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림(崔林)은 자가 덕유(德儒)이고, 청하군(清河郡) 동무성(東武城)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더디게 이름을 알렸으며 친족들은 모두 그를 알아주지도 못했다. 오직 그의 사촌 형 최염(琰)만이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태조(太祖)는 기주(冀州)를 평정한 후, 불러서 오현(鄔)의 장(長)으로 제수했다. 그는 가난하여 거마(車馬)가 없었으므로 혼자 걸어가 취임했다. 태조가 호관(壺關)을 정벌할 때, 현의 장리(長吏)들 중에서 덕정(德政)이 가장 뛰어난 자를 물었는데, 병주자사(并州刺史) 장척(張陟)이 최림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태조는 그를 발탁하여 기주주부(冀州主簿)로 임명하였다. 전임하여 별가(別駕)ㆍ승상연속(丞相掾屬)이 되었고, 위(魏)나라가 세워지자 점점 승진하여 어사중승(御史中丞)까지 되었다.

문제(文帝)가 제위에 오른 후, 상서(尚書)로 제수되었고, 밖으로 나가 유주자사(幽州刺史)가 되었다. 북중랑장(北中郎將) 오질(吳質)이 하북(河北)의 군사를 통솔하였는데, 탁군태수(涿郡太守) 왕웅(王雄)이 별가 최림에게 충고하여 말했다.

“오중랑장(吳中郎將: 오질)은 황상께서 가까이하며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며, 나라의 귀한 신하요. 절(節: 재판의 전권을 나타내는 것)에 기대어 일을 통솔하고, 주와 군(州郡)의 장관들 중 서간을 보내 경의를 나타내지 않는 자가 없소. 그러나 최사군(崔使君)은 그에게 서간을 보내지 않았소. 만일 변방지역을 다스리지 않는 것을 이유로 하여 오중랑장이 그대를 죽이려 한다면, 사군은 그대를 어떻게 변호할 수 있겠소?”

별가(別駕)가 왕웅의 말을 최림에게 모두 말하자, 최림이 말했다.

“자사(刺史)는 이 주(州)를 떠나는 것을 신발을 벗는 것처럼 하고 있는데, 어찌 연연해 해야만 하겠소? 이 주(유주)는 오랑캐와 인접해 있으므로, 응당 안정으로써 다스려야 하오. 정치가 소란스러우면 오랑캐들의 반역하려는 마음을 움직이게 되어, 특히 나라 북쪽이 근심거리가 되게 만들 것이오. 나는 이렇기 때문에 이 땅에 머물려고 하는 것이오.”

재임하는 1년간, 오랑캐들이 몰래 침범하는 것이 끊어졌지만, [주1] 여전히 상사(上司)를 존경하지 않았으므로 하간태수(河閒太守)로 좌천되었다. 청렴을 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최림 때문에 원망하는 의견이 많았다. [주2] 


[주1] 안왕씨보(案王氏譜):왕웅(王雄)의 자는 원백(元伯)이다. 태보(太保)인 왕상(王祥)의 종(宗)이다. 위명신주(魏名臣奏)에는 안정태수(安定太守) 맹달(孟達)이 왕웅을 추천하는 글이 실려 있다.


