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잠(裴潛)은 자가 문행(文行)이고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 사람이다. [1]

[1] 위략(魏略): 배잠의 가문은 몇 세대 동안 이름난 가문이었으며 아버지 배무(裴茂)는 영제(靈帝)를 섬겨 현령(縣令) 군수(郡守) 상서(尚書)를 역임했다. 또한 건안(建安)초에 관중(關中)의 제장들을 이끌고 이각(李傕)을 토벌하는데 공이 있어 열후(列侯)로 봉해졌다. 배잠이 어릴 적에는 아주 작은 수양도 하지 않았기에 아버지는 공경받지 못했다.

전란을 피해 형주(荊州)로 갔는데, 유표(劉表)는 빈객의 예로써 대우했다. 배잠은 사사로이 친하다고 일컫는 왕찬(王粲)과 사마지(司馬芝)에게 말했다.

“유표는 패왕(霸王)의 재목이 아닌데, 서백(西伯: 주문왕)으로 자처하려고 하니, 그의 멸망은 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쪽 장사(長沙)로 갔다. 태조는 형주를 평정한 후, 배잠을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로 임명했다. 배잠은 지방으로 나가 세 현(三縣)의 현령(令)을 역임했으며, 중앙으로 들어와 창조속(倉曹屬)으로 임명되었다.

태조가 배잠에게 물었다.

“그대는 이전에 유비와 함께 형주(荊州)에 있었소. 그대는 유비의 재략이 어떻다고 생각하시오?”

배잠이 말했다.

“그로 하여금 중원에 있게 하면 사람들을 소란스럽게는 할 수 있겠지만 다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틈을 타서 요충지를 지킨다면, 한쪽의 군주는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이때 대군(代郡)이 크게 소란했으므로 배잠을 대군태수로 임명했다.

오환왕(烏丸王)과 그 대인(大人) 세 명은 각자 선우(單于)라고 칭하고, 대군의 정사에 간섭하였다. 전임 태수가 그들을 바르게 다스릴 수 없었으므로, 태조는 배잠에게 정예병을 주어서 그들을 진무하고 토벌하게 하려고 했다. 배잠이 사양하며 말했다.

“대군(代郡)의 호구 수는 많고, 병사와 전쟁용 말은 항상 만여 필을 헤아립니다. 선우는 스스로 방종하게 지낸 시간이 오래되었음을 알고 내심 매우 불안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병사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토벌한다면, 반드시 두려워하며 경내에서 항거할 것이고, 소수의 장수는 꺼리지 않을 것입니다. 응당 계획을 짜서 그들에게 대응해야지, 군대로 위협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레 한 대를 타고 대군으로 갔다. 선우는 놀라며 기뻐했다. 배잠은 그들을 위로하고 진정시켰다. 선우 이하는 모자를 벗고 얼굴을 땅으로 향하고, 전후로 하여 약탈했던 부녀자, 기계, 재물을 모두 돌려주었다. 배잠은 군내의 대관중 선우(單于)와 일체가 되었던 자, 학온(郝溫)ㆍ곽단(郭端) 등 10여 명을 주살시켰다. 북쪽 변방은 매우 놀랐고 백성들은 그에게 귀의하였다. 대군에서 3년 재직하고, 중앙으로 돌아와 승상이조연(丞相理曹掾)이 되었다. 태조는 대군을 다스린 공을 칭찬하고 포상했다. 배잠이 말했다.

“저 배잠은 백성들에게는 비록 관대하지만, 오랑캐들에게는 매우 엄합니다. 지금 후임자는 반드시 제 법령이 너무 엄하고, 정사는 너무 온화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랑캐는 평상시 오만하고 방자하여 지나치게 간대하면 반드시 흩어지게 되고, 또 이미 흐트러지고 나서 그들을 법률로써 규제하려고 하면, 이것은 투쟁을 낳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형세에 근거하여 추측하면, 대군은 반드시 또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래서 태조는 배잠을 너무 일찍 돌아오게 했다고 깊이 후회했다. 그 후 수십 일이 지나자 선우 세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서 언릉후(鄢陵侯) 조창(彰)을 효기장군(驍騎將軍)으로 임명하여 보내 그들을 정벌하도록 했다.

배잠은 지방으로 나가 패국(沛國)의 상(相)이 되었다가 연주자사(兗州刺史)로 승진했다. 태조는 마피(摩陂)에 주둔하였을 때, 배잠이 다스리는 군의 질서정연한 모습에 감탄하여 특별히 상을 내렸다.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중앙으로 들어가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었다. 지방으로 나가 위군(魏郡)ㆍ영천(潁川)의 전농중랑장(典農中郎將)이 되었고, 군국(郡國)과 같이 인재 천거의 길을 열어달라고 주청하였으며, 이로부터 농업관리가 벼슬에 나갈 길이 넓어졌다. 형주자사)로 승진하였으며,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다.

