원 2013-05-04 6530
170 위서 선비전 재원 2013-05-04 7395
169 위서 오환전 [2] 재원 2013-05-04 8971
168 위서 종회전 [21] 견초 2013-05-04 12956
167 위서 등애전 [6] 견초 2013-05-04 14931
166 위서 제갈탄전 [4] 견초 2013-05-04 16724
165 위서 <배송지주>문흠전 재원 2013-05-04 6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