"신이 듣기로 명군은 대업을 이루기 위해 현명한 이를 구하고 충신은 남을 본받기 위해 선을 추구한다 들었사옵니다. 그렇기에 주역(易)에서는 "띠를 뽑으면 뿌리까지 전부 따라 뽑힌다 하였고(拔茅連茹;발모연어: 훌륭한 한 사람을 등용하면 같은 사람을 서로 이끌어준다는 뜻.)"라 하고 논어의 주석(傳)에서는 "네가 잘 아는 사람부터 등용하라(舉爾所知)"하 한 것이옵니다. 신은 자신을 역량을 헤아릴 수는 없사오나 이 문구에 담긴 뜻만은 남모래 우러러 받들고 있사오니 이는 신이 옛날에 부족한 사람들로 관청의 직책을 채우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옵니다. 당시 탁군태수(涿郡太守) 왕웅(王雄)은 서부종사(西部從事)로 신의 동료였사옵니다. 왕웅은 천성이 어질고 완교하여 실로 꾀가 있는 인물이었으니 3개 현의 임기가 끝날 때마다 인심이 화합하였으며 근직(近職)에 있을 때에는 황제의 은혜와 명택을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을 회유할 줄 아는 재주가 있었고 법을 다룰 때에 있어서는 부패가 없이 신중했습니다. 신이 왕년에 출사를 갔었는데 지나가는 길에 왕웅의 군을 들리게 되었습니다. (왕웅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우리는 폐하로부터 특별히 발탁되는 은혜를 받았기에 항상 심혈을 기울여 절조를 지켜야 하며 이를 위해 목숨을 던질 생각도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 언사는 격양되었고 정취는 진지하고 간절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어두워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일지 모르지만 이 왕웅이라는 자는 문무의 자질을 겸비하였으며 성품이 충성스럽고 절개가 굳세니 그가 속한 무리의 분수에는 맞지 않는 재능이옵니다. 지금 탁군(涿郡)의 인구가 3천호인데 고아와 과부가 있는 집이 그 절반에 해당하고 병사들은 북쪽의 장벽을 굳게 지키고 있는 상황이니 진실로 왕웅이 자신의 지혜와 힘을 펼치기에도, 자신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발전시키기에도 부족한 곳입니다. 신이 받은 은혜는 깊고 두터운데 나라에 보답한 것은 없기에 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정성을 다하여 제 마음의 얕은 생각을 무릅쓰고 아뢰니 들어주시옵소서"

이에 조서를 내리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옛날에 소하(蕭何)는 한신(韓信)을 추천하였고, 등우(鄧禹)는 오한(吳漢)의 말에 더했으니(進) 오직 어진 이만이 (누가 인재인지) 아는 것이다. 나 또한 왕웅은 담력과 지혜가 있고 문무에 자질이 있다는 것을 오랜 기간 동안 알고 있던 터였다. 이제 (왕웅을 기존 제도를 무시하고) 편히 산기(散騎)로 뽑으려 한다. 국가의 제도에 따르면 산기는 내 문하에 있는 젊은이들 중에 나의 취지를 아는 자를 임용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천하의 선비라면 모두 산기를 먼저 경험한 연후에 나가 주군(州郡)을 지켜야 한다고 보니 이게 나의 본의이다."

역주: 오한은 말로 자기자신을 표현을 다 못해서 등우 등이 추천한 일화를 뜻한 것이 아닌가 하여 이렇게 번역했어요.


나중에 유주자사가 되었다. 아들 왕혼(王渾)은 양주자사(涼州刺史)가 되었고, 그 다음 아들 왕예(王乂)는 평북장군(平北將軍)이 되었고, 사도(司徒) 안풍후(安豐侯) 왕융(王戎)은 왕혼의 아들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 태위(太尉) 무릉후(武陵侯) 왕연(王衍)와 형주자사(荊州刺史) 왕징(王澄)은 모두 왕예(王乂)의 아들이다.


[주2] 위명신주(魏名臣奏)에 실린 시중(侍中) 신비(辛毗)의 상소문: "옛날 환계(桓階)가 상서령(尚書令)으로 있을 때 최림이 상서(尚書)에 걸맞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하간태수(河閒太守)로 옮겨 임용했다."고 하니 본전과는 같지 않다.

