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史랑방


 

곽가(郭嘉)는 자(字)가 봉효(奉孝)이고 (예주) 영천(潁川) 양적(陽翟) 사람이다. [1] 당초 북쪽으로 가서 원소(袁紹)를 만나보고는 원소의 모신(謀臣)인 신평(辛評)과 곽도(郭圖)에게 말했다, 


[1] 「부자傅子」왈 : 곽가는 어려서부터 원대한 기량이 있었다. 한나라 말 장차 천하가 어지러워지려 하자 약관(弱冠)의 나이 때부터 명적(名迹, 이름과 행적)을 숨기고 은밀히 영걸들과 교결(交結)하며 속세와 접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 중 많은 이가 그를 알지 못하고 오직 식달(識達)한 이들만이 그를 높게 여겼다. 나이 27세에 사도부(司徒府)에 벽소되었다. (※)


※ 여기 곽가전에 따르면 곽가는 170년생이므로 27세가 된 해는 196년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조조는 사도(司徒)가 아닌 사공(司空) 이었으며 당시의 사도는 조온(趙溫)입니다. (후한서 헌제기에 따르면 194년 – 208년 재직) 따라서 결국 조온에게 벽소되어서 처음 임관했다는 뜻이 되나 그렇게 보긴 힘들고, 여기 부자의 기사는 곽가가 처음 조조에게 임관한 것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아마 사공(司空)을 사도(司徒)로 잘못 적은 것 같습니다. 


한편, 삼국지 <권1 무제기>에서는 ‘건안 3년(=198년) 봄 정월에 공(→조조)이 허(許)로 돌아와 처음으로 군사제주(軍師祭酒)를 두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아래 cf 참고)「삼국지집해」를 지은 노필(盧弼)은 당시 조조가 사공이므로 이를 ‘사공부의 속관인 군사제주’로 파악하는 한편, 여기 곽가전을 비롯해 삼국지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군제주(軍祭酒), 군모제주(軍謀祭酒) 는 모두 軍師祭酒에서 師(진나라 경제로 추존된 사마사의 이름자) 자를 피하기 위한 피휘로 보았습니다. 이에 따르면 사공부의 군사제주(=군제주)는 건안 3년에 처음 설치된 것인데, 이를 부자의 기술이나 곽가전 뒷부분(11년간 함께했다고 조조 스스로 술회한 대목)과 취합해서 보면, 곽가는 27세의 나이인 196년(건안 원년)에 조조에게 벽소되어 사공부의 모종의 속관이 되었다가 뒤에 198년에 군사제주 직을 처음 신설하면서 여기에 임명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여기 곽가전에서 여포정벌 건(198년 9월 이후의 사건)이 뒤이어서 기술되는 것으로도 간접적으로 뒷받침됩니다. 


cf. 관련 기사(삼국지 권1 무제기) 三年春正月, 公還許, 初置軍師祭酒.(진서 권24 직관지) 及當塗得志,克平諸夏,初有軍師祭酒,參掌戎律。당도(當塗)(→위나라)가 뜻을 펼쳐 제하(諸夏,중국)를 평정할 때에 처음으로 군사제주(軍師祭酒)를 두어 군율을 관장하는데 참여하게 하였다.


“무릇 지혜로운 자는 섬길 주인을 헤아리는데 있어 잘 살펴야 하는 법이니 이로써 백가지 거행을 모두 온전히 하여 공명(功名, 공적과 명성)을 세울 수 있소. 원공(袁公)(®원소)은 옛 날에 주공(周公)이 하사(下士)를 대우하던 법을 본받고자 하나 용인(用人)의 요체(機)를 알지 못하오. 단(端,두서)은 많으나 요령은 부족하며 모책을 좋아하나 결단력은 없으니 그와 더불어서 함께 천하의 대난(大難)을 구제하고 패왕(霸王)의 업(業)을 정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오!”  


그리하여 마침내 그를 떠났다.  


이보다 앞서 영천(潁川) 사람인 희지재(戲志才)는 주획(籌畫)하는 선비로서 태조(太祖)(→조조)가 그를 매우 중하게 여겼었는데 일찍 죽었다. 태조가 순욱(荀彧)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희지재가 죽은 뒤로는 더불어서 함께 일을 헤아리며 의논할 자가 없소. 여남군 영천군에는 빼어난 선비가 많으니 누가 그를 뒤이을 만하오?” 


 순욱이 곽가를 추천하니 그를 불러서 만나 천하의 일을 논하였다. 태조가 말했다,  


 “내가 대업(大業)을 이루도록 해 줄 사람은 필히 이 사람이다.”  


곽가가 밖으로 나온 뒤에 또한 기뻐하며 말했다,  


“실로 내 주인(主)이시다.”  


표문을 올려 곽가를 사공 군제주(司空軍祭酒)로 삼았다. [2] 


[2]「부자傅子」왈: 태조(太祖)가 곽가에게 말했다, 


“본초(本初)는 기주의 무리를 끼고 있고 청주, 병주가 그를 따르니 땅은 넓고 병(兵)은 강한데 여러 차례 오만불손(不遜)한 짓을 하였소. 내가 그를 치고자 하는데 역량상 대적할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하겠소?”


