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파(劉巴)는 자가 자초(子初)이며, 영릉군 증양현 사람이다. 젊었을 때부터 유명하였으므로,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에 이르길: 유파의 할아버지 유요(劉曜)는 영릉 남쪽 교주의 창오태수(蒼梧太守)를 지냈고 아버지 유상(劉祥)은 강하태수(江夏太守)와 탕구장군(蕩寇將軍)을 지냈다. 손견(孫堅)이 병사를 일으켜 동탁과 싸우던 시절, 손견이 남양에 이르렀을 때 남양태수 장자(張)를 군량을 공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여 버렸다. (유파의 아버지) 유상은 손견하고 한마음이었다. (그런데 손견이 죽여버린 장자는 남양군의 사민들에게 널리 흠모를 받았으므로) 남양 군민들은 유상에게 원한을 품고, 병사를 일으켜 유상을 공격했다. 유상은 이를 맞아 싸웠으나 패해 죽었다. 이때 유표 역시 평소에 유상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구실을 만들어 유파를 잡아들여 죽이고자 했다. 그래서 유상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을 유파에게 몇번 보내, 거짓 정보를 주게 했다.


“유목(유표)이 자네에게 위해를 가하고자 하니 나와 함께 달아나는 것이 좋을 듯하오.”


유파는 번번이 이를 거절했다. 일이 있으면 매사를 유표에게 보고한 후 처리했으므로 유표는 곧바로 유파를 죽이지 못했다.


유파는 18세에 호조사주기주부(戶曹史主記主簿)가 되었다. 유선(劉先)은 조카인 주불의(周不疑)를 유파에게 보내 유파가 주불의 공부를 도와주게끔 할려고 했다. 유파가 그 요구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제가 지난 날 형주의 북쪽 지방으로 유학을 갔을 때 그곳의 여러 스승들과 학파들의 가르침을 두루 섭렵했었던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의 학문이 명성에 미치지 못했으며 안으로는 양주(楊硃)의 고요함을 유지하는 학술이 없었고 밖으로는 묵적(墨翟)의 시무에 힘쓰는 유풍이 없었습니다. 단지 하늘의 남쪽 귀신처럼 헛되어 쓸모가 없는 것들뿐이었습니다. 저에게 편지를 주시고 현명한 생질에게 명하시길 그의 난새와 봉황의 아름다움을 꺾고 저의 제비와 참새의 겉모습만을 즐기게 하시길 원하시니 이를 어찌 밝게 깨우쳤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있으나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내실이 있는 듯하나 공허해’ 부끄럽기 그지없으니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형주목 유표가 여러 차례 초빙하려 했고, 무재로 추천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를 정벌했다. 유비가 강남으로 달아나자 형, 초의 수많은 선비들이 구름처럼 그를 따라갓지만, 유파는 북쪽의 조조에게로 갔다. 조조는 그를 초빙하여 속관으로 삼고, 그를 보내 장사군, 영릉군, 계양군을 귀순시키도록 했다.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에 이르길: 조조는 오림(烏林)에서 패배하고 북쪽으로 돌아갈 때, 환계(桓階)를 장사(長沙) 등 세 군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환계는 자신이 유파에게 미치지 못한다며 사퇴했다. 유파가 조조에게


“형주가 유비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라고 하자, 조조는


“유비가 만일 형주를 먹을려고 도모한다면, 나는 육군(六軍)(중국 주나라 때에, 천자가 통솔하던 여섯 개의 군(軍))을 이끌고 쳐들어 가겠소.”


라고 했다.

마침 유비가 이 세군을 점령하였으므로 유파는 복명 할 수 없어 그대로 멀리 교지로 달려갔다.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에 이르길: 유파는 영릉(零陵)에 갔지만, 임무를 성사하지 모샜고, 교주(交州)로 갈 생각으로, 경사(京師: 수도)를 떠나 오고 있었다. 이때 제갈량은 임증(臨烝)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유파는 제갈량에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위험한 일을 무릅쓰고 백성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하고자 했소. 백성들의 뜻을 따르고 천심을 받들며 사물의 본성에 따라 할 수 있는 바를 다했으나 이제 이 몸에는 남은 것이 없소. 만약 길이 막히고 병사들의 수가 다하면 장차 창해(滄海)에 운명을 맡길 생각이오. 다시는 형주를 돌아보지 않겠소"


제갈량이 말했다.


"유공(劉公: 유비)은 세상을 뒤덮을 만한 영웅의 재능을 지녔으며 이미 형주의 땅을 다 점령했으니 그의 덕에 귀순하지 않은 자가 없소. 많은 사람들의 거취를 보면 이미 알 수 있는 일이거늘 족하는 대체 어찌 하기를 원하는 것이오"


유파가 말했다.


"명령을 받고 왔다가 일이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오. 족하는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유비는 이 일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유파는 교지에서 다시 촉군에 도착했다.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에 이르길: 유파는 교지로 들어와 성을 장(張)씨로 바꾸었다. 교지태수 사섭(士燮)과 의견이 맞지 않았으므로 장가(牂牁)의 길을 경유하여 갔다. 익주군에 구류되자, 태수가 죽이려고 했다. 그곳의 주부는 유파가 범상하지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처형을 만류하며, 자청하여 주부(州府)까지 호송했다. 그러던 중 익주목 유장을 만났다. 유장의 부친 유언이 과거 유파의 부친 유상(劉祥)에 의해 효렴으로 천거되었었으므로, 유장은 유파를 보고 놀라고 기뻐했으며, 중대한 일은 항상 그와 상의했다.