대홍려(大鴻臚)로 승진했다. 귀자왕(龜茲王)이 천자를 모실 아들을 조정으로 보내왔다. 조정에서는 그가 먼 곳으로부터 도착했음을 가상히 여기고, 그 왕에게 매우 후한 포상을 했다. 그 나머지 국가들은 각각 아들을 보내 내조(來朝)하게 하였으므로 왕래하는 사절이 끊이지 않았다. 최림은 사자를 파견하는 나라 중에서 진심으로 귀순하지 않고, 잠시 위나라의 비호를 받으려고 사자의 역할을 시켜 위나라 인수(印綬)를 구해 얻어 이익을 구하도록 하기 때문에 도로의 호송을 하며 손실되는 바가 점차 많아질 것임을 걱정했다. 봉양받아야 되는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이익이 없는 일로 낭비하여 오랑캐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 이것은 옛날부터 걱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돈황군(燉煌)에 조서를 내려 취지를 설명하는 동시에 이전 시대에 여러 나라의 사자를 접대할 때의 예의에 관한 일을 참고하여 영원한 법을 제정하도록 했다.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했으며, 광록훈(光祿勳)ㆍ사예교위(司隸校尉)로 전임시켰다. 관하(屬郡)의 군에서는 모두 위법행위를 제거하고, 허물이 있는 관리를 제거하거나 줄였다. 최림은 정무를 주관할 때, 성실함을 추존하고 법령을 간편하게 하여 대강만 있게 했다. 이 때문에 임지에서 떠난 후, 관리와 백성들이 항상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산기상시(散騎常侍) 유소(劉劭)가 고과론(考課論: 관리의 임용이나 승진에 관한 평가제도에 대해 논한 것)을 지었는데, 명제는 관리들에게 이에 관해서 토론하도록 했다. 최림이 논의하여 말했다.

─ 주관(周官: 주례)의 고과(考課)에 의거해 보면, 그 문장은 완비되었지만, 강왕(康王) 이래 점점 쇠미해졌는데, 이것은 즉 관리를 살피는 법령이 엄밀하지 못해서 그렇겠습니까? 현재 군대 안에 있는 법령은 어떤 것은 번잡하고, 어떤 것은 느슨하며, 몇 개의 법령조문을 갖추고 있으며, 안팎(궁중 기관과 정부 기관)을 구별하여 펴고, 늘어남과 줄어듬이 일정하지 않으므로 진실로 통일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어망이 확장되지 않았는데 때 그 어망을 펼치고, 모든 털이 정돈되지 않았을 때 옷을 입습니다. 고요(皋陶)가 우(虞)에서 관직생활을 하고, 이윤(伊尹)이 은(殷)나라의 신하가 된 이후로 어질지 못한 사람은 멀리 갔습니다. 오제 삼왕(五帝三王)의 법령은 반드시 하나 같지는 않았지만, 각기 혼란을 다스렸습니다. 역(易)에서 말하기를, ‘행동을 간편하게 바꾸면 천하는 크게 다스려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태조께서는 그 당시의 상황에 따라 법령을 세워 오늘날까지 전했기 때문에 옛날 제도를 모방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제도가 성글고 소활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직 한 가지 방침만을 견지하여 잃지 않게 할 뿐입니다. 만일 조정의 신하들이 중산보(仲山甫: 주나라 선왕을 보좌했었음)와 같은 무거운 책임을 맡을 수 있다면 설령 백 가지 법령을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누가 감히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

경초(景初) 원년(237), 사도(司徒)와 사공(司空) 모두에 결원이 생겼다. 산기시랑(散騎侍郎) 맹강(孟康)이 최림을 추천하며 말했다.

“무릇 재상이란 자는 천하의 존경을 받고 모범이 되어야 하며, 진실로 응당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덕망과 의리가 있는 선비를 선발하여 기용해야만 천하의 사표(師表)가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사사로이 보건대, 사예교위(司隸校尉) 최림(崔林)은 천성이 자연스럽고 바르며, 고아하고 넓은 도량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뛰어난 바를 고인에게 비교하여 논하면, 충심과 정직함 및 곧은 의지는 사어(史魚 : 춘추시대 위나라 영공이 현명한 신하는 사용하지 않고 아첨하는 자만을 사용하는 것을 죽을 각오로 간언한 인물)의 무리이며, 청렴하고 절약하는 것은 계문(季文: 춘추시대 노나라의 청렴한 사람)과 같습니다. 주나 군(州郡)을 감독하여 지키는 일에 있어서는 각 임지에서 치적을 세웠고, 외무를 담당하는 직책(대홍려)에 있으면서는 만리를 맑게 정돈하였습니다. 최림은 진실로 재상이 될 수 있는 기량이 있고, 삼공의 직책을 담당할 수 있는 재능이 있습니다.”