명제가 즉위하자, 중앙에 들어가 상서(尚書)가 되었다. 지방으로 나와서는 하남윤(河南尹)이 되었고, 태위군사(太尉軍師)ㆍ대사농(大司農)으로 전임되었으며, 청양정후(清陽亭侯)로 봉해졌고, 식읍 2백 호가 증가했다. 중앙으로 들어와 상서령(尚書令)이 되어 직무의 구분을 바르게 하고, 명실(名實)ㆍ품평ㆍ정책을 내었을 때 관소에서 결정하도록 하는 1백5십여 가지를 상주하였다. 부친이 죽은 후 관직을 떠났고, 후에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임명되었다.

정시(正始) 5년(244), 세상을 떠났는데 태상(太常)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를 정후(貞侯)라고 했다. [2]

[2] 위략(魏略): 당시 멀고 가까운 사람 모두 배잠이 좋은 공(公)이 될 것이라 말했으나 공교롭게도 배잠은 병에 걸려 죽었다. 예전에 배잠은 외삼촌과 아버지 모두 공경받지 못하니 스스로가 미천한 출생이라 생각하여 자기를 굽히고 의지를 꺾어 벼슬길에 나아갔다. 수 많은 직책을 지냈지만 탐욕이 없고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히 하였다. 임지로 갈 때마다 처자를 데리고 가지 않았기에 처자식은 궁핍해 명아주를 짜서 스스로를 이바지해야 했으며 연주자사(兗州)일 때 만들어둔 호상(胡床;접의자)을 기둥에 걸어놓고 연주를 떠날 정도였다.

배잠의 아버지도 수도에 있을 때 얇은 수레 덮개만을 얹은 수레를 타고 다녔으며 동생들은 시골집에 살며 항상 도보로 이동했다. 집안 사람들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모여 밥을 먹었으며 집안의 가르침에 따라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서로를 받들어 석분(石奮)의 예와 같이 하였다. 위나라(魏)가 세워진 이후, 배잠이 행한 검사와 가르친 법도에 미칠만한 자는 적었다. 배잠은 큰 인재로 우아하였으나 단지 그뿐으로 끝내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는 다른 것은 놔두고 그의 청렴함만 좇은 것이다.

아들 배수(秀)가 후사를 이었다.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라고 유언하였으므로, 묘 안에는 오직 태좌(台坐) 하나와 옹기 몇 개만을 두고, 그 나머지는 하나도 설치하지 않았다. 배수는 함희(咸熙) 연간에 상서복야(尚書僕射)가 되었다. [3]

[3] 문장서록(文章敘錄), 순작(荀綽)의 기주기(冀州記), 육기(陸機)의 혜제기거주(惠帝起居注)의 찬, 진제공찬(晉諸公贊): [[배수전]]으로 분할



위략에서는 서복(徐福), 엄간(嚴幹), 이의(李義), 장기(張既), 유초(游楚), 양습(梁習), 조엄(趙儼), 배잠(裴潛), 한선(韓宣), 황랑(黃朗)을 한 책(열전)에 담았는데 그 중 장기, 양습, 조엄, 배잠 4명은 삼국지에 전이 있으며 서복(徐福)은 제갈량(諸葛亮)전에 내용이 있고 유초는 장기의 열전에서 확인되니 한선을 비롯한 4명의 열전을 여기 적는다.


[[엄간, 이의전]]으로 분할


[[한선전]]으로 분할


황랑(黃朗)의 자는 문달(文達)로 패군(沛郡) 사람이며 통달한 자로 성실하였다. 아버지는 고향현에서 병사로 근무했는데 황랑은 이를 좇아 유학을 가지 않았기에 국(國)과 군(郡)의 사대부들은 그를 남다르게 예우했다.


황랑은 특히 동평(東平)의 우성(右姓;명문가)인 왕혜양(王惠陽)과 깊이 교류했는데, 왕혜양은 평상 아래로 내려가서 황랑의 어머니에게 절을 하였다. 


황랑은 앞서 황초(黃初) 중에 장사(長吏)였는데 장안령(長安令)으로 승진했으나 모친상 도중이었기에 거절하였다. 이후 위령(魏令)이 되었으며 양성전농중랑장(襄城典農中郎將), 탁군태수(涿郡太守)로 승진하였다. 명제(明帝) 때 병사하였다. 


황랑은 군장(君長;고을의 지도자 정도?)이었을 적에도 아버지의 연고로 인해 부하의 오백(伍伯)을 부를 때 항상 성이나 자(字)로 불렀으며 화날 때조차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황랑은 이천석의 관리가 되었고, 왕혜양 또한 장안령(長安令), 주천태수(酒泉太守)를 지냈다. 그런 연유로 당시 사람들은 왕혜양이 겉으로는 추소(거칠고 차분하지 못하다)하지만 내면은 견밀하다 하였으며 널리 헤아려 황랑의 본말을 생각하지 않고 사귀고 황랑의 모친을 자신의 모친과 같이 섬겼다고 하였다.