곽가가 대답하였다, 


“유방은 항우에게 대적할 수 없는 형세였음을 공(公)도 잘 아실 것입니다. 한조(漢祖) (→유방)는 오로지 지혜(智)로써 이기니 항우(項羽)가 비록 강하였으나 결국은 사로잡히는 (패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저 곽가가 스스로 헤아려 볼 때 원소에게는 십패(十敗)(→패배할 열 가지 요인)가 있고 공에게는 십승(十勝)(→승리할 수 있는 열 가지 요인)이 있으니 비록 원소가 병(兵)이 강하나 할 수 있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원소는 예의(禮儀,예법과 의식)가 번다(繁多)한데 비해 공은 자연스러움에 맡기니, 이러한 도(道)가 (십승 중) 첫 번째 승(勝)입니다.


원소는 역(逆)으로 행동하나 공은 봉순(奉順)하며(※①) 천하를 이끄니, 이러한 의(義)가 두 번째 승(勝)입니다. 


한나라 말의 정치는 지나친 관대함(寬)에 의해 그르쳐졌는데, 원소는 관대함으로써 관대함에 의해 그르쳐진 정치를 구제하려하므로 이를 정돈할 수 없으나(不攝) 공은 사나움(猛)으로써 바로잡아 위아래가 제약(制)을 아니, 이러한 치(治, 다스림)가 세 번째 승(勝)입니다. 


원소는 겉으로는 관대하나 속으로는 시기하며 사람을 쓰면서 그를 의심하고 오로지 친척(親戚)들과 자제(子弟)들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데 비하여, 공은 겉으로는 사람을 쓰는 것이 쉽고 간략하게 보이나 속으로는(실제로는) 영명하고 사람을 쓰면서 의심하지 않고 오로지 그 재능이 임무에 합당하다면 사이가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으니, 이러한 도량이 네 번째 승(勝)입니다. 


원소는 모책을 꾸미는 것은 많으나 결단하는 것이 적어 뒷일을 그르치는데 비해 공은 책략을 세우면 곧바로 행하고 응변(應變, 변화에 대응함)이 무궁하니, 이러한 모(謀)가 다섯 번째 승(勝)입니다. 


원소는 누세(累世, 누대)의 자산을 기반으로 하여 고의읍양(高議揖讓, 고의는 고상한 의논이고 읍양은 주객이 만났을 때의 예법을 말하는데, 여기선 서로 모여서 읍양하면서 고담준론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으로 명예(名譽)를 얻고자 하니 선비(士) 중에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겉을 꾸미는 자들이 대다수 그에게 귀의하는데 비해, 공은 지극한 마음으로 남을 대우하고  성심으로 남을 대우하며 행동하고 헛된 아름다움을 꾸미지 않고 아랫사람들을 검소하고 소박하게 대하고 공을 세운 자에게는 아끼는 게 없으니 선비 중에서 충정(忠正)하고 멀리 보는 식견이 있으며 내실을 갖춘 자들이 모두 공에게 쓰이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덕(德)이 여섯 번째 승(勝)입니다. 


원소는 남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것을 보면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안색에 드러나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에게는 그러한 염려가 때로 미치지 않으니 이러한 마음은 바로 부인네들의 어짊(仁)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공은 눈앞의 작은 일(小事)에 대해서는 때때로 소홀할 때가 있으나 큰일(大事)에 관하여는 사해(四海)와 접하며 은혜가 끼치니 그 은혜가 커서 모두 기대를 넘어서고 비록 직접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염려가 두루 미치므로 구제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러한 인(仁, 어짊)이 일곱 번째 승(勝)입니다. 


원소의 대신(大臣)들은 서로 권력을 다투어 참언(讒言)으로 미혹하고 어지럽히는데 비해 공은 도(道)로써 아랫사람들을 다스려 침윤(浸潤, 서서히 젖어듦)(하는 교묘한 참언)이 행해지지 않으니(※②), 이러한 명(明,밝음, 현명함)이 여덟 번째 승(勝)입니다. 


원소는 옳고 그름(是非)을 분별하지 못하는데 비해 공은 옳은 것(是)은 예(禮)로써 올리고 옳지 못한 것(不是)은 법(法)으로 바로잡으니, 이러한 문(文)이 아홉 번째 승(勝)입니다. 


원소는 헛된 세력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병(兵)의 요체를 알지 못하는데 비해 공은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이기고 용병(用兵)이 신(神)과 같아서 우리의 군인들은 이를 믿고 의지하고 적인(敵人) 들은 이를 두려워하니, 이러한 무(武)가 열 번째 승(勝)입니다.” 


태조가 웃으며 말했다, 


“경(卿)이 말한 바와 같은 것들을 내가 무슨 덕(德)으로 감당할 수 있겠소!” 


곽가가 또 말했다, 


“원소는 바야흐로 북쪽으로 공손찬(公孫瓚)을 공격하니 그가 원정(遠征)하는 것을 틈타 동쪽으로 가서 여포(呂布)를 취하십시오. 먼저 여포를 취하지 않았는데 원소가 우리를 침범한다면 여포가 그의 외원이 될 것이니 이는 심대한 해독입니다.” 


