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군(陳羣)은 자가 장문(長文)이고, 영천군 허창현 사람이다. 조부 진식(陳寔), 부친 진기(陳紀), 숙부 진심(陳諶)은 모두 이름이 높았다.


진식(陳寔)의 자는 중궁(仲弓)이고, 진기(陳紀)의 자는 원방(元方), 진심(陳諶)의 자는 계방(季方)이다.


위서(魏書): 진식 당시에 가장 덕이 있다고 알려졌으며, 진기와 진심과 함께 명성이 세상에 퍼졌다. 진식이 태구(太丘)현의 장이었을때, 당고의 옥을 만나, 형산(荊山)에 숨어 들었는데,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한나라 영제(靈帝)가 죽고 하진(何進)이 정치에 관여하게 되자, 천하의 명사들을 불러모았는데, 진식(陳諶))도 불러 들여 참군(參軍)으로 삼으러 하였으나, 병을 이유로해서 가지 않았다. 진심은 사공연(司空掾)이 되었지만, 빨리 죽었다. 진기(陳紀)는 평원(平原)의 상(相), 시중(侍中), 대홍려(大鴻臚)를 역임했으며, 수십편의 책을 썼으며 그 책을 진자(陳子)라 했다. 진식이 죽었을때 사공(司空) 순상(荀爽), 태부령(太僕令) 한융(韓融)등이 상복을 입고 장례에 참석했으며, 아들과 손자로서의 예의를 갖췄으며, 사방에서 모려든 사람들의 수레가 수천이었고 태원(太原) 곽태(郭泰) 등등, 문은 사람으로 가득찼다.


부자: 진식이 죽었을때, 천하의 사람들은 조의를 나타내, 3만명의 사람이 장례에 참석했고 상복을 입은 사람은 백명 이상에 달했다. 「선현행장」: 대장군이었던 하진은 애도의 사자를 보냈고, 문범선생(文範先生)이라는 익호를 내렸다. 진식, 진기는 함께 이름이 높아서 진심과 함께, 세상에서는 "3군(三君)"이라고 칭했다. 매번 재부(宰府)에서 벽소하여 같은 때에 찾아가니 이끌고 간 새끼 기러기가 무리를 이를 정도였고 승연(丞掾)과 교제할 정도였다. 예주의 사람들은 진식, 진기, 진을 본뜬 그림이나 책을 내걸고 있었다.


진군이 어렸을 때, 진식은 항상 그의 재능을 특별하게 생각하고는 종족의 장로들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종족을 일으킬 것입니다." 

노나라 사람 공융은 뛰어난 재능이 있었고 오만했다. 나이는 진기와 진군의 중간이었으며, 먼저 진기와 교우를 맺었고 후에 진군과 사귀었으며, 진기를 위해 절까지 하여 이로부터 이름이 나게 되었다. 유비는 예주자사로 임명된 후, 진군을 불러서 별가로 삼았다. 이때 도겸이 병사하였으므로, 서주에서는 유비를 환영하였다. 유비는 가려고 했는데, 진군이 충고의 말을 했다. 

"원술은 아직도 세력이 강대하므로 지금 동쪽으로 간다면 반드시 그와 싸우게 될 것입니다. 여포가 만일 장군의 뒤를 습격한다면, 장군은 설령 서주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일은 반드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결국 서주로 갔고, 원술과 충돌했다. 여포는 과연 하비를 습격하고, 또 병사를 보내 원술을 도와 유비의 군대를 크게 깨뜨렸다. 유비는 진군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진군은 무재로 천거되었고, 자현의 현령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진기를 따라 서주로 피난갔다. 여포가 패배하자, 조조는 진군을 불러 사공서조연속으로 삼았다. 