어환(魚豢)이 말한다: 세상에서는 군자의 덕이 용과 같다며 칭찬하는데 이는 대개 사람의 성질이나 행동이 전보다 나아지기 때문이다. 과거에 장안의 장사치 중에 유중시(劉仲始)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한 번은 그가 시장 관리에게 모욕을 당했다. 격분한 유중시는 자신의 자(尺)를 밟아 부러트리고는 그 자리에서 공부하러 떠났다. 유중시는 학교들을 지나며 수행을 계속했고 그의 명성은 결국 해내에 퍼지게 되었다. 후에 유중시의 재주를 듣고 그를 불렀지만 유중시는 나아가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그의 높은 이상을 좇았다. 


이전 시절에 이와 같은 일이 존재하였는데 오늘 날에 와서는 서복(徐福)과 엄간(嚴幹)이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만약 용의 뜻이 아니었다면 어찌 가능했겠는가? 이의(李義)는 변천하여 도에 도달하였고 장기(張既)는 힘써 주인을 섬기었고 한선(韓宣)은 사물을 다르게 볼 줄 알았으며 황랑(黃朗)은 특출나게 되었다. 각자는 위에 돌이 있는 뿌리와 같아 수천 리에 걸쳐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으니 결코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유초(游楚)는 강개함이 있어 자신이 품은 깊은 속마음의 포부를 펼쳐 군(郡)을 온전히 지키고 황제를 알현했다. 이를 보면 본인의 생명을 내어주고는 잔치, 놀이를 하며 한가로운 것이니 이 또한 하나의 결실이 아니겠는가. 


양습(梁習), 조엄(趙儼) 또 배잠(裴潛)에 이르기까지 장양(張楊)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자신을 단속하고 늙어감에 따라 밝음을 더하였으니 이 또한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 평하여 말한다.

화흡(和洽)은 청렴과 화합을 이상적인 근간으로 하여 일을 하였고, 상림(常林)은 평소의 행동이 순수하고 곧았으며, 양준(楊俊)은 원만하고 도의를 행했다. 두습(杜襲)은 온화하고 순수하며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고, 조엄(趙儼)은 강인하며 절도가 있고, 배잠(裴潛)은 절조가 고상하며 재능이 탁월했으니, 이들 모두 한 시대의 우수한 선비들이다. 상림(常林)이 삼사(三司)에 마음을 얽매이지 않고, 대부(大夫)의 위치로서 노령(老)을 이유로 물러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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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3
13:03:59
(*.52.89.88)
오옷 이미 추가되어 있군요. 확인의 의미로 리플남깁니다.

코렐솔라

2021.08.31
11:16:07
(*.46.121.71)
魏略曰:潛世為著姓。父茂,仕靈帝時,歷縣令、郡守、尚書。建安初,以奉使率導關中諸將討李傕有功,封列侯。潛少不脩細行,由此為父所不禮

위략(魏略): 배잠의 가문은 몇 세대 동안 이름난 가문이었으며 아버지 배무(裴茂)는 영제(靈帝)를 섬겨 현령(縣令) 군수(郡守) 상서(尚書)를 역임했다. 또한 건안(建安)초에 관중(關中)의 제장들을 이끌고 이각(李傕)을 토벌하는데 공이 있어 열후(列侯)로 봉해졌다. 배잠이 어릴 적에는 아주 작은 수양도 하지 않았기에 아버지는 공경받지 못했다.
=====================================================
魏略曰:時遠近皆云當為公,會病亡。始潛自感所生微賤,無舅氏,又為父所不禮,即折節仕進,雖多所更歷,清省恪然。每之官,不將妻子。妻子貧乏,織藜芘以自供。又潛為兗州時,嘗作一胡床,及其去也,留以掛柱。又以父在京師,出入薄軬車;群弟之田廬,常步行;家人小大或并日而食;其家教上下相奉,事有似於石奮。其履檢校度,自魏興少能及者。潛為人材博,有雅(要)容,然但如此而已,終無所推進,故世歸其絜而不宗其餘。



위략(魏略): 당시 멀고 가까운 사람 모두 배잠이 좋은 공(公)이 될 것이라 말했으나 공교롭게도 배잠은 병에 걸려 죽었다. 예전에 배잠은 외삼촌과 아버지 모두 공경받지 못하니 스스로가 미천한 출생이라 생각하여 자기를 굽히고 의지를 꺾어 벼슬길에 나아갔다. 수 많은 직책을 지냈지만 탐욕이 없고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히 하였다. 임지로 갈 때마다 처자를 데리고 가지 않았기에 처자식은 궁핍해 명아주를 짜서 스스로를 이바지해야 했으며 연주자사(兗州)일 때 만들어둔 호상(胡床;접의자)을 기둥에 걸어놓고 연주를 떠날 정도였다.