태조가 말했다, 


“옳은 말이오.”


여포(呂布)를 쳐서 세 번 싸워 모두 격파하니 여포가 물러나서 굳게 지켰다. 당시 사졸(士卒)들이 피로하고 고달퍼하니 태조(太祖)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려 하였는데 곽가가 돌아가지 말고 급히 공격하도록 설득하여 마침내 여포를 사로잡았다. 이에 관한 말은 (권10) 순유전(荀攸傳)에 있다. [1] 


[1]「부자傅子」왈 : 태조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려 하니 곽가가 말했다, 


“옛날에 항적(項籍)(→항우)은 70여 번을 싸우며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었으나 하루아침에 세력을 잃고 자신의 몸은 죽고 나라가 망한 것은 용맹만을 믿고 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포는 매번 싸울 때마다 번번이 격파당하니 기(氣)는 쇠하고 힘은 다하여 안팎으로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포의 위력(威力)은 항적(項籍)에 미치지 못하는데다 곤패(困敗)함 또한 항적보다 더하니 만약 승세를 타고 공격한다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좋소.”


/「위서魏書」왈 : 유비(劉備)가 도망오자 그를 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았다. 어떤 이가 태조에게 말했다, 


“유비는 영웅(英雄)의 뜻이 있으니 이제 일찍이 도모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우환이 될 것입니다.”


태조가 이에 관하여 곽가에게 묻자 곽가가 말했다, 


“옳은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이 제검(提劍, 검을 쥠. ‘거병’의 뜻) 하여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백성을 위하여 흉포한 이들을 제거하려 하시는데, 추성(推誠, 성심으로 남을 대우함), 장신(仗信, 신의에 의지함)하여 준걸(俊傑)들을 불러 모아도 도리어 성공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지금 유비에게 영웅(英雄)의 명성이 있는데 궁박한 처지가 되어 자신에게 귀부한 이를 해친다면 이로 인해 ‘현명한 이를 해쳤다’(害賢)는 이름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지혜로운 선비들이 장차 스스로 의심을 품어 마음을 바꿔먹고 주인을 택할 것이니 공은 누구와 더불어 천하를 평정하시겠습니까? 무릇 우환이 될 한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사해(四海, 천하)의 바람(望)을 꺾는 것은 안위(安危)의 계기이니 신중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조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소.”


/「부자傅子」왈 : 당초 유비가 항복해왔을 때 태조가 그를 객례(客禮)로 대우하고 예주목(豫州牧)으로 임명하였다. 곽가가 태조에게 말했다, 

“유비는 웅재(雄才)가 있고 뭇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고 있습니다. 장비(張飛)와 관우(關羽)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 만 명에 필적할 만한 인물)으로 그를 위하여 사력을 다합니다. 저 곽가가 보건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며 그가 꾀하는 바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길 ‘하루에 적을 놓아주었다가 수세(數世)에 걸쳐 우환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의당 일찍이 조치하셔야 합니다.”


이때에 태조가 천자를 받들어 천하를 호령하며 바야흐로 영웅을 불러 모아 품어서 큰 신의를 밝히려 하니 곽가의 모책을 따르지 않았다. 때마침 태조가 유비를 시켜 원술(袁術)을 요격(要擊)하게 하니 곽가가 정욱(程昱)과 함께 수레를 타고 가서 태조에게 간(諫)했다, 


“유비를 놓아주면 변고가 생길 것입니다!”


당시 유비는 이미 떠난 뒤였고 마침내 거병(擧兵)하여 반역하니 태조가 곽가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 신 송지가 보건데「위서魏書」에서 말하는 바는「부자傅子」와는 정반대이다.


손책(孫策)이 천리 땅을 전투(轉鬭, 옮겨가며 싸움)하여 강동(江東)을 모두 차지하고는, 태조(太祖)가 원소(袁紹)와 더불어 관도(官渡)에서 서로 대치한다는 것을 듣고 장차 장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서 허(許)(→예주 영천군 허현)를 습격하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우려하니 곽가가 그를 헤아리며 말했다, 


“손책이 이제 막 강동(江東)을 아우르며 죽인 자들은 모두 영호(英豪), 웅걸(雄傑)들로서 능히 남으로 하여금 사력을 다하게 만드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손책이 경박하여 이를 방비하지 않으니 비록 그에게 백만의 무리가 있단 한들 중원(中原, 들판 한가운데)을 홀로 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만약 자객(刺客)이 매복해 있다가 공격하면 한 명을 대적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내가 보기로는 그는 필시 필부(匹夫)의 손에 죽을 것입니다.”  