당시 어떤 사람이 낙안 사람 왕모와 하비 사람 주규를 천거하자, 조조는 그들을 부르려고 했다. 진군은 봉함한 명령서를 돌려보내고, 왕모와 주규는 도덕을 일그러뜨리는 인물이므로 최후에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조조는 듣지 않았다. 후에 왕모와 주규는 모두 악한 일을 하였으므로 처형되었고, 조조는 이로써 진군에게 사과했다. 진군은 광릉의 진교와 단양의 대건을 천거하였고, 조조는 그들을 모두 임용했다. 후에 오나라 사람이 모반하자, 대건은 충의를 다하여 위험 속에서 죽었고, 진교는 명신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진군이 사람을 알아본다고 생각했다. 그는 소ㆍ찬ㆍ장평현의 현령을 역임하였고, 부친이 죽은 후 관직을 떠났다. 후에 사도연으로 임명되었을 때, 성적이 높게 천거되었고, 치서시어사가 되었으며, 참승상군사로 전임되었다. 위나라가 세워진후, 어사중승으로 승진했다. 

당시 조조는 육형 회복에 관한 논의를 하려고 명을 내렸다. 

"어떻게 하면 도리를 아는 군자와 고금의 일에 통달한 사람을 얻어, 그로 하여금 이 일을 판단하게 하겠는가! 옛날 진홍려가 사형에는 어짐과 은혜를 더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오. 어사중승은 그 부친의 의론을 펼 수 있을 것이오." 
진군은 대답했다. 

"신의 부친 진기가 한대의 육형을 폐지하고 태형을 증가시킨 것은 본래 어질고 측은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죽은 사람은 더욱 많아졌으므로 명의상 가볍지 실질적으로는 무거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명의상 가벼우면 범하기 쉽고, 실질적으로 무거우면 백성을 상하게 합니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다섯 가지 형벌을 신중히 실행해야만 세 가지 덕 ─ 강함ㆍ부드러움ㆍ정직함 ─ 을 이룰수 있다'고 했습니다. <역>에서는 코를 베고, 발을 자르고, 발가락을 상하게 하는 형벌을 기록하였는데, 이 때문에 정치를 보좌하고 교화를 돕고, 악을 징벌하고 살인을 금지시켰습니다. 그 후에 사람을 죽여도 죽음에 처하지 않는 것은 고대의 제도에 부합ㅎ되는 것이지만, 사람을 상하게 한 것에 이르러서는 그의 육체를 상하게 하거나 머리카락을 자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도리에 맞지 않습니다. 만일 고대의 형벌을 시행하여 음탕한 사람은 궁형을 실시하는 방으로 넘기고, 도둑은 그 발을 잘라 버린다면, 영원히 음탕하고 방종하거나 다른 사람의 집을 넘어가 악한 일을 하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3천 항의 형벌은 비록 모두 회복할수는 없을지라도, 이와 같은 몇 가지는 지금 우리들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는 것으로서 응당 먼저 시행해야 합니다. 한나라의 법률에도 사람을 살해하여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인자함이 미칠 여지가 없었지만, 그 나머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자는 육형으로 징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죽음에 처해지는 사람에게 새 삶을 줄 수 있습니다. 지금 곤장을 쳐서 죽이는 형법을 죽이지 않는 형법으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사람의 부분적인 몸을 중시하고 사람의 생명을 경시한 것입니다." 

당시 종요와 진군의 논의는 같았으며, 왕랑과 논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육형을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조조는 종요와 진군의 말에 매우 찬동하였지만, 군사행동이 멈추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의 의견을 고려하여 잠시 보류했다. 

진군은 시중으로 전임되었고, 승상동서조연을 겸임하였다. 조정에서는 어떤 일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평소 명예와 도의에 의지하고, 도의에 위배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거짓으로 하게 하지 않았다. 문제는 태자가 되었을 때, 그를 매우 존경하여 교유의 예절로써 대하였고, 항상 감탄하며 말했다. 

"나에게 안회가 있은 후부터 문인들은 날마다 나를 가까이 하는구나." 

