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례(孫禮)는 자가 덕달(德達)이고 탁군 용성현(容城縣) 사람이다.

조조가 유주를 평정한 후, 불러서 사공군모연(司空軍謀)으로 임명했다. 전란이 막 발생했을 때, 손례와 어머니는 서로를 잃어버렸는데 같은 군 사람 마이(馬)가 손례의 모친을 찾아 주었다. 손례는 집의 재산을 전부 마이에게 주었다. 마이가 후에 법을 범했는데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손례는 사사로이 감옥을 넘어 달아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자 마이가 말했다. 

"저는 도망칠 뜻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직접 자간주부(刺奸主簿) 온회(溫恢)에게 출두했다. 온회는 그의 행위에 탄복하여 이 일을 조조에게 상세히 알렸는데, 두 사람은 사형보다 한 등급 아래의 형으로 감형되었다. 후에 하간군(河間郡)의 승(丞)으로 임명되었으며, 점점 승진하여 영양도위(榮陽都尉)가 되었다. 

노산(魯山) 속의 도적 수백 명이 험난한 곳을 고수하며 백성들을 해롭게 했다. 그래서 손례를 노상(魯相)으로 임명했다. 손례는 임지에 이르러 자신에게 지급되는 봉록인 곡식을 내어 관리와 백성들을 동원하고, 적의 우두머리에게 현상금을 걸고, 투항하거나 귀순하는 자들을 받아들여 돌아가게 하여 약속한 시간에 평정시켰다. 산양(山陽)·평원(平原)·평창(平昌)·낭야태수(琅邪太守)를 역임했다. 

대사마 조휴를 따라 협석(夾石)에서 오나라를 정벌하러 갔을 때, 손례는 깊숙이 들어가지 않을 것을 간청했지만, 따르지 않아 패배했다. 승진하여 양평태수가 되었고, 중앙으로 들어가 상서가 되었다. 

명제는 마침 궁전을 지었는데, 기후가 좋지 않아서 천하에는 곡물이 적었다. 손례가 완강하게 노역을 중지할 것을 간언하자, 명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ㅡ 나는 그대의 정직한 간언을 공손히 받아들이겠다. 빨리 노역하는 백성들을 돌려보내라. ─

당시 이혜(李惠)가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또 상주하여 한 달만 머물게 하면 궁전을 완공할 수 있다고 했다. 손례는 직접 작업 현장으로 가본 후에 다시 상주하지 않고, 명제의 조서를 알려 백성들의 노역을 중지시켰다. 명제는 그의 거동에 감복하여 꾸짖지 않았다. 

명제가 대석산(大石山)에서 사냥을 할 때, 명제가 타고 있는 수레로 호랑이가 달려들었다. 손례는 즉시 말고삐를 놓고 말에서 내려 칼을 휘둘러 호랑이를 죽이려고 했지만, 명제가 손례에게 말에 타라고 칙명을 내렸다. 

명제는 임종에 임하여 조상을 대장군으로 삼았지만, 훌륭하게 보좌할 사람이 있어야 했으므로 침대 옆에서 조서를 받게 하여 손례를 대장군장사(大將軍長史)로 임명하고, 산기상시의 관직을 더하도록 했다. 

손례는 청렴하고 정직하며 타협을 하지 않았으므로, 조상은 그를 싫어했다. 그러나 양주자사로 임명하고, 복파(伏波)장군의 관직을 더하고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다. 

오나라 대장 전종(全琮)이 수만 병사를 이끌고 침략하였다. 당시 양주의 병사들은 대부분 휴가 중이었고, 남아서 지키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손례는 직접 자신의 위병(衛兵)을 인솔하여 적에 대항하여 작피(芍陂)에서 교전했다. 싸움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졌고, 장수와 병사의 과반수가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손례가 탄 말은 여러 군데 상처를 입었지만, 손에 북을 쥐고 한 몸을 돌보지 않고, 날카로운 칼을 휘둘러 분투하였으므로 적은 퇴각했다.

명제가 조서를 내려 그들을 위로하고 비단 7백 필을 하사했다. 손례는 전사한 병사를 위해 제사지낼 곳을 설치하고 참석하여 곡을 하였는데, 곡하는 소리가 가슴속까지 메어지게 했다. 하사받은 비단은 전사한 병사의 집으로 모두 보내도 자신은 한 필도 갖지 않았다. 