손책이 장강에 임하였다가 미처 (장강을) 건너기 전에 과연 허공(許貢)의 객(客)에게 죽임을 당했다. [1] 


[1] 「부자傅子」왈 : 태조가 유비(劉備)를 신속히 치려 하니, 의논하는 자들은 군(軍)이 유비를 치기 위해 출병하면 원소가 그 배후를 습격하여 진격해도 싸울 수 없고 물러서도 근거지를 잃어버리는 상황에 처할까봐 우려하였다. 이에 관한 말은 무기(武紀)(→권1 무제기)에 있다. 태조가 이에 관해 의심하며 곽가에게 물었다. 곽가가 태조에게 권하며 말했다, 


“원소는 그 성정이 더디고 의심이 많으므로 설령 쳐들어오더라도 필시 빨리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비는 이제 막 거병하여 뭇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그에게 완전히 귀부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급히 공격하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이는 존망(存亡)의 기회이니 놓쳐서는 안 됩니다.”


태조가 말했다, 


“좋소.”


이에 동쪽으로 유비를 치니 유비는 패하여 원소에게로 달아났으며 원소는 과연 출병하지 않았다. 


/ 신 송지(→주석자인 배송지裵松之)가 보건대, 무기(武紀)(→무제기)에 따르면 유비를 치기로 결정하고 원소가 출병하지 않을 것이라 헤아린 것은 모두 태조로부터 비롯되었다. 여기서는 곽가의 계책을 쓴 것이라 일컬었으니 즉 서로 같지 않다. (※) 


※ 무제기에 따르면(아래 cf 참고) 제장들이 원소의 배후공격을 우려해 유비 공격을 반대하자 조조가 위의 곽가 말과 비슷하게 원소가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헤아리며 이를 반박하지만, 또한 ‘곽가 또한 공에게 권하니 마침내 동쪽으로 유비를 공격했다.’는 구절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건 그냥 표현상의 차이일 뿐 꼭 서로 어긋난다고 할 만한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조조와 곽가가 서로 비슷한 논리로 유비 공격을 찬성하는 입장이었는데, 무제기와 부자는 각각 조조와 곽가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겠죠.


(건안) 5년(=200년) 봄 정월, 동승(董承) 등의 모의가 누설되어 모두 복주되었다. 공이 장차 친히 동쪽으로 유비를 치려 하자 제장들이 모두 말했다, 


“공과 더불어 천하를 다투는 자는 원소입니다. 이제 원소가 바야흐로 쳐들어오려 하는데 그를 내버려두고 동쪽으로 갔다가 원소가 이를 틈타 우리의 배후를 치면 어쩌시겠습니까?”


공이 말했다, 


“무릇 유비는 인걸이니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오. 원소가 비록 큰 뜻을 가지고 있으나 사세를 보는 것이 더디니 필시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곽가(郭嘉) 또한 공에게 권하니 마침내 동쪽으로 유비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의 장수 하후박(夏侯博)을 사로잡았다.


또한 본전(→여기 곽가전)에서는 곽가가 ‘손책이 경박하여 필시 필부의 손에 죽을 것이라 헤아렸다’고 칭하였으니 실로 견사(見事,사정을 헤아림)하는데 밝은 자로다. 그러나 자신이 상지(上智, 매우 높은 지혜를 가진 이)는 아니어서 그가 몇 년에 죽을지는 알지 못하였다. 이제 허(許)를 습격하려던 딱 그 해에 손책이 죽은 것은 아마도 일이 우연히 들어맞은 것이리라.


태조를 뒤따라 원소(袁紹)를 격파하고, 원소가 죽자 또한 (태조를) 뒤따르며 여양(黎陽)(→기주 위군魏郡 여양현)에서 원담(袁譚), 원상(袁尙)을 쳤는데 연달아 싸워 여러 차례 이겼다. 제장(諸將)들이 승세를 타서 나아가 공격하자고 하니 곽가가 말했다,  


“원소는 이 두 아들(→원담과 원상)을 모두 사랑하여 적자(適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곽도(郭圖)와 봉기(逢紀)가 그들을 위하여 모신(謀臣) 노릇을 하여 그들 사이에서 필시 서로 번갈아 다툴 것이니 다시 서로 사이가 멀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급히 공격하면 원담과 원상은 서로 도울 것이고, 느슨하게 하면 뒷날의 다툼이 반드시 생겨날 것입니다. 남쪽으로 형주(荊州)를 향하여 마치 유표(劉表)를 칠 것처럼 하면서 그 변화를 기다리느니만 못합니다. 변화가 생긴 뒤에 그들을 공격한다면 일거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좋소.” 

그리고는 남정(南征)하여 군(軍)이 서평(西平)(→예주 여남군 서평현)에 당도했을 때 과연 내분이 일어나 원담과 원상이 기주(冀州)를 다투었다. 원담이 원상군에게 패하고는 달아나서 평원(平原)(→청주 평원군 평원현)을 보전하고(평원에 의지하고) 신비(辛毗)를 태조에게 보내 항복을 청했다. 태조가 돌아가 그를 구원하고는 마침내 태조를 뒤따라 업(鄴)(→기주 위군 업현)을 평정하였다. 또 태조를 뒤따라 남피(南皮)(→기주 발해군 남피현)에서 원담을 공격하고 기주를 평정하였다.  


곽가를 유양정후(洧陽亭侯)에 봉했다. [1]


[1]「부자傅子」왈 : 하북(河北)이 평정된 뒤에 태조가 청주, 기주, 유주의 이름난 선비들을 많이 벽소(辟召)하여 점차 신하로 삼아 부리고 그들을 성사연속(省事掾屬)(※)으로 임명하였는데 이것이 모두 곽가의 모책이었다.