문제가 왕위에 오르자, 진군을 창무정후로 봉하고, 상서로 바꿔 임명하였다. 구품ㆍ관인의 법령 제정은 진군이 건의한 것이다. 문제가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후, 상서복야로 승진하였고 시중의 관직이 더해졌으며, 상서령으로 바뀌어 임명되었고, 나아가 영향후로 봉해졌다. 문제는 손권을 정벌하고 광릉에 이르러 진군을 파견하여 중령군을 겸임하도록 했다. 문제는 돌아왔을 때, 진군을 가절과 도독수군으로 삼았다. 허창으로 돌아오자, 진군을 진군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중호군을 겸임하게 하였으며, 상서의 일을 관장하도록 했다. 문제의 병세가 위독하였을 때, 진군과 조진ㆍ사마선왕 등은 함께 남긴 조서를 받아 조정을 보필했다. 명제가 즉위한 후, 진군은 영음후로 봉해졌으며, 식음 5백 호를 더하여 이전 것과 합쳐 1천3백 호가 되었으며, 정동대장군 조휴, 중군대장군 조진, 무군대장군 사마선왕과 함께 관부를 설치했다. 오래지 않아 사공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상서의 일을 관장했다. 

당시 명제가 막 정치를 맡았을 때 진군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 <시경>에서 '주문왕을 본받으면, 천하의 모든 나라가 복종할 것이다'라고 했고, 또 '먼저 처자를 예로써 대한 이후에 형제를 대하면 집과 나라를 잘 통치할 수 있다'고 했으니, 이는 가까운 곳으로부터 도를 실시하기 시작하면 교화가 천하에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한 말기의 동란 이래로 전쟁은 끊이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왕교의 근본을 모르고 있는데, 왕교가 너무 엄핮니 걱정입니다. 폐하께서는 응당 위나라를 흥성시켜 태조와 고조의 사업을 계승해야 하고 천하 사람들은 안정된 절차를 갈망하므로 오직 덕치를 숭상하고 어짐을 시행하며 백성들을 구휼해야만 백성들이 매우 행복해 할 것입니다. 대체로 신하들은 부후하뇌동하고 옳고 그름을 서로 가리고 있으니, 이것은 국가의 큰 근심거리입니다. 만일 신하들끼리 화목하지 않는다면 원수가 되는 도당이 있을 것이고, 원수가 되는 도당이 있으면 비난과 칭찬의 근거가 없어지며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기 어렵괴 되므로, 이것은 엄격히 막아 이런 현상의 근원을 단절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화 연간, 조진은 표를 올려 촉을 토벌해야 한다고 몇 차례 진언하고 사곡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갔다. 진군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 태조께서는 이전에 양평으로 가서 장로를 공격하여 콩과 보리를 많이 거두어 군량미를 보충했지만, 장로는 아직 함락되지 않았고, 식량은 부족합니다. 지금은 식량이 준비되지 않았으며 사곡의 지세는 험난하므로 나아가고 물러감이 어렵고, 군량미를 운송하게 되면 반드시 적에게 약탈당할 것이고, 사병들을 요충지에 오랫동안 주둔시키면 싸움에 참가하는 병사는 감소할 것이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제는 진군의 의견을 들었다. 조진이 표를 올려 자오도로부터 촉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진군이 다시 표를 올려 시행하기가 불편하다고 말하고, 아울러 군사를 다루는 계책을 말했다. 명제는 조서를 내려 진군의 건의를 조진에게 주었고, 조진은 그의 건의에 따라 시행했다. 마침 며칠간 장마가 내렸는데, 진군은 또 응당 조서를 내려 조진에게 돌아오도록 해야만 된다고 주장했으며, 명제는 그의 의견을 따랐다. 