배잠의 아버지도 수도에 있을 때 얇은 수레 덮개만을 얹은 수레를 타고 다녔으며 동생들은 시골집에 살며 항상 도보로 이동했다. 집안 사람들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모여 밥을 먹었으며 집안의 가르침에 따라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서로를 받들어 석분(石奮)의 예와 같이 하였다. 위나라(魏)가 세워진 이후, 배잠이 행한 검사와 가르친 법도에 미칠만한 자는 적었다. 배잠은 큰 인재로 우아하였으나 단지 그뿐으로 끝내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는 다른 것은 놔두고 그의 청렴함만 좇은 것이다.

==========
영문 중역입니다.

코렐솔라

2021.08.31
17:42:11
(*.46.121.71)
魏略列傳以徐福、嚴幹、李義、張既、游楚、梁習、趙儼、裴潛、韓宣、黃朗十人共卷,其既、習、儼、潛四人自有傳,徐福事在諸葛亮傳,游楚事在張既傳。餘韓等四人載之於後。

위략에서는 서복(徐福), 엄간(嚴幹), 이의(李義), 장기(張既), 유초(游楚), 양습(梁習), 조엄(趙儼), 배잠(裴潛), 한선(韓宣)、황랑(黃朗) 한 책(열전)에 담았는데 그 중 장기, 양습, 조엄, 배잠 4명은 삼국지에 전이 있으며 서복(徐福)은 제갈량(諸葛亮)전에 내용이 있고 유초는 장기의 열전에서 확인되니 한선을 비롯한 4명의 열전은 여기 적는다.

구라뱅뱅

2021.09.01
09:22:31
(*.21.49.97)
嚴幹字公仲,李義字孝懿,皆馮翊東縣人也。馮翊東縣舊無冠族,故二人並單家,其器性皆重厚。當中平末,同年二十餘,幹好擊劍,義好辦護喪事。馮翊甲族桓、田、吉、郭及故侍中鄭文信等,頗以其各有器實,共紀識之。會三輔亂,人多流宕,而幹、義不去,與諸知故相浮沈,採樵自活。逮建安初,關中始開。詔分馮翊西數縣為左內史郡,治高陵;以東數縣為本郡,治臨晉。

엄간(嚴幹)의 자는 공중(公仲)이고, 이의(李義)의 자는 효의(孝懿)이다. 모두 풍익(馮翊)군 동현(東縣) 사람이다. 풍익 동현은 예부터 관족(冠族:고위관리가 나온 집안)이 없었기에 두사람모두 평범한 집안(單家)이지만 타고난 성품은 모두 중후(重厚)하였다. 중평 말기 당시, 이십여세의 같은 나이로 엄간은 검격(擊劍)을 좋아했고, 이의는 장례치르는 일을 돕는 것을 좋아했다. 풍익군의 대족으로는 환(桓), 전(田), 길(吉), 곽(郭)과 옛 시중(侍中) 정문신(鄭文信)등이 있으며, 상당히 각각 그 기량과 실질이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삼보의 난 때, 사람들이 많이 이동하게 되었으나 엄간,이의는 가지 않았고 더불어 모두 전부터 부침(浮沈)이 있음을 알았기에, 땔나무를 거둬 생활을 유지 하였다. 건안 초에 이르러, 관중을 새로 열었다. 조서로 부풍 서쪽을 여러현으로 나누어 좌내사군(左內史郡)을 두었으며, 고릉(高陵)에 치소를 두었다. 동쪽 여러현은 기존 부풍군으로 하여 임진(臨晉)에 치소를 두었다.

구라뱅뱅

2021.09.01
11:14:19
(*.21.49.97)
義謂幹曰:「西縣兒曹,不可與爭坐席,今當共作方床耳。」遂相附結,皆仕東郡為右職。司隸辟幹,不至。歲終,郡舉幹孝廉,義上計掾。義留京師,為平陵令,遷宂從僕射,遂歷顯職。逮魏封十郡,請義以為軍祭酒,又為魏尚書左僕射。及文帝即位,拜諫議大夫、執金吾衛尉,卒官。

이의가 엄간에게 말하길 "서쪽현들은 아직 어린아이와 같으니, 같이 모여 앉아 논쟁하기가 불가하니, 지금 응당 방상(方床:사각 상-테이블)을 같이 만들어야 할 것이오" 라 하였고, 마침내 서로 모이게 되었으며, 모두가 동군을 섬기었다. 사례(司隸)에서 엄간을 초빙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그해 말 군에서는 엄간을 효렴(孝廉)으로 이의는 상계연(上計掾)으로 천거하였다. 이의는 경사(京師)에 남아 평릉현령(平陵令)이 되었다. 용종복사(宂從僕射)로 승진하였고, 널리 여러현의 관직을 하였다. 위(魏)국 10군을 봉할때 이의를 불러 군좨주(軍祭酒)로 삼았으며, 또 위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로 임명하였다. 문제가 즉위 하자 간의대부(諫議大夫), 집금오위위(執金吾衛尉)로 삼았고, 죽었다.