※ 省事掾屬(성사연속) –「삼국지집해」에서는 ‘省事라는 말은 미상인데 혹 從事(종사)나 徵事(징사)의 오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徵事 2명을 둔 것은 건안 15년(=210년)의 일이며 이는 (권 11) 병원전 注 (※헌제기거주)에 보인다. 부자가 기술하는 이때에는 4주의 이름난 선비들을 벽소한 것이므로 결코 2명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삼국지사전」에서는 ‘省事는 視事(집무를 본다), 爲事(직무를 처리한다)의 뜻이므로 省事掾屬은 즉 爲事하는 掾屬이다.’라고 해설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진서나 송서 등에 별개 속관의 명칭으로 등장하는 걸 볼 때(예컨대, 제공諸公의 속관 중 기실성사령사, 상서령 성사, 사예교위나 주자사 속관 중 성사 등) 속관명으로서 성사(省事)라는 이름이 바로 이때에 처음 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위의 ‘以爲省事掾屬’은(사공부 또는 기주목의 속관으로서) “성사나 연속으로 임명하였다”로 풀이될 수 있겠죠. (참고로 ‘상서령 성사’의 경우는 진서 직관지에서는 진나라 초 가충이 상서령을 지낼 때 처음 비롯된 것으로 고증했음)


태조가 장차 원상(袁尙) 및 삼군오환(三郡烏丸)(※)을 치려 하니, 수하들 다수는 유표(劉表)가 유비(劉備)를 시켜 허(許)를 습격하며 태조를 공격할까봐 우려하였다. 곽가가 말했다,  


“공이 비록 위엄으로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으나 호(胡)(→북방민족의 통칭. 여기선 오환)는 그들이 멀리 떨어져있는 것을 믿고 있으니 필시 방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방비가 없음을 틈타 갑작스럽게 공격한다면 격파하여 멸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원소(袁紹)가 민이(民夷,중국의 일반백성과 오랑캐)에게 은혜를 베푼데다가 원상 형제가 생존해 있습니다. 4주(四州)(→기주, 청주, 병주, 유주)의 백성들은 단지 위엄으로써 강제로 우리에게 귀부한 것이며 은덕과 시혜가 아직 더해지지 못했는데 이를 내버려두고 유표를 치며 남정(南征)한다면, 원상은 오환(烏丸)이라는 자산을 기반으로 그의 사주지신(死主之臣,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불러 모을 것이고 이와 더불어 호인(胡人)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면 민이(民夷)가 함께 호응할 것이니, 이는 답돈(蹋頓)(→요서오환 출신으로 당시 삼군오환의 수장)에게 다른 마음이 생기게 하고 분수에 넘치는 욕심의 계책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 청주, 기주가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유표는 좌담객(坐談客,앉아서 담소하기나 좋아하는 인물)일 뿐이라 자신의 재능이 유비를 부리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그를 제어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고 가벼운 임무를 주면 유비가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니 우리가 비록 나라를 비워두고 원정(遠征)하더라도 공이 염려하실 게 없습니다.”  


이에 태조가 실행에 옮겼다. 역(易)(→기주 하간국 역현)에 도착하니 곽가가 말했다,  


“병(兵)에서는 신속(神速)을 귀하게 여깁니다. 이제 천리 길을 가며 적을 습격하려는데 치중(輜重, 짐수레)이 많으면 이득을 취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치중으로 인해 진군이 늦어져 저들이 우리가 온다는 것을 듣게 되면 필시 방비를 할 것입니다. 치중은 남겨두고 경병(輕兵,가볍고 날랜 차림의 군대)으로 겸도(兼道,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감)하여 출군함으로써 엄기불의(掩其不意, 적이 뜻하지 못할 때에 엄습함)하느니만 못합니다.” 


이에 태조가 은밀히 노룡새(盧龍塞)를 나가 선우정(單于庭)으로 곧바로 향했다. 노(虜)(→오환)가 태조가 갑자기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는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어울려 싸웠다. 태조가 이를 대파하고 답돈(蹋頓) 및 명왕(名王)(→오환의 직책 명) 이하 여러 명을 베었다. 원상 및 원상의 형 원희(袁熙)는 요동(遼東)으로 달아났다.


※ 삼군오환(三郡烏丸) –후한 말 동북변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하며 원씨와 결탁하고 뒤에 조조에게 토벌된 오환족들을 일컫는 말인데, ‘삼군’이 뭐라고 특정해놓은 기록이 없고 당시 기록들에서는4종의 오환(요서, 상곡, 요동속국, 우북평)이 등장해서 분명치는 않습니다. (단, 삼국지 오환전과 달리 후한서 오환전의 해당대목에서는 ‘요동속국’을 ‘요동’으로 표기하고 삼국지사전에서도 아마도 이에 근거해서 삼군오환을<요서, 요동, 우북평 오환>으로 해설했으나, 영웅기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지 쪽의 ‘요동속국’이 더 정확한 표기로 보임) 영웅기에 따라 원소에게서 선우의 인수를 받은 3종으로 보면 <요서, 요동속국, 우북평>이 되고, 郡이란 표현에 주목해서 요동속국을 제외하면 <요서, 상곡, 우북평>이 됩니다. 