후년에 사공(司空)으로 임명되었으며 안양정후(安陽亭侯)로 봉해졌고, 식읍이 6백 호 주어졌다. 삼공(三公)의 관직에 있는 자가 열후(列侯)로 봉해진 것은 최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주] 오래지 않아, 또 승진하여 안양향후(安陽鄉侯)로 봉해졌다.


[주] 신송지가 생각해보면 순열(荀悅)은 한나라(漢)가 승상(丞相)을 봉지에 봉한 것을 비웃었습니다. 위나라(魏)가 삼공을 봉하니 그 허물은 마찬가지이옵니다.

노나라 재상(魯相上)이 상소하여 말했다.


- 한(漢)나라는 옛날에 공자(孔子)의 묘를 세었으며, 포성후(褒成侯 : 공자의 자손 공균으로서 원제 시대에 열후가 됨)가 매년 계절마다 제사를 올렸고, 벽옹(辟雍: 태학)에서 예의를 행할 때는 반드시 선사(先師: 공자)를 제사지내고, 왕실이 곡물을 내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 종성후(宗聖侯)가 공자의 후사를 받들고 있지만, 천자가 제사를 명령하는 예는 없습니다. 응당 제사용 가축을 지급하여 현의 관리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어 공자를 고귀한 신(神)으로 삼도록 해야만 합니다. ─

황제는 삼부(三府)에서 이에 관한 논의를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박사(博士) 부지(傅祗)는 춘추전(春秋傳)에 의거하여 공자의 말이 후세에 전해졌고 제사의 법제로 확립된 이상, 그것은 공자가 존재하는 것이며 종성후는 공자의 후사를 계승하여 성대한 덕을 충분히 빛나게 할 수 있고, 공자가 학설을 창립한 공적을 빛나게 하며, 밝은 도덕을 수상하는데 이르러서는 노나라 재상이 올린 건의와 같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최림은 논의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종성후 또한 왕의 명령에 따라 제사지냈으므로 명령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주무왕(周武王)은 황제(黃帝)ㆍ요(堯)ㆍ순(舜)의 후대를 봉하고, 또 세 왕조의 후대를 나누어 봉했는데, 우와 탕(禹湯)의 자손은 그 당시에 열후가 되지 못했으며, 또 특별히 다른 관직에 명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현재 주공 이상 삼황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으며, 예경(禮經)상에서도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 오직 공자만을 제사지내는 것은 시대가 가깝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대부(大夫)의 후대로써 계속 제사를 받고 있고, 그에 대한 예의는 고대와 제왕을 뛰어넘었으며, 그에 대한 존경은 상탕(湯)과 주무왕(武)을 초과하였으므로, 성명을 존중하고 성덕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또 그 후대 사람들에게 다시 그를 제사지내지 못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


[주] 臣松之以為孟軻稱宰我之辭曰:「以予觀夫子,賢於堯舜遠矣。」又曰:「生民以來,未有盛於孔子者也。」斯非通賢之格言,商較之定準乎!雖妙極則同,萬聖猶一,然淳薄異時,質文殊用,或當時則榮,沒則已焉,是以遺風所被,寔有深淺。若乃經緯天人,立言垂制,百王莫之能違,彝倫資之以立,誠一人而已耳。周監二代,斯文為盛。然於六經之道,未能及其精致。加以聖賢不興,曠年五百,道化陵夷,憲章殆滅,若使時無孔門,則周典幾乎息矣。夫能光明先王之道,以成萬世之功,齊天地之無窮,等日月之久照,豈不有踰於群聖哉?林曾無史遷洞想之誠,梅真慷慨之志,而守其蓬心以塞明義,可謂多見其不知量也。