구라뱅뱅

2021.09.01
12:56:08
(*.21.49.97)
義子豐,字宣國,見夏侯玄傳。幹以孝廉拜蒲阪令,病,去官。復舉至孝,為公車司馬令。為州所請,詔拜議郎,還參州事。
會以建策捕高幹,又追錄前討郭援功,封武鄉侯,遷弘農太守。及馬超反,幹郡近超,民人分散。超破,為漢陽太守。遷益州刺史,以道不通,黃初中,轉為五官中郎將。明帝時,遷永安太僕,數歲卒。始李義以直道推誠於人,故于時陳群等與之齊好。雖無他材力,而終仕進不頓躓。

이의의 아들은 이풍(李豐)으로 자는 선국(宣國)이다. 하후현(夏侯玄)전에서 볼수 있다.
엄간은 효렴에서 포판현령(蒲阪令)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에 걸려 관직에서 물러났다.
효성이 지극함에 다시 천거하여, 공거사마령(公車司馬令)에 임명되었다.
주(州)로부터 불려 조서로 의랑(議郎)에 임명되었으며, 주(州)로 돌아와 업무에 참여하였다.
고간(高幹)을 포박한 계책과 곽원(郭援)을 토벌한 공으로 하여 무향후(武鄉侯)에 봉해지고, 홍농태수(弘農太守)로 승진하였다.
마초가 반란을 일으키자. 엄간의 군(郡)이 마초와 가까워 군민 들을 흩어지게 하였다. 마초가 격파 되고 한양태수(漢陽太守)로 임명되었다.
익주자사로 승진하였으나 가는 길이 막혔다. 황초 연간에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으로 전임되었다.
명제 때, 영안태복(永安太僕)으로 승진하였고 몇 년 후 죽었다.
처음 이의는 곧고 진실된 사람이어서 진군(陳群)등과 더불어 사이가 좋았다. 비록 재주와 힘이 없더라도, 결국 정해진 시각에 맞춰 출근하였고, 업무에 차질이 없었다.

幹從破亂之後,更折節學問,特善春秋公羊。司隸鍾繇不好公羊而好左氏,謂左氏為太官,而謂公羊為賣餅家,故數與幹共辯析長短。
繇為人機捷,善持論,而幹訥口,臨時屈無以應。繇謂幹曰:「公羊高竟為左丘明服矣。」幹曰:「直故吏為明使君服耳,公羊未肯也。」

구라뱅뱅

2021.09.01
15:00:56
(*.21.49.97)
엄간은 난이 끝나 직후에 학문에 대한 생각을 고쳐 잡으니, 춘추공양전(春秋公羊)을 특별히 좋아하였다. 사례교위 종요는 공양전은 좋아하지 않았고, 좌씨전(左氏)을 좋아하였기에 말하기를 좌씨전이 궁중요리사(太官) 라면, 공양전은 시장 떡가게집(賣餅家)이라 하였으니, 수차례 엄간과 같이 그 장단점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졌다. 종요는 사람이 기민(機捷눈치가 빠르고 민첩함)하고, 지론(持論)을 좋아하니 , 이에 엄간은 말을 더듬 거려 임시로 굽힘이 없이 대응하였다. 종요가 엄간에게 말하기를 "공양고(公羊高:공양전 저자)가 마침내 좌구명(左丘明:좌씨전 저자)에게 항복하였구려" 엄간이 이에 말하길 "고리(故吏)가 명사군(明使君)에게 항복한 것이니, 공양은 아직 수긍하지 못하였소" *(고리故吏는 추천 받아서 관직에 오른 사람을 말하니, 엄간이 사례교위 종요에게 임관된 것을 빗대어 말함)

코렐솔라

2021.09.08
22:50:31
(*.219.68.249)
'馮翊'西數縣為左內史郡 풍익을 나눈건데 부풍을 나눈 것으로 오타 나온 거 같아요.
저도 옛날부터 좌풍익 주제에 오른쪽(동쪽)에 있어서 자주 헷갈리더군여 ㅠㅠ

구라뱅뱅

2021.09.01
17:30:52
(*.114.89.66)
韓宣字景然,勃海人也。為人短小。建安中,丞相召署軍謀掾,宂散在鄴。
嘗於鄴出入宮,於東掖門內與臨菑侯植相遇。時天新雨,地有泥潦。宣欲避之,閡潦不得去。
乃以扇自障,住於道邊。植嫌宣既不去,又不為禮,乃駐車,使其常從問宣何官?宣云:「丞相軍謀掾也。」植又問曰:「應得唐突列侯否?」
宣曰:「春秋之義,王人雖微,列于諸侯之上,未聞宰士而為下士諸侯禮也。」