당시 가장 큰 규모인 상곡오환이 빠진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긴 하지만, 이들이 장순의 반란 이후로는 요서 등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세력이 약화되어 요서오환 등의 일종으로 같이 취급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즉, 원소나 조조 시기를 기준으로 볼 때 요서군, 요동속국, 우북평군에 거주하던 오환족들(실제로는 4종)을 당시 한족들이 ‘삼군오환’이라 칭했던 것 같습니다.


 

삼국지 오환전

(장순의 반란 이전 상황)

영웅기

(원소의 선우 임명)

요서

丘力居(→蹋頓)

왕이라 자칭

蹋頓

상곡

難樓

왕이라 자칭

기술 없음

요동속국

蘇僕延

峭王

頒下

우북평

烏延

汗魯王

汗盧

 

(※ 후한서 오환전도 위와 모두 같으나

요동속국만 요동으로 바꿔서 기록)

 


cf. 관련 기사


(삼국지 권30 오환전) 


그러나 오환, 선비가 점차 다시 강성해지고 또한 한나라 말의 혼란으로 중국에 일이 많아 바깥을 토벌할 겨를이 없음을 틈탄 까닭에 막남(漠南) 땅에서 마음대로 굴고 성읍을 구포(寇暴)하고 인민을 살략하니 북변이 그 곤란함을 겪게 되었다. 때마침 원소가 하북을 겸병하고는 삼군오환(三郡烏丸)을 위무하여 차지하고 그 명왕(名王)을 총애하여 그 정예기병을 거두었다


…(중략)…

한나라 말, 요서 오환대인 구역거(丘力居)가 무리 5천여 락(落), 상곡 오환대인 난루(難樓)가 무리 9천여 락(落)으로 각기 왕이라 칭했다. 그리고 요동속국 오환대인 소복연(蘇僕延)이 무리 천여 락(落)으로 초왕(峭王)이라 자칭하고 우북평 오환대인 오연(烏延)이 무리 8백여 락(落)으로 한로왕(汗魯王)이라 자칭하였는데 이들이 모두 계책과 용건(勇健)함을 갖추고 있었다. 


중산태수 장순(張純)이 반역하여 구역거의 무리 안으로 들어가 미천안정왕(彌天安定王)이라 자칭하며 삼군오환(三郡烏丸)의 원수(元帥)가 되어 청주, 서주, 유주, 기주의 4주를 구략하고 관리와 백성들을 살략하였다. 영제 말에 유우(劉虞)를 유주목으로 삼으니 유우가 호(胡)를 초모하여 장순의 머리를 베어 북주가 평정되었다. 뒤에 구역거가 죽자 아들 루반(樓班)이 나이가 어렸으므로 종자(從子,조카뻘)인 답돈(蹋頓)이 무략이 있어 그를 대신해 즉위하여 삼왕부(三王部)를 총섭하니 무리들이 모두 그의 교령을 따랐다. 원소가 공손찬과 더불어 연달아 싸웠으나 결판나지 않았는데 답돈이 원소에게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고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공격해 격파하였다. 원소가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답돈, 초왕(峭王)(→소복연), 한로왕(汗魯王)(→오연)에게 인수(印綬)를 내리고 그들을 모두 선우(單于)로 임명했다. (후략) 


(오환전 이 대목의 注引 영웅기) 


영웅기 왈: 원소가 사자를 보내 오환의 세 왕을 선우로 임명하고 이들에게 모두 안거, 화개, 우모, 황옥, 좌독을 주었다. 그 판문(版文)에서 이르길 


“사지절 대장군 독유청병 영 기주목 원향후(원)소가 승제(承制)하여 요동속국 솔중왕 반하(頒下), 오환 요서 솔중왕 답돈(蹋頓), 우북평 솔중왕 한로(汗盧)에게 조령을 내린다. 생각건대


…(후략) 


(※ 삼국지 중화서국본(1971년)에서는 맨 끝의 維 까지를 모두 고유명사로 보아 이름이 ‘汗盧維’인 것으로 파악했으나, 여기의 ‘汗盧’는 오환전 본문에 나온 ‘汗魯’의 다른 표기(역음 상의 차이)인 듯하여 汗盧/維로 끊어서 풀었습니다. 국편위 고대사료집성 표점에서도 維는 빼고 ‘汗盧’만을 이름으로 보았습니다.)