명제(明帝)는 또 최림으로부터 식읍의 한 부분을 나누어 한 아들을 열후(列侯)로 봉했다. 최림은 정시(正始) 5년(244)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를 효후(孝侯)라고 했다. 아들 최술(述)이 후사를 이었다. [주]


[주] 진제공찬(晉諸公贊): 최술의 동생은 최수(崔隨)로 진나라(晉)의 상서복야(尚書僕射)였으며 그 사람됨은 명민하고 통달하였다. 조왕(趙王) 사마륜(倫)이 제위를 찬탈하는 것을 도왔으며 사마륜이 패하자 최수 또한 죽었다.


최림의 손자 최위(崔瑋)는 성격이 소탈하고 트였으며 관직은 태자우위솔(太子右衛率)에 이르었다. 


예전에 최림은 같은 군의 평민 중에서 왕경(王經)을 잘 알아보고 발탁하였는데 후일 명사가 되니 사람들이 이를 칭송했다.

분류 :
위서
조회 수 :
8335
등록일 :
2013.05.04
12:50:16 (*.67.12.154)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2591/4b4/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2591

'10' 댓글

코렐솔라

2013.07.15
11:55:20
(*.0.203.172)
번역추가

코렐솔라

2021.10.18
02:58:30
(*.219.68.249)
「臣聞明君以求賢為業,忠臣以進善為效,故易稱『拔茅連茹』,傳曰『舉爾所知』。臣不自量,竊慕其義。臣昔以人乏,謬充備部職。時涿郡太守王雄為西部從事,與臣同僚。雄天性良固,果而有謀。歷試三縣,政成人和。及在近職,奉宣威恩,懷柔有術,清慎持法。臣往年出使,經過雄郡。自說特受陛下拔擢之恩,常勵節精心,思投命為效。言辭激揚,情趣款惻。臣雖愚闇,不識真偽,以謂雄才兼資文武,忠烈之性,踰越倫輩。今涿郡領戶三千,孤寡之家,參居其半,北有守兵藩衛之固,誠不足舒雄智力,展其勤幹也。臣受恩深厚,無以報國,不勝慺慺淺見之情,謹冒陳聞。」

詔曰:「昔蕭何薦韓信,鄧禹進吳漢,惟賢知賢也。雄有膽智技能文武之姿,吾宿知之。今便以參散騎之選,方使少在吾門下知指歸,便大用之矣。天下之士,欲使皆先歷散騎,然後出據州郡,是吾本意也。」


"신이 듣기로 명군은 대업을 이루기 위해 현명한 이를 구하고 충신은 남을 본받기 위해 선을 추구한다 들었사옵니다. 그렇기에 주역(易)에서는 "띠를 뽑으면 뿌리까지 전부 따라 뽑힌다 하였고(拔茅連茹;발모연어: 훌륭한 한 사람을 등용하면 같은 사람을 서로 이끌어준다는 뜻.)"라 하고 논어의 주석(傳)에서는 "네가 잘 아는 사람부터 등용하라(舉爾所知)"하 한 것이옵니다. 신은 자신을 역량을 헤아릴 수는 없사오나 이 문구에 담긴 뜻만은 남모래 우러러 받들고 있사오니 이는 신이 옛날에 부족한 사람들로 관청의 직책을 채우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옵니다. 당시 탁군태수(涿郡太守) 왕웅(王雄)은 서부종사(西部從事)로 신의 동료였사옵니다. 왕웅은 천성이 어질고 완교하여 실로 꾀가 있는 인물이었으니 3개 현의 임기가 끝날 때마다 인심이 화합하였으며 근직(近職)에 있을 때에는 황제의 은혜와 명택을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을 회유할 줄 아는 재주가 있었고 법을 다룰 때에 있어서는 부패가 없이 신중했습니다. 신이 왕년에 출사를 갔었는데 지가가는 길에 왕웅의 군을 들리게 되었습니다. (왕웅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우리는 폐하로부터 특별히 발탁되는 은혜를 받았기에 항상 심혈을 기울여 절조를 지켜야 하며 이를 위해 목숨을 던질 생각도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 언사는 격양되었고 정취는 진지하고 간절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어두워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일지 모르지만 이 왕웅이라는 자는 문무의 자질을 겸비하였으며 성품이 충성스럽고 절개가 굳세니 그가 속한 무리의 분수에는 맞지 않는 재능이옵니다. 지금 탁군(涿郡)의 인구가 3천호인데 고아와 과부가 있는 집이 그 절반에 해당하고 병사들은 북쪽의 장벽을 굳게 지키고 있는 상황이니 진실로 왕웅이 자신의 지혜와 힘을 펼치기에도, 자신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발전시키기에도 부족한 곳입니다. 신이 받은 은혜는 깊고 두터운데 나라에 보답한 것은 없기에 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정성을 다하여 제 마음의 얕은 생각을 무릅쓰고 아뢰니 들어주시옵소서"

