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흠전(華歆) 
 
화흠의 자는 자어(子魚)로 평원(平原)군 고당(高唐)현 사람이다. 고당은 제(齊) 지역의 이름난 도시로, 무릇 의관쓴 자라면 그곳의 저자나 마을에 놀러 다니지 않음이 없었다. 화흠이 관리가 되어선 쉬려고 관부를 나오면 집에 돌아가 문을 닫았다. 의론(議論)함에 공평함을 지녀 끝내 남을 훼손하여 상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위략(魏略)』에 이르길 화흠은 북해(北海)군 출신의 병원(原)•관녕(管寧)과 같이 유학했는데, 세 사람이 서로 친하여, 당시 사람들이 세 사람을 '일룡(一龍)'이라 불렀으니, 화흠이 용의 머리, 원은 용의 배, 관녕은 용의 꼬리로 여겼다]

같은 군 사람인 도구홍(陶丘洪) 또한 이름이 알려졌는데, 스스로 명철한 식견이 화흠보다 뛰어나다고 여겼다. 이 때 왕분(王芬)이 호걸들과 영제(靈帝)를 폐위할 것을 모의했다. 이에 관한 말이 『무제기(武帝紀)』에 있다.


魏書稱芬有大名於天下。


왕분이 몰래 화흠과 도구홍을 불러 같이 계책을 정하니, 도구홍은 이를 행하고자 했으나 화흠은 그만두며 무릇 (황제를) 폐하고 세우는 것은 큰 일로써 이윤(伊尹)이나 곽광(霍光)도 어려워했소. 왕분은 성품이 조악한데다 무력도 없으니, 이것은 반드시 성공할 수 없으며, 그 화가 장차 일족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그대는 가지 마시오!라 했다. 도구홍이 화흠의 말을 따라 그만두었다. 후에 왕분이 과연 패망하니, 도구홍이 이에 복종하였다.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중(郎中)에 제수되었으나, 병이 있어 관직을 버렸다.

영제가 붕어하자 하진(何進)이 정사를 보필했는데 하남(河南)의 정태(鄭泰)•영천(潁川)의 순유(荀攸) 및 화흠 등을 불렀다. 화흠이 도착하자 상서랑(尙書郞)으로 삼았다. 동탁(董卓)이 천자를 장안으로 옮기자, 화흠은 외직으로 나가 하규(下 ) 현령이 되길 원했지만, 병으로 가지 못하다가, 마침내 남전(藍田)에서 남양(南陽)에 이르렀다.


화교보서(華嶠譜敘)에 이르길: 화흠은 어려서부터 품행이 높아 유명했다. 장안의 동란을 피하여 뜻을 같이하는 정태(鄭泰) 등 6,7명과 무관(武關)을 나왔다. 도중에 혼자 가고 있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함께 가기를 원하였다. 모두 그를 불쌍하게 여겨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화흠이 말했다.


“안되오. 지금은 위험에 처해 있소. 화복 재난을 만날 경우 마음을 하나로 하는 우정이 필요하오.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받으면 우정은 모르오. 그를 받아들여도 화급할 경우에 중도에 버릴 수 있소!”


사람들은 남자를 받아들여 함께 갔다. 이 남자가 중도에 우물에 빠지게 되었는데 모두 그를 버리려고 하자 화흠이 말했다.


“이미 함께 했는데, 그를 버리는 것은 의리가 없는 행위요.”


그래서 그를 구출한 후에 헤어졌다. 사람들은 그의 도의에 감탄했다.
 
이때 원술(袁術)이 양(穰)에 있었는데, 화흠을 머물게 했다. 화흠이 원술에게 진군하여 동탁을 토벌하도록 설득하였으나 원술은 그 계획을 쓸 수 없다. 화흠이 (원술을) 버리고 가려했는데, 마침 천자가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를 시켜 관동지역을 안집(安集)시키게 하자, 마일제는 화흠을 연[; 속관, 보좌관]으로 삼았다. 동쪽으로 서주(徐州)에 이르자 조칙으로 곧장 화흠을 예장(豫章)태수로 배수하니, 그의 정사는 청정하고 번잡하지 않아서 관리와 백성들이 감격하여 그를 사랑하였다.