植又曰:「即如所言,為人父吏,見其子應有禮否?」宣又曰:「於禮,臣、子一例也,而宣年又長。」植知其枝柱難窮,乃釋去,

具為太子言,以為辯。黃初中,為尚書郎,嘗以職事當受罰於殿前,已縛,束杖未行。

文帝輦過,問:「此為誰?」左右對曰:「尚書郎勃海韓宣也。」帝追念前臨菑侯所說,乃寤曰:「是子建所道韓宣邪!」特原之,遂解其縛。

時天大寒,宣前以當受杖,豫脫蔥,纏褌面縛;

及其原,褌腰不下,乃趨而去。帝目而送之,笑曰:「此家有瞻諦之士也。」後出為清河、東郡太守。
明帝時,為尚書大鴻臚,數歲卒。
宣前後當官,在能否之間,然善以己恕人。
始南陽韓暨以宿德在宣前為大鴻臚,暨為人賢,及宣在後亦稱職,故鴻臚中為之語曰:「大鴻臚,小鴻臚,前後治行曷相如。」

한선(韓宣)은 자가 경연(景然)으로 발해(勃海) 사람이다. 건안 연간 승상이 불러 군모연(軍謀掾)에 임명하였고, 한가하게 업(鄴)에 있었다.
업의 궁을 출입하다 동쪽의 액문(掖門:좁은문) 안쪽에 임치후(臨菑侯) 조식과 만났다.
이 때 하늘에서 봄비가 내려 땅이 진창이었다. 한선은 피하고자 하였으나 비로 문을 잠가 갈수가 없었다.
이에 부채로 비를 막으며 길가에 있게 되었다. 조식은 한선이 가지 않음을 불만스러워 하며 예가 아니라 하여 수레를 세우고
그가 어떤 벼슬인지를 물었다. 한선이 말하기를 "승상군모연입니다" 라 하자 조식이 다시 묻기를 "열후(列侯)가 아님에도 당돌하구나" 라 하자
한선은 "춘추의 의리에는 왕의 사람은 비록 미천하더라도 제주의 위라 하였고, 아직 재상의 관리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대하는 제후의 예는 듣지 못했습니다."
조식이 다시 말하기를
"그 말한 것과 같다, 아버지가 부리는 사람이라는 것이구나, 그 아들에게는 합당한 예가 없다고 보는 것인가?"
한선이 다시 말하기를
"예(禮)에서는 신하와 아들은 같은 항렬이며, 한선의 나이가 더 많습니다."
조식은 그 뜻을 알게되어 궁하게 되니 이에 놓아주고 가서, 태자에게 그 말을 세세 말하였다.

황초 연간에 상서랑(尚書郎)이 되었고, 직무를 하던 중에 죄를 지어 궐아래 포박되어 형벌(杖장형:볼기를 때림)을 행하기 전이었다.
문제가 가마(輦)를 타고 지나다가 묻기를 "이는 누구인가?" 하자, 좌우에서 대답하기를 "상서랑 발해사람 한선입니다"
황제는 전에 임치후의 말이 생각나서 이에 깨달아 말하기를 "이는 자건(조식)이 말했던 한선이구나"
라 하여 특별이 죄를 사하여 마침내 포박에서 벗어났다.
이 때 큰 추위가 있어, 장형을 하기 전에 바지를 벗었고, 속옷(褌)을 감아 두손을 등뒤로 돌려 묶었으니, 이는 속옷이 허리 아래 있어 만일 달아남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황제는 풀어주어 가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이제 집안에서 내려다 볼수 있는 선비로구나" 후에 청하(清河)로 나아가 동군태수(東郡太守)가 되었다.

명제 시기, 상서대홍려(尚書大鴻臚)가 되었고, 수년 후 죽었다.
한선은 앞뒤로 관직에 있었으며, 능력이 유무의 사이에 있기에, 그리하여 착하고 어진 사람이었다.
처음 남양(南陽) 한기(韓暨)가 오래된 덕망으로 베품에 있어 대홍려가 되었고, 한기는 인격이 현명하였다.

우선 번역하던거 올려요. (문장 다듬고 마무리도 해야함)

구라뱅뱅

2021.09.02
08:57:59
(*.21.49.97)
한선(韓宣)은 자가 경연(景然)으로 발해(勃海) 사람이다. 건안 연간 승상이 불러 군모연(軍謀掾)에 임명하였고, 한가하게 업(鄴)에 있었다.
업의 궁을 출입하다 동쪽의 액문(掖門:좁은문) 안쪽에서 임치후(臨菑侯) 조식과 만났다.
이 때 하늘에서 봄비가 내려 땅이 진창이었다. 한선은 피하고자 하였으나 비로 궁문을 잠궈 갈 수가 없었다.
이에 부채로 비를 막으며 길가에 있게 되었다. 조식은 한선이 가지 않음을 불만스러워 하며 예가 아니라 하여 수레를 세우고
그가 어떤 벼슬인지를 물었다. 한선이 말하기를
"승상군모연입니다"
라 하자 조식이 다시 묻기를
"열후(列侯)가 아님에도 당돌하구나"
라 하자 한선은
"춘추의 의리에는 왕의 사람은 비록 미천하더라도 제주의 위라 하였고, 아직 재상의 관리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대하는 제후의 예는 듣지 못했습니다."
이에 조식이 다시 말하기를
"그 말한 것과 같다, 아버지가 부리는 사람이라는 것이구나, 그 아들에게는 합당한 예가 없다고 보는 것인가?"
한선이 다시 말하기를
"예(禮)에서는 신하와 아들은 같은 항렬이며, 한선의 나이가 더 많습니다."
조식은 그 뜻을 알게되어 궁하게 되니 이에 놓아주고 가서, 태자에게 그 말을 세세 말하였다.