 (후한서 권90 오환전) 영제 초, 오환대인(烏桓大人)인 상곡의 난루(難樓)가 무리 9천여 락, 요서의 구역거(丘力居)가 무리 5천여 락으로 각기 왕이라 자칭했다. 또한 요동의 소복연(蘇僕延)이 무리 천여 락으로 초왕(峭)이라 자칭하고 [(이현 주석) 峭의 음은 七+笑] 우북평의 오연(烏延)은 무리 8백여 락으로 한로왕(汗魯王)이라 자칭했다. 이들이 모두 용건하며 계책이 많았다. 중평 4년(=187년), 전 중산태수 장순(張純)이 반역하여 구역거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 미천안정왕(彌天安定王)이라 자칭하였다. 마침내 여러 군(郡)의 오환의 원수가 되어 청주, 서주, 유주, 기주의 4주를 구략했다. (중평) 5년(=188년), 유우를 유주목으로 임명하니 유우가 현상 수배하여 장순의 머리를 베어 북주가 안정되었다. 헌제 초평 연간(190-193년)에 구역거가 죽자 아들 루반(樓班)이 나이가 어리므로 종자(從子)인 답돈이 무략이 있어 그를 대신해 즉위하여 3군(三郡)을 총섭하니 무리들이 모두 그의 교령을 따랐다. 


건안 초, 기주목 원소가 전장군 공손찬과 더불어 맞서며 결판이 나지 않았는데 답돈이 원소에게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고는 군대를 보내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공격해 격파했다. 원소가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답돈, 난루, 소복연, 오연 등에게 모두 선우의 인수를 하사했다. 뒤에 난루, 소복연이 그들의 부중을 이끌고 루반을 받들어 선우로 삼고 답돈은 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답돈이 여전히 계책을 틀어쥐었다. 광양 사람 염유(閻柔)가 어릴 때에 오환, 선비 속으로 들어갔다가 그 종인들로부터 신임을 얻으니 이에 염유가 선비 무리들의 힘을 빌려 오환교위 형거(邢擧)를 죽이고 그를 대신하였다. 원소가 염유를 총애하고 달램으로써 북변이 안정되었다. 


그러다 원소의 아들 원상이 패하여 답돈에게로 달아났다. 당시 유주, 기주의 관리와 백성들 중에 오환에게로 달아난 이가 십여만 호(戶)에 이르렀는데 원상이 그 병력에 힘입어 다시 중국을 도모하려 하였다. 때마침 조조가 하북을 평정하니 염유는 선비, 오환을 이끌고 귀부하였고 조조는 염유를 교위로 삼았다. 건안 12년(=207년), 조조가 친히 오환을 쳐서 유성(柳城)에서 답돈을 대파해 죽이고 20여만 급을 참획하였다. 원상은 루반, 오연 등과 더불어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이 이들을 모두 목 베어 조조에게 보냈다. 그 나머지 무리 만여 락(落)이 모두 중국으로 옮겨져 거주하였다. 


(삼국지 권28 관구검전) 率幽州諸軍至襄平,屯遼隧.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遼西烏丸都督率衆王護留等,昔隨袁尙奔遼東者,率衆五千餘人降.


(237 년 관구검이) 유주의 제군을 이끌고 양평에 도착하여 요수(遼隧)에 주둔하였다. 우북평 오환선우 구루돈(寇婁敦)과 요서오환 도독 솔중왕 호류(護留) 등 예전에 원상을 따라 요동으로 달아났던 이들이 무리 5천여 명을 이끌고 항복했다.


곽가는 매우 통달한 이로 산략(算略, 모략, 책략)을 갖추었고 사정(事情)에 밝았다. 태조가 말했다,  


“오직 봉효(奉孝) 만이 내 뜻을 잘 안다.” 


당시의 나이 38세로 유성(柳城)으로부터 돌아온 뒤 병이 위독해지니 태조가 병문안하는 이를 번갈아 계속 보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곽가가 훙(薨, 공公, 후侯와 같은 귀인의 죽음을 높여서 일컫는 말)하니 (※ 곽가 생몰 : 170-207년) 그의 상(喪)에 임하여 매우 슬퍼하며 순유(荀攸) 등에게 말했다,  


“제군(諸君, 여러분)들은 나이가 모두 나와 동년배인데 오직 봉효(奉孝)만이 가장 젊었소. 천하의 일이 끝나면 뒷일을 그에게 맡기려고 하였는데 중년(中年)의 나이에 요절(夭折)하니 이것이 운명인가 보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군제주(軍祭酒) 곽가(郭嘉)는 정벌(征伐)에 뒤따른 지 11년이 되었습니다. 매번 대의(大議,큰 의논)가 있을 때마다 적을 맞아 변화를 제어하는 계책을 내어놓았고, 신(臣)의 계책이 결정되지 않았을 때는 늘 곽가가 이를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천하를 평정하는 데에 있어 그가 도모한 공이 높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명이 짧아 사업(事業)을 다 끝내지 못했습니다. 곽가의 공훈을 추사(追思, 추념)해보면 실로 잊을 수 없습니다. 식읍(邑) 8백 호(戶)를 늘려 예전과 합쳐 모두 1천 호(戶)가 되게 해 주십시오.” [1] 


[1]「위서魏書」에 실려 있는 태조(太祖)의 표문 왈 : 


“신이 듣기로 충성스런 이를 기리고 현명한 이를 총애하는 것은 꼭 그 당사자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공적을 생각할 때에는 그 은혜가 후사(後嗣)에게까지 융성히 내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춘추시대 초(楚)나라는 손숙(孫叔)(→손숙오孫叔敖)을 존숭하여 그의 자식을 높게 봉하고 후한 초에는 잠팽(岑彭)이 죽은 뒤에 그 작위가 적자 이외의 방계에까지 미친 것입니다. 