위략에서 이르길: 양주자사(揚州刺史) 유요(劉繇)가 죽자 그 부하로 있던 백성들은 화흠을 주인으로 모시기를 간청했으나, 화흠은 시세를 이용하여 임명되는 것은 신하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백성들이 그를 몇 달 동안 설득했으나, 화흠은 결국 그들을 돌려보내고는 따르지 않았다.

손책(孫策)이 강동을 공략하였는데, 화흠은 손책이 용병(用兵)을 잘한다는 것을 알고, 이에 두건을 쓰고 그를 영접했다. 손책이 장자(長者)라 여겨 상빈(上賓)의 예로써 대우했다.


호충(胡冲)의 오력(吳歷)에서 이르길: 손책은 예장(豫章)을 공격할 때, 우선 우번(虞翻)을 파견하여 화흠을 설득하게 했다. 화흠은


“나는 오랫동안 양자강 이남 땅에 있으면서 항상 북쪽으로 돌아가려고 했소. 손회계(孫會)가 오면 나는 곧 떠날 것이오.”


라고 대답했다. 우번은 돌아와 손책에게 보고했다. 손책은 그래서 군사를 나아가게 하였다. 화흠은 갈포(葛布)로 된 두건을 쓰고 손책을 맞이하였고, 손책은 화흠에게 말했다.


“태수의 나이와 덕망․명성․인망에는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간에 마음을 의탁할 것입니다. 나 손책은 나이가 어리므로 자제의 예로써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화흠에게 절을 했다. 그 당시 사방의 현명한 선비들 중에 강남으로 피난 오는 자가 많았는데, 모두들 화흠의 풍모에 무릎을 꿇고 앙모했다. 손책이 커다란 회합을 개최하였을 때, 좌중에는 감히 화흠보다 먼저 말하는 이가 없었다. 화흠이 때가 되어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면, 의론의 꽃이 피었다. 화흠은 과음을 잘 했는데, 한 석쯤 마셔도 바른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 강남에서는 그를 ‘화독좌(華獨坐)’라고 불렀다. 


虞溥江表傳曰:孫策在椒丘,遣虞翻說歆。翻既去,歆請功曹劉壹入議。壹勸歆住城,遣檄迎軍。歆曰:「吾雖劉刺史所置,上用,猶是剖符吏也。今從卿計,恐死有 餘責矣。」壹曰:「王景興既漢朝所用,且爾時會稽人眾盛彊,猶見原恕,明府何慮?」於是夜逆作檄,明旦出城,遣吏齎迎。策便進軍,與歆相見,待以上賓,接 以朋友之禮。孫盛曰:夫大雅之處世也,必先審隱顯之期,以定出處之分,否則括囊以保其身,泰則行義以達其道。歆既無夷、皓韜邈之風,又失王臣匪躬之操,故 撓心於邪儒之說,交臂於陵肆之徒,位奪於一豎,節墮於當時。昔許、蔡失位,不得列於諸侯;州公實來,魯人以為賤恥。方之於歆,咎孰大焉!


후에 손책이 죽었다.

태조(조조)가 관도(官渡)에 있었는데, 천자에게 표를 올려 화흠을 불러들였다. 손권이 보내지 않으려 하자, 화흠이 손권에게


"장군이 왕명을 받들어 비로써 조공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지만 의리는 굳건하지 않은데, 제가 장군을 위해 마음을 다하게 하면, 어찌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지금 공허하게 저는 남겨두시는 것은 무용지물을 기르는 것이니, 장군에게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라 했다. 손권이 기뻐하며 이에 화흠을 보냈다.

빈객과 옛 지인들로 전송하는 자가 천여명이나 되고, 선물로 수백금이나 주었다. 화흠은 거부하는 바가 없었지만, 몰래 모든 것(선물)에 표식을 해놓고 떠날 때가 되자, 여러 물건들을 모두 모은 뒤 여러 빈객들에게 말하길


"본래 여러분들의 마음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받은 게 너무 많게 되었습니다. 단촐히 수레타고 멀리 갈 생각인데 장차 보화를 가지고 가는 것은 죄가 될 것이니, 원컨대 빈객들께서는 저를 위해 헤아려 주십시오"


라 하며 받은 것은 모두 남겨두니, (사람들이) 그 덕에 감복했다.