황초 연간에 상서랑(尚書郎)이 되었고, 직무를 하던 중에 죄를 지어 궐아래 포박되어 형벌(杖장형:볼기를 때림)을 행하기 전이었다.
문제가 가마(輦)를 타고 지나다가 묻기를
"이는 누구인가?"
하자, 좌우에서 대답하기를
"상서랑 발해사람 한선입니다"
황제는 전에 임치후의 말이 생각나서 이에 깨달아 말하기를
"이는 자건(조식)이 말했던 한선이구나"
라 하여 특별이 죄를 사하여 마침내 포박에서 벗어났다.
이 때 큰 추위가 있어, 장형을 하기 전에 바지를 벗었고, 속옷(褌)을 감아 두손을 등뒤로 돌려 묶었으니, 이는 속옷이 허리 아래 있어 만일 달아남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황제는 풀어주어 가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제 집안에서 내려다 볼수 있는 선비로구나"

후에 청하(清河)로 나아가 동군태수(東郡太守)가 되었다.
명제 시기, 상서대홍려(尚書大鴻臚)가 되었고, 수년 후 죽었다.
한선은 앞뒤로 관직에 있었으며, 능력이 있으나 그리하지 못하였고, 어진 마음으로 자신과 모두를 용서하였다.

처음 남양(南陽) 한기(韓暨)가 숙덕(宿德:학덕이 높은 노인)하여 한선(宣) 이전에 대홍려가 되었고, 한기는 어질고 현명하였으며,
이에 한선이 후에 그 관직에 있게 되니, 옛 홍려(鴻臚) 중에 있는 말이

"대홍려, 소홍려, 앞뒤로 행장을 꾸려 가니 어찌하여 서로 같을 소냐" 라 하였다.

몇몇 문구가 막혔으나, 우선 번역 본문 적용

코렐솔라

2021.09.04
21:03:51
(*.219.68.249)
안녕하세요.

엄간, 이의와 한선전을 따로 분할했습니다.

어환의 평이 따로 있기는하나 그것은 삼국지의 전도 마찬가지기에 괜찮다고 봤습니다.

번역 감사합니다

코렐솔라

2021.09.06
11:24:49
(*.219.68.249)
黃朗字文達,沛郡人也。為人弘通有性實。父為本縣卒,朗感其如此,抗志游學,由是為方國及其郡士大夫所禮異。特與東平右姓王惠陽為碩交,惠陽親拜朗母於床下。朗始仕黃初中,為長吏,遷長安令,會喪母不赴,復為魏令,遷襄城典農中郎將、涿郡太守。以明帝時疾病卒。始朗為君長,自以父故,常忌不呼鈴下伍伯,而呼其姓字,至於忿怒,亦終不言。朗既仕至二千石,而惠陽亦歷長安令、酒泉太守。故時人謂惠陽外似麤疏而內堅密,能不顧朗之本末,事朗母如己母,為通度也。
====================
황랑(黃朗)의 자는 문달(文達)로 패군(沛郡) 사람이며 통달한 자로 성실하였다. 아버지는 고향현에서 병사로 근무했는데 황랑은 이를 좇아 유학을 가지 않았기에 국(國)과 군(郡)의 사대부들은 그를 남다르게 예우했다. 황랑은 특히 동평(東平)의 우성(右姓;명문가)인 왕혜양(王惠陽)과 깊이 교류했는데, 왕혜양은 평상 아래로 내려가서 황랑의 어머니에게 절을 하였다.

황랑은 앞서 황초(黃初) 중에 장사(長吏)였는데 장안령(長安令)으로 승진했으나 모친상 도중이었기에 거절하였다. 이후 위령(魏令)이 되었으며 양성전농중랑장(襄城典農中郎將), 탁군태수(涿郡太守)로 승진하였다. 명제(明帝) 때 병사하였다.