배송지가 말했다: 유언은 영제 시대에 이미 태상이었고 익주목으로 나갔으며 유상은 손견이 장사태수이던 시절 강하태수였으므로 유상이 유언을 효렴으로 추거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오래지 않아 유비가 익주를 점령했다. 유파는 유비에게 사죄하였는데, 유비는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에 이르길: 유장이 법정을 보내 유비를 영접할 때, 유파는 간언하여


“유비는 영웅입니다. 들어오면 틀림없이 해가 될 것입니다. 들어오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유비가 들어온 후에도 유파는 또 간언하여


“만일 유비에게 장로를 토벌하게 한다면, 이것은 산림 속에 호랑이를 풀어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라고 했지만, 유장은 듣지 않았다. 유파는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며 질병을 핑계댔다. 유비는 성도를 공격하여 군중(軍中)에 명하여,


“유파를 살해하는 자가 있다면, 삼족까지 사형에 처할 것이다”


라고 했다. 유파를 얻게 되자 매우 기뻐했다.


제갈공명이 그를 자주 칭찬하고 천거햇으므로, 유비는 그를 초빙하여 좌장군서조연으로 임명했다.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에 이르길: 장비는 일찍이 유파가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갔는데, 유파가 그와 말을 하지 않아 장비는 매우 분노했다. 제갈양이 유파에게,


“장비는 비록 무인이지만, 그대를 경모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지금 문무를 결집하여 대사를 정하려고 하십니다. 그대는 비록 고상한 천성을 갖고 있지만, 굽히려는 뜻이 적습니다”


라고 하자,유파는


“대장부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응당 사해의 영웅들과 교제해야 합니다. 어찌 무사와 함께 말을 하겠습니까?”


라고 했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매우 화가 나서 말했다.


“우리는 천하를 평정하기를 원하고 있는데, 자초는 그것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 북쪽으로 돌아가고 싶어 이 땅을 이용하는 것인가. 어찌 혼자 일을 이루려고 하는가?”


유비는 또 말했다.


“자초의 재능은 탁월하다. 나와 같은 자는 그를 임용할 수 있지만, 나와 같지 않은 자는 임용하기 어렵다. (나같으니깐 써먹지 딴 사람 같으면 택도 없다)


제갈량 역시 말했다.


“장막 속에서 계책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은 제가 자초와 비교하면 한참 멀었습니다! 만약 북채와 북을 잡고 군문에 서서 병사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용기를 내게 하려면 마땅히 저 사람과 의논해야 합니다.”


일찍이 유장을 공격할 때 유비가 여러 장수와 군사들에게 약속했었다.


“만약에 성도(成都)가 평정되면 부고(府庫)에 있는 모든 물건은 나는 관계치 않겠다.”


마침내 성도가 함락되자 장수와 병사들은 다 창과 방패를 내던지고 성 내의 여러 창고로 달려가 경쟁적으로 보물을 취했다. 창고가 다 약탈되어 군용물품이 부족하게 되자 유비가 심히 우려했다. 유파가 말했다.


“쉬운 일입니다. 단지 당백전을 주조해 유통하고 관리들에게 명령해 관시(官巿: 국가가 운영하는 시장)를 열게 하되 물건의 값을 균등하게 관리 하십시오.”


유비가 이를 따르자 수개월 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건안 24년(219)에 유비는 한중왕이 되었으며, 유파는 상서가 되었다. 후에 법정을 대신하여 상서령이 되었다. 그는 몸소 청렴하고 질박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재산을 증식시키지 않았다. 또 자신이 유비를 따르는 것은 본래의 마음이 아니었으므로 의심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공손하며 말없이 조용한 태도로 견지했으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사사로이 사귀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에 이르길: 이 당시 중국 사람들의 감정은 일관되지 못했다. 유비가 촉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는 목을 길게 빼고 그의 내방을 기대했다. 유비는 제위에 오르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파는 그같은 일은 천하에 대해 기량이 좁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느긋하게 하기를 원했다. 주부 옹무(雍茂)가 유비에게 간언했는데, 유비는 다른 일을 빌려 옹무를 살해했다. 이 때문에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시는 오지 않았다.


유비가 황제의 존호를 칭했을 때 황청상제 * 후토신지에게 보고했는데, 그러한 문장이나 임명서는 모두 유파가 지은 것이다.

장무 2년(222)에 유파는 세상을 떠낫다. 세상을 떠난 후, 위나라의 상서복야 진군이 제갈양에게 편지를 보내 유파의 소식을 물었다. 제갈양은 그를 유군자초라고 칭하고 매우 존경하며 중시하는 마음을 보이며 유파의 소식을 전했다.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에 이르길: 보오장군(輔吳將軍) 장소(張昭)가 이전에 손권(孫權)과 유파에 관해 논의할 때 성급하고 좁다며 장비(張飛)를 거부한 것이 부당하다며 너무 심하다고 하였다. 손권이 이에 말하길:


"만약 자초(子初)가 이제와서 세상에 영합해 현덕을 받아들이면 그와 교류하는 자들이 그를 높은 선비로 대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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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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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23
14:57:25
(*.52.89.88)
주석 추가 번역이 하나도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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