초빙되어 소부(少府)로 임명되었고, 지방으로 나가 형주자사가 되었으며, 기주목으로 승진하였다. 태부 사마선왕이 손례에게 말했다. 

"지금 청하(淸河)와 평원(平原)이 변방지역을 다툰 지 8년이나 되었고, 두 번이나 자사를 바꾸었는데 해결할 수 없었소. 우(虞)와 예(芮)는 전지(田地)의 경계를 다투었는데 주문왕을 기다렸다가 해결되었소. 당신은 응당 그들을 위해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하오." 

손례가 말했다. 

"소송한 자는 옛날 묘에 근거하여 징험한 것이고, 피고인은 선대 노인들의 말로써 정설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곤장을 때릴 수 없고, 어떤 황폐한 묘는 지세가 높은 곳으로 옮겼고, 어떤 것은 원수를 피해 옮긴 것입니다. 지금 들은 것은 비록 고요일지라도 해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 그들로 하여금 분쟁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명제가 당초에 평원(平原)을 나누어 봉했을 때의 지도에 근거하여 판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찌 옛일을 좇아 원인을 찾아 쟁론을 더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옛날에 성왕은 오동나무 잎을 사용하여 숙우(叔虞)에게 농담을 하였지만, 주공은 그를 열후로 봉했습니다. 지금 지도는 천부 안에 수장되어 있으므로 앉아서 판결할 수 있는데, 어찌 제가 주에 취임하기를 기다리십니까?" 

사마선왕이 말했다. 

"그렇소. 지도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 마땅하오." 

손례는 임지에 도착한 후, 지도에 근거하여 평원에 소속시키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상은 청하군의 말을 믿고 문서를 내려 말했다. 

"지도를 사용하여 판단할 수 없소. 응당 말의 참과 거짓을 조사해야만 하오." 

손례는 상소를 올려 말했다. 

ㅡ 관중은 패자(覇者)의 보좌이고 기량 또한 적었지만, 백씨(伯氏 ; 제나라 대부의 집)가 소유하고 있는 병읍(騈邑)을 빼앗고, 그로 하여금 죽음에 이를 때까지 원한의 말이 없게 할 수 있었습니다. 신은 명을 받들어 주의 목으로 부임했으며, 성조(聖朝)의 지도를 받들어 두군의 경계를 조사했습니다. 경계는 실제로 왕옹하(王翁河)를 한계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유현(유縣)에서는 마단후(馬丹候)를 증거로 삼고 헛되게 명독하(鳴犢河)를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거짓 송사에 의지해 조정을 기만한 것입니다. 

신이 사사로이 듣건대, 사람들의 입은 금을 쪼갤 수 있고, 물속의 돌은 나무를 가라앉게 할 수 있으며, 세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있다고 하면 자애로운 어머니는 북을 던진다고 합니다. 지금 두 군이 변방의 경계로 인해 8년간 다투었는데 하루아침에 해결하려면 지도와 설명한 문서에 근거해 조사여 사실을 명백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원군은 두 냇물 사이에 있으며, 동쪽을 향해 올라가면 중간에 작제(爵제)가 있는데, 작제는 고당(高唐) 서남쪽에 있고, 다툰 곳은 고당 서북쪽이니, 서로의 거르는 20여리 쯤 됩니다. 오랫동안 탄식하고 눈물을 흘릴만합니다. 설명과 지도를 조사하여 상주했지만, 유현에서는 조서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신이 연약하여 그 책임을 다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이 또 무슨 면목으로 나라의 봉록을 받겠습니까? ─

그리고 정장을 하고 신발을 신고, 수레를 타는 등 방축 처분을 기다렸다. 조상은 손례의 상주문을 보고 대단히 노했다. 손례가 조정에 원환을 품고 있다고 탄핵하고, 5년간의 금고(禁錮)에 처했다. 집으로 돌아온 지 1년 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말을 하였으므로, 다시 성문교위(城門校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흉노왕 유정(劉靖)의 병력은 강성하였고, 선비족이 자주 변방을 침략하였으므로 곧 손례를 병주자사로 임명하고 진무장군·사지절(使持節)호흉노중랑장(護匈奴中郎將)의 관직을 더하였다. 그는 가서 태부 사마선왕을 만났는데 분노하는 안색이 있었으므로 말을 하지 않았다. 사마선왕이 말했다. 