황랑은 군장(君長;고을의 지도자 정도?)이었을 적에도 아버지의 연고로 인해 부하의 오백(伍伯)을 부를 때 항상 성이나 자(字)로 불렀으며 화날 때조차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황랑은 이천석의 관리가 되었고, 왕혜양 또한 장안령(長安令), 주천태수(酒泉太守)를 지냈다. 그런 연유로 당시 사람들은 왕혜양이 겉으로는 추소(거칠고 차분하지 못하다)하지만 내면은 견밀하다 하였으며 널리 헤아려 황랑의 본말을 생각하지 않고 사귀고 황랑의 모친을 자신의 모친과 같이 섬겼다고 하였다.

코렐솔라

2021.09.06
12:33:04
(*.219.68.249)
魚豢曰:世稱君子之德其猶龍乎,蓋以其善變也。昔長安巿儈有劉仲始者,一為巿吏所辱,乃感激,蹋其尺折之,遂行學問,經門行脩,流名海內。後以有道徵,不肯就,眾人歸其高。余以為前世偶有此耳,而今徐、嚴復參之,若皆非似龍之志也,其何能至於此哉?李推至道,張工度主,韓見識異,黃能拔萃,各著根於石上,而垂陰乎千里,亦未為易也。游翁慷慨,展布腹心,全軀保郡,見延帝王,又放陸生,優游宴戲,亦一實也。梁、趙及裴,雖張、楊不足,至於檢己,老而益明,亦難能也。

=========================================================================

어환(魚豢)이 말한다: 세상에서는 군자의 덕이 용과 같다며 칭찬하는데 이는 대개 사람의 성질이나 행동이 전보다 나아지기 때문이다. 과거에 장안의 장사치 중에 유중시(劉仲始)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한 번은 그가 시장 관리에게 모욕을 당했다. 격분한 유중시는 자신의 자(尺)를 밟아 부러트리고는 그 자리에서 공부하러 떠났다. 유중시는 학교들을 지나며 수행을 계속했고 그의 명성은 결국 해내에 퍼지게 되었다. 후에 유중시의 재주를 듣고 그를 불렀지만 유중시는 나아가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그의 높은 이상을 좇았다.

이전 시절에 이와 같은 일이 존재하였는데 오늘 날에 와서는 서복(徐福)과 엄간(嚴幹)이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만약 용의 뜻이 아니었다면 어찌 가능했겠는가? 이의(李義)는 변천하여 도에 도달하였고 장기(張既)는 힘써 주인을 섬기었고 한선(韓宣)은 사물을 다르게 볼 줄 알았으며 황랑(黃朗)은 특출나게 되었다. 각자는 위에 돌이 있는 뿌리와 같아 수천 리에 걸쳐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으니 결코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유초(游楚)는 강개함이 있어 자신이 품은 깊은 속마음의 포부를 펼쳐 군(郡)을 온전히 지키고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또한 육지에서의 생황을 그만두듯 잔치자리를 헤엄치며 논 것 또한 사실이다. (오역의 가능성이 매우 높은 문장;又放陸生,優游宴戲,亦一實也).

양습(梁習), 조엄(趙儼) 또 배잠(裴潛)에 이르기까지 장(張)과 양(楊)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자신을 단속하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밝음을 더하였으니 이 또한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
陸生은 뜬금없이 왜 나오고 마지막의 장과 양은 뭔지를 모르겠네요 -_-;; 차마 반영하지를 못하겠음

구라뱅뱅

2021.09.06
13:15:34
(*.114.89.66)
유초는 장기전에서 유초 내용 읽으면 되겠네요.

제갈량이 쳐들어오자 본인의 목숨을 내놓았으니 放陸生 (육생을 내놓으니 -> (본인의) 목숨을 내놓으니, 놀기를 좋아하던 본인의 성향에 맞게, 황제를 알현하고 나서 여유롭게 즐기는것도 하나의 결말이다. 라는 뉘앙스.
(군을 지켜 황제 알현했다, 그런데 그걸 보면(又으로 이어짐) 본인의 생명을 내어주었더니, 宴戲잔치,놀이를 하며 優游한가로우니 이또한 하나의 결실아닌가~

코렐솔라

2021.09.06
13:52:17
(*.219.68.249)
아 육생이 본인의 목숨을 의미하는 것이었군요! 감사합니다. 영어 번역에선 육생을 고유명사라 해놔서 육울생은 들어봤어도 육생은 뭐지???? 이러고 있었습니다 ㅋㅋㅋ

그럼 이 부분은

유초(游楚)는 강개함이 있어 자신이 품은 깊은 속마음의 포부를 펼쳐 군(郡)을 온전히 지키고 황제를 알현했다. 이를 보면 본인의 생명을 내어주고는 잔치, 놀이를 하며 한가로운 것이니 이 또한 하나의 결실이 아니겠는가.

가 되겠군요.

코렐솔라

2021.09.07
00:49:37
(*.219.68.249)
개인적으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와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봤는데(https://cafe.naver.com/booheong/208820) 장(張)과 양(楊)의 경우 쉼표 없는 판본이 있고 그에 따라 번역하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따라서 장과 양을 장양으로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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