화흠이 이르자 (조조는 화흠을) 의랑(議郞)에 배수하여 사공(司空)의 군사일에 참여케 하고, (조정에) 들어와 상서가 되고 시중(侍中)으로 자리로 옮겼다가 순욱(荀彧)을 대신해 상서령으로 삼았다. 태조가 손권을 정벌할 때, 표문을 올려 군사(軍師)로 삼았다. 위(魏)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문제(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상국(相國)으로 배수하고 안락향후(安樂鄕侯)로 봉하였다. (조비가) 제위에 오르게 되자, 고쳐 사도(司徒)로 삼았다.


위서에서 이르길: 문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조정 신하들은 삼공 이하 나란히 직위를 받았다. 화흠의 태도와 표정이 그때 상황과 반대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사도로 좌천시키고, 작위도 승진시키지 않았다. 위 문제는 오랫동안 기뻐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상서랑 진군(陳群)에게 의견을 구하며 말했다.


“나는 천명에 응하여 선양을 받았소. 제후들 중에 기뻐하지 않는 자가 있어 소리와 표정에 나타나는데, 상국(相國:화흠)과 공만은 기뻐하지 않고 있으니 무슨 이유요?”


진군은 좌석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말했다.


“신과 상국은 이전 한조의 신하입니다. 마음속으로는 비록 기쁘고, 도의감이 그 표정에 나타나고 있을지라도, 또 한편으로는 폐하가 실제로 증오할까 두렵습니다.”


황제는 매우 기뻐하며 그를 중히 여겼다.

화흠은 본래 청빈하여, 녹봉으로 하사받은 것은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집에는 조금도 저장해 놓은 바가 없었다. 공경(公卿)의 관리들이 일찍이 모두 관청에 몰수된 노비(生口)를 하사받았는데, 오직 화흠만이 이들을 내보내 결혼시켰다. 황제가 탄식하며 조서를 내려 이르길


- 사도는 나라의 … 원로이며, 음양을 조화시키고 뭇 일을 처리하는데 참여하는 것이오. 지금 대관들이 먹는 것을 중히 여기는데, 사도는 푸성귀만 먹은니, 뭐라 할 말이 없소


라 하며, 특별히 의복을 하사하고, 그의 처자와 (그 집안의) 남녀들을 위해 의복을 지어주게 했다.


위서에서 이르길: 여기에 더하여 노비 50명을 하사했다.


삼부[三府; 당시 최고위 직책을 삼공(三公)이라 부르는데 삼공은 시대마다 약간씩 지칭하는 관직이 다르지만, 후한 대에는 태위(太尉)•사도(司徒)•사공(司空)을 일컬었습니다. 이 삼공은 각자 자기의 관부(官府)를 가질 수 있었기에, 이 세 관부를 삼부라 부릅니다]에서 의론하길


-- 효렴[孝廉 ; 관직 천거의 한 요건]으로 천거하는 것은 본래 덕행(德行)을 따져서 하는 것이지, 경전을 시험해서 다시 제한하는 것은 아닙니다라 하니, 화흠이 상란[喪亂 ; 여기서는 후한 말의 혼란]을 겪은 이래 육적[六籍=육경(六經), 즉 『시(詩)』•『서(書)』••『예(禮)』•『악(樂)』•『역(易)』•『춘추(春秋)』]이 무너져 폐하여 졌으니, 마땅히 이를 보전하여 세워 왕도를 존숭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무릇 법을 제정하는 것은 성할 때와 쇠할 때를 겪어온 것입니다[뭔 말인지.. 원문은 夫制法者,所以經盛衰]. 지금 효렴만 들어주고 경전을 시험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학업도 이를 따라서 폐하여질까 두렵습니다. 만약 빼어난 재능을 가진 자가 있으면 따로 불러 등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가 없을지 걱정하지, 어찌 그런 자를 얻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라 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황초(黃初 ; 220~226) 년간에 공경에게 조칙을 내려 고상한 지조를 가진(獨行) 군자는 천거하라고 하자, 화흠이 관녕(管寧)을 천거하니, 황제가 편안한 수레를 보내 그를 불러들였다.