후에 명제의 딸 조숙이 병으로 죽자, 시호를 평원의공주로 추증했다. 진군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 사람의 수명이 길고 짧음은 운명에 있고, 삶과 죽음은 구분이 있습니다. 때문에 성인은 예제를 제정하여, 어떤 때는 상례를 융성하게 거행하고, 어떤 떄는 상례를 거행하지 않는 것을 법으로 만들고 그 중도를 추구하려고 했습니다. 공자의 부모님의 묘는 방에 있는데, 꾸미지 않은 검소함이 있고, 연릉계자는 제에 있는데, 그의 아들은 오히려 영과 박 사이에 있어서 돌아오지 못하는 혼령이 되었습니다. 대체로 성인의 거동은 천지와 부합되어 영원히 후세에 전해지고, 또 위대한 덕이 있는 사람의 거동은 예의와 제도를 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사람들의 사표가 될 수 있습니다. 여덟살 이하의 어린 아이가 죽으면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물며 어린 아이가 죽은 지 한 달이나 되는데 성인의 예절로써 그를 보내고, 게다가 상복을 입히고, 조정의 상하가 흰 옷을 입고, 아침 저녁으로 통곡하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이러한 일이 있은 적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또 몸소 가시어 묘를 시찰하고 친히 조재에 임하였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손해만 있고 이익이 없는 일을 제거하고, 단지 모든 신하들이 상례를 지내고 보내는 것을 따르고 폐하께서는 장례에 직접 참가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모든 국민의 지극한 소망입니다. 폐하께서 마피로 행차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실제로는 허창으로 가자, 두 궁의 아래 위가 모두 함께 동쪽으로 가 조정의 위아래가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멸망을 피하려고 한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편리한 곳으로 궁궐을 옮기려고 한 것이라고 하며, 어떤 사람은 무슨 까닭인지 모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길하고 흉함은 천명에 의해 결정되고, 재앙과 복은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서 옮겨서 편안함을 구하려고 하지만 또한 이익은 없었습니다. 만일 반드시 멸망을 피해 옮겨야만 됐다면 금용성 서쪽 궁궐과 맹전 별궁을 깨끗이 수리하여 모두 잠시 분별하여 거주할 수 있습니다. 두 궁궐을 들어 들녘을 들어내지 않고 농사철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적지에서 이 일을 들으면, 국가에 큰 상사가 발생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게다가 번거롭게 소비되는 바는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게다가 훌륭한 선비나 어진 사람은 성함과 쇠락을 만나고 안위에 처했을 때, 도를 따르고 천명을 믿으므로 집이 편안할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그들을 따라 기풍을 바꾸며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하물며 제왕께서는 만국의 군주이니, 안정되면 천하가 편안하고, 움직이면 천하가 혼란스럽게 됩니다. 행동은 조용함에서 그쳐야지 어찌 가볍게 결정할 수 있습니까? 

명제는 듣지 않았다. 

청룡 연간, 궁전을 건축하였으므로 백성들은 농사지을 시기를 잃었다. 진군이 상소하여 말했다. 

─ 우임금은 요와 순의 성대한 시대를 계승했지만, 오히려 꾸미지 않은 궁전에서 살았으며 거친 옷을 입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전란이 있은 이후로 백성들은 지극히 적어 한나라 문제와 경제때와 비교하면, 그 당시의 큰 한 군에 불과합니다.


신(臣) 송지(松之)가 생각건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이르기를


“원시(元始) 2년, 천하의 호구가 가장 번성하였으니 여남군(汝南郡)은 커다란 군으로서 30여만호를 소유했다.”


하였는데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시기에도 이보다 많지 못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진태강삼년지기(晉太康三年地記 - 태강지리기, 태강지지 라고도 함)에는


“진나라는 377만의 호구를 소유했다”


하였는데 오나라와 촉나라는 (이 중) 절반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말한 것을 보면 위나라가 비록 전쟁으로 피폐한[喪亂] 때를 처음 이어받았다 하나, 진나라와 비교하여도[方] 또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아니 하였을 듯합니다[본문의 無乃는 완곡한 추측]. 장문(長文-진군)의 말은 지나칩니다.