이에 조서를 내리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옛날에 소하(蕭何)는 한신(韓信)을 추천하였고, 등우(鄧禹)는 오한(吳漢)의 말에 더했으니(進) 오직 어진 이만이 (누가 인재인지) 아는 것이다. 나 또한 왕웅은 담력과 지혜가 있고 문무에 자질이 있다는 것을 오랜 기간 동안 알고 있던 터였다. 이제 (왕웅을 기존 제도를 무시하고) 편히 산기상시(散騎)로 뽑으려 한다. 국가의 제도에 따르면 산기상시는 내 문하에 있는 젊은이들 중에 나의 취지를 아는 자를 임용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천하의 선비라면 모두 산기상시를 먼저 경험한 연후에 나가 주군(州郡)을 지켜야 한다고 보니 이게 나의 본의이다."


역주: 오한은 말로 자기자신을 표현을 다 못해서 등우 등이 추천한 일화를 뜻한 것이 아닌가 하여 이렇게 번역했어요.


===================

탁군 3천호! 진서 범양이 1만 1천이니 나름 비교해볼만한 구체적인 수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린 조서는 효렴으로 뽑힌 애들 낭관으로 지내는 거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모르니 이쪽 부분을 전혀 모르니 반영하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드는군여...

코렐솔라

2021.10.21
11:37:26
(*.219.68.249)
번역기로 파악해보니 대충 비슷한 걸로 보아 산기상기만 산기로 바꿔서 반영해요.

https://new.qq.com/omn/20210222/20210222A0AO0Q00.html
http://www.qulishi.com/article/202012/471942.html

구라뱅뱅

2021.10.21
15:24:02
(*.21.49.97)
지가가는 길에 왕웅의 군을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냥 오타있네요. -> 지나가는 길에.

(참고로 산기상시는 산기와 중상시를 일컫는 말이라네요. 원문과 같이 산기 표기는 맞는 듯요.
曹丕并散骑与中常侍为一官,如称散骑常侍,以士人任职。)

코렐솔라

2021.10.21
15:39:32
(*.219.68.249)
넵 오타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코렐솔라

2021.10.18
11:19:02
(*.219.68.249)
魏名臣奏載侍中辛毗奏曰:「昔桓階為尚書令,以崔林非尚書才,遷以為河閒太守。」與此傳不同。

위명신주(魏名臣奏)에 실린 시중(侍中) 신비(辛毗)의 상소문: "옛날 환계(桓階)가 상서령(尚書令)으로 있을 때 최림이 상서(尚書)에 걸맞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하간태수(河閒太守)로 옮겨 임용했다."고 하니 본전과는 같지 않다.