명제[明帝; 조예(曹叡), 문제 조비의 태자]가 즉위하자 작위를 올려 박평후(博平侯)로 봉하고, 식읍 5백호를 늘려서 이전 것과 합쳐 1,300호가 되게 하고, 직위를 옮겨 태위(太尉)로 배수했다.



열이전(列異傳)에서 이르길: 화흠이 서생(書生)으로 있었을 때, 하루는 문 밖에서 자게 되었는데, 집주인의 아내가 밤에 출산을 했다. 오래지 않아 두 명의 관리가 문에 이르러서는 서로


"공이 여기 있다"


고 하고, 오랫동안 머뭇거리더니 한 관리가


"호적이 정해졌군, 얼마나 살까?"


라고 했다. 그리고 나가 화흠에게 절하고 들어갔다. 나가는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함께


“몇 살이나 살게 할까?”


라고 하더니, 한 사람이


“세 살”


이라고 했다. 날이 밝자 화흠은 떠났다. 후에 화흠은 그 일을 살펴보려고 3년이 지나서 그 아이의 소식을 물었더니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었다. 화흠은 그래서 자신이 공(公)이 될 운명임을 알게 되었다.


臣松之按晉陽秋說魏舒少時寄宿事,亦如之。以為理無二人俱有此事,將由傳者不同。今寧信列異。



화흠이 병을 칭탁해 물러나길 원하며 자기의 지위를 관녕에게 넘겨주려 했다. 황제가 허락치 않았다. 큰 조회를 임하게 되어서 이에 산기상시(散騎常侍) 무습(繆襲)에게 조서를 받들고 뜻을 전하길


-- 짐이 여러 일을 새롭게 하여, 하루에 큰 정사를 다루는데 이를 들어서 결단함이 명확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덕이 있는 신하들이 좌우에서 짐을 몸소 도우는 것에 힘입어야 하는데, 그대는 자주 병으로 직위를 사임한다. 무릇 주군을 헤아리고 가리며, 그의 조정에 있지 않고, 영화와 봉록을 내버리며 그 지위를 궁구하지 않는 것은 옛 사람들에게도 진실로 있었으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주공(周公)과 이윤(伊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절개를 드러내는 것은 일반 사람(常人)들도 하는 것이나, 그대에게서 이런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대가 병을 힘써 이기고 조회에 나오는 것은 나 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는 것이다. 장차 자리에서 일어나 백관들에게 스스로를 단속하라고 명하여 그대가 오기를 기다릴 것이니, 짐은 그런 후에 앉을 것이다.


라 하였다. 또한 무습에게 조칙을 내려 이르길 화흠이 반드시 일어나길 기다려서 돌아오라고 했다. 화흠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태화(太和 ; 227~232) 연간에 조진(曹眞)을 보내 자오도(子午道)를 통해 촉을 토벌토록 하고, 어가는 동쪽 허창으로 갔다. 화흠이 상소를 올려 말하길


--병란(兵亂)이 일어난 이래로, 20년이 지났습니다. 대위(大魏)가 천하를 잇고 천명을 받았고, 폐하의 성덕은 (주나라의) 성왕(成王)•강왕(康王)의 융성함에 해당되니, 마땅히 일대(一代)의 정치를 크게 하여 삼왕[三王 ; 하•은•주]을 이어야 합니다.


비록 두 적(賊 ; 초와 오) 위험을 지고서 수명을 연장시키고 있지만, 진실로 성스런 교화는 날로 올라가 멀리 있는 자들도 그 덕을 생각해 장차 강보를 이고서 올 것입니다. 무릇 병기란 어쩔 수 없을 때 쓰는 것이요, 그래서 거둬 들였다가 때에 맞게 움직여야 합니다. 신은 진실로 폐하께서 먼저 치도(治道)에 마음을 두시고, 정벌을 뒷날의 일로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천리까지 군량을 운반하는 것은 용병(用兵)의 이로움이 아닙니다. 험준함을 넘어 깊이 들어가면, 홀로 이기는 공적이 없을 것입니다.