게다가 변방에는 일이 있어서 장수와 병사들은 수고로운데, 만일 수재나 한재의 근심이 있게 된다면 국가는 커다란 걱정이 있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오와 촉이 아직 멸망되지 않았으므로 사직은 불안합니다. 응당 그들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는 틈을 타서 병사들을 조련시키고 농업을 권장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지금 이와 같은 진급한 일을 버리고 먼저 궁궐을 짓고 있으니, 신은 백성들이 이 때문에 곤궁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장차 어떻게 적을 대응하겠습니까? 이전에 유비가 성도로부터 백수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많이 만들어 많은 인력을 소비하자, 조조는 그와 같이 하는 것이 백성들을 피곤하게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지금 중국이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여 국력을 약하게 하는것 역시 오와 촉이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안위와 관계되는 것이므로 오직 폐하께서 생각하셔야만 됩니다. 

명제가 대답했다. 

─ 왕자王者의 궁전은 응당 (오나라와 촉나라를 멸망시키는 것과) 더불어 진행해야 한다. 적을 멸망시킨 다음에는 다만 역을 면하고 지키기만 해야지 어찌 다시 요역을 일으키겠는가? 그러므로 이는 그대의 직무이자 소하의 큰 계략이다. 


호삼성: 이 일은 소하가 미양궁을 건설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노필: 진군의 벼슬이 사공이었기 때문이다.

진군은 또 상소했다. 

─ 옛날 한고조는 단지 항우와 천하를 다투었는데, 항우는 멸망하고 궁실은 타버렸기 때문에 소하가 무고와 태창을 만들것을 건의하였던 것이며, 이런 것들은 모두 긴급히 필요한 것들이었지만, 한고조는 그것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지금 두 적은 평정되지 않았으니, 진실로 옛날과 똑같이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孫盛曰:周禮,天子之宮,有斲礱之制。然質文之飾,與時推移。漢承周、秦之弊,宜敦簡約之化,而何崇飾宮室,示侈後嗣。此乃武帝千門萬戶所以大興,豈無所復 增之謂邪?況乃魏氏方有吳、蜀之難,四海罹塗炭之艱,而述蕭何之過議,以為令軌,豈不惑於大道而昧得失之辨哉?使百代之君,眩於奢儉之中,何之由矣。詩 云:「斯言之玷,不可為也。」其斯之謂乎!


- 대체로 사람에게는 욕망이 있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꾸미지 않는 이가 없는데, 더구나 당신은 천자이니 당신의 욕망을 어길 사람은 없습니다. 이전에 무고를 부수려고 부수지 않을 수 없다고 했고, 후에는 그것을 설치하려고 설치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만일 반드시 궁궐을 지어야만 한다면 진실로 신하들의 말에 의해 꺾이지 말아야 하며, 만일 조금이라도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면 확실하게 마음을 돌려서 또한 신하들이 미치는 바가 없게 해야 합니다. 한명제가 덕양전을 세우려고 하자 종리의가 상소하여 중단할 것을 권하였는데, 명제는 즉시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습니다. 후에 또 덕양전을 지으려고 했고, 궁전이 완성되자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종리의가 상서의 자리에 있었다면 이 궁전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오.' 무릇 왕된 자가 어찌 신하 한 명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것은 백성을 위하는 것입니다. 지금 신하는 폐하로 하여금 이 의견을 듣게 할 수 없으니, 종리의에 미치지 못함이 요원합니다. 

명제는 그래서 궁전의 건축을 감소시켰다. 

당초, 조조 시대에 유이는 동생이 위풍과 반역을 도모한 것에 연루되어 그 죄가 사형에 해당했다. 진군은 조조에게 그것을 말했고 조조는 대답했다. 

"유이는 명신이오. 나 또한 그를 사면시켜주려고 하오." 

그리고 유이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유이는 진군에게 매우 감사했다. 진군이 말했다. 