"그대는 병주를 얻고도 부족한가? 군의 경계를 나눈 것으로 불공정한 처리를 받아 분한가? 지금 고별하고 원정을 가려고 하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는가!" 

손례가 말했다. 

"어찌하여 명공께서는 이처럼 황당한 말씀을 하십니까? 저 손례는 비록 부덕하지만, 어찌 관직에서 있었던 일을 마음에 둘 수 있겠습니까? 본래 명공(明公)은 이윤과 여상을 좇아 따르면서 위나라 왕실을 보좌하고, 위로는 명제의 위탁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만세에 전해지는 공훈을 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현재 사직이 위급하고 천하가 어수선한 것이 저 손례가 즐겁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얼굴 가득 눈물을 흘리자, 사마선왕이 말했다. 

"그치시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으시오." 

조상이 피살된 후, 손례는 중앙으로 들어가 사예교위가 되었으며, 그가 다스린 7군 5주에서는 모두 위엄과 신의가 있었다. 사공으로 승진하였고, 대리정후(大利亭侯)로 봉해졌으며, 식읍 1백호를 받았다. 손례와 노육(盧毓)은 같은 군사람으로 나이도 서로 비슷했지만, 감정은 좋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비록 장점과 단점이 있지만, 명성과 관직은 대체로 비슷하였다. 

가평 2년(250)에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경후(景侯)라고 했다. 손자 손원(孫元)이 뒤를 이었다.

진수의 평: 손례(孫禮)는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성격이 과격했다.
분류 :
위서
조회 수 :
9052
등록일 :
2013.05.04
12:51:22 (*.67.12.154)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2595/090/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2595

'1' 댓글

코렐솔라

2013.07.15
12:01:19
(*.0.203.172)
으익, 이 네임드가 배주하나 없네요,
옵션 :
:
: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수 추천 수 비추천 수 날짜
공지 삼국지 게시판 도움말 [10] 코렐솔라 16935     2021-08-30
공지 촉서 촉서 목차 링크 재원 368404     2013-07-08
공지 위서 위서 목차 링크 [3] 재원 381070     2013-06-29
공지 오서 오서 목차 링크 [3] 재원 263975     2013-06-28
287 위서 <배송지주>신헌영전 [2] 재원 8080     2013-05-04
 
286 위서 신비전 [7] 견초 11965     2013-05-04
 
285 위서 왕관전 [1] 견초 7638     2013-05-04
 
» 위서 손례전 [1] 견초 9052     2013-05-04
손례(孫禮)는 자가 덕달(德達)이고 탁군 용성현(容城縣) 사람이다. 조조가 유주를 평정한 후, 불러서 사공군모연(司空軍謀掾)으로 임명했다. 전란이 막 발생했을 때, 손례와 어머니는 서로를 잃어버렸는데 같은 군 사람 마이(馬台)가 손례의 모친을 찾아 주었...  
283 위서 고유전 [8] 견초 11311     2013-05-04
 
282 위서 최림전 [10] 견초 8620     2013-05-04
 
281 위서 한기전 [6] 견초 7754     2013-05-04
 
280 위서 배잠전 [16] 견초 9431     2013-05-04
 
279 위서 조엄전 [4] 견초 11217     2013-05-04
 
278 위서 두습전 [5] 견초 9145     2013-05-04
 
277 위서 양준전 [2] 견초 7981     2013-05-04
 
276 위서 상림전 [3] 견초 8920     2013-05-04
 
275 위서 화흡전 [1] 견초 8141     2013-05-04
 
274 위서 노육전(노식의 아들) [3] 견초 11178     2013-05-04
 
273 위서 위진전 [3] 견초 8772     2013-05-04
 
272 위서 서선전 [2] 견초 8429     2013-05-04
 
271 위서 진교전 [5] 견초 9878     2013-05-04
 
270 위서 진태전 [6] 재원 12577     2013-05-04
 
269 위서 진군전 [9] 견초 13209     2013-05-04
 
268 위서 환계전 [6] 견초 8885     2013-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