코렐솔라

2021.10.18
11:22:11
(*.219.68.249)
본문 하한태수->하간태수

코렐솔라

2021.10.18
12:16:12
(*.219.68.249)
臣松之以為漢封丞相邑,為荀悅所譏。魏封三公,其失同也。

신송지가 생각하해보면 순열(荀悅)은 한나라(漢)가 승상(丞相)을 봉지에 봉한 것을 비웃었습니다. 위나라(魏)가 삼공을 봉하니 그 허물은 마찬가지이옵니다.
============
순열 상소문에서 어느 부분이 이걸 비웃는지 모르겠어요. 상 관련 기록? 아님 완전 다른 기록인가;;그리고 순열이면 조조 말하는 것 같은데 조조가 무평후 된 것은 196.09고 승상이 된 것은 208.06인데 말이죠.

코렐솔라

2021.10.18
19:41:22
(*.219.68.249)
臣松之以為孟軻稱宰我之辭曰:「以予觀夫子,賢於堯舜遠矣。」又曰:「生民以來,未有盛於孔子者也。」斯非通賢之格言,商較之定準乎!雖妙極則同,萬聖猶一,然淳薄異時,質文殊用,或當時則榮,沒則已焉,是以遺風所被,寔有深淺。若乃經緯天人,立言垂制,百王莫之能違,彝倫資之以立,誠一人而已耳。周監二代,斯文為盛。然於六經之道,未能及其精致。加以聖賢不興,曠年五百,道化陵夷,憲章殆滅,若使時無孔門,則周典幾乎息矣。夫能光明先王之道,以成萬世之功,齊天地之無窮,等日月之久照,豈不有踰於群聖哉?林曾無史遷洞想之誠,梅真慷慨之志,而守其蓬心以塞明義,可謂多見其不知量也。


신송지가 생각해보면 맹가(孟軻;맹자)에 재아(宰我)의 말이 실려있어 "제가 부자(夫子;공자)를 보아하니 요순(堯舜)보다 현명합니다."라 했으며 또 "사람이 태어난 이래로 공자(孔子)만큼 성대한 성대한 자가 없었다."라 하였으니 (최림의 말은) 모두 현자의 격언과는 통하지 않고 어느 것이 표준이냐며 품평이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것들이 모두 같아 만 명의 성인도 한 사람인 것 같았으나 지금에 와선 순박한 도화원과 야박한 세속이 서로 다르니 이는 실질적인 내용과 외형적인 형식이 서로 다른 효과를 냈기 때문이옵니다. 모두 살아있을 때만 영예로웠고 죽으면 끝이었으니(사기 공자세가 찬) 그 유풍이 널리퍼졌음에도 진실로 깊게 퍼진 곳이 있고 얕게 퍼진 곳이 있는 것이옵니다.

만약 윗사람에게 건의해 법을 제정하는 큰 공로를 세워 백세 동안의 왕이 이를 지키도록 했다면 모범이 되어 바탕을 세운 것이니 진실로 이를 이미 이룬 이는 (공자) 한 명뿐이 아니겠사옵니까?

역주: 百王莫之能違: 맹자의 等百世之王, 莫之能違也 만약 백세 이후에 백세 동안의 왕들을 평가해 본다 하더라도, 그 어떤 군주도 공자의 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經緯天人는 經緯天地와 비슷하게 제정한 공로가 아닐까...

주나라(周)는 하나라와 은나라 두 국가를 거울로 삼아서 그 문채가 풍부하고 다채로웠다.(논어)고 하였으나 그 연후에도 육경(六經)의 도가 세세하지는 않았사옵니다. 성현과 같은 이가 오백년 동안 나타나지 않으면 그 도가 오랭캐(夷)와 같이 된다 하였으니 그 헌장은 거진 멸망하게 되고, 만약 공자의 제자(孔門)가 아무도 없다면 주전(周典)은 사라졌을 것이옵니다. 선왕이 세운 광명의 도를 따를 수 있다면 그 성과는 만세를 이롭게 할 것이옵니다.