"대체로 형벌에 대한 논의는 국가를 위한 것이지 사사로운 정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것은 성명한 군주의 읭향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내가 어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도량이 크고 거동이 오만하지 않았으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청룡 4년(235)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를 정후라고 했다. 아들 진태가 뒤를 이었다. 명제는 진군의 공덕을 추모하고, 진군의 식읍을 분할하여 한 아들을 열후로 봉했다.



위서: 진군은 예전부터 계속해서 수차례 황제에게 득실에 관해서 간언하였는데,상소할때마다 그 초고를 없애버렸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간언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진군이 침묵만 지키고 있다고들 의심하고 있었는데 정시(正始: 240-249)연간에 신하들이 올린 상서 중에서 뽑아서, 명신진의(名臣奏議)라는 이름으로 공개되었는데, 이때야 신하들이 진군의 간언 내용을 볼 수 있었고, 모두들 경탄해 했다.


원자(袁子): 어떤 사람이 말했다.


“옛날 소부(少府) 양부(楊阜)가 어찌 충신이 아니었겠나? 군주의 잘못을 보면 발연히 노해 바른 말을 하니 늘 도리가 아닌 것을 말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소. 어찌 소위 ‘왕의 신하의 곧음이여,제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충성하기 때문이라(王臣謇謇,匪躬之故).’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소!”


원자가 이에 대답했다.


“가위 곧은 선비라 할 수는 있으나 충성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지 못하겠소. 무릇 어진 자는 사람을 소중히 합니다. 군주에게 충성으로 말하고 부친에게는 효도로서 말합니다. 충효가 제일가는 근본이오. 그러므로 어질고 사랑함에 이른 자는 군주와 부친에게 도를 넘지 않고 간언하되 범상하지 않고 군주의 생각을 바꾸려 하오. 부득이 말을 하게 되면 군주의 뜻을 뒤집으려 그 내용을 드러내지 않소.


요즘 신하된 자들은 군주가 도리를 잃은 것을 보면 직접 그 잘못을 들추어내 결과적으로 군주의 악함을 널리 퍼뜨리니 가위 곧은 선비라 할 수 있으나 충신은 아니오. 그러나 사공(司空) 진군(陳群)이야 말로 충신이라 할 수 있소. 그는 종일 담론을 해도 한 번도 군주의 잘못을 말한 적이 없으며 수십 번 상서를 했지만 그 내용을 바깥사람이 알지 못하게 했소. 군자들이 진군을 장자(長者)라 부르는 것이 이런 까닭이오.”


[[진태전]]으로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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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댓글

코렐솔라

2013.07.14
21:55:28
(*.52.89.87)
주석추가요

코렐솔라

2013.07.15
21:08:39
(*.52.89.88)
http://cafe.naver.com/historicdata/1506 블링블링님이 진군의 소리가 과장됐음을 밝혀주셨습니다.

서영

2019.11.24
17:26:23
(*.39.156.101)
궁전을 지은것에 진군이 간언하자 조예가 답한 내용의 수정이 필요합니다.

王者宮室,亦宜並立。滅賊之後,但當罷守耳,豈可復興役邪?是故君之職,蕭何之大略也
왕된 자의 궁실 또한 왕업을 세우는 것과 함께 해야 한다. 적이 멸망한 이후에는 단지 이미 완성한 가업만을 지킬 뿐인데, 어찌 다시 부역을 일으킬 수 있겠나? 이 때문에 그대의 임무는 소하가 미앙궁 건축을 질책한 것처럼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인데요 고사인용이랑 문장이 잘못되었습니다. 소하가 미앙궁을 지은걸 질책한게 아니라 소하가 장안에다가 미앙궁을 짓고 그 이상으로 궁궐을 짓지 말라고 한 것이거든요. 고치면 이렇게 됩니다.

왕된 자의 궁실 또한 왕업을 세우는 것과 함께 해야 한다. 적이 멸망한 이후에 단지 마땅히 지키는 일을 그만둘 따름인데, 어찌 다시 부역을 일으킬 수 있겠나? 이것이 옛 임금의 직분이며 소하의 큰 계략이기도 한 것이다.