고(故,전) 군제주(軍祭酒) 곽가(郭嘉)는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학식이 깊고 품행이 아름다워 본성이 통달하였습니다. 매번 대의(大議)가 있을 때마다 그의 발언이 궁정을 가득 채우고 중정을 지키며 이치에 따르니 늘 쓰이지 않고 남겨지는 계책이 없었습니다. 


군진에 있은 지 10여 년 동안 함께 말을 타고 다니고 군막의 좌석에서 함께 앉아 계책을 의논하면서 동쪽으로 여포(呂布)를 사로잡으며 서쪽으로 휴고(眭固)를 취하고 원담(袁譚)의 목을 베며 삭토(朔土)의 무리들을 평정하고 험한 요새를 넘어가 오환(烏丸)을 소탕하고 요동(遼東)에 위엄을 떨치며 원상(袁尙)을 효수했습니다. 비록 천자의 위엄를 빌려 쉽게 지휘(指麾)하긴 하였으나 적을 맞이해 약속하고 경계하는 말을 발양(發揚)하고 흉역(凶逆)을 섬멸한 공훈은 실로 곽가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바야흐로 표문을 올려 그를 현창하려는데 명이 짧아 일찍 죽었습니다. 위로는 조정을 위하여 훌륭한 신하(良臣)를 애도하고 아래로는 빼어난 보좌인을 상실한 것을 통한히 여깁니다. 의당 곽가의 봉작을 추증(追增)하여 예전과 합쳐 1천 호(戶)가 되게 함으로써 죽은 이를 기리어 보존하고 지난 일을 두텁게 포상하여 장래의 공적을 권장해야 합니다.”

 

시호를 내려 정후(貞侯)라 하였다. 아들인 곽혁(郭奕)이 후사를 이었다. [2]


[2]「위서魏書」에서 곽혁은 통달하여 이치를 잘 헤아렸다고 칭하였다. 곽혁의 자는 백익(伯益)인데 이는 왕창(王昶)의「가계家誡」에 보인다.


뒤에 태조가 형주(荊州)를 치고 돌아오다 파구(巴丘)에서 역병을 만나 배를 불태우며 탄식하며 말했다,  


“곽봉효(郭奉孝)가 살아있었다면 내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1] 


[1]「부자傅子」왈 : 태조가 또 말했다, “슬프구나, 봉효여! 애통하구나, 봉효여! 아깝구나, 봉효여!”


당초 진군(陳羣)이 곽가가 바른 몸가짐을 닦지 않는다고 하며 여러 차례 조정에서 곽가를 고발하였으나 곽가의 뜻은 태연자약하였다. 태조가 그를 더욱 중히 여겼으나 진군이 정도를 지킨다 하여 또한 기쁘게 여겼다. [2]


[2]「부자傅子」왈 : 태조가 순욱(荀彧)에게 서신을 보내 곽가를 추상(追傷, 그리워하며 애도함)하며 말했다, 


“곽봉효(郭奉孝)는 나이 40세를 채우지 못했으나 나와 더불어 11년을 주유하며 조험(阻險) 간난(艱難)을 모두 함께 겪었소. 또한 그는 통달(通達)하였으므로 세사(世事)를 살펴봄에 있어 막히는 바가 없으니 그에게 뒷일을 맡기려고 하였는데 어찌 이처럼 갑작스럽게 그를 잃게 될 줄 짐작했겠소. 비통하고 상심하오. 


이제 표문을 올려 그의 아들의 식읍을 1천 호를 채우도록 해주었으나 죽은 자에게 이것이 무슨 이익이 되겠소. 추념(追念)하는 마음이 더 깊어질 뿐이오. 게다가 봉효(곽가)는 바로 나(孤)를 알아주는 사람이었소. 천하인 중에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는 이가 적은 법이니 또한 이 때문에 통석(痛惜)하오. 어찌하면 좋소! 어찌하면 좋소!”


또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봉효를 추상(追傷)하는 마음을 떨칠 수가 없소. 그 사람은 시사(時事)와 병사(兵事)를 보는 바가 남들보다 더 뛰어났소. 또한 사람들은 대다수 병을 두려워하는 법이라 남방에는 역병이 있어 항상 말하기를 


‘내가 남방으로 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계책을 논할 때에는 


‘응당 먼저 형주를 평정해야 한다.’


라고 말하였소. 이는 단지 계책을 살피는 것이 충후(忠厚)할 뿐 아니라 필히 공업을 세우고자 하여 명운을 돌보지 않았다는 뜻이오. 곽가가 남을 섬기는 마음이 이러하니 어찌 그를 잊을 수 있겠소!” 


곽혁은 태자문학(太子文學)을 지냈는데 일찍 훙(薨)했다. 아들인 곽심(郭深)이 후사를 이었다. 곽심이 훙하자 아들인 곽렵(郭獵)이 후사를 이었다. [3] 


[3]「세어世語」왈 : 곽가의 손자 곽창(郭敞)은 자가 태중(泰中)으로 재주와 식견이 있었고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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