듣자하니 금년에 징병의 군역이 있어 자못 농상(農桑)의 생업을 잃었다고 합니다. 나라를 위하는 자는 백성을 기반으로 삼고, 백성은 의식을 기반으로 여깁니다. 중국[中國 ; 중원, 여기서는 오•촉이 변방이고 정통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위나라 자신들을 가리킵니다]에 춥고 배고픔의 걱정이 없게 하여 백성들이 땅을 떠날 마음이 없게 하는 것은, 천하에 큰 다행이고 두 적(賊)들에게는 틈이 벌이지게 되는 것이니, 가히 앉아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신이 재상의 직위를 갖추고 있으나, 늙음과 병이 날로 심해져 견마(犬馬)의 수고로움을 장차 다하려 하지만, 다시는 천자의 수레덮개( 蓋)를 받들어 바라보지 못할까 두려워 감히 신하의 생각을 다하여 않지는 않고 있으니, 오직 폐하께서 재량하여 살피십시오.


라 했다.

황제가 답하길


--그대의 나라를 위한 계책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짐이 심히 아름답게 여기는 바이다. 적(賊)들이 산천에 기대어 믿고 있어, 선대의 두 황제(二朝)께서 전세에 수고를 했지만 오히려 끝내 평정치 못했는데, 짐이 어찌 감히 스스로 많다고 여겨 저들을 반드시 멸할 것이라 생각하겠는가! 여러 장수들이 한번 깊이 취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절로 쇠폐해 지게 될 것이라 여기기 때문인데, 이로써 군대를 열병하여 시위하여 그 틈을 엿보는 것이다. 만약 천시(天時)가 오지 않는다면 주 무왕이 그랬던 것처럼 군대를 되돌릴 것이다. 이전의 일을 거울삼아 짐이 공경히 그 경계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 했다.


이 때 가을인데 큰 비가 내리니, 조진에게 조칙을 내려 군사를 이끌고 귀환하게 했다.
 
태화(太和) 5년(231) 화흠이 죽으니, 시호를 경후(敬侯)라 했다.


위서(魏書)云:이때 화흠의 나이 75세였다.


아들 화표(華表)가 뒤을 이었다. 처음에 문제가 화흠이 받은 봉읍의 호(戶)를 나눠, 화흠의 동생 화집(華緝)에게 봉해주고 열후로 삼았다. 화표는 함희(咸熙; 264~265) 연간에 상서가 되었다.


華嶠譜叙: 화흠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화표의 자는 위용(偉容)이고, 20여 세에 산기시랑이 되었다. 당시 동료 의랑과 상서의 사무를 담당했다. 동료들은 나이가 어렸는데 다투어가며 명성과 영예를 추구했다. 상서의 일이 끝나 적합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경우에는 즉시 상서와 논의하여 충분히 고찰했다. 담당자가 고집쟁이인 경우에는 함께 상주했다. 惟表不然,事來有不便,輒與尚書共論盡其意,主者固執,不得已,然後共奏議。司空(陳泰)〔陳群〕等以此稱之。仕晉,歷太子少 傅、太常。稱疾致仕,拜光祿大夫。性清淡,常慮天下退理。司徒李胤、司隸(王密)〔王弘〕等常稱曰:「若此人者,不可得而貴,不可得而賤,〔不可得而 親〕,不可得而疏。」中子博,歷三縣內史,治有名跡。少子周,黃門侍郎、常山太守,博學有文思。中年遇疾,終于家。表有三子。長子廙,字長駿。晉諸公贊 曰:廙有文翰,歷位尚書令、太子少傅,追贈光祿大夫開府。嶠字叔駿,有才學,撰後漢書,世稱為良史。為祕書監、尚書。澹字玄駿,最知名,為河南尹。廙三 子。昆字敬倫,清粹有檢,為尚書。薈字敬叔。世語稱薈貴正。恆字敬則,以通理稱。昆,尚書;薈,河南尹;恆,左光祿大夫開府。澹子軼,字彥夏。有當世才 志,為江州刺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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