로 고쳐야하지 않나 합니다.

코렐솔라

2019.11.25
10:13:21
(*.46.174.164)
소하의 인용 부분은 그렇다치더라도 문답 자체가 뭔가 이상하긴 하네요.

진군: 농번기에 궁전 짓지마;;
조예: 왕가의 위신에 궁전은 필요함. + [뒤의 내용]
진군: 그때랑 지금이랑은 경우가 다름;;

인데 소하 미앙궁이라면 혼란할 때 아니면 크게 짓지 못하니 지금 크게 짓고 뒤에 더 크게 안 지으면 된다 정도 아닌가요?
"적이 멸망한 이후에 단지 마땅히 지키는 일을 그만둘 따름인데, 어찌 다시 부역을 일으킬 수 있겠나?"
부분이 심히 이상합니다. 한자 안 보고 뇌피셜로 [뒤의 내용]을 추측해보면
"적이 멸망한 다음에야 말로 다른 궁전을 더 지을 필요가 없을터인데(=이미 완성한 가업을 지키다), 지금 그대는 소하 같은 조언을 올릴 때가 아닌가?"
같은 내용이 와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좀 더 의견을 듣고 번역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dragonrz

2019.11.25
23:48:08
(*.67.125.237)
王者宮室,亦宜並立。滅賊之後,但當罷守耳,豈可復興役邪?是故君之職,蕭何之大略也

왕자王者의 궁전은 응당 (오나라와 촉나라를 멸망시키는 것과) 더불어 진행해야 한다. 적을 멸망시킨 다음에는 다만 역을 면하고 지키기만 해야지 어찌 다시 요역을 일으키겠는가? 그러므로 이는 그대의 직무이자 소하의 큰 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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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기는 고쳐야겠는데 이런식으로 하는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삼국지집해를 보면 "◎胡三省曰:此指蕭何治未央宮事而言。◎弼按:群爲司空,故云。"
호삼성은 이 일을 소하가 미앙궁을 건설한 것을 말하는것이라고 하고 노필은 진군의 벼슬이 사공이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코렐솔라

2019.12.02
15:35:34
(*.112.38.49)
넵, 그럼

왕된 자의 궁실 또한 왕업을 세우는 것과 함께 해야 한다. 적이 멸망한 이후에는 단지 이미 완성한 가업만을 지킬 뿐인데, 어찌 다시 부역을 일으킬 수 있겠나? 이 때문에 그대의 임무는 소하가 미앙궁 건축을 질책한 것처럼 하는 것이다.
->
왕자王者의 궁전은 응당 (오나라와 촉나라를 멸망시키는 것과) 더불어 진행해야 한다. 적을 멸망시킨 다음에는 다만 역을 면하고 지키기만 해야지 어찌 다시 요역을 일으키겠는가? 그러므로 이는 그대의 직무이자 소하의 큰 계략이다.

(파란색 글씨) 호삼성: 이 일은 소하가 미양궁을 건설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노필: 진군의 벼슬이 사공이었기 때문이다.

로 수정하겠습니다.

dragonrz

2019.11.26
00:05:24
(*.67.125.237)
참고로 조선시대 이가환이 지은 蕭何大起未央宮論을 일부 인용합니다.