하늘과 땅은 모두 끝이 없어 해와 달등은 오랜 기간 동안 우리를 비추고 있었는데 어찌 성인과 같은 무리를 넘어서는 자(공자)가 없었겠사옵니까? 최림에게 사천(史遷;사마천)의 진실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생각이 없었다면, 매진(梅真;매복梅福)의 강개하는 뜻이 없었다면 옹졸한 마음으로 아무 것도 듣지 않으며 자신을 지키려고만 했을터이니 이를 헤아려 알지 못한 것이 많이 보이옵니다.

============
대충 공자를 외 가까운 인간이라고만 하냐고 까는 것 같은데 유교 관련 대부분 모르고 인용의 경우 한문 조금만 바꿔도 못 찾기 때문에 뇌피셜이 되어 버렸고 따라서 반영 안 할 꺼에요.

영어 번역이 있다고 생각해서 시작했는데 못 써줄 수준.

코렐솔라

2021.10.19
00:10:59
(*.219.68.249)
[주] 晉諸公贊曰:述弟隨,晉尚書僕射。為人亮濟。趙王倫篡位,隨與其事。倫敗,隨亦廢錮而卒。林孫瑋,性率而疏,至太子右衛率也。初,林識拔同郡王經於民伍之中,卒為名士,世以此稱之。

[주] 진제공찬(晉諸公贊): 최술의 동생은 최수(崔隨)로 진나라(晉)의 상서복야(尚書僕射)였으며 그 사람됨은 명민하고 통달하였다. 조왕(趙王) 사마륜(倫)이 제위를 찬탈하는 것을 도왔으며 사마륜이 패하자 최수 또한 죽었다. 최림의 손자 최위(崔瑋)는 성격이 소탈하고 트였으며 관직은 태자우위솔(太子右衛率)에 이르었다.

예전에 최림은 같은 군의 평민 중에서 왕경(王經)을 잘 알아보고 발탁하였는데 후일 명사가 되니 사람들이 이를 칭송했다.
옵션 :
:
: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수 추천 수 비추천 수 날짜
공지 삼국지 게시판 도움말 [10] 코렐솔라 9062     2021-08-30
공지 촉서 촉서 목차 링크 재원 355230     2013-07-08
공지 위서 위서 목차 링크 [3] 재원 354045     2013-06-29
공지 오서 오서 목차 링크 [3] 재원 253579     2013-06-28
287 위서 <배송지주>신헌영전 [2] 재원 7865     2013-05-04
 
286 위서 신비전 [7] 견초 11674     2013-05-04
 
285 위서 왕관전 [1] 견초 7411     2013-05-04
 
284 위서 손례전 [1] 견초 8796     2013-05-04
 
283 위서 고유전 [8] 견초 11037     2013-05-04
 
» 위서 최림전 [10] 견초 8335     2013-05-04
최림(崔林)은 자가 덕유(德儒)이고, 청하군(清河郡) 동무성(東武城)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더디게 이름을 알렸으며 친족들은 모두 그를 알아주지도 못했다. 오직 그의 사촌 형 최염(崔琰)만이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태조(太祖)는 기주(冀州)를 평정한 후, 불...  
281 위서 한기전 [6] 견초 7541     2013-05-04
 
280 위서 배잠전 [16] 견초 9208     2013-05-04
 
279 위서 조엄전 [4] 견초 10921     2013-05-04
 
278 위서 두습전 [5] 견초 8883     2013-05-04
 
277 위서 양준전 [2] 견초 7770     2013-05-04
 
276 위서 상림전 [3] 견초 8645     2013-05-04
 
275 위서 화흡전 [1] 견초 7921     2013-05-04
 
274 위서 노육전(노식의 아들) [3] 견초 10898     2013-05-04
 
273 위서 위진전 [3] 견초 8519     2013-05-04
 
272 위서 서선전 [2] 견초 8175     2013-05-04
 
271 위서 진교전 [5] 견초 9579     2013-05-04
 
270 위서 진태전 [6] 재원 12258     2013-05-04
 
269 위서 진군전 [9] 견초 12811     2013-05-04
 
268 위서 환계전 [6] 견초 8631     2013-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