"-상략-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일반 사람들의 마음을 가지고는 능히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른바 깊고도 먼 염려의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다 고해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인 듯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깊은 염려라고 하겠습니까?
소하가 미앙궁을 지은 것은 부득불 짓지 않아서는 안 되는 때를 당하였으면서도 부득불 그만 두지 않아서는 안 되는 형세를 당해서였습니다.
이른바 때라는 것은, 고금(古今)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릇 세상에서 옛날의 성왕들은 초가집의 궁궐과 낮은 궁궐에 거처하였다는 설을 가지고 후세의 임금들을 힐난하는 자들은 모두 변화에 통달한 의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주(周)나라의 융성함이 있은 뒤로는 그 궁궐의 제도가 고공기(考工記)에 보이는 것을 보면, 옛날의 궁궐에 비하여 몇 배나 더 클 뿐만이 아닙니다. 무릇 주공(周公)과 같은 거룩한 분께서 어찌하여 멀리 요(堯) 임금과 우(禹) 임금을 본받지 않고 곧장 이와 같이 장대하게 하였겠습니까? 이 어찌 조정 안의 백관(百官)들과는 세 계단의 섬돌460) 안에서도 화락하게 지낼 수가 있지만, 만방(萬邦)의 제후들과는 반드시 구문(九門) 안에서 분주하게 오가야 하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용기(龍旂)와 구유(九游)462)의 성대한 깃발을 세우고, 고멱(羔幦)과 착형(錯衡)의 편안한 수레를 타고, 측재(側載)와 고지(睾芷)의 향기를 드날리는 신분으로서, 겨우 몸 하나만 들어가 있을 수 있는 집에 거처한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한 바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세(勢)라는 것은, 치란(治亂)이 그것입니다. 무릇 진(秦)나라와 초(楚)나라의 학정을 거친 나머지를 당하여, 백성들은 귀에 괭과리 소리만 들려와도 놀라고, 눈에 깃발의 색깔만 보아도 어지러우며, 상처가 난 몸을 돌보기에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전쟁에서 벗어나 편안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에 바야흐로 무너지듯이 쓰러져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겠다.”라고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다시 토목공사를 일으켜 괴롭힌다면, 비록 집집마다 사람을 보내어 시대가 변하였다는 말을 하면서 깨우치더라도, 어느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반드시 빙 둘러 싸고 노려보면서 원망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세(勢)라는 것입니다.
무릇 부득불 그만 두어야만 하는 형세에 처해 있으면서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를 만났을 경우, 이것은 천하에서 지극히 어려운 일로서, 하찮은 재주나 보잘것없는 지혜를 가진 자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부득불 조금 늦추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으며, 그 일을 하는 것을 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소하는 반드시 고제(高帝)가 외방에 나가 있기를 기다려서 미앙궁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고제는 또한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가지고 소하를 꾸짖었습니다.
아, 함곡관(函谷關)을 넘어와서 도읍(都邑)을 정한 이후에 궁궐을 지을 만한 날짜가 많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법궁(法宮)을 지으면서는 반드시 고제가 어가(御駕)를 타고 돌아다니는 때에 맞추어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또 고제는 외방에 나가 있을 적에 승상의 기거와 움직임에 대해서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법궁을 건립하는 일에 대해서만은 마치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일들은 모두 저로서는 감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본다면, 한가로이 말을 나누는 즈음이나 긴밀하게 계책을 논하는 즈음에 천문 만호(千門萬戶)가 이미 고제와 소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계획하는 사이에 다 갖추어져 있지 않았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것은 대개 평발(平勃)이 능히 끼어들 수 있는 바가 아니었으며, 천고(遷固)가 능히 깨달을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략-"

아마도 조예는 궁전의 건조가 꼭 필요하지만 전쟁이 다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면 굉장히 사업을 진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과거 소하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지금 전쟁과 더불어 진행해야 한다고 역설한것 같습니다.

코렐솔라

2021.09.07
13:36:46
(*.219.68.249)
樂安 낙안으로 발음 수정했습니다. (기존 악안)

코렐솔라

2021.09.26
13:40:24
(*.219.68.249)
칭했다. 예주의 사람들은

사이에 每宰府辟命,率皆同時,羔鴈成群,丞掾交至가 빠져있어서 추가합니다.

매번 재부(宰府)에서 벽소하여 같은 때에 찾아가니 이끌고 간 새끼 기러기가 무리를 이를 정도였고 승연(丞掾)과 교제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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